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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거의 모든 여자들의 집에는 화장대가 있다. 단칸방 구석에 조촐한 얼굴로 앉은 앙증맞은 화장대부터 제법 격식을 갖춘 안방에 우아하게 자리 잡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화장대들이 여자들과 함께 산다. 물론 그녀들의 집엔 숟가락도 있고 책상도 텔레비전도 있지만, 화장대는 각각의 사물이 지닌 고유성의 측면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여느 사물과 구별된다. 얼마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사물들은 중성적이다. 가구들의 세계도 그렇다. 그런데 화장대는 가구들의 계보 속에서 확실히 좀 튀는, 일종의 강렬한 성(性) 정체성을 지닌 사물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주인을 모르는 방에 화장대가 놓여 있다면 그 방의 주인이 남자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화장대를 보는 일은 그 집 창문에 달려 있는 커튼을 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화장대를 보게 된다면 십중팔구 우리의 상상력은 뭔가 다른 낌새를 채고 싶어 할 것이다. 내가 처음 화장대를 가져본 것은 이십대 중반에 막 접어든 때였다. 소소한 화장품이 한두 가지씩 생겨나면서 방 귀퉁이에 몇 장의 붉은 벽돌을 받침 삼아 쌓은 후 베니어판과 레이스 달린 탁상 보를 덮어 만들었던 작은 화장대가 생각난다. 그 위에 꽃모종처럼 수줍은 분통과 스킨, 로션, 립글로스, 빗, 머리핀들이 오종종 놓여 있었을 것이다. 화장대 위에 놓여지는 것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아련하게 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젊거나 늙은 엄마의 화장대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얼마간의 다사로움과 물기를 머금기 십상인 것처럼. 화장대 위의 사물들은 현실성과 비현실성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솔직하면서도 뻔뻔하다. 내숭 떨면서도 열렬하다. 냉정하면서도 얼마간 과장되어 있으며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몽상을 작동시킨다. 그것들은 고착된 경계에 익숙하지 않다. 그것들과, 그것들을 받쳐 안은 화장대는 현실의 경계를 지워버리거나 넘어서고 싶은 열망으로 꿈틀거린다. 그 열망의 심연에, 미추와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고 싶은 우리의 기나긴 무의식의 여정이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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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대를 가진 것은 이십대였지만 화장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화보에서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투탕카멘 왕의 황금 마스크를 보았을 때였다. 뜻밖에도 나는 그 마스크에서 충격적이라고 할 만한 어떤 미감, 다소 비극적인 육체성을 느꼈던 것 같다. 마스크 저편에 가리워진 죽은 자의 얼굴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이었을까. 열여덟에 죽은 젊은 왕의 얼굴은 아름다운 황금 마스크 저편에서 기이한 육체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듯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얼굴에 대한 상상은 더욱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책상 서랍 한쪽에 넣어놓고 가끔 꺼내보던 몇 장의 사진들 역시 대부분 인물들이었다. 책 속에서 오려낸 루이제 린저와 전혜린, 시몬느 베이유, 카프카, 카잔차키스의 사진들. 그들은 십대를 건너는 내 몽상과 동경의 그림자들이었다. 그리고 투탕카멘의 마스크가 그것들에 더해졌다.
파라오의 저주니 피라미드의 진실이니 하는 등속의 미스터리에 예민한 사춘기의 영향도 있었을 테지만, 무엇보다 그 황금 마스크는 아름다웠고 특히나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 눈이었다. 굵고 선명한 검푸른 선으로 그려진 그 눈은 강렬하면서도 이상하게 슬픈 눈이었고, 뜨고 있지만 밖을 보는 것이 아닌 눈이었다. 그 눈은 황금 얼굴 안쪽의 자신의 진짜 얼굴을 향해 있으며 실은 진짜 얼굴조차도 보고 있지 않은, 죽음을 통해 이미 소멸한 자기 얼굴의 내부를 헤엄치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특이한 형태로 휘면서 길게 그려진 눈썹과 눈꺼풀의 곡선, 나는 기이하게 화장된 그 눈에서 두 마리의 신비한 물고기를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길게 꼬리를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을 상상했을 수도 있다. 하여간 그 얼굴은 강렬하고 독특한 눈 화장으로 인해 물고기가 헤엄치는 심해가 되거나 꼬리별이 흐르는 우주가 되곤 했다. 투탕카멘의 마스크뿐만 아니라 이집트 벽화의 인물들은 대부분 그런 뉘앙스를 지닌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기이한 느낌을 주는 눈 화장을 하게 된 걸까. 그들이 눈 화장을 하는 방식은 두 눈의 강조라기보다는 실체의 왜곡에 가까운 듯하다. 그리고 그 왜곡은 기이한 비현실성을 낳는다. 