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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국 高麗(QORI)
[퍼온 글] 대륙백제의 강역과 지도 그리고 천산 즉 중심지의 이동-대제국 고려에서 인용문
번호 : 546 글쓴이 : 일류성월
조회 : 55 스크랩 : 0 날짜 : 2001.01.04 18:47
대륙고려에서 인용한 것으로
새로운 사실이 많아 참고로 올립니다
대륙백제의 강역과 지도 그리고 천산 즉 중심지의 이동-인용문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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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역사관이 바뀌는 혁명적 역사관과 역사적 사실
1. 요동,서의 구분은 3번 바뀌었다.
2. 고구려 평양성 9번 옮겼다.
2-1 해동 역사 城邑編
1] 홀승골성
2] 국내성
3] 환도성
4] 평양성
5] 장안성
6] 산서성 安陽
7] 산서성 태원
8] 사서성 대동부
9] 만주의 심양
2-2 고구려 평양성 1차 도읍
2-3 고구려 평양성 2차 도읍
2-4 고구려 평양성 3차 도읍
3. 고구려와 한나라와의 관계
4. 신라 서울, 경주 6번 옮겼다.
5. 우리 민족의 시발지이면서 전 인류의 고향 이전[伊甸=지나 발음 이덴,
서양 발음 에덴]樂園--中國史前史話기록:천제울국=九夷의 나라=백산[천산]과
에덴은 민족의 고향
http://www.ginsengchicken.com/history/imges/china%20map22.jpg
1. 요동,서의 구분은 3번 바뀌었다.
2. 고구려 평양성 6번 옮겼다.
3. 신라 서울 경주 6번 옮겼다.
4. 우리 민족의 始發地이면서 전 인류의 고향 이전[伊甸=지나 발음 이덴,서양 발음 에덴]樂園
--中國史前史話 기록; 天帝울國[천제울국]=九夷의 나라=백산[천산]과 에덴은 민족의 고향
1.요동,서의 구분은 3번 바뀌었다.
위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1.첫번째가 Urumqi;우루무치밑의 천산산맥=천산=백산,
2. 두번째가 산시=섬서성=SHAANXI에있는 서안=시안=Xian,
3. 세번째가 북경=Beijing옆의 난하와 갈석산
구분 이유와 최초의 구분
인류가 최초로 백산인 천산에 있는 이전 낙원에서 환인 천제의 인도로 BC8936, 내려와 돈황에 자리 잡고 난 후,언어와 생활의 관습으로 세상의 기준이 필요하였던 바,그당시 세상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白山=天山[중국 표현;崑崙山]을 중심으로 표현할 때, 백산을 생략하고 요동과 요서라고 하였으니 이구분이
최초이다.이 구분은 BC8936 桓因씨가 천산으로부터 하강한 이래 지금까지 1만년간 동양사회의 기준이던 요동,서의 구분이 인구의 증가와 사회,문명의 발달로 복잡해 지면서 바뀌는 것이 당연하고, 3번이나 바뀌면서 후대 사람들이 바뀌어 온줄 모르고 요동,서가 고정된 줄로만 알아 혼미하니 이런 현상의 최대 아둔패기가
우리민족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칼하다 하겠다. 요동,서의 개념을만들어 낸 고대인도 우리민족이요,그
개념에 고정되어 헷갈리고 날조된 국사를 부등켜 안고, 옛부터의 약소국으로 알고,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현대 한국인도 그 선조의 자손이니 ...참으로 위대한 선조에 딱하고,엉뚱한 후손이라 하겠다.역사를 볼줄 알면
아무 것도 아닌 요동,서 개념을 가지고,그 변동한 기준을 몰라, 또 그 변동한 기준을 감추고 고의적으로 역사를 날조하고 대드는 타 민족에게 당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믿고, 고치려는 생각은 커녕 바로 고치고자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우리는 거꾸로 미쳤다고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당시 구분의 기준이 天山=白山이었으니 당연히 요서는 백산의 서쪽인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스스탄을 거쳐 유럽쪽이 된다. 이 구분은 夏,殷,周까지였다가 주나라 말기의 戰國시대에 들어오면서 현재의 섬서성 서안이 된다.
白山이 기준이었던 시절, 이 요서 지역에, 桓檀古記의 桓國12聯邦시대의 나라가 [우리 민족의 12국중에] 유럽에까지 걸쳐있었다고하니 더 깊이 上上古史를 연구하여야 하겠다.이를 두고 필자는 桓因이 우주인이라는
가설에서 박시인씨나 문정창씨가 주장하는 현대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되는 수메르문명이 桓國 12聯邦중의
하나인 須密爾國이라는 데에 동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을 별도로 작성해 둔바 있다.却說하여
구분의 요동과 요서
春秋戰國시대에 들어서면서 지나 대륙을 지배해온 동이족의 사상=敬天愛人地
思想이 BC8936부터 고조선이 멸망한 BC200까지 차츰 엷어져 하늘과 땅 그리고 백성을 두려워하는 정신이 없어지고실로 약육강식의 전쟁시대인 戰國시대에 들어와 전쟁시대의 효율적 관습인 능률주의가 현재의 서안인
그때까지의 정신적 구심점. 古朝鮮의 평양성이 기준이 되었다. 이 서안 기준,요동,서의 개념으로 쓰여진
고구려의 1차도읍지 洛陽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다.梁書 89~2107쪽 기록--高句麗者 其先出自東明...중략...
其國漢之玄 郡也. 在遼東之東去遼東千里...[고구려는 그 시조가 동명이오...중략...그나라는 한나라의 현토군,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리 떨어 진 곳이다. 其國漢之玄 郡也. 在遼東之東去遼東千里이 글귀를 가지고 기존
반도=식민사학에서 현재의 요동반도 기준 동쪽으로 천리 있는 곳의 국내성 집안이 고구려 수도라 하는 데,
이때의 요동,서 기준이 현재의 서안인 줄 모르고 그런 말 했다면 역사를 인식조차 못했다는 자격도 없는 겉햟기 사학자요,알면서도 그렇게 스승=이병도의 제자들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밥그릇인 교수직=기득권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쓰는 민족반역행위 밖에 안된다.
위 梁書 89~2107쪽 기록이 꼭 맞는 것이 평양성인 현재의 서안 기준 동쪽으로[遼東千里] 1000리=400km
떨어져 있는 낙양이 고구려의 1차 도읍지였으므로.
3차 구분의 요동,서
상기의 요동,서 구분 1,2차가 인류 사회의 발전으로 불편을 느낀다든지 하는 자연스러운 구분 변화인 데에
비하여, 이 3차 구분 변화는 몇몇의 개별적 집단의 이익을 위해 조작된 것으로, 1910년경,일제의 반도=식민
사관 조작의 전제로 성립되었으니,대륙 역사가 모두 동이족의 역사인 데에 평소 껄끄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던 지나인들이 이에 부화뇌동함으로서 굳어진 개념으로 90년의 시일이 지나 돌이킥 수없는 사실같아 보이는 이
개념은 북경 동쪽의 갈석산과 난하를 기준으로하는 요동,서의 구분이다.위의 2차 요동,서의 구분에서
기술했듯이, 梁書 89~2107쪽 기록처럼 ...其國漢之玄 郡也. 在遼東之東去遼東千里.....그나라는 한나라의
현토군,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리 떨어 진 곳이다.라는이 기록이 日帝의 조작대로 요동,서의 기준을 북경옆
갈석산과 난하로 옮겨 놓고 보니 꼭 맞는 史實이 이제까지 우리가 배운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압록강변
집안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史實?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을 패배감=엽전은 때려야 말듣는다는 등의 노예화를 위한 반도,식민사관은
이와같이 아주 간단히 요동,서의 기준을 섬서성 서안에서 북경옆의 갈석산과 난하로 옮겨다 놓음으로 우리 민족의 질곡과 멍에는 씌워졌던 것,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획책이 역사왜곡으로부터 시작된 이유는
대륙 고려의 위대한 선조들의 자손이라고 史實대로 역사 교육해서는 침략자 일본이 오히려 깔보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제1대 총독 데라우찌가 취임하자마자 한 소리가 조선 역사를 새로 편수할터이니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옛날 역사서를 총독부에 바치라 해 놓고서는그 귀중한 역사서를 한강 백사장에 모아 놓고 불지르기 3일
밤낮을 해놓고서 하는 소리가
조선사 편수관들에게, 조선인들에게 조상들의 위대하고 훌륭한 점은 덮어 감춰 알지 못하게하고 못난 점들만을 침소 봉대하여 역사를 가르치게 편찬하라 훈시하였으니,이에서 탄생한 것이 반도,식민사관으로,
고조선으로부터의 모든 역사를 한반도로 끌어다 놓았고
서안 이북의 서역에서몽고,한반도까지의 광대한 고구려 영토를 만주로 축소 시키기위해,
임나 일본부를 고증하기 위해 광개토왕비를 가짜 만들어<
[가짜 의혹 다분]
조작해내었음이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된 후, 이승만 정권이 정치 기반없이 이승만 홀로의 인기로 정권 잡은 취약점으로,친일파를 숙청하는 반 민족행위 처벌법 시행에 극히 미온적이고,거꾸로 한독당과의 정쟁에서,모두가 지탄하는,
갈곳없는 친일파이기에 더욱 더 충성바칠것이라는 계산에,거둬 등용하는 등, 흐지부지하다가 6.25사변이 터져 반민족행위 처벌법은 물 건너 가버렸으니, 우리 역사 또한 친일파가 숙청되었다면,애시당초 大陸史觀이 우리들 머리속에 자리 잡았을 테고, 우리들 머리 속에 자리잡은 엽전은 때려야 말 듣는다는 등의 패배감은 커녕,위대한 초 강대국 高麗의 후손답게 긍지를 가지고민주당의 政爭으로 날을 지새우는 일도 없이,조국 근대화에 심혈을 쏟는 국민 역량이 해방후 바로, 빠르게 상승적으로 니타나는 긍정적 힘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면 이 모두 인과응보인 것도 같다.
