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그동안 이 나라에는 현직 외에 여섯 명의 대통령이 지나갔는데 그 중의 한 명도 무사히 임기를 끝내고 여생을 평온하게 보내는 예가 없었다. 권좌에서 쫓겨나거나 피살되거나 공적인 수모를 당하거나 심지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거나 했다. 참으로 밖으로는 부끄럽고 안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지나간 대통령의 동상이나 기념관 하나를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그러면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국민에게 유감만을 남겼고 아무런 공헌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해방 이후 이 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고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대통령의 역할과 무관했다고 할 수는 없다. 무릇 역사에는 예외 없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고 그러한 역사의 주역을 맡은 대통령에게도 양면이 없을 수 없다. 부정적 측면을 합리화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난해 조선일보가 주최한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전', 그리고 1년 동안 연재된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은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진실과 치적을 널리 알리고 그분의 건국 공로를 재평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연재물을 만들어 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역사에 단절은 없다.그 동안 한국을 이끈 대통령들도 돌이켜 보면 한국의 발전이라는 하나의 축에 동일하게 서 있었고 또 실제로 서있던 인물들이다.국민들의 축하 속에 취임하고 열성껏 국민에 봉사하다가 온 국민들의 축복 속에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는 대통령은 아직 없었지만 이제 그런 지도자를 만들어 내야 할 책임이 우리 국민들에게 있다.그것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교훈을 얻으려는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하다.1)
이 얼마나 슬기로운 말인가! 한편 작가 복거일 씨는 전시회를 돌아 본 소감으로 "셰익스피어는 사람들의 과오는 청동에 새겨지고, 그들의 덕성은 물로 쓰여진다 하였는데 이제 지나간 대통령들의 업적을 잉크로 써야 할 때가 왔다"고 쓰고 있다.2) 지당한 말이라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1945년 이후 우리는 대체로 네 가지 민족적 과제와 대결하느라고 처절한 고난을 겪어왔다. 첫째는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 민주에 터전한 대한민국을 건립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조상 전래의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셋째는 구미에서 이식한 민주적 대의정치를 바르게 정착시키는 일이고, 넷째는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남북통일을 이룩하는 일이다. 이 중에서 첫째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둘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을 이끈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아마도 지금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두 대통령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여 우리에게 유감을 남겨 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분들이 이 나라에 끼친 공로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먼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쓴 사람들은 그가 미국의 앞잡이이고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가져온 독재자라고 혹평한다. 그러나 최근에 구 소련 정부의 비밀 외교문서들이 공개되자3) 이른바 '북침론'의 억지는 그 근거를 잃게 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반탁과 자주독립을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미국정부와 싸웠는지는 미국정부의 공개된 기록과 역사가들에 의하여 소상히 밝혀지고 있다. 필자는 최근에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15년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 역할을 한 바 있는 R. T 올리버 박사를 만나 담론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인의 현대사』4)를 집필하고 있었는데 그 책이 출가된 후 한 권을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고 이승만 박사에 관하여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우리에게도 현대사에 관한 자료는 많다. 그러나 이 책과 같이 이승만 박사의 구국행보를 가까이서 보고 객관적으로 기술한 저서는 보지 못했다. 필자는 이 박사에 관하여 잘 모르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주로 올리버 박사의 저서를 참조하면서 이 박사의 건국운동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소련과 미국의 2대 강국이 한반도에서 마주치게 되는데 미국은 한국의 사정을 너무나 모를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의 전략을 오판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미국의 지도층이 종전 후의 한반도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단순히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후견 통치 경험을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처음으로 신탁통치안을 건의한 것은 1942년 미국의 Intitute of World Affairs라는 정책연구기관인데 이때부터 이승만 박사의 대미투쟁이 시작된다. 이 박사는 동년 12월에 미국무성 히스 장관과 차관보 등을 만나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하는 것만이 소련의 한반도 진출을 예방하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히스는 미국의 전쟁 동맹국인 소련의 의도를 곡해하고 있다고 하여 화를 냈다. 