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이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간첩 협의에 대한 12년 동안의 논란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프랑스 또는 유럽 전역이 양심적인 지식인 세력과 수구적 음모세력 또는 반유태주의, 인종차별주의 세력 간의 첨예한 대립을 말한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정의 정치 사회사에 큰 얼룩을 남겼다.
1894년 9월 프랑스 군부는 중요한 군사 기밀이 독일 대사관을 통해 빠져 나가고 있음을 탐지했다. 단서는 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군부는 패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희생양 또는 전범을 필요로 했고, 유태계 장교 드레퓌스는 그러한 희생양에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드레퓌스는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피카르라는 프랑스군 고위 장교가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을 적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피카르는 한직으로 좌천당하고 만다. 그의 무죄 주장도 묵살되었음은 물론이다.
1898년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대통령에 대한 공개장을 통해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과 군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함으로써, 프랑스는 일대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정치가 클레망소, 작가 아나톨 프랑스 등이 졸라측에 가담했고, 끈질긴 재심 요구 끝에 군부는 결국 1906년에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단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럽 전역을 들끓게 하였는데, 결국 이후 파시즘적 정권이 공작 정치를 통해 진실을 은폐, 호도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행태, 또한 그러한 행태에 맞서 싸운 양심적 지식인들의 승리 등을 통칭하는 일종의 일반 술어로 자리잡았다. 또한 처음에는 드레퓌스의 처벌을 옹호하던 언론이 나중에 가서는 그를 살려낼 것을 주장함으로써, 언론 특유의 카멜레온적 속성을 드러낸 것도 이 사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다.
드레퓌스는 부유한 유대인 방직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882년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이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직업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였고, 1889년 무렵에는 육군대위로 진급했다. 1894년 육군부에 들어갔으나 그해 독일 대사관원 장교에게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죄로 고발당하여, 10월 15일에 체포되어 12월 22일,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의 '악마의 섬'이라는 악명 높은 범죄자 수용소에서 종신형을 살도록 선고받았다. 재판절차는 불충분한 증거만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가족들도 끈질기게 그의 무죄를 뒷받침했지만 악의적인 반(反)유대주의파가 이끌던 여론과 프랑스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배심원들의 평결과 종신형의 선고를 환영했다.
특히 에두아르 드뤼몽이 편집자로 있던 신문 〈리브르 파롤 La Libre Parole〉지는 드레퓌스를 불충스러운 프랑스 유대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육군중령 피카르는 소령 C. F. 에스테라지가 스파이 조직에 가담했으며, 드레퓌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편지의 필적이 바로 에스테라지의 것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피카르가 해임되자 사람들은 그가 찾아낸 증거들이 상관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드레퓌스 편에 서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들 가운데는 언론인 조제프 레나크와, 역시 언론인으로 나중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 상원의원 오귀스트 쇠레르 케스트네르도 있었다.
그러나 에스테라지가 증거를 날조하고 소문을 퍼뜨린 데다가 드레퓌스의 것이라는 편지 원본을 발견했던 소령 위베르 조제프 앙리가 새로운 문서들을 조작하고 나머지를 없애버리는 바람에, 이 사건은 어처구니없이 복잡하게 꼬여갔다. 에스테라지는 군법회의에 불려갔으나 무죄로 풀려났고 오히려 피카르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운동을 구체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 는 클레망소가 펴내는 〈오로르 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제목으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신문은 그날 저녁까지 20만 부가 팔렸다. 졸라는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육군부의 명령으로 에스테라지를 풀어주었다고 고발했다.
졸라의 편지를 계기로 드레퓌스 사건은 국민의 주목을 크게 끌기 시작했고 프랑스를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이 문제는 드레퓌스가 유죄냐 무죄냐를 따지는 개인적인 문제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심을 반대하는 반(反)드레퓌스파, 민족주의자, 독재주의자들은 이 논쟁을 군부의 명예를 떨어뜨리려는 프랑스의 적들이 꾸민 음모라 여겼다. 한편 드레퓌스 대위의 누명을 벗기려는 드레퓌스파는 이 사건을 국가안보 논리에 종속되어버린 개인의 자유라는 원칙문제이자, 국가와는 관계없이 행동하는 군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는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위신 문제로 보았다. 의회가 시끄러운 가운데 정부는 졸라를 재판에 회부하라는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각지에서 반유대 폭동이 터지고 있었다. 한편 드레퓌스 사건을 재심하라는 탄원서에 약 3,000명이 서명했고 여기에는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졸라에 대한 재판은 1898년 2월 7일 시작되었고, 명예훼손죄로 1년간의 징역형과 벌금 3,000프랑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1898~99년에 드레퓌스파는 커다란 힘을 얻었다. 앙리 소령이 자기가 문서를 위조했음을 고백한 뒤 1898년 8월말 자살했고, 에스테라지는 겁에 질려 벨기에를 거쳐 런던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앙리의 자백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재판을 다시 해달라는 드레퓌스 가족의 탄원을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899년 6월 르네 발테크 루소가 이끄는 새로운 내각이 출범하면서 마침내 이 사건이 해결되었다. 재심을 받기 위해 악마의 섬에서 불려온 드레퓌스는 렌에서 열린 새로운 군법회의(1899. 8. 7~9. 9)에 출두했다. 이 재판은 유죄를 판결했으나 공화국 대통령은 문제해결을 위해 그를 사면했다. 드레퓌스는 이 조치를 일단 받아들이긴 했지만, 결백을 증명할 법적인 권리를 행사하기도 했다. 1904년 재심이 허가되었고, 1906년 6월 드레퓌스를 재판한 상고법원은 그의 결백을 밝혀냄으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판결내용을 뒤집었다. 의회는 드레퓌스 복권에 대한 의안을 통과시켰다. 7월 22일 그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레종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그후 얼마 동안 다시 군에 복무하며 소령으로 진급한 뒤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소환되어 중령으로서 군수품 보급부대를 지휘했고, 전쟁이 끝나자 은퇴했다.
'라페르'(l'Affaire:사건)라고도 불리는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정의 역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사회적 세력들은 입장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1905년 과감한 정교분리법(正敎分離法)이 제정되었으며, 좌익 반군부 세력과 우익 민족주의자들 사이가 더욱 멀어져 1914년, 또는 그후에도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따라서 프랑스 최고의 문필가들이 두 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런 현상은 한 세대가 지나도록 프랑스인의 단결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잘못된 충성심, 되풀이되는 어리석음, 비열한 문서 위조, 격한 극단론들이 뒤얽혀 상황은 국가적 위기로까지 치달았다. 그나마 프랑스의 면목을 살려준 것은 그후 반유대주의를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가져온 최악의 결과는 프랑스의 약화를 부른 가장 큰 요인인 만성적인 내부분열을 일으키고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