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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많으십니다.
남강문학2호 수록용 평론 1편과 사진 그리고 약력을 송고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河東의 地誌學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
Ⅰ.문학과 공간배경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六何원칙에 충실하려는 것이 산문문학이라면 시문학은 이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속성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시가 되었건 소설이 되었건 작품의 배경이 되어있는 공간배경만은 특수한 의미를 띈다. 공간배경의 선택, 공간배경의 설정이 그래서 중요하다.
대체적으로 문학작품에서 공간배경이 설정되는 경우는 대충 6가지이다. 뛰어난 자연경관이나 풍물, 역사적 명소나 역사적 현장, 자전적 체험의 삶의 공간, 작품 형상화를 위해 설정해 본 경험적 현실공간, 역시 작품 형상화를 위해 상상적으로 끌어온 실제의 공간, 상상이나 공상의 초현실적 공간 등이다.
그런데 한 작품이 나오기 전에도 전국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곳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독자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준다. 채만식의 장편『탁류』의 군산, 최명희의 장편『혼불』의 남원, 박경리의 장편『김약국의 딸들』의 통영, 박목월 시의 경주등을 들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직 덜 알려져 있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라면 그 작품으로 말미암아 그곳은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해 지리적 개념의 정보를 널리 알리는 경우가 된다. 김원일의 장편『노을』속의 경남 진영, 한승원 소설속의 장흥 앞바다인 득량만, 조정래의 장편『태백산맥』속의 전남 벌교, 이문구의 연작소설『관촌수필』속의 충남 관촌(冠村)마을, 서정인의 연작소설『달궁』속의 지리산 뱀사골쪽의 달궁마을, 이효석의 단편「메밀꽃 필 무렵」속의 강원도 평창의 봉평장, 김유정의 단편「동백꽃」의 강원도 춘천 근방의 실레마을, 김소월의「진달래」속의 영변 약산, 서정주의 장시『질마재 신화』속의 전남 고창의 질마재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문학작품 속의 공간은 그 작품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비례적으로 명소가 되어 관광객이 찾아오거나 몰려든다.
그런 예를 외국의 경우에서 찾아보면 더욱 흥미가 있다. 19세기 불란서 시인 아포리네르는 「미라보다리」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이 시가 인구에 회자되자 파리 세느강의 수많은 다리중에서 볼품없는 이 다리가 한 순간에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또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근년에 소설과 영화로 인기를 누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에는 실제로 7개의 다리가 있는데 두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의 무대역할을 한 로스맨(Roseman)다리가 명소가 되었다.
여기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 왕년에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 리가 쓴『뿌리』란 작품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출판으로서는 물론, 미국 TV에서 미니시리즈로도 소개되자 한순간 아프리카 감비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 있는 감비아강의 오지에 있는 작은 마을 주푸레가 일약 문명국인들에게 명소가 되었다. 노예사냥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팔려온 작가의 제1대 선조가 바로 쿤타킨테인데 이 쿤타킨테가 태어난 마을이 바로 주푸레다.
Ⅱ.문학작품 속의 하동
그러면 이제부터는 문학에 있어서 공간배경의 이러한 의미성과 그 중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과연 ‘하동’이란 곳은 누구의 어느 작품에서 어떻게 나오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되 시문학과 산문문학으로 나누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1)시문학에 나타난 하동
지리산 반야봉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50리의 화개골은 신라 이래로 지리산 남쪽에 자리잡은 불교 중심지였다. 무려 60여 개의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걸 보면 화개계곡 이야말로 온통 절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청학동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요 자연경관이 빼어나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거쳐가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은일했기에 수많은 시작품의 소재가 되고 배경이 되어왔다.
그 대표적인 작품을 일부 소개해 보면 그 첫 자리에 오는 것이 신라의 고운(孤雲) 최치원의 시이다. 그는 속세를 등지고 이 화개골로 들어와 속세의 온갖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앞으로 여기서 계속 소개될 모든 한문시는 편의상 우리말로 옮겨 소개하기로 하겠다. 그에겐「花開洞詩」가 있는데 ‘동국 화개동은/ 이땅에서 딴 세상이구나/ 신선이 옥베개를 베니/ 문득 천년이 흘렀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원래 16수였는데 8수만이 이수광의『지봉유설』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문신인 백운거사 이규보는「花開 孺茶詩」를 남겼는데, 관가의 차세(茶稅) 현물공납에 시달리고 있는 화개골 사람들을 생각해 보며 ‘차의 공납을 금지만 한다면/ 남녁 산골 착한 백성들/ 편히 쉬며 살 수 있으리’라고 끝맺고 있다. 화개골의 특산품인 차가 소재가 되고 동시에 그들의 삶을 동정하고 있다.