그 비현실성은 그들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여겼던 죽음 너머에까지 아름다운 육체를 이끌고 가 닿고자 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애초에 그들의 화장은 생사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싶은 일종의 제의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공들여 아침 화장을 하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상상했을 것이다. 몽상하듯 가늘게 내려뜬 눈에 칠해지는 검은 미묵과 황금빛 피부와 향유냄새…. 각양각색의 화장품 단지들이 올려진 아름다운 화장대 앞에 앉은 젊은 왕의 얼굴은 태양신의 종자로 태어난 태생 자체로 이미 영원을 얻은 죽은 자의 얼굴이며 동시에 가장 강력한 산 자의 얼굴이기도 했으리라. 고대 이집트인들은 삶과 죽음의 혼융 속에서 아름다움을 꿈꾼 듯하다. 아니, 삶이라기보다는 죽음 속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그토록 기이하고 몽환적인 화장을 한 듯하다. 여하한 젊은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로 인해 촉발된 화장에 대한 내 관심은 예뻐 보이기 위한 치장이라기보다는 미궁처럼 십대의 감성을 자극하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환기하는 쪽이었던 것 같다. 십대를 지나면서 거의 누구나 죽음에 대한 막연하고도 낭만적인 페이소스를 경험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어느 바람 많이 불던 우울한 날 기어코 나는 언니의 눈썹연필을 가지고 화장대 앞에 앉아 꿈꾸는 물고기를 닮은 이집트인의 눈을 내 얼굴에 그려본 적이 있다.
화인(火印) 같은 유년의 기억들이 있다. 맥락이 없기 일쑤이면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것들은 뇌리에 찍혀진 순간의 시간 속에 단단히 봉인되어버린 듯하지만 실은 기억의 주체와 함께 성장한다. 그리하여 기억들은 개성이 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세계를 해석하는 무의식적 코드가 되기도 하고 해석을 넘어선 행위를 촉발하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기억은 질기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황금 마스크에서 기이한 육체성과 죽음의 미감을 느꼈다면 그 느낌의 아득한 저편에 질긴 기억 하나가 삐걱거리며 자가발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곱 살, 산 밑 마을인 당두마을에서였다. 모처럼 일찍 깨어난 어느 아침, 할머니는 조그만 경대를 열어놓고 머리손질을 하고 계셨다. 대접의 물을 발라가며 참빗으로 길고 성긴 머리채를 빗어 내리고 쪽을 지어 은비녀를 꽂으셨다. 주기적으로 들이던 검은 염색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백발에 비녀를 꽂을 때 두 손이 가늘게 떨렸을지도 모른다. 힘들어 한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다. 할머니의 아침 단장은 느릿느릿하게 시간을 거느렸다. 경대 서랍 속의 작고 납작한 흰 도자기 합을 열어 머릿기름을 조금 찍어 손바닥에 싹싹 문지른 후 가르맛길 양편으로 정성스레 바르셨다. 할머니의 화장대인 그 낡은 경대는 거울을 접어 닫으면 네모난 상자처럼 보였다. 작은 관곽 같은 그것에는 납작한 서랍이 달려 있었는데 서랍 속에는 참빗과 가르마타개, 기름함,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접어두는 기름 먹인 한지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작은 물동이를 인 할머니를 따라 아침 산보를 간 윗우물은 주로 먹을 물을 길어오던 곳이었다. 우물은 깊어 아이들에게는 두레박질이 금지되어 있었다. 몇 번인가 조심스럽게 두레박질을 하던 할머니가 두레박 속에서 무언가 건져 올렸다. 그것은 손가락 정도 굵기의 투명한 줄 속에 까만 알들이 점점이 들어 있는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도롱뇽 알이었다. 꽤 여러 줄이 한데 얽혀 마치 검은 점이 박힌 투명한 뱀의 똬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습윤한 아침 공기 속에서 적당한 햇빛을 받아 파르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이던 투명한 도롱뇽 알. 나는 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을 기억한다. 그 눈빛도. 다음 순간 할머니가 내게 저리 가 있으라고 손짓을 했던가. 내게 찰나의 미소를 보여준 할머니는 투명한 몇 줄을 우물 속에 다시 넣어준 후 나머지 하나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나는 순간 진저리쳤고 투명한 알주머니는 할머니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할머니의 정갈하게 쪽진 가르마가 내 시야를 가르며 현기증처럼 핑글 떠올랐다. 화장대 앞에서 정성들여 아침 단장을 하는 할머니와 도롱뇽 알을 삼키는 할머니, 맑은 물을 담고 출렁이던 검푸른 우물 바닥과 이끼 낀 우물가의 깊은 초록, 함부로 움켜쥐면 터져버릴 것 같은 투명한 도롱뇽 알주머니에 어른거리던 까만 점들, 도롱뇽 알을 삼킨 후 양손바닥으로 쪽진 머리를 단정하게 쓰다듬어 내리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 주름진 입가, 출렁이는 두레박…, 그것들은 동시적이면서도 아득한 시차를 지닌 듯한 기이한 시공간성을 띠며 내 마음에 깊은 화인을 찍었다. 나는 진저리쳤고 얼마 동안 할머니를 피했지만 누구에게도 내가 본 것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밀이 되었고 비밀은 내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무거워져 말로 발설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가치판단도 섣불리 들어설 수 없는 밀도로 정지한 풍경이 되었다. 