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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에 대체도로가 왜 필요한가
아라곤 길 첫날의 낮과 밤이 모두 행복하고 달콤했으며 아레스까지 짧은 거리라는데서
오는 여유 탓인지 늦잠이 들었다.
모처럼 편안한 밤을 보낸 아침의 몸도 마음도 다 가볍고 상쾌했다.
꼴찌로 알베르게를 나와 아라곤 왕국의 수도였던 고도의 신시가지를 벗어났을 때 먼저
떠났던 한 초로남(初老男)이 가드레일(guardrail)에 앉아 지도 검색에 골몰중.
볼거리가 많다는 대체도로(Alternativo/alternative)로 가려는 듯.
간밤에 65세 나이를 과시하다가 나한테 기죽은 한 스페인 영감이 내게 권했던 길이다.
카미노에 볼거리 위주의 대체도로는 언제부터, 왜 생겼는가?
모든 루트에 이같은 대체도로가 적잖이 있다.
우회도로는 천재지변 또는 공사를 비롯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돌아가야 하는 길이지만
순례자에게 관광명소 위주의 대체도로가 왜 필요한가?
뽕도 따고 임도 보면 더 좋을 것이라는 발상인가?
흥행의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고전적 카미노에 대한 동경심의 약화는 물론 순례길의
본질을 박제화할 뿐일 것이다.
만일, 카미노까지 침투한 상술의 농간이라면 양두구육의 처사인 동시에 본말이 전도된
이같은 시책은 결국 소탐대실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순례가 영성수련을 목적으로 한다 해서 순례자에게 고난이 필수는 아니다.
따라서, 순례길이 허들 레이스(hurdle race)처럼 형극의 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거나 순례길에 있는 관광명소를 피하는 것이
순례자의 길(본분) 또한 아니다.
그렇다 해서 선택적(택일을 요구하는) 관광명소길이 순례자의 길은 더더욱 아니다.
정답이 자명한데 이 순례자는 왜 고민하고 있을까.
피레네산맥을 등지고 남하했던 어제와 달리 피레네를 우측에 낀 서쪽 일변도의 아라곤
길은 N-240도로와 자리바꿈을 하다가 도로를 떠나 숲길이 된다.
숲길은 개울을 건넌 후 개울과 잠시 함께 가는데 물이 뜨물처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석회광산지대인 것 같다.
널따란 휴게소가 사람이 무척 그립겠다.
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이용자는 커녕 행인이 없으니.
창고인 줄 알았는데 비베로(vivero/苗床?)라는 건물이 용도폐기되었는가.
곧 볼성사나운 흉물로 남을 것 같다.
허수아비가 있는 산골길이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어느 산촌을 통행중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할 만 하다 할까.
수풀 속에 핀 야생화에 취해 있는 후한 체구의 중년녀가 순진한 소녀처럼 보였다.
순례중에 배낭멘채로 쭈그려 앉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어찌 밉게 보이겠는가.
카메라에 담으려는 순간에 놀란 듯 일어선 여인은 홀란드산(産) 스페인녀다.
'올란드'라 해서 잠시 멍청하니까 네덜란드라고 바꿔 말하는 센스있는 그녀.
아뿔싸, 'H'는 묵음인데....
카메라 앞에서 미소짓는 포즈를 취했다.
꽃 앞에서 순수해지는 것처럼 카메라 앞에서는 포즈를 취하는 것이 본능?
거스 히딩크를 아느냐고 물어보려 하는데 왜 계속 형광등이었을까.
떠오르지 않던 이름이 헤어진 얼마 후에 비로소 기억났으니까.
북쪽 야산에서는 고가도로용 교각공사 중인데 회색 흙으로 보아 석회지대가 맞는 듯.
보알라르 산록(Monte el Boalar)을 타고 가는 숲길 카미노는 만만하고 편한 길이다.
관망의 시각이 다른 것도 문화의 상이(相異) 탓인가.
