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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산수화
조선왕조말기(1850-1910)에는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가 사실상 거의 사라지다시피 쇠퇴하고 남종문인화가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후기와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 시대에는 또한 후기에 싹텃던 이색적인 경향의 산수화풍이 더욱 뚜렷한 양상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되고 근대화단과의 연결을 이룬다는 점에서도 자못 의의가 크다.
1. 추사파 산수화
조선 말기에는 남종산수화가 더욱 널리 보급되고 풍미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는 사의를 존중하였던 추사 김정희(정조10, 1786-철종7, 1856)와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김정희는 1819년(순조19)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참판의 벼슬에 까지 올랐던 선비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인물이다. 특히 서예에서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이룩하였고 회화에서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금석학, 고증학, 실학등에서도 괄목할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예술은 24세때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북경에 가서 당시의 거유인 옹방강, 완원등과 교유하게 되면서 강한 자극을 받아 큰 성장의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6)부터 1849년(헌종15)까지의 9년간에 걸친 제주도(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리)에서의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에서 그의 학문과 예술이 매우 큰 성숙의 단계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사의와 문기를 매우 중시하였으며 깔끔한 남종문인화만을 존중하였다. 따라서 한국적인 특징이 넘치는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를 경시하여, 조선 말기에 이르러 진경산수화가 쇠퇴하고, 더 이상의 맥을 잇지 못하게 된 첫째 이유를 추사 김정희 일파의 대두와 관련지울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산수화풍은 제주 유배 시절에 그린 그의 대표작 「세한도」를 통해 엿 볼 수 있다. 세한도는 추사 59세때인 1844(헌종10)년 역관으로 그를 따르던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으로 지조를 상징하는 송, 죽, 매의 세한삼우와 한채의 집을 다룬 지극히 간단한 그림이다. 세한도란 논어에「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떤 역경에 처해도 변함없는 선비의 지조를 비유해서 사용되는 말이다. 간일한 구도, 대담한 생략, 갈필로 이루어진 까슬한 필치 등에 김정희의 농축된 문기가 넘친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말기의 대표적 화가인 우봉 조희룡(정조13,1789-고종3,1866), 소치 허유(순조9,1809-고종29,1892), 고람 전기(순조25,1825-철종5,1854)등에게 큰 영향을 미치니 이들을 추사파라 한다.
우봉 조희룡은 한양 출신으로 김정희의 문인이다.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렸으며, 1850년(철종1)에 돌아가신 헌종에 대한 예론문제로 추사 김정희가 함경남도 북청으로 재유배를 떠날 때, 추사파의 일원으로 전라남도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글씨는 추사체를 본받았고 그림은 산수, 화조, 사군자에 능하였다. 그는「호산외사」라는 저술을 통하여 당시의 미천한 계층의 출신중 학문, 서화, 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소개하였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7명의 화가(김홍도, 최북, 임희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의 교우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그림인데, 그의 매화 그림에 대한 편벽된 경향은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홍매대련」을 들 구 있는데 굵은 노수간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채우고 그 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나가 주간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비백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되는 윤묵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 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으로 그렸다. 그의 백매화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 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를 겯들여 문인화 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았다. 그의 묵매화는 사임당 신씨 이래의 조선 중기 묵매도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조선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또한 그의 대표작인 「매화서옥도」를 보면 그는 추사의 영향을 뛰어넘은 출중한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송대의 매화시인 임포의 은둔생활을 그린 그림으로 문인화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는 고사이다. 눈송이 처럼 피어난 매화꽃과 책을 대하고 앉아있는 선비의 서옥을 산을 배경으로 묘사하였는데 그림에 넘치는 참신하고 이색적인 취향이 아주 강렬하다. 서예적인 필법, 청신한 묵법과 설채법등에서 그의 독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소치 허유는 전남 진도 출신으로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받았든 사람이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 의순의 소개로 추사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돈독한 아낌을 받으며 화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추사의 막역한 친구이자 영의정인 이재 권돈인을 비롯한 사대부는 물론 헌종과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에게까지 소개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자서전인 「소치실록」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산수를 비롯하여 매화, 대나무, 모란, 파초등 다양한 화제를 그렸다. 그는 중국 남종화의 맥을 잇는 대가들을 따르고 그들의 화풍을 섭렵한 듯하다. 그의 자 '마힐'과 이름 '유'는 중국 남종화의 시조인 마힐 왕유를 따른 것이고, 호 '소치'는 중국 남종화의 정맥을 형성하고 있는 원말4대가의 한사람인 황공망의 호인 대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향 진도에 지은 화실을 운림산방이라 한 것은 역시 원말4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의 호인 운림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중국 남종화의 화풍을 방작했지만 특히 황공망과 예찬의 화법을 즐겨 사용하였고 그의 작품에는 특히 운림 예찬의 화풍을 닮은 것이 많다. 그의 대표작인 「선면산수도」는 그가 살던 진도의 운림산방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전형적인 화풍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갈필과 일종의 단필피마준법을 사용하고 담채를 가하여 다소 거칠고 소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그의 아들인 미산 허형과 방계인 의재 허백련, 그리고 손자인 남농 허건등 자손들의 손을 통하여 가법을 이루며 현대화단까지 계승되고 있다.