유방선(柳方善)은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기의 학자인데 그에겐「花開靑鶴洞」이란 시가 있다. 청학동을 직접 둘러보고 지은 시인데 ‘나도 여기 집을 짖고 숨어 살면서/ 해마다 요초 캐며 삶을 끝내고 싶구나’라고 읊고 있다.
조선조로 와 보면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한 성리학자 정여창(鄭汝昌)이 젊어서 지금의 화개면 덕은리에서 살았는데 ‘바람이 솔솔 갯버들을 부드러히 흔들고/ 4월 화개골엔 보리도 누렇구나’라고 읊고 있는「花開洞雲」이란 시를 남겼다.
남명 조식(曺植)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서부 경남의 학자로 남명과 종유하고 또 남명의「遊頭流錄」의 기행길에 동참했던 이정(李禎)은 ‘섬진강 나루터에 늦게 조수가 돌아드니/ 많은 남정네 긴배 이끌고 천천히 오는구나/ 피리소리 길게 울리니 산과 물이 푸르고/ 강건너 구름 서린 숲이 봉래산이로구나’란 시를 남겼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화개골과 매우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이곳의 여러 절과 암자에서 수도하고 참선을 했다. 그래서 이곳과 관련된 여러 편의 시를 남겨 놓았다.
그 중에서 그의 출가 입산 시(詩)라고 알려진「花開洞詩」를 보면 ‘꽃이 지는데 청학 둥지에/ 학은 돌아오지 않구나/ 잘 있거라 홍류교 아래로 흐르는 물이여/ 너는 바다로 가고 나는 산으로 들어가네’라고 읊고 있다.
인조와 효종조의 학자로서 하동 옥종면 안계리에 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하홍도(河弘度는 ‘신선이 사는 곳에 봄이 온 것 같아/ 그윽한 흥취는 다함이 없네/ 잔을 잡고 서로 읊조리니/ 하늘 가운데 또 달이 떴구나’라고 노래했다.
현대로 와서 많은 사람들이 화개골을 노래했지만 꼭 한 사람만 소개해 보면「지리산」이란 시조를 쓴 노산 이은상이 있다. ‘지리산 천왕봉을 언제 오를꼬/ 청학동 접어들어 길을 헤맬제/ 칠불암 목탁소리 다정도 하다/ 山茶에 목축이라 부르는구나’라고 읊고 있다.
그리고 하동 출신으로 일찍 작고한 아동문학가 남대우(南大祐)는 섬진강 뱃노래, 섬진강, 하동포구 등 하동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많이 소실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2)산문문학에 나타난 하동
고려의 문신 이인로(李仁老)의 산문집「破閑集」에 기행문 ‘청학동기’가 들어있다. 그는 어지러운 속세가 싫어 은거할 곳을 찾아보려고 구전되어 오던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가 헛걸음만 치고 돌아온 자초지종을 적어놓고 있다. 자기가 듣고 아는바 대로 찾아가는 길의 지세(地勢), 청학동의 지형(地形), 옛날 속세를 피해 살던 사람들의 흔적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끝내 그런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에 이르러 신응사에 유숙했는데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데가 없어「花開洞神凝寺」란 시를 지어 바위에 새겨두고 왔다 하면서 그 시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조로 와 보면 남명 조식(曺植)에게 물론 한문으로 된 기행수필「遊頭流錄」이 있다. 그전에도 그는 지리산을 여러 번 오른 적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하동쪽 지리산을 밟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인데 1558년(명종13년), 57세 때다. 삼가에 살 때이고 덕산의 산천재로 집을 옮기기 3년 전이다. 여행기간은 음력 4월10일부터 25일까지이니 16일간 이었다. 그 당시 내노라하는 서부 경남의 학자들과 제자들과 어울렸는데 하인과 기생까지 합쳐 일행이 무려 40여명이 되었다.
