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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준비와 이 운동이 미친 영향
- 하디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
김인수 교수(장신대 역사신학)
내년이면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된다.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구형(構形)되는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선교는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데서 맺어진 결실이다. 성령의 역사는 주로 부흥운동에서 비롯된다. 예수 승천 후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무리들이 불같은 성령을 받고 전도하면서 예루살렘에 첫 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로부터 온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면 불같은 성령은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 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면 부흥운동에서 성령이 역사 하셨고, 그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이 운동을 되짚어 봄으로써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되살려야겠다.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이다. 수 천 년 내려오던 이교 문화의 배경에 기독교 신앙이 소개 되었고, 재래 종교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교회 문화가 형성되어갔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그 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고, 조직이 확대되었다.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때 장로교회 노회가 조직되었고, 1912년에는 총회가 창립 되었으며, 감리교회도 연회를 조직하여 선교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교회 확장에 매진한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과 정착은 일제의 폭압 속에서 도 고난을 감내하고 극복할 힘을 비축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사역하던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하디(R. A. Hardie)로부터 발단되었다. 그의 통절한 참회의 사건이 차차 번지면서 급기야 4년 후인 1907년 평양에서 모인 남자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져 한국 교회사에 빼어 놓은 수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이 불을 붙였고,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특히 길선주 목사에 의해 승계,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다양한 결과를 교회와 사회에 가져왔는데, 이 운동으로 해서 교회도, 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으므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 짧은 글에서는 하디와 길선주에 의한 부흥운동의 준비 과정과 이 운동이 미친 영향에 대해 간단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 대부흥운동 발단과 준비과정
1. 정치, 사회적 배경
평양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즈음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은 순탄치 않았다. 약소국 조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힘이 다스리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서 비극적 역사를 맞게 된다. 1905년 7월 27일 미육군성 장관 태프트(W. H. Taft)는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밀지를 받고 일본수상 카츠라 다로(桂太郞)와 소위 “카츠라-태프트 메모”라는 비밀협정을 맺었다.1) 이 협정에 따라 그 해 11월, 일제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치욕적인 늑약(勒約)을 강압적으로 체결시켰다. 조약에 따라 서울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1906년 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화를 구체화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군사 기지화 하여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러?일전쟁 직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자들을 강제 징발하여 군용철도를 건설하였다. 또한 그들은 군사적 필요라는 명분으로 민간인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군법회의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대행하였다.2) 원한경(H. H. Underwood)은 그래서 “일제의 한국 통치는 사실상 러?일 전쟁을 위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1905년부터 시작되었다.”3)고 술회한 바 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 정미년(丁未年)에 일제는 ‘정미7조약’을 역시 강압적으로 체결시켜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하면서 사실상 국권을 장악하였다. 그 해 네덜란드 헤이그(Hague)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가 밀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아 일제는 같은 해 7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키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등극함으로써 조선왕조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급기야 1910년 한일병탄이 되고 말아, 500년을 이어 오던 조선왕조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군대의 해산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동학농민혁명, 계속되는 흉년과 기근, 역병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황폐해 갔다. 이런 육체적 탈진은 영적 고갈을 심화시켰고, 종교적 본능은 새로운 종교 운동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남감리교회의 무즈(J. R. Moose)선교사는 “일반적인 불안 의식과 정신적 지주(支柱)의 결여는 백성들로 하여금 선교사와 그가 전하는 복음으로 지향하게 하였고, 그들이 의지할만한 무엇인가를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지 찾으려고 애썼다.”4)고 말했다. 1907년 부흥운동은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 사상적 혼란과 난경(難境)에서 비롯되었다.
