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규원사화/단군기.제1세 왕검> 기록 일부다.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다.
지금의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다.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은 모두 `소머리`란 뜻이며 음이 서로 비슷하다.
...
이명이 말하기를, 속말수 북쪽에 발해 중경 현덕부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단군이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이기 때문에 임검성.곧 평양이라 했다.
북으로 상경 홀한성을 가려면 육백 리이다.``
위 추정도와 같이 요하문명은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왕검조선.단군부여 백성들이 일군 문명이다.
결코 중국 시조 황제 헌원 백성들의 문명이 아니다.
왜일까?
신채호.계연수 교시와 같이,
고대의 요하는 란하였고 패수는 란하였기 때문이다.
즉 한 시기의 요동군 위치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지금의 란하 중류 2 개의 승덕 표시 지역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승덕을 경유하는 서북쪽 지류가 1250 리 길이 대요수, 정북쪽 지류가 2100 리 길이 염난수인 것이며,
송 시기 이후 대요수는 황하로, 염난수는 요하로 개칭되어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명칭과 위치에 변동이 없었다.
물론 패수는 1910 년대 일본놈이 주장하는 지금의 란하 본류는 아니다. 중류 동쪽의 작은 지류였을 뿐이다.
이러한 지리를,
1870 년대 초부터 일본명치왕 참모부가,
란하 상류와 황하 중류를 연결하고 란하 중.하류와 황하 상류는 삭제하여 란하라 표시하는 등의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하였고 이후 만주국지도와 현재의 중국전도에까지 공식 표시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식민사관을 정의한다면서 당파성.정체성 등 핵심과 동떨어진 규정이나,
고려 시기 요하를 압록강이라고도 했었다며 지금의 요하를 고려 압록강이라고 주절대는 등신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중국의 동북공정 대처와 관련해서도,
100 여 년 전인 청국이 멸망한 1911 년 당시의 요하를 묻는 것 만으로도 상식과 양심 있는 중국인들은 손을 들고 말 것이니,
소위 재야 연구가들도 연구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