등정과정을 보면 삼가의 뇌룡사에서 출발하여 뇌룡사로 되돌아오기까지 무려 스무 단계 이상을 거치는데 실제의 고유지명이 나온다. 사천에서 배를 타고 남해를 거쳐 섬진강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하동땅을 밟는다. 악양→ 현재의 화개면 덕은리의 도탄→ 쌍계사 동문→ 불일암→ 청학동→ 지장암→ 쌍계사→ 신응사→ 현재의 횡천 횡포역→ 현재의 옥종면에 있었던 정수역 등을 거친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여행 중에 일어난 일, 자연에 대한 완상, 인생론적 여러 생각, 해당 지역과 특별한 연고가 있는 갑자사화의 희생자인 정여창이나 조지서(趙之瑞)등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느낌 등을 적어놓고 있다. 특히 조지서는 남명 조모의 친정동생으로서 진외가 할아버지뻘이었으니 그 감회가 더욱 남달랐으리라 본다.
그리고 자연경관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가다가 산문표현이 궁색할 때에는 간혹 시로 대신했다. 웅장한 불일폭포를 보고 지은 오언절구「詠靑鶴洞瀑布」와 칠언절구「靑鶴洞」이 그런 예다.
알다시피 예부터 신선사상가들에 의해 지리산 어느 곳에 푸른 학이 살고 있는 청학동이 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는데 일단 남명은 그 당시 그가 본 불일암 일대를 청학동이라 생각했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로 희생된 탁영 김일손, 서산대사, 허목도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진주에서 서쪽으로 약 1백 50리 거리에 청학동이 있다고 했기에 그 위치에 대한 이론(異論)도 있다. 악양면 매계골을 청학동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팔역지』라는 지리서에 나온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청암면 묵계리 학동을 청학동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최치원이 은둔해 살았다는 곳으로 알려졌는데 이곳은 유뷸선 합일 경정유교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한국전쟁 이후 구전의 청학동이라 생각하고 찾아들어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청학동이 되어 있다.
참고로 ‘두류산 양당수를 녜듯고 이제 보니’로 시작되는 남명의 국문시가「頭流山歌」는 하동지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작품은「遊頭流錄」보다 뒤에 지은 것으로 남명이 삼가에서 덕산골로 이사를 와서 지은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현재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양당’(兩堂 ․兩塘)혹은 ‘양뎅이’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그 강가에 산천재를 지어 제자를 가르칠 때 지은 것이라 한다.
현대소설에서 하동의 어느 지명이 본격적으로 공간배경이 된 것은 김동리의 단편「驛馬」에서다. 화개장터가 바로 그곳인데 이 작품은 1948년에 발표되었다.
알다시피 김동리는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와 화개장터와의 인연이라면 아마 젊은 날의 삶의 과정에서 비롯되었지 않나 싶다.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그의 단편「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었다. 그 상금을 여비 삼아 다솔사와 해인사등을 전전한 적이 있다. 그 다음, 한때 상경하여 잠시 서울에 머물다 다시 곧 다솔사로 들어가 작품을 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야학을 설립하여 나중에는 광명학원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십중팔구 그에겐 쌍계사는 물론 화개장터를 구경해 볼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역마」를 구상할 때 꽤 이름난 5일장이기에 쉽게 그 공간을 배경으로 차용할 수 있었다 하겠다. 작품의 도입부에 나와 있는 화개장터의 지리적 설명과 묘사야말로 도저히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세밀하고 생생한데 그 점이 바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스토리로는 이런 배경에다 비교적 젊은 36살의 주모(酒母) 옥화(玉花)가 나온다. 그는 얼마 전에 친어머니가 죽었고 돌아올 길 막연한 떠돌이 중인 남편을 기다리며 아들과 같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예순도 훨씬 더 넘은 늙은 체장수가 장사길에 열 대엿 살 되어 뵈는 계연이란 딸 하나를 데리고 주막으로 찾아든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체장수 노인이 바로 서른 여섯 해 전에 남사당패의 소리꾼으로 이곳에 들렸다가 하룻밤 옥화 어머니와 놀다간 사람임이 밝혀진다. 친아버지를 만난 셈이다.
한편 옥화는 구름 같이 떠돌아다니는 중과 인연을 맺어 아들 성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고 보면 옥화와 계연은 배 다른 형제간이 되고 성기에겐 계연이가 배 다른 이모가 되는 것이다.