대륙에서 우리가 장손 민족으로서 멸시하던 지나인들,지손인 그 지나인들이 명나라를 세워 대륙에 터 잡고 살던 장손민족인 우리를 한반도로 쫒아내고대륙의 주인 자리를 탈취한 것이나,백제가 멸망하면서, 왜로 도망가서 일본이라 국호를 지은 이후,
한반도로 연결된 대륙에 대한 원한이 섬나라 주민들의 자자손손 유전인자로 물려 내려 가면서,한반도=대륙에 대한 원한이 부모국이면서 장손국인 대한제국을 1차 병탄하고,
2차 지나사변을 일으켜 남경학살을 일으킨 것은 일본 주민 대대로 내면 세계에 깊숙히 자리잡은 대륙에의 복귀 일념=잠재의식 인가 한다.
AD660 백제 멸망이후,1999년까지 1340년간 복수의 칼을 벼르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인과응보라 아니할수 없다.이것이 역사 연구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역사의 숨결이니,개인이든 국가이든 인과응보의 굴레는 피할수 없으리라......
이 모두 桓因,桓雄으로부터 시작된 지,대략 9000년, 대륙에서 더불어 살던 우리,왜,지나가 각자 다른 지방을 점거하고, 비 타협적인 국가이념으로 갈라져 버린 후,
대략 1000년동안에 이렇게 된 것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말씀처럼 歷史란 我와 皮我의 투쟁기록이란 점이 이렇게 절실할
수 있을까?!
일전에 국내성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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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구려의 평양성 9번 옮기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한번도 이북 평양인 적이 없었다.
해동 역사 城邑編
1]. 홀승골성[忽升骨城]
2]. 국내성[國內城]
3]. 환도성[丸都城]
한담 님께! 일전에 국내성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셨지요.
이제야 필자가 드리는 선물은 국내성 뿐 아니라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 나와 제일 먼저 건국 한
1. 홀승골성에서부터
2. 국내 위나암성
3. 환도성의 위치를 기록한 해동역사 하권 城邑編 하권555-556쪽의 기록을 드립니다.
여기뿐 아니라 국내 전체의 기존 사관 => 금서룡이, 옛 우리역사책을 악의적으로 번역한 골조에,
약간의 살을 덧붙인 앵무새에서 못 벗어남이 기본임을
설마 했던 것이, 아주 골수 깊이 찌든 것을, 확실히 알았으므로,
선조들의 대륙 활동을 증명하는 글-이미 아실는지 모르지만-을 드리오며
부탁 말씀 드림은, 한문서적을 한글 읽듯이 익숙하시라는 것입니다.
특히 아래 通典의 기록은,
압록강이 백산(=천산)에서 흘러나온다 하였으니, 백산(=천산)으로부터 말갈의 땅에서 나온 압록강이
국내성을 경유하여 동서의 물이 합하여 염난수 된다는 말은 이미 소개하여 드린 원사 208권 외 이전
제 95 고려편과 북사 고구려전, 원사 지리지 명사와 일치하고 있음에이 국내성이 서안 서북쪽이 된다는 말인데,
금서룡의 악의적 왜곡이 압록강을 북한 압록강으로, 떼어다 붙여 국내성이 집안이었다는,
이런 말을 물리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한문 해독하는 수 밖에 없사오니 십분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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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홀승골성}忽升骨城
[三國志 高句麗傳]삼국지고구려전 句麗作國依大水而居 구려작국의대수이거
고구려는 큰 강을 끼고 살면서 나라를 세웠다.
[後魏書高句麗傳] 후위서고구려전
朱蒙棄夫餘東南走中道遇一大水木慾濟無梁魚鼈 浮成橋
주몽기부여동남주중동우일대수욕제무량어별병부성교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 나와 동남으로 가는 중에 큰 강을 만나 건너려 하나 다리가
없었는데, 물고기와 자라가 같이 부교를 만드는지라.
朱蒙得渡遂至普述水遇三人與至忽升骨城遂焉號曰高句麗
주몽득도수지보술수우삼인여지홀승골성숙언호왈고구려
조우한 3인과 홀승골성에 도착하여 거주하였으니 고구려라 부른다.
[句麗史] 구려사
朱蒙行至 水魚鼈成橋得渡至毛屯谷
주몽행지암체수어별성교득도지모둔곡
주몽이 비류수에 이르러 물고기와 자라가 만들어 준 다리로 인해 무사히 건너
모둔곡에 이르러.
遇三人與之俱至卒本川觀其土壤肥美山河險固遂慾都焉
우삼인여지구지졸본천관기토비미산하험고수욕도언
조우한 3인과 같이 졸본천에 도착하여 보니 그 땅은 비옥하고 수려하며 산천은 험하고 견고함을 쫓아 도읍하였다.
而未遑作宮室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國號高句麗是漢孝元帝建疎二年也
이미황장궁실단결려어비류수상거지국호고구려시한효원제건소2년야
황급하여 궁실을 못 짓고 초가로 비류수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니.
其地連靺鞨部落恐侵盜爲害逐攘斥之靺鞨畏服不敢犯焉
기지연말갈부락공침도위해축양척지말갈외복불감범언
그 땅은 말갈 부락과 붙어 있어 침략해와 도둑질의 해를 겁내서 쫓아 물리쳤더니
말갈은 두려워 하며 감히 범하지 못했다.
▶ 삼국사기의 홀승골성
#37卷-志6-地理4-00;삼국사기 37권-지6-지리4-00
雜志第六. 잡지 제 6. 地理四. 지리4.
<高句麗>·<百濟>. 고구려*백제 #37卷-志6-地理4-01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안이란 사람이 통전에 이르기를 주몽이 한나라 건소[年號] 2년에,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북부여로부터 동남쪽으로 와서 보술수를 건너, 홀승골성에 이르러 살았다.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
<卒本>, 似一處也.
이름하여 구려, 고씨를 성씨로 삼았다. 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나와 졸본 즉
홀승골성에 이르러, 졸본에 거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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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國內城(국내성) --- 이 국내성 위치가 서안 근처 라는 명확한 기록입니다.
[後周書高麗傳]후주서고려전
朝鮮有國內城 조선유국내성
[通典]통전
馬雌水一名鴨綠江源出靺鞨白山經國內城南又西與一水合卽鹽難水野
마자수 일명 압록강 원출말갈 백산경 국내성 남우서여 일수합즉염난수야 마자수 일명
압록강은 말갈의 땅 백산(=天山)에서 나와 국내성을 경유하여 남과 서쪽에서 온 강이 합쳐 하나가 되어 염난수가 된다.
