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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우리집 대소사
*큰아들 귀국 여름휴가
*회장 취임
*머내 누이 소천
*캐나다 사돈 귀국
*구정의 일과
*태극집회에 참가하는 나의 소고
*막내매형 소천
*태극권 대만대회
*핸드폰 분실
*생일 잔치
*빗물받이 공사
*큰아들 귀국 여름휴가
큰아들이 캐나다에서 몇 년 만에 여름 휴가차 귀국을 하여 우리 부부와 작은 아들 부부는 큰아들의 일정에 맞추어 모든 계획을 짜고 큰아들 위주로 모든 행동반경을 잡았다.
보람 있는 여름휴가
금년 2016년 여름은 무더위가 극성을 부려 에어컨을 주야로 작동시키니 서민들의 전기료가 누진 폭탄이라고 아우성이다.
다행히 우리 집은 태양광이 설치되어 있어 전기료 누진세 폭탄은 면했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부터 식구들을 데리고 전국으로 휴가를 잘 돌아다녔다.
우리나라 콘도미니엄 초창기에 한국콘도를 구입하여 콘도 지점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그 주위를 열심히 구경하며 전국을 놀러 다녔다.
친척이나 조카들 결혼식 때는 우리 콘도를 사용하게 하여 인기를 얻었다.
콘도 초창기에는 신혼여행으로 콘도를 사용하는 것은 최상의 숙박 선물이었다.
나는 여름휴가 때는 강원도의 산 과 바다, 부산의 해수욕장 그리고 겨울에는 스키장을 가족을 데리고 다니며 휴가를 알뜰히 사용하였다.
어린 두 아들을 계속 데리고 다니니 이 아들들도 성장하여 남에게 뒤질세라 열심히 여행을 다닌다.
나의 여행 스타일은 최소의 경비로 최상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콘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음식 재료도 집에서 가지고 가니 숙식이 해결된다.
스키장에도 점심에 음식을 싸 가지고 가서 식당에서는 국물이나 사서 먹는 정도니 옆에서 보는 사람은 궁하고 추하게 보일수도 있다.
싸 가지고간 음식을 먹다보니 명승고적 근처의 맛집이라고 유명한 곳도 들를 필요가 없어 어는 때는 맛집을 지나쳐 서운한 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국제나 국내 여행은 누구보다도 많이 다닌 편이다.
1번부터 9번 까지가 우리 식구다
금년에는 토론토에서 큰 아들이 식구들을 데리고 4년 만에 귀국하여 한 달간 휴가를 보낸단다.
수원에 있는 작은 아들이 형이 오면 같이 온 식구가 놀러 간다고 휴가스케줄을 짜 놓았다.
7월 18일에 큰 며느리가 두 남매를 데리고 먼저 귀국하고 아들은 말일에 귀국한단다.
공항까지 집사람과 며느리를 마중 나갔다.
Skype로 매 주말마다 영상통화를 하여선지 공항에서 손주들이 반갑다고 뛰어 오는데 낯설지가 않다.
뛰어오는 손주들을 품에 안아보니 손주를 보는 기쁜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마음속 깊게 흐뭇한 마음이 전해진다.
집에 도착한 아홉 살 손녀 고은 이와 다섯 살 손자 순용 이가 11시간의 시차를 잘 극복해 가는 것 같다.
손녀는 학교에서 등급이 같은 반 또래들보다 높아 반에서 Top 이란다.
한국말과 영어를 동시에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게 관심을 두고 대화하게 한 결과다.
손자는 이제 가을학기에 유치원가려고 누나한테 영어 기초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집사람은 며느리에게 집이 협소해서 생활할 수 있느냐고 근심을 한다.
나는 집이 좁더라도 서로 비집으며 같이 살아 식구들이 동화해야 한다고 하니 며느리도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왔다고 한다.
아희들은 더위를 무척 타 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잔다.
금년여름이 유난히 덥긴 해도 추운 나라에서 온 아희들이 왜 이렇게 더위를 타는지 모르겠다.
아들 부부가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약해서 아희들도 더위를 타는 것 같다.
자는 폼을 보니 개구리처럼 엎드려서 자기도 하고 모로 누워 애벌레처럼 자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다.
에어컨 한대로는 어림도 없어 선풍기를 동원하고 난리다.
귀국 다음날부터 반포 수영장, 코코몽 카페, 뽀로로 카페 작은아들 식구들과 광명동굴 등 며느리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끌고 다닌다.
우리 부부도 합세하여 차량 이동하는 편의를 봐준다.
30년 전 큰아들이 손자만할 때 산 고무보트를 손자가 수영장에서 타고 논다.
자기 아들이 타고 있는 사진을 보고 큰아들도 옛날 생각을 더듬는 것 같다.
30년 전 어린이 놀이 보트가 지금까지 있는 것도 신통하다.
손주들은 처음으로 지하철도 타보고, 타고 싶다던 기차도 타고 시내버스도 타 보았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타는 것은 미숙하다.
한적한 곳에서 살다가 서울에 오니 별안간 환경이 변해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차가 붐비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캐나다에선 차가 사람을 비키는데 서울에선 사람이 차를 비켜야 한다.
골목에서 차가 비집고 들어오니 손주가 뒤쪽으로 겁나서 숨는다.
7월 30일에는 큰아들까지 귀국하여 본격적인 행락이 시작되었다.
8월초에 압구정 애슈리퀸즈에서 사촌식구들을 초청하여 전 식구가 상면하는 자리를 마련하였고 이 자리에서 큰아들은 열심히 캐나다 생활을 자랑하였다.
작은 아들이 8월7일부터 10일까지 가족여름휴가 일정포를 짜 놓았다.
우리부부와 큰아들 식구 넷, 작은아들 셋, 모두합해서 식구가 총9명이다.
승합차를 렌트하여 작은 아들이 운전은 맡았다.
휴가 가서 먹을 음식이나 과일 휴가용품 등은 모두 작은 아들이 준비했다.
승합차라고는 하나 식구가 아홉 명에 짐을 실으니 자리에 까지 짐 보따리가 차지하였다.
불편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참는 수밖에 없다.
강원도 사천 해수욕장에 가서 펜션에서 1박하고 홍천 오션 월드에서 2박하고 귀경하는 것이다.