이런 핏줄의 인연을 전혀 알 수 없는 성기와 계연의 사이엔 잠시 한집에 지내는 동안에 사랑이 싹튼다. 그러나 헤어져야만 하는 애달픈 이별의 날이 오고 드디어 성기는 사랑병에 걸려 자리에 눕는다. 이를 눈치챈 옥화는 하는 수 없이 아들에게 인륜의 비밀을 밝힌다.
모든 것을 운명이라 체념한 성기는 역마살의 운명을 풀기라도 하듯 역목판을 짊어지고 장사길로 나선다는 것이 마지막 부분이다.
그러고 보면 옥화의 어머니인 성기의 외할머니가 젊은 소리꾼이었던 체장수를 만난 것도 화개장터요 또 옥화가 떠돌이 중을 만난 것도 이곳이며 더 나아가 운명적으로 성기가 배다른 이모를 만난 것도 이곳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만남과 이별의 운명적 공간이요 ‘역마살’이 낀 인간들이 잠시 거쳐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어머니 옥화와 외할머니가 성기의 역마살을 풀어보려고 일부러 쌍계사에서 중질을 시켜보고 또 화개장날에 책전을 펴는 장사도 시켜보지만 결국 운명은 거역할 수 없어 고향인 화개장터를 떠나 떠돌이 엿장수로 나서는 것이 바로 성기의 모습이다.
『智異山』은 7권으로 되어있는 이병주의 대하 장편소설이다. 비록 하동지역이 주무대나 구체적 배경으로 나오진 않지만 부분적으로나마 하동의 실제 지명이 나오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면 시대적 배경에는 1938년부터 1956년까지 근 한 세대가 걸쳐져 있으며, 일제 말기, 8․15해방, 분단, 6.25동란, 휴전협정이란 민족사의 수난기가 나오고 있다. 일제하의 저항활동, 좌우익으로 갈라선 민족적 삶의 좌절과 이념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특히 좌익에 가담해 지하운동을 하거나 입산해 유격대 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요 등장인물로는 이규, 박태영, 하영근, 하준규 등 네 명이다. 이규는 몰락한 지주집안 출신으로서 박태영과 절친한 사이로서 지리산에 들어갔던 인물이면서도 시대적 추세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데 해방 후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박태영은 이규의 중학 동창생인데 도쿄 유학생으로서 좌익 서적을 탐독하고 후에 좌경해서 남로당원이 되고 또 빨치산이 되어 행방불명이 된다. 하영근은 진주의 만석꾼의 아들로서 지적 자유주의자인데 외동딸 윤희와 이규를 결혼시켜 프랑스로 같이 유학을 보낸다. 하준규는 일제 치하에서 저항운동을 한 경력이 있고 후에 공산당원이 되어 활동하다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공간배경은 어떤가? 제목만 보면 지리산이 주된 배경이 아닐까 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된 배경은 아니다. 좌우익 갈림의 비극적 상징공간이란 의미가 더 크다. 그래서 지리산과 그 주변의 일원이 바로 공간배경이란 결론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연고지인 지리산 부근의 일원과 그 일원의 중심부에 지리산이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쩌면 동심원적 공간구조를 가졌다 하겠다.
그래서 소설『지리산』에 나타난 하동이란 관점에서 보면 하동이나 하동지역은 부분적으로 나온다. 이규의 고향 북천면이 나오고, 하동읍이 나오고, 옥종면이 나오며, 청학동을 찾아 헤매는 상투를 한 최노인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제2권에 나오는 ‘청학동’이야기는 좌우익 갈림과 충돌이란 조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아 싸움이나 다툼이 없는 이상사회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염원이 간접표현 되었다 하겠다.
그 다음 장편에서 본격적으로 하동이 소설공간으로 나오는 작품이라면 박경리의 대하소설『土地』를 들 수 있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1897년에서 시작하여 1945년 해방까지 약 50년간의 이야기로서 대충 2세대에 걸쳐져 있다. 주인공 최참판의 손녀딸 최서희를 기준해서 보면 5세에서부터 50대 중반에 이르는 이야기이고, 역사적 사건으로 보면 동학혁명, 한일합방, 일제식민지화, 3․1운동, 대동아 전쟁, 해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5부로 된 이 대하소설을 각 부별로 정리․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부의 공간배경은 평사리가 주무대가 되어있고 평사리라는 생활공동체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1897년 8월 한가위로부터 1908년 5월까지 약 10년간이다. 서희 나이로 보면 5살 나던 해에서 16살이 되던 해로 되어있다.