--- 북한 압록강은 다만 서쪽으로 흘러 가기만 하지 남과 서에서 온 물이 합치지는 안
합니다.
--------참고;말갈;해동역사 544쪽
[新唐書黑水靺鞨傳]신당서 흑수말갈전
居肅愼地東濱海西屬突厥南高句麗北室韋離爲數十部
숙신의 땅에 살며, 동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서로는 돌궐에 속했고, 남으로는 고구려에,
북쪽의 근거지는 수십부가 있다.
其著者曰粟靺部居最南抵太白山依粟靺水以居稍東北曰泊 部
그들을 사람들이 이름짓기를
1 속말부는 남으로 태백산에 접하고, 속말수에 의거해 살며, 조금 더 동북으로 가면
2 박돌부가 있고,
又次曰安居骨部益東曰拂湟居骨之西北曰黑水部....
그 다음은
3. 안거골부, 더 동으로 가면
4.불황부, 서북은
5.흑수부...이하 생략.--이 이하에 15부가 다 나열되어있읍니다. -- 참고 끝 -------
[括地志]괄지지
不耐城卽國內城也城累石爲之[句麗史引用]
불내성즉국내성야성누석위지구려사인용
불내성은 즉국내성이다. 성은 돌을 겹쳐 쌓았다.[구려사 인용함.]
[句麗史]구려사
琉璃王二十一年(漢 平帝 二年)三月郊豚逸薛支逐之至國內尉那巖得之
유리왕이십일년(한 평제 1년)삼월교돈일설지축지지국내위나암득지
유리왕 21년(한나라평제2년) 3월 교외에서 돼지가 달아나 설지가 뒤 쫓아 도달한 곳인 국내성인 위나암성에서
返見王曰臣至國內尉那巖見
반견왕왈신지국내위나암견
왕을 만나지니 하는 말이 신이 국내성인 위나암성에 이르러서 왕을 뵙게 됩니다 하면서,
其山水深險地宜五穀多鹿魚鼈之産
기산수심험지의오곡다녹어별지산
그 산수는 물이 깊고 산이 험한 땅이라 마땅히 오곡과 사슴과 물고기, 자라가 많이 생산됩니다.
若移都卽不唯民利之無窮又可免兵革之患也
약이도즉불유민리지무궁우가면병혁지환야 만약 도읍을 옮겨오면 백성의 이로움이
무궁하기만 하지 않고 또한 병화의 환란을 면할 수 있는 더 함이 있읍니다 라고 했다.
二十二年冬十月王遷都於國內尉那巖城
이십이년동십월왕천도어국내위나암성
(유리왕)22년 겨울 10월에 (유리)왕은 국내성인 위나암성에 천도했다.
삼국사기기록,--권 37,지6,
현토와 국내성
<卒本>者, 蓋<漢><玄免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免>屬縣,
<高句麗>是歟. 졸본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두 이구동성으로, 한나라의 현토군의
영역에 있다고 하였다.
大遼國 東京의 서쪽이다.
漢志의 소위, 현토란 것은 고구려가 갖고있었던 것이다.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景{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 >, 故知其然也.
대요가 건국되기전의 요나라 임금이 있던 연경은 우리 조선인들이 말하기를 동경에서 요수를 건너 의주 도착이 하루에 간다고, 그리고 연검으로 향해있음을 옛날에는 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自<朱蒙>立都<紇升骨城>, 歷四十年, <孺留王>二十二年, 移都<國內城>.[或云<尉耶巖城{尉那巖城}>, 或云<不而城>.]
주몽이 홀승골성에 도읍한지 40년만에 유리왕 22년에 혹은 위나암성, 불이성이라고도
불리는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 국내성의 위치를 말해줌
#37卷-志6-地理4-02
○按『漢書』: "<樂浪郡>屬縣, 有<不而>.
"안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漢書』: "<樂浪郡>에 불이라는 곳이 속해 있다고 했다.
又<總章>二年, 英國公<李勣>奉勅, 以<高句麗>諸城, 置都督府及州縣. 目錄云: "<鴨 >以北已降城十一, 其一<國內城>, 從<平壤>至此十七驛." 則此城亦在北朝境內, 但不知其何所耳.
또 당나라 총장2년에 영국공 이적이 봉해 올린, 고구려 여러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는 목록에 압록이북의 항복한 성, 11중에 하나인 국내성에서 평양까지 17역을 지나면 도착한다고 했는 데,
즉, 이 성[국내성]은 역시 북조내에 있는데 ,어느 곳인지는 들은바 없어 모른다 했다.
都<國內>, 歷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歷一百五十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歷八十三年, <寶臧王{寶藏王}>二十七年而滅.[古人記錄, 自始祖<朱蒙>, 王{至}<寶臧王{寶藏王}>, 歷年丁寧纖悉若此,
국내성에 도읍하기를 425년만에, 장수왕15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이 156년만에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으로 옮겨 83년이었고, 보장왕27년에 멸망하였다.
[여기에서 필자 주장인 보장왕 27년,서기 661년이후 668년까지의 7년동안 5번을 북으로 쫒겨 가며 도읍을 옮긴 고구려 망국의 역사는 빼어버린 김부식이 이해가 안갑니다.
삼국사기를 훓어보면 또 나올라나?!.....몰라도....]
옛사람의 기록에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까지의 역년은 정녕섬실이란 책과 같다.
而或云: "<故國原王>十三年,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知之?
혹은 고국원왕 13년,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겼는 데, 황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중인데 [목멱산중이 그러한지 아닌지는 알수없는데],평양성이 지금의 서경이고,
패수가 대동강이다. 어떻게 아느냐?!何以知之?
『唐書』云: "<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 爲 , 南涯<浿水>."
『唐書』云하기를 "<平壤城>은 <漢><樂浪郡>라고 했고, 산따라 굽이지어 성곽을 쌓고[隨山屈 爲 ], 남쪽 절벽에 패수가 접했다[南涯<浿水>.]" 했다.
又『志』云: "<登州>東北海行, 南傍海연 [언덕가 연]過<浿江>口<椒島>, 得<新羅>西北."
또 그 책=당서에 등주는 동북으로 바다를 항해해야는 데, 남쪽 바다의 가장자리, 연이란 곳을 통과하는 패강의 입구인 추도는 신라의 서북으로 뺏은 곳.
--패강 입구가 등주근처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패강은 황하를 뜻하지 않겠는 가?!
又<隋><煬帝>東征詔曰: "滄海道軍, 舟 千里, 高帆電逝, 巨艦雲飛, 橫絶<浿江>, 遙造<平壤>." 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 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또, 수양제의 동정조서왈 창해 진격하는 수군은 노를 저어 번개와 같이 하고, 큰배에는
운비를 싣고, 패강을 가로질러 평양에 이르라고 했으니,이말의 뜻이 대동강이 패수를
말함이다.
즉, 서경이 평양이라는 명백함을 역시 알수 있지 안는 가.
『唐書』云: "<平壤城>亦謂<長安>." 而古記云: "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遠近, 則不可知矣. 당서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역시 장안이라했고,고기록에도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했으니,
즉 2성은 가까이에 있는 다른 성이면서 같은 성을 뜻함을 모르겠는가?
<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
고구려는 처음 중국 북쪽에 있었다가 점차 동쪽으로 옮겨 패수의 옆으로 왔다.
[필자주;참고;우리 민족 모두=3국이 천산 부근에서 동으로 옮겨 서안으로 왔음.
-최초의 경주도 감숙성 경양현이니....]
<渤海>人<武藝>曰: "昔<高麗{高句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則可謂地勝而兵强. 至于季末, 君臣昏虐失道, 大<唐>再出師, <新羅>援肋{助}, 討平之. 其地多入<渤海>·<靺鞨>, <新羅>亦得其南境, 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 以備九州焉.
