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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바랑을 앞에 놓고 이것저것 챙기다 말고 창 밖에 듣는 빗소리에 여느 날과 달리 구슬픈 생각조차 일어나는 9월29일 밤. 행장을 어리러 놓은 채 책상을 향해 멍하니 앉았다가 말고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홍조(鴻爪) 두 글자입니다. 기러기가 멀리 날아가면서 발톱으로 눈 위에 자국을 내어 제 지나간 곳을 기표해 두어도 뒷날 다시 와보면 눈은 다 녹고 발자국은 스러져 어딘지 알 길이 없는 것이라 옛사람이 일찍 자취 없음을 일러 기러기 발톱에 비겨 말했습니다. 이제 저 설악 명산을 찾아가는 나도 어리석어라 한 게 홍조의 나그네가 아니오리까. 그러면 누가 내게 물을 것입니다, "자취 없는 걸음을 왜 짓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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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자정을 넘기며 후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을 왜 해야 하는가 고민한 것 같습니다.
<개념도를 클릭해서 보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9월30일(1일차)
서울에서 소양강까지
<1933년 10월20일 금요일, 동아일보 다섯 번째 연재가 실린 기사입니다.>
오전8시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인제로 출발합니다.
오후 1시경 춘천에 도착해 2시간 정도 보낸 후 3시경 인제로 가는 차에 오릅니다.
차를 배에 실어 소양강을 건너 후 속력을 내어 달립니다.
우수산을 지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전과 청평산을 지나니 청평사가 점점 멀어지고, 약수로 이름난 추전리를 지나고, 구암교를 건너 도촌을 지나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도로지라는 곳, 12고개를 넘어 양구와 인제를 경계하는 신월령을 넘게 되니 인제가 40리라고 합니다.
무사히 인제에 도착하니 오후7시로 평소보다 1시간이 늦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여관에 들으니 그토록 내리던 비가 멈추고 밖으로 나가 주변산을 봅니다.
동쪽으로는 비봉산, 남쪽으로는 팔봉산, 서쪽으로는 아미산, 북쪽으로는 기룡산(起龍山->옛 산 이름은 복룡산,伏龍山)이 자리 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월1일(2일차)
-인제에 머물며 휴식을 취한 듯 합니다.
남교리에서 복숭아탕-1396봉-안산-치마바위 좌릉-못재마을까지
10월2일(3일차)
자동차로 인제에서 남교리로 출발합니다.
일행은 길안내자로 심메마니, 산짐승(곰, 멧돼지, 범)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포수, 경승을 찍을 사진사가 동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행은 1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새벽에 인제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내린천과 인북천이 만나는 합강의 정자가 있는 합강정으로 지나고 세화에서 오는 천과 북천이 만나는 합수점을 지나 원통을 지나 남교리로 들어섭니다.
지리곡의 산주소
<1933년 10월25일 수요일, 동아일보 아홉 번째 연재가 실린 기사입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남교리에서 큰 내(북천)을 건너 계곡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들어가는 산골을 ‘지리실’이라 부르는데, 한문글자로는 ‘지리곡(支離谷)’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지리실(支離室)’이라고까지 쓴 데도 있습니다. 차츰 멋진 산수미를 더 하면서 오관과 육정의 맹활동을 요구하는 믈소리와 산색은 너나없이 모든 이의 얼굴위에 즐거운 웃음을 재촉합니다. 앞서 가는 심메마니가 한곳을 가리키며, ‘저것은 첫 구융소, 그 다음 것은 둘째 구융소’라 하는 말에 바라보니, 말구유((馬槽) 같이 바위 흠이 패인 것이 둘이 연(連)하여 이층의 작은 폭포를 지었습니다. ---중략--- 두 언덕에는 울창한 수림이 낮이라도 귀신 보일듯한데, 얼마쯤 더듬어 오르다가 또 셋째 구융소를 보고서는 <안돌이바위>라는 것을 안고 돌아가게 됩니다. 120도쯤 경사진 넓고 큰 반석에는 오랜 창태(蒼苔)로 옷을 입혀서, 한발 아차하면 눈깜빡할 새에 물 속 권속(眷屬)을 만들 곳인데, 다행히 손으로 안고 붙어 돌아갈 바위가 놓여 있어 ‘네 목숨은 내가 붙들어 주마’하는 바람에, 하마 끓일 뻔하는 구경욕심을 다시 살려가게 됩니다. 우리는 떨 듯이 하며 한 사람이 거의 2~3분씩의 시간을 걸려, 이 고맙고도 밉고 밉고도 고마운 안돌이바위를 안고 돌아가니 다시 넷째 구융소가 있습니다. |
위 본문을 보면 계곡의 이름부터 달리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계곡은 탕숫골인데 현재는 흔히 십이선녀탕계곡으로 부르며 지도에도 십이선녀탕계곡으로 명시하기도 하는데 설악행각에서는 초입은 지리골로 기록하고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설악문을 지나면서부터 탕숫골이 되며 두문폭포 위는 두문골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제당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력한 곳으로 설악산국립공원 남교리탐방지원센터자리>
<산제당이 있었을 것 으로 2번째 생각되는 곳으로
설악산국립공원 남교리탐방지원센터(위)에서 100m지난 지점 모퉁이 >
지리골?
십이선녀탕국공초소에서 15분정도 지나면 곧은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곳에서 계곡은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직진으로는 지계곡이 있는데 이를 곧은지티골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지리골과 지티골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설악사랑 블로그를 운용하는 맘짱님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노산선생께서 기록한 지리골이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지티골을 하나로 연계해 본다는 글을 썼습니다.
<입구에서 15분 들어가 곧은교가 있는 곳에서 곧은지티골입구입니다.>
지리골로 들어서 잠시 후 돌무더기가 있는 산제당을 지난다고 했으니 지금은 없는 산제당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십이선녀탕 국공초소자리이거나 국공초소를 지나 약100여m지나면 모퉁이, 이정목이 있는 곳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후 구융소가 4개가 연속 나옵니다.