2. 하디 선교사에 의한 준비
1907년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성경공부와 기도운동에 기인한다. 여기에는 두 줄기의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다. 원인은 1903년 함경남도 원산 지방에 남감리회 중국 선교회 소속 화이트(Mary C. White)와 캐나다 장로회 소속 다른 여선교사 둘이 한국을 방문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선교하고 있던 캐나다 선교회 소속 선교사인 매컬리(Louise H. McCully)와 더불어 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영성을 강화 시켜달라며 간절한 합심 기도를 드렸다. 이 소식에 접한 이 지역의 선교사들은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을 특별기도 주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집중적인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갖기로 결의 하였다.5)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남감리회의 소속으로 1898년부터 선교하고 있던 하디(R. A. Hardie)는 이 기간 동안 3편의 글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준비하였다.6)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불길에 점화 한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는 본래 캐나다 토론토 대학 YMCA 소속 의료선교사로 8년간의 선교 지원을 약속받고 부인 마가렛(Margaret Kelly)과 함께 1890년 내한하여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8년 후인 1898년에 남감리교회에 가담하여 강원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7) 하디는 개척선교를 하였으나 사역에 별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의 1904년 보고에 의하면,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남감리]교회가 처음 터 닦은 지경터(地境垈) 지역에서 애써 일 하였으나, 거기서 사역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 할 수 없으리 만큼 기진맥진하였다8) 라고 기록하여, 선교사역이 순탄치 않았음을 고백하였다.
하디는 성경공부 교안 작성을 요청받고 자기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한국 교인들이 진정한 참회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는 주제로 교안을 준비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선교사로써의 자격을 갖고 있는가라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고백하기를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그의 첫 요구는 나의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선교사들 앞에서 나의 실패와 그 실패의 원인을 시인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9)
하디는 통절히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사죄의 확신을 얻은 후에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실패를 모두 털어 놓았다. 다음 주일 그는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으로 내 자신의 교만함과 신앙 없음,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나의 잘못을 고백한다.”10)라고 자백했다. 그 때의 경험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나는 성신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는 부끄러움과 혼미에 찬 얼굴로 나의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함과 또 그 상태가 빚어낸 모든 결과를 자복하였다. 이에 회중은 강한 죄의식과 회개로써 신앙생활의 깊은 체험상의 작용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단순한 신앙으로 내가 성신의 은사를 받았음을 알려 주었다.11)
그 때 그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의 고백과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어 부흥의 불길이 서서히 붙기 시작하였다. 하디의 이런 참회 경험은 1907년 대부흥운동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
성령 체험을 한 하디는 넘치는 영적 능력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선교 사역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변화된 모습을 동료 선교사였던 게일(J. Gale)은 후에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 나님은 그에게 전혀 아무런 가식이 없는 진지함(earnestness)과 부드러운 촉진(觸 該 tender touch)의 은사를 주셨으며, 그에게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주님 나라 에 대한 사모함을 주셨다. 그의 삶의 변화는 갈릴리에서 베드로의 마지막 고기 잡는 여정과 그가 너무도 놀라운 부드러움으로 베드로 서신을 기록하던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12)
성령의 뜨거운 체험 없이 그리고 통절한 참회의 과정 없이 선교에 임했던 하디가 이런 성령체험과 참회의 과정을 겪은 후부터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영적 능력으로 집회와 선교 사역을 감담 하였다.
이 때 타오른 성령의 불길이 한국 교인들 사이에도 떨어졌다. 한 집회에서 젊은이가 일어나 자신은 자기 부인을 죽게 방치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했다.13) 이에 자극 받은 교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크게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기도회를 연일 가졌다. 이에 더 큰 은혜가 임재하면서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설교 시간에 어쩔 수 없는 힘에 압도되어 갑자기 일어나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바람에 설교가 종종 중단되기도 하였다. 큰 은혜를 받은 교인들은 그들의 은혜 받은 대로 고백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이 간증하는 내용은 지금까지 기독교를 이렇게 개인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경험으로써 느끼지 못했다.”14)는 내용이었다.
