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2015.
장강명의 [댓글부대]를 서너 시간 만에 독파한 듯하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유투브 동영상을 참고하며 읽었다. 재밌어서 그랬는지 대단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이번에 읽은 [한국이 싫어서]라는 책도 엄청 빨리 읽었다. 조금 얇은 분량('경장편'이라는 새로운 분류 기준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이기도 했거니와 1인칭 서술자 시점이어서인지 어려운 부분도 없었다.
[댓글부대]에서 처럼 새로운 사실들이 많았다. 특히, 주인공 계나가 호주 시민권을 취득하는 과정이 많아 '아하, 그렇구나' 여겨지는 내용이 가득이었다. 마치 내가 호주 시민권을 취득한 경험이었다랄까?
하지만 책의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의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책 말미의 서평에서 문학평론가 허희는 199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 씨랜드 화재 사고로 어린 자녀를 잃은 전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를 거론했다. 그녀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를 위로하기는 커녕 사건의 축소와 은폐, 책임 공방 만을 일삼는데 대해 환멸을 느끼고, 그동안 국가대표 선수로 받은 메달과 훈장을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지 정도의 사유가 '한국이 싫은'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 계나는 세 자매 중 둘째다. 어머니는 전업주부인 듯 하고, 아버지는 건물 경비일을 하신다. 언니는 외국계 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직업 삼아 일 하고, 동생은 백수다. 자신은 홍대를 나와 W증권(종합금융?)에 입사했다. 든든한 부모를 둔 것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도 아니며, 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니란다. 그것이 한국에서 자신의 꿈(주인공 계나의 굼이 뭔지 모르겠지만)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란다.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은 이공계를 다닌다. 그런데 기자가 꿈이다. 소위 말하는 SKY 출신이 아니라면 기자 되기도 어렵거니와 학교에서의 스터디에도 다들 같은 부류이면서도 자신들 내에서 서열화 하고, 차별한다.
지명의 아빠는 대학교수고, 그들 가족은 강남에 산다. 지명의 군제대를 앞두고 모인 갑작스런 만남에서 계나는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이런 이유들이 계나로 하여금 한국을 싫어하게 되고 결국 호주로 떠나게끔 한다. 아, 한가지 더. 계나는 한국의 겨울도 싫단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데 계나의 집은 누워있으면 코가 시려울 정도란다. 호주, 참 따뜻한 나라다.
계나의 호주생활은 녹록치 않다. 그래도 만족한다. 일 한 만큼 벌고, 번 만큼 쓴다.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많아진 시간 만큼 여유로워 진다. 호주 시민권을 취득해 눌러 살고 싶은 계나는 회계사가 되기로 한다. 건물만 덩그런 학위 전문 대학원에 등록을 하고, 생활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계나의 호주생활을 통해 유학생들의 A부터 Z까지를 새로이 알게 된다. 훗날 내 자녀들이 호주로 유학을 보내달라면, 그럴 돈도 없지만, 자신들이 워홀러(워킹 홀리데이)로 벌어가면서 그곳에서 생활한다 해도 말릴 것이다. 이 책에서의 호주 유학생들의 긍정적인 모습이 거의 없었으므로.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기자가 된 지명의 구애에 계나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명과의 두 달 가량의 동거를 통해 새벽에 들어와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모습에서 역시 안되겠다는 생각에 호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정착한다. 고만고만한 회사의 회계 업무를 통해 이제는 제법 규모 있는 회사의 회계사가 되어 있다. 보수도 만족스럽다. 특히, 한국처럼 야근이니 잔무니 하는 것도 없고, 상사와 부하직원의 군대문화도 없다. 해 떠 있을 때 퇴근해서 자유로운 자신 만의 시간을 갖는다.
계나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드러난 남편 덕, 시부모 험담, 감춰야 하는 욕정 따위가 이곳에는 없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온 계나는 행복하다.
과연 그럴까? 지금처럼 살고 싶어서 떠난 것 아닌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무엇에도 구속 받기 싫은 자신의 성격 때문에 그저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곳. 그곳이 호주 아니었을까?
오로지 나 혼자 만의 안위 만 걱정하고, 내 호구 만 책임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인가?
한국, 짜증 나는 나라다. 비호감 민족이다. 그래도 어쩌랴. 여기에 내 가족이 있다. 내 친구가 있다. 내 이웃이 있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전투 중에 내 자존감은 장렬히 전사했어도 집에 가면 가족이 있어 웃는다. 이제 사회에서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친구라는 관계로 인해 동급으로 뒹굴 수 있는 사내들이 있다. 분리 수거를 하다 눈이 마주치면 계면 쩍게 웃어도 담배 한 대 나누어 필 수 있는 이웃이 있다.
나는 한국 밖에 모른다. 그래서 한국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