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재경 영덕군 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海月/尹榮大
영덕에서 전해지고 있는 대게 유래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 견해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하나는 예주(지금의 영해지역)의 연역에서 나타나듯이 고려태조(왕건) 23년(서기 940년)에 지금의 영해지역을 처음 순시때 임금님의 주안상에 특별한 음식으로 올린 것과 그 이후 예주부사가 대게잡이로 알려져 온 이곳 마을을 초두 순시한 것을 바탕으로 마을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기인한다. 다른 하나는 조선조 초기에 지방특산품을 중웅에 조공하여 임금님의 수랏상에 대게를 올려 맛보게 하였으나 당시 대게를 먹는 임금의 자태가 근엄하지 못하고 임금의 얼굴에 대게살이 묻어 있는 모습을 신하들이 보기에 너무도 흉칙하여 한동안 수랏상에 대게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게의 특별한 맛이 생각난 임금이 신하에게 다시 대게를 찾아오라고 명하여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가 게를 찾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와 한참을 헤매던 끝에 지금의 동해 영덕군 축산면 죽도에서 한 어부가 잡은 게를 찾게 되었다.
그때 어부에게 그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으나 어부가 대답하지 못하여 크고 이상한 벌레라는 뜻으로 언기라고 이름지었다. 죽침 언기어 또는 대나무의 곧은 줄기와 같고 다리의 마디가 여섯 마디라는 뜻으로 죽육촌어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은 죽해(竹蟹)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그 뜻은 대나무 섬을 지나오면서 잡아온 게의 다리가 대나무 마디와 같이 길쭉하다는 의미이다.
하여튼 구설로 전하여지고 있지만 게가 크다는 뜻이 아니라 몸통에서 뻗어나간 다리 모양이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으며 길쭉하고 곧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앞으로 영덕대게는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자긍심으로 품질관리는 물론 자원보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그 위상을 높여가며 지역명품의 차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종 25년인 1530년에 발간된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토산물조에 보면 조선팔도에 게가 생산되는 고을이 71개소이지만 자해(紫蟹)가 나는 지역이 경상, 강원, 함경도의 11개 지역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앞에 명시된 71개 고을에서 나는 게는 민물에 나는 참게 종류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11개 지역에서 잡히고 있는 자해(紫蟹)는 홍게와 지금의 대게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11개 지역가운데 영덕과 영해의 지명이 명시되어 있으므로 동해안 곳곳에서 대게가 잡히고 있으나 대게는 영덕의 지역특산물로서의 문헌상 근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해군 5년인 1614년 발간된 허준의 동의보감
에도 게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얕은 바닷가, 시냇물, 호수, 못 등에 살고 있는 게는 발이 8개이고 집게발이 2개이며 발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옆으로 기어가기 때문에 방해(方蟹)라고 불렸으며, 게는 늦여름과 초가을에 생태적으로 매미처럼 허물을 벗는다고하여 벗을 "해(蟹)"자를 붙였다고 한다.
광해군 6년 1614년에 나온 이수광의 지봉유설
에도 살펴보면 게의 껍질은 사람의 손으로 벗길 수 있어 쪼갤 "해(蟹)"자로 표현했다고 한다. 게를 오래 보관하는 법, 게젓을 담그는 법과 게찜이나 게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을 소개하는 등 이같은 음식으로써의 게에 대한 기록은 1809년에 빙허각 이씨란 분이 쓴 규합총서
라는 책에 나타나있다.