8월7일 아침 일찌감치 집에서 출발하여 강릉 사천 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2층 펜션에 짐을 풀고 해수욕장에를 갔다.
두 돌도 안 된 작은 아들의 순우는 물론 토론토에서 온 손자 순용이도 바다를 처음 보는 것이다.
처음으로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첫 손녀 고은이는 전번 귀국했을 때 보라카이 여행을 가서 바다를 보고 이번이 두 번째 인 것 같다.
해수욕이 끝나고 저녁에 펜숀에서 바비큐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묵을 펜션은 방3개에 거실 2층이 있는데 밖에는 독립된 바비큐장이 있다.
아홉 식구의 바비큐를 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작은 아들이 주역으로 한다.
저녁이 되니 뜨거운 햇살도 가시고 해변가라 열대야도 생기지 않으나 후덥지근하다.
바비큐에 술 한 잔 곁들이는 것도 흥취가 나고, 식구들끼리 떠드는 것이 얼마나 정겨운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거실에 들어가서 과일과 맥주를 하며 또 이야기가 지속된다.
나는 며느리들에게 계속 떨어져 있으면 남남이 되니 이번기회에 식구들끼리 응집하여 서먹서먹한 관계를 일소하고 한식구로 융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천 대명리조트의 소노벨리체로 이동하기 전에 강릉의 커피 스트리트를 들렸다.
해안가를 끼고 커피 점들이 들어서 있는데 외 내장 인테리어나 커피 가격이 서울하고 차이가 없다.
해안가의 이 많은 커피점이 들어선 것을 보면 영업이 잘 되는 모양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하는 풍경은 이제 우리도 선진국들의 여유 있는 해안가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강릉 경포대를 한 바퀴 돌며 홍천 오션 월드로 향했다.
홍천으로 가며 계곡의 추억을 손주들에게 경험 시켜주려고 산 계곡을 찾았다.
산 계곡에 들어가 계곡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곳에 발을 담그고 노는 낭만적인 생각이었다.
도로가 잘되어 있어 강릉에서 차를 타니 순식간에 홍천 리조트에 도착하였다.
아쉬움이 있어 리조트 끝의 계곡으로 올라가니 가뭄 끝이라 물도 흐르지 않고 걷는데 익숙지 않은 손주들이라 내가 생각하는 계곡의 풍경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소노벨리체 콘도를 들어가니 방 3개에 신형 전자제품과 생활도구에 널찍한 응접실에 베란다가 있다.
새로 지은 콘도를 보고 내가 사는 집보다 좋구나 하며 내가 뒤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한국 경주콘도를 사서 경주 보문단지에 갔을 때 감동을 받은 기억이 불숙 난다.
아침에서 밤까지 오션월드에서 수영하고 놀기로 계획을 하였다.
온 식구가 물놀이 기구를 들고 오션월드 수영장에 입장을 하여 자리를 잡았다.
풀장 옆의 방갈로인데 그늘 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 에어컨 식탁 소파까지 있는 방갈로로 손주들 때문에 아들이 큰맘 먹고 최상의 방갈로를 빌린 것이다.
여태껏 풀장을 다니며 그늘 막을 빌려 쉬는 사람을 보면 수영장에서 방갈로를 빌려 사용하는 귀족들로 생각 했다.
우리는 한술 더 떠 냉장고 에어컨까지 있으니 우리가 상류인사가 된 기분이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손주들을 물놀이 시키며 부모들은 짬을 내서 파도풀이나 원형 스윙 풀에서 즐긴다.
손녀 고은이는 학교에서 기초 폼을 배웠는지 열심히 하여 물에 뜨는 정도가 되었다.
손주들이 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면했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풀장에 손님이 많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 3분 동안 노는 놀이 기구를 탈 생각은 아예 할 수도 없다.
아무리 물놀이가 좋다고 하여도 쪼그만 손주들이 하루 종일 풀장에서 노는 것은 무리다.
방갈로에서 쉬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저녁에는 피곤한 손주들을 일찍 재우고 야간에 아들 며느리와 스윙 풀에서 마지막까지 즐겼다.
큰 며느리는 스윙 풀을 처음 경험하는지 매우 즐거워한다.
작은 며느리는 어데서 부터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선수다.
내가 아들 며느리와 끝까지 노는 것을 보고 나의 체력을 칭찬한다.
큰 아들은 주빈으로서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아직 3번아 잘 있어라 6번은 간다가 아니고 1번을 견지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지 않고 온 식구가 용인의 에버랜드를 갔다.
캐나다에서 온 손주들은 동물원에서부터 놀이기구까지 하고 십은 대로 하고 놀고 십은 대로 놀아 한국 오면 항상 자기들한테 이렇게 하는 줄 알고 있을 것 같다.
점심 식사를 하며 나는 우리 동기생이 에버랜드 전신인 자연농원 처음 개장하기 위하여 묘목을 심을 때 여기서 일 했으며 묘목은 경주의 묘목 장에서 거의 다 왔다고 하였다.
에버랜드는 지역이 넓어서 어떤 곳을 보고 어떤 곳을 지나쳐야 되는지 사전 계획을 하고 가야지 무작정 쫓아다니다가는 다리가 아파서 결정적인 곳을 놓치게 되어 있다.
어린 손주들을 낮잠을 재우면서 까지 구경하다 물폭탄 광장까지 경험을 하였다.
저녁은 야간 불꽃놀이를 볼 수 있는 식당의 특별석을 예약하였다.
박칼린이 감독한 레이져 쇼가 건물에 영상을 비취며 건물 뒤에서는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는데 고은 이는 불꽃이 연거푸 터지니 겁이 나는지 의자 옆으로 피한다.
처음 보는 불꽃놀이라 황홀하고 멋있으면서도 겁이 났던 모양이다.
에버랜드의 자랑인 휘황찬란한 야간 차량 행렬은 하이라이트라 손주뿐만 아니라 며느리도 감탄 했을 거다.
캐나다에서 온 큰 아들 식구는 한국에서 즐겁게 여름휴가를 잘 보냈을 줄 안다.
손주들도 휴가기간 동안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 감사하다.
작은 아들 식구는 온 집안 식구 챙기느라 수고가 많았다.
