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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복(景福),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로부터 첫 번째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개국 3년 만인 1395년 완공된 궁궐은 390여 칸으로 한양의 중심축에 자리했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등 뒤로는 주산(主山)인 북악산을 두었고 궁의 정면인 광화문 밖으로는 육조 거리를 두어 시가지를 만들었다. 그 앞쪽에는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었고,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흘렀다. 새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법궁(法宮)이 자리하기에 더없는 명당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의 길한 기운 덕일까 새 왕조는 영욕의 시간 가운데 무려 600년이나 이어졌다. 다만 경복궁의 역사는 그러하지 못했다.
광화문광장 세종이야기 • 충무공이야기 세종문화회관에서 운영하는 생생한 역사 문화 공간 세종 • 충무공이야기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과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화문 광장 지하에 조성된 전시관이다. 세종이야기는 2009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개관하였고, 충무공이야기는 2010년 4월 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을 맞아 개관하여 현재까지 약 230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한 서울 관광 명소이다.
덕수궁 덕수궁 돌담길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조선조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이 덕수궁에서 일어났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 이른다. 덕수궁은 원래 그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 선조25)이 일어났다.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했고 한성의 궁궐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선조가 돌아와 머물 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궁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는 1593년 행궁에서 승하했다. 덕수궁 대한문 : 왕궁수문장 교대 및 수위의식 매일 오전11시, 오후2, 오후3시30분(일3회)
창덕궁 창덕궁은 서울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먼저 종묘가 선정됐고 이어 창덕궁이 등재됐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이자 세계가 함께 보존하고 지켜가는 문화재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은 진정성과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전제로 한 10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 이상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창덕궁은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어진 궁궐로 전체 면적의 2/3가 북악산의 응봉산 자락에 있다. 산세를 적절히 활용한 궁궐인 셈이다. 창덕궁 후원의 가치가 각별한 이유도 이같은 자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건축과 조경의 특징이다.
운현궁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를 지나면 대로에 긴 한옥 담이 보인다. 담 너머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인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조선 말 정치의 흥망성쇠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경복궁의 중건, 서원 철폐, 세도정치 개혁 등이 이루어졌으며 대원군의 섭정 10여 년 동안 사실상 조정(朝廷)과 같은 역할을 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곳으로서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 말기의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조계사 공간소개100여 년 역사의 도심 속 사찰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있는 조계사는 한국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이자 한국 근대 불교운동의 중심지다. 일주문을 지나면 도심 속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조계사 경내 풍경이 펼쳐진다. 1910년 창건한 각황사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사찰. 그 대웅전 앞마당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사리탑이 먼저 보인다. 탑에 모셔진 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 스님이 당시 불교계에 기증한 것으로 남방 불교 국가를 통해 한국에 직접 전해진 최초의 진신사리로 알려져 있다. 사찰 옆에는 불교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인사동 쌈지길 ‘쌈지길’은 인사동에 있는 공예전문쇼핑몰이다. 1층부터 4층까지 길로 연결된 이색적인 건축물 속에 공예품점, 갤러리, 찻집, 음식점 등 70여 개 점포가 입점해 있다. ‘쌈지길 체험공방’은 직접 공예품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다. 컵이나 접시 등에 그림을 그리는 도자공예, 자개가루를 붙여 반지나 휴대폰고리 등을 만드는 자개공예, 한지보석함이나 한지조명등을 만드는 한지공예를 체험할 수 있다.
종묘 조선 왕조의 정신이 깃든 곳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종묘를 지은 것이었다. 또 임금이 새로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에 나아가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다. 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왜병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을 때도 선조는 위험을 무릅쓰고 위패를 모셔 오도록 했다. 이처럼 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종묘는 조선의 역사에 더없이 중요한 장소였다.
봉은사 도심 속 천년고찰 삼성역 맞은편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어 누구나 한번쯤 눈길을 건넨다. 바로 봉은사다. 빌딩 숲 속에 위엄 있는 자태를 자랑하는 절로 서울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다. 그 역사만도 1000년이 넘는다. 봉은사는 794년(원성왕 10)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성종의 무덤인 선릉을 조성하며 사찰을 중창했고 그 때부터 봉은사라 불렀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봉은사에서 치른 승과에 급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병자호란과 한국전쟁 때 전각들이 파괴됐고 후에 다시 복원했다.
몽촌토성 올림픽공원에 자리한 백제의 토성 몽촌토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올림픽공원을 지난다. 평화의 광장을 지나고 평화의 문을 지나고 국기광장을 지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물길을 사이에 두고 몽촌토성 일대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의 대표 토성이다. 전체 둘레는 약 2.7킬로미터에 이르며 남북 730미터, 동서 540미터 규모의 마름모 형태다. 북동쪽으로는 약 170미터의 외성이 일자 형태로 자리한다. 정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했고 그 아래로는 성내천이 흘러 자연스레 방어선 구실을 한다. 반면 동쪽으로는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해자를 설치했다. 성벽 바깥쪽으로는 역시 목책을 둘렀다. 목책은 1.8미터 단위로 설치했는데 그 높이가 2미터에 달한다.