이승만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 해 1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한반도는 공산국가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5월 15일 다시 루스벨트에게 서한을 보내 "40년 전에 미국이 그토록 우려하던 러시아의 팽창주의의 위험은 아직도 사리지지 않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박사의 이러한 동찰과 예언이 적중하였다는 것은 후일에 판명된 일이지만 당시의 미국정부는 나라가 없는 이 박사의 충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3월 영국 에덴 수상과 만난 자리에서 신탁통치안을 공식화했고, 그 해 11월의 카이로 회담 후에 테헤란으로 가서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40년 간의 신탁통치안을 거론하였다. 이 박사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그러한 신탁통치안은 제2차 세계대전의 대의를 몰각한 처사라고 항의하였는데, 이 때에 비로소 미국 언론에 신탁통치안을 반성하는 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례로 국무성에서 퇴임한 S. 웰스는 한국의 독립은 20세기에 저질러진 가장 큰 범죄를 재정하고, 태평양지역에 건설해야 할 새로운 국제질서의 안정화 요인이 될 것이다라고 신문에 썼고, 또 어떤 이들은 소련이 참전하면, 시베리아에서 소련이 훈련한 3만 5,000명의 조선족들을 앞세워 한반도의 큰 부분을 점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는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해 소련을 전쟁으로 끌어들여 일본을 공격케 하는 일이었다. 1944년 2월 얄타회담(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회동)이 열렸는데 이 때에 국무성 실무자들이 대통령을 위해 준비한 자료에는 이 회담에서 "영국 및 중국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련과도 한반도의 군사적 잠령계획과 신탁통치시의 국제적 관리방안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994년 4월 15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그 뒤를 이어받게 되는데 그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깊은 지식없이 동년 7월에 포츠담 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루스벨트와는 달리 스탈린의 눈치를 보거나 회유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타고난 성격도 그러려니와 이제 원자탄이 완성단계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소련을 두려워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주로 유럽에 관한 문제가 토의되었고 한반도에 관하여는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1945년 8월 6일 드디어 미국의 첫번째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지자 바로 이틀 후에 소련은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그때는 이미 일본이 미국에 대한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8월 9일에는 제2의 폭탄이 나가사끼에 떨어졌고, 14일에는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에 깊숙이 진주하고 있었다. 이 때에 비로소 미국은 당황하기 시작하여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 들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맥아더 장군은 군정 훈령 제1호를 발하여 38선에 소련군 저지선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38선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누구의 탓이냐 하는 논쟁이 있어 왔다. 일부 학자들은 1946∼48년경 미·소관계가 악화하기 이전에 한국사람들이 남북통일을 위해 단결했었더라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만약 말이 날 수 있었다면 더 빨리 갈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가정과 같다. 우선 무엇을 위해 단결하느냐가 문제이다. 소련과 김일성이 주도하는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단결하느냐, 아니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단결하느냐. 이 문제를 떠나서 단결을 강조해 보았자 무의미하다. 만약 그 당시에 국민의 대다수가 공산주의를 원했다면 아마도 적화통일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의 미국은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위하여 소련을 끌어들이는 데 연연했고, 전후 처리가 끝나는 대로 남한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한다는 것이 기정의 정책이었던 반면 소련은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친소적 공산정권을 세운다는 확고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한 주민의 대다수는 한사코 공산화를 원치 않았다.
신탁통치안에 대한 남한 주민들의 거국적 반대가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미국정부와 맞서 끝까지 반탁투쟁을 전개한 지도자는 이 박사뿐이었다. 다른 지도자들도 반탁에 앞장서기는 하였으나 대미 영향력이나 교섭력에 있어서 이 박사를 따를 사람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좌익인사들이 처음에는 반탁운동에 합세하다가 소련의 지령이 있자 찬탁으로 표변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쨌든 남한 주민과 이 박사의 반탁투쟁의 결과로서 미국이 생각하는 신탁통치 기간은 당초의 40년에서 20년으로 후퇴하였고 1945년 12월 26일의 모스크바 외상회의(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서는 다시 5년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현하는 임무를 남한에 진주한 미 제8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맡기게 된다. 하지 중장은 일개 야전사령관이니 정치와 한국을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었고 그래서 이 박사는 이러한 3성 장군과 맞설 수밖에 없게 된다.
1946년 1월, 하지 중장과 소련의 치스티아코푸 대장은 남북간의 점령업무의 협의기관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를 통하여 신탁통치안을 추진하려 하자 이 박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이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이승만 박사의 반대선언은 다음과 같다.
