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르키메데스의 점’
“내게 발판과 적당한 크기의 지레가 있다면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아르키메데스는 과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실제로 그는 지레의 원리를 발견하고는 바다 위에 거대한 군선을 띄우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런 차원에서 지구 밖에 지렛점을 세우고 적당한 크기의 지렛대가 있으면 지구를 우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인데, 바로 이 지렛점이 ‘아르키메데스의 점’으로 통한다. B.C 3세기경 천재 과학자의 주장이 2,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현재 인류가 화성을 오가는 우주 시대를 맞아 언젠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세울 날도 있을지 모르겠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변화의 원리로 설명한다. 지구를 딛고서 지구를 들어 올릴 수가 없기 때문에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지구 밖 우주 공간에 마련해야 하고, 또한 지렛대를 내리누르는 힘점은 보다 먼 곳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레 길이만큼의 충분한 거리가 요구되는 것인데, 아렌트는 이를 두고 “변화는 지금의 나로부터 먼 바깥에서 도래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변화의 원리’는 발상의 전환인 셈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자에 대한 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일본을 방문하여 기시다 총리와 정상 회담을 가지면서 6년 만에 한.일 셔틀외교 재개를 성사시켰지만 이에 대한 국민 정서가 녹녹치 않게 흐르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의 정치공세는 반일 감정을 앞세워 극단적 선동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빗댐을 넘어서 굴욕외교라든지 더 나아가 일본의 하수인이라고까지 몰아붙인다.
일부에서는 이를 종북적 선동정치라고 지적하기도 하고, 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에 대한 방탄용 물타기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민단체들까지 점화된 분위기는 국론분열과 국민 갈라치기의 갈등으로 번지는 모습이다.
사실 윤 대통령의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자 배상에 대한 해결책 결단은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한나 아렌트가 ‘변화의 원리’로 설명했듯이 일종의 관점 차이다. 말하자면 ‘발상의 전환’인 것이다. 그동안의 관점에서 벗어 난 ‘가치의 다름’을 통해 바깥을 경험하여 미래를 환대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는 결국 한마디로 ‘극일(克日)’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일제 식민지 피해자 패배의식 속에 살아야 하는가? 100년도 더 된 상처로 인해 80년 동안 가슴앓이를 겪으며 줄기차게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우리 국민이 받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국민 정서와 감정상 치유되기 어려운 시련이었음이 확실하다. 어린 학창 시절 학교 폭력의 상처로 평생동안 겪는 트라우마로 인해 보복의 응징 드라마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중처럼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는 그리 쉽게 지울 수 있는 과거가 아니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그 과거에 시달리며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것인가? 친한 일본인들도 이젠 지겨워한다. 그동안 일본 국무총리와 지도자들이 일제 침탈 과거사를 여러 번 사과도 했으며, 1965년 한·일 협정으로 피해 배상도 했다.그 돈으로 우리는 포항제철을 비롯해 여러 기업도 세우고, 고속도로도 뚫으면서 산업화의 종잣돈으로 쓰기도 했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인들도 공동체주의에 따른 책임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 일본인들의 선조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공동체의 역사적 책무는 벗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일본인들의 책무는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벗어나야 한다. 세계 경제 10위 국으로 도약하면서 나라의 품위도 세계 6위를 차지, 세계 8위의 일본을 앞질렀다고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과거사 피해의식에 젖은 반일 감정으로 오히려 국제정치에 역행하는 부적절함도 보였고, 최근 동북아시아의 안보 문제 차원에서도 중국과 러시아와 북한의 진영대결을 대비하는 한·미·일의 공조가 절필한 시점에 이르기도 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강제 징용자 배상 해법과 일본과의 정상외교 회복 시도는 무엇을 주고받는 식의 결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뭔가를 요구하거나 받기를 바라면서 추진하는 외교 정책이 아니라 글로벌 시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라는 평가다. 더 이상 후손들에게 불행한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전진하지 못하는 병폐를 막으면서 미래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변화의 원리를 찾아주겠다는 용기의 결단인 셈이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고 역설했듯이 과거를 딛고, 미래를 선택하기 위한 현재의 행동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암울한 패배주의식 반일 감정보다는 미래지향적 ‘극일’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발상의 전환점이다. 과거 박정희식 산업화의 시발점처럼 이제 당당히 미래 선진화를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