우리 온 식구들은 이번 여름 휴가동안 서로 협조하려고 노력하고 동화하여 일체감 있는 한 가족으로 뭉쳐진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집사람은 며느리들이 극빈 대우를 하여 기분이 좋은 데다 식사에 설거지 까지 며느리들이 해 주니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한 달간 큰아들 식구 휴가에 온 가족이 초점을 맞추어 생활하였으나 보람 있는 여름 휴가였다.
*회장 취임
회장 취임
금년에 고등학교 동기 동창 회장과 군대 해병학교 동기생 회장을 겹쳐서 맡게 되었다.
*고등학교 회장
덕수 고등학교 제49회 동창은 5백여 명에 지금은 반 정도가 연락이 되며 그중 반 정도가 참석 가능인원이다.
총회를 하면 지방소재 동창을 제외하면 백 명이 못되게 참석을 한다.
동창의 애경사에는 나오고 동창회에는 불참하는 인원도 제법 된다.
작년 12월에 운영위원회에서 회장추천을 받아 1월 8일 총회에서 인준되어 정식회장으로 업무를 보게 되었다.
봄에 괴산 옛길 여름에 연천 보신 가을에 영월 청령포 장릉을 버스를 대절하여 성공적으로 치렀다.
동창들이 나이가 들어 예전같이 술의 양도 줄고 걸음걸이도 어깨가 늘어져 걷는 폼이 영락없는 노인네다.
회장이 되어 동창들에게, 이제 늙어서 찾는 친구도 줄어들었으니 서로 열심히 만나 회포를 푸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며 각 친구들끼리 소모임을 하여 끼리끼리 자주 만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정한 요건을 갖추는 소모임은 동창회의 정식 모임으로 간주하여 금일봉을 전달하겠다고 공언을 하였다.
십여 명 이상의 정규모임이 종로, 분당, 일산, 정자, 골프, 등산 동아리가 금년에 정식으로 동창회의 소모임으로 결성되어 집행부에서 찾아가 금일봉을 전하니 매우 좋아한다.
총회에는 안 나오든 친구들이 소모임에는 나와 결속력을 갖게 되었으며 동창회의 일에 참석하는 인원이 증가 하였다.
*해간 35기 회장
해병학교 동기회도 12월에 지명이 되어 3월에 정식업무를 시작하였다.
동기회장이 되니 당장 닥친 게 소위임관 50주년 기념행사가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행사를 하자니 예산이 필요한데 동기회비는 거덜이 난 상태다.
이 난감한 상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쌓인다.
문집을 만들어 팔자 느니 외부인사는 초청하지 말자 느니 알차게 소규모로 하자는 등 여러 안이 있었으나 어찌되었던 예산이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한다.
다행히 동기생들이 찬조금을 내어 기념행사 예산을 초과하게 되었다.
예산이 충분하니 마음 편하게 임관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소규모로 하자던 것이 부부동반 산업시찰도 하고 550페이지나 되는 임관50주년 기념 문집 “질풍”도 발간하였다.
후배들이 결성한 군복차림의 밴드도 불렀다.
기념식은 5월 27일로 일자를 정하고 오전에는 평택 아산 기아자동차를 부부동반 산업시찰을 하고 영릉을 구경하고 용산 국방부 컨벤션 센터에서 저녁에 임관 50주년 본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부부동반 모든 참석자는 식사비도 받지 않고, 50주년 문집 질풍 책자도 무료로 지급하기로 하니 모두 대찬성으로 좋아하였다.
참석인원이 역대 최고로 모여 서로의 회포를 풀었다.
참석한 동기생이 미국에서 제주도에서 부산 강원도에서 잘 안 나오던 서울의 동기들도 모두 모여 오래간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반가워하였다.
*개별모임 회장
다른 개별모임도 내가 회장을 맡았는데 군대 친구들에게만 열심히 하고 자기들은 소홀히 한다며 은근히 조여 온다.
* 시골동네 친구들 모임에서는 회장이 울릉도 간다며 약속을 지키라고 한다.
바쁜 가을 각 모임 여행 스케줄에서 4일을 내어 울릉도 독도를 갔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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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모임은 분기별로 만나며 12월 부부동반 뷔페로 회장의 임무를 하였다.
* 대학 친구 모임은 격월로 조촐한 식당에서 만나 회장의 직분을 하였다.
회장 복이 터져 한 번에 회장 직이 몰리니 대 중 소 모임에 쫓아다니느라고 시간에 쫓기고 본의 아니게 술을 즐기게 되니 체력이 부친다.
봄가을은 여행에 년 말은 송년회에 참석하느냐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회장으로서 일정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이 참석하게 되는 이유도 된다.
돈을 버는데 이렇게 복이 터졌으면 더 원이 없겠다.
회의 하고 회식 하는데 쫓아다니느냐고 내 일은 제대로 못하고 돈만 쓴다.
내년 일 년만 더하면 바쁘게 뛰어 다녀야 하는 회장 직은 고사 하겠다
*머내 누이 소천
셋째누이 소천
분당 동원동 머내에 사는 셋째 누이가 12월 10일 저 세상으로 갔다.
칠 남매 중 네 번째로 소천을 한 것이다.
89세이니 장수를 한 것이다.
머내 민 씨 집안으로 출가를 하여 네 아들을 낳고 칠십 여년 살으셨으니 여한은 없다.
머내 민 씨 집안은 단명한 집안이라 환갑을 넘기는 자손이 거의 없다.
셋째 매형은 여러 형제중 혼자만 환갑은 잡수시고 저세상으로 가셨다.
낙생면 동원리에서 성남시 동원동으로 바뀔 때까지 머내에 터전을 잡고 있었으니 나름대로 농사짓던 전답이 제법 된다.
지금도 옛날 터와 기와집에서 생활을 한다.
촌 동내에서 시로 승격을 하니 부동산 값이 많이 올라 생활에는 지장이 없이 잘 살았다.
노년이 되어 육신에 신경통이 와서 걷기도 힘든데 집 앞 터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일을 했다.
농사지은 열무나 고추 호박 등 우리가 방문을 하면 조금이라도 더 줄라고 애를 쓰니 고맙기 그지없어 그 정성을 담아 온다.
