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에 제작된『장미의 이름』이라는 이 영화에 대해서 이 영화를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이런 영화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추천을 받고 나서 본 이후 이 영화는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고 한편의 영화가 가져다 주는 교훈은 갚진 것이었기 때문에 영화의 비평을 논하기는 부족한 점이 많으나 내 나름대로 영화를 통해 얻은 지식과 감상을 곁들여 비평을 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요즈음 나오는 많은 신작 영화가 많은데 하필이면 오래된 이 영화를 소개하느냐 하면 이 영화는 간단한 스토리로서만 전개된 것이 아닌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오늘날 내가 배우는 지식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 주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1) 영화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배운다는 것은 때로는 힘들고 지겨울 때도 있으나 배움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과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배우기를 갈구하나 보다. 나 또한 배우기 전에는 무지하고 부끄러운 존재였으나 배우고 난 뒤 비로소 나를 뒤돌아 볼 수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배움에는 책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을 통해서 전달해주는 배움 또한 얼마나 크고 값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처음 이 영화를 추천 받았을 때는 단순히 『장미의 이름』속에 깊은 뜻이 숨겨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그동안 내가 물들어온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 늘 싸우고, 사랑하고, 또한 단순한 줄거리 속에 매몰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프랑스 영화의 거장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작품이 난해하고 어렵다고만 들어왔지 실제로 내가 직접 작품을 보고 생각해 보려고 조차하지 않았다. 그런데 좋은 기회를 얻어 영화다운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인물은 많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액션 배우로 활동하던 '숀 코네리'가 이번에는 아주 심도 있고 특히 그의 모습에 어울리는 윌리암 신부 역을 그가 완벽하게 소화해 냄으로써 이 작품이 더 부각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F 머레이 에이브러함'과 호흡을 맞추어간 이 작품은 1327년 말 그러니까 중세 말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윌리암 신부와 그의 제자 앗소가 겪었던 수도원에서의 연쇄 살인사건을 주요 사건으로 다루는 이 영화는 '앗소'의 자서전으로 앗소에 의한 회상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공간적 배경인 북부 이탈리아는 정말 장엄하고 배경 하나만 가지고도 이 영화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촬영 술이 무척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 사본가들의 죽음
후란시스코파인 윌리암 신부와 그의 제자 앗소는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본가들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고 범인을 잡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 벽지 수도원에 다다르게 된다. 수도원이 한적한 산 꼭대기에 있는 모습이 어떤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탑 꼭대기에서 자살을 한 사본가 아델모에 의해 사건의 발단은 시작하고 뒤 이어서 그리스어를 번역하던 수도사가 돼지우리에서 흉측하게 죽은 채로 발견된 모습을 본 윌리암은 피묻은 시체를 닦아내고 먼저 죽은 아델모는 자살이 분명하지만 그리스어 번역승은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되었음을 알아내고 범인이 남긴 눈에 남아있는 발자국을 통해 사건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그러던 중 윌리암과 앗소는 사본실에 들어가 여러 사본가들이 연구하던 모습을 보며 그곳에서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사서 베렝가의 의문스런 행동을 보며 그가 숨기려 했던 책을 찾아내고 그 책 속에 숨겨진 작은 메모 용지를 보게된다. 어떤 비밀스런 메모를 숨겨놓은 것처럼 보인 그 메모지는 사실 레몬으로 쓰여진 하나의 단서였으나 베렝가에 의해 책과 단서도 놓치고 윌리암 또한 중요한 증인이 될 베렝가를 놓치게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베렝가 또한 어떤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하고 만다. 단지 혓바닥에 묻은 잉크와 손가락에 묻은 잉크만을 남긴 채 죽은 것이다. 윌리암이 속한 후란시스코파의 몇몇 사절단이 뒤이어 도착하지만 수도원 원장은 윌리암 더러 이 사건에서 손을 떼기를 바라고 윌리암과 한때 이단 심문관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베르나르도 드귀와 교황사절단이 이 수도원의 새로운 사건 담당자로 파견되어 온다. 이들의 목적은 윌리암과는 다르게 빨리 누군가 범인을 잡고 사건을 결론지으려는 속셈을 가지고서 이곳을 방문한다.