십이선녀탕계곡을 들어서면 늘 느끼는 것이 안내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악산국립공원은 오래전부터 쌍용폭으로 기록되어오던 곳을 노산선생께서 용손폭포, 용아폭포로 부르며 시를 쓴 후 안내판에 버젓이 용손폭포, 용아폭포라고 기록하면서 탕숫골계곡에는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명경이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안내판을 세워도 될듯한데 안내판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설악행각에 연속으로 구융소가 나오는 것으로 명소가 시작되는데 소나 말의 구유와 같이 넓적하게 파인 곳이나 돌확이 생긴 것을 뜻하는데 너무나 여러 곳이 있어 어느 곳을 뜻함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넷째 구융소를 지나서, 산주소(散珠沼)라는 한 누운 폭포를 만나니, 이야말로 위험 속에서 맛보는 달콤한 위안이 나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여기 와서는 비교적 넓고 편평한 바위가 순하게 엎드려서, 기대고 눕기를 기다리는 듯함이 위험을 지난 우리에게는 더한층 느껍습니다. ---중략--- 돌확에 아람 같은 덩이를 지어 흘러내리는 저 산주소의 경치는 실로 금강(金剛)의 산주연(散珠淵)과 이름과 실상이 같은 것입니다. |
4번째 구융소를 지나 산주소라는 명소를 기록합니다.
<안돌이 바위가 있는 구융소라고 추정되는 곳>
<무명와폭이나 무명담이 너무 많아 어느 곳이 구융소인지 산주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산주소(散珠沼)라~
일자로 된 와폭으로 다단으로 된 와폭같으며 층층이 떨어지며 부서지는 물방울이 마치 구슬같다고 붙여진 듯한데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일까?
처음에는 설악문으로 추정하는 곳이 안돌이 바위가 있다는 구융소이고 검정띠를 두른 무명와폭이 설악문으로 생각했었는데 뭔가 퍼즐이 맞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진을 보면서 글과 대입하며 보니 안돌이바위라고 생각한 곳이 설악문이 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산주소의 위치도 의문이고 처음에 설악문으로 생각했던 검정 띠를 두른 무명와폭은 설명이 없어 의아했는데 모두가 헷갈리다보니 노산선생께서 설악문과 산주소의 순서를 바꾸어 잘 못 기록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날 산행에서 산주소의 위치와 안산에 대한 기록이 없음이 미스터리입니다.
설악문 들어서서
<1933년 10월26일 목요일, 동아일보 열 번째 연재가 실린 기사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산주소 다음에 등장하는 명소가 바로 설악문입니다.
이곳 설악문을 지나면서부터 탕숫골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제까지는 지리골로 지나온 셈입니다.
산주소(散珠沼)를 떠나, 개울 오른편 길로 돌길을 더듬어 가느라니, 커다란 두 개 암석이 밑은 따로 놓이고 머리는 서로 맞대어, 천작으로 문을 이룬 것이 있는데, 이것을 설악문이라 합니다. 지나온 수석경치도 비범한 것이었으나, 참으로 설악 탐승은 이 석문을 들어서야만 시작된다 하여, 특히 이것을 설악문이라 한 모양입니다. 골짜기 이름으로 지리실이라 부르는 것은 남교리에서 약40분 동안 걸려서 오는 이 설악문까지의 오리를 이름이요, 이 석문을 들어서서부터는 따로이 탕수골(盪水洞)이라고 부릅니다. |
설악문(雪岳門)?
생소하기만 합니다.
설악문이라는 생소한 명소를 듣고 사진들을 확인해보지만 확실한 곳은 알 수가 없지만 2곳이 추정지가 있습니다.
응봉출렁교 5분전에 사면을 지나다 보면 아주 좁게 보이는 무명폭포가 있는 곳과 조금전 산주소가 아닐까 생각했던 검은 띠를 두른 무명와폭 2곳입니다.
<위 사진은 설악사랑 맘짱님이 설악문 답사를 위해 계곡치기로 오르며 찍은 설악문 추정지입니다.>
<제가 설악문으로 추정한 무명폭으로 맘짱님 의견과 일치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좁게 보이는 무명폭포 이곳을 안들이바위가 있는 구융소 3번과 4번으로 생각했는데 설악문을 아무리 찾아봐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자료를 얻고자 설악사랑 맘짱님 블로그를 들어섰는데 오래전 맘짱님은 설악문을 확인하고자 지인2명과 함께 계곡치기로 답사를 하였는데 누구나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맘짱님도 제가 설악문 추정지로 보는 곳과 일치했습니다.
설악문 추정지는 응봉출렁교 5분전, 사면을 지나며 내려다 볼 수 있는 무명폭으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멀리서 볼 뿐인데 맘짱님 일행은 노산선생께서 표현한 그대로 계곡으로 지나며 확인했는데 이곳이 유력한 설악문으로 본 것입니다.
설악문에서 복숭아탕 구간
설악문 추정지에서 5분을 지나면 응봉출렁교를 건너게 됩니다.
응봉출렁교를 건너 5분 정도 지나면 계곡과 잠시 떨어져 지나다가 오름길을 오르며 큰 다리를 지나는데 다리 아래계곡은 거대하고 정말로 경관이 좋은 와폭이 있습니다.
<위2장의 사진은 계곡으로 내려가서 본 풍경이고 맨 아래 사진은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제가 산주소(散珠沼)일까? 아니면 설악문일까? 생각했던 곳입니다.
다리 위에서는 명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데 아래 내려가면 위용과 희귀의 가치를 알 수 있는데 노산선생은 이곳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며 맘짱님도 아무 기록이 없었는데 경사진 긴 와폭에 중간에 돌확이라고 해야 하는지 담이라고 해야 하는지 넓게 패인 곳도 있으며 희귀한 것은 흰 암반 가운데는 아주 검은 돌이 폭2~3m 길이 약25~30m가 띠를 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리가 놓인 위치의 계곡 양옆 바위도 가까워 이곳이 처음에는 설악문 다음에는 산주소로 생각했던 곳입니다.
이러한 명소를 노산선생은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인데 산주소가 설악문 이후인 것을 이전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등로는 그리 어렵지 않게 5분여 이어집니다.
