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성립·발전한 철학·종교·사상의 총칭 및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다르샤나(darsana:知見)로서, 세계와 인생에 관한 사변(思辨)의 체계를 가리킨다. 인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철학이 줄곧 종교와 친연관계(親緣關係)에 있어서 그 지적(知的) 탐구도 미망(迷妄)으로부터 해탈(解脫)을 목적으로 하며, 인도철학은 이와 같은 탐구의 역사적 전개를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인도철학사(哲學史)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서(西)유럽의 철학사와는 달리, 여러 체계들은 서로 교섭하고 병행하면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연대는 추정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으나 사상 전개의 경향성(傾向性)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① 고대(서력기원 초까지), ② 고전시대(7세기경까지로 불교를 비롯한 모든 철학사상이 상당히 체계화되었다), ③ 중세(8세기 이후, 베단타학파가 주류를 차지한 후부터 15세기경까지), ④ 근대(15세기 이후 약간의 과도기를 거쳐 18세기 이후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고대의 사유(思惟)는 신화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그 연원(淵源)도 BC 13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으나, 주된 것으로는 베다의 종교, 브라마나의 세계관 및 고(古)우파니샤드의 철학이 있다. 베다의 종교는 다신교(多神敎)로, 신들의 대부분은 자연신(自然神)이었으나 점차 인격화되어 갔다. 4종류의 베다 본집(本集) 중에서는 《리그베다》가 가장 오래되었고, 그 철학적 찬가 속에는 우주창조의 최고신(最高神)과 궁극원리로서의 유일자(唯一者) 등이 탐구되었다. 브라마나는 베다이래의 제식(祭式)에 관한 규정이나 해석을 집성한 문헌이다. 여기서는 제식의 연구나 실행이 인간생활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제사를 직접 주관하는 바라문족(族)은 우주를 지배하는 힘, 즉 브라만[梵]을 가졌다 하여 점차 상류계급을 형성하였다. 또한 최고신을 프라자파티라고 하고 세계의 창조자·지배자라고 생각하였다. 우파니샤드란 가까이 앉는다란 뜻에서 전화(轉化)되어 사제간(師弟間)에 구전(口傳)되는 비의(秘義) 및 그 문헌의 총칭이며, 각각 독립된 철인(哲人)이 대화형식으로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샨딜리아(BC 7세기∼BC 6세기)는 우주의 통일 원리를 브라만이라 부르고 이것을 본래의 자기인 아트만[我]과 동일시하였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다. 우달라카 아루니(BC 7세기∼BC 6세기)는 만물의 근원을 유(有)라 부르고 이에 입각하여 현상의 개전(開展)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에 비하여 인식주체(認識主體)로서의 아트만은 부정적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즉 네티 네티(neti neti:…이 아니고, …이 아니다)로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전존재(全存在)를 관념론적으로 통일하려던 사람이 야지냐발키아(BC 8세기경)였다. 또한 후세에 와서 각종 우파니샤드가 만들어졌으나, 고(古) 우파니샤드에는 이미 독특한 업(業)과 윤회(輪廻)의 사상이 담겨 있다. 고대의 종교단체로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유력하다. BC 5세기경 도시가 발달하여 왕족과 상공업자의 실권이 강화되면서 바라문족의 권위가 약화되고 많은 자유사상가가 나타났다. 이들을 불교측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라 부르는데, 석가(BC 563?∼BC 483?)는 여기서 혁신적 종교운동을 일으켜 불교를 창시하였다. 그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버리고 중도(中道:八正道)를 택하여 어디까지나 인생의 진실을 구하였다. 또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무아설(無我說)에 입각하여 인간적 현실을 직시하며 진실의 지혜에 눈뜰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인간의 평등과 자비의 정신을 강조하는데 교설(敎說)의 주요 내용은 오온(五蘊)·사제(四諦)·십이인연(十二因緣) 등에 나타나 있다. 불교는 그 후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으로 나뉘고, 대승과 소승에서는 다시 여러 분파가 생긴다. 소승에서는 다원론적(多元論的)·실재론적(實在論的)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현상론적(現象論的)인 경량부(經量部)가 주류를 차지하였다. 대승에서는 중관(中觀)과 유가유식(瑜伽唯識) 양파가 2대 사조(二大思潮)를 이루는데, 전자인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150?∼234)는 공관(空觀)에 의해 대승불교 사상의 기초를 다지고, 후자의 아상가(Asanga 無著:310?∼390?)와 그의 동생인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320?∼400?)가 보살의 실천을 매개로 한 현실세계의 구조를 관념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자이나교는 마하비라(Mahavira 大雄:BC 448∼BC 376?)가 시작한 것으로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非) 바라문적인 사문(沙門)의 흐름에 그 연원을 두고 해탈(解脫)을 목표로 한다. 그 극단적인 고행주의(苦行主義)와 상대적인 관찰법은 별도로 치고, 세계관·유정관(有情觀) 실천규정 등에서는 불교와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 후 얼마되지 않아 성립된 집권적(集權的) 국가를 배경으로 모든 철학사상이 정비되었으며, 정통(正統) 바라문교에서는 6개의 학파가 각각 수트라(古典)를 정비하여 차례로 주석서(註釋書)를 만듦으로써 학설을 발전시켰다. 이것을 육파철학(六派哲學)이라고 한다. 카필라(Kapila:BC 350?∼BC 250?)를 개조(開祖)로 하는 상키아학파는 우다라카의 유론(有論)의 비평적 개혁을 통해 성립되어, 푸르샤(순수정신)와 프라크리티(根本原質)의 두 원리에 의해 우주의 창조와 개전(開展)을 설명하고, 또한 요가의 실천을 통해 고뇌의 종식을 지향한다. 요가학파는 기초이론을 상키아학파로부터 이어받으면서 신비적이며 금욕적인 실천을 체계화하였으나 그 태도에서는 주지적(主知的)이었다. 아크사파다(50?∼150?)를 개조로 하는 니아야학파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논증방법(論證方法)을 정리하면서 논리학과 지식론(知識論)에 전념하여 혁신적인 불교논리학을 성립케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도의 논리학은 복잡다양하여 서유럽의 논리학과 비교 연구하는 데 좋은 소재를 제공하였다. 니아야학파와 자매관계에 있는 바이세시카학파의 개조는 카나다(Kanada:BC 150?∼BC 50?)인데 실체·성질·운동·보편·특수·내속(內屬)의 6가지 원리를 설정하고 실재론적인 자연철학을 전개하였다. 그 범주론(範疇論)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대비한다는 것만으로도 특수한 의의가 있다. 미망사학파는 자이미니(Jaimini:BC 2세기경)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베다 성전(聖典)에 규정된 제사의례의 연구와 실천을 인간생활의 의무라 생각하고, 베단타학파와 더불어 정통 바라문 철학의 중핵(中核)을 이루었다. 그들의 언어철학은 특히 뛰어났다. 8세기 이후 불교가 밀교화(密敎化)하고 이슬람교의 침투로 점차 세력을 잃어갔으나 바다라야나(BC 100?∼1?)를 개조로 하는 베단타학파는 특히 상카라(700?∼750?) 이후, 다른 학파나 불교의 사상을 섭취하여 인도 철학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이 학파는 베다 성전의 근본사상인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철저히 연구하여 브라만으로 귀일(歸一)하는 한편, 내부의 논쟁을 통하여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제한불이론(制限不二論)·다원론적 실재론(多元論的實在論)·불일불이설(不一不異說) 등 다채로운 사상을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14세기경부터 인도의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광범한 사상적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단서를 마련하여 힌두교의 이론적 지주(支柱)로 삼았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전화(轉化)된 새로운 형태이며, 주요한 것으로는 비슈누파와 시바파가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의(敎義)를 가지며, 많은 종파(宗派)로 갈리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업(業)과 윤회에서 해탈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와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인도의 모든 철학 학파는 이슬람교와 융합하는 양상을 나타냈고 독창적인 사상이 무시되었다. 오히려 라마난다(1400?∼1470?), 카비르(1440∼1518), 나나크(1469∼1538) 등에 의한 전통사상의 개혁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한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유럽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종래의 인도철학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부적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1834∼86), 비베카난다(1862∼1902) 등에 의한 전통사상의 재생운동이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간디의 진리 파악, 타고르의 생명관도 그 근본에서는 인도의 전통적 철학과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대의 인도철학은 라다크리슈난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비교철학에 역점을 두고 있다.
브라만교(婆羅門敎, Brahmanism)
고대 인도에서 불교보다 먼저 브라만 계급을 위주로 《베다》를 근거로 하여 생성된 종교. 특정 교조(敎祖)를 갖지 않는다. 바라문[婆羅門]교라고 한자로 음사(音寫)한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의 4베다와, 베다의 주석 및 제사에 관한 규칙을 기록한 《브라마나[梵書]》 《아란야카[森林書]》, 그리고 철학서 《우파니샤드[奧義書]》 등을 계시성전(啓示聖典:Sruti)이라고 한다. 그 외에 6종의 보조학(Vedanga:音聲·祭式·文法·語源·韻律·天文),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라마야나:Ramayan》의 2대 서사시, 그리고 《마누법전(法典)》 등의 성전문학(聖傳文學)이 전해지고 있다. 브라만교는 인도 아리아인(人)이 BC 1500년경에 인도에 침입한 이후 신봉하였던 민속종교로, 넓게는 힌두교(인도교)에 속한다. 최고의 베다 시대에는 자연현상의 배후에 어떤 지배력이 있는 것으로 상정(想定)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하여 천신(天神)·태양신·새벽의 신·뇌신(雷神), 폭풍의 신 등의 신격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신격화한 무한신(無限神)·공간의 신 등, 그리고 제사의 구성 부분을 신격화한 화신(火神)·주신(酒神)·언어신(言語神) 등 많은 신격들이 상정되고 이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 시대의 신관(神觀)은 맥스 뮐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신교(多神敎)에서 교체신교(交替神敎)를 거쳐 단일신교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후기에는 인도철학의 근본사상이라 할 일원론(一元論)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고 있다.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 《리그베다》 제10장에는 기도주(祈禱主:기도의 힘을 신격화한 것으로 冶工과 같은 역할)·황금태(黃金胎:부모의 생산능력에 비유)·조일체자(造一切者:木工의 건조에 비유)·원인(原人:그 신체의 각 부분으로부터 세계가 유래) 등의 유일신적 창조신이 나타나는데, 특히 ‘비유비무가(非有非無歌)’에서는 창조가 최고신의 2분(二分)에 의한 자기생식(自己生殖)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被造物) 간의 동질성(同質性)을 말하는 것으로 일원론적 사유의 원형이다. 브라마나 시대(BC 1000∼BC 800)에 이르러 브라마나[婆羅門:司祭族]·크샤트리야[刹帝利:王·武士族]·바이샤[毘舍:농공상의 평민족]·수드라[首陀羅:노예족]의 바르나, 즉 4성제도(四姓制度:Caste)가 확립됨에 따라 브라만족에 의한 제사·학문 등의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브라만족은 다른 계급에 대한 자기들의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그것은 베다 천계주의(天啓主義), 브라만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만능주의(祭式萬能主義)로 나아가는 역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형식적이고 획일적인 브라만 계급의 횡포에 반감을 품고 자각 반성한 브라만 또는 크샤트리야들이 나타나 모은 사물의 근원적 힘으로서 브라만[梵]을 상정하였는데, 그것은 또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불가설(不可說)·불가촉(不可觸)의 형이상학적 실체인 아트만[我]과 하나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에 일관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다. 브라만교에는 민중적인 기도·제사의 면과 고도의 철학적 면이 있다. 제사와 사회제도 등의 실천적인 면은, 후에 《가정경(家庭經)》 《대계경(大啓經)》 《법경(法經)》 등의 경서를 낳았고, 철학적 면은 이른바 6파철학(六派哲學)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모두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파로서, 이것을 부정하는 불교와 자이나교 등과는 대립관계에 있다. 브라만교에서는 바르나 아슈라마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는데, 바르나 구성원이 한평생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생활기:asrama)가 설정되어 있다. 즉 학생기·가장기(家長期)·임서기(林捿期)·유행기(遊行期)의 4단계로 되어 있다. 브라만교는 후에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인도 국민 일반에 널리 교세를 떨치려 하였는데, 이것을 힌두교라고 한다.