이상한 것은,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을 먹어치우는 어른들을 끔찍하게 바라보곤 하던 내가 도롱뇽 알을 삼킨 할머니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진저리치며 우물가의 할머니를 바라보았지만 그 풍경의 질감에 대해 무어라 단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우물가는 미궁으로 내 마음에 갇힌 채 오래도록 어딘가를 향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다. 나는 왜 그 풍경 앞에서 그처럼 머뭇거린 걸까. 미궁이지만, 확실한 것은, 조그만 경대 앞에서 공들여 아침 단장을 하던 충분히 늙은 할머니의 육체가 없었다면 그 풍경에 대해 그처럼 관대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토록 징글징글한 생에의 욕망이 죽음의 그림자를 공기처럼 거느린 이미 늙어버린 육체로부터 발현될 때, 더구나 경대 앞에 앉은 노구의 뒷모습과 겹쳐질 때, 마음의 풍경은 복잡해진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 이 화인을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기묘한 슬픔과 그로테스크한 미감의 기원에는 할머니의 낡은 화장대가 유적처럼 앉아 있다.
화장대 앞에 앉은 사람을 보는 것은 언제나 조금쯤 특별한 미감을 자극한다. 육체에 수용되기 위해 기다리는 색채의 제단, 화장대는 제의를 연상시킨다. 화장의 기원엔 신들과 자연을 포함한 타인에 대한 경의와 연대와 매혹의 욕망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욕망의 근원엔 다양한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미의식 속에서 경배하고 즐기던 다채로운 미의식들이 얽혀 있다. 부나 권력 등속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화장대는 축복받아야 할 제단이다. 아름다움에의 욕망은 무해하다. 적어도 타인을 억압하지 않는다. 누구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에의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미감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복잡한 무의식의 통로를 지니는 세계다. 천 그루의 나무가 있으면 천 가지 이상의 미감이, 만 명의 사람이 있으면 만 가지의 이상의 미감이 존재한다. 만약 아름다움에의 욕망이 사회적 힘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다채로운 개별성의 수용과 소통으로부터 발원하는 힘일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원한다. 오랫동안 정신의 감옥이었으며 이중적으로 배척되었던 육체는 이번 세기에 이르러 자유를 만끽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여정이 그다지 순조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외모는 배후의 권력이 되었다. 도처에서 시장과 결탁한 과장된 미의 이미지가 넘쳐난다. 미는 관리되고 마케팅된다. 개별자인 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찬하며 즐기는 방식이 아니라 미의 준거로 제공된 보편적 이미지에 대한 맹신이 늘어난다. 대중매체는 미에 대한 우리 기호의 다양성을 훼손하며 다채롭게 발현되어야 할 미의식은 잘 디자인된 소수의 몸들에 억압당한다. 시장과 대중매체는 개인들의 미의식을 일괄적으로 평준화하는 경향이 짙고, 다양성을 상실한 수동적 미감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억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주체 스스로를 억압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화장대 앞에 앉은 사람들은 개개인이 모두 하나씩의 고유한 세계다. 화장대 앞에서 우리 모두가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자기만족적이었으면 좋겠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다. 혹자는 남성들이 점점 여성화되어 간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아직도 더 많이, 적극적으로 여성스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과잉 축적되어온 남성성은 우리 모두를 얼마나 힘들게 해왔던가. 경쟁과 정복과 힘의 숭배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기도가 날마다 멀리까지 번져갔으면 좋겠다. 더 섬세하고 더 나지막하게, 경쟁이 아니라 연대를, 힘에 의한 배타적 지배가 아니라 공존과 포용과 아름다움을 꿈꾸는 세계가 날마다 넓어졌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화장대 앞에서 자유분방하게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제의들이 날마다 넘쳤으면 좋겠다. 하나의 성 정체성으로 규정받아온 화장대가 양성구유였으면 좋겠고 개별자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화장대들이 일상이라는 꽃밭에 날마다 가득했으면 좋겠다.
생활속의 이야기 2004년 9,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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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산문에 경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