"미국사람들이 쿠바나 비율빈(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었다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비율빈사람이 아니고 4,0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사람이다.나는 미.소공위에서 우리 의견에 맞지 않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보다는 총선거를 통하여 자율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총과 폭탄이 나의 육체는 꺾을 수 있겠으나 나의 정신과 주장은 꺾지 못할 것이다."5)
그러나 미.소공동위는 양측이 처음부터 동상이몽이었고 어떠한 합의점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미측은 소련의 한반도 지배를 거부하는 입장에서 남한의 모든 주요 정당이 참가하는 독립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고, 소련측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인사를 배제하고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맞섰다. 한편 본국 정부의 지시와 한국내의 반탁운동 사이에 끼어 고전하던 하지 중장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1946년 7월 22일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어서 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기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주간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공산주의자와 합작하는 정부는 소련에게 독립을 파는 결과가 된다고 역설하는 한편 입법의원의 의장이 되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군정 감시하에 실시된 입법의원 선거결과를 놓고 말썽이 생겼다. 과도입법의원은 하지가 임명하는 관선의원 45명과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는 민선의원 45면명으로 구성되는데 민선의원은 우익 진영에서 43석 좌익에서 2명이 각각 당선되었다. 그런데 김규식 박사 등이 선거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군정당국은 서울과 한 개 도의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양 지구의 선거를 다시 치른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군정 당국은 김성수를 포함한 3명을 친일파라 하여 일방적으로 당선을 무효화했다. 여기에서 하지 중장과 이 박사 사이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하여 이 박사는 미군정에 대한 일체의 협력을 거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박사는 하지 중장에게 워싱턴에 가서 선거의 진상을 설명하고자 하니 항공편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하지는 이것은 자기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여 화를 내고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1946년 11월 23일 이 박사는 국내 정치단체가 모금한 1만 달러를 가지고 미군용기편으로 동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맥아더장군의 주선으로 7일에 워싱턴에 도착하게 된다.
이 때, 미국에서는 하지 중장의 선거관리가 비민주적이었다는 언론의 비판이 일어났다. 이 박사는 미국무성에 6개 조항의 대한 정책을 건의한다. 그 주요 내용은 (1)남북을 통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동정부가 UN에 가입하여 점령 및 기타 현안 문제에 관하여 미국 및 소련과 직접 교섭할 수 있도록 하고, (3)대일청구권에 대한 특별배려를 해 줄 것과, (4)교역상의 최혜국대우를 공여하고, (5)한국 통화가치를 안정화하여 환율을 설정하고, (6)미소 양국의 군대가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할 것 등이다.
그러는 사이 국내에서는 혼란상태가 더욱 악화하였다. 1947년 중반에 산업생산은 전쟁 전 수준의 20%로 떨어졌고, 민생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치면에서는 송진우 씨가 암살되고 김구 선생은 남북에서 1,500명이 참가한 회의를 서울에서 소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을 선언케 하려 하였으나 몇 시간의 격론 끝에 부결되고 말았다. 미당국은 이것을 이 박사가 시킨 것으로 오해하였으나 이 박사는 미국에서 이 회의를 개최하지 말라는 전문을 보냈다는 것이 올리버 박사의 증언이다.
1947년 4월 21일 이 박사는 하지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였는데 하지는 한국민에 대하여 모스크바 결의에 의한 신탁통치는 불가역의 '법'이니 이에 복종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한편 이승만 박사를 연금상태로 가두게 된다. 봄과 여름에 걸쳐 그의 전화는 철거되고 헌병이 배치되어 24시간 그를 감시했다. 모든 우편물은 엄격한 검열을 받았고 그의 주간 라디오 담화는 물론 국민에 접근하는 일체의 수단이 단절되었다.
그러는 사이 세계정세는 달라졌다. 한반도에 있어서 소련의 의도가 점차 노골화 되고 있을 때 소련은 동구제국을 완전히 공산화했고 지중해 또한 공산화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응하여 미국에서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게 된다. 즉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지중해지역에서 공산주의 침투에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는 그리스,터키 양국에 4억 달러의 차관을 공여할 것과 미국이 군사고문을 양국에 파견할 것을 의회가 승인해주기 바란다"고 요청함과 동시에 미국은 앞으로 직간접으로 공산주의 침략과 위협에 직면한 나라들에게 군사원조를 공여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였다. 이것이 동서냉전의 시작인데 이것은 이승만 박사의 소련에 관한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지 중장은 이 박사의 지도력을 꺾기 위하여 85세의 필립 제이슨을 불러오고 여운형, 김규식 등은 7월 11일 인천에서 그를 환영하였다. 제이슨은 기자회견에서 조선인들은 아직 자치능력이 없고 비누 한 장을 만들 줄 모른다고 폭언하였다. 그가 워싱턴에 돌아가서 이승만 박사에게 군정에 대한 반대를 지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경고하자 이 박사는 "우리는 분단을 끝내고 선출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한.미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라고 응수하였다.