한 구비 돌며 눈앞에 응봉폭포가 나타납니다.
아~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저도 맘짱님에게서 커닝한 내용입니다.
이 계곡을 지나며 이 폭포를 볼 때마다 응봉폭포라고 생각했고 단 한 번도 응봉폭포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맘짱님도 이러한 생각은 마찬가지였는데 모두 오답입니다.
그러면 이 폭포는 무슨 폭포?
정답은 승폭 또는 승폭포라는 것인데 노산선생의 본문을 봅니다.
석문을 떠나, 약30분 쯤 지난 때에 어디로선지 찬 기운이 코밑을 찌르고 스치면서, 귓전을 뚫어 터질듯이 내려찢는 물소리가 한가슴 밀어 닥칩니다. 이것은 물을 것 없이 폭포이지만, 폭포라고 왜 무시무시한 위협부터 먼저 주는고 하였더니, 들으니 불길한 내력이 있는 폭포라 그러한가봅니다. 백여 척이나 되는 거무스름한 석벽으로 떨어지는 수량조차 무섭게도 많은 폭포인데 옛날에 이 산에 있던 한 늙은 중이, 어느 가을날 달 밝은 밤에 오히려 세상 근심을 울다 못해서 시비 고락을 다 잊어버리려고 이 폭포에 떨어져 그 몸을 부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폭포 이름도 승폭(僧瀑)이라 했다 합니다. |
여기서 석문이라 함은 설악문을 뜻함인데 설악문에서 약30분 거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저의 경우는 20분이 걸렸는데 저는 검은 띠를 두르고 있는 무명와폭에 내려서서 5분 이상 경관을 보느라 20분이 걸렸고 노산선생께서는 당시 길이 안 좋아 그리 걸렸을 듯합니다.
<노산이 찍은 사진으로 동아일보에 실린 승폭으로 우리들은 이곳을 응봉폭포라고 잘못알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응봉폭포로 알고 지나던 이 폭포는 응봉폭포가 아니고 승폭포입니다.>
승폭(僧瀑)과 승소(僧沼)?
늙은 중이 이곳 폭포에서 투신한 후 이름이 지어진 듯합니다.
승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노산선생은 즉석에서 시를 한 수 읊습니다.
가을날 달 밝은 밤을 저 노승 근심에 싸여
깊은 이 산을 이리 저리 헤매다가
이 소에 그 몸을 던져 다 잊으려 하옵던가.
늙도록 울어 살고 눈물 아직 또 남으니
천번 헤어보고 만번 남아 생각하되
산다는 인생 일생이 그렇게도 슬프던가.
지금 저 물 속에 보이는 중의 환상
상기도 근심 그득한 그 얼굴 그대롤네
가서도 인간 번뇌는 벗기 저리 어려운가.
죽는다 산다 함이 같은 줄을 아시던들
구대 늙은 몸이 여기에야 들었으리
비노니 물속에 드신 혼이 부디 편안 하시과저.
이제까지 응봉폭포라고 알았던 폭포가 승폭포라면 그러면 응봉폭포는 어디인가?
이곳 탕숫골을 지나는 사람들 모두 이곳을 응봉폭포라고 기록했는데.....
다시 알아 보기로 하고 승폭을 지나 오름이 시작됩니다.
칠음대와 구선대
<1933년 10월27일 금요일, 동아일보 열한 번째 연재가 실린 기사입니다.>
좌측으로는 어마어마한 암반이 길게 이어집니다.
중간에 폭포도 있는 이 암반은 100m는 훨씬 더 되니 150m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나며 이 암반은 왜 이름이 없을까? 생각했었는데 이름이 없는 게 아니고 이름이 있는데 알지 못하고 지났던 것입니다.
노산선생의 원문을 봅니다.
승소에서 한 십오분쯤 지난 때에, 넓고 큰 반석위에 이게 무슨 기관(奇觀)입니까. 2칸 쯤의 넓이로 또 꽤 두꺼운 물이 일곱 번 굽이쳐 흐르는 양은 손도 안대고 보는 이의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합니다. 이름조차 칠음대(七音臺) ! 세상의 많은 악성들은 <도,레,미,파,솔,라,시> <궁,상,각,치,반치,우,중한>의 칠음을 짧고 길게, 받고 넘긴, 온갖 곡조의 본원이 알고 보니 여기입니다그려! 천사람 우륵과 만사람 베오토벤을 한데 뭉친, 그 어떤이를 천만 사람이 다시 모아, 그 위대, 숭고, 청아, 명랑한 대작 대곡을 내어놓게 할지라도, 이 칠음대의 들을수록 신비한 자연의 묘한 음악을 따를 수는 없을 겝니다. |
그렇습니다,
<무명 암반으로 생각하며 지났던 곳인데 아주 멋있는 이름이 있었네요, 일곱번 굽이쳐 소리를 내며 흐른다고 칠선대!!!>
일곱 번 굽이쳐 흐른다고 해서 칠음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암반은 거의 직선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7번 구비 친다는 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인데 의심스러운 것은 다음 나오는 구선대와 서로 바꾸어 기록하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제 주관적인 생각이고, 이곳 칠음대는 단풍나무가 암반을 덮고 있어 가을철 단풍이 들면 이 계곡에서 제일 멋있는 풍경을 지닐 것 같습니다.
노산선생께서는 명경 칠음대를 보고 또 시를 한 수 읊습니다.
칠음대 신비한 곡조 자세히 듣노라니
천만 음 한 곡조요 한 곡조 천 만음이
조화옹 크신 예술을 분별하기 어려워라.
칠음대를 지나 약3분을 지나면 계곡을 가로지른 사장교가 나오는데 함지박출렁교라고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함지박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약12~13분 오르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전망대에서 마주 보이는 계곡이 작은함지박골, 두문폭포 위 우측 계곡이 큰함지박골이라고 부르는데 함지박골이 있다고 헤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은데 노산선생의 행각에서는 함지박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함지박출렁교를 건너면 잠시 뒤 긴 암반 V곡이 나오는데 암반 V곡을 우측에 두고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다리를 건너 계곡을 가로지르는데 다리위에서 암반 V곡 아래와 위를 보면 이 또한 명경인데 저는 이곳의 풍경을 보고 이렇게 좋은 곳에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며 다리 위에서 한동안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그러면 이리 좋은 풍경을 보고 노산선생은 어떻게 표현했으며 이곳의 명소는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본문을 봅니다.