거창한 안내 간판의 홍보와 달리 전망이 별로인 '베르둔 운하의 전망대'(Mirador de la
Canal de Berdun)에 실망했다.
공짜로 잠자라 해도 거절할 것이니까 어차피 나와는 무관하지만 아라곤 호텔의 순례자
우대 시책도 실망스러워 산타 실리아까지 단숨에 갔다.
우에스카 주의 지자체중 하나다.
순례자 정장을 갖춘 순례자(사도야고보?)가 동구에 서서 수문장을 자임하고 있는 듯한
산타 실리아(Santa Cilia)는 N-240도로와 아라곤 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주민 200명 남짓인 이 마을도 인구의 감소에는 속수 무책인 듯.
1910년에 511명이었던 주민수가 1c 사이에 5분의 2로 줄었다니까.
공교로운 것은 이주 주민의 다수가 식민지였던 남미의 아르헨티나를 택한단다.
명상의 길, 각성의 길, 자유의 길, 아주 특별한 길
이베리아 반도인의 꽃가꾸는 정성을 이미 높이 평가하고 있거니와 길가 참한 집마당의
잘 가꿔진 꽃들이 내 집 마당의 꽃들에 대한 걱정을 하게 했다.
늙은 아내와 자식들과 손자들이 아니고 꽃을 걱정하다니?
가족애가 부족하거나 노망했다고 비난받아 마땅한가?
아니다. 그 비난은 수용할 수 없다.
내 가족은 잠시도 잊을 수 없고 비교 우위가 아니고 내게 단 하나뿐인 최상의 관계다.
이것은 우리 가족의 유전자일 것이다.
70년여년 전 일이다.
나는 하나뿐인(당시에는) 여동생을 졸지에 잃었다.
내 애통이 부모님의 비통에 당하겠는가.
그러나 부모님은 조부님께서 며칠간의 여정으로 집을 비우신 바로 그날 일어난 일이라
조부님의 상심 걱정에 당신들의 슬픔을 맘놓고 드러낼 수 없는 상태였다.
한데, 조부님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여정을 취소하고 당일 밤에 귀가하셨다.
당신께서 애지중지하셨으며 아침에도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했던 어린 손녀의 죽음이
발길을 돌리시게 한 것이며 나는 이 분의 손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
포르투 길에서 로저 교수가 집에 전화하라고 내미는 전화기도 사양했다.
막내가 준 국제전화카드도 쓰지 않고 있다.
다만 며칠에 1번 꼴로 여정을 알리는 엽서를 집에 보낼 뿐이다.
내 가족은 엽서를 통해서 내가 어디쯤 가고 있겠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아나로그 방식이다.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걱정해서 되는 일인가)
무심하기 때문이라고?
무심하지 않으면 대책이 있는가?
그러므로, 믿을 수 밖에 없다.
나로 하여금 내 조부님의 유전자를 극복하게 한 것은 오직 믿음의 힘이다.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성서)는 믿음이다.
모두 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다면 75일은 커녕 단 하루라도 마음 편히 걸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가족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면 내게 산도 길도 있을 수 없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일체의 유무형 소유욕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내게 아직 필요한 소유는 오직 배낭이다.
또한, 배낭메고 산야를 편히 걸을 수 있으며 불편해도 잘 극복할 수 있기 바랄 뿐이다.
이 소망마저도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다.
왜냐하면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성사 여부는 '그 분'에게 달려 있음을 믿으니까.
"진인사 대천명"은 표현이 다를 뿐 동일한 뜻이다.
먼 이베리아 반도의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이 바람은 잘 이행되고 있다.
내게 먹고 자는 것은 전혀 현안이 아니다.
잦은 풍찬노숙으로 삼불(三不:不食不飮不息)체질이 된 나는 하루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하룻밤쯤은 눕지 않아도 대세에 지장 없으니까.
잘 데가 없다면 걸으면 된다는 뜻이다.
