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매개로 하여 정신작용을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여타의 생명체와 변별된다. 이 때의 정신작용은 보통 세 개의 영역을 갖는다. 본성과 감성과 이성이 그것이다. 본성은 하단전에 토대를 두고, 감성은 중단전에 토대를 두며, 이성은 상단전에 토대를 둔다.
이러한 논의는 본성이니 감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정신작용의 토대가 인간의 육체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별개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육체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 정신이라고 해야 옳다. 여기서 육체라고 하는 것은 온몸을 가리킨다. 온몸이 詩作을 이루는 정신작용의 토대지만, 그것이 구체화되다 보니 예의 영역을 갖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때의 영역과, 그에 따른 명칭이 구체적인 정신작용의 과정에 매번 명확하고 분명한 형태로 현현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각각의 경계가 모호하고, 따라서 다소간은 상호 착종되어 드러나는 것이 인간의 이들 정신작용이다.
인간의 정신작용, 즉 이성과 감성과 본성이 이처럼 상호 착종되어 드러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비록 세 가지 명칭의 영역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성장해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뿌리는 식욕과 성욕을 바탕으로 하는 본성을 가리킨다. 물론 본성은 인간의 육체가 갖는 본능과 관련되어 있다. 겉으로 현현되는 욕망은 다기하지만 그것의 근저에는 식욕과 성욕이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견해는 자명하다. 기본적으로는 프로이드가 말하는 리비도(lybido)에 상응하는 것이 식욕과 성욕에 기초하는 인간의 정신작용, 즉 본성이다. 따라서 리비도의 억압과 승화가 예술적 심리를 형성하는데 관여하는 것처럼 본성(본능)의 억압과 승화도 예술적 심리를 형성하는데 관여한다고 해야 옳다.
본성을 이루는 식욕과 성욕이 언제나 동일한 내포를 갖거나 동일한 방향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성욕과는 달리 식욕은 완벽한 억압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십분 개별성을 지닌다. 성욕을 억압했을 때와는 달리 식욕을 억압했을 때는 생명 자체가 지속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식욕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체험, 즉 가난에 따르는 굶주림의 체험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가를 알면 이는 좀더 분명해진다.
일종의 기질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본성은 개개의 존재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르기 마련이다. 크기와 형태가 다른 만큼 억압을 느끼는 정도며 억압에 대한 반응의 태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본성이 갖는 이러한 개별성이야말로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실제로는 본성으로부터 불거져 나오는 것이 감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감성은 본성으로부터 불거져 나오는 과정에 다양한 자극을 경험하는 것이 보통이다. 본성의 '억압'도 실제로는 그러한 과정에 작용되는 자극의 하나이다.
본성의 억압은 독특하면서도 왜곡된 감성, 즉 심미적 감성을 탄생시키는 계기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좀더 관심을 끈다. 여기서 말하는 심미적 감성이 예술적 정서를 뜻하고, 나아가 시적 서정을 뜻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시적 심리와 관련하여 심미적 감성에 좀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본성에서 불거져 나온다는 것이 감성이라는 것은 감성이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중단전에 토대를 두고 있는 감성이 하단전에 토대를 두고 있는 본성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저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본성과 착종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감성이라는 얘기이다.
감성과는 달리 식욕과 성욕으로서의 본성은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실제로 표현되는 감성은 온혈동물이나 인간 등 얼마간은 고급한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는 정신능력이라고 해야 옳다. 감성을 지니게 되면 언어를 매개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기본적인 정신작용을 할 수 있고, 저급한 형태로나마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감성을 지니고 있는 생명체는 그렇지 못한 생명체보다 결코 많지 않지만 말이다.
인간은 본성으로부터 분리해낸 감성을 언어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여타의 생명체와 변별된다. 이 때의 감성은 당연히 이성이 분화되기 이전의 본원적인 형태로서의 감성을 가리킨다. 물론 이성이 분화되기 이전의 감성은 언어 등을 통해 표현될 경우 과학적이고 수리적인 엄밀성을 갖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이 때의 감성은 아직 이성이 혼재되어 있는 다소간은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정신작용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온혈동물 등 다소간은 고급한 여타의 생명체와 인간이 변별되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능력을 갖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기본적으로는 정신작용의 하나로서 이성을 함유하고 있는 감성도 인식능력의 하나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성이 분리되어 있는 감성도 인식능력의 하나이지만 이성이 아직 미분화되어 있는 감성도 인식능력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성이 미분화되어 있는 감성은 서정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점에서 좀더 주의를 요한다. 서정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것은 이 때의 감성이 세계와의 통합을 꿈꾸는 일치의 정서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치의 정서가 시적 정서, 곧 예술적 정서를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보통의 인간은 이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감성보다는 이성이 분리되어 있는 감성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본성으로부터 분리된 감성으로부터 다시 이성이 분리된 조금은 복잡한 정신작용의 체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다. 감성으로부터 분리된 이성을 갖고 있는 존재는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이 이성을 매개로 하여 지금의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왔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정신작용, 곧 지적활동은 근대에 이르러 과학이나 학술의 형태로 정리되어 축적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작용은 순수한 이성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성이 미분화되어 있는 감성 또한 정신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성이 활동하며 형성하는 정신작용은 대부분 예술이나 기술의 형태로 정리되어 축적되고 있다. 이성이 미분화된 감성이야말로 예술이나 기술을 이루는 정신작용의 토대인 것이다.
예술의 토대를 이루는 감성은 심미적으로 잘 가공된 정서라는 점에서 일상의 평범한 감정과는 구분된다. 이 때의 심미적 감성도 식욕과 성욕을 바탕으로 하는 본성으로부터 불거져 나온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식욕과 성욕으로서의 본성에 관한 억압은 잘 승화되어 아름답게 가공된 심미적 감성으로 현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형태로 식욕과 성욕으로서의 본성을 억압당해본 사람이 오히려 독특하고 개별적인 예술적 감수성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식욕과 성욕으로서의 본성에 대한 어떤 형태로든 억압을 체험하게 될 때 그에 상응해 심미적 감성을 밀어 올린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억압은 결핍을 뜻하거니와, 식욕과 성욕으로서의 본성이 심각하게 결핍될 때 주체의 인지영역 안에 개별적이고 특수한 감성이 형성된다는 것은 일상의 체험으로 보더라도 명확한 사실이다.