이 칠음대를 지나 십분쯤 더 가니 이것은 또 무슨 기이한 중에 기이한 경관입니까. 칠음대와 그 성질은 같으면서도 그 굽이친 것이 어딘지 모르게 좀 더 멋있어 보이는 그것이 바로 아홉 굽이이나 굴기 때문에 이것은 이름도 맞추어 구선대(九仙臺)라 합니다. 이 칠음대의 일곱 굽이나 구선대의 아홉 굽이가 하나요 둘도 아닌 큰 반석위에서 연쇠극을 벌인데 있어서는 더한층 경이의 눈을 힘껏 떠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구선대의 맑고 빼어난 품격! 구선대의 높고 깨끗한 자태! 신비와 황홀의 지극히 화사한 면사포를 쓰고, 둥근춤, 둘이춤, 꼬불춤들을 갖추갖추 보이는 예술의 전당! 글로 쓰자고 해서 물을 향수라 함이 아니라, 향수로 아니 볼 수는 없는 이 물의 향기로움이야말로 분명한 향수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발을 씻는다던가, 갓끈을 씻는다는 따위는 그나마 건방진 말이 아니오리까. 통째로 몸뚱이를 던져 이 향기로운 흐름에 목욕함이 진실로 옳을 것입니다. 어디로선지 불어오는 바람은 구선(九仙)의 치맛자락을 날립니다. 아니, 이것이 구선의 춤추는 치맛자락에서 생기는 향기로운 바람이 아니온지요. 참 좋거든요. 어허, 참 좋거든요! 반석(盤石) 길에 지팡이를 던져놓고, 바보 같이 입을 벌리고 앉아 멍하니 보옵다가, 구선 따라 활개를 들고 배운데 없는 춤을 제멋대로 추고야 마는 곳입니다. 참 좋거든요. |
노산선생께서 또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아홉 선녀 너훌 너훌 저마다 다른 춤이
둥근춤 둘이춤에 다시보니 꼬불춤이
인간에 못 보는 춤을 여기 와서 보는구나.
저 사람 저 무슨 춤 저리도 우스운고
허허 모르시거든 가만히나 서 계시오
구선녀 갈라 추는 춤을 모둬 추니 그렇구려.
이곳 명승의 이름이 구선대였습니다.
칠음대 그리고 구선대!
이리 좋은 이름과 유래가 있음에도 어찌 설악산국립공원은 안내판 설치에 인색한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입니다.
제도 이곳을 지나며 이곳 풍경에 취해 다리위에서 한동안 머물다 지났던 곳입니다.
본문을 보면 노산선생께서는 구선대의 굽이치며 흐르는 물을 보고 아홉선녀가 춤을 추는 듯한 감정에 사로 잡혀 배우지도 않은 춤을 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기쁜 마음을 "허허 좋습니다."를 3번이나 반복 한 것을 보면 무척 기뻐던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6~7분을 더 오르면 다시 계곡을 가로지르는 큰함지박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곳에 엄청난 비경이 숨어 있는데 저도 노산선생의 글을 읽으며 집필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설악사랑 맘짱님의 글을 보고 제 우둔함을 탄식했습니다.
구선대 다리를 지나면 계곡과 등로가 멀어지다가 6~7분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계곡이 좌측으로 휘돌며 폭포를 하나 숨기고 있는데 바로 응봉폭포라는 것인데 물론 저도 이곳을 몇 차례 오르고 내려섰지만 알지 못하는 곳입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워낙 험난한 길이라 발 딛고 갈 데를 조심하기에 좌우 살필 여유도 없습니다마는 그래서 잃어버린 경치도 많으려니와 그중에 길잡이가 내 소매를 당겨주지 않았던들, 참말로 눈뜬 소경의 한탄을 못 면할 뻔 한 것은, 구선대에서 십오분쯤 올라온 때에, 계곡의 본류에서는 조금 떨어진 저편 왼쪽벽 위에 또 한 번 상쾌한 응봉폭(鷹峰瀑)이 내려질리는 그것이외다. 이 탕수동으로 몇 번 다닌 이곳의 산중 사람들도 이 응봉폭은 못 보았노라 한다는 그만큼 경치치고는 불우한 경치이거니와, 세상에도 매양 불우한 자가 실로 그 잘나지 않은 자 없는 격으로, 여기 이 불우한 경치 응봉폭도 결코 남 뒤질 어른이 아니십니다. 폭퍼의 이름은 그것이 응봉 아래 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요 길이도 실로 몇 백 척을 헤아림직한 승경입니다. 그러나 남들 다 모인 자리에서 외로이 빗겨나 저 혼자 따로 서있는 만큼 불우하여 잘 못 입고, 잘 못 먹고, 노심초사한 탓이 온지, 수량은 여윈 품입니다. 그러나 사람도 품위 높은 선비는 그 몸이 비대하지 않은 것 같이, 오히려 그 청수한 여윈 품이 어찌 보면 외롭고 슬픈 것 같아도, 다시 보면 단단한 기개가 사람의 심장을 은(銀) 화살로 쏘는 것 같습니다. |
<이 사진은 설악사랑 맘짱님이 2009년에 찍은 응봉폭포입니다.>
노산선생께서 등로를 따라 갈 때 길잡이가 소매를 잡고 응봉폭포가 왼편에 숨어 있다고 알려 주었던 모양입니다.
예전에도 지금의 등로와 같았는지 응봉폭포는 등로를 벗어나 있어서 당시 토박이 산꾼들도 응봉폭포를 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도 아직 응봉폭포를 보지 못한 상황이지만 기록을 보면 폭포의 물골이나 수량이 빈약한 듯합니다.
