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춘천 가정초등학교
여의내골 의병의 기개를 이어온 학교
이학주(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으랏차차!” 든바위를 들고 훈련을 했던 류인석의 기합소리이다. 든바위는 가정초등학교와 마주한 여의내골 끝자락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이다. 가정초등학교의 의기가 서린 기상일까?
옛날 가정리에는 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저수지가 있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절 사(寺)자 마을 동(洞)자를 쓰는 사동리(寺洞里)였다. 그때는 마을에 다양한 성 씨가 살고 있었다. 대곡에는 밀양 박(朴) 씨, 제청말에는 홍천 용(龍) 씨, 가정자 쪽에는 거제 반(潘) 씨가 살았다. 또 황골에는 위(魏) 씨들이 살았다. 그런데 고흥 류 씨인 류숙(柳潚, 1564~1636)이 가족을 이끌고 마을에 들어오면서 류 씨 집성촌이 되었다. 류숙은 강원도사 및 병조참판을 지낸 인물로 가정리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구휼에 힘썼다. 류숙의 가르침은 류중교와 류인석 등으로 이어져 마을의 전통이 되었다. 구휼은 ‘미염이’라는 지명으로 잘 남아 있다. 미염(米鹽)이는 쌀 미자 소금 염자로 흉년에 쌀과 소금을 나눠줘서 생겨난 지명이다. 유학자가 들어와서 살면서 정자를 지었는데, 떡갈나무의 일종인 가나무로 정자를 지어서 가정자(柯亭子)라 불렀다. 사동리가 가정리로 바뀌었고, 불교마을은 유교마을로 바뀌었고, 유교적 학문의 전통이 이어진 유래이다. 류 씨 집성촌이기에 집집이 택호(宅號)를 많이 쓴다. 제보를 해 주신 류희만 제보자는 놋점댁을 쓰고 있었다. 할머니가 춘천 우두산이 있는 놋점마을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이다.
가정리는 의병마을로 잘 알려졌다. 마을 전체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활동을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구한말 의병을 이끌었던 류인석과 류홍석 등 의병장만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리고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이 의병활동을 평생하게 한 고장이다. 가정리는 마을사람 모두가 의병에 참가했다. 춘천의 막국수가 유명하게 된 원인도 의병을 돕기 위해서였다니 그 진상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정초등학교는 류인석이 태어나 의기를 쌓고, 의병이 전투를 치르기 전 훈련을 하고, 윤희순 등이 의병이 쓸 무기를 만들던 여의내골에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의병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군자금이 필요했는데, 군자금의 많은 부분을 보탰다는 류참봉이 살았던 약암(藥岩) 공회당에서 학교는 시작했다. 류태석 참봉은 의암의 시신을 만주에서 가정리로 옮겨 오는 반장(返葬)을 할 때도 도움을 줬다. 약암 공회당에서 학교가 시작된 것은 1937년 일제강점기 때였다. 이후 몇 번 학교를 옮겨 여의내골까지 왔다가 2009년에 학생 수가 줄어 폐교가 되었다. 여의내골에 학교를 옮기기 전에는 약 100여 미터 앞 가정자쪽에 있었다. 그곳은 옛날 침수가 잘 되어 비만 오면 학교 건물에 물이 들어왔다. 그래서 1971년 여의내골로 옮겼다. 이때 가정리 사람들은 땅을 희사하고 학교를 짓는데 앞 다퉈 일을 했다. 그리고 1987년에 학교건물을 새로 지을 때 너나없이 찬조금을 내고 지게와 리어카를 이용해 학교 개축을 도왔다.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전통을 이은 마을사람들의 의지이리라. 그리고 1989년 학교운동장에 준공기념비를 세웠다.
그 기념비는 2020년 현재 유일하게 학교 교정을 지키고 있다. 가정초등학교는 없어지고 대안학교 가정중학교가 그 터에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준공비에는 한자로 가정국민학교개축 준공기념비라 하고, 학교연혁과 찬조내역, 충효(忠孝)라고 쓴 글자가 있었다. 그리고 학교 교가가 쓰여 있었다. 교가는 류연목 2대교장이 작사를 하고, 박정웅 매원국교교사가 작곡을 했다. 가사에도 의병의 기개가 배어 있다. 그것은 “끓는 피가 힘차게 용솟음치니”나 “대한 사람 한몫을 단단히 맡을”과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다.
필자가 가정초등학교를 처음 찾은 때는 2011년이었다. 그때는 국제창의미션스쿨을 운영하는 사람이 초등학교 건물을 교육청에서 임대 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가 조심스러웠다. 학교 건물, 운동장, 그리고 주변의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는 듯했다.
교정 옆 오누이가 책을 펼치고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이 정다웠다. 1979년 서울에 있는 매원국민학교에서 기증을 했다고 쓰여 있었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 어느 학교를 가나 다 있던 석고상이다. 정말 추억의 고리가 되고도 남았다.
독서상 옆에는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이 있었다. 책보를 옆에 끼고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이다. 1968년 당시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사건과 관계된 평창 이승복 어린이의 죽음도 알고 있다. 그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가 죽었다고 했다. 나중에 진위여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린이들에게 반공교육을 강화하고 궐기대회와 웅변대회를 더욱 강화시킨 계기가 됐다.
그런데 가정초등학교에만 있던 독특한 조각물이 있었다. 그것은 ‘충효상(忠孝像)’이었다. 두 명의 어린이가 네모 난 판 위에 두 개의 둥근 형상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의 동상이었다. 하나의 둥근 모양은 무궁화(?) 같은 것에 올려 있고, 하나는 그냥 놓여 있었다. 아마도 가정리이기에 이런 동상을 세웠을 것이다. 가정리는 고흥 류 씨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랜 유교적 전통을 지켰다. 게다가 의병활동을 많이 했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가정리 사람이 주축이 되어 산악대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적과 싸웠다. 이런 마을의 문화가 충효상 동상으로 만들어졌다. 학교준공비 옆에도 ‘충효’라는 단어를 크게 써 두었다. 이런 동상은 졸업생들이나 자매결연을 한 곳에서 많이 세웠다고 했다.
가정초등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는 마을 어른들의 갈등이 심했다. 일제강점기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종손들은 학교를 보내지 않고 서당에서 한문교육을 시킨 경우가 많았다. 구학과 신학의 갈등이라고 표현은 했으나 일제의 교육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그 때문에 어떤 집안의 종손들은 아예 한문교육도 못 받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기도 했단다.
마을이 류 씨 집성촌이기에 텃세도 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류 씨가 아닌 사람이 학교 교사로 오면 견디기 어려웠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류 씨의 사위로 삼아서 학교에 근무하게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