베다(Veda)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신화적 제식문학(祭式文學)의 일대 집대성. 베다란 ‘지식’ 또는 ‘종교적 지식’을 의미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베다 문헌은 《리그 베다:Rgveda》 《사마 베다:Samaveda》 《야주르 베다:Yajurveda》 《아타르바 베다:Atharvaveda》의 4종류가 있다. 이 4종류의 구별은 고대 인도의 침입민족인 아리아인(人)이 제식(祭式)을 지낼 때 제관(祭官)의 역할에 따라 구분한 데 유래한다. 《리그 베다》는 제신(諸神)을 제장(祭場)으로 불러들이는 권청(勸請), 《사마 베다》는 제장에서의 가창(歌唱), 《야주르 베다》는 제사의 진행과 관계가 있고, 《아타르바 베다》는 재앙 제거, 조복(調伏) 등의 주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BC 1500∼BC 1000년경에 이루어졌다. 출생·결혼·장례 등 인생에 있어서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조상 공양이나 신월제(新月祭)·만월제(滿月祭)·계절제(季節祭)·공수제(供獸祭), 또는 신주(神酒)를 신에게 바치는 소마제(祭) 등, 인사백반(人事百般)에 걸친 제식에 관한 복잡한 규정과 그에 관한 신화적 의의가 부여되어 있다.
우파니샤드(Upanisad)
고대 인도의 철학서. 바라문교(波羅門敎:Brahmanism)의 성전 베다에 소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그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Vedanta:베다의 말미·극치)라고도 한다. 현재 200여 종이 전해지는데, 그 중 중요한 것 10여 종은 고(古)우파니샤드로 불리며, BC 600∼AD 300년경, 늦어도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그후 10수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크리트로 씌었다. 우파니샤드의 원뜻은 사제간에 ‘가까이 앉음’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게 되었으며, 옛날부터 천계문학(天啓文學:sruti)으로서 신성시되었다. 인도의 정통 바라문철학의 연원으로서, 그 후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典據)가 되었다. 개개의 우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한 사람의 작자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쳐 편집·정비하였다고 생각되며, 베다 및 브라마나의 제식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불교흥기를 촉진한 사상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중에는 신·구의 잡다한 사상이 섞여 있으며 전체로서의 통일이 결여되었지만 그 근본 사상은 만유의 근본원리를 탐구하여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형성 배경에는 창조관과 동치(同置:upasana)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는 스리스티(srsti)는 최고신의 2분에 의하여 자신의 일부를 방출(esrj )함으로써 창조자와 피조물이 동질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주적 실재와 개인의 구성요소를 대응시켜 불사(不死:amrta)를 탐구하였던 동치의 논리는 범아일여사상의 원형적인 사고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은 업(業)에 의해 윤회를 반복하지만 선정(禪定:dhyana)·고행(苦行:tapas)을 투철히 하여 진리의 인식(brahma-vidya)에 도달함으로써, 윤회에서 해탈하여 상주·불멸의 범계(梵界:brahma-loka)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우파니샤드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아트만을 만물에 편재하는 내재성으로서의 유(有:sat)로 주장하는 우달라카 아루니(Uddalaka Aruni)와 아트만을 인식주관으로서 불가설·불가괴(不可壞)한 것으로 주장한 야지나발키아(Yaj꣦valkya) 등이 있으며, 전자의‘네가 그것(아트만)이다(tat tvam asi)’, 후자의 아트만은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의‘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neti, neti)’ 등의 말은 유명하다.
힌두교(Hinduism)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브라만교가 복잡한 민간신앙을 섭취하여 발전한 종교.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u)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 ‘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성전(聖典)전설·의례·제도·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직업·종교적인 제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라마의 기행)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辯才天), 비슈누에게는 라크슈미(吉祥天)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파르바티·우마·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學生·家住·林住·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성별·직업·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자이나교(Jainism)
인도에 현존하는 유서깊은 종교. 자나교라고도 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정통(非正統)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出家主義) 종교이다. 불전(佛典)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를, 석가와 같은 시대의 마하비라(Mahavira)가 재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의 완성자를 지나(Jina:勝者)라 부르고, 그 가르침이라 하여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불타에서 연유하여 ‘불교’라는 호칭이 생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조(敎祖)의 출신과 인간형성, 지리적·문화사적 배경, 교단 성립의 경위도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힌두교와 더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으므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 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1세기 말경 공의파(空衣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支派)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시 경전에서는 비교적 상세한 교의(敎義)가 정립되어 있으나, 그 이후로는 불교만큼 다채로운 발전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후세에 와서 인식론이나 논리학은 불교의 영향이 현저한데, 오랫동안 산일(散佚)되어 있던 불교의 작품들이 최근 자이나교의 승원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교도 수는 인도 전역에 걸쳐 180만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상호부조적(相互扶助的)인 성격이 강하고 상인이나 금융업자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경제적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그 실천생활상의 특색으로서 승려를 통하여 불살생(不殺生:ahinsa)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교의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二元論)을 주창한다. 즉 생명(jiva)과 비생명(ajiva)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생명은 다시 공(空:운동의 원리)·비공(非空:정지의 원리)·물질재료·허공·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형이상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다음 7종 또는 9종(선·악을 포함하여)의 실천론적 계열이 모든 가능태(可能態)로 제시된다. 즉 생명·비생명·선·악·누(漏)·박(縛)·차(遮)·멸(滅)·해탈(解脫)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외적 대상의 영향을 받아, 물질재료가 생명 속에 누입(漏入)하고[漏], 그것이 물질적 업(業)을 형성하여 생명을 속박한다[縛]. 그리고 외적·내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업물질(業物質)의 누입을 정지시키고[遮], 또한 이 업물질을 멸(滅)한다. 이 멸한 상태가 해탈이다. 해탈에 이르게 하는 덕목(德目)으로는 정견(正見)·정지(正知)·정행(正行)으로 요약되거니와,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오계(五戒)에 해당하는 오금서(五禁書:브라다),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에 해당하는 삼기율(三紀律:구프티), 오용심(五用心:사미티)이 특히 요구되고 있다.
六師外道(Sad-darsama)
석가 당시 인도 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6인의 철학자·종교가의 유파. 6파철학이라고도 한다. 인도 브라만교에서 정통으로 인정하는 철학의 대(大)유파 6종이다. 《베다》 문명에 기인(起因)하는 인도 사상계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탄생시켜 인도종교의 기조를 형성하였다. 거기에서 인생관·세계관·우주관 등 여러 사상·학설이 태동하여 이른바 6대철학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학설들은 브라만의 근본 경전인 《베다》 《우파니샤드》 등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점이 있으므로 외도(外道)라는 말이 붙여졌다. 더군다나 이 외도란 불교측에서 붙인 호칭이다. ① 푸라나카사파[富蘭那迦葉]:선악의 행위와 그 보응을 부정하는 외도, ② 마칼리고살라[末伽梨拘梨子]:운명론. 불교에서 말하는 사명외도(邪命外道), ③ 산자야벨라지푸타[刪耶毘羅子]:궤변론·회의설, ④ 아시타케사캄발라[阿耆多翅舍欽婆羅]:유물론·쾌락설, ⑤ 필구타카자야나[迦羅鳩馱迦延]:유물론적인 주장, ⑥ 니간타나타푸타[尼咤若提子]:기나교(耆那敎) 등이다. 이들 육사(六師)는 한결같이 《베다》의 권위를 부인하고 브라만교에 반항하였다. 그들은 신흥도시의 왕후·귀족·부호들의 정치적·경제적 원조 밑에 활약하였다. 이들 각 유파의 형성은 그 기원·성립연대가 다른데, BC 5세기~BC 3세기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佛敎(Buddhism)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미얀마·타이·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⑥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인도불교】 〈원시불교〉 창시기(創始期)의 불교를 말하며, 경전들은 석가의 생애 중의 가르침을 스승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수집·정리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석가가 직접 설한 교법을 판별하기는 곤란하다. 교단도 이미 발족되어 석가 입적 후 약 100년 동안은 완전한 통일이 유지되었다. 불(佛)·법(法)·승(僧)의 3보(寶)는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데, 승(僧:敎團)은 출가신자(出家信者)인 비구·비구니와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로 이루어져 계율(戒律)로 규제되며 부처를 중심으로 모여 그 법을 실천한다. 이 재가신자는 단가제도(檀家制度)에서의 신자와는 달리 3보에의 귀의(歸依)를 서약할 뿐 아무런 속박도 없으며 그 대신 출가신자에 대한 의식(衣食)의 재정적 지원을 맡았다. 석가는 태자(太子) 시절의 물질적으로 풍족하던 생활에서도, 출가 후의 고행(苦行)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뇌하였으나, 그 두 극단의 고뇌를 버림으로써 중도(中道)를 깨닫고 불타가 될 수 있었다. 중도란 일체 편견(偏見)에 구애되지 않는 자세이며, 올바른 견해·결심·언어·행위·생활·노력·사념(思念)·명상(瞑想)의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5온(蘊)의 일체는 고(苦:苦諦), 그 고의 기원(起原:集諦), 고의 초극(超克:滅諦), 초극에 이르는 길, 즉 도제(道諦)라는 4개의 진리(四諦)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 팔정도이지만, 그 중 도제의 내용이야말로 팔정도 바로 그것이며 그 실천에 의해서만 중도가 얻어진다. ‘일체는 고이다(一切皆苦)’라는 말에서 생각해 보아도 5온의 이합(離合)은 항상 변천(變遷)하는 것이며(諸行無常), 존재하는 것에는 상일(常一) 주재(主宰)하는 입장은 없는 것으로(諸法無我), 전변(轉變) 무상한 세계에서 상(常)을 구하기 때문에 고가 생기는데, 팔정도의 실천에서 각성이 열리고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도 설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원시불교의 사상이다.
〈부파불교〉 불멸(佛滅) 후 100년까지 교단은 착실하게 확대·발전을 이루어, BC 3세기에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이 귀의하여 불교는 거의 인도 전체에 퍼져 교세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러나 교단의 확대에 따라 내부에 의견의 대립이 나타나 불멸 후 100년이 지난 무렵부터 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혁신적인 대중부(大衆部)의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불멸 후 200년 무렵에는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 먼저 일설부(一說部)·설출세부(說出世部)·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설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制多山部)·서산주부(西山住部)·북산주부(北山住部) 등으로 분파되었다. 한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 무렵부터 분열이 시작되어 먼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현주부(賢胄部)·정량부(正量部)·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가, 이어서 경량부(經量部)가 분출되었다. 이들 20개의 부파는 소승 20부(小乘二十部)라고도 부르며 이들을 총칭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한다. 상좌부·대중부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는 별로 없으나 혁신적인 대중부에는 후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발전할 기미가 엿보인다. 또한 상좌부 불교는 남방불교로서 오늘에 전한다.
〈대승불교〉 출가신자(승려) 중심인 종래의 불교에 대항하여 기원 전후부터 재가신자를 포함하는 신앙으로의 탈피를 원하는 대승(大乘)의 운동이 인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밖에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 불탑에 예배함으로써 불타에 대한 신앙을 높이는 재가신자의 집단인 보살단(菩薩團)이 있어, 이것도 대중운동에 합체하여 초기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 BC 1세기부터 AD 2세기에 걸쳐 《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화엄경(華嚴經)》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의 대승경전이 차례로 성립되어, 이것들은 3세기 전후에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에 의해 이론적 근거가 부여되면서 대승불교의 확립을 보았다.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일은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眞空中道)의 정관(正觀)을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般若空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또 미륵(彌勒)이 시작하고 무착(無着)·세친(世親) 등이 전개시킨 학파를 유가파(瑜伽派) 또는 유식파(唯識派)라고 한다. 이학파는 용수의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관상(觀想) 등에 의한 수행(修行)인 유가행(瑜伽行), 외계(外界)의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만 심식(心識)의 투영이며, 심식만이 실재한다는 유식설(唯識說), 불성(佛性)은 중생도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으로 중생 모두가 여래(如來)가 될 수 있다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등을 설하고 있다. 이 두 학파가 중기 대승불교를 형성하였으며 그 후 세친의 학통을 이은 진나(陳那) 등에 의하여 인명(因明:불교논리학)이 확립되었다. 후기 대승불교에 이르면 인도교 등의 영향을 받아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을 중심으로 하는 밀교(密敎)가 주류를 이루어 점차 타락의 길을 걷다가 이슬람교의 인도 침입으로 13세기에 쇠멸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은 모든 존재에 실체(實體)·아(我)와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공(空)’의 사상이다. 또 보살(각성을 구하는 사람)의 실천윤리덕목으로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내세우는데, 그 첫째가 보시로 되어 있어 이타행위(利他行爲)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주로 북쪽으로 퍼져 중국과 한국·일본 등에 전해졌다.