이렇게 빈약한 응봉폭포를 보고 "나는 이제 ‘불우’의 슬픔을 노래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며 긴 폭포지만 수량이 적은 폭포에 맞춰 시를 읊습니다.
까마귀 뭇 까마귀 내로라 다투어도
청강에 숨어 뜰지언정 백로 아니 좋을런가.
세상에 이름 날려 내로라 떠들어도
파묻힌 천재 지사가 더욱 아니 높으신가.
잘나고 품도 좋아 저리 시원하시구나
불우한 경치마라 우리 다시 뵈옵세.
큰 충격입니다.
이제껏 응봉폭포라고 알았던 폭포는 승폭포이고 응봉폭포는 숨어 있어 위치도 모르고 지났던 것입니다.
설악사랑 맘짱님도 이 글을 읽고 이제까지 몰랐던 응봉폭포를 찾아 나서 확인을 했다고 하여 맘짱님의 응봉폭포 사진을 빌려와 실었습니다.
다음 탕숫골을 가게 되면 아무리 비바람이나 강한 추위가 있는 악조건이라고 해도 응봉폭포를 꼭 보고 와야 할 것인데 물이 많은 여름이 제일 좋을 듯합니다.
다시 큰함지박교로 이어갑니다.
특유한 탕의 경관
<1933년 10월28일 토요일, 동아일보 열두 번째 연재가 실린 기사입니다.>
큰함지박교를 건너서 약100m 오르면 전망대가 있습니다.
맞은편 계곡이 있는데 이 지계곡이 작은함지박골로 서북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다단폭과 큰 협곡 그리고 아주 우람한 폭포가 있는데 우람한 폭포는 평소에는 수량이 적어 폭포로서의 위용을 느끼지 못하는데 장마가 진 다음이면 장관을 이룰 것 같습니다.
노산선생께서는 이곳은 오르지 못했으니 평하지도 않고 지나쳤으며 이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복숭아탕에 도착합니다.
노산선생께서는 복숭아 탕에 도착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함을 ‘조화(造化)의 고심(苦心) 역작(力作)’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였으니 본문을 보겠습니다.
응봉폭에서 약 25분쯤 오르니, 금시로 이 산중에 무슨 큰 난리가 일어난줄로 속아보도록 긴 폭포 큰 폭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묻지 않아도 이 골짜기에 군림하신 그 옥좌적 존재일시 분명합니다. 과연 이 골짜기를 탕수동이라 한 <탕>(盪) 그것이 여기 이것입니다. 저 남교리에서 20리를 상거한 이곳에서부터 이른바 <탕>이란 게 시작됩니다. 폭포 아래 들어서자, 한 눈에 들어오는 3번 꺾인 큰 폭포 그러나 실상인즉 따로따로 큰폭포가 연속된 것인 이 보기 드문 장관! 그리고 폭포 아래 괴인 물은 어디서고 대개는 담(潭)이니 연(淵)이니 하지마는, 여기서는 특별히 <탕>(盪)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글자 그대로 한 반석이 둘러 패어 큰 확이 된 때문이거니와, 과연 이 탕이야말로 이곳 특유의 경치입니다. 그래서 폭포(瀑布)도 좋건마는, 폭포는 이름조차 없어지고, 다만 탕의 이름뿐입니다. 독탕(甕盪)이라 북탕(梭盪)이라 무지개탕(虹盪)이라 하고, 폭포는 각기 끼어 들어가 행세를 얻어하는 셈입니다. 폭포가 없으면 탕이 없을 것으로 보아서는 주객전도라 하겠지마는, 탕 때문에 폭포가 이름난 걸 따지면, 탕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폭포도 그리 서러운 것은 없겠습니다. ---중략--- 그 같이도 천만년 긴 세월동안 파낸 이 탕은 그래 필경 누구의 목욕을 위함이리까. 보니 사람도 이 탕 속에 들기만 하면 살아나올 생각은 아예 말아야겠고 또 들으니 짐승이라도 빠지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니, 과연 이 탕은 무엇을 위하여 생김인지요. |
<1933년 10월28일토요일, 동아일보에 실린 복숭아탕 사진입니다.>
<복숭아탕 전망대에 있는 안내판으로 용탕과 북탕(복숭아 사(梭)를 써서 사탕)을 하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 글에서 보면 남교리에서 계곡으로 들어서서 이곳 복숭아탕까지 20리길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에야 눈대중으로 거리측정을 했으므로 길이 험하고 힘드니 대략 20리길이라 했는데 20리라면 8km인데 제가 GPS로 측정한 거리는 약4.8km로 시오리도 되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 이 광경을 목격하고 너무 신비스럽게 느꼈는데 노산선생께서도 적잖이 놀라고 흥분 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폭포 아래 고여 있는 물을 담(潭)이나 연(淵)으로 부르는데 이곳은 탕이라고 부르는 건 폭포가 없이 넓은 반석에 확이 생긴 것이므로 탕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곳에서는 폭포보다 탕이 더 우선시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화의 고심 역작
<1933년 10월31 일 화요일, 동아일보에 열세 번째 실린 기사입니다.>
그리고는 조물주가 탕을 파 놓고 짐승이나 사람은 들지 못하게 하고 옥수와 구름이 쉬어 가는 곳으로, 떨어지는 낙엽이 쉬어 가는 곳으로 적으며 사람으로 태어나 탕 속에 들어가지 못함을 탄하고 있으니 이러합니다.
천만년 큰 공 들여 탕을 여기 파내시고
사람 짐승을 다 못 들게 하시면서
눌 위해 이 맑은 옥같이 맑은 물을 밤낮 괴어 두시는고.
저 하는 해와 달이 먼 길 가올 적에
이 탕에 잠깐 들어 쉬어 가는 곳이온지
날아가 해 달이 되어 한 번 굽어 봤으면!
날으는 구름 송이 떠오고 떠가다가
이 탕에 몸을 잠가 씻어 저리 희어졌네
내 몸도 구름 되어 씻어보고 싶구나.