그 이후 조선말기에 문신이며 서예가인 최영년(1856~1935)의 해동죽지
라는 시집중편의 음식물 편에 해각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해각포 중에는 동해안 영해에서 나는 것이 최고 명품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영덕이 대게 원조의 고장이라는 확실한 문헌적 근거를 가졌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대게의 체질은 자연환경에 맞게 특징지어졌을 것이며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영덕대게로 자리매김하게된 것이다. 청정해역으로 인정받고 있는 영덕의 해역은 바다 밑에서도 서식환경이 좋은 여건이어서 이곳에서 생활하는 각종 플랑크톤과 대게의 먹이감들도 그 품질이 우수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양질의 먹이, 즉, 이러한 기본적인 고단백질 말고도 바다 밑의 각종 미네랄과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한 영덕대게를 통해 우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그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덕대게의 그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30~40년 전에도 영덕인의 영덕대게에 대한 관심은 다른 지역보다 특별하였으며 영덕대게는 지역 소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요즈음처럼 자원관리나 상품관리 및 홍보 등 여러 가지의 여건이 취약하여 유통과정조차 어려운 형편이었고 뿐만 아니라 인쇄문화의 기술 역시 후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1969년에 영덕군은 처음으로 활자판 인쇄의 통계년보를 발행하였으며 그때부터 통계연보의 표지에 영덕대게 모양을 형상화하여 도안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여 영덕대게를 대표적인 영덕 특산물로 자리 매김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살펴보면 영덕대게는 영덕인에 의하여 자리 매김되어 왔으며 지속적으로 그 자원을 보존하고 관리하여 후손들에게로 자랑스럽게 물러주어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 1900년대 초기, 우리나라의 수산업은 연안어업에 의존하였으며, 대부분 무동력 어선으로 어획작업에 참여하여 수산업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고 어로작업 역시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 산업화의 기반이 매우 열악한 당시였지만 그래도 동해 연안은 어촌 포구마다 연안 수산자원이 상당히 풍족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동해안에서도 남한지역보다는 북한지역 특히 함경남도 신포와 함경북도 청진을 중심으로 수산물의 산업화 기반이 일찍이 조성되면서 일본을 거점으로 하는 무역을 위한 수산물의 가공산업이 시작되었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수산가공산업은 통조림 사업이었다고 한다.
전국의 통조림 가공실적을 살펴보면 1928년 4월부터 1929년 4월까지 1년간 약 5만 상자에 이르고 있었으며, 해외로 수출되는 수산물 통조림 생산액은 당시의 금액으로 180만원 정도였다. 그 가운데 6할은 털게와 대게통조림이었다는 통계를 보아 따라서 털게와 대게가 동해안에서 다른 어떤 어중보다 매우 가치 있는 소득차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통조림의 해외수출 실적을 살펴보면 년 간 25만원 내외의 전복통조림 한 종류를 제외하고, 그 외에는 털게의 통조림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해안의 털게잡이는 국내의 시장거래에 의존하던 어업종사자들에게는 큰 소득원이었으며 국제 대차 개선책을 높인 유일한 품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게의 통조림산업은 게를 통조림으로 제조하는 시기 이외에는 동해안에서 많이 어획되는 정어리와 고등어 등을 부수적으로 가공할 수 있어 당시의 수산업에 기여한 비중은 상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만 하여도 어선과 어구 및 어업시장을 포함한 수산업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으며, 어종에 따라서 어획기간도 제한되어 있었지만, 털게는 자원이 풍부하여 특별한 기술 없이도 매일 상당량 어획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한다.