발해사람 무예[필자,제가 하는 注;발해 2대왕]왈,
옛날 고구려 전성기엔 군사 30만으로 당에 대항했으니, 가위 그땅의 강병이 성했음이다. 그, 나라 말기에 군신이 혼미하고 학정을 하여 실도하여, 대국인 당이 재 출병해서, 신라가 도와줘 토벌 평정하여, 그 땅이 발해,말갈로 많이 들어가고, 신라 역시 그 남쪽 땅을 차지하여, 한,삭,명의 3주와 그군현으로 9주를 완비하였다.
계속되는 한산주,국원성=일명 미을성=일명 임장성등등의 성이 있는 소재지 기록은 10여쪽에 이르고 특히 압록수의 위치도 기록된바, 모두 서안=장안 근처를 말하고 있습니다
3.해동역사 556쪽 [丸都城]환도성 [三國志 高句麗傳] 삼국지 고구려전
高句麗都於丸都之下(고구려도어환도지하)
[通典] 통전
漢建安中高句麗王伊夷模更作新國都於丸都山下在沸流水東
한건안중고구려왕이이모갱작신국도어환도산하재비류수동
한 나라 건안 중에 고구려왕 이모가 새 나라를 다시 세워 환도산 아래, 비류수 동쪽에 도읍했다.
句麗史구려사
山上王二年(漢獻帝九年)築丸都城十三年十月王移都於丸都
산상왕이년(한헌제구년)축환도성십삼년십월왕이도어환도
산상왕2년(한나라 헌제 9년) 환도성을 쌓고 13년 10월 왕은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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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도읍 ;홀승골성<紇升骨城>처음 건국할때
2차도읍 ;국내성[國內城]--유리왕22년 도읍
삼국사기 권37,지6기록;
주몽이 홀승골성에 도읍한지 40년 후, 유리왕22년 국내성[혹은 위나암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自<朱蒙>立都<紇升骨城>, 歷四十年, <孺留王>二十二年, 移都<國內城>.[或云
尉耶巖城{尉那巖城}>, 或云<不而城>.
------- 참조 ---- 건국 초부터 자리 잡은 곳 현토와 국내성, 洛陽
<卒本>者, 蓋<漢><玄 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 토> 屬縣,
<高句麗>是歟.
졸본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두 이구동성으로, 한나라의 현토군의 영역에 있다고 하였다.
大遼國 東京의 서쪽이다. 漢志의 소위, 현토란 것은 고구려가 갖고있었던 것이 다.
洛陽에 고구려가 건국하면서 도읍했다는 다음 기록은
▶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931년, 臧勵화등 編著]771쪽 기록.
-- 高句麗國, 其先出自扶餘 [고구려국은 본시 그 선조가 부여라 했다.]
漢時避難居卒本水, 因稱卒本扶餘.
[한나라때 피난와서 졸본수에 거주, 그래서 졸본 부여이다.]
地爲漢之玄 郡.[그땅은 한나라 현토군].
屬有三縣高句麗其一也. [현토군은 3개현이 속해 있고, 그중 하나가 고구려].
因以爲國號 [그래서 국호가 되었다].
▶ 梁書89-2107쪽 기록;낙양성의 위치를 말해주는 기록;
高句麗自 其先出自東明.....其國漢之玄 郡也
고구려의 선조는 동명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나라는 한나라의 현토군이다,
在遼東之東去遼東千里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리이다].--현토군은 요동 1000리에 있고, 그곳은 洛陽이다.
[서안에서 낙양은 400KM=1000리에 있음]---그래서 고구려가 1 차 도읍한 곳은
洛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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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도읍; 환도성
[句麗史] 구려사
山上王二年(漢獻帝九年)築丸都城十三年十月王移都於丸都
산상왕2년(한,헌제9년)축환도성십삼년십월왕이도어환도 10대 산상왕2년(한나라 헌제
9년) 환도성을 쌓고 13년 10월 왕은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三國史記 #16卷-高句麗本紀4-山上王-13年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AD55)13년,.
冬十月, 王移都於<九都<丸都>) . 겨울 10월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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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도읍; 평양성=장안성
1] 三國史記#17卷-高句麗本紀5-東川王[동천왕]-21년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 廟社. <平壤>
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21년,춘2월, 왕이 환도성에 경란이 일어나 불가피 옛 도읍지로 옮겼다.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를 옮겼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평양은 선인 왕검의 택지라 했다. 혹은 왕검의 도 읍지라 했다
2]#18卷-高句麗本紀6-故國原王-13年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 >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가을 7월, 평양성인 동황성으로 이사했다.
이 성은 지금[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서경 동쪽 목멱산중에 있다
3]新唐書 卷220 東夷傳 145, 666~4792쪽 기록
高句麗本夫餘別種也 地東跨新羅南 亦跨海距 百濟西北渡 遼水與營州接 北靺鞨其君居
平壤城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 동쪽에 걸터 앉은 신라 남쪽을 넘어로 동해에 걸 쳐진다.
서북으로 연결된 백제를 지나면 요수와 영주에 접한다.북으로는 말갈이며, 평양성 역시
장안성이라 함. 그 서울 기준 5000리 영토
中略 南涯浿水王築官其在 又有國內城 漢城別號都
중략 [평양성의]패수 남쪽 낭떨어지에 왕이 성을 쌓고 관리들을 그 곳에 있게 했다.
[그래서]나라 안에 있는 성=국내성이 있은 것이고, 별명이 한성이고 도읍지이다.
-- 隋書81卷,列傳46,東夷高麗 기록과 동일.-都於平壤城亦曰長安成..,
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 其
평양성에 도읍했고 역시 장안성이며...남쪽으로 패수에 임했으며 그 속에 국내성,
한성이 나란히 있다.
-- 신당서에 국내성의 별명이 한성이라고 구분한 것을 이 隋書는 구분못하고 둘 다
있다고 한것만 차이가 남.
水有大遼 山西亦南流 中略
이 물[패수]이 대요[수]이고--위의 요수와는 구별하여 대요수임-,
역시 산서성에서 남쪽으로 흘러 오는 물이다. 중략....
若鴨頭號鴨綠水 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 又西南至 安市入于海 而 平壤在鴨綠東南.....
오리 머리[파란색]를 따서 압록수라 이름졌고, 역대 국내성이 있 고, 이 국내성에서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하고 --- [통전의 기록과 동일]
또 서남으로흘러 안시성으로 들어가 바다쪽으로 있는 평양성 으로 가는 이 압록강은
동남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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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도읍; 장안성
I.三國史記 #18卷-高句麗本紀6-長壽王-15年
○十五年, 移都<平壤>.15년에 평양으로 이사했다.
장안성 II.三國史記#19卷-高句麗本紀7-平原王-28年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28년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여기에서 이미 당나라 이전에 장안성이 있음을 알수있고,
이 장안성과 평양성은 서로 같은 근처이며, 또한 국내성=한성은 평양성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신당서 기록인, 中略 南涯浿水王築官其在 又有國內城 漢城別號都
중략 [평양성의]패수 남쪽 낭떨어지에 왕이 성을 쌓고 관리들을 그 곳에 있게 했다.
[그래서]나라 안에 있는 성=국내성이 있은 것이고, 별명이 한성이고 도읍지이다.
*또한 이미 이 곳에서 인용했던, 支那 史書들 元史,明史,北史,隋書,元史 지리지,通典,
등에서 이구 동성으로 평양성=장안성이라는 기록외에도,
위와 같은 三國史記 평원왕 28년조에 장안성으로 移都한 기록이 명확하게 있는 데,
기존 사관에서는 북한 대동강옆 평양성이라고 일관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고 딱하기가 미련스럽기 짝이 없고,
더욱 한심한 것은 그런 소설을 자라나는 세대들이 역사라고 배우는 것이다.
이모두가
I.조선의 선조들은 한문을 잘 알았어도, 썩어빠진 선비라서 해동역사를 쓴
한치윤 도 고구려,고려 강역의 지도를 해동역사 부록에 그려 놓은 것을 보면 한반도로
욱여 넣었는 데, 이것이, 그 당시 조선 순조때의 모든 썩은 선비들에게 인정 받아
해동역사가 桓檀古記나, 규원사화처럼 禁書가 안되고, 전해져 올 수 있는 이유가
되었 다면,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하다 하겠는 가?!