(3) 민중들의 봉기 그리고 호르헤의 음모
이들은 먼저 돌치노파의 수도승 살바토레와 한 여자와의 관계를 죄목으로 지적하고 살바토레를 통해 범인을 잡으려 하나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자꾸 빠져 들어가고 만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단 하나 그리스도의 청빈을 강조하며 빈농들에게 성직자의 재산을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돌치노파를 제거하기 위해 이단으로 간주하려 하며 그 희생양이 된 살바토레와 관계를 가진 여자를 마녀로 지목한 후 이들 모두를 화형에 처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참고있던 민중들이 들고일어남으로써 이들은 죽음에서 구출되고 윌리암과 제자 앗소는 실제 범인 '호르헤'를 통해 그의 음모를 밝혀낸다. 금서로 지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없애기 위해서 책의 맨 끝 페이지에 독을 묻혀 놓음으로써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의 혓바닥과 손가락에 잉크가 묻은 채 죽었던 것이다. 호르헤 자신은 미로와 함정, 그리고 거울을 탑 속에 만들어 놓은 채 그 속에 많은 책을 숨겨 놓으며 자신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단 장애가 되었던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사서들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어를 해석할 줄 알고 많은 책 속에서 지식을 탐구하고자 했던 이들은 결국 그동안 모순된 행동을 일삼은 수도원과 그 지배를 총 지휘하던 교황청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사서들을 통해 모든 사실이 민중에게까지 알려지기를 꺼려했던 호르헤와 핵심 수도사들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 뒤에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결국 윌리암의 뛰어난 추리력과 앗소를 통해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책을 가지고 나오는데 성공하고 이 수도원의 탑이 불에 탐으로써 모든 사건은 결말을 맺는다.
(4) 영화가 주는 의미
이 영화는 단순히 중세의 수도원을 통해 일어났던 연쇄 살인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132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이 영화가 북부 이탈리아 수도원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중세 시대 유럽을 지배하던 교황과 신 중심주의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1327년 즉 중세 말을 그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르네상스가 먼저 일어났던 이탈리아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르네상스하면 인본주의, 즉 신(神) 중심적인 절제와 금욕의 암흑시대였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과 인간성의 해방으로 돌아가자는 문화 부흥운동을 말한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문화라 하면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일컫는다. 즉 이 영화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 시대의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 사건을 통해 이 영화는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던 수도원의 수도승 그리고 로마의 교황청과 지금의 수도원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책을 통해 알게된 수도승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죽어간 것이고 금서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는 호르헤의 음모의 독에 휘말리어 죽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중세 수도원의 모순된 모습을 통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 수도원은 금욕적인 생활, 그리고 절제를 늘 중요시 여기며 항상 수도승들이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하여 화형을 처하거나 고문을 했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그 점을 매우 심도 있게 다루고 있었다. 자신의 금욕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한다든지 또한 참지 못한 수도승 살바토레 같은 경우는 여자와 직접 관계를 맺기도 하나 결국 고문을 당하게 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금욕을 강조했던 수도원의 남성들이 여성화되어 가는 장면을 통해 이들의 삶이 비참하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민중들의 억압적인 삶의 모습이다. 교황청으로부터 그리고 교황의 지배, 교황의 힘이 막강했던 중세시대 민중의 수탈자는 바로 다름 아닌 종교였다는 점이 나에게 분노를 머금게 했다. 정신적 지도자이고 민중에게 희망을 주며 교훈을 주어야 할 종교가 교황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서 민중에게 면죄부를 판매한 장면, 곡식이며 가축을 수도원에 바치게끔 하는 장면은 중세 사회의 타락한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먹을 것이 없어서 몸을 팔았던 여자의 모습과 수도원에서 나오는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라도 음식을 더 찾기 위해 날뛰는 빈민들의 모습들을 보며 중세의 썩어 가는 부패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다른 점은 종교갈등 문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후란시스코파와 베네딕트파 그리고 돌치노파는 각각 주장하고 있는바가 다르다. 특히 돌치노파를 주목해서 보면 이들은 나머지 종파와 다르게 민중들의 편에 섰고 그랬기 때문에 노선을 달리한 교황청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으며 결국 수도원에서도 명확한 증거 없이 단순히 돌치노파라는 이유만으로 화형에 처해지는 모습들에서 중세의 종교간의 갈등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한가지 생각나는 소설 작품이 있다. 이 영화의 주요사건의 발단이 금서로 지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외에 여러 관련된 책들을 이 수도원의 탑 속에 숨겨 놓음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기초가 흔들리고 자신들의 위상이 떨어 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수많은 책을 귀중한 보물처럼 숨겨 놓았던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김성환'씨 작품의 『바비도』또한 '바비도'라는 인물을 비롯해 대다수의 민중에게 성서 읽는 것을 금기시 하고 이를 스스로 번역하는 자는 화형에 처한다는 교황청의 명령을 어긴 바비도는 자기 스스로 성서를 번역하다 들키고 스스로 불에 타 죽는 모습을 그린 작품과 이 영화가 어느 면에서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의 암흑 적인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이렇게 짓밟히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민중들을 보며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에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힘들었다.