원산 지역의 이런 성령의 역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1903년에도 지속적으로 특별집회와 사경이 계속되다가 이듬해인 1904년으로 이어졌다. 이즈음 중국 스캔디나비아선교협회(Scandinavian Missionary Alliance of China)소속 선교사 프란슨(F. Franson)이 이 곳에 도착하여 이어지는 주간에 일주일간 머물며 원산 지방 선교사들의 기도와 성경공부를 인도함으로써 더욱 힘을 보태 주었다.15) 이 기도회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더불어 장로교, 침례교 선교사들, 그리고 일부 한국교인들도 참여하는 연합 모임으로 확대되어 매일 밤 집회가 계속 되었다.16)
하디와 더불어 캐다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원산에서 동역하던 로브(A. F. Robb)가 큰 은혜를 받아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정월 모인 원산 사경회에서 그는 “특은(特恩)을 받아 다일간(多日間) 금식통회(禁食痛悔)하며 가로상(街路上)에서도 간구불절(懇求不絶)”17)하는 성령의 체험을 하였다.
이런 일이 있는 다음달에 하디에게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 등 각지로부터 집회 요청이 쇄도 하였는데, 그는 집회를 할 때마다 먼저 죄를 참회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철저한 죄의 회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에서 추출해낸 것이다.
부흥운동이 원산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어 가던 중, 이 소식에 접한 평양의 선교사들이 하디를 초청하여 1906년 8월에 장, 감 연합으로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 집회를 가질 즈음의 한국 상황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종주권을 세계 제국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고, 한 해 전인 1905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탄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채결하고 선포한 때였다. 특히 한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소위 ‘가츠라-태프트 메모’에 의해 한국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밀약을 맺었고, 제일 먼저 서울에 있던 공사관을 철수 시켰다. 이로써 한국인들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어 가는 때였으므로 주한 선교사들은 이를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블레어(W. Blair)는 “미국까지도 영국이 했던 것을 본 따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고 나서는 것을 용인함을 볼 때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서 격렬한 척외 정신이, 특히 반미 정신의 물결이 전 국토를 휩쓸었다.”18)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
이런한 상황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사이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고, 선교사들은 이런 현실을 타개 할 수 있는 길은 따로 없다고 판단했다. 블레어는 “그 여름 8월의 집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 세례만이 우리(선교사)에게 합당한 것이며 장차 고난을 겪게 될 한국의 동료 교인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이 기회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19)고 기록했다. 이런 배경에서 8월 선교사 모임이 실현되었다. 그들은 이 집회를 통해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진정한 ‘성령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다음 해 초 평양에서 모이는 겨울 사경회에서 이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단하였다. 그 때 그 곳에 모인 선교사들은 “통회와 자복으로 크게 은혜를 입었다.”20)
1906년 평양의 모임에 이어 그 해 9월 서울에서 모인 연례선교사총회에 미국에서 온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원이었던 존스톤(Howard A. Johnston) 목사가 출석하여 선교사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는 또 한국 교인들과 지도자들에게 인도와 영국의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며 설교하였다.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은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선교 보고서는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가 선교사들에게 한 설교는 듣는 이들의 영혼과 삶을 크게 자극하였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게 하였고, 더욱 열정적인 기도를 하도록 북돋아 주었다....그가 한국 교인들에게 행한 설교는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의 방문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일로 남게 되었다.20)
매년 연말이 되면 선교사들은 성탄절 준비와 새해맞이 그리고 휴가 기간에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1906년 말은 선교사회와 한국교회에 일고 있던 성령 운동의 기운으로 새해 초에 있을 사경회 준비를 위한 기도를 계속하였다. 매년 초에 장로교회는 도사경회(都査經會)를 갖고, 감리교회는 일반부 성경공부반을 운영하였는데, 두 선교부는 이들 성경반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장로교 사경회는 정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낮에는 대체로 시골에서 올라온 남자들 약 900여명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였고, 저녁에는 평양 시내 여러 교회에서 온 남자들 약 1,500명이 모여 전도 집회를 하였다.20)
본격적인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 1907년 정월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는 이런 예비 단계를 거치면서 전개되었다. 성령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참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B. 길선주(吉善宙) 목사에 의한 준비(새벽기도회)
1907년 대부흥운동은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선교사들에 의해 준비 되어졌다. 비록 처음부터 부흥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된 바는 없었지만, 그들의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이 효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중심에 길선주 목사가 있다.21) 그는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22)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에 한 사람”23)이라는 칭송을 받는 인물로 부흥운동의 중요한 준비 단계에 그의 새벽기도 운동이 있었다.