따라서 시적이거나 예술적인 심리를 산출시키는 정신작용은 순수이성이거나 순수감성이기기보다는 이성이 함유되어 있는 감성, 즉 다소간은 불순한 감성이라고 해야 옳다. 이처럼 불순한 감성이 시적이고 예술적인 심리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형성하는 이성과 감성의 조합에는 사람마다 상당한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성이 강화되어 있는 서정적 심리도 있을 수 있고, 본성이 강화되어 있는 서정적 심리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감성 자체가 강화되어 있는 서정적 심리도 있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모든 정신작용이 구체적인 외적 대상의 자극을 통해 발현된다는 점이다. 이 때의 외적 대상은 서정적 심리의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세계를 가리킨다. 현실의 세계가 주는 자극이 없이 활동하고 운기(運氣)하는 정신작용은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세계에서 비롯된 자극과 반응의 결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이 때 자극을 행사하는 주체는 인간 저 자신일 수도 있다.
서정적 심리를 활동시키고 운기시키는 현실의 세계는 자연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생활로 존재하기도 하고, 관념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시인 밖의 현실의 세계가 본래 이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적 심리를 탄생시키는 자질 가운데 현실의 세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서정적 심리를 운동시키고 그것을 시라는 언어예술로 드러나게 하는 정신작용, 즉 '이성이 미분화된 감성'은 본성과 감성과 이성과 현실의 세계가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구체화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본성이 좀더 강화되어 있는 감성, 감성이 좀더 강화되어 있는 감성, 이성이 좀더 감화되어 있는 감성, 현실의 세계가 좀더 강화되어 있는 감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기존의 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이를테면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서의 특징에 따라 1) 본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감성, 2) 감성 위주의 감성, 3) 이성을 포괄하고 있는 감성, 4) 생활과 현실 위주의 감성을 기준으로 기존의 시가 지니고 있는 갈래를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본고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대전현역시인선집}에서도 별다른 파탄 없이 확인이 된다. 다름 아닌 이 네 가지 기준을 통해 {대전현역시인선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을 검토하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들 기준을 매개로 하여 각각의 시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점검하는 일이 그간의 논의에서 이루어온 갈래 체계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형성된 갈래 체계 또한 시를 구성하는 다양한 자질을 토대로 하여 구체화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본고에서의 시에 대한 접근방식이 조금은 새로운 시각을 갖는 갈래 체계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2. 순간 혹은 직관의 절대정신
'본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감성'은 본래의 본성이 그러한 것처럼 직접적이고 순간적 활기를 바탕으로 한다. 시적 주체의 인지영역을 치고 들어오는 촌철살인의 직관과 영감이 정서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정신작용의 시가 갖고 있는 특징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에는 세속의 논의에서 말하는 주제나 의미가 존재할 틈이 없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 때의 시에서는 별다른 가치를 갖지 못한다. 활기 있게 움직이는 언어 자체가 뿜어내는 심미적 아우라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이 이러한 시가 지니고 있는 특징이다.
폭발하는 언어의 運氣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시는 기본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토대로 하는 본성의 순간성에 상응한다. 따라서 본성과 맞닿아 있는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시는 식욕과 성욕으로 상징되는 본능의 卽物性과 맥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들 시가 더러는 음식의 이미지나 성애의 이미지를 동반하는 것도 그러한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직관이나 영감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시의 정서는 靈的 活氣를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절대정신에 가 닿고자 하는 것이 이들 시가 지니고 있는 언어의 運氣라고 할 수 있다. 독특한 리듬과 어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절대정신의 경지에서 세속적 의미나 주제를 찾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어리석은 일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저문 날
설핏설핏
눈이 내린다. 이맘때면
고향집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서던 어둠.
찬바람이 개울 건너 잠들면
눈이 내린다.
떠난 모든 것들이
돌아와 내린다.
-강신용, [첫눈] 전문
이 시에서 이성의 정신작용에 따른 의미나 주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저문 날" "눈이 내"리는 "고향집 사립문"과 사립문 밖의 "개울가"의 풍광만이 모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에는 심미적 본성이 작동하여 만드는 의미밖의 서정적 울림만이 절대적 형상으로 드러나 있을 따름이다. 물론 이 때의 절대적 형상은 미래 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 지향적이다. 따라서 이 시는 의미 밖의 전통적 서정의 모습을 띠고 독자들을 심미적으로 자극하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이 시에 비해 다음의 시는 이미지의 전개가 훨씬 비현실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비의적이고 환상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좀더 현대적인 감수성을 토대로 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미역을 빤다
생일 미역을 빤다
잔잔한 수면에 파도가 일고
바다가 범람한다
해일도 고래도 상어떼도
조랭이에 건져내는
어머니의 바다
어머니는 바다를 조물락댄다
파도에 밀리는 날치의 은빛 비늘
갯마을 저 멀리
휘늘어지는 미역
가닥 사이로 멀어져가는
똑딱선 하나
-변재열, [바다의 꿈] 부분
이 시는 유추의 기법을 통해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어 좀더 주목이 된다. 유추의 기법은 이미지의 전개방식을 비약과 생략에 두고 있어 흔히 독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당황하게 한다는 것은 낯설게 한다는 것이니 만큼 새롭게 한다는 것과도 통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시에서 생성되는 새로움이 특별한 의미나 주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비약되고 생략되는 가운데 전개되는 가운데 드러나는 현란한 이미지만이 독특한 시적 분위기, 곧 서정적 아우라를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에 함유되어 있는 정서적 분위기는 다분히 전통적인 소재에서 비롯된다. 어머니라든가 미역 등 전통적 소재에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것이 이 시의 중심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소재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별로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다.