셋째누이가 당뇨에다가 치매기까지 오기 시작하여 방안에서 근근이 생활을 하는데 자식 부부의 간호가 극진하지 않다.
병수발 3년에 효자 효부 없다더니 누이가 며느리에게 박대 받는 것이 느껴진다.
집에서 밥을 혼자 해결한다.
자식부부가 봉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살림을 하는 것 같다.
압구정 막내 누이를 데리고 우리 부부가 방문을 하니 막내 누이보고 보고 싶었다며 왜 이렇게 안 왔느냐고 서운해 한다.
자기가 괴롭고 핍박 받을 때 꼭 누구에게 의뢰하거나 만나 하소연 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있는데 셋째 누이가 막내 누이에게 이런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경난이 족하가 인천에서 효 요양원을 운영한다.
머내 누이를 자식들이 용인 요양원에서 인천 효 요양원으로 옮겼다.
요양원으로 옮기고 부터는 자식들이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생각보다 열심히 병문안을 온다.
며느리 때문에 신경을 썼는데 아들 부부가 열심히 문안을 오는 것을 보고 요양원에 모시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요양원에서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다.
막냇누이와 우리부부가 병문안을 갔는데 막내 누이를 못 알아본다.
우리 집사람 보고 누구냐고 물으니까 천사라고 한다.
막냇누이를 못 알아보고 집사람한테는 천사라고 하니 옆에서 듣는 나는 칭찬이 기쁘기도 하고 누이를 못 알아보는 것이 황당하기도 하였다.
집사람이 머내 누이를 찾아 갈 때 마다 떡도 해가고 과일도 해가며 집안일 있을 때 마다 해결하러 다니는 것이 뇌리에 박혔던 모양이다.
성남 장례식장인 양생원에서 식을 치루고 집안 선산인 이천의 남편 곁에 모셔졌다.
이승에서 서운한일 모두 잊고 저세상에서 편안히 사십시오.
*캐나다 사돈 귀국
사돈 귀국
사돈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귀국 한단다.
큰아들 내외와 Skype로 영상통화를 하며 어머니가 귀국한다고 하여 안사돈만 귀국 하는 줄 알았다.
안사돈이 귀국하면 집사람이 안사돈을 만나 식사를 하며 인사를 하면 된다고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한 달 동안 체류한다기에 여유를 부리다가 안사돈만 귀국한 것이 아니고 두 양주가 같이 귀국을 한 것을 알게 되었다.
불이야 사돈에게 연락을 하고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우리가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캐나다에서 사돈이 우리부부를 온타리오 주 최북단 알곤퀸 파크를 하루 종일 구경시켜준 것을 기억하며 우리나라에서 우리부부와 같이 여행을 하자고 하였다.
한국에서 일산아파트 건이나 해결하고 넉넉한 시간을 갖고 있는 줄 알았더니 친척과 남해여행 당진의 부동산 문제 등 우리와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 일정을 내어 우리와 보내기로 하였다.
우리는 집사람과 상의하여 아침고요수목원을 가기로 하였다.
아침고요수목원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을 때 집사람과 구경한 적이 있어 거리상으로나 하루 일정에 맞는 적당한 코스고 사돈 부부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하여 안성맞춤이었다.
집사람은 하루 종일 있을 간식거리와 과일 등을 준비하느냐고 바쁘다.
특히 저녁을 우리 집에서 하기로 일정을 짜 놓았다.
저녁반찬에 안 사돈이 좋아 한다는 게나 전복까지 준비 하느냐고 집사람이 바쁘게 움직인다.
아침에 사돈 부부를 모시고 우리부부 4인이 아침고요 수목원에를 갔다.
수목원은 전에 왔을 때 보다 많이 확장을 하였고 원예수목을 배치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사돈 부부는 처음 왔다며 수목원을 걸으며 매우 즐거워한다.
원두막에서 우리가 싸 가지고 온 간식과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즐겼다.
저녁에는 집에서 집사람이 정성스럽게 만든 저녁을 들며 그간의 이야기들을 하였다.
저녁반찬은 집사람이 안사돈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파악하여 여러 가지를 정성껏 만들어 내가 보기에도 정성을 쏟은 것이 눈에 바로 보인다.
*구정의 일과
설날의 일과
금년은 입춘이 지나고 나흘 만에 병신년 설날이 찾아왔다.
기승을 부리던 추위도 풀려 예년기온을 찾으며 설 행사에 지장 없게 해 주었다.
우리 집은 설날이나 추석에는 차례 상을 차려 집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산소에서 지낸다.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산소에는 성묘만 하고 오면 편하고 쉬울 텐데 꼭 제물을 차려 가지고 산소에 간다.
내가 젊었을 때는 산소에 묘지기가 제물을 다 차려 산소에 빈 몸으로 가서 차례를 지내면 되었는데 사촌형이 땅을 다 팔아 버리니 묘지기가 없어져 지금은 조율이시 제물 하나라도 우리가 직접 챙겨 가야 한다.
땅을 팔아먹은 사촌들은 오지도 안는다.
이제는 묘지기가 없으니 집에서 지내도 좋으련만 옛날 하던 습관대로 산소에 가서 제물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낸다.
산소는 하오고개에 오대조까지 모셔놓고 있으나 산소가 한군데 모여 있지 않고 운중동에서 부터 금토동까지 산재해 있다.
할아버지 묘소는 판교 안양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이장을 하여 할아버지 묘소는 오대조 묘소 옆에 안치하여 별 상관이 없으나 4대조 묘소가 문제다.
4대조 묘소는 청계산 남쪽 끝자락 7부 능선에 위치하여 하오고개에서부터 산소를 올라가더라도 가파른 경사에 겨울이라도 등줄기에서 땀이 나야 할아버지 산소에 도달 할 수 있어 집안에서도 개선을 해야 한다고 말이 많다.
나는 산소에 갈 땐 정장차림에 넥타이를 매거나 한복차림으로 간다.
조상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성묘하러 가는 것이 차례를 지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등산가는 것 같다.
겨울에 한복을 입고 4대조 묘소에 올라가면 눈에 미끄러지는 것은 감수하더라도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옷에 부스러기가 생긴다.
같이 올라가는 조카들은 한복이나 정장을 한 녀석이 하나도 없다.
