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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첫사랑회복(3) / “첫사랑 주님을 바라보라!”
+ 본 문 : 창 세 기 3장 8절 - 21절 (구약성경 4쪽)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멘!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신 후, 광고시간에 성도님들에게 숙제를 하나 내주었습니다.
“다음 주엔 거짓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설교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마가복음 17장을 여러분 모두 꼭 읽어 오세요. 딱 한 장입니다. 꼭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예배 설교시간에 “설교에 앞서 지난 주 내 준 숙제를 확인합니다.
마가복음 17장을 읽어 오신 분은 손들어 보세요.” 하고 숙제확인을 위해 물으셨습니다.
성도님들이 서로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사람이 손을 드니, 하나 둘씩 손을 들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합니다. “참 많이들 손 드셨네요. 하지만 마가복음은 16장까지 밖에 없습니다.
자, 그럼 이제 거짓말에 대해 설교하겠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에 재한 설교를 시작했답니다.
거짓말 숙제를 내주신 목사님도 거짓말을 했고, 성도님들 중 그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말은 죄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도, 이 거짓말이라는 죄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께 범죄 하였으면서도, 거짓말이라는 죄로 변명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여 용서받지 못하고, 거짓말만 늘어놓은 후,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한, 아담과 하와, 그들이 취한 거짓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 설교의 내용에 나오는 주인공인 아담과 하와, 곧 범죄 하므로,
첫 사랑을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는 바로 지금, 범죄 하므로 첫사랑을 잃어버린 저와 여러분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오늘의 설교 말씀을 들으신다면, 더 큰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습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을 피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떠난 것이 아니라, 범죄 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피하여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범죄 한 그들은 더 꽁꽁 숨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듣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그래서 우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일부러 산에도 가고,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면서, 그 음성 듣고 싶어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확신이 오면, 이런 찬양도 하잖아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고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네...”
그런데 죄가 들어오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을 피하여 더 꽁꽁 숨어버립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을 꿈에라도 만나고 싶어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면서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꿈에라도 하나님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어 다녔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께 숨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나무 사이에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안타깝게도,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죄는 나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 결과 죄는 나 자신을 가립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철저한 분리는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기에, 영적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께서 별세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의 유언이 너무 감동을 주는 내용이라, 유족들이 복사하고 코팅을 해서 조문객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답니다. 특별히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만 소개한다면, 바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나는 주님과 하나란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라.
그리고 하나이신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하여라. 무엇보다 첫사랑이신 주님을 잘 믿어라.”
정말 멋지잖아요. 우리도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과 하나 된 첫사랑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결코 죄를 짓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런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도 슬슬 피하여 숨는 부끄러운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범죄 한 아담과 하와가 왜 두려워하였습니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문장 그대로만 보면, 분명 아담이 두려워하는 것은, 발가벗은 것을 알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의 변명일 뿐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두려워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조건인데도 왜 두려워하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왜 두려워합니까?
우리 사람이 죄를 짓고, 우리의 첫사랑이어야 하는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왜 하나님을 떠나면 두려움이 찾아옵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영원한 생명 되신 주님의 날인데도, 성도라면 마땅히 여러분처럼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왜 예배의 자리를 자꾸만 피할까요?
죄를 짓고, 참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두려워 피하고 숨어버라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가끔은 교회에 오기 싫거나, 주일 오전예배로 만족해버린 때가 있을텐데,
그 원인은 우리가 죄를 지으므로, 참 생명이신 하나님이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범죄를 해서, 첫사랑이신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첫사랑 회복의 원리’ 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범죄 한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고, 그 앞에 나아와 회개하면 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면, 미쁘신 하나님은 기억도 아니 하시고 다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이레! - 준비된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말 그대로 첫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고 매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하나님께 내 자만심을 없애달라고 요청했는데, 하나님은 ‘아니야.
그것은 내가 없앨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하나님은 ‘아니야. 인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는 것이지’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나는 행복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하나님은 ‘아니야, 나는 복을 줄 수는 있지만,
행복을 느끼는 것은 너에게 달려있어.’ 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사랑을 회복하자고 범죄 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회복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믿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첫사랑의 대상임을 말입니다.
셋째로,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고맙게도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범죄 한 후 하나님을 떠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찾아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피하여 숨으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니, 하나님께서는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도 점점 멀리 하게 되고, 사람들과도 멀어집니다.