한편 미국정부의 명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돌아보고 워싱턴에 돌아온 웨드마이어 장군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한다. 그리고 8월 11일 마셜 국무장관은 소련의 모로토푸에게 신탁통치에 관한 모스코바 걸정의 수정을 논의하기 위하여 서로 만나자고 제의한다. 그 제의는 8월 26일 4개국 외상회의(미국, 소련, 중국, 영국) 개최 제의로 공식화되었는데 회의의 목적은 남북을 통일하고 하나의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4개국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소련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마셜 장관은 9월 17일 '한국의 독립문제'를 UN 총회에 상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래서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드디어 폐기되고 말았는데 이승만 박사의 끈질긴 반탁운동은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어서 11월 14일 미국이 주도한 UN에서 한국 문제는 43대 0이라는 절대적 지지로 가결되었다.그 주요내용은 1948년 3월 31일까지 '한국의 선거를 감독할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과 독립정부가 수립된 후 7월 1일까지 미·소 양국 군대를 철수한다는 것 등이었다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시행하자면 선거감시를 위한 UN 한국위원단이 북한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1월 22일 주UN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점에 관련하여 일부 학자들은 1946년 6월 3일의 이 박사의 정읍(井邑) 발언을 남북분단의 기점으로 보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정읍 발언요지는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는 것이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박사가 미국무성에 제출한 문서에 있어서도 남북간의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제의하였고, UN한국위원단이 내한했을 때에도 그가 발표한 성명을 통하여 "특히 남북을 통한 총선거실시를 위하여 노력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소련과 김일성이 총선거에 응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그렇다면 먼저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남북 분단의 기점은 그로미코가 UN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 때라고 보아야 한다.6)
어쨌든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의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었는데 국내에서는 적지 않은 진통이 따랐다.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 대 이승만 박사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김씨는 어떠한 경우에도 단독정부는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이 박사는 소련의 의도가 명백하니 단독정부라도 세울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이었다. 즉 이상론과 현실론의 대립인데, 결국 소련과 김일성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의 초점이라 할 것이다. 이때에 3자간의 의견조정을 위해 중화민국 유 총영사가 자기 관저에 3자회담의 자리를 만들었고 뒤이어 하지 중장도 같은 날 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UN의 결의를 존중하여 3자가 합의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박사는 여기에 오기 전에 3자가 이미 합의에 도달했노라고 답변하였고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는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나 사전에 평양과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2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자기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다고 선언하였고 이틀 후에 김규식 박사도 동일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8년 2월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 등이 김일성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자 김일성은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의해 왔다. 결국 4월 27∼30일에 개최된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김구, 김규식, 조소양, 박헌영, 배남운 등이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평양에 가서 보니 회의의 각본은 이미 짜여져 있었고 그 각본에 따라 UN결의와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실망하고 돌아온 김구선생은 계속 통일을 위해 전력하겠다고 말하였고 김규식 박사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는 자신을 잃었다며 앞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성명하였다. 이승만 박사로서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우여곡절 끝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고 주민의 92.5%가 투표하여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동년 7월 19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의결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부동의 목표로 정하고 있었던 소련과 김일성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무력통일의 길을 택하게 된다. 김일성이 조직한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남한의 남조선노동당(南勞黨)과 연계하여 남한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심지어 국회를 포함한 각계 각층에 공산주의 프락치를 침투시켜 남한정부의 전복을 기도하였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군사원조를 청하였고 그 결과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부대, 8개 국경수비대, 20개의 항공정찰기와 100여 대의 전투기 및 30개의 폭격기 지원을 약속받았다.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은 "1949년에는 북반부를 방위하는 데 주력했으나 50년에는 분단된 조국을 통합하기 위하여 영웅적 투쟁을 시작하고 영광되고 완전한 조국 통일을 이룰 것이다"라고 호언하였다.