【남방불교】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불교를 남방불교라 한다. 이 지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이며 BC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Mahinda)가 파견되어 상좌부 불교를 전한 것이 효시가 된다. 이 불교는 팔리어(語) 경전을 믿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5세기에는 불음(佛音)이 인도로부터 건너와 팔리어 경전의 주석(注釋)을 집대성함으로써 상좌부 불교의 기초가 굳어지고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얀마와 타이에는 이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졌다. 5세기에 미얀마로 건너간 상좌부 불교는 그 후 밀교[大乘]로 바뀌었다가 11세기 파간조(朝)의 전(全)국토통일과 함께 재흥되었고, 후에 본가인 스리랑카불교가 쇠퇴하자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로 역수입되었다. 한편 타이에는 8세기 무렵에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다가 후에 미얀마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진출하였고, 13세기 말에는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그 후 왕조의 보호 밑에 발전하여 지금은 이 지역 제1의 불교국이 되었다. 자바에는 8세기경 인도로부터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였으나 후에 이슬람권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라오스는 13세기 말부터 타이족의 침입으로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오늘에 이른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또 하나의 지역인 베트남은 옛날부터 중국과의 교섭으로 6∼7세기경 대승불교가 전해져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티베트·몽골의 불교】 티베트·몽골의 불교는 라마교라고도 한다. 티베트에는 일찍이 네팔 등의 불교가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토속적 샤머니즘인 분교(敎)가 성행하여 교세를 넓히지 못하였다. 6∼7세기 인도에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들어왔고, 8세기경에는 다시 인도로부터 밀교와 중관계(中觀系) 대승불교가 전해졌고, 경전의 티베트어 번역도 진척되면서 불교는 널리 전파되었다. 10세기에 한때 쇠퇴하였으나 11세기에 다시 일어나 밀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초 종객파(宗喀巴)가 나와 종풍(宗風)을 쇄신, 교세를 크게 높였으며, 이후 그 법계(法系)는 대대로 다라이라마(‘큰 라마’라는 뜻)가 되어 종교와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한편 몽골에는 13세기 파스파(’Pags-pa:八思巴)가 티베트불교를 원(元)나라 조정으로 전해왔고, 그 후 각지로 퍼져 청(淸)나라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불교】 처음 불교가 전해진 연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세기 중엽 한(漢)나라 때 서역(西域:티베트)지방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지방은 옛날부터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요로에 있어 양쪽 문화의 접촉장소가 되어왔으므로 인도의 불교가 재빨리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지방에도 독특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는데, 그 서역불교의 발자취는 둔황[敦煌]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전기(初傳期)에서 4세기까지를 중국불교의 제1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서역방면으로부터의 내입승(來入僧)의 활약이 눈에 띈다. 즉 안세고(安世高)·지루가참(支婁迦懺)·축법호(竺法護)·불도징(佛圖澄) 등이며 그들은 대승·소승의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를 넓히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인 불도(佛徒)로 주사행(朱士行)·도안(道安)·혜원(慧遠) 등이 나왔고, 특히 도안·혜원 등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던 불교를 실천으로써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불교가 무조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고래의 사상과의 유사점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불타가 황제(黃帝)·노자(老子)와 나란히 제향되는 예가 그것이며, 4세기 무렵부터는 불교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해석하려는 격의불교(格義佛敎)도 생겨났다. 401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들어와 대승경전의 번역을 시작한 때부터 중국불교는 제2기에 들어선다. 구마라습은 여러 경전의 뛰어난 한역(漢譯)을 행하여, 그 한문경전에 의한 불교 본래의 교리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인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넓어져, 이후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그 문하생은 3,000여 명이라 하며 그 계통은 일대 교세를 이루고 제2기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구마라습 외에도 각현(覺賢) 담무참(曇無讖)·보리류지[菩提流支]·진제(眞諦) 등이 도래하여 경전의 한역을 행하고, 그 경전 연구에 따라 삼론(三論)·사론(四論)·성실(成實)·법화(法華) 등 많은 학파가 발생하였다. 또 우발적으로 전래된 여러 경전을 본래의 역사적 발전의 순서로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기 위한 교판(敎判:敎相判釋)도 성행하게 되어 교학연구는 더욱 진전하였다. 수(隋)·당(唐)시대에는 전대의 교학연구를 기초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에 의한 종파가 확립되어 국민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에 입각한 불교의 성립을 보았으며, 이 시대는 중국불교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수나라 때는 우선 지의(智)가 《법화경》에 의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종(開宗)하고, 이어서 길장(吉藏)은 용수의 삼론(三論)에 의한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당대(唐代)에는 화엄종·선종(禪宗)·정토종(淨土宗)·법상종(法相宗)·율종(律宗)·밀교의 각 파가 성립하였다. 화엄종은 《화엄경》 소의(所依)의 종파로 법장(法藏)이 그 교학의 대성자이며, 선종은 이전부터 달마(達磨)에 의하여 전해져 오다가 5조(祖) 홍인(弘忍)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고, 다시 그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에 의하여 남종·북종의 2대 분파가 생겼다. 특히 남종파는 임제(臨濟)·위앙(仰)·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과 임제에서 분파된 양기(楊岐)·황룡(黃龍) 등 이른바 5가(家) 7종(宗)이 나와 크게 번영하였다. 정토종은 담란(曇鸞)·도작(道綽)·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부처의 명호(名號)를 외우며 오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라는 간단한 교의(敎義)로써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다. 법상종은 현장(玄)이 인도에서 가져온 유식론(唯識論) 관계의 경전을 기초로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개종하였고, 율종에서는 도선(道宣)의 계통, 즉 남산종(南山宗)이 번창하였다. 밀교도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 등에 의하여 인도에서 전래되었다. 수·당의 황금기를 지난 중국불교는 그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몇 차례의 파불(破佛)을 겪고 또 명(明)나라 때는 중앙에서 통제가 가해지는 등, 활발한 불교활동은 차차 자취를 감추고 다만 선종과 정토종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국 본토에서는 불교활동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일본불교】 일본의 불교는 538년 백제 성왕(聖王) 때 도장(道藏)이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成實宗)의 개조가 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의 접촉이 빈번하여 관륵(觀勒)은 역법(曆法)·천문·지리·술수(術數) 등을 일본에 전하였고, 혜총(惠聰)·도림(道琳)·담혜(曇慧)·혜미(慧彌) 등 많은 고승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여러 호족(豪族)들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불교장려책을 쓰게 됨으로써 공식적인 지위를 굳혔다. 나라[奈良] 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와의 연관을 더욱 굳혀 고쿠분사[國分寺]의 제도도 이 무렵의 산물이다. 이 시대는 중국불교가 황금시대를 이룬 때였으므로 그들의 여러 종지(宗旨)가 차례로 건너와 삼론(三論)·법상·성실·구사(俱舍)·율·화엄 등 이른바 남부6종(宗)이 성립하였다. 헤이안[平安]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천태(天台)·진언(眞言)의 2종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천태종의 사이초[最澄], 진언종의 구카이[空海] 등은 모두 입당(入唐)하여 새로운 불법을 구한 개조들이다. 남부6종은 이들 2개 종파의 발전에 따라 점차로 그 세력을 잃게 되었고, 특히 사이초가 대승계단(大乘戒壇)을 개설하고 그가 죽자 이것이 국가의 공인을 얻음으로써 남부6종의 몰락은 결정적으로 되었다. 또 헤이안불교는 귀족들의 열성적인 귀의와 보호를 받아 귀족불교라 일컬어졌는데, 귀족들은 조정의 본을 떠 조사(造寺)·조탑(造塔)에 힘쓰는 한편 기도(祈禱)와 법회를 자주 열어 그 권세를 자랑하였다. 한편 이렇게 귀족들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 승려들은 세속적 권위와 결탁하게 되었고, 절은 귀족으로부터 기부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승병(僧兵)을 두게 됨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일본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이다. 말법사상(末法思想)을 배경으로 일어난 정토종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일만이 정토왕생(淨土往生)의 정정업(正定業)이라고 설하면서 급속히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토종을 확립한 겐쿠[源空:法然]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 여러 종파로 분립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을 개설한 신란[親鸞]이다. 그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유형에 처해졌으나 그는 유형지에서 저술과 포교에 주력하였다. 한편 에이사이[榮西]·도겐[道元] 등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종(禪宗)은 계율에 엄격한 수양의 교법으로서 무사계급과 결부되어 발전하였다. 가마쿠라불교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니치렌종[日蓮宗]이다. 니치렌은 처음 진언밀교(眞言密敎)를 배우고 이어 천태(天台)를 배워 《법화경》의 진리를 깨닫고 니치렌종을 개종하였다. 이 종파는 천태 이외의 종파를 부정하는 도전적인 언동 때문에 자주 법난(法難)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민중들 사이에 교세가 확장되어 지금은 진종(眞宗)과 나란히 대종파를 이루고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이후 불교는 점차 쇠퇴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를 통일하자 완전히 교세가 꺾였으며, 에도[江戶] 시대에는 정권의 도구로 타락하였다. 이렇게 침체·부패한 불교에 대하여 비난·배척의 운동도 자주 일어났으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뜻있는 불제자들에 의하여 혁신의 기운도 높아지고 여러 종파의 부흥운동도 추진되어 근대적 종교로서의 불교발전이 이룩되었다.
【한국불교】 〈삼국시대〉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秦)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의 설법과 전도를 공허(公許)한 고구려에서는 그 후 평양(平壤) 9사(寺)와 반룡사영탑(盤龍寺靈塔) 등을 짓는 한편 불교 전파에도 힘써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고, 열반종(涅槃宗)·삼론종(三論宗)·천태종(天台宗)·살바다종(薩婆多宗) 등의 종파가 이루어졌다. 의연(義淵)은 불교역사 연구를 통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혜자(惠慈)·운총(雲聰)·혜편법사(惠便法師)·담징(曇徵)·법정(法定) 등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도림(道琳)·덕창(德昌)·혜량(惠亮)·신성(信誠) 등은 호국불교를 위한 실력배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입국, 왕의 우대를 받고 궁중에 머물다가 이듬해 남한산(南漢山)에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 후 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한산불사(漢山佛寺)·경복사(景福寺)·수덕사(修德寺) 등 많은 사찰이 건조되고 교파도 삼론종·계율종·성실종(成實宗)의 세 종파가 성립되었다. 백제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많은 고승들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일본 성실종의 개조가 된 도장(道藏)을 비롯하여 혜총(惠聰)·도림(道琳)·혜미(惠彌)·도흔(道欣)·담혜(曇慧)·도령(道寧)·상휘(常輝)·의각(義覺)·방제(放濟)·다상(多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백제 멸망 후 그 재건을 위해 궐기하였던 승장(僧將) 도침(道琛), 인도에 유학하고 귀국 후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한 겸익(謙益) 등도 유명하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로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는데 그 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인도와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당나라의 13종(十三宗:成實宗·三論宗·俱舍宗·地論宗·攝論宗·天台宗·法相宗·涅槃宗·念佛宗·密宗·禪宗·華嚴宗·律宗)이 도입되어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9산선문(九山禪門)의 분파를 이루었다. 국가 안태(安泰)와 왕실의 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국민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봉성사(奉聖寺)·감은사(感恩寺)·봉덕사(奉德寺)·망덕사(望德寺)·법주사(法住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월정사(月精寺)·부석사(浮石寺)·불국사(佛國寺)·장안사(長安寺)·해인사(海印寺)·보현사(普賢寺)·범어사(梵魚寺)·쌍계사(雙磎寺) 등 명찰을 창건하였고, 탑·종·불상 등의 공예가 발달하여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정혜사(淨惠寺)의 13층탑, 화엄사 쌍탑, 감은사 쌍탑, 무량사탑(無量寺塔), 동화사(桐華寺) 쌍탑, 금산사(金山寺)의 석탑 및 6각다보탑, 화엄사 사리탑 등을 비롯하여 석굴암 석불, 황룡사 장륙금상(丈六金像), 봉덕사 종, 금산사 부도(浮屠), 감산사(甘山寺)의 2불상, 백률사(栢栗寺)의 약사상(藥師像),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화엄사 석등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전승된다. 한편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圓光)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경흥(憬興)·지통(智通)·표훈(表訓)·명랑(明朗)·승전(勝詮)·대현(大賢)·도의(道義)·신행(信行)·체징(體澄)·지증(智證)·혜소(慧昭)·현욱(玄昱)·개청(開淸)·낭공(朗空)·범일(梵日)·무염(無染)·원랑(圓郞)·진경(眞鏡)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고려시대〉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진관사(津寬寺)·부석사(浮石寺)·관음사(觀音寺)·숭교사(崇敎寺)·석왕사(釋王寺)·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수기(守其)·균여(均如), 말기의 나옹(懶翁)·보우(普愚)·보조(普照)·백운(白雲)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화엄종·총남종(摠南宗)·자은종(慈恩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도문종(道門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자은·총남·중신·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미증유의 수난기(受難期)를 맞이하였으니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田)에도 과세를 하였으며 승려의 궁중출입과 도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과(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德)·흥천(興天) 두 절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중종(中宗)은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은 민가를 짓는 데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앙 자체를 말살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상류층 부인의 신앙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역대왕 중에는 호법왕(護法王)도 있었으니, 태조는 석왕사·태고사·해인사 등에 비판(婢板)을 하사하였고, 세종·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을 간행하였다. 특히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를 단행하여 조계·천태·총남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자은·시흥·중신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선·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이름 높은 명승도 많이 배출되어 무학(無學)·함허(涵虛)·보우(普雨) 등과 임진왜란 때의 승장 서산(西山)·사명(四溟)·처영(處英)·영규(靈圭)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末寺)로 구분되었고, 3·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韓龍雲)·백용성(白龍成)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 교구제(敎區制)를 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원을 설치, 종헌(宗憲)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립, 동국대학·해인대학·경기대학과 해동(海東)·용인(龍仁) 등 10여 고등학교 및 20여 개의 중학교를 운영, 문화사업에도 기여하고 있다. 1954년 이래 비구(比丘)·대처(帶妻) 두 파의 분쟁으로 분열된 후 여러 개의 종단으로 갈라졌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종파는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법화종(法華宗)·미륵종(彌勒宗)·법상종·보문종(普門宗)·일승종(一乘宗)·용화종(龍華宗)·불입종(佛入宗)·원효종(元曉宗)·천태종·화엄종·정토종(淨土宗)·진각종(眞覺宗)·총화종(總和宗)·진언종(眞言宗)·천화불교(天華佛敎)·한국불교법화종 등 18개 종파가 있다. 사찰수는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만여 명, 신도수 1,30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신문》을 비롯하여 각 종파·단체들에서 정기간행물도 30여 종이 나오고 있다.