3. 1907, 어떻게 성령이 평양에 임하셨는가?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이길함(Graham Lee)
1906년 8월 [26일]에 우리 평양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삶을 더 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1주일간[8월 26일-9월 2일] 사경회를 개최했다. 원산의 하디 박사가 와서 우리에게 대단한 도움을 주었다. 성령께서 그 집회를 통해 우리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시며 그분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놀랍게 사용하시기를 사모하도록 우리의 심령에 간절한 열망을 불어넣어주셨다.
사경회 후 즉시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 연례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거기서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을 만났는데 그를 통해 서울 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존스톤 박사는 평양에 와서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인도에서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현시에 대해 들려주었으며 그 이야기를 들은 한국인들 몇 사람이 같은 축복을 받기를 대단히 열망했다. 그 때부터 축복이 임할 때까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은 놀라운 부흥이 임하도록 기도해왔다.
우리가 연례회의에서 돌아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도록 간구하면서 얼마 동안 특별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 때에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그 집회를 즐겼으나 성령께서는 권능 가운데 우리와 함께 임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를 계속하였고, 크리스마스 때에 우리 선교사들 심령에 한 주간 특별 기도회를 갖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불어 넣어주셨다.
이 특별 기도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유익이 있는 집회였다. 이 집회가 마치기 전에 평안남도 겨울남자 도사경회가 시작되어 약 700명의 남자들이 성경공부를 하며 2주[1월 2일-15일]를 보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이 사경회 동안에 특별한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 장로교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에 모여 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오 기도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이 정오 기도회가 우리에게 바로 벧엘이었기 때문이다.
1월 6일에 우리는 평양시내 네 개의 장로교가 연합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와 평양시내 사람들을 위해 저녁집회를 시작했다. 만약 남녀를 같이 참여하도록 한다면 장소가 너무 협소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여성들의 경우 네 개의 다른 장소에서, 학교 남학생들의 경우 중학교 예배실에서 별도로 모임을 갖도록 요청하였다. 장대현교회에서는 단지 남자들만 참석하였다. 장대현교회는 약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매일 밤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찼다. 토요일[12일] 저녁까지 매일 밤 집회 가운데 주의 능력이 점점 강하게 나타나 토요일[12일] 저녁집회는 그 때까지 열린 저녁 집회 가운데 최고였다.