고람 전기는 약포를 경영한 중인으로 알려져 있다. 조희룡, 유재소, 유숙 등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중인 출신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다. 우봉 조희룡의 「호산외사」에 의하면 "그는 체구가 크고 빼어나며 인품이 그윽하여 진, 당의 그림속에 나오는 인물의 모습과 같다."고 하였으며, "그가 그린 산수화는 쓸쓸하면서도 조용하고 간담하면서도 담백하여 원대의 회화를 배우지 않고도 원나라 사람의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하였다. 추사파 가운데서도 사의적인 문인화의 경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사하였던 인물로 크게 촉망 받았으나 29세의 이른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현존하는 작품들을 통해서 볼 때 주로 산수화를 즐겨 그리면서 화훼화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기룰인 듯하다. 그의 회화세계는 스승인 추사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사의적인 남종문인화풍과 김창수·김수철의 이색산수화풍과 상통되는 참신한 경향의 화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작인 「계산포무도」는 간일한 필치와 간명한 구도에 의하여 이룩된 선미가 깃든 화풍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매화초옥도」에서는 참신한 감각의 화풍과 투명한 설채, 특이한 모습의 태점에 의하여 이룩된 신선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조선말기의 추사파산수화■
Chusapa Landscape Painting
of the Chosun Late Period
▣김정희:세한도▣
▣조희룡:매화서옥도▣
▣허유:선면산수도▣
▣전기:계산포무도▣
2. 이색산수화
추사파산수화와 더불어 조선 말기의 회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북산 김수철(?-?)과 학산 김창수(?-?)를 비롯한 일부 화가들의 이색저인 산수화풍이다. 개성이 풍부하고 화풍이 전에 없이 참신한 경향을 띤 이색산수화풍은 조선 후기부터 그 태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활약하였던 지우재 정수영과 학산 윤제홍의 작품들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생원시에 수석으로 급제하였고 문과에도 올라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까지 지낸 바 있는 전형적인 사대부 문인화가 학산 윤제홍의 「송하관수도」를 보면, 그 특이한 소나무, 인물 묘사, 산의 형태,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설채법등이 북산 김수철의 작품과 학산 김창수의 작품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학산 윤제홍은 「옥순봉도」나 「송하소향도」를 보면 능호관 이인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 「송하관수도」에 보이는 이색적 화풍을 형성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소나무와 인물의 형태나 설채법등은 그가 동시의 화원이었던 혜원 신윤복의 산수화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주목이 된다. 이색산수화의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지우재 정수영, 학산 윤제홍 등이 능호관 이인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인물들임은 매우 흥미롭다. 아마도 이인상의 화풍을 수용하고 그 위에 혜원 신윤복의 소나무, 인물, 설채법 등을 가미했던 것이 이색산수화풍을 창안하게 된 계기가 아닐까 추측된다. 그런데 혜원 신윤복의 산수화에서 보이는 변형된 하엽준법이나 소나무의 묘사에서 단원 김홍도의 영향을 감지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학산 윤제홍에서 비롯된 이색산수화풍은 결국은 여러 사람의 화풍을 소화한 위에 독자성을 발휘한 하나의 역사적인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조선 후기의 지우재 정수영과 학산 윤제홍에서 토대가 잡힌 이색산수화풍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북산 김수철과 학산 김창수에서 완성된 것이다.