동해안의 통조림공장 35개소에는 모두 털게, 왕게를 주원료로 가공하였으나, 1927년에는 완공된 경북 영덕군 강구와 축산의 통조림공장 2개소에서만은 당시 주종을 이루었던 털게, 왕게와 지금의 영덕대게를 함께 가공허가 되었으니 당시 연안의 자연여건에서도 영덕은 다른 어촌과 구별된 대게의 특산지였음을 입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도 그럴것이 1930년대만 해도 울진 앞바다에서 잡힌 대게가 대구, 포항, 안동, 서울 등 대도시로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통과정에서 교통수단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 값어치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반대로 강구항은 동해안 해산물 공급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그 명성이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뒷바침하는 자료가 있다. 영덕대게는 영덕사지에 보면 죽해(竹蟹)라고 표기되어 있고, 울진에서 잡힌 대게는 자해(紫蟹)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생물학적 분류보다는 외형적 판단이 우선시 된 것 같다. 그러므로 대게의 뜻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영덕의 대게인 것이다. 이렇게 영덕대게의 우수성이 높아진 가운데 희소식은 이러한 대게자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기간을 설정하여 관리하고 체장미달이나 빵게(대게의 암컷)의 거래자체까지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부정어업을 엄격히 단속하는 등 당국의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관리방법을 좀더 개선하여 명실상부한 지방화시대의 경쟁상품으로 다듬어가고 영덕의 지방자치경영을 21세기 환동해시대의 중심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다른지역에서 대게를 즉석에서 싸게 팔고 있는데 해마다 위판량과 위판액이 증가하고 있지만 자원의 고갈로 수요를 충족할 수 없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따라서 영덕대게는 적정한 가격을 결정하되 상품의 차별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리방법의 개선을 모색하여 그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대게는 게아목, 물맞이게 광에 속하며 전 세계의 북방냉수역에 분포하고 대게속 5종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붉은대게와 더불어 2종이 어획되고 있다. 중국명 또는 한자어로는 죽해(竹蟹)라고 하는 데 큰게가 아니라 몸통에서 뻗어나간 8개의 다리모양이 대나무처럼 곧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대게 가운데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영덕 강구와 축산 앞바다에서 3~4월에 잡힌 영덕대게이다. 이곳은 바다 밑바닥이 개흙이 전혀 없고 깨끗한 모래 층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게의 갑각은 그 윤곽이 둥근 삼각형에 가깝고 너비는 길이보다 약간 더 넓으며 갑각 언저리에 작은 가시가 15~20개정도 있고 집게발은 보각보다 짧은데 수컷은 암컷보다 훨씬 크다. 걷는 다리는 모두 비교적 납작하며 제1, 제2 걷는 다리는 매우 길고 약간 두툼하며 납작하지만 제3 걷는 다리는 이보다 약간 짧으며 제4 걷는 다리는 매우 짧고 가늘다. 몸빛깔은 주황색 또는 연한 밤색이다.
대게는 우리나라 경북 이북의 동해안, 주로 함경북도 연안에 많이 분포하며 이북지역의 화도학산, 함경만내, 동향화, 양도 등에도 서식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일본해 서남해역인 북육, 산음 등이며 양적으로는 노우도우 이서의 섬까지의 냉수대에서 많이 잡히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오오츠크해, 캄차카, 베링해, 알라스카해, 북미서안, 그린란드 등에 분포하고 있으나 대체로 우리나라 동해와 일본열도의 서해안에 둥근 모양으로 수심 2백~4백m의 대륙붕 연변부와 중앙부 및 대화퇴에 분포하고 있다. 대게의 서식장소는 바다의 수심 1백미터에서 3백미터의 모래바닥 또는 진흙이 있는 곳으로 수온이 연중을 통하여 섭씨 3℃이하의 수심이 2백~4백미터이다.
대체로 암컷과 수컷의 서식처가 분리되어 있어 미성숙 개체와 암컷의 어미는 수심 2백~3백미터의 대륙경사면에 주로 서식하며, 수컷의 큰 것은 3백미터 이상의 수심에서 서식한다. 특히 바다 밑 4백~6백미터 정도의 수역에서는 대게와 붉은대게 사이의 자연 교잡종이 다소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연 교잡종의 경우는 2대에는 재생산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너도대게의 경우를 보면 아직 명확하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서식하고 있는 환경을 보면 수온이 0℃~3℃의 비교적 냉온이며 높은 수온에서는 저향력이 아주 약하다. 대게가 좋아하는 먹이는 다른 종류의 게, 새우 등과 오징어, 문어와 갯지렁이 등 비교적 잡식성이다.
대게의 크기는 생물학적으로 최소의 성숙기준을 갑폭의 크기에 기준을 두고 있으며 수컷의 경우 6.6cm, 암컷의 경우는 6.3cm로 하고 있으며 가장 큰 것은 수컷의 경우 갑폭이 18~20cm정도이고 암컷의 경우는 10~12cm정도라고하니 분포수역에 따라 같은 대게 종이라 하여도 그 크기가 다르다.