75일중 5분의 3인 45일 동안에 1일 평균 비용은 15유로쯤에 불과했으며 적응도가 높아
앞으로는 더욱 적은 비용이 들 것이므로 돈 걱정도 없다.
환전해온 2.000유로의 태반이 남아있으니까.
그러나 식물은 다르다.
특히 자생력이 박탈된, 의존도100%인 원예식물은 사람의 관심권 밖에서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아내는 약한 체력 때문인지 관심에 비해 돌보는 일에 소홀한 편이다.
아들과 두딸은 관심의 실행권(圈) 밖에 있다(분가가 이유지만 이 관심표현을 노동으로
간주하는 아들과 별무관심인 딸들에게는 어차피 기대할 수 없다)
사람에게서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사람에게 돌려주고 생을 마감하는 신실한 생명체인
꽃들을 멀리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걱정하는 이유다.
이처럼 생각하며 걷는 명상의 길, 걸으면서 깨닫는 각성의 길, 공차증을 비롯한 일체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의 길, 더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분'과 상봉하는 아주 특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야 말로 축복중 축복,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다.
순례길의 돌탑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산타 실리아의 참한 집에서 시작된 이 상념에 몰입되어 있는 동안에 6km거리인 푸엔테
라 레이나 데 하카(Puente la Reina de Jaca)에 도착했다.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카메라에 담았나.
아라곤 길이 제법 상세하게 담겨있다.
널따란 농로와 N-240도로, 개양귀비밭과 밀보리밭 길, 숲길과 아라곤 강둑길, 다시 N-
240도로와 작은 돌탑들이 난립된 아라곤 강둑길 등.
생각이 얼마나 골돌하였기에 N-240도로를 꽤 많이 걸어야 했는데도 공차증을 느끼지
못했을까.
자고로 돌이 많은 산길에는 돌탑이 있기 마련이다.
작은 돌무더기로 시작하여 보기 좋은 돌탑으로 발전한다.
곧 돌탑에 얽힌 전설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서낭당 신앙이 형성된다.
제법 합리적이다.
그러나 기저에 깔려있는 목적은 돌뿌리에 차여 넘어지면 부상당하기 십상이므로 돌에
차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돌의 제거에 있다.
한데, 이즘에는 한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돌탑에도 개인주의적
경향이 반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선인들이 했듯이 한곳에 정성스레 쌓는다면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의미있는
대형 돌탑이 되련만 하나같이 개별적으로 돌 위에 돌을 능력껏 올려놓고 간다.
내가 걸은 사도 야고보의 길들에도 예외없이 동일한 현상이다.
싹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지저분하고 산란한데도 자꾸 늘어만 간다.
무의식적이거나 몰지각한 추종 또는 모방현상일까.
암석 숭배(신앙)는 돌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던 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선사시대라 기록은 없지만 발굴된 유물들에서 나온 추정이다.
바위의 형상에 따라 각기 다른 소원을 비는 무속신앙은 물신신앙(fetishism)의 한 섹트
(sect)로 민간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좀처럼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작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으며 무엇을 빌었을까.
더구나 순례길이라는 특수한 의미의 길에 순례자라는 특별한 신분이 쌓은 많은 돌탑을
어떨게 이해할까.
넘어지지 않도록 치우는 것이 아니라 길을 어지럽혀 놓은 저 돌무더기들을.
인구의 감소현상 때문에 갖는 고민이 이웃마을 산타 실리아와 동병상련의 관계에 있는
푸엔테 라 레이나 데 하카(Puente la Reina de Jaca) 역시 우에스카 주의 지자체다.
주민수가 200명쯤 되는 아라곤 강가의 특징 없는 농촌이다.
피레네 산맥권에 있는 아라곤 지역은 고원지대지만 곳곳에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한 반도의 경우, 백두대간의 지리산 자락인 운봉과 인월, 아영, 산내 등 4개면에 펼쳐져
있는 평야는 대표적인 고원평야다.
1950년대 말, 결핵과 최후의 결전장으로 택한 그 곳에서 나는 가을 추위에 한해 농사를
망치는 현장을 목도했다.