그렇다면, 한치윤은 역설적으로 저술을 보존하기위한 방편으로, 자기 글은 모두
그시대의 事大慕華 思潮에 부화뇌동하는 것처럼 써놓고서,
정작 선조들의 대륙 활동을 증명하는 귀중한 史書들인, 通典,句麗史,新唐書,括地志등
등을 전혀 가감없이 수록해 놓은 것을 보면,
이 조상님도 말은 안했어도, 후세에 알아주는 후손이 나타난다면,
자기의 逆說을 알아 볼테지하는 심정도 느껴진다.
II.지금은 어떠한가?!
왜놈 금서룡의 앞잡이 서울대 전 교수 이병도가 씨뿌려 놓은 전국의 국사 교수 들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권위로 식민 사관을 꼭 껴안고는 위와 같은 정확한 史書 기록을
가지고 들여대도, 국사 교수들이하 그 惡의 제자들 모두 한결같이 그런 기록을
막무가내로>br> 부정하는 가하면, 그런 말하는 이 사람이나 이중재님보고,
거꾸로 미쳤다하니, 과연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혼자 성한 소리하면,
거꾸로 미친 놈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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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도읍; 산서성 안양
보장왕27,AD661 나당 연합군에 밀린 고구려는 지금의 산서 성 安陽으로 옮기고,
7차도읍; 산서성 太原
8차도읍; 산서성의 최 북단 大同府로 옮기고
9차도읍; 마지막으로 만주의 瀋陽[옛 봉천]에 평양성을 세우고
북한의 압록강 변 通化에 도읍을 두고 마지막을 맞는다.
그러므로, 위의 6]번,
보장왕27,AD661로부터 AD668까지의 7년동안 숨가 쁘게 북으로 밀려간 고구려는
만주의 심양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 때가 AD668로 900년 역사로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모두 BC37로 잡은 것을 BC231로 잡은 이유는
I. 海東繹史 권6,世紀6 고구려41쪽 기록
鎭書 謹按 高句麗惑作句麗 周隋後史作高麗蓋句麗之稱
진서에 按[안황모밀]이 謹하며 하는 말이 고구려를 혹 구려라하고
주,수나라후에는 고려,개구려라 함.
非是于高朱蒙也 秦漢之際巳有其國
고주몽이 처음은 아니지만, 진과 한나라 사이에 그런 나라가 있었다.
漢武帝滅之 回降國爲縣匠於玄 郡至
한 무제가 멸망시키고난뒤 고구려 회복되어 현토군을 갖고
元帝建昭二年甲申歲 朱蒙始建國於故句麗也
원제 건소 2년 갑신년, 주몽이 시조되어 옛 구려 땅에 건국했다.
여기에서 위, 秦과 漢나라 사이에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고구려 건국
연대를 BC231로 잡은 것.
이 고구려는 1차 한 무제에게 멸망했으나 다시 회복되어 현토군으로 시작되었고,
다시 고주몽이 접수하여 BC38-34인 건소[建昭]때에 건국한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에는 BC37로 잡았으나 BC231로 잡는 것이 타당함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근세 조선의 고종이 대한제국을 다시 개국한 것으로 보는 것도 맞고,
근세조선을 순종 때까지 보는 것도 맞는 이유와 같다.
분명히 한 무제 이전의 고구려와 고주몽의 고구려는 왕의 혈통이 틀리는
것은 맞지만 이 모두 동이=그 당시의 주류였던 줄기=장손민족이었던 우리
민족이 같은 국호로 [開國이지만] 잇은 나라니까 같은 나라로 봄이 타당하리라.
이 사실이 상기 1번에 나와 있는 梁書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나와 있는
BC231의 건국년대 잡는 이유이다.
그래서 BC231 秦,漢년대에 개국한 고구려는 句麗로서 秦의 제후국으로 封國됨이
시작이었다.
이 句麗도 본래 戰國時代 韓나라 때 古離 또는 藁離國으로서 이 보다 앞선 부여
시대에는 高離國이었다.
II.三國史記 #22卷-高句麗本紀10-寶藏王-27年
且<高句麗>『秘記』曰: 고구려 秘記에 이르기를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고구려는 900년이 조금 못 된다.이제 지금 80명의 대장이 죽었다. 그래서 멸망하였다.
고[고구려]씨는 스스로 漢나라로부터 유래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900년이다.
-- 이 말은 김부식 스스로 이 고구려 본기의 시작에 BC37에 고구려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스스로 고쳐 하는 말임.[필자 주]
900년-668[고구려 망한 연대]=BC232가 되므로, 위 BC231-AD668의 고구려 899년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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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구려와 한나라의 관계는?!
한담님께,말갈을 수정하면서,
작성자 : 김용무 ....작성일 : 99-12-30 ....조회수 : 29
한담님께, 桓談님이시라는 제 홈의 방명록에 써놓으신 유모어에 넘치는,
정다운 글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仙談에 대하여 저도 할 이야기는 엄청 많으나,일찍이, 사업이 망했다 다시 재생하는 과정에서 붙어버린 악습;말술마시는 습관으로 그렇다고 알콜 중독자는 아니고,
仙道 修鍊에 방해되는 술과 선도의 갈림길에서, 어쩔수 없이 택한 술로 인해 선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어, 옛날에 술끊고 1년여, 선도는 맛만 보았지,
仙道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술을 더 사랑해 선도 포기한 아쉬움이 더 큽니다.
桓談님이시라니, 仙家의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도,
세상이 온통 선가 세상되는 때가 옵니다.
이것이 坎->辰->艮의 CYCLE 또는 物極必反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三聖=三神님의 작품인,
고도의 부메랑 현상이고 이제 일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담님께 작별 선물로 드린 국내성 기록중의 HIGH LIGHT는,
[新唐書黑水靺鞨傳]신당서 흑수말갈전
居肅愼地東濱海西屬突厥南高句麗北室韋離爲數十部
숙신의 땅에 살며, 동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서로는 돌궐에 속했고, 남으로는 고구려에, 북쪽의 근거지는 수십부가 있다.
에서 西로는 돌궐에 속했다는 말인데, 식민사관의 테두리를 못벗어난 글=그런 글도
식민 사관자인 누가 번역해 놓은 글에서 퍼 옮겨와, 겨우 하는 말이 말갈이 연해주나 東만주라는 글을 여기에 올렸는 데, 자기가 직접 옛 史書를 읽어 보면 그런 말은
안 나올텐데, 하는 아쉬움이 대단히 큽니다.
西로 돌궐에 속했다는 소리가 대단히 중요한 문구가,
돌궐은 천산의 동서에 걸쳐 있다는 데에, 말갈도 돌궐로 보아야하며,
이 돌궐은 흉노이며, 이 흉노는 漢武帝에 쫒겨 서양으로 가서 훈족이 되는 이
한무제때, 고구려가 시작되며,西와東漢의 漢나라 시절에 고조선의 평양성=서안을
차지한 고구려와 漢나라가 같이 존재했음이 역사서에 많이 써 있어 이를 규명해
보는 것이 1,2개월로는 되지도 않는 방대한 연구 과제입니다.
더욱이 동,서한의 수도가 고구려와 똑같이 서안과 낙양이니,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의문으로 떠 오르는 제 연구 과제입니다.
이 실마리의 시작은
1.고구려의 선조를 부여로 보았을 때=朱蒙이면 연대가 아래와 같이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첫장의 기록<扶餘>王<解夫婁>老無子와 <漢><孝元帝><建昭>二年은 BC37이맞지만,
BC231 秦,漢년대에 개국한 고구려는 句麗로서 秦의 제후국으로 封國됨이 시작이었고.
이 句麗도 본래 戰國時代 韓나라 때 古離 또는 藁離國으로서 이 보다 앞선 부여 시대에는 高離國이었으며,전,후한의 중간 新나라 王莽[AD9-13]이 高句驪로 국호를
고치면서 高句麗중흥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부식 자신이 아래와 같은 고구려 본기의 첫 기록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글을 써
놓았기 때문이며,또한 지나쳐 버릴수 없는
고구려 스스로 漢나라로부터 유래한다는 말 때문에 고구려와 같은 우리민족인
漢나라는 대륙에 같이 존재했다는 많은 역사 기록도 읽어 집니다.