釋迦(Sakyamuni, BC 563 ?∼BC 483 ?)
불교의 개조.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Sa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a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출생】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淨飯王)와 마야(Maya:摩耶)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ipavamsa》 《대사(大史) Mahavamsa》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출가와 성도】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매우 풍부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耶輸陀羅]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羅羅]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써 설명된다.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2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阿含經)》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십이인연(十二因緣)·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moksa)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nirvana)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설법】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梵天)의 간절한 권청(勸請)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rgadav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samgha:僧伽)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 《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一切皆苦·諸行無常·諸法無我 또는 一切皆苦를 빼고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사제·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무기(無記: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향함을 말한다)·법(法: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오온(五蘊: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육근(六根:법의 분류로서 眼·耳·鼻·舌·身·意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色·聲·香·味·觸·法의 객체, 즉 6境을 더한 十二處와, 거기에 眼識 등의 6식을 추가하여 十八界를 말하기도 한다)·연기(緣起: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기가 특히 유명하다)·열반·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입멸(入滅)】 혹서의 중부인도(印度)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교주(敎主)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내가 설한 교법(敎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 때, 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沙羅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sari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法身:진리로서의 불타)·보신(報身:보살의 願·行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응신(應身: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성도·입멸의 월·일에 관하여 최고(最古)의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성도를 12월 8일, 입멸을 2월 15일로 한다. 또한 남방불교에서는 탄생·성도·입멸이 모두 바이샤카월(Vaisakha 月:4∼5월)의 보름날의 일이라고 하여, 이 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8시기로 구분하여 팔상(八相:兜率來儀相·毘藍降生相·四門遊觀相·踰城出家相·雪山修道相·樹下降魔相·鹿苑轉法相·雙林涅槃相)이라고 부르는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緣起(patityasamutpada)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설. 나아가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그 간단한 형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같이 중생이 생사·유전(流轉)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를 유전연기,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환멸(還滅)연기라고 한다. 원시불교 이래의 사제설(四諦說:네 가지 근본진리)도 일종의 연기설로서 고(苦)·집(集)의 2제는 유전연기, 멸(滅)·도(道)의 2제는 환멸연기를 나타낸다. 연기설의 일반적 형태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 (老死)의 12종이 순차적으로 발생·소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십이연기이다. 《아함경(阿含經)》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진리)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한 말이나, 연기를 보는 자는 불(佛)을 본다고 설(說)한 것과 같이 연기는 법과 동일한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따라서 연기에 관하여 원시불교 이래 대승·소승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업감(業感)연기·아뢰야식(阿賴耶識)연기·진여(眞如)연기·여래장(如來藏)연기·법계(法界)연기 등이 그것이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업설(業說)이 부가되어 십이연기의 12지(支)를, 우리의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있다고 생각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설명하였다. 이는 시간적인 생기(生起)를 중심으로 연기설을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타파한 것이 대승불교운동인데, 특히 그 최초에 등장한 《반야경(般若經)》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였다. 이는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에 의해 연기와 밀접히 관련지어져 ‘연기 →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해석이 확립되었다. 즉 일체는 다른 것에 인연하여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상호의존하고 있는 상인 상대(相因相待)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은 자성을 갖고 있는 존재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사상이다. 중기 대승불교의 하나에 일체의 현상을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유식설(唯識說)이 있는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는 외계의 일체 현상은 말나식(末那識)의 활동과 이 말나식을 내포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또 하나가 모든 중생 속에는 깨달음의 가능성, 즉 여래의 인자가 있다고 하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여기에서는 본래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을 둘러싼 외계의 번뇌[客塵煩惱]에 의해 생사에 유전하는 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여래장 사상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진여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화엄경》 법계연기는, 모든 연기를 이상세계로서의 법계의 전개라고 보고 일체의 사물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를 연기무애문(緣起無門)이라고도 한다.
四聖諦(Catvari-arya-satyani)
인생문제와 그 해결방법에 관한 4가지의 진리. 제(諦:satya)는 진리·진실의 의미이며, 그 진리가 신성(arya)한 것이라 하여 사성제(四聖諦)·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한다.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의 인(因)·과(果)를 설명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조직으로 고제(苦諦:dubkha)·집제(集諦:samudaya)·멸제(滅諦:nirodha)·도제(道諦:marga)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① 고제:현실세계의 참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범부(凡夫)의 생존은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 인생의 고(苦)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로 표시되며, 또는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所求不得苦),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근본인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取蘊苦, 五陰盛苦:생존에 대한 집착)의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여기서 자연현상으로서의 생·노·병·사가 괴로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노·병·사가 괴로움인 것이다. 그럼에도 생·노·병·사는 인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자기존재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리켜 고제라고 한다. ② 집제:괴로움의 원인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기가 취하는 생존이 바로 고가 되는 것은 마음 깊이 갈애(渴愛)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욕망의 근저가 되는 욕망이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갈애에는 욕애(慾愛:감각적 욕망)·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무유애(無有愛:생존의 단절을 바라는 욕망)의 세 가지가 있다. 행복을 구하는 것도 욕망의 일종이지만 갈애는 그것과는 달리 욕망의 근본에 있는 불만족성을 말한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집제라는 것은 갈애를 근본으로 하는 여러 가지 번뇌이며, 괴로움의 원인이다. 따라서 집제와 고제는 미망의 원인과 결과를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발견하는 데에 불교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③ 멸제:이 갈애가 남김 없이 없어진 상태를 말하며, 이것은 이상적 경지로서 열반(涅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음이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결국 갈애에 물들지 않고 행동하는 마음의 자유로운 상태이며 이것이 참된 즐거움이다. 열반은 멸(滅)로도 번역되기 때문에 열반을 허무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멸은 갈애의 멸이지 마음 그 자체의 멸은 아니다. 갈애가 멸함에 따라 올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그 지혜에 의하여 알게 되는 부동의 진리가 열반이다. ④ 도제:이 고(苦)와 집(集)의 멸을 실현하는 길을 도제라고 한다. 이 수행방법은 8정도(八正道) 또는 팔성도(八聖道)로 표시된다. 8정도란,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8가지 실천사항을 말한다. 정견은 올바른 견해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이에 의하여 자기와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게 된다. 정견에 기초하여 올바른 사유가 생긴다. 나아가 이 생각에 의하여 올바른 말, 올바른 행동,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이 행해진다. 이것은 일상생활이 정견에 기초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생활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들에 의하여 정념이 확립된다. 정념은 올바른 주의력, 올바른 기억으로 마음을 줄곧 올바른 상태로 유지하는 마음의 힘이다. 마지막의 정정은 정견~정념에 기초하여 실현되는 마음의 통일, 즉 올바른 선정(禪定)을 말한다. 이상의 8정도는 서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선정에서 올바른 지혜가 생기며, 또한 정견은 올바른 지혜, 즉 정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정도는 점진적인 수행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길이다. 이러한 사제설은 석가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初轉法輪]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八正道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진(瞋)·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 이것은 원시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의 법으로, 석가의 근본 교설에 해당하는 불교에서는 중요한 교리이다.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8가지 덕목은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三法印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의(敎義). 인(印)이란 인신(印信)·표장(標章)의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이다. ①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온갖 물(物)·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불변·상존하는 것처럼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주기 위하여 모든 것의 무상을 강조하는 것. ②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만유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실로 자아인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아(我)에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므로, 이를 없애주기 위하여 무아라고 말하는 것. ③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생사가 윤회(輪廻)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이상의 경지인 열반 정적의 진상을 강조하는 것. 이 세 가지 법으로써 부처의 말씀과 마군(魔軍)의 말을 관장하는 인(印)으로 삼는다.
中道(madhyama-pratipad)
단멸(斷滅)·상주(常住), 유(有)·무(無), 고(苦)·낙(樂) 등 두 가지 대립·집착을 떠나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즉 불교의 근본적 입장으로서 대승·소승을 통하여 중시되어온 사상. 석가의 깨달음도 최초의 설법도 이 중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원시·부파(部派)불교에서는 고·낙의 이변(二邊)을 떠난 실천인 팔정도(八正道)를, 또한 단·상, 유·무 등의 편견을 떠난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이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를 피하고 낙을 구한다. 안락은 고와 대립하면서 인생의 이상으로서 지고의 선이다. 여기에 고의 멸과 낙의 초월의 ‘이중부정(二重否定)’이 있다. 이 이중부정에 의하지 않고는 진실·절대가 현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관파에서는 성멸(成滅)·단상(斷常)·일이(一異)·거래(去來)의 여덟 가지 대립적인 견해에서 떠날 것을 말하는 팔불(八不) 중도를 가리킨다. 결국 공(空)을 말한다. 법상(法相)·유식(唯識)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천태종에서는 실상(實相)을,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해석한다.
涅槃(nirvana)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의 ‘니르바나’의 음역인데, 니원(泥洹)·열반나(涅槃那) 등으로 음역하기도 하며 멸도(滅度)·적멸(寂滅)·원적(圓寂), 또는 무위(無爲)·부작(不作)·무생(無生) 등으로도 의역한다. nir(out)+?a?to blow)의 어원으로 해석되는 열반의 본뜻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된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영원한 평안, 완전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남방의 팔리 불교에서는 조림(稠林)이 없는 것으로, 이 경우에도 번뇌의 숲이 없어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 이르러서는 석가불의 이상화·신격화에 따라 열반에 대한 생각도 변하여, 수행자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는 완전한 열반을 체득하기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얻어진 열반은 불완전한 것(有餘涅槃)이며,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다(無餘涅槃)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석가불과는 달리 열반의 경지가 아니라 아라한(阿羅漢: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승불교에서는 유여·무여열반 외에 본래자성 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일체중생의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 진여(眞如:있는 그대로의 진리) 그 자체임을 달관하여 안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대승불교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열반으로서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 즉 열반 비지원만(悲智圓滿:자비와 지혜가 원만함)·임운무작(任運無作:아무런 조작 없이 있는 그대로 운용됨)의 불·보살의 상태를 말한다. 결국 열반이 어떤 특별한 경지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범부(凡夫)의 미혹이며, 열반은 유(有)도 무(無)도 아닌 공(空)으로서 윤회나 열반이나 어떤 구분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의 보살의 활동이 강조되었다.
輪廻
생명이 있는 것, 즉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불교사상. 산스크리트의 삼사라(samsara)를 번역한 말로, 전생(轉生)·재생(再生)·유전(流轉)이라고도 한다. BC 600년경 《우파니샤드[優波尼沙土]》의 문헌에서 비롯되어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세계에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천상(天上)의 6도(六道:六趣)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우리들 앞에 있는 축생, 예를 들어 파리나 모기 등도 전생에는 인간이었던 것이 바뀌어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또 장차 우리들이 저승에서 파리·모기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와의 총체인 업(業)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하며, 또한 이 업은 이승에 있는 우리들의 상식을 초월하여 판정되어, 선업(善業)에 의하여 선의 세계에, 악업에 따라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한편 부분적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 중에도 이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말한 이가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니체의 영겁회귀(永劫回歸)사상 등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原始佛敎
석가 시대부터 아소카왕[阿育王:재위 BC 272?∼BC 232?] 시대까지의 불교. 초기불교라고도 한다. 석가의 연대론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설이 있어, 이 시대를 약 100년간 혹은 200년간으로 보고 있다. 대체로 석가의 2대 법손(法孫) 또는 그 다음 세대까지를 가리키는데, 이 시대에 석가가 교리를 펴고 그가 죽은 뒤에 그의 가르침을 모아 이것을 포교할 제도가 확립되었다. 현재 그에 관한 자료 가운데는 신·구의 여러 가지 책들이 뒤섞여 있어 이것들을 모두 불설(佛說)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른바 ‘5부(五部) 4아함(四阿含)’의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은 그 대부분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불설을 거의 그대로 준봉(遵奉)하여 교단의 결속이 굳혀져 점차 교세를 넓혀 중인도 일대에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보수와 진보의 두 파로 갈라지면서,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로 옮겨갔다.