설 명절에 조상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정장을 하고 나왔는데 몇 년이 지나도 조카들은 정장을 하고 나타나지를 않는다.
나를 본떠서 정장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 나 혼자 기대한 생각일 뿐이다.
나는 불편을 감수하고 정장을 고집하였는데 나도 간편복으로 갈아입을 때가 되었나 보다.
조카들이 이 높이 있는 산소에 까지 올라 와서 성묘하는 것만도 감지덕지 하게 생각해야 한다.
설 명절이나 추석에는 가족에게 선물이나 설빔을 하여주고 세배를 주고받으며 세뱃돈을 준다.
나는 산소에 갔다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정장을 벗어버리고 한복에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고 나타났다.
형님들은 다 돌아가시고 우리 집의 좌상이 나다.
사촌 조카들에 손주까지 다 모이니 좁은 집안이 미어터진다.
우리부부가 세배를 받고 다음부터는 형제들 순위대로 세배를 하는데 손주들이 세뱃돈을 받고 제일 좋아한다.
우리 집에서 세배를 받기 시작 하고 부터 점심을 차리는데 집사람 혼자 다 음식을 장만하니 보통일이 아니다.
몇 년이 지나니 조카며느리들이 각자 한두 가지씩 자기 집에서 해가지고 와 떡 벌어진 음식상이 되었다.
그리고는 조카며느리들이 작은 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다.
처음보다 생각들이 많이 발전 하였다.
집사람은 차례 상 제물 준비나 하며 조카들을 보듬으면 되었다.
제물준비만도 부침게를 부치랴 탕을 하랴 적을 하랴 쉬운 일이 아니다.
설날은 이렇게 해서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은 처제 집에서 한잔하고
초사흗날은 둘째누이 9순이라 압구정 한일관에서 또 한잔했다.
토론토에 있는 아들하고는 Skype 로 화상통화를 하고 막내아들 한테는 세뱃돈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설 연후를 잘 보냈다.
*태극집회에 참가하는 나의 소고
태극집회에 참가하는 나의 소고
칠십 중반의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 잔하며 건강이나 병원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정치와는 동 떨어진 나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노인이다.
신문 방송에서는 연일 최순실 이야기 외에는 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이 대 국민사과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박근혜대통령을 고고한 학 같은 느낌을 주고 행동하며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5선의 국회의원에 당 대표를 3번이나 하고 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 당을 구해낸 선거의 여왕이라는 말이 나올 때에는 대단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고 구중궁궐에서 자란 여인이 조용히 잠적해 있다가 정계에 뛰어들어 대통령이 되고는 청렴한 정치를 하려고 혈육인 동생들을 청와대 근처에도 못 오게 하며 권력형 부정을 사전 차단하는 일을 하였다.
이런 박근혜대통령이 여염집 부인 정도밖에 안 되는 최순실의 행위에 대국민 사과를 한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매스컴에서는 미르재단, K 스포츠재단 하며 최순실이 전횡을 한 사실이 명확하다고 기술하며 최순실의 가정과 주위인물을 논거 하는데 최순실이 박근혜대통령보다 위에 있다는 것이다.
JTBC에서는 태블릿 PC를 제시하며 최순실것이라고 단정하고 이 PC안에 부정한 축재 인사 등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단정하였다.
각 신문 방송에서는 이 태블릿 PC를 대대적으로 기술을 하여 일파만파로 파장을 일으켜 모든 국민이 믿고 실망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 침몰 때 박근혜대통령의 청와대에서 7시간 행적에 대해서 물고 늘어졌다.
처음에는 남자와 밀회를 즐겼다고 매스컴에서 퍼트리더니 이게 거짓으로 나타나자 이번에는
청와대에서 오방 굿판을 벌였다고 떠들었다.
굿판도 사실이 아니라고 나타나자 이제는 의사들을 불러들여 성형수술을 했다고 한다.
청와대 7시간은 문체부 장관의 청문회 출석에서 해명되어 모두 거짓으로 나타나고 청와대에서는 뒤 늦게 7시간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설명하였다.
이 청문회에 의사 미용사 미국에서 간호장교까지 호출되어 성형수술을 확인하려다 오히려 질의하는 국회의원이 역풍을 당하기도 하였다.
최순실 게이트의 첫 관문인 테블릿 PC 는 독일에서 귀국하여 검찰에 검거된 최순실이 자기의 테블릿PC가 아니라고 부인을 하며 자기는 태블릿 PC를 칠줄 모른다고 한다.
방송사나 검찰이나 한심하기 그지없다.
상황이 이런대도 최순실이 독일에서 귀국하자마자 야당과 재야 단체가 집회를 시작하였다.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며 청와대로 간다고 한다.
박근혜 하야하라고 목청을 돋운다.
시위는 불어나며 광장에 단두대 상여 박근혜 목 잘린 상이 나타나며 고등학생들이 혁명을 일으키자며 피켓을 들고 사회주의가 답이란다.
국가가 해산한 통진당을 살리고 이석기를 석방하란다.
민주노동 총연합회 에서는 일본 노총까지 동원하여 국제무대를 만들어 버렸다.
야당에서는 이들을 부추겨 횃불로 변화시켜 보수를 다 태워버리자고 한다.
이 촛불집회의 목적이 어데 있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 과오를 물어 국가를 올바르게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신문 방송에서는 최순실 국정논단, 박근혜 하야가 해결책이라며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부추기고 있다.
최순실의 가족 딸 최순실 주위의 인물 최순실을 도와준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등 엮은 굴비가 나오듯 줄줄이 신상털이가 되어 신문 방송에 도배되고 있어 최순실 사건 외에는 지면이 없을 정도다.
북한에 유리한 피켓과 구호를 외치는 매스컴과 촛불집회를 보고는 이게 나라가 어디로 갈 건가하고 불안해지기 시작 하였다.
박근혜대통령은 매스컴에 밀려 청와대 수석을 해임하고 더 나아가 청와대 삼인방을 모두 해임하여 주위에 자신을 도와줄 인물이 없게 되어 손발이 잘린 상태다.
야당에 밀려 총리를 해임하라고 하여 야당출신의 김병준을 추천하니 안 된다고 국회에서 추천해야 된다고 한다.