주일[13일]에 우리는 평양의 네 개의 각 교회에서 정규 주일예배를 드리고, 주일저녁에 장대현교회에서 계속해서 평양시내 네 개의 교회가 연합하여 다시 저녁집회로 모였다. 우리는 그 주일 저녁집회에 대단한 축복을 기대했었으나 놀라운 축복을 받는 대신 우리는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하였다. 집회는 냉랭했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였다. 한번의 설교와 유익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몇 사람의 열의 없는 간증이 있은 후 우리는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며 무거운 심령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전 저녁 집회에서는 생명력을 가진 간증들과 실제적이고 진지한 죄의 고백이 있었으나 주일 저녁에 모든 것이 막힌 듯했다. 그 집회는 하나의 죽어 버린 형식적 집회처럼 보였다. 한국인 형제들도 우리 선교사들이 느끼는 것과 똑 같이 느꼈다. 주일저녁은 음울한 밤이었다. 1월 14일, 월요일 정오에 우리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울면서 간절히 간구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월요일 저녁집회에 바로 그 축복이 임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채 월요일[14일] 저녁집회에 참석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달라고 내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우리가 장대현교회 건물 안에 도달했을 때 우리 모두가 무언가 임하고 있음을 느꼈음을 감지했다. 간단한 설교가 있은 후 우리는 함께 통성기도를 드렸으며 모든 청중들이 함께 여기에 합류했고 이 통성기도는 이들 집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기도 후 몇명의 간증이 있은 후 사회자가 청중들에게 일어나라고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새벽까지 계속 기도회를 가질 계획을 가지고 혹 오래 남아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남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5백에서 6백명 가량이 남았다. 우리는 이들을 장대현교회 건물의 한 L자 형 예배실에 모으고 집회를 시작했는데 그 집회는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목도하지 못했던 그런 집회였다. 기도 후에 죄를 고백했으며 즉시 하나님의 영이 그곳의 회중들 가운데 임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흐느껴 울며 마루 바닥에 고꾸라졌고 혼신을 다해 통회하는 가운데 손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내 요리사가 죄를 고백하려고 시도하다 집회 중간 쯤 통회하며 그 방을 가로질러 내게 와서는 “목사님, 내게도 소망이 있습니까, 나도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소리치고는 바닥에 쓰러져 울고, 또 울고, 거의 고통 속에 절규했다. 때 때로 죄의 고백이 있은 후 전 회중이 통성으로 통회의 기도를 드렸고, 수백 명의 남자 성도들이 통성으로 함께 드리는 기도의 효과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었다. 다시 또 다른 사람이 죄를 고백한 후 회중들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통회의 기도가 시작되어 우리 모두 울었고,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 집회는 죄를 고백하고 울며 기도하면서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중 몇몇은 교회의 높은 제직 가운데 몇 사람, 특별히 강씨와 김씨 사이에 마음에 증오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우리는 이 저녁 집회가 열리는 동안에 모두 와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희망했다. 월요일 저녁에 강씨가 용기를 가지고 그가 얼마나 김씨를 미워했는지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고 강한 사람이 울음을 터트리고 다시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그런 후 다시 자신이 얼마나 김씨를 미워했는가를 말하면서 통회하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새벽 2시가 되었으나 아직도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점차 추워가고 우리가 아직 또 다른 저녁집회를 남겨두고 있어 우리는 여기서 월요일 저녁집회를 마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 화요일[15일] 정오기도회에 우리 선교사들은 전날의 놀라운 저녁집회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심령을 가지고 모여, 또 다시 화요일 저녁집회 때에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화요일 저녁집회 때 우리의 가장 은사를 충만히 받은 설교자, 길선주가 간단히 설교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약 6백명이 남았다. 그 집회는 월요일 저녁집회와 상당히 유사했지만 성령의 현시는 더 강력했다.
우리 중 몇은 두 사람, 특별히 김씨와 주씨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그것은 우리가 볼 때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할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김씨가 용기를 내자 상황은 절정에 달했다. 강대 앞 쪽에 앉았던 그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앞으로 나와서는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다른 형제들, 특별히 블레어 선교사를 미워했음을 고백하고는 온 몸을 전율하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그는 마루 바닥에 고꾸라졌는데 모습이 꼭 발작하는 사람 같았다. 그가 통회하자 온 회중은 마치 하나의 강력한 통회의 폭풍처럼 통회하기 시작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우리 선교사들은 나머지 무리들과 함께 울었으며 회중들이 통회하는 것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그들이 흐느껴 우는 동안 강씨가 일어나 기도했다. 심령이 가난한 그 남자는 절규하며 기도하고는 완전히 녹아내려 자신의 죄를 완전히 통회 자백하였는데 마치 심장이 끊어지는 듯했다. 