이들 전통적 이미지의 전개과정에 어떤 이성적인 운산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분히 본능적인 무의식이 작용하여 예의 이미지들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의 이미지의 전개과정에 작용하고 있는 무의식과,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가 이 시를 이 시답게 만든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시를 이 시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는 예의 이미지의 전개과정 자체가 보여주는 개성 있는 분위기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유추를 통해 전개되는 이 시의 이미지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무의미한 절대정신에 가 닿는다. 다음의 시 '나무못'은 절대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얼마간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나무못은 녹슬지 않는
부드럽고 견고한 침이다
이 땅 위에
벌어지지 않는 가슴과 가슴
어디 있다든가
틈을 찾아 따뜻하게 박힌
절집의 나무 못
볼수록 다정하다
사람의 벌어진 가슴을
채울 수 있는
나무 못
또 어디 없는가
반짝이지 않아도 좋을,
-박명용, [나무못] 전문
이 시에서 나무못은 하나의 사물이면서도 존재이다. 사물이라는 것은 그것이 가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뜻하고, 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내부에 본질을 거느리는 상징이라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이 시에서 나무못의 현상은 저 자신의 내부에 본질을 거느리는 상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거느리는 모든 현상은 언제나 일정한 내포를 갖기 마련이다. 이 시에서도 나무못의 이미지는 그에 합당한 내포를 갖는다. "벌어지지 않는 가슴과 가슴" "틈을 찾아 따뜻하게 박"히는 기능과 연결되어 의미를 갖는 것이 이 시에서 나무못의 이미지이다. "절집의 나무 못"처럼 "사람의 벌어진 가슴을/채울 수 있는" 어떤 존재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나무못인 셈이다.
따라서 앞의 시들과는 이 시는 달리 무의미의 밖에서 궁극적인 가치를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궁극적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사람살이의 지혜에 맞닿아 있는 무엇을 가리킨다. 순간적인 직관으로 꿰뚫는 '나무못'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사람살이의 근원적 지혜를 뜻한다고 해야 옳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에서는 다름 아닌 그것이 절대정신으로 존재한다.
3. 순수감성 또는 전통서정
본성은 자발적이면서도 자율적인 기의 작용이다. 따라서 본성은 완벽하게 통제되거나 차단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자체로 이미 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성의 활동에 비해 감성의 활동은 훨씬 걸러지고 다듬어진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에 비해서는 감성이 본성에 훨씬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본성에서 맨 처음 불거져 나온 것이 감성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성에 비해서는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본성에 비해서는 훨씬 정제되어 있는 것이 감성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이래 감성은 그 자체로 인식능력의 하나로 취급되어 온 바 있다. 물론 감성은 과학이나 학술보다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인식능력이다. 감성은 상상력이나 형상사유라는 이름으로 개념화되면서 근래에 이를수록 더욱 많은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이해력이나 개념사유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성과 상호 부조하면서 마음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감성이기 때문이다.
감성은 문학이나 예술, 특히 서정시의 창작과 향유 과정에 좀더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인식능력이다. 하지만 퓨전을 경험하지 않은 순수감성의 인식능력이 작용되는 예는 서정시의 경우에도 별로 많지 않다. 앞에서 '본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감성'의 입장으로 논의를 마련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서정시의 실제에서 순수감성 자체에 기초하거나 순수감성 자체를 추구하는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순수감성에 기초한 심미적 세계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서정시 본래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이러한 순수감성은 오히려 전통서정이라는 이름으로 저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오고 있다. 고향이나 자연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들 순수감성의 시는 새롭고 참신한 이미지나 정서보다는 낡고 진부한 이미지나 정서를 고집함으로써 개별성을 추구하는 예가 없지 않다.
가파른 천둥지기에도
누렇게 벼는 읽어가리.
외롭다 말라
산골 햇볕은
얼마나 찬찬한가.
작은 창자 채우려
몰려온 참새 떼
오히려 무료를 달래주고 있지 않느냐.
하늘만 쳐다보다가
지금은 벼가 익고 있다.
남루함이여
시름은 털어버려라.
황금빛 저 익어 가는 것
그것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일 아닌가.
-임강빈, [허수아비] 전문
자족한 마음으로 고향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시인의 자연 친화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 시에서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것은 외롭지도 무료하지도 남루하지도 않은 시인의 감성이 불러일으키는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이다. 분별이나 갈등이 없이 자연과 통합되어 있는 시인의 본연지성이 불러일으키는 초연하고 초탈한 정서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시인 셈이다.
아직은 자연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이 시로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수감성이 산출하는 소박하고 담백한 전통의 정서이다. 따라서 이들 정서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시의 내용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의미나 주제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의미나 주제보다는 전통적 서정 자체를 산출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산출되는 전통적 서정은 다음의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이슬을 행주질하고
봄보리랑 눈정情 나눈
햇살이 내울 건너
열리는 마을
산 66번지 바람에
밀리고 밀리는 둑새풀이여
참새들은 풀파도를 타고
달구지 길 따라
산사山寺의 염불 내리고
시킴굿 무녀巫女인 양
춤추고 학鶴두루미
학鶴춤에 고부라졌던 해가
소나무에 걸려
노을가루가 날린다
-정진석, [용산리] 부분
이 시는 "이슬을 행주질하고/봄보리랑 눈정情 나눈/햇살이 내울 건너/열리는 마을"의 풍광에서 묻어 나오는 서정을 담아내는 데 초점이 있다. 물론 이 때의 풍광은 용산리라는 농촌 마을을 공간으로 하고 있고, 독새풀이 바람에 밀리는 봄날을 시간으로 하고 있다. 이들 시공간이 만드는 풍광은 달구지, 산사, 무녀, 학, 해, 소나무, 노을, 들녘, 어스름, 청솔, 바람, 달빛 등의 사물에 의해 좀더 즉물적인 서정으로 전이된다.