小乘佛敎(Hinayana)
사람들을 인도하여 해탈(解脫)을 얻도록 하는 불교 유파(流派).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큰 수레가 아니라고 한다. 인도의 불교사를 보면, 첫째로 석가모니 재세(在世)의 BC 6∼BC 5세기의 근본불교와, 둘째, 석가모니 멸후(滅後), 갠지스강 유역에 교단을 넓히고 《아함경(阿含經)》 등의 원시경전이 성립된 약 2세기 간의 원시불교(여기에는 근본불교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셋째, 아소카 왕의 불교 귀의(歸依)로 불교교단이 급속히 발전 확대됨과 동시에 교단분열이 일어났던 부파(部派)불교, 넷째, BC 2∼BC 1세기경에 대두되기 시작한 대승불교로 대별된다. 대승불교는 부파 중에서 진보적·혁신적이었던 대중부(大衆部) 및 재가신자 집단, 즉 보살중(菩薩衆)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까지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던 전통적·보수적 불교에 대항하였던 종교운동이며, 그때 스스로를 대승(大乘)으로 자칭하고 기성불교를 소승으로 낮추어 불렀다. 따라서, 후자가 스스로를 소승으로 자칭하는 일은 없다. 그 기원에서 소승불교는 원시불교를 포함하여 말하는 경우와 직접 대승운동의 상대방이 되었던 보수적인 모든 부파만을 일컫는 경우의 두 가지 용법이 있다. 부파는 처음 불멸(佛滅) 100여 년 후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의 2파(根本·部)로 나뉘고,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대중부 계통이 계속하여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상좌부 계통이 분열하였다. 이 분열의 사정과 명칭은 제전(諸傳)이 일치하지 않으나, 북전(北傳)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의 기록에 따르면 [표]와 같다. 이 [표]에서 새로이 성립한 18부파(枝末十八部)를 근본 2부와 합해 ‘소승 20부’라 한다. 그러나 남방소전의 《도사(島史)》에서는 불멸 후 약 100년 동안에 상좌대중부의 근본분열이 있고, 그후 약 100년 동안 대중부 계통의 5부, 상좌부 계통의 11부로 분열하여 도합 18부의 부파를 전하고 있다. 각 부파는 자파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각각의 입장에서 종래의 성전을 편집 집대성하였는데, 이로써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해석·주석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깊은 이해에 의해 체계화되어 논서가 성립하였다.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부르며, 논장(論藏)으로 총칭한다. 경·율·논의 3장은 각 부파에 의해 정비되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주로 스리랑카상좌부의 3장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하는 논장에 지나지 않는다. 부파 중 가장 유력하였던 설일체유부는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 의해 일체의 법이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며(法體恒有), 그 법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실재한다(三世實有)고 하였다. 또한 법의 체계를 5위(位) 75법(法)으로 정비하였으며, 동시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자기 일신의 정진, 덕목의 실천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 수행의 단계를 세분하였을 뿐 아니라 열반(涅槃)을 유여(有餘)·무여(無餘) 열반으로 2분하여 수행의 구극에 도달한 아라한(阿羅漢)도 유여열반에 이를 뿐이라 하였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번쇄한 교학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집대성되었다. 비바사는 광해(廣解)의 뜻으로 당시의 학자 또는 학파의 다수의 이견(異見)을 열거하여, 소승불교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후에는 불론의 연구·정리가 이 학파의 주된 과제가 되고 있다. 그 외 경량부(經量部)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에 대하여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을, 법체실유설(法體實有說)을 부정하고 가유설(假有說)을 주장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종자설로서 종자는 식물의 종자가 발아의 능력을 내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업력(業力)을 업과(業果)로 이끄는 힘을 말한다. 우리의 업과를 일으키는 종자가 현세에서 내세까지 멸하지 않고 존속할 때, 이것을 세의식(細意識) 또는 일미온(一味蘊)이라 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자·훈습(熏習)은 후세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무루(無漏)의 종자는 범부(凡夫)에게도 내재하며, 이것이 계발되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중부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통하며, 대승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의 원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량부 계통에서 발달한 것이 하리바르만[訶梨跋摩]의 《성실론(成實論)》 및 바수반두[世親:320∼400?]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다. 특히 후자는 그후 인도·티베트에서도 깊이 연구되었으며, 소승불교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인정되었고, 중국에 전래되어서는 ‘구사종’이라는 일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경량부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여 실유의 범위를 한정하였지만, 대개 상좌부의 실재론적인 법의해석(人無我·法有)과 실천의 자기 중심적 경향[自利]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공격도 완전히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각각 법무아(法無我)에서 공(空)으로, 이타(利他)에서 자비(慈悲)로 발전하였으며, 보살(菩薩)사상이 형성되었다.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 보살에 대해 소승불교에서는 성문(聲聞:석존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 열반에 이르는 성자)과 연각(緣覺: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성자)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고 있다. 소승불교 중, 상좌부 계통은 스리랑카·미얀마·타이·라오스 등에 전해져 현재에도 민중 속에 확고한 기반을 잡고 있다. 한편 대중부 계통은 후에 대승불교로 발전하여 중국·한국·일본 등 북방에 널리 유포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철학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阿羅漢(Arhan)
소승(小乘)의 수행자들, 즉 성문승(聲聞乘) 가운데 최고의 이상상(理想像). 나한(羅漢)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후에 불제자들이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階位)로 바뀌었다. 수행결과에 따라서 범부(凡夫)·현인(賢人)·성인(聖人)의 구별이 있는데, 잘 정비된 교학(敎學)에서는 성인을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있다. 아라한과(果)는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라고 하며, 그 이전의 계위는 아직도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단계이므로 유학(有學)의 종류로 불린다.
아쇼카왕(Asoka,?∼?)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272?∼BC 232?). 한역불전(漢譯佛典)에는 아육왕(阿育王)·아수가(阿輸迦)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조부 찬드라굽타 시절에 이룩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이어받아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정치 이념을 내걸고 그 이념 실현에 정열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영역 내의 석주(石柱)나 암석에 새겨진 그의 조칙(詔勅)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나 아마르어로 새겨진 것도 있다. 이 조칙의 내용에는 그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 오리사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부모·어른에의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고, 북서 국경의 그리스 세력도 그들 내분 때문에 다른 지방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반 생활양식이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취한 정책이 매우 현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원시불교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정치이념은 인근 제국이나 제민족에게까지 전파되어 그의 사절(使節)이 이집트·마케도니아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왕의 정책은 36년 통치 후에는 점차 쇠퇴하였으나, 그의 치세(治世) 중에는 불교를 비롯한 갠지스강 유역의 고도의 문화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불교도들은 그를 이상적 군주로 추앙하였고, 많은 설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大乘佛敎(Mahayana)
대승의 교리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종파(宗派)의 총칭. 삼론종(三論宗)·법상종(法相宗)·화엄종(華嚴宗)·천태종(天台宗)·진언종(眞言宗)·율종(律宗)·선종(禪宗) 등이 이에 속한다. 석가 입멸(入滅) 후 500년경(BC 100년?) 인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때까지 여러 파로 갈라져 자파(自派)의 주장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고집하여 온 불교의 자세를 맹렬히 비판하고, 재래불교를 소승(小乘:Hinayana)이라 폄하(貶下)하는 한편, 대승이라고 칭하면서 이타적(利他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활발하고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대승’의 어원은 큰(maha) 수레(yana),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제도(濟度)를 그 목표로 하였다. 이 운동은 종래에 출가자(出家者:승려)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널리 민중에게까지 개방하려는 재가자(在家者)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 유적인 스투파(stupa:墳墓)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때까지 석가에게만 한정하던 보살(菩薩)이라는 개념을 넓혀 일체중생의 성불(成佛)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일체중생을 모두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고 광범위한 종교활동을 펴 나갔다. 이 불교운동의 전거(典據)로는 대승불교의 경전이 속속 이루어진 데 있었다. 먼저 《반야경(般若經)》이 나왔다. ‘공(空)’의 사상을 강조하는 《반야경》은 종래의 고정관념을 타파함과 동시에, 일체의 집착(執着)으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실천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어 일체를 포함하여 ‘일승(一乘)’을 교설(敎說)하고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세우는 《법화경(法華經)》, 광대한 불타[毘盧遮那佛]의 세계를 교설하는 《화엄경(華嚴經)》, 재가거사(在家居士)인 유마(維摩)가 오히려 출가자(出家者)를 교설하는 《유마경(維摩經)》, 서방정토(西方淨土)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를 찬탄하며 일체중생의 구제를 약속하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등이 이루어져 종래의 불교를 일신하는 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뒷받침하였다. 이 경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승이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거니와, 2∼3세기에는 용수(龍樹)가 출현하여 이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어 일체중생에 불성(佛性)을 인정하는 여래장(如來藏)을 교설한 《승만경(勝經)》 등의 경전이 이루어졌고, 또한 일체를 마음의 흐름에 응집(凝集)시키는 유식(唯識)사상의 대두에 이어 5∼6세기에는 불교논리학인《인명(因明)》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대승불교 초기부터 일반민중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다라니(陀羅尼)》를 외우고 주법(呪法)을 교설하는 밀교(密敎)가 성하여 7세기 이후 불교활동의 중심이 되었는데, 밀교는 ‘대승’보다는 ‘금강승(金剛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대승불교는 한(漢)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가 몽골·티베트·한국·일본 등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에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재위 491∼518) 때 용수(龍樹)의 《중관론(中觀論)》 등 삼론(三論)을 비롯한 천태(天台), 열반(涅槃)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였다. 또한 길장(吉藏)은 삼론을 바탕으로 삼론종(三論宗)을 개종(開宗)하는 등 한국에서의 대승불교는 마침내 독자적인 노력에 힘입어 발전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佛陀(Buddha)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 약칭은 불(佛). 불타(佛馱)·부타(浮陀)·부도(浮屠)·부두(浮頭)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라고 하였다. 의역(意譯)하면 깨달은 사람(覺者), 환히 아는 사람(知者)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 즉 불타는 BC 6세기쯤에 인도 카필라국에서 출생하여 태자(太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진리를 알아서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깨우쳐 주었던 석가세존을 존경하여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는 깨달은 사람, 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불타 즉 부처는 석존에게만 국한된 절대적인 명칭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는 일체법(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대성자(大聖者)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성자가 석존이기 때문에 그를 불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석존처럼 우주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진실되게 이해하여 실천 파악하고 자기화시켜,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완성한 이를 가리킨다. 《대반야경(大般若經)》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여러 경전에서 “일체지(一切智)를 얻었으므로 부처라 한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을 알므로 부처라 한다”라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 “제법(諸法)의 실의(實義)를 알았으므로 부처라 하고, 제법의 실상(實相)을 얻었으므로 부처라 하며, 다시 실의에 통달하고 참된 그대로 일체법을 알았으므로 부처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모두 앞에서 본 불타의 뜻과 같은 말들이다. 또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의 앞부분에 보면 “부처[佛]란 제악(諸惡)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제선(諸善)을 모두 체득하여, 또 모든 허물이 없이, 제욕(諸欲)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번뇌와 어리석음과 어둠을 부수고 정각(正覺)을 체득하여 이루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불교경전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名號]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의 여래십호(如來十號)를 비롯하여, 대자비자(大慈悲者)·일체지자(一切智者)·일체견자(一切見者)·개도자(開道者)·대사문(大沙門)·대성인(大聖人)·양족존(兩足尊)·천중천(天中天)·인중인사자(人中人獅子) 등으로 많으며, 경전에 따라서는 60가지, 108가지, 또는 270가지나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부처의 위대함을 찬양하여 표현한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타관(佛陀觀)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초기의 석존시대에는 불타라 하면 석존을 가리켰고, 그 제자들에게서 불타는 오직 석존뿐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대승불교 시대로 이르는 동안 불타관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 왔다. 불타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0덕상(德相), 즉 신체적 특성으로서 32상(相) 80종호(種好)를 갖추고 정신적인 특수성으로서의 덕성인 십력(十力)·사무외(四無畏)·삼념주(三念住)·18불공법(十八不共法:불타 외에는 아무도 같을 수 없는 불타만의 특수한 18가지 덕성)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타는 생신(生身)과 법신(法身)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의 육신(肉身)을 생신불(生身佛)이라 하고, 부처가 얻은 부처의 본성인 진리[法]를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2,500여 년 전에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역사적 불타인 석존은 생신(육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타라고 할 때에는 보통 법신불을 말하는데, 이 법신불은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신관(佛身觀)에 의하여 삼신설(三身說), 즉 법신(法身)·보신(報身:應身)·화신(化身)이 나타났다. 