여러분! 하지만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닌데, 왜 거기 있느냐? 그러므로 지금 거기서 나오라!” 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있지 아니하고, 제 위치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차가 제 위치 벗어나면, 그건 사고입니다.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하면, 그건 분명 대형사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지 아니하고, 제 위치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보십시오. 남편이 남편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리를 벗어나면, 그건 범죄요. 그 가정은 불행해집니다.
아내가 아내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리를 벗어나면, 그건 범죄요. 그 가정은 불행해집니다.
자녀가 자녀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리를 탈선하면, 그건 범죄요. 그 가정은 어두워집니다.
성도가 성도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리를 벗어나면, 그건 범죄요. 그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 하나님의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숨은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네가 왜 거기에 숨어 있느냐?” “지금 왜 거기에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다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자기 자리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남의 자리, 은혜의 자리, 첫사랑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감사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그건 하나님의 부르심의 대상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누구를 부르시고 계십니까? 지금 멋진 첫사랑을 나누고 있는 의인입니까?
아니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죄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죄인을 부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 의인을 부르시고 계시지 않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버린,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죄인들을 만나고 싶어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 감사, 감사한 일입니까? 이게 바로 은혜요. 첫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피하여 꽁꽁 숨어버린 죄인들을 지금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성공한 사람들만 부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 아담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큰 공을 세운 사람도 부르시지만, 죄 짓고 부끄러워하고 있는 사람도 부르십니다.
지금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 첫사랑의 헌신을 잃어버린 사람을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지치고 고달픈 사람들을 향해서 “오라! 오라!” 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난 사람도, 주님은 지금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누가 먼저 찾았습니까? 아담입니까? 아닙니다.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먼저 찾아 주셨습니다.
포기한 인생, 버려진 인생, 실패한 인생을, 자신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찾아주십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실패한 베드로도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주님과의 첫사랑의,
자리를 떠나, 고기잡이로 다시 갈릴리바라로 돌아간 베드로에게까지도 주님께서는 친히 찾아주셨습니다.
아마 나일론(nylon)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아시는 분들은, 아마 아실 줄로 믿습니다.
거미줄 보다 가늘지만, 강철보다 더 강하다는 별명을 가진 것이 나일론이라는 실입니다.
누에의 비단이 중화문명을 만들었고, 목화의 면이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면, 나일론은,
20세기 문명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일론의 발명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그 이름도 못 지어, 2년 6개월간 애쓰다가 잘 안 풀려 “No Run” 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노런’ 이 “나이런” 으로, 나이런이 결국 지금의 “나일론” 으로 명명되게 됩니다.
바로 이 나일론이 유기화학자인 윌리스 흄 캐러더스에 의해서, 우연히 발명되어졌습니다.
그 조수 줄리언 힐이 쓸모없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여러 화합물질을 실험용 컵에 넣어,
가열하다가 유리 막대를 타고 거미줄처럼 가는 섬유가 올라왔는데, 그것이 나일론입니다.
이처럼 과학자들이 버린 화합물질이, 20세기의 문명을 새롭게 여는 나일론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은 쓸모없는 인생, 포기한 인생, 버려진 인생이라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택하였고, 택하였기에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사랑에 실패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시듯, 예수님께서 첫사랑에 실패한,
사랑하는 제자 시몬 베드로를 찾아오시듯,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성령의 불로,
모두 태워버리시고,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목적대로 존귀한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넷째로, 그런데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는 범죄 한 책임을,
그 누군가에게 떠넘기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핑계하고 변명합니다.
오늘 본문 11절, 12절 말씀입니다. /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그 책임을 하나님과 하와에게 떠넘기며 변명합니다.
아담은 ‘직접적으로는 하와 때문이요. 간접적으로는 하와를 주신 하나님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 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 책임을 자기가 아닌 모두 다 하나님과 하와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선악과처럼 먹지 못할 것을 만드셨을까요? 왜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그리고 오늘 우리를 위해서 먹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깊으신 그 은혜를 저버리고 범죄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시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에게 올무가 아니었습니다.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믿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그 교회 대학생들과 함께 버스 타고, 지방으로 수련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모처럼 목사님 옆에 앉았다가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십계명을 매우 싫어합니다.”
“왜 그런가?” “십계명에는 하지 말라는 말이 8가지나 돼요. 저는 자유를 좋아합니다.”
“그래? 그렇겠구만.” 그러면서 계속 버스 타고 가다가 모르는 곳에서 이정표를 만났습니다.