복숭아탕이 있는 3개의 탕을 보고 위로 올라가니 통바위로 되어 있는 곳에 길이 없으므로 넓은 반석을 더듬어 올랐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엉금엉금 기어오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길이 험함을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을 보자니 눈을 떠야겠고, 눈을 뜨자니 손발이 떨리고, 손발을 안 떨려면 애초 올라갈 생각은 그만 두어야겠고, 기어이 구경은 해야 하겠으니, 병신은 아니건마는 사지를 떨어대는 중풍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첫 탕 아래서 한꺼번에 볼 수 없던 3탕을 위에 와 내려보니, 첫 탕인 독탕은 독처럼 생겼고, 그 다음 북탕은 끝이 빤 것이 더 할 나위 없이 북(梭)인데, 또 그 다음 ‘무지개탕’은 어떤 모양에 견줄 무엇이 없으므로, 그 긴 폭포에 무지개가 움직임을 가져다 탕 이름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
옆으로 우회하여 3개의 탕이 있는 위에서 내려다 보니 탕의 형태가 달리 보이는 듯 했는지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독탕, 북탕, 무지개탕이라고 칭했는데 독탕은 독, 옹기, 항아리를 뜻하는 옹기 옹(甕)를 써서 옹탕이라고 했는데 위에서 보니 독처럼 생겼다고하고, 북탕은 복숭아 사(梭)를 써서 사탕 즉, 복숭아탕이라 했는데 위에서 보면 빨갛게 보이는지 체험을 하지 않았는데 딱 복숭아라고 했고, 또 다른 한 탕은 무지개 홍(虹)자를 써서 홍탕이라 했는데 물안개로 인해 무지개가 생겼나 봅니다.
여기서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제도 그렇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아래서 3번째 탕을 복숭아탕으로 알고 있는데 3탕 중 가운데 있는 탕이 복숭아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이 이어집니다.
세 번째 탕을 지나서도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역시 같은 종류의 탕이 그대로 연속적으로 다섯이 더 있습니다. 이 다섯 탕도 아래 세탕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습니다마는, 무슨 불행으로인지 이름이 없고, 다만 그중에서 제일 윗 것을 용탕(龍盪)이라 할뿐입니다. 권소유(權小遊)의 기문에도 탕의 이름을 분명히 적지 않음을 보면, 본시부터 무명씨(無名氏)로 살아오신 모양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조그마한 돌맹이 하나에도 이름자가 둘씩 셋씩 붙는데, 이런 신령스러운 폭포와 탕에 함자가 없다니? 하겠지마는, 다시 헤아리면, 인간의 잡된 지식으로부터 무어라고 불리움을 받지 않은 그것이 오히려 더 깨끗하고 더 빛남이 아니오리까. 사람도 이름이 높이 들려 떠들썩한 이보다 촌구석에 명색없이 살아가는 이 중에 더 훌륭한 이가 있음을 봅니다. 여기 이름없는 탕이야말로 바로 그격이라 하겠습니다. 뒤에 오는 이들에게 전하는 말씀----- 「여기 이것만은 구태여라도 영원히 무명씨로 그냥 모심이 어떠하니이꼬」 |
십이탕십이폭이라고 전하는데 막상 답사하고 나니 8폭8탕이라 하며 8탕 중 독탕, 북탕, 홍탕, 용탕 과 같이 4탕은 이름이 있고 4탕은 이름이 없다고 하면서 후대에게 4탕의 이름을 짓지 말기를 권고하명서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이대로 좋으이다 이대로 보시오들
사람이 짓는 이름 천부당 만부당을
생기신 제대로 두고 건드리지 맙시다려!
노산선생께서는 이름이 없는 4탕에 대해 이름을 짓지 말라고 권고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이리 확고하던 마음은 다음날 쌍용폭포를 보고 시한 수를 읊으니 이게 오늘날 없던 이름을 지은 격이 되어 쌍용폭포 아래 있는 폭포는 쌍용폭포의 아들이라 해서 용아폭포, 용아폭포 아래있는 폭포는 쌍용폭포의 손자가 된다 해서 용손폭포로 불리고 있으니 모순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초 탕인 독탕에서 마지막 탕인 용탕까지 15분이 걸리며 8폭8탕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저도 이곳을 지나며 12탕을 억지로 맞추려고 해 보았는데 그러자면 생기다가 멈춘 곳, 아주 얕은 곳을 쳐야할 것 같아 이상함을 느꼈는데 노산선생께서도 이에 대해 8폭8탕이라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연하기를 이곳 토박이들은 12폭12탕이라고 하고 선답했던 소유 권상용은 5폭10탕이라고 기록했다고 하며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노산선생은 8폭8탕으로 기록한다고 심경을 적습니다.
상암지나 연현에
<1933년 11월02일 목요일, 동아일보에 실린 열네 번째 기사입니다.>
본문이 이어집니다.
맨 위 용탕에는 폭포 뒷벽에 이른바 용혈이란 것이 시꺼멓게 뚫렸는데,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이 비를 비는 곳이라 하는 만큼, 이곳을 단순히 경치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거룩한 존재로 알아왔던 자취도 살필 수 있겠습니다. 그는 어쨌든 탕 곁 바위 위에 앉아 보니, 과연 급히 떨어져 부서지는 물이 탕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히려 다시 떨어지기를 바삐하는데, 남은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져 맑고 빛나는 꽃가루를 흩여 사람으로 하여금 술 아닌 술에 취하지 않은 취중으로 끌어들입니다. ---중략--- 탕 속에 괸 깊이 모를 시퍼런 물을 들여다보니, 용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용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도 두꺼운 바윗돌이언만, 마치 유리 조각이나 디디고선 것 같아서, 발바닥이 못내 편안치가 않습니다. 그리서 저도 모르게 앉은걸음으로 자꾸 물러나, 꽁무니를 뒤로만 뒤로만으로 빼게 된 것이, 언제 벌써 용폭 위로 기어 올라가, 위험을 떠난 편평한 개울 바닥 길로 가고 있음을, 나중에야 알겠습니다. |
술 취객으로 비유를 합니다.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물이 탕을 돌아 바삐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한 것 같다며 이 같은 경승을 보고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칭송을 합니다.