제 2부는 서희와 그 주변 인물들이 평사리에서 간도로 옮긴 용정촌이 주무대며 간도 이민생활이 그려지고 있다.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약 7년간의 이야기이며, 서희 나이는 19세에서 26세에 이른다.
제 3부에서는 간도에서 두 아들과 함께 돌아온 서희가 미리 집을 마련해 둔 진주를 중심하여 평사리, 서울, 간도, 지리산 등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나오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가을부터 1929년까지 약 10년간이고, 서희 나이는 27살에서 37살이 된다. 주된 이야기는 빼앗겼던 평사리의 집을 되찾으며 세대간의 교체도 일어난다. 구세대들이 평사리로 돌아가 물러나거나 인생을 마감함에 따라 다음 세대들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제 4부의 공간배경은 진주와 평사리에서 서울, 만주, 일본까지 확대된다. 시간적으로는 1930년부터 1938년까지 약 8년간의 이야기이며, 서희 나이는 38살에서 46살이 된다.
제 5부의 공간배경은 제 4부와 거의 동일하다. 1940년 8월부터 1945년 8월15일 해방까지 약 5년간을 시간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서희 나이가 이제는 48세에서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르게 된다.
대충 위에서 이 작품의 공간과 시간배경을 살펴보았다. 공간배경으로서의 하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역시 평사리가 주무대가 되어 있다. 제 1부의 주무대일 뿐 아니라 제 3부, 제 4부, 제 5부에서도 스토리 진행의 결정적 공간요인으로서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서희의 입장을 비유적으로 말해보면 모천(母川)을 떠난 연어가 다시 모천으로 돌아온 형국이다. 평사리→ 간도→ 진주→ 다시 평사리로 돌아왔으니 고향의 떠남에서 고향으로의 회귀로 이어져 ‘연어의 생리’를 닮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배경이 바로 이 작품의 처음과 끝 부분에 나타나 있다. 제 1권을 펼쳐보면 맨 앞부분에 평사리 최참판댁 타작마장에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한가위 굿놀이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고, 제 5부 마지막 권에서는 쇠락해 가는 평사리 고가(古家)의 한 구석방에 칩거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고 있는 서희의 얼굴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 바로 모천으로 돌아온 ‘연어의 생리’를 닮은 경우라 하겠다.
수필집에서 하동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집을 말한다면 이유식의 연작 자전적 수필『그대 떠난 빈자리의 슬픔』을 들 수 있다. 그의 성장지 옥종(玉宗)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해방과 군정, 6.25, 6.25 이후의 재건시기로 되어 있는데 본인으로 보면 유년시절, 초등학교의 소년시절, 중․고교의 청소년 시절에 해당하는 약 15년간의 이야기이다. 옥종이란 삶의 공간에서 그가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를 그 당시의 사회, 문화, 생활, 민속, 유행 등과 관련을 지우며 일종의 풍속사적 자전에세이를 썼던 것이다.
Ⅲ. 미래 작품 속의 하동
현재 하동 출신 문인들의 수는 출향과 향토를 합쳐 전국적으로 약 4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문단 연조가 높은 문인들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또는 수구초심 같은 그리움에서 하동을 노래해 왔고 하동을 소재로 삼아 왔다.
시에서 정공채, 정득복, 정두수, 강남주, 정순영, 정규화, 김필곤 등이 있고, 시조에는 김광수, 강경주, 김연동, 하한송, 강기주 등이 있고, 수필에는 김규련, 이유식, 강석호 등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욱더 활발해지리라 본다. 그 첫 번째 이유는 3년 전에 하동에 거주하고 있는 10여명의 문인들이 ‘하동문학회’를 결성했고 또 회지『하동문학』지를 펴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고, 그 두 번째 이유는 회지 발간과 향토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취지로 금년에 전국의 출향문인들이 참여하는 ‘하동문학작가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출향문인 30여명과 향토문인 10여명이 뜻을 나누고 또 힘을 모아 나간다면 하동에 대한 애향심은 배가(倍加)되리라 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하동이 배경이 되거나 하동이 담긴 작품들이 더 많이 생산되리라 본다.