실제에서 불타로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오직 석존뿐이지만, 많은 불교경전에는 석존의 이전에 이미 비바시불(毘婆尸佛)·연등불(燃燈佛) 등 과거의 부처와 미륵불(彌勒佛) 등 미래의 부처와 그리고 아축불(阿皾佛)·아미타불(阿彌陀佛) 등 현재의 부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들은 모두 역사상의 불타인 석존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즉 과거의 여러 부처들은 석존이 인위(因位:부처를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자리)에서 수행을 쌓을 때 받들어 공양하고 수기(授記)를 얻은 데에 관련이 되고, 또 장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비롯한 미래의 많은 부처들은 석존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그 실제의 몸은 오히려 온세계에 나타나서 교화를 쉬지 않는 모습을 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을 지녔으므로 과거부터 부처의 성품을 개발하여 성불(成佛)한 이가 많았을 것이고, 또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동안에 발심수행(發心修行)하여 마땅히 성불할 자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현재·미래와 온세계에 모래알같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들이 출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지만 이는 두 큰 법신불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부처는 세 가지의 공통된 것이 있으니,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모두 수행을 쌓는 것이 같고, 법신이 같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같다. 부처(불타)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의 활동이 언제나 가득하여 부족함이 없이 원만무애(圓滿無碍)하다. 즉,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우치는 온전한 인간상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yus Buddha)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3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5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아축불(阿皾佛, Aksobhya-Buddha)
사방현재불(四方現在佛)의 하나. 동방의 현재불, 남방 보상불(寶相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과 더불어 사방 현재불을 이룬다. 아축비(阿?·아추비야(阿芻耶)·아축바(阿몹? 등으로도 음역하며, 무동(無動)·부동(不動)·무노불(無怒佛) 등이라 의역한다. 불교의 붓다(부처)관(觀)으로서 붓다는 역사적 인물인 석가 이외에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무수한 붓다가 있어 각각 설법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축불국경(阿멓擄覲?》에 의하면 아축은 과거 동방의 아비라타[阿比羅提] 나라의 대일여래(大日如來) 아래에서 발심(發心)을 하였다. 어떠한 사물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절대로 화내지 않겠다는 무진에(無瞋)의 서원을 하고 그 수행에 따라 동방세계에서 성불(成佛)하여 아축불이 되었으며, 현재도 설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의 화성유품(化城喩品)에는 대통지승불(大通知勝佛)의 16왕자 중 제1왕자인 지적(智積)이 동방세계에서 성불하였다고 쓰여 있다. 또한 《비화경(悲華經)》에서는 미타(彌陀)의 전신인 무쟁념왕(無諍念王)의 1,000명의 왕자 중 제9왕자가 아축으로서 동방 묘락국(妙樂國)에서 성불하였다고 한다. 아축불국이란 곧 이 동방세계를 가리킨다. 밀교에서는 그를 금강계(金剛界) 5불의 하나로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미륵신앙(彌勒信仰)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 크게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말세적인 세상을 구제하러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의 2가지 흐름으로 나누나 근본적으로는 이상세계를 제시하는 미륵의 대승설법이 이루어지는 복지사회에의 염원에서 나온 불교적 이상사회관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인도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미륵보살상을 통해 간다라 미술의 유입기인 BC 2세기경부터 모든 중생의 이익을 원하는 미륵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중국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룽먼[龍門]석굴의 미륵상들을 통해 6세기 북위 불교의 미륵신앙 열기를 추정할 수 있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에 대한 신앙 중에서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이 가장 오래되었고, 또한 미륵의 명칭은 초기 경전에서 후기 경전까지 끊이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영향도 깊다. 특히 말세사상과의 연관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부각되어 사회 모순을 해결짓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초기 불교 수용에서부터 전래된 미륵신앙은 특히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서 응용되어 백제의 무왕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으로 왕권을 강화하며, 신라 진흥왕은 왕자의 이름을 금륜과 동륜으로 지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적인 치세를 흠모하는 정치를 펼치며, 신라의 화랑 또한 미륵의 화현(化現)인 국선(國仙)을 따르는 청년집단으로 결성되어, 고대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주체로 형성되었다. 또한 미륵경전에서 강조된 10가지 착한 행위는 참회를 통해 지난 죄업을 소멸하는 수행을 낳게 되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힐부득(努p夫得)의 현신성도(現身成道) 설화는 대중 구제적인 방편과 함께 자신을 연마하는 미륵신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경우는 말세적인 민심을 이용하여 자신이 미륵이라 하여 일시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하는데 이 또한 미륵하생의 원용이다. 근세 한국에서 일어난 증산교 및 용화교 등도 사회 갈등기에 일어나는 민중의 소망을 사회구제적인 미륵신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이다.
菩薩(Bodhisattva)
산스크리트 보디사트바의 음사(音寫)인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 보디(bodhi)는 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 깨달음·지혜·불지(佛智)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트바(sattva)는 as(존재하다)를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유정(有情)을 뜻한다. 보살의 일반적인 정의(定義)는 ‘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으로서 보리를 증득(證得)할 것이 확정된 유정’ ‘구도자(求道者)’ 또는 ‘지혜를 가진 사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보살이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확립된 뒤부터이지만, 그 용어와 개념의 시초는 BC 2세기경에 성립된 본생담(本生譚:석가의 前生에 관한 이야기)에서였다. 본생담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석가를 신성시하고, 그 깨달음의 근원을 전생에서 이룩한 갖가지 수행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구도자로서의 석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특히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석존이 연등불로부터 불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계기로 하여 석가를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즉 보살이라 일컫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단수로서 석가만을 가리키던 보살이 복수로서 중생을 뜻하게 된 것은 본생담의 석가가 출가(出家) 비구(比丘)에 국한되지 않고 왕·대신·직업인·금수(禽獸)이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과거·현재·미래세계에 다수의 부처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석가보살과 같은 특정의 보살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불(成佛)의 서원(誓願)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장차 성불(成佛)할 것이라는 이른바 ‘범부(凡夫)의 보살’ 사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보살사상은 공(空) 사상과 결합하여 하나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렀으며, 육바라밀(六波羅蜜)·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捨)·무생법인(無生法忍) 등의 실천을 근간(根幹)으로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축(軸)이 되었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 중 기본적인 두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이다.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며, 자기의 쌓은 바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돌리겠다는 회향이다.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이상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 그 수행단계에 의하여 몇 가지 계위(階位)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초발심(初發心:최초단계로서의 진리를 추구함), 행도(行道: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수행함)·불퇴전(不退轉:도달한 경지에서 물러나거나 수행을 중지하는 일이 없음)·일생보처(一生補處:한생이 끝나면 다음에는 부처가 됨)의 4단계가 있는데, 후에 《화엄경》에서는 십지(十地:歡喜·離垢·發光·焰慧·難勝·現前·遠行·不動·善慧·法雲地)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보살의 개념이 확대되어 미륵불(彌勒佛)이 탄생하였다. 미륵불은 미래에 성불할 자로서, 현재는 도솔천(兜率天)에 미륵보살로서 거주한다는 미래지향의 미륵신앙이 나타났다. 또한 정토사상과 관련하여 아촉불(阿멓?아촉보살)·아미타불(阿彌陀佛:法藏 보살)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자비와 절복(折伏)의 신앙대상으로 관음(觀音)보살과 대세지(大勢至)보살, 《반야경》 계통의 문수(文殊)보살, 《화엄경》 계통의 보현(普賢)보살이 성립되고, 이어 지장(地藏)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나타났다. 또한 보살은 실재했던 고승(高僧)이나 대학자에 일종의 존칭과 같이 사용되어 인도의 용수(龍樹)·마명(馬鳴)·제바(提婆)·무착(無着)·세친(世親) 등도 보살이라 불렀으며, 중국에서는 축법호(竺法護)가 돈황(敦煌)보살로, 도안(道安)이 인수(印手)보살로, 그리고 한국에서는 원효(元曉) 등이 보살의 칭호를 받았다. 나아가 ‘범부(凡夫)의 보살’은 재가(在家)·출가(出家)를 불문하고 모든 불교도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중기 대승불교 이후 성했던 여래장(如來藏)·불성(佛性)사상과 표리관계를 이루며, 불─보살─일체중생(산천초목도 포함)의 활동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한다)’라는 말을 낳았으며, 불교활동의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六波羅蜜(Sadparamita)
생사(生死)의 고해를 건너 이상경인 열반(涅槃)의 피안에 이르는 여섯 가지 덕목(德目). 보살이 수행하는 6가지의 바라밀법을 말한다. ① 보시(布施), 즉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재시(財施)·무외시(無畏施)·법시(法施) 등 널리 자비를 베푸는 행위, ② 지계(持戒), 즉 시라(尸羅)바라밀:재가(在家)·출가(出家)·소승·대승 등의 일체 계행(戒行), ③ 인욕(忍辱), 즉 찬제(:提)바라밀:여러 가지로 참는 것, ④ 정진(精進), 즉 비리야(毘梨耶)바라밀:항상 수양에 힘쓰고 게으르지 않는 것, ⑤ 선정(禪定), 즉 선나(禪那)바라밀:마음을 고요하게 통일하는 것, ⑥ 지혜(智慧), 즉 반야(般若)바라밀:사악한 지혜와 나쁜 소견을 버리고 참지혜를 얻는 것이다.
中觀派(Madhyamika)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한 학파.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중관론의 약칭)을 근저로 하여 반야 공관(般若空觀)을 선양한 학파로서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되었다. 《중론》의 설은 모든 존재가 연기성(緣起性)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은 유·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라는 것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데에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는 《백론(百論)》 등을 저술하여 외도(外道)와 소승의 교의를 논파하고, 제바의 제자 나후라발타라(羅羅跋陀羅)는 《중론》의 팔불(八不)의 의의를 주석하였다. 그러나 중관파가 학파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은 불호(佛護) 시대부터인데, 고학의 근본은 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공의 입장이다. 불호 이후 공의 인식방법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2파로 나뉘었는데, 불호의 계통인 필과성공파(必過性空派) 또는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와 청변(淸辨)으로 대표되는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이다. 전자로부터는 월칭(月稱)이 나와 중론의 주석서 《Prasannapada》를 쓰고, 《중관에의 입문》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티베트에 널리 유포되었다. 후자에는 같은 시기에 관서(觀誓)가 나오고, 또한 이어서 적천(寂天)도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등의 중요한 논서를 저술하였다. 8세기에는 적호(寂護), 연화계(蓮華戒)가 중관파와 유가행파를 종합한 입장에서 중관파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 계통은 티베트로 전파되어 번영하였는데, 그 대표자가 아티샤(982∼1055)이고, 중국에서는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을 소의(所依)로 하는 삼론종(三論宗)이 발전하였다.
般若思想(prajna)
반야경전을 근본으로 사물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대승불교 사상. 초기 《도행(道行)반야경》의 성립에서 시작된 반야바라밀의 강조는 초기 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반야 개념의 정립과 함께 깨달음을 구하는 보살의 6가지 덕목 중 하나로 시작되었으나, 반야의 인식론적 중요성이 공(空)사상의 대두와 함께 부각되어 본래 자성(自性)이 없는 공관(空觀)의 체득을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필수적이라 하였다. 사물에 대한 분별심 없는 직관을 통해 보다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반야사상은 그 후 발전되어 염불 내지 신주(神呪)·진언(眞言)에도 응용되어 대표적인 밀교경전인 《이취경(理趣經)》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의 근본사상이 되었으며, 《반야경》이 중국에 전래되어서는 반야의 오묘한 이치가 중국 도교의 근본과 비슷한 점이 많아 중국에 반야사상이 유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중국적으로 반야사상을 이해하는 격의(格義)불교를 일시동안 낳기도 한다. 《반야경》을 주석한 형태인 중관불교는 공사상으로 표현되는데, 유식사상과 함께 인도 대승교학의 2대 흐름을 하나로 중국 선불교의 6조 혜능의 깨우침도 반야사상에 입각한 《금강경》을 독송을 듣고 이루어졌음을 볼 때 중국 불교의 경우는 교학뿐만 아니라 실천수행에도 반야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空(sunya)
공·영(零)·무(無) 등을 뜻하는 범어 ‘수냐’의 한역어(漢譯語). 순야(舜若)·순야다(舜若多) 등으로 음역(音譯)되는데, 3가지 의미로 쓰인다. 인도 수학에서 수냐는(sunya)는 영(零)을 의미하는 말로, 없는 것, 비어 있는 것, 결핍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불교, 특히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반야사상(般若思想) 계통의 중심사상이 된 말이다. 즉,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實體)는 없으며, 연기(緣起)에 의하여 존재하는 연기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셋째, 부정사(否定詞)로서 없다[無]는 의미로 사용될 때 이것은 존재 자체의 부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것은 자체(自體)·실체·아체(我體)·본체(本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즉, 아(我)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의 영구적 항존성을 인정하는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부정한다. 말하자면 고정적 실체의 부정이다. 이러한 공(空)의 사상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있었으나 대승불교, 특히 용수(龍樹:Nagarjuna)의 반야사상에서 핵심이 되었다.
