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강자에게 던지는 화두(話頭)
제 강의는 4단계인데
제1단계는 정의를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다. 입니다.
이어서
① 한글(韓契) ② 한류(韓流) ③ 이론(理論) ④ 지식인(知識人)과 지성인(知性人)
⑤ 섭씨(攝氏) ⑥ 시간(時閒) 등의 정의(定義)부터 시작한다.
문 : 한글의 정의는?
답 : 훈민정음 아닙니까? (대부분 별 것을 다 물어본다는 식의 반응이다.)
문 : 그러면 훈민정음의 정의는?
답 : 세종대왕이 만든 글 아닙니까?
문 : 세종은 훈민정음을 글로 만들었습니까?
답 : 그렇지 않으면요?
문 : 훈민정음이 언제부터 공식문자로 쓰였습니까?
답 : ??? (대한민국 정부)
문 : 한글이 무엇의 약자인가요?
답 : (한겨레글 또는 한민족의 글 약자라고 답하는 사람이 없다.)
문 : 한글의 종류는?
답 : ???
한글의 종류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① 훈민정음 사용 전 한글인 “옛한글 진서(眞書)”
②“근대 한글 훈민정음”이 그것이다.
둘 모두 한민족 또는 동이(東夷)가 만든 우리글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가 ①은 우리글이 아니라 중국 글(漢文)이라 우긴다.
왜 옛한글(眞書) 개념이 없는가?
① 일제(日帝) 고도(高度)의 간계(奸計)
조선인이 우리 사서(史書)와 경서(經書)와 족보를 기록한
옛한글을 알면 안 되는 왜(倭)의 고도의 계략에 기인한다.
▲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 속에 칼을 품음)
일제의 순치(馴致) 또는 사주(使嗾) 요지
-진서(眞書)는 한겨레글이 아니라 중국 문자(漢字)다.
-조선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까지는 글도 없었다.
(곧, 중국 글을 빌려 쓰는 미개국이었다.)
-훈민정음이 최초의 조선 글이다.
-세종은 역대 왕 중 가장 위대한 대왕(大王)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 늦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이제부터라도 한글을 전용해야 한다.
(그것도 다음 세대부터는 근대한글도 가르치지 않고
일본글만 가르치려 했음이 문서로 밝혀졌지만.)
②『한글 = 훈민정음』이라는 고정관념의 덫
많은 선비가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에 항거하는 것 같았으나 결과적으로
근대한글만을 조선 글이라 사주한 왜(倭)의 노선을 추종(追從)하였다.
대부분 세종숭배사상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일제의 간계에 말려들었으나
소수는 알고도 일제의 (근대)한글전용 앞잡이노릇을 하였다.
작금(昨今)의 현실
100여 년을 일제의 우민정책대로
광개토대왕비문, 팔만대장경, 삼국사기, 훈민정음 해례,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등을 기록한 옛한글을 중국 글(漢字)이라 순치(馴致)하였다.
그 결과 지금은 영어나 한자나 외국어이기는 마찬가지 아니냐는
얼빠진 반문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
훈민정음만 한글이고 옛한글은 중국 글이라면?
기인반수기(欺人反受欺 : 남 잡이가 제 잡이)
우리 한민족은 훈민정음을 공식문자로 사용한 대한민국 때(서기 1948)까지,
자체 기록문자도 없는 미개국이었다는 일제의 농간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주시경(周時經), 정인승(鄭寅承), 최현배(崔鉉培)를 위시한
많은 한글학자가 친일매국노로 분류되어도 유구불언인 것이다.
첫댓글 한중 학자가 만나는 자리에서,
중국의 학자가, 한자는 당신의 조상이 만든거라고 하니, 우리나라 국문학자는 무슨 뜬금 없는 말이냐는 듯 멍하니 쳐다보았답니다 ....
'중국의 학자가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고 말하더라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침략 즉시 우리의 고대역사서와 문학서 등, 고대문서 5만여권을 경복궁과 남한산성에서 2박 3일 불살라 우리의 고대 역사를 말살했다는 주장이 사실인 듯 싶습니다.
35년 식민통치에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는 거의 파 묻힌 것 같은데, 현대의 사학자들을 그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없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려 하질 않습니다.
<맞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안호상)이라는 자가 임어당 석학한테 당한 망신사례가 그것입니다.
우리 사서와 경전을 사문난적이라 하여 가장 많이 태우고 멸문지화시킨 장본인이 정도전과 세종이었습니다.
(삼국사기도 고려중심이었으면 태워 없앴을 거라는 것 아닙니까?)
