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1파 죽산 탐진 족보(1980)의 신죽산, 탐진 상계 기록
순흥안씨 족보 전의록(傳疑錄)의 변천사
순흥 전의록(傳疑錄)의 안씨시조 동래설 기록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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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간행되는 순흥안씨 1파의 족보에는 아래와 같이 정형화된 전의록(傳疑錄)을 싣고 있다. 이것은 1936년 간행 순흥안씨 병자보에 처음 실린 전의록이나 1957년 《순흥안씨서파공파보》의 전의록(傳疑錄)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경신대보(庚申大譜)라고도 불리는 1980년 간행 순흥안씨 일파 죽산 탐진 족보(順興安氏一派 竹山 耽津 族譜)에 실린 전의록(傳疑錄)의 원문과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순흥안씨일파 죽산 탐진 족보(順興安氏一派竹山耽津族譜), 11권, 1200-1980 // 안균섭 편집 : 유타계보협회 FamilySearch Site
p.694 : 순흥안씨 일파 죽산 탐진 족보(順興安氏一派 竹山 耽津 族譜) 一卷
p.743 : 전의록(傳疑錄)
[원문]
傳疑錄
[1] 乙酉譜曰 廣州安氏鼻祖 大將軍邦傑下 舊有缺世 今考其新譜別編 始於大將軍下 繼以 子門下侍中 國信 子門下侍郞 礪仲 子內史侍郞 輔平 子僉議中贊 憲思 子平章事 武成 子參知議事 慶立 子中書令 石昌 子內史令 弼夢 子門下侍中 弘美 以吾始祖 護軍公 書於弘美弟行 而註以順興安氏始祖 以爲得於順興刊板舊譜云 此所謂舊譜迺吾安之所不知者也 若有此舊譜 則何不出於 前後修譜時耶 其言固無稽 其所錄 亦傳疑之例 而旣有刊行文字 恐爲百世之疑 故玆以卞明焉
[2] 庚寅譜曰 廣州安氏 新譜 密陽板 別錄註卽 安順菴鼎福所著 有曰 廣州安氏自大將軍以下 典農寺尹 以上有缺世 原州宗人處大 往忠州順興安氏外孫金姓人家 見順興安氏刊版舊譜 則亦以廣州君爲始祖 其下系以十二代 屬之于典農寺尹 處大遂謄 送于宗中 宗中諸人 但見其所謄 不敢遽以專信 送宗人信亨 往見處大與之偕 往忠州金姓人家 則順興舊譜 已入於回祿中 其家亦移居 無處更問 今姑別錄 以俟後日云
族祖唐津公羽濟氏世乘亦曰 此舊譜似是丙午前本也 而第吾宗人亦有於忠州吾安氏外孫柳姓士人家得見 其板本所謄 護軍公以上九世而謄來者則此也 忠鄕之有此本審矣 豈前時 譜學不博 未能闡發故耶 廣州安氏之所不敢信者 亦未敢遽信 而姑錄之云 故今竝記之
[3]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瓊(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新羅哀莊王七年) 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嶽山下 時有廣州人 殺其主以叛 安瓊兄弟 挺身安國 兄瓊安國 故賜姓安氏 弟璜 以本姓移封固城 安瓊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因更名曰 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封竹城君 東方有安氏 自此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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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록 (傳疑錄) : 순흥안씨세보 번역판 (1992)
[1] 을유보(乙酉譜, 1765)에,
“광주 안씨 시조인 대장군 방걸(邦傑)의 아래에 빠져 있는 세대가 있었는데, 이제 그 신보(新譜)의 별편을 상고해보니, 대장군의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인 문하시중 국신(國信)과 아들인 문하시랑 여중(礪中)과 아들인 내사시랑 보평(輔平)과 아들인 첨의중찬 헌사(憲思)와 아들인 평장사 무성(武成)과 아들인 참의지사 경립(慶立)과 아들인 중서령 석창(石昌)과 아들인 내사령 필몽(弼夢)과 아들인 문하시중 홍미(弘美)를 계속 썼으며, 우리 시조인 호군(護軍)공을 홍미의 아우 항렬에 써 놓고는 순흥 안씨의 시조라 주기(註記)하고, 이것을 순흥 안씨의 판각한 구보(舊譜)에서 얻었다 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구보는 우리 안씨는 일찍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구보가 있었다면 어찌 전후에 수보(修譜)할 때 나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 말은 진실로 황당무계하며 그 기록 또한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준례에 불과한데, 이미 간행한 문자가 있으면 백세(百世)에 의심할까 염려되므로 이에 분별하여 밝히는 바이다.”
하였다.
[2] 경인(庚寅, 1830)보에 이르기를,
“광주 안씨 신보(新譜)인 밀양판(密陽版) 별록의 주(註)는 바로 안순암정복(安順庵鼎福)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광주 안씨는 시조인 대장군 이하 전농시윤 이상에 빠진 세대가 있었는데, 원주의 종인인 처대(處大)가 충주의 위류면에 사는 순흥 안씨의 외손인 김씨 집안에 가서 순흥 안씨가 간행한 구보(舊譜)를 보니, 또한 광주군(廣州君)을 시조라 하였고, 그 아래에 12 대를 이어 전농시윤에게 소속시켰었다. 처대는 마침내 이것을 등사하여 종중에 보내왔는데, 종중의 여러 사람들은 다만 그 등사한 것만을 보고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여, 종인인 신형(信亨)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처대는 그와 함께 충주에 사는 김씨 집에 가보니, 순흥의 구보는 이미 화재에 불타 없어졌고, 그 집도 이사해 가서 다시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선 별도로 기록해서 후일을 기다리는 바이다.’ 하였으며, 족조(族祖)인 당진공 우제(羽濟)씨의 세보에도 또한 이르기를, ‘이 구보는 병오보 이전의 본(本)인 듯하다. 다만 우리 종인 중에도 충주에 사는 우리 안씨의 외손인 유씨 집안에서 그 판본에 등사된 호군공 이상 9 세(世)를 얻어 보고는 등사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하였으니, 그렇다면 충주 지방에 이러한 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예전에는 보학이 밝지 못하여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보다.