(5) 윌리암과 앗소
내가 가장 매력적인 배우라고 생각하는 숀 코네리는 이 작품의 윌리암 역에 정말 그 어떤 배우 보다도 딱 맞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의 도도하고도 눈 속에서 풍기는 빛,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이 사건의 해결자라는 특성에 딱 맞게 작품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윌리암 역시 같은 이단 심문관이며 라이벌 관계였던 베르나르 드귀와의 사이에서 자신이 베르나르 드귀에게 굴복했던 깊은 상처를 갖고있는 인물로 나오며 그의 제자 앗소와는 다르게 인간미보다는 지적인 인물로 나온다. 뛰어난 추리력과 그의 안경 또한 그와 더불어 콤비를 이루었고 불이 타는 탑 속에서 나올 때에도 그는 오직 숨겨져 있던 책에만 관심이 있던 인물로 나온다.
이와는 반대로 주인공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남긴 윌리암의 제자 앗소는 대단히 인간적인 젊은 청년으로 나온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윌리암을 만났고 윌리암과 더불어 이 사건에 뛰어 들면서 앗소는 지금까지 그가 만난 사람 중에서 기억에 남고 사랑했던 여자를 만난다. 앗소는 그 여자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사랑을 느낀다. 한때 그 여자는 마녀라 하며 수도원에서 화형을 당할 뻔하지만 앗소의 기도와 민중의 힘에 의해 살아나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 앗소는 그녀에게 '장미'라는 이름을 부여해 준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말이 오고 가지 않았지만 서로의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앗소에게는 영원한 감정의 의미로 그녀에게 '장미'라는 이름으로 부여해 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앗소는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었고 그가 자신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지금, 아니 언제까지나 젊었을 때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는 그의 마음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앗소는 또한 하나님께 늘 지적으로 살았던 자신의 스승 윌리암 신부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아름다운 북부 이탈리아의 광야를 배경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내가 마치 영화 속의 실제 인물이 된 것처럼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은 말로서는 설명이 안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다. 단순히 어렵게만 생각되고 자주 접하지 못했던 프랑스 영화 『장미의 이름』을 통해 닫혔던 눈을 떴고 굳어졌던 마음이 풀렸다. 깊이 있고 관객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이 영화에 애착이 가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영화를 통해 얻었던 배움과 보람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재산이 될 거라고 믿는다.
『장미의 이름』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 때 이 영화가 나타내는 저항과 민중들의 봉기가 마치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부르짖던 80년대와 비슷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고 영화 이전에 책으로도 발간되어 신학 서적의 대표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바도 적고 그다지 훌륭한 작품을 본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몇 편 안 되는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장미의 이름』을 꼽고 싶다. 그것은 왜냐하면 감독은 물론이고 배우들의 연기력과 더불어 전체적인 구도가 안정적인 동시에 보는 사람에게 전해주는 깊은 감동은 이 영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진한 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