이러한 반면 남한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승만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세력은 물론, 국회 내 소장파 의원 40여명은 19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안에 동의하고, 1949년에는 본격적으로 미군철수 문제를 제기했다.미국무부는 당초 계획대로 5월 20일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미군철수를 발표하고,6월 29일에 철수를 완료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미군철수 문제에 대해 줄곧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북한의 군사력이 50만 명 이상인 반면 우리는 국방경비대를 개편해서 2∼3개여단 수준의 병력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국민들을 동원해 미군철수 반대시위를 조직하는 한편,미국에 대해 무기제공을 강력히 요청했다.그러나 결국 미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미군철수에는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즉 한반도에 독립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국 군대를 철수한다는 UN결의도 있었거니와 중국의 장개석이 본토에서 대만으로 철수(1949년 9월)할 것이 예상되자 미국정부는 아시아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즉 아시아에서 '먼지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면서 유럽으로 관심을 돌리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애치슨 국무장관, 톰 코나리 상원 위교위원회 의장, 그리고 심지어 맥아더 장군까지도 극동에 있어서의 미국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 일본, 그리고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공언하였고 한국은 그 선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돌이켜 보면 미국은 대한정책에서 당초에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과오를 범했는데 이번에는 군사전략에서 또다시 큰 과오를 범하였다. 즉 성급히 미군을 철수하여 그 때문에 한국전쟁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미국은 이승만 박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박사는 무쵸 주한 미국대사로 하여금 40대의 F-51 전투기의 배치를 워싱턴에 건의케 하였으나 거절되고 말았다. 그 후 이 박사는 필리핀의 퀴리노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과 함께 미국에게 공동방위를 위해 '태평양 동맹'을 결성하자고 제의하였으나 그것 역시 거절 되고 말았다.
1950년 6월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인 캔사스 체류 중에 6.25 남침의 급보를 받고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와서 참전을 결심한다. 한국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소련의 팽창정책을 막아야 한다는 긴박감 때문이었다. 한편 주한 UN 위원회는 남침이 '계산되고 조정되고 비밀리에 진행된' 침략행위라고 본부에 보고하였고 27일에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7대 1의 찬부와 2개국의 기권으로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의하였고 마침내 12개국이 참가하는 UN군이 한국에 파견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해군과 공군의 즉각 출동을 명령하였고 이어서 육군도 파견된다.
전쟁 중에도 이 대통령은 거의 맨손으로 궐기한 국군과 국민을 이끌면서 미국과의 씨름을 계속한다. 이 박사는 이 기회에 무력으로 김일성을 타도하여 국토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일념인데 반하여 미국은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여 소련이나 중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한다는 것이 기본전략이었다. 이 대통령의 집념은 7월 18일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국민과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한국통일의 시기이고, 한국인의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과 그의 강력한 동맹국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귀하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입장을 명백히 해 두고자 합니다. 한국정부의 동의와 승낙 없이 제3국과 맺어지는 한국에 관한 어떠한 협약이나 양해사항도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귀하가 최근에 천명한 바와 같이 이것이 또한 미국정부의 입장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7)
미국의 참전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거만할 정도로 당당하다. 그래서인지 투루먼은 이 박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9월에 맥아더 장군의 극적인 인천상륙이 성공하여 인민군이 북으로 패주할 때, 연합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이 박사는 또 다시 미국과 다투게 된다. 이승만 박사는 북한군에게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진격해야 한다고 맥아더 장군에게 촉구하였으나 맥아더 장군은 자기에게는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 박사는 맥아더 장군에게 "그러면 당신은 UN의 결정이 있을때 까지 기다리시오. 그러나 누구도 한국군의 북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요"라고 말하고 단독으로 한국군에게 진격을 명령하였다.
그 후 맥장군은 트루먼의 훈령을 받았는데 그 내용인즉, 38이북에서 작전을 하되 소련이나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거나 개입하겠다는 예고가 없을 때 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중국의 주은래는 10월 1일 제국주의 국가들이 우리의 이웃나라를 침범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냈고 맥아더 장군이 라디오를 통하여 북한군의 완전 쾌멸이 불가피하다고 평양에 통고하자 주은래는 북경 주재 인도대사를 통하여 만약 UN군이 북조선을 침범하면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자극된 UN은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여 10월 7일 총회에서는 '주권국가인 Korea에 하나의 통일된 독립적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라고 의결하였고 10월 22일에는 UN이 승인한 정부가 없는 북조선의 정치적 재편을 승인한다는 의결까지 하였다. 