총리를 추천하라고 국회에 요청을 하니 안 된다고 아예 거국내각을 해야 한다고 한다.
거국내각을 하라고 국회에 요청을 하니 거국내각도 안되고 아예 하야를 하란다.
국회가 하는 꼴을 보니 이게 국회인가 한심하고 팔다리 잘린 대통령이 안 스럽기 짝이 없다.
행정부가 국회에게 계속 밀리다 못해 밟히는 상황을 보니 국민의 한사람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고 국가가 공산화 되는 직전 같이 보인다.
대통령이 하야는 하지 말고 1년 남은 잔여기간을 채워주었음 하는 바람이 허공에 하는 말 같다.
급기야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였다.
대통령이 하야를 하지 않으니 빨리 끌어 내리려고 야당이 여당의 일부 동조세력과 합세하여 탄핵을 가결시킨 것이다.
이제는 정치적인 면에서 법리적인 문제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박근혜대통령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신문 방송에 그렇게 많이 쏟아진 사건의 말들은 사실이 확정된 것이 없고 거의 다 카더라 하는 찌라시 정도의 삼류 뉴스뿐이었다.
매스컴에서 찌라시 뉴스를 계속 읊어 대니 텔레비전을 보는 국민은 그런 줄 알고 믿게 된 슬픈 현실이 되었다.
박근혜는 10원도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이 없다고 한다.
검찰의 확정된 혐의도 없는데 탄핵의제로 삼았으니 기각 가능성이 많으나 검찰에도 좌익세력이 많으니 결과는 법리만 가지고 따질 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레임덕이 있는데 공무원은 눈치 보며 국가행정이 잘 돌아갈리 없고 행정공백이 생겨 국가적인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경제는 재벌 총수를 모두 한 번에 국회에서 청문회에 출두시켜 하루 종일 붙잡아 두는 우를 범하니 정치가 선진국으로 가는 경재의 발목을 잡아 3만 불 시대는 한참 걸릴 것 같다.
정부를 가지고 노는 제1 야당 문재인은 대통령이 된 듯 대통령이 되면 우방인 미국보다는 주적인 북한을 먼저 방문하겠다고 한다.
북한의 핵개발의 밑천을 대주고, 언론사 사장단을 북한에 데리고 가서 김정일에게 충성맹세를 시킨 박지원은 모든 정책은 자기와 협의해야 한다고 기승을 부린다.
진보단체가 주관하는 광화문에 매주 1000여대의 버스가 상경하여 촛불시위가 극성을 부리며 150여 재야단체가 후원을 하여 무대를 꾸며 가수들이 동원되고 젊은 층이 이를 구경하기 위한 전략을 쓴다.
조직적인 데모전문가인 재야단체를 보수단체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지리멸렬한 오합지졸이다.
문제는 조직적으로 동원된 인원은 한계가 있으며 시위의 본질을 국가 안정이 아니라 사회주의 지향 방식이니 대중의 결집력이 없다.
시위를 하며 태극기를 부정하며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운동권에서 부르는 임을 위한 교향곡을 부른다.
이는 국가를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니 명분을 찾을 수가 없다.
보수단체는 야당과 재야세력이 극렬하게 촛불시위로 가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참고 있었다.
국가가 공산화가 된다는 위협을 느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생기니 보수층이 자발적으로 대한문 시청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이 많은 노인층이 주류를 이루며 모두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니 열기가 진동을 한다.
날이 갈수록 인원이 늘어나며 촛불집회의 수를 능가하며 열기로 촛불집회를 압도 하였다.
보수단체 집회측도 많이 모이는 인원에 놀라며 반가워하나 전체적인 단체를 통제하며 이끄는 방식은 미숙하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나는 박사모도 아니고 정치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최순실이는 대통령을 팔아 이권에 개입하거나 권력을 행사했다면 죗값을 받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가가 이런 사태까지 오는 상황을 만든 책임이 있다.
이권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행정적인 지휘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탄핵을 받을만한 책임은 절대 아니다.
12월 말일 날 대한문에서 열리는 태극집회에 가니 시청 앞 광장에서부터 대한문 앞 도로까지 태극기를 들고 군중이 태극기를 흔드는데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진하는 데는 인원이 많아 대한문에서 시청광장 프라자호텔을 거처 한국은행 본점에서 남대문까지 행진이 이어진다. 이 많은 인파가 대로를 행진하며 탄핵반대 국회해산 탄핵 무효를 외치는데 열기가 대단하다.
특히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드니 이 장관을 시장 통에서 보는 상인들도 다 모여서 본다.
문제는 각 방송국 차나 신문사 차는 보이지 않는다.
보수단체 집회는 아예 보도를 하지 않으려는 작정이다.
신문 특히 방송은 편파방송이 극에 달했다. 인터넷매체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계도하는 매스컴이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고도 반성할 줄을 모른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가보니 방송국차가 다 모여 있다.
이러고도 편파방송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우리나라 매스컴은 반성하는 단계를 넘어 페쇠하고 다시 짜야한다.
나는 탄핵이 기각되어 박근혜대통령이 다시 근무를 시작하여 우리나라 역대 비리를 모조리 파헤쳐 주었으면 한다.
바다 이야기, 부산저축은행, 엘시티, 건강보험, 4.3, 5.18,.......
우리나라 안보차원에서 나는 허락하는 한 애국 태극집회에 참석하려고 한다.
피죽 먹던 가난한 국가에서 선진대열에 올려놓은 우리 기성세대들은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되거나 후진국으로 떨어지는 것을 앉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막내매형 소천
막내 매형 소천
막내 누이가 첫 번째 결혼에 실패를 하고 재혼을 한 매형이다.
매형은 작고한 전실의 자식이 형제인데 형은 더 할 수 없는 호인인데 동생은 이런 인간도 있나 하는 못된 놈이다.
누이가 이 형제의 외가 식구를 만났는데 누이보고 왜 아기를 안 낳느냐고 물어 전실 자식이 있는데 전실 자식을 잘 키우면 된다고 하였다.
외가 식구의 대답이 아이가 없으면 얼마나 나중에 외로울 텐데 아기를 갖으라고 한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연준이다.
연준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씨 집안에 처음으로 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집안에서는 경사스럽고 영광스러워 기쁨이 충만하였다.