서대문형무소 자주 주권에 대한 열망 독립문은 1897년 독립협회가 국민 모금을 통해 세운 높이 14.28m, 너비 11.48m의 석조문이다. 원래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사대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이 있었으나, 이를 허물고 독립의 의지를 되새겼다. 그 모양새는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듯하고 세련미는 적지만 자주 주권에 대한 열망만은 가득하다. 한글과 한자로 새긴 독립문(獨立門)이라는 현판 글씨와 좌우의 태극기는 이를 강조하는 듯하다. 문 앞에는 사적 제33호인 영은문 주초 두 개가 서 있다. 1992년 8월 15일에 주변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관, 순국선열 추념탑 등을 아울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북촌한옥마을 600년 수도의 스펙트럼 속으로 서울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역사문화의 현장은 단연 북촌한옥마을이다. 600년 수도의 역사를 자랑하듯 전통 한옥들이 즐비한 동네다. 북촌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오는 지명이다. 당시 서울의 중심에는 청계천이 흘렀는데 이를 기준으로 북쪽을 북촌이라 했고 남쪽을 남촌이라 했다. 북촌에는 당대의 권세가들이 살았다. 근처의 궁궐을 보면 이해할 수 있듯 왕가를 중심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대부들이 살았다. 남촌은 남산 아랫자락에 해당하는 남산한옥마을 주변이었다. 하급 관리나 벼슬을 멀리한 선비들이 많았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남촌에는 술이 맛있고 북촌에는 떡이 맛있다’라는 뜻이다. 두 지역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지금 북촌한옥마을은 보통 경복궁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백악산과 응봉산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이다. 가회동이나 삼청동 정도가 귀에 익지만 원서동과 계동, 재동, 안국동, 소격동, 사간동, 송현동, 화동 등 그 지명도 낯선 11개의 동이 자리한 마을이 바로 북촌한옥마을이다.
남산 산의 높이는 262m이며 한양이 조선의 도읍(都邑)으로 정해지면서 도성(都城)의 남쪽에 위치하는 산이라 남산이라고 불렀다.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또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불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재위 4년인 1395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을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 매년 나라에서 재사를 올리게 되자 목멱신사를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불렀다. 남산은 북악산(北岳山)·낙산(駱山)·인왕산(仁王山)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여러 산과 더불어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어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여졌었고, 도성을 에워싸는 방벽은 태조 재위 5년인 1395년에 축성되어 이후로 여러차례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었고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1909년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연 것이 국립박물관의 시초이다. 1915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후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하여 국립박물관을 개관하였다.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정식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지금까지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986년 구 중앙청 건물을 개수하여 중앙박물관을 이전 및 개관하였다. 이후 2005년 용산 미군 헬기장 철수로 신축 이전 개관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이슬람 서울 중앙성원은 1976년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이다. 한국 정부에서 토지를 기부하고 이슬람교 국가들이 건축 및 운영 경비를 지원해 세워졌다. 한강과 남산의 중간지점에 자리한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은 1층에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사무실과 회의실, 2층에 남자 예배실, 3층에 여자 예배실이 설치되어 있다. 부속건물에는 무슬림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마드라사(이슬람교의 신학교)와 이슬람 문화 연구소 및 학생회 등 산하단체의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
석촌동 백제고분군 석촌동 고분은 백제가 한성(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후 공주로 도읍을 옮기는 475년까지 계속되는 백제 초기의 고분입니다. 여러개의 돌을 사방 계단모양으로 쌓아올린 모습을 하고 있는 이같은 무덤을 돌무지무덤이라고 합니다. 이런 무덤형태는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것은 백제를 세운 온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것을 알려줍니다. 석촌동일대에 있는 고분은 그 생김이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습니다. 바닥에 진흙을 다지고 자갈돌을 깐 다음, 그 위에 큰 판석이나 자른 돌을 한 겹 깐 뒤에 작은 돌들을 겹겹이 쌓아서 계단 모양을 만든 것입니다. 바로 이 형식이 고구려 무덤의 형식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 백제의 숨결이 깃든 고분 방이동 백제고분군은 서울특별시 방이동 일대에 있는 백제 전기의 무덤이다. 분구의 형태는 모두 원형이며 내부 구조는 수혈식 석곽과 횡혈식 석실의 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은 서기 475년 백제 중기의 도읍지인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축조된 백제 전기의 고분군으로 보고 있다. 제2호분과 제3호분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분이나 분구 정상부에 노출된 천장부 뚜껑 돌에 의하여 제1호분과 동일한 구조의 석실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횡혈식 석실분인 제1호분이 백제 중기의 도읍지였던 공주의 송산리 제5호분과 그 구조 형식이 흡사하여 방이동 백제고분군의 구조 형식이 공주 고분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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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들의 쌈터.... 조계사와 봉은사 가 보고 싶습니다.
네 쌤
한동욱신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