용을 본 적이 없지만 마치 물속에 용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신령스러운 바위를 밟고 있기가 두려워 용폭 위로 오르다 보니 용탕 위 계곡에 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33년 11월02일, 동아일보에 실린 용탕 사진입니다.>
용탕을 가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오르면서 용탕 좌측 사암에는 물이 흐르지 않은 패인 곳이 있는데 이곳을 용혈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용혈 말고도 패이다가 만 또 다른 곳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12탕을 맞추느라 용혈까지 탕으로 보기도 했던 곳입니다.
용혈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인가 봅니다.
용혈이 원래부터 검었던 것인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불을 피워대서 그렇게 검게 그을린 것인지 모르지만 검게 보였습니다.
용폭에서 조금 더 오르면 큰 폭포가 하나가 나오는데 바로 두문폭포입니다.
이곳 두문폭포에 오른 노산선생은 이렇게 소회를 적었습니다.
용폭에서 얼마 아니하여 또 한 개의 큰 폭포를 만나니, 이것은 두문폭입니다. 용탕 위에서부터 계곡 막바지에 높다랗게 솟아 막힌 감투봉 아래까지의 10리를 따로이 두문곡(杜門谷)이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그 속에 있는 폭포라 이것을 두문폭이라고 부릅니다. |
두문폭포의 이름은 폭포위 계곡이 두문곳이라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한 것은 노산의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행각을 나설 때 일행이 15명이라고 했으니 길잡이인 이곳 토박이 심마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을 것으로 봅니다.
감투봉에서 치마바위(裳巖)를 지나 못재(淵峴) 구간
본문을 이어갑니다.
이리하여 용탕을 떠난 약 1시간 만에 감투봉 위로 올랐습니다. 여기서 봉의 오른쪽 등성이를 타고 거의 2시간을 걸려 사태목(沙汰)이란 데 이르니, 치마바위의 엄전한 모양이 오른쪽 눈 위로 들어옵니다. 치마 중에도 요사이 치마 같이 메린스나 후지기누 따위로 짤막하게 걸친 치마가 아니라, 덕성을 그대로 감추어 오히려 더 빛나게 깨끗이 다려 입은 무명 긴 치마라 하겠습니다. |
저는 이 대목에서 상당한 혼란을 느낍니다.
두문폭포에서 감투봉을 1시간 만에 올랐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감투봉은 서북릉의 귀때기청봉과 대승령 중간 지점이 되는 1408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에서 동복방향으로 능선을 타고 30정도 거리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을 감투봉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산선생은 두문폭포에서 1시간만에 감투봉을 올랐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두문골에서 능선으로 올라 응봉으로 갈라지는 1358봉을 감투봉이라 적은 것 같은데 예전에는 이곳도 감투봉으로 불렀나 봅니다.
명산이므로 같은 봉우리 이름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치고, 두문폭포에서 응봉으로 이러지는 갈림길까지 정확한 거리가 2.82km인데 옆 봉우리인 1358봉까지는 약3km인데 오래전 길도 안 좋은 상황에서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3km를 1시간에 오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일행 15명에는 짐꾼도 있을 것인데 짐꾼까지 모두 1시간에 3km? 거의 불가한 일입니다.
그런데 두문폭포에서 감투봉까지 1시간이 걸렸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글이 없어 추측만 할 뿐 정확한 행로는 알 수가 없는데 의문은 계속 이어집니다.
<1번 개념도, 설악명승학교 카페에서 모셔 온 개념도입니다.>
<1번 개념도를 기준으로 행로를 표시해 봅니다.>
<다음지도로 1번, 2번 개념도에 나온 행로를 추정해 본 지도입니다.>
이후 감투봉에서 2시간을 걸려 사태목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두문폭포에서 감투봉까지 1시간에 오를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라면 감투봉에서 2시간을 간다면 안산을 넘어 서북릉에서 치마바위골 어느 능선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라면 안산 옆을 지나며 안산, 고양이바위, 치마바위에 대해 자세한 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본문에서는 안산 이야기는 없고 사태목에 도착하니 치마바위가 우측에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태목은 어디일까? 인터넷을 두둘겨도 찾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사태목을 고개나 지명으로 생각했었는데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자 지명보다는 산사태가 난 곳을 통해 능선을 넘어가는 길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일부 해소가 됩니다.
이 놀리라면 사태목추정지는 작은 함지박골이 기능성이 높습니다.
작은함지박골 능선에서는 안산이나 치마바위가 보이지 않지만 작은 함지박골 전 1321봉에서 안산은 보이지 않고 우측으로 치마바위만 살며시 보입니다.
사태목에 대한 퍼즐을 맞추니 2시간에 응봉 갈림길에서 작은 함지박골 능선까지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안산으로 지났는데 안산기록과 치마바위 기록은 없었을까? 풀리지 않는 의혹입니다.
<안산 정상에서 본 치미바위의 풍경입니다.>
처음에는 당시에는 안산이라는 산명이 없나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다음, 또 다음날 영시암으로 가면서 영산담을 설명하는 과정에 안산이 나오면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안산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설악행각 개념도는 위에 올린 것 같이 2가지가 있습니다.
1번 개념도는 어디서 그렸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설악명승학교 카페에서 모셔 온 개념도인데 이 개념도에서는 노산선생 일행이 지난 행로를 두문폭포에서 골짜기로 올라가 응봉갈림길 1358봉 3거리를 지나고, 대승령으로 내려서는 3거리를 지나 이곳에서 1396봉 능선을 지나 안산을 지나 간 것으로 행로를 표시했는데, 저도 처음에는 이 행로가 맞다고 생각하는데 안산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미스터리입니다.