매형은 늙어서 까지 부동산 가게를 하며 살림을 하는데 전실 동생 연구는 나이가 오십이 되도록 늙은 아버지한테 쫓아와서 생활비를 뜯어간다.
전실 형 연택이는 부모의 생일을 챙겨주질 안나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와 해결해 주질 안나 집안의 보배다.
같은 뱃속의 아들이라도 이렇게 대조적으로 틀릴 수가 없다.
막내 누이도 연구가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면 연택이를 찾고 연구와 연택이는 두잽이를 한다.
막내 매형이 나이 80세에 경찰병원에서 3월4일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큰아들 연택이가 주관이 되어 떡 벌어지게 장례식을 치렀다.
연구는 십여 년 상호 왕래가 없어 자기 아버지 영면 한 줄도 모르고 가르처 줄려고 하여도 연락이 닿질 안는다.
연준이는 하버드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는데 연락하자마자 부부가 귀국하여 마지막 발인식을 하였다.
막내 매형은 6.25 참전 용사라 국립묘지 이천으로 모시기 전에 서류상 문제가 있었다.
이때까지 연준이는 연택이가 이복형이라는 것을 모르고 친형인줄 알고 있었다.
누이도 친 아들인 연준이에게 이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누이도 연택이와 상의 하여 어차피 알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 연준이에게 알려주기로 하였다.
말 잘하는 연택이가 연준이에게 친형이 아니고 자기가 이복형이라고 하니 연준이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황당한 일이 벌어지니 연준이는 연택이에게 왜 여태껏 숨겼느냐고 한다.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으니 전과 똑같이 살아가면 된다고 하였다.
나도 누이가 여태껏 연준이에게 이복형제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연준이가 40이 넘었는데 연준이도 의심 없이 여태껏 살아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지금까지 함구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재혼 살림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의심 없이 그 긴 세월을 살아 왔다는 것은 집안을 편안하고 균형 있게 잘 보살폈다는 사실이다.
*태극권 대만대회
집사람 태극권 대만 대회
집사람이 강남 신사 문화회관에서 태극권에 열심이다.
일주일에 세 번 새벽에 나가는데 갔다 와서는 집에서 혼자 연습도 한다.
몸 상태가 안 좋았는데 태극권을 하고 부터는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단다.
자기는 일생동안 어떤 것이나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단다.
내가 보기에 태극권은 운동 같지도 않고 손과 발을 비비 꼬면서 천천히 호흡과 같이 움직이는 동작인데 옆에서 보면 가관이다.
중국 여행을 가면 공원에서 여러 사람이 군무처럼 천천히 몸동작을 하며 음악에 맞추어 하는 운동이다.
이게 운동이 될까 하고 의문이 나는데 노인들은 천천히 하는 운동이니 괜찮을 것 같다.
태극권 교본을 사서 순서를 익히며 순서대로 끝까지 해야 된단다.
집사람이 배우는 이 태극권은 원조가 대만이다.
금년에 대만에서 태극권 세계 대회가 열리는데 참가에 의미를 두며 참석하겠단다.
시작한지 일 년 밖에 안됐는데 외국까지 간다는데 말리기도 뭣해서 가라고 하니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
신사동에서 연습하는 것 외에 교대앞 태극권 본당으로 까지 가서 추가 연습을 한다.
11월 21일부터 24일까지 대만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사람 혼자 출국을 하였다.
한국 참석자는 7명인 모양이다.
각 품위별로 참가를 하는데 집사람은 기본 품세에 출전한단다.
대만에서는 태극권 세계대회이니 신경을 썼지만 25개국 외국인 참석자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많지 않은 모양이다.
주로 대만사람들이니 외국선수들은 들러리 같다.
아무래도 외국선수들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게 되어 있다.
대회에 참가한 집사람은 자기는 7분 동안 품세를 틀리지 않고 잘하고 자기가 한 것에 대하여 만족한다고 한다.
경기가 끝나고 나니 점수를 매기는 심판관들이 잘했다는 싸인을 해 주었단다.
점수도 잘 나왔다고 좋아한다.
결과는 기본 품세이지만 상장을 타 왔다.
집사람이 대만까지 갔다 온 보람이 있다.
*핸드폰 분실
핸드폰 분실
스마트 폰 삼성 갤럭시 S5를 중국 태항산 여행가서 6월 29일날 잊어버렸다.
요즈음 세상에 성인의 필수품이 핸드폰이다.
옛날 백색 전화기와 일반전화기만 있을 때는 전화 연락이 하루가 보통이지만 핸드폰이 생기면서 전철 앞뒤 칸에서도 전화를 건다.
시간이동이 빨라져 활동하는데 는 좋지만 노인에게는 통신료도 부담이 된다.
핸드폰이 무선전화국에서 허가를 받아 개통한 차량에 안테나를 달고 아령만한 전화기를 받던 날이 엊그제다.
무선전화국 허가 없이 핸드폰이 손안에 들어오는 수준으로 발전하더니 순식간에 모바일 폰으로 진화하였다.
G2 폴더 폰은 핸드폰으로 모바일은 스마트 폰으로 알려지면서 카카오 톡이 탑재되고 나서는 전송사진이나 문자가 SNS상으로 번지며 사회의 커다란 핸드폰 문화가 형성되었다.
스마트 폰을 못하면 사회에 뒤처진 인간이 되는 기분이고 스마트 폰을 하자면 컴퓨터 하는 것같이 처음에는 쉽지가 않다.
이 스마트 폰에 모든 전화번호는 물론 사진 필요한 문자 신상 정보 등을 보관하고 활용한다.
핸드폰이 그렇게 간편하고 생활에 이로울 수가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이 스마트 폰 삼성 갤럭시 S5를 중국 태항산 여행가서 6월 29일날 잊어버렸다.
태항산 산악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오다 바지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버스좌석에 떨어진 것 같다.
여행버스를 갈아탈 때 핸드폰 분실한 것을 알고는 가이드에게 알리고 찾아달라고 하니 즉시 포기하란다.
중국에서는 한국 핸드폰이 인기라 주웠다 하면 바로 자기 주머니로 들어가고 모른 척 하는데 찾는 다고 고생만 하니 아예 포기하란다.
핸드폰을 잊어버리니 생활이 백지가 된 것 같다.