이들 사물과 함께 하는 즉물적인 서정은 그야말로 전통적이다. 여기서 전통적이라는 것은 상실된 지 이미 오래인 고향을 정서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향의 정서, 곧 향수는 언제나 그리움의 정서를 거느리는 가운데 발현되기 마련이다. 기다림의 정서와 함께 낭만적 정서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리움의 정서이다. 낭만적 정서는 본래 이곳이 아닌 저곳을,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향의 정서, 곧 향수도 이곳이 아닌 저곳, 현재가 아닌 과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심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도 알 수 듯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곧 향수는 고향을 완벽한 세계, 즉 이상의 공간으로 회억하기 일쑤이다.
내 고향의 바람 속에는
나무 잎새들이 흔들리는 시냇물 소리
은빛의 물결 타고 흐르는 세월이 있다
내 고향의 바람 속에는
풋고추 익어 가는 빛깔 알싸한
고추잠자리 나래 가지런히 하늘이 있다
-박상일, [청양] 부분
이 시에서 고향은 "나무 잎새들이 흔들리는 시냇물 소리"와 "은빛의 물결 타고 흐르는 세월이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풋고추 익어 가는 빛깔 알싸한" 곳, "고추잠자리 나래 가지런히 하늘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곧 향수의 심리에는 이처럼 완벽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자리해 있다.
한 개인의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세계는 누구에게나 유년의 공간을 통해 유추되기 마련이다. 유년의 공간은 주체가 타자와 분리되기 이전의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분리되기 이전의 주체에게 가장 행복한 공간, 곧 완벽한 세계는 유년의 시기 중에서도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의 세계, 곧 상상계라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개인사와 관련하여 상정할 수 있는 좀더 완벽한 세계는 태중의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라고도 해야 마땅하다.
이처럼 미분화된 세계는 어머니와 함께 하던 세계, 곧 자연과 함께 하던 세계이기도 하다. 자연을 가리켜 흔히 어머니라고 하거니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자신의 생명을 마치면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연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근원적 고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하더라도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면 누구나 회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회한 또한 특별한 의미나 주제를 갖지 않는 전통적 정서의 하나라고 해야 마땅하다.
노송老松 우거진 기슭에
어머니를 묻고
산을 내려왔다
산새가 이따금 푸득거리고
꽃의 향기가 하얗게 날렸다
짙게 그늘이 깔린 길
노송은
등 굽은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장희, [황토 길] 부분
이 시에는 "노송老松 우거진 기슭에/어머니를 묻고/산을 내려"오면서 느끼는 시인의 막막한 감회가 담겨 있다. 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어머니를 묻고 산을 내려오면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시인의 쓸쓸함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3행 이하의 구절에서 조금은 낯설고 어색하게 산새, 꽃의 향기, 노송 등의 이미지를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확인이 된다.
하지만 이 시에 느낄 수 있는 정서가 크게 새롭거나 신선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쓸쓸하고 불투명한 정서 역시 익숙한 전통적 정서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이 시 역시 전통적 서정 그 자체를 위주로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록파의 시들로부터 맥을 이어온 전통적 서정의 시들, 즉 감성 자체의 심미적 아우라를 추구하고 있는 시들이 남긴 문학사적 의의는 크다. 시적 서정이 어떻게 심미적 감동을 산출할 수 있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것이 이들 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시는 자칫 낡고 진부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좀더 독특하고 기발한 서정적 아우리를 창출하기 위해 이들 시에게도 끊임없이 새로운 모색과 실험이 요구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4. 인생과 자연의 리얼리티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정신작용은 오직 무구하고 깨끗한 감성 자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미적으로 발현되는 감성의 본원적 형태인 서정적 정서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이성의 개입 속에서 좀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다. 구체적으로 창작되는 당시에는 순수감성에 의지해 있다고 하더라도 퇴고의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이성이다.
구체적으로 창작되는 과정의 시적 심리를 보면 순수감성 그 자체에 의지해 발상되는 경우만큼이나 이성이 혼재되어 있는 퓨전의 감성에 의지해 발상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현대시에서는 감성을 중심으로 하되 충분히 이성을 받아들이는 퓨전의 심리에서 발상되는 시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성을 받아들이는 감성은 이성에 의해 감성이 끊임없이 단련되고 정련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성찰이나 반성의 정서를 낳기도 하지만 더러는 초월이나 초연의 정서를 낳기도 한다.
초월의 정서를 함유할 때는 앞에서 말한 절대정신으로 전이되는 예가 적잖다. 하지만 초월의 정서에서 비롯되는 절대정신은 인생과 자연의 본질에서 비켜서기 일쑤라는 점에서 감동을 잃기 쉽다. 시인의 도드라진 정신만이 세계로부터 유리된 채 우뚝 서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들 시이다.
이에 비해 초연의 정서를 함유할 때는 훨씬 더 인생과 자연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절대정신에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인생과 자연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정서와 함께 하면서 감동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이 때의 정서가 시적 주체의 이성에 의해 철저하게 절제되고 통제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생과 자연의 본질'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현실의 세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에 의해 파악되고 터득되는 인생과 자연이 함유하는 내적 진실을 뜻한다고 해야 옳다. 이렇게 하여 발견된 내적 진실에는 시적 주체가 체험하는 깊은 고난과, 그에 따른 독특한 정서가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산된 시의 정서는 설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마냥 어둡고 시리지만은 않다는 특정을 갖기도 한다. 어둡고 시리면서도 밝고 따뜻한 설움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이들 시의 정서인 것이다.