광주 안씨들이 감히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것을 우리 또한 그대로 믿을 수 없으므로 우선 기록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아울러 기록하는 바이다.
주(註): 당진공(唐津公) 우제(羽濟, 순흥 21世 찬성공파, 1720-1784) : 처음 이름(初諱)은 덕제(德濟)이고, 자(字)는 공보(公輔), 호(號)는 만암(晩菴)이다. 숙종(肅宗) 경자(庚子, 1720)년 생. 갑오(甲午, 1774) 연벽진사(聯壁進士), 을미(乙未) 참봉(叅奉), 당진현감(唐津縣監)에서 그치고, 갑진(甲辰, 1784)에 졸(卒)하니 수(壽)는 65세이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로 부친은 설서(說書) 도형(道亨)이고, 조부(祖)는 통덕랑(通德郞) 필승(必升), 증조(曾祖)는 현감(縣監) 호열(虎烈)이며, 외조부(外祖)는 문화(文化) 유양(柳穰)이다. ○묘(墓)는 배천군(白川郡) 동백양골(東白楊谷) 국사봉(國師峯) 아래 계좌(癸坐)이며, 쌍분(雙墳)이다. 재종질(再從姪) 첨추(僉樞) 업(業)이 지은 묘지(墓誌)가 있다. 순흥 을유보(1765) 간행을 주관했다고 함. 唐津公(羽濟:21世, 1720-1784) : 初諱德濟字公輔號晩菴肅宗庚子(1720)生甲午聯壁進士乙未叅奉止唐津縣監甲辰卒壽六十五配淑夫人昌寧成氏父說書道亨祖通德郞必升曾祖縣監虎烈外祖文化柳穰○墓白川郡東白楊谷國師峯下癸坐雙墳再從姪僉樞業撰墓誌.
父 안석구(安錫龜) -순흥안씨 20世 (찬성공파). 안우제의 부친 안석구(安錫龜)는 안석경(安錫儆, 1718~1774)과 육촌 간이다.
순흥안씨 찬성공파 종회 인터넷 족보 석구(錫龜) - 중필(重弼) - 규(圭) - 광욱(光郁) - 천건(千健) - 택선(擇善) - 기(玘) - 순좌(舜佐) - 성(珹) - 인후(仁厚) - 경(璟) - 종약(從約) - 원(瑗) 석경(錫儆) - 중관(重觀) - 후(垕, 圭의 동생) - 광욱(光郁)
안우제(安羽濟) 진사 방목(1774 갑오) ; 동생 안습제(安習濟)와 동방 (聯壁)
순흥안씨 을유보(1765) 서문 - 안석경(安錫儆, 1718-1774) 唐津公(羽濟)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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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죽산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경(李瓊 一諱는 琬)은 중국 농서 사람이다. 당 헌종 원화 2 년(신라 애장왕 7) 정해년에 그 아우 황(璜)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이때 광주 사람이 그 임금을 죽이고 배반하자, 이경 형제는 분발하여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형 경은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하여 안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아우 황은 그대로 본성을 갖고 고성(固城)에 옮겨 봉해졌다. 안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요, 차자는 엽춘(葉春)이요,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3 년인 갑신년에 외란이 있었는데,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왕은 나라를 편안히 한 신하라 하여 이름을 고쳐 방준(邦俊)이라 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했으며,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하였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였는바, 우리나라에 안씨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위의 내용을 죽산안씨들이 차용해 가서 1999년 대동보에서 자신들의 시조설로 공인하여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고성이씨 시조 이황이 이원의 동생이라거나, 이원의 아들들이 아닌 이원 본인이 동생 이황과 광주의 반란을 진압해서 안씨 성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죽산안씨들이 안씨시조동래설에 관한 여러 기록중 왜 유독 특이한 이 전의록의 내용을 채택하여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지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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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록(傳疑錄) 믿지 말아라!- 순흥안씨 3파보감
순흥안씨 3파보감[신미보(辛未譜) 1991년 11월8일 발행]에서 전의록의 안씨 시조 농서이씨 동래설을 배척함.
「안씨의 기원설(起源說) 및 전의록(傳疑錄)」 : 『순흥안씨보감(順興安氏譜鑑)』(3판)
청헌(晴軒) 안용호(安龍鎬) 감수 1989년 1월 10일 초판, 1992년 5월 10일 3판
『보정판(補正版) 순흥안씨보감(順興安氏譜鑑)』p.122~126
전의록의 안씨 시조 농서이씨 동래설을 배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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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95 : 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9M-CSSB-276B-V?cat=1469087&i=694&lang=en
p.716 : 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9M-CSSB-276R-P?cat=1469087&i=715&lang=en
p739 : 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9M-CSSB-27NS-4?cat=1469087&i=738&lang=en
p.743 : 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9M-CSSB-276R-V?cat=1469087&i=742&lang=en
p.744 : 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9M-CSSB-276T-L?cat=1469087&i=743&lang=en
p.696 : 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9M-CSSB-27N7-2?cat=1469087&i=695&lang=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