북산 김수철은 생몰년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말기에 활약했던 것임은 틀림없다. 고람 전기는 북산의 그림에 화제를 쓴 일리 있으며, 또 같은 소재와 구도를 지닌 그림도 그렸다. 이로보면 북산 김수철은 추사, 우봉, 소치, 고람 등과 동시대의 인물로 볼 수 있는데, 북산의 작품중에는 己酉年(1849)과 庚戌年(1850)의 간지가 들어있는 것이 있어 대략 1850년대에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산수와 화훼를 모두 잘 했는데, '대담한 생략'과 '청신한 설채'를 특징으로 한다. 북산 김수철의 작품중에서 「계산적적도」는 우봉 조희룡의 「매화서옥도」와 고람 전기의 「매화서옥도」와 유관한 것이나, 그의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은 학산 윤제홍의 화풍을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윤제홍의 작품들 보다 좀더 정리되고 다듬어진 느낌을 준다. 또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근경에 낮으막한 언덕과 몇 그루의 나무'가 서있고 '원경에 주산'이 놓여 있으며 '중경에는 물이나 안개'로 채워져 있어 대체적인 구도는 원말사대가 가운데 운림 예찬과 유관함을 보여준다. 다만 북산 김수철은 운림 예찬위 경우처럼 절대준을 사용하지 않고, 보다 단순하고 곡선적인 형태를 즐겨 그리며 비교적 밝은 담채를 사용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운림 예찬 이후의 남종문인화법과의 관계를 잇게하고 있을 뿐이다. 김수철의 작품 중에는 또한 「송계한담도」처럼 소나무의 자태나 단순화된 인물의 모습 그리고 수채화적인 설채법 등에서 학산 윤재홍과의 관계 분만아니라 혜원 신윤복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도 있다. 이처럼 북산 김수철의 화풍에는 여러가 지 복합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학산 김창수의 화풍은 북산 김수철의 화풍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 같다. 학산 김창수의 새애 역시 북산 김수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세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화풍상으로 보면 북산과 학산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학산은 북산의 친동생이라는 설, 그리고 두 작가가 동일인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별개의 인물로 다룰 수밖에 없다. 학산 김창수의 작품상의 경향은 북산 김수철의 화풍과 큰 차이가 없다. 구태여 차이를 찾아 본다면 북산의 작품들이 학산의 작품 보다는 더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산 김창수의 작품은 북산 김수철의 작품 보다는 좀 더 과장되고 경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색화풍의 태동도 그 근저에는 남종화가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 말기에는 비록 한국적인 진경산수화는 쇠퇴하였으나 남종화와 그것을 토대로 하여 발전한 이색산수화에는 큰 업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말기의 이색산수화■
Exotic Landscape Painting
of the Chosun Late Period
▣윤제홍:옥순봉도▣
▣김수철:계산적적도▣
3. 오원파 산수화
조선 왕조 말기의 화단을 마지막으로 꽃피운 대표적 인물은 오원 장승업(1843-1897), 해사 안건영(1845-?), 소림 조석진(1853-1920), 심전 안중식(1861-1919)이다. 이들은 모두 화원들로서 그들의 화풍은 일반적으로 중국풍이 강하다.
오원 장승업은 40세를 전후하여 화명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초빙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감찰이란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의 한미한 생애와 호방하고 괴팍한 성격은 위암 장지연의「일사유고」'장승업전'에 의하면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다가 한양 수표교 부근에 살고 있던 이응헌의 집에서 기식하며 어깨너머로 글공부와 원, 명 이래의 명품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신이 내린 듯 그림을 능수능란하게 그리게 되어 화명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미인이 옆에서 술을 따루어 주어야만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하였으며, 또한 아무 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방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나이 40에야 장가를 들었으며 그것도 하룻만에 끝내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기질은 강렬한 필법과 묵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을 특징으로하는 그의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그림들은 조선왕조 회화사에서 예를 픶아볼 수 없을 만큼 호방하고 활달하며, 자유자재로 형태를 과장하는 시원스럽고 능숙한 기량을 보여준다. 그는 산수, 인물, 영모, 사군자, 기명절지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는데 전반적으로 문기어린 격조보다는 탁월한 기량이 돋보인다. 산수화에서는 원말사대가와 청초 사왕오운 계통의 각종 남종화풍과 각체의 북종화풍을 함께 소화하여 그렸으며, 특히 밀폐된 공간개념은 명대의 절파화풍과 상통되는 바 있다. 사실상 그는 문맹에 가까워 이따금「倣元人法」이라는 서툰 글씨의 자필 관지가 보이나 화제 낙관은 거의가 정학교와 안중식의 대필로 되어 있다.