형제들이 그 사람 주변에 모여 그들의 팔로 그를 감싸자 그가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런 후 그가 김씨에게 가서 사랑스럽게 자신의 팔을 벌려 그를 포옹하고 그와 함께 우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런 후 김씨가 통회하며 블레어 선교사에게 돌아가 “블레어 목사님, 나를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블레어 선교사는 일어서는 “아바지, 아바지”를 두 번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잃고 더 기도를 하지 못했다. 청중들은 통회를 계속했고 그것은 어떻게 그들이 중단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우리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송 한 곡을 불러야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몇몇 사람이 자신들을 통제할 수 없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르는 동안 그들이 냉정을 찾았으며 그런 후 다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 집회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저녁에 있었던 가장 놀라운 일 중의 하나는 한 대학생의 기도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싶다고 요청 기회를 얻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결코 전에는 그런 기도를 들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진 한 영혼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간음, 증오, 아내에 대한 애정 결핍,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가지 다른 죄를 고백했다. 기도하면서 그는 통회하였으며, 실제로 거의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가 통회하자 청중들도 그와 함께 통회하였다. 우리 모두는 마치 우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화요일[15일] 저녁집회로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는 마쳤으나 우리는 마치 이 같은 성령의 현시가 이제 그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수요일 저녁 우리 평양 시내 네 장로교회 기도회 때 똑 같은 놀라운 권능이 현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나는 수요일 저녁 장대현 교회에서 두 장로를 선출하겠다고 광고했었으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저녁에 선거를 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내가 그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날 밤 선출할 장로는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간단한 설교가 있는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돌려보냈다. 청중이 조용해지자마자 우리는 함께 통성 기도를 드렸다. 즉시 일단의 남자들이 껑충껑충 뛰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싶다며 의사를 표했다. 몇몇 사람이 죄를 고백한 후 주 장로가 자기 죄를 고백할 용기를 얻게 되자 그 집회는 절정에 달했다. 그 놀라운 화요일 저녁집회 내내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들은 그가 고백할 무언가 무서운 죄가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그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강단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갑자기 그가 내 곁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내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굴복하였고, 성령께서 이제 그를 깨끗게 하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너무 떨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표현이 불분명했다. 그러나 계속하면서 그의 말은 더 분명해졌고, 그런 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토로했다. 그는 간음과 공금 유용을 고백했다.
그가 자신의 죄를 토로하는 동안 유한한 인간이 표현한다면 이제까지 내가 목격했던 바로는 가장 무시무시한 고통 가운데 처해 있었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나는 그가 혹시 고꾸라지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팔을 벌려 그를 붙들었다. 무서운 심령의 비탄 속에 그는 “이제까지 세상 어디에 나와 같은 무시무시한 죄인이 있을까요”라며 울부짖고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주먹으로 강단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는 바닥에 주저 않고는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극심한 고통 가운데 뒹굴었다.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마치 그는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장면을 목도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한국 형제들이 그에게 다가가 자신들의 팔로 그를 감싸고는 고통 가운데 있는 그를 위로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주씨가 통회하자 온 회중이 눈물로 통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울고 절규하고, 다시 절규하였으며, 마치 그들은 중단할 수 없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송 한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집회를 조금 연장한 후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현시하셨음을 인하여 감사하며 회중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 장로가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일이었다.