예순쯤 살아온 강물은
조용 조용히 흐른다
가슴으로 뜨겁지도 않고
입술 파랗게 질리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강물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갈 뿐
단순한 기쁨 얼굴에 넘치고
강물은 밤낮을 잊어버리고 산다
거슬러 올라갈 생각 없이
아래로 아래로 오직 한 길
바다를 경건히 바라보며
단순한 강물은 그냥 넉넉하다
물새 따라와 외롭지 않고
물고기 함께 살아 가난하지 않다
바다의 마음 그리워하는
단순한 강물 도도하게 살아간다.
-신협, [단순한 강물] 전문
이 시에서 "예순쯤 살아온 강물은" 말할 것도 없이 시인 자신의 삶을 가리킨다. 이 때의 시인 자신의 삶은 "조용 조용히 흐"르는 시간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한층 주목이 된다. 세상의 일상으로부터 "가슴 뜨겁지도 않고/입술 파랗게 질리지도 않게" 초연히 살아가는 것이 시인 자신의 삶이라는 내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바다를 경건히 바라보며" "그냥 넉넉하"게 흐르는 "단순한 강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말 속에는 이루지 못한 꿈이 만드는 알싸한 회한이 담겨 있다. "물새 따라와 외롭지 않고/물고기 함께 살아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믿겨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보다는 "바다의 마음 그리워하는/단순한 강물"로 "도도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야 옳다.
이처럼 이 시에 함유되어 있는 회한의 정서에는 이성의 정신작용이 만드는 반어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그가 이러한 내적 진실을 담게 되는 데는 아마도 저 자신의 희망과 무관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짐승의 삶을 방불케 할 정도로 세속적 욕망이 들끓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최소한의 인격조차 지키기가 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시인으로서는 이렇게 각축하는 삶의 현실로부터 한 발 빼고 싶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모든 시인이 다 이처럼 반어적 이성을 움직여 인생과 자연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훨씬 더 객관적으로 인생과 자연이 지니고 있는 내적 진실을 포착하고 있는 시인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를 깨닫고 있는 다음의 시들은 다름 아닌 이러한 맥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봄비에 젖지 않는 것들은 영원히 잠깨지 못하리
사통팔달 바람의 묵언 들판을 가로지르고
허물벗이 배암 초록눈박이 사슴 은행목 잔가지도
펄럭이는 책장 소리에 눈뜨고 귀 기울인다
지금 세례 받는 목숨들은 생의 내력을 더듬으며
동동거리는 종종걸음으로 성급히 내닫는다
보았는가, 푸른 물 혈관 타고 기어오르던 시간 이래로
우리 몸속 피를 덥히는 태양과 바람의 쉼없는 노동,
빛과 어둠이 굴리는 수레바퀴 틈에 끼어
달아나도 털어낼 수 없는 꽃 피고 싶은 마음
그 죄의 일곱 빛깔 무지개를 기다리며 봄비를 맞는다
-주용일, [입춘 그이후·1] 부분
목련이 돋아나고
산수유가 피어나고
벚꽃이 불을 터뜨리기 시작해서
갑자기 봄이 무서워졌다
겨울이 히말라야 만년설처럼 녹지 않는 마음인줄 알았더니
눈물을 흘리는 눈사람처럼
시간이 저절로 녹아서 나무들의 뿌리와 줄기로 흘러가더니
희고 노랗고 붉은 횃불을 든
이 모든 꽃들의 혁명이 무서워졌다
그 미묘한 신호와 암시에 중독된 검은 운명의 인생보다도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겨울이면서 봄이면서 여름이면서 가을인 당신
나무이면서 꽃이면서 잎이면서 열매인 당신
꽃들의 환한 시간 속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당신
-김백겸, [횃불] 전문
이 두 편의 시는 모두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로부터 비롯되는 봄의 경이감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앞의 시는 자연의 만상을 일깨우는 봄비에 초점을 두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 시에서 봄비는 "뿌리며 마음의 생장점에 발화 재촉하며/마른 겨울잠 씻어내" "허물벗이 배암 초록눈박이 사슴 은행목 잔가지도" "푸른 물 혈관 타고 기어오르"게 하는 '기운'으로 인식되어 있다. 시인에게 이 때의 기운은 "몸속 피를 덥히는 태양과 바람의 쉼없는 노동"이 만드는 결과이다. 이처럼 이 시는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를 일깨우는 봄비의 내적 진실을 추적하고 있다.
뒤의 시는 목련이며 산수유, 벚꽃 등이 피어오르는 순간의 경이감을 포착하고 있어 구체적인 공간감을 갖게 한다.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을 횃불이 타오르는 모습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이 시의 은유구조도 그러한 공간감을 갖도록 하는데 일조를 한다. 이 시에서 더욱 주목이 되는 것은 자연의 순환원리를 발견하는 데서 오는 경이감을 무서움의 차원으로 고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때의 무서움은 경외감을 가리킨다. 그가 경외감을 갖는 것은 "희고 노랗고 붉은 횃불을 든" "꽃들의 혁명"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겨울이면서 봄이면서 여름이면서 가을인 당신"이다. 여기서의 당신, 곧 "나무이면서 꽃이면서 잎이면서 열매인 당신/꽃들의 환한 시간 속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당신"이 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물주인 神이다.
다음의 시에서는 조물주인 신이 "바람 한자락"으로, "빛을 닮은 커다란 손"으로 상징화되어 있어 좀더 관심을 끈다.
손 저으면
마악 밑뿌리를 흔들며 가는
바람 한 자락이여.
빛을 닮은 커다란 손 하나가
또다시 서녘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말하라. 우리의 혼돈이
얼마나 건강한 눈물을 키워 왔는가를
이것은
통찰의 거울에 번지는 피
그대 등 뒤로 튕겨오르는
허망의 파도다.
영원의 기슭에서 밀려와
영원의 기슭으로 멀어지는 소리.