그 이정표에는 각각의 화살표시가 있었습니다. 부산, 대구, 광주로 되어 있는 이정표였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자네, 저 이정표들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나?” “예, 물론 고맙지요.”
“저 이정표들이 왜 고맙다고 생각하나?” “아. 그것대로 따라가야 우리 갈 곳을 가지요.”
“그렇지, 이정표가 고마운 것이지. 그것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길 어떻게 찾아가겠나?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 인생길에, 우리를 위해 십계명이라는 이정표를 주신 것이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은, 우리 인생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네.”
그렇습니다. 십계명이 그렇듯이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도 우리를 위한 이정표였습니다.
또 아담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여자 때문에 내가 죄를 짓게 되었다,” 고 말합니다.
좋을 때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요.” 라고 닭살 돋을 정도로 좋아 했잖아요?
그런데 이젠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이 여자가 내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과 하와를 원망합니다.
이처럼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아담 안에 죄가 들어오니, 아담은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도 다 잊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 하나님과 하와도 공격하므로,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관계가 깨져 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첫사랑이 깨진,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원망하고, 원인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정성껏 치료한 다음에,
환자가 어느 정도 건강하게 되면, 이제 이 환자를 퇴원을 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게 되는데,
이때 ‘이 사람을 퇴원을 시켜 돌려보내도 되는 것일까?’ 혹은 ‘아무래도 아직은 미흡한데,
아직은 돌려보내지 말까?’ 하고 망설여질 때, 환자의 정신건강 정도를 실험하는 방법을,
개발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 의사가 개발한 정신 건강 측정 방법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 환자가 있는 방에 수도 장치를 해놓고, 수돗물 수도꼭지를 적당히 열어놓는답니다.
그러면 수돗물이 계속 졸졸졸 흘러내리겠지요? 그렇게 물이 흘러 넘쳐 방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이게 될 정도가 되면, 정신병 환자에게 걸레를 주면서 방을 닦으라고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생각한 그대로 자기를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환자에게 걸레를 주고 닦으라고 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당연히 수도꼭지부터,
먼저 잠근 다음에, 엎드려서 방바닥의 고인 물을 닦습니다. 이 사람은 퇴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고, 계속 방바닥에 고인 물만 열심히 닦는 사람은 아직 아닙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여러분이 생각한 행동은 어떤 쪽이었습니까? 웃는 분들, 수상한 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지금 내가 당한 현실만 가지고 따집니다.
잘됐느니, 못됐느니, 살겠느니, 죽겠느니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원망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통찰해 들어가면서, 문제의 근본부터 고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치유되고 회복되는 좋은 결과를 기다립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그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먼저 나를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참된 성도라면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뱀과 선악과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1850년 1월 6일, 영국의 콜체스터 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 일로 한 젊은 형제가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그가 다니던 교회에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서,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소년은 여러 달 동안, 마음의 곤고함과 죄에 대한 괴로움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소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사였기에, 교회에서 자랐지만, 그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가 간 교회에서는 출타한 목사님을 대신하여 한 평신도가 서툴게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한 본문은 이사야 45장 22절의 말씀이었고, 제목은 "여호와를 앙망하라." 였습니다.
그 서툴게 준비한 평신도 설교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본문을 반복해서 외칩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나를 앙망하라는 이 본문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바라 보십시오.
지금 누구든지 그냥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면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설교하던 그 평신도 설교자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젊은이, 아주 피곤해 뵈는군. 젊은이도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그때 그 젊은 청년은 비로소 그 말씀에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더니, 믿음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믿음이 들어오면서
그 젊은 청년은 새로운 변화, 주님과의 첫사랑을 아주 뜨겁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이 바로 위대한 설교가로 명성을 떨친, 바로 스펄젼 목사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문을 열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구원의 확신도 없이 지금 예배드리는 분이 혹 있다면, 더더욱 마음을 열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아담처럼, 하와처럼 숨지 말고, 주님께 담대히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바로 지금 마음을 열고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지었다고 두려워하며 숨지 말고, 오히려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품으로 피하여 숨으십시오.
주님께서 나아와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모든 죄 다 사하여 주심으로 첫사랑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무슨 일에나, 가장 먼저 주님 바라보고,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주님께 나아와 주님 품에 안김으로, 거친 파도가 날 향해 와도 주님과 함께 날아오르십시오.
그래서 폭풍 가운데 몸과 마음과 영혼이 능력의 주님과 눈을 마주치고 서로 잠잠히 바라보는
주님과의 첫사랑의 행복한 교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