수요일[16일] 아침 평양 숭현여학교에 똑 같은 성령의 현시가 임했다. 스눅 여 선교사가 여느 때처럼 학교에 출근하여 첫 수업이 끝난 후 10시에 학생 예배가 시작되었으나, 그날 아침 예배 내규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몇 마디의 멘트와 기도가 있은 후 여학생들이 통회하며 울부짖으며 회개하기 시작 12시까지 오직 기도와 통회와 죄를 고백하였으며, 집회는 12시가 넘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목요일 아침에 수요일의 역사가 반복되었으며 채플이 정오까지 지속되었다. 금요일에 학교 수업을 중단하고 오전 내내 지난 이틀간처럼 시간을 보냈다. 수요일 아침 장대현교회 남학교, 숭덕학교에서 똑같은 성령의 현시가 나타났다. 학교가 보통처럼 개학하였으나 수업을 중단하고 1시까지 계속 통회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세 명의 소년들이 절제를 못하고 강력한 집회에 압도되어 의식을 잃었다. 확실히 그 책임을 맡은 한국인 교사는 필요할 경우 어떻게 그 영적 긴장에서 회중들을 벗어나게 할지 알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목요일 아침 여자 초등학교에 성령이 임하셨다. 우리 중 몇은 학교 교실까지 가면서 학생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똑같은 권능이 그곳에 임한 것을 알았다. 베스트 여 선교사는 즉시 내려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듣고 번하이젤 선교사 부인이 평양의 여학교로 내려가 그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목도했다. 그녀는 그 여학생들에게 몇 마디를 하자 즉시 그들이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수요일 정오기도회 때에 똑같은 권능이 현시되었다. 30분의 기도회 대신 우리는 그날 오후 2시까지 울면서 우리의 죄를 고백했다. 나는 결코 전에는 그 같은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영이 문자적으로 우리에게 임했으며 우리는 울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서 방해하거나 죄짓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정결케 하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평안남도 도 사경회 내내 교회 여자 성도들은 별도로 모임을 가졌으나 그곳에서는 그들 가운데 특별한 성령의 현시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장대현 교회에서 그들을 위한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특별한 성령의 현시가 없었는데, 그것은 여인들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소의 죄 고백과 몇몇 자기 의로 충만한 나이든 여인이 산만하게 몇 마디 했으나 성령께서 권능으로 그곳에 임하시지는 않았다. 토요일 저녁에 권능이 임하자 여인들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되었던 한 젊은 여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을 보고 참으로 기뻤다. 우리는 그녀를 도우려고 했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토요일 저녁에 그녀가 통회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는데 그녀는 마치 심장이 찢어지는 듯 절규했다.
1월 20일 주일 아침 장대현교회에서 우리는 주일날 평소의 주일학교 성경공부를 가졌으며, 그날 오후예배 때 또 다른 놀라운 성령의 현시가 임했다. 길선주 장로가 설교했는데 그는 아주 생생한 예화로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했다. 그는 밧줄에 연결된 끈을 가지고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조여 묶고는 매큔 선교사가 강단에 서서 그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동안 사회자 중 한 사람에게 그 밧줄을 잡아당겨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후 길장로는 어떻게 죄로 결박당한 죄인이 죄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가를 설명했다.
길선주 장로가 사람들 중 몇이 통회할 때처럼 몸부림치자 드디어 그 결박이 끊어졌고 그런 후 그가 강단을 가로 질러 가서 매균과 서로 감싸 안았다. 나는 블레어 선교사와 시골 사경회를 개최하느라 시골에 있어서 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매큔 선교사는 길선주가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회중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고 결박이 끊어지고 그와 길 장로가 서로 팔로 포옹하자 그 효과는 형언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많은 남자들이 곧 일어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울부짖었고, 반면 다른 사람들은 간절히 울부짖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길 장로는 그들에게 집으로 가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다시 저녁집회에 오라고 말했다.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에 단지 여성들만을 위한 집회가 열렸으며 그 집회 때 또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현시되었다. 그 임재의 역사가 너무도 커서 한 여인이 의식을 잃었고 다른 이들도 거의 자신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은혜 가운데 집회가 끝났다.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 즐거워했다. 시골 지역에서 그 역사는 계속되었다. 블레어 선교사와 내가 막 시골 사경회에서 돌아왔는데, 그 사경회에서도 성령의 현시가 정확히 똑같이 나타나 죄로 인한 무시무시한 통회, 죄에 대한 고백이 있은 후 놀라운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다.
평양에서 은혜로운 사역이 시작되었음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 최고의 감사를 돌리며, 우리가 목도한 것이 단지 하나님이 아직 우리를 위해, 아니 단지 우리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위해 예비해두신 더 위대한 축복을 위한 염원이기를 기도한다.(*)
출처:http://blog.daum.net/gaya92/8589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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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