그리고 트루먼은 맥아더 장군에게 북진을 허가하면서도 중국 영토에서 전쟁목적에 반하는 작전을 하려할 때에는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군과 UN군이 압록강에 이르자 중공군이 25만의 전방병력과 20만의 예비병력을 투입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정세는 일변하였다. UN군은 중공군 공세에 성공적으로 대비하지 못하였고 서울은 또다시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UN은 앞에서 본 10월 7일 및 22일의 결의와는 딴판으로 이제는 휴전위원회를 결의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주요국들은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1월 5일 이 대통령은 국군이 혼자서 싸울 것이니 50만 개의 소총을 달라고 맥아더 장군에게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5만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장개석 총통의 제의를 UN 사령부가 수락하라고 요청한 것도 거부되었다. 이제 자유세계 열강들은 한국의 독립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고 오직 전쟁의 확대를 막는 것만이 그들의 표적이었다. 4월 10일에는 제한적 작전에 불만을 품은 맥아더 장군 마저 투루먼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밴풀리트 장군이 취임하게 되었는데 장군은 비로소 국군 전력강화에 동의했고 이 박사는 그를 '국군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고마워했다. 7월 8일에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고 23일에 양측이 휴전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는데 이 대통령은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휴전 후 포로들의 북송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제주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포로 중에서 북송을 원하지 않는 반공포로 2만5천명을 단독으로 석방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UN연합국의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끝났는데, 이 박사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공산화기지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에 대하여 천추의 한을 품게 되었다. 이 박사의 이러한 관점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다. 일례로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증언한 미국의 모든 장성들도 이박사와 같은 요지의 진술을 했다. 밴풀리트 장군은 라이프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이박사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 박사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가, 그리고 애국자였다"라고 쓰고 있다. 역사가인 올리버 박사도 "이 박사는 적어도 루스벨트나 처칠에 못지 않은 인물이고 세계 정치인 중에서 그처럼 동양과 서양의 높은 학문을 동시에 몸에 익힌 인물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 중장 자신도 사석에서는 한국 최고의 정치가라고 평했다 한다.
이상에서 반탁,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이승만 박사가 자주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어떻게 투쟁하였는가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 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비방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반도에 대한 미국정책의 허점을 지적하였고 그 때문에 끊임없이 미국정부와 다투었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 없는 지도자와 약소국 대통령의 충고와 소망을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책임을 이 박사에게 돌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 이 박사의 주장대로 당초에 미국이 장개석 총통과 합작하여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승인했더라면 소련의 한국 진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한국전쟁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미국의 반대로 이박사의 그러한 경륜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반탁을 주도하여 한반도의 반쪽에나마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건립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6.25동란으로 우리는 남북과 UN군을 합하여 600만 이상의 사상자(실종자 포함)를 냈는데8) 이들이 누구를 위하여 또 무엇을 위하여 희생되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분명히 남한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자유민주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하여 국군과 우방군이 생명을 바친 것이다. 그런데 이 희생을 이 나라의 이념적 기초로 살려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건국 초기에 남북전쟁이 있었다. 남은 지고 북은 이겼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건국이념이 통일되고 그것이 오늘의 미국사회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4.19 의거를 자유민주를 위한 학생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야 말로 자유민주를 위한 국민적 차원의 투쟁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약 6.25의 이러한 이념적 이의를 살리지 못한다면 장차 남북이 통일된다 하더라도 이 민족은 정신적 지주 없이 혼란 속에 표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예컨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것은 이 박사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나라를 잃고 힘도 없는 약소민족이었던 탓으로 돌려야 한다. 이 박사는 이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높은 식견과 통찰력을 가지고 미국을 설득하려 했지만, 제아무리 친근한 우방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떠나 약소국의 소망과 이익을 돌보는 나라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김일성 독재체제에 대하여 그들은 말이 없다. 이 나라에서 흔히 독재라고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정부를 비판하는 국회와 언론이 있고 학생 데모가 끊이지 않는 나라를 독재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있다. 독재라기보다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매우 서투르고 후진적인 대의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 우리의 실상이라 할 것이다.