영덕지방에서는 대게의 암컷은 흔히 찐빵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빵게라고 부르기도하며 수컷에 비하여 갑폭이 절반정도로 작으며 부화할 때까지 외복부에 알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간은 약 일년간이다. 산란습성의 이유 때문에 암컷의 몸체가 작은 원인으로 볼 수 있으며 성장보다는 번식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암컷은 수컷에 비해 최대크기가 작은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대게의 자연상태의 수명은 암컷은 부화 후 6~8년에 어미로서 성장한 이후 탈피하지 않고 3~4년을 더 살고 있으니 9~12년 정도이며 수컷은 암컷보다 2~3년정도 더 오래 살아간다고 한다.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서식하는 대게의 교미시기는 처음 교미인 경우는 1~2월경 수심이 70~90cm내외의 얕은 곳에서이루어지며 두번째 이후는 2~5월경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3~4월경에 수심이 18m 부근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대게의 교미시기는 첫 교미인 경우 1~2월경에 수심 70~90m 내외의 다소 얕은 속에서 이루어지며 제2회 이후는 2~5월이라고 하지만 주로 3~4월에 수심 180m 부근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대게의 교미시간은 40~45분 정도이며 산란시간은 교미 후 1~2시간이다. 암컷의 복부에 포란된 알들은 약 155일 정도 지나야 알에 눈색이 나타나며 포란 시간은 첫 산란의 게들에 있어서는 12~18개월이며 두번째 산란한 게들의 경우에 약 12개월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산란은 2월결에 일어나며 두번째 이후의 산란개체의 산란은 5월경까지 일어난다.
대게알의 크기는 0.99~1.11mm라고 하니 1mm정도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하다. 대게의 산란량은 개체당 많은 량이므로 바다 속의 환경여건이 좋은 상태가 아니더라도 그 종족이 보존되고 있으며 계속하여 증식되고 있다. 대게의 부화는 산란한 다음해인 3월에서 5월에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대게를 포획하지 못하도록 보호기간을 설정한 것도 최소한의 산란기간과 새끼대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대게는 성장을 하면서 껍질을 벗는다. 일생을 통하여 15~17회 정도 껍질을 벗으면서 성장한다. 영덕지방에서 탈피하기 직전에 잡힌 대게를 훗게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은 탈피를 할 수 있도록 내피가 얇게 형성된 것으로 충분히 흡수하여 적당한 시기가 되면 탈각하게 되며 이러한 대게는 날 것으로 먹으면서 일명 약게라 하여 귀하게 취급하고 있다.
대게의 유생기는 조에아기가 2기이며 메갈로파기를 거쳐 새끼게로 된다. 유생기간은 보통 4~8개월로 추정하고 있다. 대체로 산란과 부화기간은 2년간 소요되며 1년 단위로 산란과 부화를 반복하고 있다. 대게는 탈피하면서 갑각의 크기가 자라지만 일년의 성장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게의 어획작업도 최근에는 한·일어업협정에 따른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규제되고 있으며 어획량에 대한 현황의 진단도 중요하지만 생태와 어장의 분포를 알아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 주변 어업환경은 인접국가들의 배타적 경제수역 설정으로 인하여 연근해어장이 분할 또는 축소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연근해 어장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보호관리 되지 않으면 안된다. 대게의 경우 그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자원은 점차 고갈되어가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대게 월 별 어획량을 도표로 나타내어본 것이다.
영덕대게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역명품의 자리를 튼튼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제는 영덕대게의 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전문점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수요자의 계속적인 증가추세로 영덕대게의 자원은 차츰 줄어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영덕대게의 자원보호와 상품개발을 병행하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산자원 보호령을 제정하여 매년 6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포획을 금하고 있으며 포획금지 체장은 갑폭을 기준하여 9cm로 하고 있고 암컷은 포획을 금하고 있다.
이러한 포획금지기간의 규정을 위반한때는 3백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에 처하며 포획금지 체장을 위반하거나 또는 암컷의 포획금지 규정을 위반한 때는 2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으나 규정을 집행하는 당국의 감독이 최일선에까지 미치기 힘들어 자원보호를 위한 지역주민의 참여와 자발적인 협조가 더욱 필요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