핸드폰에 의지하다 보니 친구나 거래선 전화번호를 알 길이 없다.
핸드폰 잊어버릴 것을 예상하여 컴퓨터에 백업을 해 놔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았나.
귀국 하자마자 핸드폰 대리점에 가서 삼성 갤럭시 S7 신형으로 구입하고는 아는 전화번호부터 입력하기 시작하였다.
IT가 세계에서 제일 발달하고 핸드폰 보급률이 가장 많은 곳이 한국이다
나도 생활하는데 핸드폰을 잊어버리고 나서 핸드폰의 위력을 재삼 확인 하였다.
*생일 잔치
생일 잔치
생일날에는 미역국을 먹는 것이 우리나라 생일날의 전통이다.
우리나라가 못산 후진국일 때 영양보충이라도 해줄 양으로 생일날에는 미역국에 고기반찬을 해주는 전통문화가 계속되어 왔다.
어린 시절의 내 생일날에는 집에서 부모들이 생일상을 차려주어 생일날에는 누구든지 다 그런 줄로 알았다.
군대 전역 후에도 생활이 궁핍했지만 생일날은 식구들이 챙겨주어 생일날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결혼하고 첫 번째 맞는 생일날은 신경을 써서 떡 벌어진 진수성찬의 생일상이 차려졌다.
결혼을 하고는 일가를 이루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하고 나 자신도 가장의 위치와 책임을 재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칠남매는 생일날만 되면 각자 생일잔치를 하여 집안 식구가 모두 모여 씨끌 벅적하다.
처음은 집에서 시작하든 생일잔치가 식당으로 옮겨지며 지속하다 보니 생일 선물이 봉투로 바뀌었다.
형제들이 나이가 들어 저 세상으로 가게 되니 이제 형제가 나까지 세 사람만 남았다.
내 생일은 형제는 물론 족하들 까지 모인다.
족하들이 자기 자식들 까지 데리고 와서 떠드니 생일에 생기가 돌며 생일잔치하는 기분이 난다.
핵가족 시대에 여러 식구가 모여 환담을 하고 노는 것을 친구들이 알고는 내 생일 잔치를 부러워한다.
여태껏 해 오던 생일잔치를 집사람과 작은 아들이 방법을 바꾸잔다.
생일날에 친척이 가지고 오는 봉투가 부담이 되니 초청을 하지 말고 우리식구끼리 식사만 하잔다.
아니면 식구끼리 생일날 여행을 가잔다.
집사람이 생일날 봉투 받는 것이 부담이 되니 친척을 초청하지 말고 우리끼리 식사만 하자고 하여 나는 단숨에 안 된다고 하였다.
여태껏 지켜오던 우리집안의 전통인데 큰 사유도 없이 변경한다는 것은 안 된다고 하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집사람과 작은 아들이 작당을 한 것인데 작은 아들이 나에게 귀띔도 안하고 진행한 것이 쾌심하기 짝이 없다.
나는 우리집안의 전통을 계속 지켜나가기 위하여 전같이 생일을 하라고 하였다.
단지 이번에는 사전에 친척들에게 봉투는 가지고 오지 말라고 사전 통보하라고 하였다.
생일을 맞으며 마음이 전에 같이 명쾌하지가 않다.
생일이 동자 섣달에 있고 생일 지나면 곧바로 구정이 닥치니 친척들을 연거푸 만나게 된다. 만나는 텀이 짧으니 생일을 축소하자는 의미인데 자식의 입장에서는 내 생일이 은근히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빗물받이 공사
빗물받이 공사
단독 주택을 다가구 주택으로 재건축을 하여 피로트 5층에 엘리베이터도 놓고 건물을 신축한 새 기분에 5층에서 기분 좋게 살고 있었다.
1층 간이창고에 이유도 없이 곰팡이가 끼고 사진이 손상되어 상하수도에 문제가 있나하고 살펴보아도 이상이 없다.
장마철에는 석조를 깔은 1층 돌바닥에 이슬이 비친다.
장마가 지나고 보니 피로트 1층 주차장 벽에 땅에서 물기가 올라와 마른 흔적이 석조벽바닥에 하얀 백화현상이 나타났다.
건물공사를 한 예림 이사장에게 물으니 건물 밑에 물이 많이 흘러 보강공사를 하였는데 물줄기가 방향을 바꿔 그렇다고 한다.
계속 살피고 연구한 결과 빗물이 도산공원에서부터 흘러 윗집을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 밑으로 흐르다가 물 양이 많은 장마철에 우리 집 경계선의 돌 틈으로 빗물이 새어나와 도로 위로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빗물이 돌 틈으로 새어나와 도로 위로 계속 흐르니 여름에는 조금씩 흐르는 물로 도로에 이끼가 끼는 현상이 나타나 보기에 흉하게 되었다.
우리 집 상하수도에서 나오는 물로 착각하기 쉽게 되었다.
빗물받이를 하기 위하여 강남구청 주택과 공사과 하수과를 거처 빗물은 취수과에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도로에 빗물받이를 해 달라고 취수과 담당 주무관과 여러 번 통화 끝에 출장을 나와 사진까지 찍으면서 상수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내가 새로 지은 집이고 절대 아니라고 항변을 하였다.
사무실에 들어가 상의 해 본다고 하는 것이 연락이 없어 전화를 여러 번 해도 하세월이다.
우리 집 앞 도로가 사유지라 사유지내 노면수는 토지주에 관리책임이 있다며 구청에서는 사유지에 공사를 못 한다고 한다.
그러면 사유지 도로에 구청에서 상하수도 공사나 가스공사 도로포장 공사는 어떻게 했느냐며 반문하였다.
공무원과 옥신각신하다 못 한다는 공문이라도 보내라고 하였다.
여름에 시작된 것이 11월에 공사 못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구청에서 도로 관리하는 규정이 어떤지는 모르나 도로를 개인이 관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공사인부를 불러 집 경계선을 파 보니 물이 별안간 도랑처럼 흐른다.
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PVC 관을 박고 콘크리트 도로를 뚫어 하수관에 연결하여 영구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집에서 물이 빠져나가니 속이 후련하고 집에 물이 차는 근심이 사라지니 공사비는 들었지만 만사가 즐겁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