팔십의 노구로 현대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이 나라를 이끌었던 이 대통령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1950년 3월 24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앞으로 2년 이상은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 모든 일을 누구한테 떠넘기고 이 자리에서 물러 났으면 하는 때도 있다"고 그의 심정을 토로한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연장하려다가 권좌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만년에는 노쇠해서 조직을 부릴 힘이 없어지고 거꾸로 조직이 그를 부리게 된 데 큰 원인이 있었다고 오기창 박사는 말하고 있다.9) 우남 (雲南)은 국민들이 그의 뜻을 몰라 주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무척이나 쓸쓸했던 모양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三山採藥難醫世 東西通商不賣愁
(삼산에서 약초를 캐와도 이 세상의 병을 고칠 수 없고 동서간에 통상을 해도 나의 수심을 팔 수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에 관하여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쪽의 무력적화통일 전략을 거부하는 안보태세를 확립하는 동시에 이 나라 국민을 전통적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면 될 것이다. 일찍이 1960년 10월에 발간된 미국의 권위지인 Foreign Affairs는 당시의 한국경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1960년의 국민 1인당 GNP는 100불 이하이고, 전력 산출량은 멕시코의 6분의 1, 수출은 2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이래서 한국의 경제적 기적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계획의 가장 실망적인 국면은, 윈조계획이 생활수준 향상을 지속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조건은 북한이 남한보다 순조로운 상태에 있다" "결국 한국인들이 직면한 선택은 워싱턴이냐. 모스크바냐가 아니라 서울이냐, 평양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외국인의 관찰인데 이 절박한 현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실은 경제적 빈곤과 침체 속에서 북쪽의 적화통일전략의 함정에 빠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력과 지도력이 있었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5.16 정변이 일어났고, 그 후 불과 18년 만에 세계의 최빈국 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각광받는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국의 논자들 중에는 5.16 정변을 근대화를 위한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혁명과 통치 목표로 '일면국방, 일면건설'을 내세웠고 정치적 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적 빈곤과 한국적 정치문화의 토양에서는 서구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행동에 있어서는 비민주적 타성에 젖어 있는 정치인들에 비하면 오히려 정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르거나 부정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새마을사업의 계획과 집행을 마을사람들의 철두철미한 토의와 합의에 맡겨 새마을운동이 민주주의의 도장이 되게 하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은 빈곤하기 때문에 항상 정치가 불안정하고 정치가 불안하기 때문에 행정부가 일관적으로 개발정책을 추진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급선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한국의 정당정치에 혐오와 불신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정치는 내가 맡을 것이니 경제장관들은 오직 경제개발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나는 몇 번인가 들었다. 대통령의 강압정치 때문에 정치는 항상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행정은 질서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개발정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정치적 갈등과 행정적 안정 그리고 경제개발이 개발년대의 기묘한 배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두 가지 통치목표는 대체로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조상전래의 빈곤에서 벗어나서 어느 정도의 풍요를 누리고 있고 세계공산체제의 붕괴와 함께 남북간의 역학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취를 토대로 하여 우리는 정치적 민주화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민주화 초기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혼란과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안정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국민들의 북에 대한 자신감과 경제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11월 15일 박정희. 케네디 공동성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기계획에 의거한 한국 경제발전의 성공적인 완성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확립하고 한국의 강력한 반공태세를 유지하는 데 불가결의 요소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은…… 이같은 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촉진시키기 위해 미국이 대한민국에게 가능한 한 모든 경제원조와 협조를 계속 제공할 것을 박 의장에게 확인하였다.10)
예컨대 박정희 시대는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고'11) 다가오는 민주화의 경제적 기초를 만드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제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 할 지라도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방 이후 우리가 당면한 네 가지 과제 중 첫번째와 두번째 과제는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영도하에 해결될 수 있었고 이제 대의정치를 선진화하는 일과 남북통일을 달성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현재 혹은 미래 대통령의 몫이 될 것이다.
기타 대통령
그밖에 몇 분의 다른 대통령에 관하여는 그들에게도 긍정적인 측면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윤보선, 최규하 대통령은 재임기간이 짧아 치적을 쌓을 겨를이 없었으나 윤보선 대통령은 귀족적이고 민주화를 신봉하는 대통령으로 국민의 추앙을 받았고, 최규하 대통령은 청렴결백한 공직자로서 삼간 누옥에 칩거하면서 유교적 가치관과 대통령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모를 감수해 왔다. 전두환 대통령은 안정화 시책을 추진하여 물가안정과 국제수지 흑자를 실현하는 데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그 취임 과정이 어떠했든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를 만들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른바 6.29 선언 후 직접선거로 당선되어 민주화의 문을 열었고 북방외교를 추진하여 러시아 및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다만 두 대통령이 금전비리로 명예를 손상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지도자를 보는 눈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아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에 대하여 부정적 측면만를 강조해 왔기 때문에 필자는 균형을 도모하는 의미에서 두 대통령의 긍정적 측면만을 부각시켜 보았다. 그러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공유한 대통령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야야 할 것인가.
세월이 가면 그들에 관하여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을 것이 걸러지게 될 것이다. 지도자에게는 동지와 적이 없을 수 없다. 지도자 밑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그를 미화하려 하고 손해를 본 사람들은 그의 나쁜 점만 들추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세평이란 진실이 아닐 경우가 많다. 지난 수년 간 텔레비전에서 현대사에 관한 연속극이 많이 나왔는데, 그것들을 흥미본위의 드라마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거기에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뒤섞여 있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어차피 역사적 기록이란 큰 줄거리에 관한 것 이외에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치 않은 것들은 어차피 세월이 가면 우리의 관심과 기억에서 사라져 간다.