息愼[->肅愼]은 순임금께 BC2284 獻弓, BC1122 周 武王때 肅愼은 무왕에게 獻弓,
[이상 만주원류고 기록] 에서 보듯이 堯임금의 형인 后稷의 후예인 肅愼은
BC2400부터 존재하면서 고조선의 제후국 古離, 고離 또는 藁離國이 되고 후에
句麗->高驪국->高句麗와 漢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高句驪[新] 王莽[AD9-13]은 高驪국의 직계 후손이라 엄청 엉클어진 혈통 관계에서 고구려와 漢나라의 관계는 규명되어야 할것입니다.
三國史記 #22卷-高句麗本紀10-寶藏王-27年
且<高句麗>『秘記』曰:고구려 秘記에 이르기를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고구려는 900년이 조금 못 된다.이제 지금 80명의 대장이 죽었다. 그래서 멸망하였다.
고[고구려]씨는 스스로 漢나라로부터 유래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90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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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라 서울 경주 6번 옮기다.
**참고가 될까요? - 절강성 해안지대에 있는 '신라' 지명들
작성자 : 이재환 ....작성일 : 00-01-09 ....조회수 : 9
>문제는 바로 신라의 기록에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3세기 이전의 관측은 양자가
하류지역에서, 8세기 이후의 기록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기에 일식기록을 중심으로 한 삼국사기의 천체기록이 당시의 중국기록보다 10%이상 정확한 약 90%에
이른다면, 박창범 교수의 견해를 믿어야 된다고 봅니다.
>왜 초기 신라의 천체 관측 지점이 양자강 하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존경하는 여러
상고사 독자 님들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박창범교수가 아직 발표하지 않은,
신라의 3세기와 8세기 사이의 천체관측기록을 조사하면 관측지점이 어디가 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도 부탁드립니다. 나오기 전에 미리 예측할 수 있어야지, 나온 다음에 설명하는 것은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때 한반도로 옮겨갔으면,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특히 김용무, 한담, 식민사학 님의 견해는 꼭 듣고 싶습니다.)
- 이 모자란 사학도가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말씀을 듣다보니 탁하고 떠오르는 게 있는데 바로 중국 해안지대에 있는 [신라]라는 땅 이름과 중국 사서의 [신라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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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통지浙江通志] 권 9 - 21 산천조에 나오는 중국 절강성 연안의 신라계 지명
상산현 신라오산(新羅奧山) : "현 동북 20리",[구절강통지舊浙江通志] 에서
천태현 신라산(新羅山) : "현 서쪽 30리",[적성지赤城志] 에서
임해현 신라서(新羅嶼) : "현 동남 30리. 신라상인의 정박처.",[임해현지臨海縣志]에서
온주현 신라부산(新羅浮山) : "장우시문(張又詩文)", [명승지名勝志]에서
평양현 신라산(新羅山) : "현남 2리에 신라국新羅國 왕묘", - [평양현지平陽縣志]에서
- 즉 절강성 상산현(象山縣) 동북 20리에 신라오산, 천태현(天台縣) 서쪽30리에 신라산, 임해현(臨海縣) 동남 30리에 신라상인이 정박하던 신라서,온주현(溫州縣)의 신라부산
그리고 평양현(平陽縣)에 신라산이 있다.
(중략) [평양현지平陽縣志]에는 약간의 기록이 있다. 즉 "신라산은 현 남쪽2리에 있으며 신라국의 왕묘王廟가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有新羅國王廟在焉故名)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복건성에 신라현新羅縣이 설치된 때는 서기 282 년이었다. 그러면 이때의
신라인들은 과연 한반도의 어떤 집단이었을까? 왜냐하면 282년 현재한반도에는
놀랍게도 신라란 국호가 아직 성립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왕은 백제인이며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가서 드디어 이나라 왕이되었다.
"(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 - 수서(隋書) 권 81 신라전(新羅傳) - 이 기사는
지금(서기 2000년 현재) 전라남도에 용성군이라는지명이 있다는 사실과, [삼국유사]
탈해왕 조(條)에 석탈해의 본거지가 원래용성국(龍城國) 이었다는 사실과 들어맞음.
박, 석, 김씨 중에서 바다로 이동해 온 집단은 오직 석씨집단 뿐이므로결국 백제인으로서 신라왕이 된 세력은 석씨집단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석탈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는 "脫解"(탈해) 즉 해(解)로부터 탈출(脫出)했다는
뜻이다. 당시 온조백제의 왕성은 [삼국유사] 권 2 남부여전에기재되었듯 해씨(解氏)였다. 당시 탈해는 온조백제를 탈출한 세력이 된다.
- 김성호 박사의 책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제 2권 에서(맑은소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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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와 천문관측 결과를 보고 제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석昔씨족은
원래 전라남도에 있으면서 남중국, 특히 절강성이나 복건성 해안지대 - 이무렵(서기 3세기까지의 중국)은 아직 중국 왕조들이 남쪽에까지 실질적인 영향력을 떨치지 못했고,
한족들은 해양민족이 아니라서 바닷길을 이용하지 못했음 - 에
세력을 떨치고 백제의 담로처럼 식민지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무역과 어업으로 먹고 살았고 배를 다루는 기술과 바닷길을 다니는 능력이뛰어난
집단이었지요. 그러다가 백제가 서기 1세기 무렵 마한을 무너뜨리고 세력을 잡자, 백제를 피해 일부는 신라로 가고 일부는 절강성과 복건성에 세워놓은 식민지로 갑니다. 그때부터 새로운(신,新) 땅(라,羅) 이라는 뜻으로 신라라고 이름을 지어서 나라를 꾸려 갔겠지요.
제 생각입니다만 양자강 하류에 나타난다는 신라의 초기 관측결과들은, 다름아닌 바로 이 석씨 세력들이 양자강 하류인 절강성에 살면서 남긴 천문 기록들이 아닌가 합니다.
아시다시피 바다에 배를 띄워서 장사를 하려면 밤하늘의 별을 잘보고 관찰해야 하니까요.(날씨 예측이나 가는 항로 예측을 해야 하니까) 양자강 하류에 살다 보니 당연히 그곳을
기준점으로 별을 관측해야 했을 겁니다.
또 뱃길을 이용해서 한반도로 간 석씨 세력과 연락을 주고 받았을 겁니다.(당시 백제는
아직 뛰어난 해상능력을 보여주지 않던 때니까요) 그러다가 석씨족의 역사가 신라왕조에 흡수되고, 그들의 기록이나 족보도 신라의 거칠부가 쓴 [국사國史]에 정리되어
올려졌기 때문에 [신라본기]의 기록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 초기 기록은 양자강 하구에서, 후기 기록은 한반도에서 하는 식으로.
- 더 궁금하시면 김성호 박사님의 책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1,2권을
(맑은소리 펴냄) 사서 읽어보세요. 단, 그분의 주장을 다 믿지는 마세요.
자료는 훌륭하고 몇몇 주장은 참조할 만하지만, 문제가 많습니다.
-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네티즌 이재환
핸드폰 : 011 - 9788 - 4852, 전화번호 : 02) 408 - 4854
전자우편 : utari@netian.com 과 damro@hanmail.net
이재환님,과학도님,그리고 모든 분들께,
석昔씨족은 원래 전라남도에 있으면서 남중국, 특히 절강성이나 복건성 해안지대 - 이
무렵(서기 3세기까지의 중국)은 아직 중국 왕조들이 남쪽에까지 실질적인 영향력
을 떨치지 못했고, 한족들은 해양민족이 아니었읍니다.
김용무 답입니다.
위 이재환님의 글중에서 꺼낸 말중, 석씨가 전남에 있었다고 하면, 백제 지역에 어떻게
신라 세력이 있었느냐고 대번 소설이라 몰아 부칠 사람 있을 까 걱정 됩니다.
신라가 복건성에 있었다만 말해보아도 답답하기만 할 테니, 신라 건국에서 패망까지
서울 옮긴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진시황제의 후손인 신라는 그 시작이 진(秦)나라로부터 말해야 옳습니다.