-손종호, [안개] 부분
이 시가 관심을 끄는 것이 " 빛을 닮은 커다란 손", 곧 조물주인 신을 깨닫고 있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안개로 상징되어 있는 혼돈의 인간 또한 깊이 있게 깨닫고 있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神의 질서와는 달리 "건강한 눈물을 키"우는 것이 인간의 혼돈이거니와, 그것도 결국은 "허망의 파도"일 따름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영원의 기슭에서 밀려와/영원의 기슭으로 멀어지는 소리"로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혼돈의 존재로서 인간인 것이다.
이 시의 시인이 인간을 이렇게 이해하는 데는 아무래도 기독교적 인식론이 깊이 자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질서와 혼돈, 신과 인간, 선과 악 등 기독교적 이분법으로 자연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시적 정서에는 이성의 정신작용이 깊이 개입해 있다. 시와 함께 하는 그의 인지영역에는 순수감성보다 이성을 포괄하는 감성이 좀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성을 포괄하고 있는 감성의 양상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연에 대한 태도가 훨씬 포괄적인 경우도 적잖은 것이 사실이다. 자연에 대한 태도가 포괄적이라는 것은 이분법적이거나 양자택일적이지 않고 다의적이거나 양가적이라는 뜻이다.
뻐꾹새 한 마리가
쓰러진 산을 일으켜 깨울 때가 있다
억수장마에 검게 타버린 솔숲
등치 부러진 오리목,
칡덩굴 황토에 쓸리고
계곡 물 바위에 뒤엉킬 때
산길 끊겨 오가는 이 하나 없는
저 가파른 비탈길 쓰러지며 넘어와
온 산을 휘감았다 풀고
풀었다 다시 휘감는 뻐꾹새 울음
낭지하게 파헤쳐진 산의 심장에
생피를 토해 내며
한 마리 젖은 뻐꾹새가
무너진 산을 추슬러
바로 세울 때가 있다
-김완하, [뻐꾹새 한 마리 산을 깨울 때] 부분
이 시의 씨앗은 "뻐꾹새 한 마리가/쓰러진 산을 일으켜 깨울 때가 있다"라는 구절이다. 나머지 구절은 이 구절이 부연되고 확장되고 매조지된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시의 씨앗에 함유되어 있는 내적 진실은 부분과 전체에 대한 자각에 그 초점이 있다. 부분으로서의 '뻐꾹새'와 전체로서의 '산'이 이루는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이 시에 포유되어 있는 내적 진실이라는 뜻이다.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이라는 자각이 다름 아닌 그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뻐꾹새'와 '산'이 이루는 관계를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에는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의인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기독교적 인식론이 자리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론이 일반화되는 데는 선불교의 논리, 곧 一則多의 논리가 크게 기여해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로부터 직관의 절대정신이라든지 전통적 서정 등을 감지하기는 어렵다. 이성을 포괄하고 있는 감성의 정신작용을 통해 인생과 자연의 배후에 자리해 있는 내적 진실을 깨닫고 발견하는 데 초점이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은 이 시 뿐만이 아니라 이 장에서 거론하고 있는 모든 시들에게 적용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 시가 목표로 하는 것은 시적 정서 자체가 아니라 시적 정서가 포획하는 인생이나 자연의 리얼리티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 생활과 현실의 발견
시의 정서적 특징이 오직 주체의 정신작용을 이루는 세 가지 토대가 현현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본성과 감성과 이성의 정신작용을 촉발시키는 외적 생활과 현실 또한 서정적 정서를 산출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의 정신작용은 본성과 감성과 이성의 어느 것에 토대를 두던 외적 자극으로부터 주체가 느끼는 반응의 형태로 운동運動하기 마련이다. 물론 주체가 능동적으로 세계에 접촉하여 외적 자극을 유도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따라서 세계에 의해 선택되든, 주체에 의해 선택되든 시적 정서를 형성하는 데는 외적 대상으로서의 생활과 현실도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활과 현실은 우선 시적 형상의 자질을 이루는 이미지의 원자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물론 시적 대상이 없는 시, 곧 시적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시를 탐구하는 예도 없지는 않다. 추상화된 의식의 흐름을 추구하거나 무의식의 혼돈을 추구하는 시가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본고의 대상인 {대전현역시인선}에서 그러한 시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한 시보다는 생활과 현실의 풍경이 좀더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시를 찾기가 좀더 쉽다고 해야 옳다.
이들 시는 시적 주체의 정신작용에 의한 정서적 변용보다는 생활과 현실의 풍경의 묘사 그 자체를 심미적 전략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들 시는 생활과 현실의 내적 진실이 담겨 있는 체험이 형상화되는 것을 훨씬 소중히 여긴다. 이들 시의 입장에서는 풍경의 선택이 곧 세계관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주체의 정신작용이 과도하게 개입되어 너절한 감상을 만들기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체험이 섬세하고 치밀한 화폭으로 그려지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이들 시이다. 따라서 이들 시는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작용에 상대적으로 좀더 의지한다. 감성 자체가 만드는 심미적 정서보다는 감성 밖의 생활이나 현실이 만드는 심미적 정서에 좀더 기울어져 있는 것이 이들 시이다. 이들 시는 주관적 감정이 과도하게 개입되어 너스레를 떨기보다는 시인 자신의 체험이 포함된 객관적인 풍경이 그려지는 가운데 보편성이 획득되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두 시간 십오 분 동안 소설 한 권을 다 읽고
붉은 입술을 동백처럼 벌려 긴 하품을 하던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책장에 책을 꽂아 놓던
자주색 백에서 Anycall폴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서점의 무거운 공기를 살랑살랑 흔들며
문 밖을 나가던
그
여자
두 시간 십오 분 동안 그 여자만 지켜보았던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열 번도 더 그 여자와 연애하고 헤어졌던
저쪽 구석의
그 남자
-윤종영, [그 남자] 부분
이 시에는 "두 시간 십오 분 동안 소설 한 권을 다 읽고"서점을 나가는 여자와, 동일한 시간 동안 그 여자를 지켜보는 남자가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타자화되어 있는 객관적인 인물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 대한 묘사를 통해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현대인의 무료하고 권태스러운 삶의 풍속을 드러내려는 면도 없지 않아 보이지만 그것이 강렬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시인은 사물화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을 객관적인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 자체에서 의의를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정작 따져보아야 할 것은 시인의 자아가 거의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이 시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일단 이 시가 활기 있는 리듬과 어조에서 비롯되는 잘 정제된 주관적 서정과는 무관하게 발상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여자와 그 여자를 지켜보는 그 남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상황이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이 시이다.