해사 안건영은 19세기 후반의 조선 말기 화단에서 활동했던 화원으로서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시대 도화서의 마지막 명수로 전해져 왔으나 그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유작이 드물어 그동안 부각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최근 그의 작품 20여점이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왔음이 알려지게 되어 그에 대한 화가로서의 평가를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의 화풍은 소재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대체로 섬세한 필치와 아름다운 채색 위주의 북종원체화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중국화풍을 짙게 풍기고 있다. 특히 산수화에서는 남종화와 북종화의 양식을 함께 소화하여 그렸는데, 전반적으로 오원 장승업의 작품에 비해 안온한 느낌을 준다.
소림 조석진은 황해도 옹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도화서 화원으로 산수화와 어해화를 잘 그렸던 할아버지 임전 조정규 밑에서 학문과 그림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28세 되는 해인 1881(辛巳年)년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군대 조련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천진으로 떠났던 김윤식의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심전 안중식과 함께 발탁되어 천진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귀국후 도화서에 들어가 조선조 최후의 화원이 되었다. 충청도 영춘군수(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로 있던 1902년에는 고종의 어진모사에 심전 안중식과 함께 화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드높였다. 1908년 조선통감부에서 세운 공업전습소의 촉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11년 이왕가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이 설립되자 심전 안중식과 더불어 교수로 있으면서,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소정 변관식, 의재 허백련, 춘전 이용우 등 한국 근대의 전통회화를 주도하게 되는 화가들을 배출시켰다. 1919년 민족서화가들을 중심으로 서화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 안중식에 이어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여러 분야의 그림을 잘 그렸으나, 특히 산수화와 어해화에 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1900년대 이후인 말년의 작품이기 때문에 화풍의 변천과정을 추구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대체로 산수화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남종문인화풍에 토대를 두되 북종원체화풍의 요소를 가미하여 강직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임전 조정규의 화풍을 이어 즐겨 다루었던 어해화들은 대상의 생동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필치의 활력보다는 정확성에 더 심혈을 기울여 사용한 꼼꼼하고도 날카로운 필선들로 이룩되어 있다. 어해화에서 보여준 이러한 화풍은 서화미술협회 시절 그의 제자들에게로 계승되어 이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심전 안중식과 더불어 조선시대 말기의 전통회화를 근대화단으로 이식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심전 안중식은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고 12세 때 부모를 모두 잃은 사실 외에는 그의 어린 시절이 알려져 있는 것은 없다. 1881년(辛巳年)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신식군대의 조련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던 김윤식의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소림 조석진과 더불어 천진에서 1년간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이때 알게 된 소림 조석진과는 평생을 친구로 사귀며 당대 화단의 쌍벽을 이루게 된다. 1902년 어진도사로 조석진과 더불어 화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드높였다. 어진도사 이후 그의 화실인 경묵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11년 이왕가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이 설립되자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의 서화미술원 출신으로는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소정 변관식, 의재 허백련, 춘전 이용우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전통회화를 이끌게 되는 대표적인 화가들이 된다. 1919년 민족서화가들을 중심으로 서화미술협회가 결성되자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 서화계의 주도적 인물로 추앙되었다. 회장으로 추대되기 두 달 전인 4월 초순 삼일운동과 관련되어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 회부되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한채 그해 1919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서양식의 데생법으로 대상의 특색을 정확하게 다루었던 기명절지화에도 능하였지만, 그의 화풍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산수화에 있다. 그의 산수화는 대체로 정형화된 남종문인화풍과 북종원체화풍의 청록산수화, 그리고 남북종절충화법의 세가지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화풍상의 변천상으로 볼 때 1910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경물을 공간 가득히 채워 밀폐시키는 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전기의 화풍은 그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오원 장승업의 화법을 그대로 따랐으며, 후기에는 남북종이 융합된 절충화풍을 토대로 하여 원숙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화풍은 서화미술원의 제자들을 통해 근대 한국의 전통화단으로 이어진다.
■조선말기의 오원파산수화■
Owonpa Landscape Painting
of the Chosun Late Period
▣장승업:방황자구법산수도▣
▣조석진:수포고촌도▣
▣안중식:도원문진도▣
첫댓글 좋은 자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