龍樹(Nagarjuna, 150?~250?)
인도의 불교학자. 원이름 나가르주나(나가:용, 아가르주나:나무 이름). 남인도 출생. 북인도로 가서 당시 인도의 사상(思想)을 공부하고, 불교 특히 신흥 대승불교(大乘佛敎)사상을 연구, 그 기초를 확립하였다. 때문에 제21의 서가(書家), 8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중론(中論)》에서 전개한 공(空)의 사상은 그 이후의 모든 불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즉, 실체(實體:自性)를 세우고, 실체적인 원리를 상정(想定)하기 위한 바람직한 자세를, 철두철미한 비판을 가하면서, 일체의 것이 다른 것[他]과의 의존·상대·상관·상의(相依)의 관계[緣起] 위에서만 비로소 성립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상관관계는 긍정적·부정적·모순적 상태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느 것에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공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반면, 구극(究極)의 절대적 입장[眞諦·第一義諦]은 우리의 일상적 진리[俗諦 즉, 世俗諦]로만 성립할 수 있으며, 이를 초월해서는 논의의 대상이나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그의 학파를 가리켜 중관파(中觀派)라고 불렀다. 주요 저서에 《중론》(4권) 외에 《회쟁론(廻諍論)》 《광파론(廣破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공칠십론(空七十論)》 등이 있으며, 《대지도론(大智度論)》(100권)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은 그의 저작설에 의문점이 있다.
唯識學派(vijuaptimatravadin)
인도 대승불교의 한 학파. 6파철학의 일파이기도 하다. 수행방법으로서 유가행(瑜伽行), 즉 유가(요가)를 중요시하므로 유가행파(派) 또는 유가파라고도 한다. 파조는 파탄잘리. 대승불교의 다른 한 파인 중관파(中觀派)와 대립하면서 300∼700년간에 발전·변천하였다. 이 학파의 초기 경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과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磨經)》이고 그 성립연대는 3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미륵(彌勒)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그 학설을 발전시켰다. 미륵의 가르침을 받은 무착(無著)은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등을 저술하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의 의식구조 및 유식무경(唯識無境), 유식관의 실천에 대한 조직적인 학설을 정립하였다. 무착의 동생이며 제자가 된 세친(世親)은 미륵·무착의 논서들을 주석하여 많은 저작을 하였으며, 또한 종래의 여러 사상을 집성하여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지어 유식사상을 대성하였다. 세친 이후는 《유식삼십종》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파가 발전하였다. 덕혜(德惠)의 뒤에 안혜(安慧)가 나와 많은 주석서를 썼는데, 그 계통에서 조복천(調伏天)이 나왔다. 또한 안혜와 거의 같은 계통의 진제(眞諦)는 중국에 들어가 많은 경·론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섭대승론》과 석(釋)을 번역·강의하여 그 문하에서 섭론종(攝論宗)이 성립·발전하였다. 한편 진나(陳那)는 논리학[因明]을 대성하였는데, 그 계통에서 무성(無性)·호법(護法)이 나왔으며, 호법은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을 지어 유식설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계현(戒賢)에 의해 계승되었다. 구법(求法)차 인도에 갔던 현장(玄)은 계현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성유식론》 및 그 외의 많은 유식학파의 경·론을 번역하였다. 그의 문인(門人) 규기(竅基)는 법상종(法相宗)을 개창하였으며, 또한 유식학파에는 난타(難陀)·승군(勝軍)의 계통도 있으며, 논리학 계통으로는 상갈라주(商羅主)·법칭(法稱) 등이 있다.
禪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선은 팔리어(語) 자나(jha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a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이를 정(定)·정려(靜慮)·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것인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a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戒·定·慧), 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捨), 사념처(四念處:身·愛·心·法의 네 염처), 그리고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이 모두 선(禪)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팔등지[八等至:사선+四無色定(空無邊處·識無邊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處)],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滅盡定)을 들고 있다. 부파(部派)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해설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상기한 원시불교의 9종 이외에, 삼등지(三等持:空등지·無相등지·無願등지),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界差別觀), 오정심관(五停心觀:不淨觀·慈悲觀·因緣觀·界分別觀·數息觀) 등인데, 그 공통의 특색은 ‘실재관(實在觀)’에 의해 고정화되었다는 점과,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즉 반야(般若)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自利)·이타(利他)를 삼매(三昧)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외도선(外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 《능가경(楞伽經)》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외도·성문·연각의 선)·관찰의선(觀察義禪:法無我, 반야경의 空, 즉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선)·반연여선(攀緣如禪:모든 분별을 떠남)·여래선(如來禪:일체중생의 구제에 전념하는 선정) 등과,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외도선·범부선(凡夫禪)·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最上乘禪) 등으로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때에 한국에 전래되어, 고려시대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하였고,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을 낳았다.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 크게 보아 선종이라 할 수 있다.
達磨(Bodhidharma, ?∼528 ?)
중국 남북조시대의 선승(禪僧).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 범어(梵語)로는 보디다르마이며 보리달마(菩提達磨)로 음사(音寫)하는데, 달마는 그 약칭이다. 남인도(일설에는 페르시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후에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다.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 북위(北魏)의 뤄양[洛陽]에 이르러 동쪽의 쑹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고 나서,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理)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였다. 그의 전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근 둔황[敦煌]에서 출토된 자료에 따르면, 그의 근본사상인 ‘이입사행(二入四行)’을 설교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오늘날의 학계의 정설로는, 달마는 《사권능가경(四卷楞伽經)》을 중시하고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당시의 가람불교나 강설불교(講說佛敎)와는 정반대인 좌선을 통하여 그 사상을 실천하는 새로운 불교를 강조한 사람이다.
慧能(638∼713.8)
중국 당(唐)나라의 승려.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한다. 속성 노(盧). 시호 대감선사(大鑑禪師). 난하이[南海] 신싱[新興] 출생.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느 날 장터에서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듣고 불도에 뜻을 두어, 무진장(無盡藏) 비구니가 《열반경(涅槃經)》을 듣고 곧 그 뜻을 이해하자, 치저우[州] 황메이[黃梅]로 제5조인 홍인(弘忍)을 찾아가 노역에 종사하기를 8개월, 그런 다음에야 의법(衣法)을 받았다. 676년 난하이 법성사(法性寺)에서 지광(智光)에게 계(戒)를 받고, 이듬해 사오저우[韶州] 차오치[曹溪]에 있는 보림사(寶林寺)로 옮겨 법을 넓혔으며, 그 곳의 자사(刺使) 위거(韋據)의 청을 받고 대범사(大梵寺)에서 설법하였다. 신수(神秀)와 더불어 홍인 문하의 2대 선사로서, 후세에 신수의 계통을 받은 사람을 북종선(北宗禪), 혜능의 계통을 남종선(南宗禪)이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에서 발전하였다. 사법(嗣法)의 제자에 하택 신회(荷澤神會)·남양 혜충(南陽慧忠)·영가 현각(永嘉玄覺)·청원 행사(靑原行思)·남악 회양(南岳懷讓) 등 40여 명이 있었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 것을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고 한다.
看話禪
화두(話頭)를 근거로 수행하는 참선법. 화(話)란 화두의 준 말이며, 회두란 고칙(古則) 공안(公案)의 첫마디를 화두 하나로 해결하면 차례로 다음 화두를 들어 그것을 해결하며, 철저한 큰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선풍을 말한다. 묵조선(默照禪)이라는 평을 받은 조동종(曹洞宗)의 선풍에 대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이 그것이다. 송(宋)나라 때 조동종의 굉지 정각(宏智正覺)이 묵조선을 표방하고 나오자, 임제종의 대혜 종고(大慧宗) 일파가 그것을 비난하면서 화두를 참구(參究)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默照禪
불교에서 묵묵히 좌선(坐禪)하여 영묘(靈妙)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선풍(禪風). 간화선(看話禪)과 대비되는 표현법으로,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이다. 이 명칭은 남송(南宋) 임제종파(臨濟宗派)의 종고(宗)가 조동종(曹洞宗) 정각(正覺)이 《묵조명(默照銘)》을 펴낸 뒤, 수행자들이 면벽좌선(面壁坐禪)함을 야유조로 이같이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이는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공안(公案)을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대혜(大慧)종교는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공격하였지만, 결국 양자의 차이는 본래의 면목(面目)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이다. 굉지(宏智)정각은 《묵조명》을 통하여 묵조선이 불조 정전(佛祖正傳)의 참된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頓悟漸修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말. 이에는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頓漸二敎
석가의 설법을 연차적, 내용적으로 분류하는 교판(敎判)의 하나인 돈교(頓敎)와 점교(漸敎). 순서를 거치지 않고 일시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가르침을 돈교, 순서를 거쳐 점차적으로 오랜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점교라고 한다. 또 설법의 형식으로는 처음부터 갑자기 깊은 내용을 설하는 것을 돈교, 얕은 내용에서 점차 깊은 내용을 설해 가는 방법을 점교라고 한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화엄경(華嚴經)》을 돈교, 《아함경(阿含經)》 《방등경(方等經)》 등을 점교라고 한다. 선종에서는 신회(神會)가 신수(神秀) 이후의 북종선(北宗禪)을 공격하며, 혜능(慧能)을 개조로 하는 남종선(南宗禪)이 돈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북종선은 점오(漸悟)의 열등한 가르침이라고 비난했다. 이를 가리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고 한다.
天台宗
중국 수(隋)나라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를 개조(開祖)로 하는 불교의 한 종파. 후난성[湖南省] 남부 화룽현[華容縣] 출신의 지의는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河南省 남단)에서 혜사(慧思)에게 사사하여 선관(禪觀)을 닦고 《법화경(法華經)》의 진수를 터득한 뒤, 진릉[金陵:南京]에서 교화활동을 하여 많은 귀의자를 얻었지만, 575년 38세 때 저장성[浙江省]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은둔하여 사색과 실수(實修)를 닦았다. 이것이 천태종 성립의 단서가 되었으며, 지의는 《법화경》에 따라 전불교를 체계화한 《법화현의(法華玄義)》, 천태의 관법(觀法)인 지관(止觀)의 실수를 사상적으로 정립한 《마하지관(摩訶止觀)》《법화경》을 독자적인 사상으로 해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의 이른바 <법화삼대부경(三大部經)>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중국·한국·일본을 일관하는 천태교학의 지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인도 전래의 불교를 중국 불교로 재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의 문하인 장안(章安) 관정(灌頂)을 필두로 지위(智威)·혜위(慧威)·현명(玄明)을 거쳐 제6조 담연(湛然)으로 교학이 전승되었다. 그들은 지의의 삼대부경에 상세한 주석을 가하여 《석첨(釋籤)》 《묘락(妙樂)》 《보행(輔行)》을 저술, 천태 교의를 선양하였고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초목성불설(草木成佛說)까지 전개하였다. 당나라 말기에 쇠했던 불교가 북송 때에 부흥하여 12조인 의적(義寂)과 그의 동문 지인(志因)의 양계통에서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는데, 전자를 산가파(山家派), 후자를 산외파(山外派)라고 한다. 의적의 제자 의통(義通), 그 문하 지례(知禮)의 계통이 송대에 융성하여 천태종의 주류가 되었으며, 남송(南宋) 대에는 선월(善月)·지반(志盤) 등이 강학에 뛰어났고, 원대(元代)에는 불교 전반의 교학적인 쇠퇴와 함께 쇠하였지만, 명대(明代)에 다시 부흥하여 선(禪)과 정토(淨土)와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명 말기에는 지욱(智旭)이 교학을 진흥시켰다. 지의는 《법화경》의 정신을 근거로 전불교 경전에 의의를 부여하여 오시(五時:華嚴時·鹿苑時·方等時·般若時·法華涅槃時)의 교판, 화의사교(化儀四敎:頓敎·漸敎·密敎·不定敎) 및 화법사교(化法四敎:藏敎·通敎·別敎·圓敎)로 구분하였으며, 공(空)·가(假)·중(中)의 삼관(三觀)을 교의의 중심으로 하였다. 또한 일상심(日常心)의 일념 가운데 지옥으로부터 부처의 경지가 내재한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사상과 일체가 원융(圓融)한 실상(實相)을 주장하였다. 한국에서 천태종이 하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이르러서였지만, 그 교학이 전래된 것은 훨씬 이전이다. 신라의 현광(玄光)은 지의에게 법을 전한 혜사(慧思)에게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웠으며, 신라의 연광(緣光), 고구려의 파약(波若) 등은 직접 지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고려 제관(諦觀:960년 중국에 감)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는 천태학의 입문서로서 크게 성행하였다. 의천의 문하에 교웅(敎雄)·계응(戒膺)·혜소(慧素) 등이 유명하며, 그 후에도 덕소(德素)·요세(了世)·천인(天因) 등이 교세를 떨쳤다. 이와 같이 천태종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크게 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척불정책으로 쇠퇴하였다.