다음의 시들은 체험의 밀도가 좀더 강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변별성을 갖는다.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이면우, [거미] 부분
회의 시간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미스 김이
자꾸만 자꾸만
다리를 떤다
규칙적으로
과장이 주절주절거리면
15회 가량
자신이 발언을 할 때는 쉼 없이
세우고 싶다
멈추고 싶다
-정덕재, [여운] 부분
'거미'와 관련된 체험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앞의 시이고, '미스 김'과 관련된 체험이 그려져 있는 것이 뒤의 시이다. 이들 시는 시인의 체험이 서술되는 전반부와, 그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이 서술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단 공통점을 갖는다. 전통적인 한시의 구성방식인 전경후정의 원리를 십분 응용하고 있는 것이 이들 시인 셈이다.
물론 앞의 시는 체험이 좀더 직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뒤의 시와 변명되기도 한다. 뒤의 시에 담겨 있는 체험이 앞의 시에 담겨 있는 체험보다 훨씬 관찰자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러한 주장은 앞의 시에 드러나 있는 체험이 더욱 허구화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시의 후반부에 드러나 있는 '정서적 반응'에서는 뒤의 시가 좀더 능동적으로 감성에 의지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세우고 싶다/멈추고 싶다"등의 구절에는 본능에 가까운 심리적 반응이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 시에 드러나 있는 체험은 나날의 생활과 현실에서 비롯된 것들로 매우 사실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한 특징은 관찰자적 체험이 좀더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다음의 시들에서도 확인이 된다.
미금 농협 앞에서 버스를 내려
작은 육교를 건너면
직업병으로 시달리다가 공원도 공장주도 던져 버린 흉물 공장
창마다 검게 구멍이 뚫린 원진 레이온 건물이 나올 것이다
그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젊은 버스기사와 야한 차림의 10대 아가씨의
푹 익은 대화를 들으며
종점까지 시골길 골목을 가야 한다
거기서 내려 세 집을 건너가면
옛날엔 대갓집이었다는 낡은 한옥이 나오고
문간에서 팔순이 된 이모가 반겨줄 것이다
-양애경, [이모에게 가는 길] 부분
붉은 대야 가득 새벽을 이고 오신 엄니는
시장 한 모서리
소화전 옆에 앉아 하루해를 팔고, 난
언제부턴지 그런 엄니의 모습을 피해
등하교 하는 버릇이 들었지
간혹, 눈길이라도 마주치는 날이면
불에라도 덴 듯
그 자리를 벗어나곤 했지
흐르는 세월 속으로
엄니의 붉은 대야는 무거워만 가고
다섯 식구의 목숨을 강물에 지고 평생을 사신 아비는
오늘도 새벽처럼 강가에 배를 띄우고
그 삶을 머리에 이고 떠난 엄니는
강물이 되어 돌아올 줄 모르는 지금
-이태관, [강] 부분
앞의 시에는 성년의 체험이 서술되어 있고, 뒤의 시에는 유년의 체험이 서술되어 있다. 앞의 시가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뒤의 시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 자신의 체험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과 관련해 생각하면 이들 시의 경우 완벽하게 객관적이지는 않다. 시인의 감성이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되면서도 이성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씌어진 것이 이들 시이기 때문이다.
앞의 시에서 시인은 경기도 미금에 살고 있는 늙은 이모를 찾아 가고 있다. 그 과정에 만나는 풍경들, 풍경들과 관련된 정서적 반응이 혼재되는 가운데 서술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엄마의 자매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적도 있는 늙은 이모는 무엇보다 육친의 정을 느끼도록 한다. 체험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 시에는 완전히 객관적인 외적 현실이 반영되지 못하다.
이러한 점은 뒤의 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뒤의 시에서 시인은 "시장 한 모서리/소화전 옆에 앉아"생선을 팔고 있는 엄마를 만나면서 겪은 체험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 만나는 풍경들, 풍경들과 관련된 정서적 반응이 뒤섞이는 가운데 전개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어린 시절 생선장수인 엄마를 만나면서 겪은 왜곡된 심리며, 왜곡된 심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 역시 완전히 객관적인 외적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이들 시는 객관적 체험과 주관적 정서가 상호 착종되면서 진행이 된다. 생활과 현실에 대한 이러한 반응은 다음의 시에서도 여실히 확인이 된다.
어데서 날아왔는지
매끈한 장판 위
날으려 애쓰는 풍뎅이 한 마리
잠시 쉬었다
다시 날개를 푸득인다
헛바퀴를 돌 뿐
내가 조금만 거들어 줄까 보다
조금만 거들어 주면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아 그러나 나도 풍뎅이처럼
제자리에 앉아
힘겹게 힘겹게 비잉비잉 돌 뿐이다.