사실 하동은 명승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전설상의 이상향이란 청학동이 화개의 불일계곡, 악양의 매계계곡, 청암의 청학계곡에 있을 뿐 아니라, 하동포구 팔십리와 광평리 섬진강변의 백사청송(白砂靑松)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장엄한 불일폭포와 쌍계사와 그 십리 벚꽃길이 있다.
특산명물로는 작설차와 은어가 있으며, 임진왜란시 일본으로 가져가 찻잔으로 국보가 되어 있는 눈박이 사발의 본고장이 바로 진교면 백련리에 있다.
그리고 근세의 역사적 현장도 많다. 동학운동, 한말의 의병활동, 3.1항일운동과 관련된 곳이 산재되어 있다. 가령 옥종면 북방리에 있는 고성산성만 해도 이곳에서 1894년 11월에 동학군 4만여 명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전멸하다시피 한 비운의 장소다. 예부터 그때 죽은 넋들이 바람이 불면 ‘고시랑 고시랑’ 소리로 흐느끼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누구에게나 문학적 상상력이나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이외에도 많은 문화 유적지와 역사유적이 있다. 그러나 꼭 이런 하동의 명소나 명물, 역사적 현장이나 문화유적지만이 작품의 소재나 공간배경이 될 수 있다고 만은 말할 수 없다. 좁게는 출생지나 성장지의 고장이나 마을도 충분히 소재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자전적 체험공간이 때론 독자들의 호기심을 더욱 충족시킬 때도 있다. 이문구 소설의 고향마을 ‘관촌’, 김유정 소설의 고향마을 ‘실레마을’을 상기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 하동출신 문인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소재가 있다 하겠다. 시로서건, 수필로서건 또 소설로서건 작품에 나타난 하동의 문학지도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
Ⅳ. 나가는 말
대충 주요 작품을 중심으로 하동지역의 문학지도를 그려보았다. 이를 우리는 하동의 문학 지지학(地誌學)이라 해도 좋다. 그리고 참고로 미래의 지지학도 그려보았다.
그런데 대체로 모든 공간배경이 경험적 현실공간이요 실제 공간인데 반해 박경리의『토지』의 경우만은 다르다는 점이다. 평사리라는 실제의 현실공간에다 작가가 창조해 낸 세계를 집어넣어 본 경우라 하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설속의 가공의 평사리를 실제의 평사리에다 복원해 놓았으니 실로 문학작품 속의 공간배경의 힘이야말로 그만큼 홍보성이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문화하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이에만 만족치 않고 다른 작품의 공간배경에도 선별적으로 관심을 가져볼 만도 하다. 가령 남명이 둘러본 청학동에 「청학동」이란 시의 현장비를 또 화개장터에는 김동리「역마」의 현장비를 세워볼 만도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문단연조와 비중을 고려해 하동출신 문인들의 생가(生家)에 표지석을 세울 수도 있다.
우리에겐 과거도 중요하지만 당대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화활동과 관련된 흔적이 하나라도 남아있게 되면 당대는 물론 먼 훗날 하동의 문화관광지리지의 표적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군 행정 당국, 문화원, 문인들 그리고 관련 있는 문화단체들이 공동으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 여겨진다. 그리고 타 지역은 과연 어떤가 하고 참고할 필요도 있다. 정신적 유산들을 일단 문학현장비나 표지석, 더 나아가 문학비로 시각화 시켜 놓으면 지역사회의 문화 마인드도 선양될 것이고 때론 타 지역 사람들이나 문인들에게 관심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리라 본다.
이 유 식
평론가. 1961년『현대문학』으로 등단. 배화여대 교수 정년퇴임,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역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현재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상임고문, 청다문학회 이사장.
현대문학상, 예총예술문화대상, 한국문학상 외 다수 수상.
평론집『반세기 한국문학의 조망』외 8권, 수필집『세월에 인생을 도박하고』외 7권, 평전 2권, 편저 4권, 공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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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배기 글이 나왔군요.우찌 이리 원고가 술술 잘 읽히고 해박한 지식으로 감탄케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이런 걸 玉稿라 부를 상 싶습니다.
이쁘기도 하셔라 10일간의 말미를 얻어놓고 6일이나 앞땡겨서 옥고를 보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