어떤 의미에서 지나간 영웅들은 고목과 같은 것이다. 나무의 입과 가지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세월이 가면 떨어져 없어지고 큰 줄기만 남게 된다. 그 줄기가 후세에 평가의 대상이 되는데 어떤 고목의 줄기는 병들어 썩은 것이 있는 반면에 모양이 좋고 늠름하여 후세가 우러러보는 거목도 있다. 예컨대 히틀러는 병들고 썩은 고목에 불과하지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영원히 빛나는 거목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우리민족을 위하여 가치있는 일들을 했기 때문이다.
현대사에 있어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거목에 틀림이 없다. 한 분은 우리를 자유세계로 이끌었고, 또 한 분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가치있는 일이다. 이 거목들의 허물들에 대하여는 국민들은 이미 잊었거나 흥미를 잃은 것 같다. 최근에 어느 잡지에서 역대 대통령의 인기투표를 했다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1위이고 이승만 대통령이 2위를 차지하였다 한다. 투표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 일은 자기 생활에서 실감할 수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나라 세우기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쨌든 두 대통령이 이 나라의 거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그러한 국민감정을 표시하는 상징물이 하나도 없다. 이승만 박사의 동상은 학생들이 끌어내렸고,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지도자의 양면을 균형있게 판단하는 가운데 지도자의 치적을 아끼고 추앙하는 태도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지도자의 공과가 어떻든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과 기념물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하기야 이념적인 지도자의 동상은 더러 눈에 띈다.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들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일이 있다. 지도자를 이념적 지도자와 실천적 지도자로 구별 한다면 영국의 민주혁명의 이념적 지도자는 J. 록과 J. S. 밀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실천적 지도자로서는 크롬웰을 들 수가 있다. 미국의 혁명에는 영국의 J. 록의 영향을 받은 매디슨과 A. 해밀턴 등이 이념의 지도자였고 그에 영향을 받은 실천적 지도자는 G. 워싱턴과 A. 링컨이 유명하다.
이념적 지도자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드높인다. 그러나 실천적 지도자는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에 엄청난 난관에 부딪치고 때로는 그 이념에 반하는 행동이 강요되기도 한다. 영국의 크롬웰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영국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왕당파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영국의 의회주의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그는 국왕 찰스 1세의 처형, 왕정의 폐지, 귀족원의 폐지, 공화국 선언 등으로 영국의 민주화를 추진시켰지만 1653년 호민관으로 취임한 후에는 왕당파, 장로교파 그리고 급진파인 레벨러(수평파라고 하기도 함) 등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탄압하였고 전국을 11개 군구로 나누어 군인통치를 실시했다. 의회주의와는 정반대의 행동이다. 그는 1658년에 병사하였는데 찰스 2세가 왕정을 복구하자 그의 부왕을 처형한 보복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된 그의 시신을 파내 효수(梟首)형에 처했다. 그러나 사가들은 "그는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그의 치적에는 질서의 확립, 경제의 재건, 종교적 관용의 실현, 교육기회의 확대, 사회 정의의 실현 등이 포함된다"고 쓰고 있다.12)
나는 영국 의회 마당에 있는 그의 동상을 바라보고 잠시 생각에 잠긴 일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글과 말로 좋은 소리를 하는 지도자에게는 존경을 표하지만 나라의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흙탕물에 뛰어든 실천의 지도자는 옷에 흙을 묻혔다 하여 지나치게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념의 지도자를 존경하는 동시에 실천의 지도자도 이해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톨스토이는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맺음말
미국에서 학생생활을 할 때 정치학 토론회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스라엘 출신의 정치학자가 나라가 잘 되려면 걸출(傑出)한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몹시 쓸쓸하였다. 그러나 지금 나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에게도 자랑할 만한 건국의 아버지가 있었다. 허물이 있었지만 지엄하고 탁월한 아버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지고 보면 그의 허물은 우리 자신의 허물이기도 하다. 그분은 미국에서 40여 년을 보낸 국제화된 인물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이땅에 있었고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또 한 분은 순 한국 토종이지만 그 모진 집념으로 국제환경을 적절히 활용하여 이 나라를 빈곤으로부터 구해 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도자들을 섬길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다음의 두가지 민족적 과제, 즉 정치의 선진화와 조국통일을 달성하는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