-최원규, [풍뎅이] 부분
이 시는 "매끈한 장판" 위에 누워 "날개를 푸득"이는 풍뎅이를 소재로 삼고 있다. 이 때의 풍뎅이는 일상의 생활과 현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제재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보편성을 띤다. 물론 이 시에서의 풍뎅이는 자연의 사물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와 유사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풍뎅이가 일종의 객관상관물로 기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풍뎅이에 대해 "내가 조금만 거들어 줄까 보다/조금만 거들어 주면/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하고 연민을 갖는다. 하지만 그러한 연민은 구체적으로 실천되기 직전에 시인 자신에게로 되돌려지고 만다. 자기 자신도 풍뎅이와 마찬가지로 "제자리에 앉아/힘겹게 힘겹게 비잉비잉 돌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풍뎅이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와 그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이 교차되면서 서술되는 특징을 갖기도 한다. 다음의 시는 이성적 관찰과 감성적 반응이 훨씬 구체적으로 활동活動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나는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가끔 감격하고 가끔은 울기도 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 인생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 때문이다. 그러나
눈물 흘리는 쪽은 언제나 아내일 뿐
나는 마음과는 달리 눈물 흘릴 수 없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삭막한 사람이라 한다
굶주리다 못해 제 새끼를 삼켜버린 후에
뉘우치고 마음 아파해도 울 수 없었다는
늙은 악어처럼, 왠지 나도 눈물 흘릴 수 없다
-도한호, [눈물] 부분
이 시는 시인이 내면이 좀더 직접적으로 고백되고 있는 점에서 앞의 시와 변별된다.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느끼는 정서를 가감 없이 토로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처럼 외적 대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내적 의식을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시는 시인의 자아가 좀더 섬세하게 운용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물론 이 때의 자아는 감성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독특하고 특별한 감성이 작동되면서도 철저하게 이성이 작동되는 것이 이러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심자가 이러한 방식의 詩作을 선택했을 때는 완성도를 높이기가 쉽지 않다. 초심자에게는 시적 대상으로 선택하는 자신의 내면 의식을 완전하게 제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인의 내면을 고백하는 시는 본래 고도로 발달된 감성과 이성이 동시에 작용될 때 활달한 언어의 운기와 함께 개성 있는 정서를 갖는 법이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시도 생활과 현실의 체험을 수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여타의 시들에 비해 적잖은 차별성을 보여준다. 체험 자체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체험에서 비롯된 감성을 이성으로 조정하는 가운데 진술되는 것이 이들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도 고백적 정서를 담는 시에는 고도의 지성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6. 현대시의 개혁을 위하여
지금까지 줄곧 논의해온 것처럼 서정적 심리를 탄생시키고 그것을 시라는 깨어 있는 언어예술로 드러내는 정신작용은 '이성이 미분화된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이성이 미분화된 감성'은 본성과 감성과 이성과 현실의 세계가 상호 길항하는 가운데 서정의 형식으로 태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성이 강화되어 있는 감성, 감성이 강화되어 있는 감성, 이성이 좀더 감화되어 있는 감성, 현실 세계가 강화되어 있는 감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는 기존의 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 더욱 주목이 된다. 기존의 시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서의 특징에 따라 1) 본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감성, 2) 감성 위주의 감성, 3) 이성을 포괄하고 있는 감성, 4) 생활과 현실 위주의 감성을 기준으로 갈래를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위의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대전현역시인선집}이 갖는 특징을 검토해온 바 있다. 돌이켜 보면 오늘의 현대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못한 만큼 서두의 가설에 비해 실제로 검토된 작품은 다소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점도 없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러한 결과가 산출되는 것은 예의 가설이 완전한 정합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대전현역시인선집}에 담겨 있는 정신작용이 지나치게 단조롭고 평이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갈래 기준이 {대전현역시인선집}의 구체적인 작품들에 적용되면서 특별한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정도에서는 충분한 의미를 갖고 검토되어온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크게 자랑하거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못된다. 이는 동시에 {대전현역시인선집}의 작품들이 이러한 분류 기준으로서는 도저히 포섭될 수 없는 정신작용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도 되지 않은가.
절대정신이며 전통서정, 인생과 자연의 리얼리티며 생활과 현실의 발견도 중요하지만 시가 갇혀 있는 물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갇혀 있는 물이 낡거나 썩는 것처럼 갇혀 있는 시도 낡거나 썩는 법이다. 젊고 새로운 시인의 젊고 새로운 시가 요구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젊고 새로운 시인의 젊고 새로운 시만이 기존의 시인과 기존의 시가 지니고 있는 고루하고 진부한 세계를 개혁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시인이라면 당연히 새로운 시가 태어나는 방법과 내용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뼈를 깎는 번민과 고통 없이 새로운 시인과 새로운 시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이 길이 기존의 시밖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새로운 시인과 새로운 시는 기존의 시인과 기존의 시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자질 중의 일부를 특화시키는 가운데 태어난다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존의 시인과 기존의 시 안에는 그때그때마다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중요한 자질이 자리해 있거니와,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고뇌하고 고민하는 시인이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리 만무하다.
기존의 시인과 기존의 시를 개혁할 수 있는 새로운 시인과 새로운 시는 미숙과 파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본래 모든 열정은 수난과 핍박을 거느리기 마련이거니와, 수난과 핍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우에도 기존의 시인과 기존의 시를 개혁할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는 오늘의 이 시대에 시인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용기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도의 용기만으로 한국시의 미래를 새롭게 건설할 수는 없다.
상징주의 시인 랭보는 일찍이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어의 모음에 "A 검정, E 하양, I 빨강, O 파랑, U 초록" 등의 색깔을 부여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각각의 자음의 형태들과 그것들의 운동을 터득하기까지 했고, 본능적인 리듬을 통해 언젠가는 모든 감각이 도달할 수 있는 언어를 창조하리라고 기대하기"까지 했다. 랭보에게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모국어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탐구 없이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은 緣木求魚에 불과하다. 한글 자모 24자에 대한 시인 나름의 치열하면서도 독특한 감각을 익히지 않고서는 관습적으로 존재해온 시인과 시를 개혁하기가 요원하다.
이번 {대전현역시인선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을 읽으며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탐구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익숙하게 보아왔던 소재를 익숙하게 처리하고 있는 평이하고 안일한 시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열정과 고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언제 다시 간행될는지 모르지만 다음의 {대전현역시인선집}에서는 일단 이러한 노력부터 만나고 싶다.
첫댓글 교수님! 안녕하신지요? 교수님의 평론을 읽으면 항상 머리 숙여집니다. 방학동안에 쉬시지도 못하고요?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