진나라의 진(秦)나라가 망하고 난후,
1.신라의 시작
[6(촌)국(國): 하남성 개봉(開封)동쪽; 고려때 송나라가 있었던 곳]
북사 94권 고려(高麗) 전(傳) 본문 3224쪽 기록
신라자기선본진한종야 지재고려(=고구려)동남거 한시낙랑지
(신라(新羅)자(自)기(其)선(先)본(本)진한(辰韓)종(種)야(也)지(地)재(在)고려(高麗)(=고구려)동남(東南)거(居) 한(漢)시(時)낙랑(樂浪)지(地)
신라는 그 선조의 근본이 진한의 종자이다.고구려의 동남쪽에 살았다. 한나라때 낙랑군 땅
->이렇게 옛 사서에 신라 국민이 어디 출신이라고 똑똑히 써 있다.
그리고 식민사학에서는 고구려 동남 경주라 했는데 진한의 땅이 엄연히 낙랑군이었다고 써있다.
기존사학에서 낙랑은 평양 근처 아닌가? 그러므로 식민사학 허구가 들어남.
낙랑이 경주가 되든지 신라가 평양에 있던지 해야 하니까?!
진한역왈 진한상전언(진한(辰韓)역(亦)왈(曰)진한(秦韓)상(相)전언(傳言))
위 낙랑땅을 역시 진한(辰韓)이라하며 진한(辰韓) 역시 진한(秦韓)이며 서로 말이 전달되고 같았다.
진세망인피역래적마한할기동계거지
(진(秦)세(世)망(亡)인(人)피(避)역(役)래(來)적(適)마한(馬韓)할(割)기(基)동계(東界)거(居)지(地))
진나라 세상이 망하자 피해 도망가 일하기 좋은 마한의 동쪽 경계로 가서 살았다.
이진인고명지왈진한기언어명물유사
(이(以)진(秦)인(人)고(故)명(名)지(之)왈(曰)진(秦)한(韓)기(其)언어(言語)명물(名物)유사(類似))
그래서 진(秦)나라 사람이라는 이유가 됐다
진한(秦韓)사람들의 언어는 명물이고 (마한사람들과) 유사(=비슷)하다.
*약간은 틀리게 적은 양서(梁書))54권 열전(열전)88 동이(동이)391쪽을 비교합니다.
신라자기선본 진한종야 진한역왈 진한상거만리 전언진세망
(신라(新羅)자(自)기(其)선(先)본(本) 진한(辰韓)종(種)야(也) 진한(辰韓)역(亦)왈(曰) 진한(秦韓)상(相)거(去)만리(萬里) 전언(傳言)진(秦)세(世)망(亡))
신라는 선조가 본시 진한이라 했다. 진한(辰韓)은 역시 진한(秦韓)이며
진한(辰韓)에서 진한(秦韓)은 1만리 떨어져 있고 전하는 말이 진나라 세상이 망하자,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에서 1만리 떨어져 있다는 말에서 진(秦)나라 수도가 서안의 옆도시 함양이므로 함양에서 동(東)으로 1만리는 경주이고 서(西)로 1만리면 천산 부근인데, 동으로 기존사학에서 말하는 경주로 볼 것인가?!
아니고 서쪽인 천산 부근으로 보아야 하는가?!
왜냐면 신라시조 혁거세의 별칭을 생각 해 보라.
거서간(居西干)이 뜻하는 바를...... 서쪽에 살았던 임금아닌가?!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그런 이름도 무시한 쪽이 정당한지,
그런 이름까지 고증으로 삼는 쪽이 정당한지?!
아무튼 1%의 근거라도 있으면 뿌리채 캐어내는 것이 사학가의 임무인 데에 충실했던
독일인 발굴가 하인리히 슐리이만이 일리아드 오딧세를 가지고 터키에서 트로이 목마를 발굴해낸 것을 상기하자!!
그리고 천산에서 온 진한(辰韓)은 진한족이 세운 진한(秦韓=진나라)이 멸망하자 낙양[=낙랑] 동쪽 땅으로 도망 갔다가 그 곳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 고구려에 복속되는 통제와 간섭, 도움을 받다가 나중에 그 설움(?)을 갚는 지?
삼국통일함이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습니다.
참고 : 마한의 위치:산서성,섬서성,하북성.[낙양이 중심]
이 이하의 양서(梁書) 기록은 북사와 동일하여 생략합니다.
위의 글을 읽고 난 후 생각 해 보면,
진한사람, 진(秦)나라의 중심귀족을 형성하고 있던 신라가 마한사람,
한(漢)나라와 같은 계열의 고구려와 싸워 이긴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진(秦)을 멸망시킨 한(漢)나라--->그 복수가 되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싸움이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또한 이 끝이 당나라 계열의 왕건이라, 같은 종친의 나라라고 서로 혈통 따지던 당과 신라,
그래서 신라의 경순왕은 왕건에게 순순히 항복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의 국적만 갈릴 뿐,
지나와 우리는 대륙에서 한데 뒤섞여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인명국위방 궁위호적위구행주
중국인(中國人)명(名)국(國)위(爲)방(邦) 궁(弓)위(爲)호(弧)적(賊)위(僞)구(寇)행(行)(酒)
(중국)나라 가운데 산 사람이라는 사람과 이름과 나라가 되었고,
나무활로 활을 쓰는 도적질이나 하면서, 길다니면서 술 마시는 짓 했다.
---->나라 가운데 사람이라는 중국인 시조가 되었음을,
우리는 신라가 그러했는지는 꿈에도 생각 못 한다.
위행상상호 개위도불여
(위(爲)행(行)상(觴)상(相)호(乎) 개(皆)위(爲)도(徒)불여(不與))
길다니며 술마시는 모두가 하는 짓이 (마한과) 같지는 않았다.
마한동우 진한왕상용 마한(馬韓)동(同)우(又) 진한(辰韓)왕(王)상용(常用)
진한왕은 마한사람을 매사에 따라했다.
마한인작지세세상정진한부득자립왕(마한(馬韓)인(人)작(作)지(之)세세(世世)상전(相典)진한(辰韓)부득(不得)자립(自立)왕(王))
마한사람이 지은 세세상전에 진한사람들은 자립을 위해 부득이 왕을 세웠다 한다.
명기유이지인고야 항위 마한소제
(명(明)기(其)유(流)이(移)지(之)인(人)고(故)야(也) 항(恒)위(爲) 마한(馬韓)소(所)제(制))
확실히 (진한(辰韓)사람이)흘러 들어온 사람이 많았고 항상 마한 사람들이 통제를 하였다.(또는 마한사람 하는 것을 따라했다.)
진한시유육국초분위십이 신라즉기일야
(진한(辰韓)시(始)유(有)육국(六國)초(稍)분(分)위(爲)십이(十二) 신라(新羅)즉(卽)기(其)일(一)야(也))
진한의 시작은 6국인데 더 작게 나누면 12이고 신라는 그 중의 하나이다.
--->섬서성 서안의 인접도시인 진나라 수도 함양을 비롯한 그 일대에 진나라 귀족 집단이었던 신라인들이 진나라 천하통일 30년 후 망해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진 사람들의 주제 세력인 후일의 신라 선조들의 비참한 유랑이,
당시 낙양에 존재하던 마한의 동쪽 경계였던 낙양 동쪽 200km지점 개봉(開封)(그 후의 고려때 송나라 수도)동쪽으로 가서 최초의 6국을 세웠다는 말인데,
이를 기존사학에서는 경주에 6촌이 있었다고 함.
또한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전신인 마한의 통제와 간섭을 받던 진한은 고구려와 신라가 되고 나서도, 통제와 도움을 받다가 나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친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 내지는 건국 시초부터 받은 모멸감을 갚은 것 아닌가 하고 2가지로
해석 될수 있음.
1) 분명히 6촌아닌, 6국중의 하나가 신라라고 써있고,
이는 같은 대륙에 살았던 북사의 기록이라 정확하다고 보는데, 기존사관에서는
6국->6촌 이 합하여 신라가 되었다는 날조입니다.
2) 이와 같이 북사는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음을 볼 때, 북사 집필진이 과연 극동의 한반도 동남부 경주에 쳐박힌 신라라면 이런 자세한 기록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아심.
3) 이전의 이 학회 토론 문답의 터줏대감 김상님과 식민사학자님
말씀대로 진나라 후손들이 B.C. 200전후해서 대거 한반도 경주로
이민 왔다면,또는 한반도 토착 세력이었다면,
철궁이나 각궁도 아닌 나무활로 도둑질해서 연명하며, 자포자기한 망국민의 행태를
내비치는 길 가면서 술 먹고 다녔다는 이 기록이 거꾸로 왜곡 기록이 되는데?!