法華經
일승(一乘)불교 사상을 설한 경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불탑신앙을 하는집단에 의해 성립된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삼승(三乘)을 한데 모아 일승(一乘)의 큰 수레로 일체 중생을구제한다는 정신에서 여래는 큰 인연으로 세상에 나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데 근본목적이 있으며, 삼승은 단지 방편으로 설해졌을 뿐이고, 이러한 여래는 상주 불멸하여 이미 여래는 오래전에 성불하였으며 단지 방편으로 세상에 나와 성도의 모습을 보였을 뿐이며 여래의 수명은 무량하다고 하였다. 한역본으로는 3가지가 있는데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 27품,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28품, 사나굴다와 달마굽타가 공역한 《첨품법화경(添品法華經)》 7권 27품이 있다. 산스크리트 원본이 네팔·티베트 등에서 발견되어 편집정리된 것이 3가지 있으며 그 외 중앙아시아어역·영역·불역 등이 이루어져서 이 법화경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 교리와의 비교 등 실로 세계적인 범위에 미치고 있다.
華嚴宗
중국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 동진(東晉) 말 북인도 출생의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화엄경》을 한역한 이래 《화엄경》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특히 511년 인도의 논사(論師) 세친(世親)의 저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모두 완역한 것을 계기로 지론종(地論宗)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화엄종 성립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한편 《화엄경》을 사경(寫經)·독송(讀誦)하는 화엄 신앙과, 이 신앙에 근거하는 신앙 단체인 화엄재회(華嚴齋會)도 발생하여 화엄종 성립의 기반이 성숙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두순(杜順)은 종래의 화엄에 대한 교학적 연구보다 실천적·신앙적 입장을 선양하여 화엄종의 제1조가 되었다. 새로이 중국에 전해진 현장(玄)의 유식설(唯識說)을 채용하면서 종래의 지론종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이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이며, 이 지엄의 학문을 계승하여 화엄종 철학을 대성시킨 사람이 현수(賢首)이다. 그 후 징관(澄觀)·종밀(宗密)이 나와 화엄종을 계승하였으나, 선종의 발흥과 함께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자선(子璿)·정원(淨源) 등이 화엄의 맥을 이었으며, 그 후 많은 선사(禪師)들의 사상에도 화엄사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에서는 화엄사상을 신라의 원효(元曉)·의상(義湘) 등이 크게 선양하였는데, 원효의 《화엄경소》는 현수의 《탐현기(探玄記)》에 인용될 만큼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의상은 두순에게서 화엄 교학을 배운 적이 있고, 부석사(浮石寺)를 창건(676)하여 화엄의 종지(宗旨)를 널리 편 이래 해동화엄종을 개창(開創)한 사람으로 숭앙되고 있다. 그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요약한 것으로 화엄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의 심상(審祥:?∼740)은 당나라 도선(道璿)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화엄학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十刹)’이라 하여 화엄학 연구의 중요한 사찰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 화엄학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희랑(希朗)과,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관혜(觀惠)의 북악(北岳)·남악의 두 파로 갈라져 논쟁이 치열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균여(均如)는 이를 조화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고려 불교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화엄·선(禪)·천태(天台)를 융합하였다. 그 후 어느 종파에 속하더라도 화엄학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화엄종 교리의 중심은 전세계가 일즉일체(一卽一切)·일체즉일(一切則一)의 무한의 관계를 갖는 원융무애(圓融無)를 설하는 법계연기관(法界緣起觀)이다. 그 원융무애한 모습은 십현(十玄) 연기를 설하며, 그 이유로써 육상(六相:總·別·同·異·成·壤) 원융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요컨대, 화엄종은 일체의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에 서 있다.
華嚴經
불교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 원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한국 불교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 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한역본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권본(418∼420), 실차난타(實叉難陀)역의 80권본(695∼699), 반야(般若)역의 40권본(795∼798)이 있는데, 상기 2본 중 최후의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다. 티베트어역은 80권본과 유사한 완본이 있다. 본경은 <60화엄>이 34장, <80화엄>이 39장, 티베트어역이 45장이지만, 실은 처음부터 현재의 형태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유통되다가 후에 《화엄경》으로 만들어졌는데, 필경 중앙아시아에서 4세기경 집대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장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것은 십지품(十地品)으로, 그 연대는 1~2세기경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이다. 본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교주로 한다. 60권본은 7처(處)·8회(會)·34품(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제1·2품)와 제2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제3∼8품)는 지상, 제3도리천회(利天會:제9∼14품)·제4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제15∼18품)·제5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제19∼21품)·제6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제22∼32품)는 모두 천상이며,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회좌의 장소도 점차 상승하고 있다. 제7은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회(제33품), 제8도 지상의 서다림회(逝多林會, 즉 祇園精舍:제34품)이다. 제1회는 불타가 마가다국(國)의 깨달음을 완성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때 불타는 비로자나불과 일체가 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보살이 차례로 불타를 찬양하는 노래를 읊는다. 긴 찬양의 노래가 이어진 다음, 이 아름다운 세계가 불타의 신력(神力)으로 크게 진동하고, 향기롭고 보배로운 구름이 무수한 공양구(供養具)를 비오듯 뿌린다. 이러한 세계를 연화장 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라고 한다. 제2회에서 불타는 적멸도량에서 멀지 않은 보광법당의 사자좌(師子座)에 앉아 있다. 문수(文殊)보살이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를 설하며, 또한 10인의 보살이 각각 10종의 심원한 법을 설한다. 제3회부터는 설법의 장소를 천상으로 옮기고 여기서는 십주(十住: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생활방식,즉 初發心住·治地住·修行住·生貴住·具足方便住·正心住·不退轉住·童眞住·法王子住·灌頂住)의 법을 하며, 제4회에서는 십행(十行:보살이 행해야 할 열 가지 행위, 즉 歡喜行·饒益行·無恙恨行·無盡行·離癡亂行·善現行·無著行·尊重行·善法行·眞實行), 제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수행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보살의 열 가지 행위), 제6회에서는 십지(十地)를 설명하고 있는데, 십지는 보살의 수행단계를 10종으로 나누는 것으로 《화엄경》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즉 제1은 환희지(歡喜地)로서 깨달음의 눈이 뜨여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경지, 제2는 이구지(離垢地)로서 기본적인 도덕으로직심(直心)을 일으켜 나쁜 죄의 때를 떨쳐버리는 경지, 제3명지(明地)에서는 점차 지혜의 빛이 나타나, 제4염지(地)에서 그 지혜가 더욱 증대되고, 제5난승지(難勝地)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 평등한 마음을 가지며, 제6현전지(現前地)에서는 일체는 허망하여 오직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으며, 제7원행지(遠行地)에서는 열반에도 생사에도 자유로 출입하고, 제8부동지(不動地)에서는 지혜가 다시는 파괴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목적에 사로잡히지 않고, 제9선혜지(善慧地)에서는 불타의 비밀의 법장(法藏)에 들어가 불가사의한 대력(大力)을 획득하고, 제10법운지(法雲地)에서는 무수한 여래가 대법(大法)의 비를 뿌려도 이를 다 증득(證得)하며, 스스로 대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의 무명·번뇌의 불길을 꺼버린다. 따라서 십지 전체를 통하여 보살은 자신을 위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 제7회에서는 지금까지의 설법이 요약되어 설명되고 있으며, 제8회에는 선재(善財)라는 소년이 차례로 53명을 찾아가서 법을 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53명 중에는 보살만 아니고, 비구·비구니·소년·소녀·의사·뱃사공·신·선인·외도(外道)·바라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구도심에서는 계급도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사상적으로 《화엄경》은 현상세계는 상호 교섭·활동하여 무한한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사무애(事事無)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근거한다. 이 《화엄경》을 전거로 하여 후에 중국에서는 화엄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주석서로는 60권본에 대한 현수(賢首)의 《탐현기(探玄記)》, 80권본에 대한 징관(澄觀)의 《대소초(大疏)》가 가장 유명하다. 또한 《탐현기》의 선구로서 지엄(智儼)의 《수현기(搜玄記)》 《공목장(孔目章)》 등이 있다. 인도에서는 《십지경》에 대한 세친(世親)의 《십지경론》 등이 있다.
오교십종(五敎十宗)
중국 화엄종(華嚴宗)에서의 교리학 분류방법의 하나로, 불교의 모든 교설을 분류·비판한 교판(敎判). 5교는 화엄종을 창시한 당나라의 두순(杜順)의 교판을 법장(法藏)이 발전·체계화한 것으로, ① 소승교(小乘敎):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설하는 《아함경(阿含經)》의 가르침, ② 대승시교(大乘始敎):공(空)을 설하는 《반야경(般若經)》과 유식(唯識)을 설하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의 가르침, ③ 대승종교(大乘終敎):진여(眞如)·여래장(如來藏)을 설하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가르침, ④ 돈교(頓敎):곧바로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하는 《유마경(維摩經)》 등의 가르침, ⑤ 원교(圓敎):일승(一乘)을 설하는 《화엄경(華嚴經)》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들 5교를 그 이론적 측면에서 분류한 내용을 가리켜 10종이라고 한다. 10종은, ①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아(我) 및 만유의 실유(實有)를 주장하는 파, 즉 불교에서도 가장 낮은 가르침으로 부파(部派)불교의 독자부(犢子部) 등을 가리킨다. ②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아는 실재하지 않지만, 만유의 실유자는 아유법공(我有法空)을 주장하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敎學), ③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설일체유부의 만유 삼세실유(三世實有)의 주장에 대해 아는 실재하지 않으며, 만유도 현재에만 존재하고 과거·미래에는 공이라고 주장(現在實有 過未無體)하는 부파불교 대중부(大衆部) 등의 교학, ④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만유는 현재에 있어서 실유인 것도 있고, 가유인 것도 있다고 하는 부파불교 설가부(說假部)·성신론(成實論) 등의 주장, ⑤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세속의 제법은 허망하며, 출세간(出世間)의 법, 즉 불교의 근본 진리만이 참되다는 부파불교 설출세부(說出世部)의 주장, ⑥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세속·출세 속의 법은 근본적으로 가명이며, 실체가 없다는 부파불교 일설부(一說部)의 주장, ⑦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초기 대승불교 《반야경》 등의 가르침으로, 5교(五敎) 중 공시교(空始敎)에 해당한다. ⑧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진여의 본성은 공이 아니라고 설도 대승종교에 해당한다. ⑨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객관의 대상[相]도 주관의 인식(想)도 함께 진여의 현현으로 언설을 끊어, 불가설(不可說)·불가사의하다고 설하는 《유마경》 등의 대승 돈교에 해당한다. ⑩ 원명구덕종(圓明俱德宗):사사무애(事事無)·법계연기(法界緣起)·중중무진(重重無盡)의 도리를 말하는 화엄의 대승 원교에 해당한다. 이 10종과 5교와의 관계는 ①∼⑥까지가 소승교, ⑦이 대승시교, ⑧이 대승종교, ⑨가 돈교, ⑩이 원교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일체의 사물은 서로 방해함이 없이 중중무진(重重無盡)하며,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음을 설하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中國佛敎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전한(前漢) 애제(哀帝) 원수(元壽) 1년(BC 2)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다른 설도 많다. 그러나 1세기에는 불교가 전래해 있었음이 확실하다. 초기에는 도교와 함께 신봉되었는데, 사상적으로도 불교의 공(空)사상을 노장(老莊)의 무(無)에 대비해 해석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장사상과의 결합은 후에까지도 중국 불교를 형성하는 강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불교가 전개되어 온 과정을 시대적으로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400년까지는 경전의 번역과 중국사상에 바탕을 둔 이해의 시기로 격의(格義) 불교시대라고 한다. 다음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의 한역을 계기로 하는 불교 본래의 사상연구의 시기이고, 그 다음은 수·당 시대에 들어와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와 실천에 있어 불교 본래의 모습을 실현한 시기이다. 이때 삼론(三論)·천태(天台)·화엄(華嚴)·법상(法相)·밀교(密敎)·율(律)·선(禪)·정토(淨土) 등의 종파가 확립되었다. 끝으로 당(唐)나라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는 《대장경(大藏經)》이 출판되는 등 일상생활에 불교적 사유(思惟)가 침투되어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