일제도 많은 책을 태웠지만 30만여 권과 많은 문화재급을 가져간 것도 사실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회군하여 조선의 임금이 되면서, 가죽에 기록해 놓은 고대역사(중국대륙의 한민족사)를 말살했다는 설도 있는데, 태조가 아니고, 세종도 그런 일을 했나봅니다 ?
안으로 밖으로 ..... 우리의 역사는 말살되었네요 ....
<집현전이 초기에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국정원보다 더 악랄했습니다>
당시는 집현전 학사에 사문난적으로 찍히면 죽음은 물론 패가망신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사문난적은 박정희 시대의 빨갱이/간첩이나, 오늘날 종북/좌빨보다 더 혹독했다고 합니다.
하하하하! 우리 쎄레 정유영 교장 선생님이 한 번 마음을 열고 이 글을 다시 한 번 보시면 좋겠네요!
아직도 훈민정음만 한글이라고 우기는 분이 많습니다, 이걸 어쩌지요? 하하하하!
"“옛한글 진서(眞書)” 와 "근대한글 훈민정음"이라는 사실을 어느 분들이 선생님처럼 알고 계시나요?
어릴적 어른들에게서 한문을 眞書라고 하는걸 들은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도 선생님의 이론들이 아주 생소하지만 수긍이 가기에 바로 잡아야 된다는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한글 = 훈민정음』이라는 고정관념의 덫이 일본의 간계였음도 수긍 합니다.
그런데 아주 비뚤어져 버린 현실을 어떻게 바로 잡아 나가야 할까요.
죽어서나 다시 태어나 영향력있는 정책자가 되어서야 가능할까요.
선생님의 블로그명이 21세기 문맹퇴치라 하심이 이해 됩니다.
많이 깨닫고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물안개구리냐, 우물을 벗어나 지평선과 우주를 보는 시야를 확보했느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제가 고교를 교대 전신인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국민학교 => 초등학교 또는 중고교 우물에서 "평생 교육에 헌신했다"는 친구들이 훨씬 고지식합니다.
정말 깨기 어려운 호도(hard nut)가 많습니다.
저는 국민학교라는 우물이 싫다고 진학하여 몇 개 과정을 전공하며 돌이켜 보니
조선의 사범학교는 내선일체, 조선인을 국민화(일본 왕 신민화)하는 일선의 앞잡이-소대장을 양성하기 위해서
세운 학교였더라고요.
<정중관천(井中觀天). 정와불가이어어해(井蛙不可以語於海)>
장자(莊子) 추수(秋水) 제17편의 정와부지해 하충부지빙(井蛙不知海 夏蟲不知氷)에서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세종이 문맹백성에 공문 발송이 안 되어 겪는 상의하달 문제해결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듯이
일제는 조선인 문맹을 퇴치하고 국민(황국신민)으로 길들이기 위해 일선 선봉장을 양성한 곳이
사범학교였다는 생각에 이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미래지향적-창의적-긍정적-적극적-개방적-민주적-국제적으로 접근하는
발전론자-미래학파-수도자의 외롭고 험난한 길을 걷고자 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많은 가르침을 펼치셔서 어두운 백성들을 깨우쳐 주시 옵소서!
<정기본 만사리(正其本 萬事理),실지호리 차이천리(失之毫釐 差以千里)>
근본이 바로서면 만사가 순리대로 이루어지고 털끝만한 차이가 천리나 빗나간다.
전한(前漢), 동방삭전(東方朔傳)의 이 말도 오리무중의 앞길을 밝게 비추어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용어정의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글이 있어 존재하는 학문은 용어정의부터 시작한다.
가장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데서부터 시작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선생님의 살아 오신 과정을 이해 할 듯 합니다.
교육현장에 있는분들이 선생님의 글을 읽고 먼저 깨달아야 할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맥상통>
-우물 안을 빠져나오라와 마음을 비워라.
-급행무선보(急行無善步)와 욕속부달(欲速不達)
-돌아가는 길이 빠른 길이다와 바늘 허리 매어 못 쓴다.
-천리행시어족하(千里行始於足下)와 만장고루평지기(萬丈高樓平地起)
..노자(老子)의 천리 길도 첫발부터 시작한다와 상서(尙書)의 마천루(摩天樓)도 일층부터 시작한다.등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사명과 재능을 받고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처한 환경에서 순리와 원칙에 따르는 삶이 가장 하늘 뜻에 가까운 삶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순리대로 살면 두 다리 쭉 뻗고 잠 잘 수 있지요! 하하하하!
모두 유유상종입니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