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 1942년4월18일)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Mitchell) 중폭격기 16대가 항공모함 USS CV-8호넷(Hornet)을 출발하여 진주만(眞珠灣)공습에 대한 복수로 일본본토를 1942년04월18일 오후12시30분경 보복 폭격한 사건을 말한다.
일제(日帝)의 진주만(眞珠灣)공습은 1941년12월7일 미국 하와이(Hawaii)주의 오아후(Oahu)섬 진주만(Pearl Harbor)에 정박해 있던 미(美) 태평양(太平洋) 함대를 일제가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이 기습 직후에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일본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발표하게 된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7월말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주함에 따라 미국은 항의와 동시에 석유금수조치를 비롯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게 되고,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일본 시간 12월 8일) 진주만에 정박한 태평양함대(太平洋艦隊)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선제공격하였다는 것이 이른바 현대 역사통설에서 말하는 진주만공격의 서술이다.
여기서 의문은 진주만(眞珠灣)의 위치다.
현 열도(列島)의 동경(東京)에서 하와이까지는 무려 6,500km의 먼 거리를 두고 있다.
189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필리핀 독립투사들에 대한 철저한 살육은 1901년 산속에 숨어있던 필리핀의 혁명정부 대통령이자 독립투사(獨立鬪士)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1869-1964)를 체포할 때까지 무려 30만명을 죽였다고 한다. 당시 미군(美軍)의 사망자는 4,234명으로 필리핀 사망자에 비해 아주 소수의 희생이었지만, 이후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參戰)해 56개월동안 40만명의 사상자를 내게 된다. 역사의 신은 도전과 응전에 정확한 저울추로 재단할 뿐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미국 26대 대통령은 1905년7월29일 미국 전쟁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857-1930)를 일본에 보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키는데, 일본을 조선의 보호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돕는다는 간교한 밀실협약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日帝)는 조선(朝鮮)에 대해 을사늑약(乙巳勒約-1905)을 번개처럼 처리하고 미국은 필리핀은 중심으로 하는 태평양의 노른자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지금까지 미국의 이 지역에 대한 지배는 변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놓고 본다면, 아시아 지배를 위한 미국의 태평양함대(太平洋艦隊)가 위치해야 할 지역은 필리핀이 되어야 타당하지 먼 태평양 한 가운데 위치한 하와이에 둘 이유는 없어지고 만다.
2.
진주만 공습을 맞이한 후의 미국은 전세(戰勢)를 뒤집고 국민의 사기를 반전시킬 방안을 모색하게 되고, 제32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1882-1945)는 도쿄 폭격방안을 구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미군(美軍)은 해군성(海軍省) 작전참모 프랜시스 로우(Francis S. Low,1894-1964)대령의 계획에 따라 항공모함(航空母艦)을 일본근해까지 접근시킨 후 행동반경이 1,000km가 넘는 육상폭격기로 일본본토를 폭격한다는 안(案)을 채택하게 된다.
공격후에는 폭격기의 착륙거리가 길어 항공모함(航空母艦)으로 귀환이 불가능함에 따라 최대한 일본에서 먼 동맹국에 착륙 또는 비상탈출하는 방식으로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선택된 항공모함과 폭격기는 CV-8호넷과 B-25 미첼(Mitchell) 중폭격기였고 지휘는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1896-1993)중령이 맞게 되었다.
3주간의 훈련과 폭격기의 개조를 통해 80명의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1942년4월2일 미국의 8번째 항모(航母) 호넷을 타고 샌프란시스코항을 빠져나갔다고 기록은 전한다.
결국 도쿄까지 약 1,070km 떨어진 지점에서 육중한 중폭격기들이 1,141갤런의 연료(燃料)를 만재(滿載)하고, 225kg짜리 폭탄 4개씩을 실은 상태로 항공모함을 이륙했으며, 오후12시30분경 동경(東京)상공에서 폭격기 한 대당 4개의 폭탄은 모두 투하하게 되는데 이 폭탄을 모두 떨어트리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였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현 중국의 절강성(浙江省)지역에 불시착하거나 낙하산으로 탈출하였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4명이 사망하고, 8명은 일본군에 체포된 후 장교3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5명중 1명은 포로생활중 사망하게 된다. 이들 12명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 1대의 승무원5명을 제외한 63명이 모두 연합군 지역으로 탈출했다고 역사의 기록은 전한다.
3.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과 비행궤적을 추적해 보면 미군이 1942년4월에 폭격한 동경(東京)이 과연 어디여야 하는지가 명확히 나타나게 된다.
당시 동경공습에 사용되었던 중폭격기 B-25는 너비 20.6m, 길이 16.1m, 높이 5.0m, 전비중량은 1만5천880㎏, 최대속도는 시속 438㎞, 실용상승한도 7,380m, 항속거리 2,170㎞, 승무원 6명, 기관총 5정. 폭탄 1,360kg을 실을 수 있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항속거리다. 이 항속거리를 중심으로 현대 역사통설에서 말하는 B-25의 공격루트와 현재의 절강성(浙江省)까지의 거리를 고찰하면 아래와 같다.
당시 공습에 나섰던 B-25 중폭격기는 내부개조를 통해 투하폭탄 4개씩을 실었다고 한다. 따라서 다른 무기장치를 제거한 후 폭탄으로 대체한 것이고, 연료는 기록대로 만재(滿載)라고 했다면 모두 바다에 떨어졌어야 하는 상황이고, 보조연료를 달았다 하더라고 기존 항속(航續)거리인 2,170km 대비 1.5배인 3,100km를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된다. 엄청난 무게의 폭탄을 싣고 이미 1,250km를 날아간 상태에서 말이다. 보조연료탱크를 달았을 경우 최대항속거리는 2,500-2,700km까지 가능한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위의 공격루트와 철수루트는 새롭게 제시되어야 할 일이다.
4.
또한 기록에 따르면 둘리틀 특공대는 대륙 동해안인 절강성(浙江省)에 착륙후 중경(重慶)에 들러 근방에 위치한 미 공군비행장에서 연료를 보충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1942년의 중경(重慶)의 위치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둘리틀 특공대가 불시착했다고 알려진 절강성(浙江省) 또한 현 사천성(四川省)의 우측에 존재했음을 그리고 당시 일본의 동경(東京)이 현 대만(臺灣)의 타이페이(Taipei)였음을 고려해 그 폭격기의 궤적을 다시 그려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B-25의 항속거리와 보조연료통 장착후의 항속거리를 모두 고려해 그 착륙지점을 간파해 낼 수 있게 된다.
이를 지도로 고찰해 보면 아래와 같이 볼 수 있다.
2022.06.10.松溪
첫댓글
저희 조부님께서 일본에 돈 벌러 간 시기가 저정도인데... 현 열도로 가셨습니다...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제 조부님께서도 북해도로 징용가셨다가 탈출해 돌아오셨습니다. 북해도는 1868년이후 일본에 편입된 땅이고 열도와 반도는 대략 메이지유신 이후 1876년경 모두 일본령이 되는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1942년의 일본은 대륙 동남부와 반도, 열도를 모두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분석을 해 들어가면 될 것입니다. 아울러서 미군의 중폭격기 항속거리는 공학의 부분입니다. 따라서 과학이라는 논리를 기준으로 기존의 역사통설을 재해석하는 부분으로 이해하여주시면 쉬울듯 합니다
일본이 현 열도에 있는 상태에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과연 그게 가능할까? 지금 한반도나 열도는 자원이 거의 없죠. 석유나 금 등 지하자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는 전쟁자체를 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일본이 대륙에 존재했어야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죠…동경이 대만에 있었다고 하는 말씀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