경주였다면 적어도 원시를 벗어나는 농업경제인 농경의 풍요스러움이 있었을텐데?!
4) 이 중국인명국위방(중국인(中國人)명(名)국(國)위(爲)방(邦)이 뜻하는 신라인들의 위치와 중국인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 가?!
나라 가운데(당시의 진(辰),마한(馬韓)에 소속된 무수한 작은 나라 가운데)사람이라,
사람이름 되고 나라이름 되었다는
이 기록은 신라인 선조가 그렇다니 얼마나 넌센스인가?!
그리고 경주에 기존사학계 말대로 진한이 있었다해도 진나라 후손들이 마한 동쪽으로 가서 진한 세웠다 소리는 배워 보지도 못했다.
삼국사의 전(前) 3분의 1을 부정하여 알기 쉽게 부정한 기존 사학계의 잘못.
다음 남사(남사(南史)) 79권 이(夷)맥(貊)전(傳) 2883쪽
신라기사상북사재백제동남오십여리
신라(新羅)기(其)사상(事祥)북사(北史)재(在)백제(百濟)동남(東南)오십(五十)여(餘)리(里)
북사에 그 사실이 자세히 써 있는 신라는 백제의 동남 50여리에 있다.
----->기존 사학에서는 백제 동쪽이지 동남은 아님.
기지동빈대해남북여구려백제접위시신로송시신라혹왈사라
기지동빈(其地東濱)대해(大海)남북여구려백제(南北與句麗百濟)접(接)위(魏)시(時)신로(新盧)송시(宋時)신라(新羅)혹왈(或曰)사라(斯羅)
그 땅은 동쪽에 있는 큰 바다와 같다. 남북은 고구려와 백제에 접했고 위나라 때는 신로였다가 송나라때는 신라 혹은 사라.
기국소불능자통사빙양보통이년성모명진시사수백제봉헌방물기속호
其國小不能自通使聘梁普通二年姓募名秦始使隨百濟봉헌(奉獻)방물(方物)其俗呼
그 나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 초빙을 못했다.
양나라 보통 2년 진나라가 처음으로 성명을 모집했다(사신을보내서).
백제가 이를 받들어 모시고 방물은 헌납하고 그 풍속을 따랐다.
*참고 : 진(秦)나라도, 신라 전신(前身)이니까 우리민족.
성왈건모라기읍재내왈탁평재외왈읍록역중국지언군현야
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
(그 신라 당시) 성은 건모라이며 그 성안, 읍에 있는 사람은 바깥으로 다니지 않았고 밖으로 다니는 사람은 좋지 않은 행세 했다고 평하고 나라안에서만 군현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말을 통하며 살았다 한다.
국유육탁평오십이읍륵토지비미의식오곡다상마작겸포복
국유(國有)육(六)탁(啄)평(評)오십(五十)이(二)읍(邑)륵(勒)토지(土地)비(肥)미(美)의(宜)식(植)오곡(五穀)다(多)상(桑)마(麻)작(作)겸( )포(布)복(服)
나라는 여섯이며 사람을 튕겨 낸다는 평이 있고 52읍 둘레의 토지는 비옥하며 마땅히 오곡 심겨 있고 뽕나무와 마가 많아 비단 옷과 베옷을 만든다.
우승마남여유별기관명유자유한지일한지제한지알한지일길지기패한지
우(牛)승마(乘馬)남(男)여(女)유별(有別)기(其)관명(官名)유(有)자(子)유한지(유旱支)일(壹)한지
旱支제(齊)한지旱支알(謁)한지旱支일(壹)길(吉)지(支)기(奇)패(敗)한지旱支
소, 말을 타는데, 남녀 유별했고 관명의 이름에는 유한지, 일한지, 제한지, 알한지, 일길지, 기패한지이고, 그 자식 격이 되는 이름이[유자(有子)],
기관왈유자예유왈위해고왈가반화왈세기배급행여
(기(其)관(官)왈(曰)유자(有子)예(禮)유( )왈(曰)위(尉)해(解)고(袴)왈(曰)가(柯)반(半)화(靴)왈(曰)세(洗)기(其)배(拜)급(及)행(行)여(與))
유자예유, 위해고, 가반화, 세기배급행여이다.
고려상류무문자각목위신어언대백제이후통언
고려(高麗)상(相)류(類)무(無)문자(文字)각(刻)목(木)위(爲)신(信)어(語)언(言)대(待)백제(百濟)이(而)후(後)통(通)언(焉)
고려(=고구려)는 (신라와) 유사하게 같은 문자가 없어 나무에 조각하여 서로 알수 있는(믿을 수 있는) 언어로 통하였는데, 백제도 후에 통하였다.
----> 여기에서 깨우치는 것은 진(秦), 한(漢)이 우리민족의 나라인 것이다.
이를 우리민족 역사에서 끊어다 지나인들에게 선물 한 것이 일제(日帝)이다.
우리를 왜곡축소 시키면서 한 술 더 뜬것이 진(秦), 한(漢)을 지나인들에게 붙여주니 지나인들이 덩달아 맞장구 친 것.
진(秦)나라가 신라의 선조나라라고 이제까지 해석하였으니,
한(漢)을 말한다.
한(漢)은 글자만 다르지, 그 뜻이 다 같은 밝음이다.
한(漢), 환(桓) 모두 환하다, 아니면 한(桓)으로도 읽는 이 말은 둘다 같고 환하다, 하나, 한겨레의 뜻도 있으니, 우리 역사만 왜곡한 것 아니고 중국까지 왜곡한 것을 좋아라 받아들이는 지나인들 또한 한 통속인 것!!!
말 나온 김에 따져 보자
1. 우리 동이족의 본류(本流)-삼국, 고려, 조선, 발해 생략하고 환인 환웅, 복희, 신농, 황제, 요순, 하(夏), 은(殷), 주(周), 진(秦), 한(漢), 한(韓), 수(隋), 당(唐) 남(南), 북송(北宋).
2. 우리 동이족의 지류(支流)
위(魏), 촉(蜀), 오(吳)의 3국, 남북조(南北朝)의 송(宋), 제(濟), 양(梁), 진(陳),
5대(代)인 양(梁), 당(唐) 진(晉), 한(漢), 주(周)와
거란(契丹)), 요(遼), 금(金), 몽고(蒙古), 원(元), 청(淸)
위와 같고,
일본은 백제의 후손이니 말할 것도 없이 동양(東洋)사(史)가 우리 민족사인 데,
신채호 선생 말대로, 아(我)와 피아(彼我)의 역사구분과 현실이 이렇게 되었는 바,
우리는 분명히 역경(易經)의 해석대로, 오성취의 현상대로,
물극필반(物極必反) 현상대로,
첫 걸음인 남북평화통일이 2002년이나 2003년이 되니,
여러분들 중 내 말 듣고 스스로 준비하는 분은 선각하여 당혹함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통일 이후의 사회 혼란을 연구한 동덕여대 유극렬교수 저서 통일 맞이 돈 만들기[예지각발행]란 책에서, 설파한, 북한의SOC투자에 따른 물가앙등,
남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못사는 이북민들의 북한이 남겨 놓은 곳곳의 탄약고로 인한 무장폭동, 이북 노동자 200만명과 그 가족 1000만명의 남하(南下)가,
2002년이나 2003년에 벌어진다는 역경의 해석이 코앞에 닥침을 모르는 우매한 분들께,
다시 한 번 경각심을 보냅니다.
1894년 일제(日帝)가 청일전쟁을 이 땅에서 치른 이후,
병자호란이후 300[?]년 평화의 끝이,
노일전쟁도 이 땅을 병참기지로 만들은 일제(日帝)가 그 이후,
만주침략, 지나사변, 태평양전쟁, 6.25사변의 69년간의 전란 시대 이후,1953에 찾아온 47년간의 평화의 끝이,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이치대로,
격동의 30년이 기다리고 있음을 어찌 모르십니까?!
미리 서둘러 국론 통일함이, 앞날에 큰힘을 발휘하는 데......
이 글은 당분간 글 못 올리기에 최후와 같은 심정으로 당부 말씀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