<2007년 월간마운틴에 실렸던 개념도입니다.>
2번 개념도는 2007년 월간마운틴에 실렸던 개념도인데 이 지도에서는 노산선생 일행이 지난 행로를 두문폭포에서 십이선녀탕계곡으로 끝까지 오르지 않고 중간에서 우측 안산 방향으로 오른 뒤 서북릉으로 가다가 치마바위골 좌릉으로 내려선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경우라면 감투봉은 서북릉의 한 봉우리이고 사태목은 치마바위골 좌릉(내려설 때는 우측 능선)을 따라 하산하면 약 능선에서 1시간거리에 갈직과 운흥사지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는데 이곳에서 우측은 갈직으로, 좌측 운흥사지로 내려가게 되는데 이 지점 쯤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라면 2번 개념도를 바탕으로 사진과 다음지도를 추정해 본 위치에서는 안산이 보이지가 않으며 능선으로 올라서기전 사면으로 지나갔다고 추정해보면 안산을 볼 수 있는 위치는 1050봉에서 잡목 사이로, 그리고 966봉 조금 아래 작은 너럭바위 전망대에서 치마바위를 볼 수 있는데 안산 정상이나 1396봉에서 보는 것에 비해 풍경이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1341봉에서 본 안산과 치마바위의 풍경입니다.>
<치마바위골 좌릉으로 하산하며 1050봉에서 본 치마바위의 풍경입니다.>
<치마바위골 좌릉으로 하산하며 906 너럭바위 전망대에서 본 치마바위의 풍경입니다.>
위 2가지 추론으로 보았을 때 제 입장에서는 전자의 행로보다는 후자의 행로에 한 표를 던질 수 있겠지만 감투봉과 사태목의 위치를 알 수 없으니 추측만으로 숙제를 풀 수가 없음이 안타깝고 힘들뿐입니다. 암튼 노산선생께서는 감투봉에서 2시간을 걸어 사태목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치마바위를 보며 시 한 수를 읊습니다.
길게 드리우신 우리 님 무명 치마
거친듯 어지시고 볼수록 빛나시네
주시는 푸진 사랑도 이리 든든 한고.
든든한 사랑이오매 믿고 아니 잊으리다
켜켜이 쌓인 설음 달래고 가옵니다
이 뒤란 생각만 하고도 웃고 살아 가오리다.
다시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또 얼마 아니하여 산상에 한 못(淵)이 있음을 보는데, 물은 맑게 괴지는 못했고, 질벅질벅한 습지입니다. 범위는 제법 넓고 크게 된 것인데, 여기에 이 못이 있다고 해서, 이 고개를 못재라 부르고, 한문으로는 연현(淵峴)이라 씁니다. 연현에서 한 30분을 걸려 고개를 내리니, 못재마을(淵峴里)라는 산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밤 이 마을 어느 초막에서 피곤한 몸을 쉬기로 합니다. 산에는 어느덧 황혼이 덮입니다. 나무들은 저녁 바람에 불려 소리를 내며 흔들고 있습니다. 내게서 떠나지 않는 황혼의 비애는 구태여 여기까지 날 따라와 같이 온 모양입니다. |
위 글에서 보면 설악행각 행로에 대해 개념도에는 예상했던 대로 1번, 2번 개념도 모두 치마바위골 좌릉으로 하산한 것으로 그렸는데 안산에 대한 기록은사태목에서 처음 거론 되는 것을 보면 2번 개념도로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본문에서는 사태목에서 못(淵)이 있는 곳까지를 시간이 아닌 ,얼마 아니하여,라고 기록하였으니 1시간을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2시간을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넓은 습지가 있는 고개?까지 내려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못재? 아마도 석황사와 운흥사지를 잇는 고개가 이곳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후 못재에서 30분을 내려서 연현리마을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산선생 일행은 상당히 빠른 걸음을 한 것 같습니다.
설악행각 개념도에는 못재에서 석황사 방향으로 내려선 후 예전 화넞느오 이용되었던 곳을 지나 운흥사지 방향으로 이어간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한계리에서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없었으므로 이곳 사람들이 이용하는 산길로 이동했을 것 같습니다.
이 논리라면 습지, 못이 있는 곳은 옛 운흥사 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항 수 있는데 현재 운흥사지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운흥사지에서 30분이면 지금 46번 국도인 한계령길 인근 쇠리까지 충분히 내려설 수 있는 거리입니다.
무척 먼 거리입니다.
1개념대로면 아마도 약17km, 2개념도이면 14km정도로 예상되는 거리인데 당시 길도 좋지 않고 15명이라는 대부대가 낙오자 없이 먼 길을 걸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노산선생이 31살로 젊을 때이기는 하지만 공부만 하던 젊은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서서 탕숫골-감투봉-서북릉-치마바위골 능선-운흥사터가 있는 연현리까지 먼 길이 설악행각에 나온 노산 이은상 선생의 산행 첫날의 이동경로를 짚어보았습니다.
첫댓글 에구 어디서 귀한 자료들을 다 찾으셨데요
아예 이은상선생보다 더 귀한 글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수고 많으셨구요
이런 자세한 답사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몇날 몇일 한두달을 가지고 쓸수 있는 글도 아니니만치 귀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선배님~
잘 지내시구요~~~
걍 한 번 제가 지난 곳과 노산션생께서 지난 곳을 비교해 보는거지요.
글이랄 것 두 없고요.
동아일보 신문기사는 나중에 문제될지 모르니까 1주일뒤에 삭제하려고요.
2일차 쓰고 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네요.
집사람 아프니 산에도 못가고 이런거나 써야지 심심해서요.
즐거운 시간 되시고 신년회 함 해야하는데...............
@범솥말 삭제하시지 마시고
언젠가는 또 필요로 할지 모르니 비공개로 자료만 보관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신문기사라는 것이 널리 알리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꼭 끝에 가서는 무단복사및 재배포금지 이건 뭐 어쩌자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사람은 건강관련 글을 써놓고 복사를 막아 놓았더라구요
그러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뭘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인지 도대체 앞뒤가 안맞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면 복사할 사람은 누구처럼 어느 구좌로 얼마를 보내라고 하던지
그건또 세금포탈에 무신고 영업 아닌가 암튼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자아자 화이팅입니다 ^^
@범솥말 조만간 시간나는대로 시간 한번 맞추어 보죠
이번에는 내가 낸다는 약속하에 해야합니다
뭐 돈버는 사람이 내야된다는 둥 이유불문하고요 ^^
ㅋ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새해복많이 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