해발 500m대 인데도 기후에 민감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500m대는 고원이 아니다.
논농사와 밭농사의 차이일까.
아레스 단상(이문을 쓸어담는 중)
푸엔테 라 레이나 데 하카에서 아레스는 4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다.
고도 약100m를 오르므로 지극히 완만해서 별로 의식되지 않는 산자락 길이다.
이방 늙은이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는 누런 평야가 그림같다.
프랑스 길을 걸을 때 새싹처럼 파릇파릇 하던 들녘이 어느새 황금벌로 변해가다니!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다시 감탄하거니와 나의 나그넷길이 그만큼 늘어가고 있슴이다.
일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지형이지만 일몰 때 걸었더라면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금방 비가 쏟아질 듯 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나직한 브라사네스 산(Brasanes)을 완만하게 도는 산허리길의 끝이 아레스(Arres)다.
작은 산봉(山峰) 정수리의 낡은 성채같은 집 몇채가 눈에 들어왔다.
알베르게와 교회와 바르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중년 남녀가 나를 맞았다.
관리인 플로렌티노(Florentino)와 레히나(Regina) 부부다.
겉으로는 무덤덤하나 속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룻밤 보낼 때 이미 느꼈고 귀국 후 보낸 함께 찍은 사진의 답장에서도 그렇게 느꼈다.
해마다 1천여명이 거쳐가고 사진도 더러 찍지만 편지 또는 사진을 보내주는 순례자가
그리도 드문가.
e-mail이라는 아주 편리한 수단을 늙은이도 활용하는데 왜들 무심할까.
경사지형에 세운 건물이라 앞에서는 3층이나 후면은 2층인 알베르게의 협소한 내부와
달리 관리인이 만든 간소하나 정이 담뿍 담긴 만찬은 거창하고 식탁은 넓어보였다.
도나티보(donativo/donation)로 운영되는 알버르게의 투숙자는 나를 포함해 6명.
코레아노, 이탈리아노, 프랑세스 각1인 외에는 에스파뇰이며 70대와 30대 각1인과 50,
60대로 기억된다.
그들은 내가 가톨릭신도가 아닌데 의아했고 내 나이에 놀랐고 내 순례자여권의 스탬프
에는 더욱 경악했다.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들은 한국영감도 자기네와 같은 줄 알았단다.
왜냐하면, 관리인의 권유로 들어간 교회 안에서 그들과 대면했으니까.
나는 신도가 아닌 한국 영감의 견해를 듣고 싶다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가톨릭교회가 범한 이전의 많은 과오를 비판하면서도 현대의 그들에게는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고 있다.
왜냐하면, 각계각층이 진행하는 사회구원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중에 그들의 것이 가장
진지하고 신뢰하게 하는 진정성이 있으니까."
그들은 내 말에 박수로 응답하며 이해하고 동의한다고 했다.
실은, 이처럼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외국어 실력이 내게 있는가.
뭐라고 말했는지 나도 잘 모를 영어와 스페인어 단어의 나열에 불과했을 텐데 그들이 내
말을 얼마나 이해했겠는가.
그러니까 의례적인 응답일 수도 있겠다.
이날 밤 늦은 시각에 나는 집에 엽서를 썼다.
"광땅을 잡는 배팅일 줄은 미처 몰랐오.
본전은 이미 에누리 없이 건졌거니와 지금 이문만 쓸어 담는 중이오.
<중략>
내 긴여정의 진수를 만끽하며 보내는 이틀째의 밤은 조촐하나 행복이 가득찬 만찬으로
만복이 되었오.(몸과 마음 모두)
나의 긴여정(stamp들을 보면 아니까)에 혀를 내두르는 이들에게 내가 한국늙은이임을
강조하는 것은 커다란 민간외교라는 자부심도 갖게 되오.
5월 19일 밤, 스페인 아레스에서 영감이. <계 속>
첫댓글 예습합니다. 2013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