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의 저술 중에 ‘담론’이라는 책이 있다. 담론이란 말을 가볍게 설명하면 ‘의견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누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담론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고, 상대가 없이는 불가능한 관계적 소통활동이다. 철학자 푸코는 ‘권력이 다르면 지식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담론은 기존 권력으로부터 탈출하는 노력이며, 권력에 의하여 생성된 기존의 지식체계를 깨 부수는 대중적 철학행위이다. 그러하니 기존권력에게 담론은 위험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정보기술 업계에서 큰 반향과 담론을 불러일으킨 애플의 1984년 슈퍼볼 광고를 보자! 짧은 은발, 빨간 반바지, 흰색 민소매 셔츠를 입은 젊은 백인여자가 내달린다. 양손으로 해머 자루를 잡고 강당의 중앙통로를 달려오는 그녀를 시위 진압복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뒤쫓는다. 시민들은 긴 의자에 줄지어 앉아 전방의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에 확대된 ‘빅 브라더’의 큰 얼굴이 최면을 걸듯이 말한다. “정화된 정보의 지향…순수한 이상의 정원…반역적 생각을 일으키는 해충으로부터 보호…생각의 통일…우리는 한 사람, 한 뜻, 한 해결책…적들은 혼란과 두려움에 떨고, 우린 그들을 매장할 것이다. 통일이다!” 라는 순간 여자투사가 투척한 해머가 스크린을 작렬시킨다.
인터넷 시대에서 IT권력의 정보독재 현상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당신의 멘탈과 소셜 네트워크를, 아마존과 알리바바는 당신의 소비패턴을, 통신사와 자동차업체는 당신의 생활 궤적을 알고 있다. 정보권력에 의하여 소시민이 발가벗겨지는 개인정보 투명성의 세상, 소비자를 길들이는 ‘빅 브라더’들의 세계가 겁나게 다가왔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는 ‘institutionalized’이라는 단어가 다섯번 나온다. 도서관 지기 노인 ‘브룩스’가 가석방을 통보 받고, 기뻐하지는 않고 오히려 재수감을 목적으로 폭력을 저지른 사태를 다른 죄수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고참 죄수인 ‘레드(모건 스탠리)’가 이유를 설명한 말이다.
‘institutionalized’란 ‘구성원들이 모두 당연시하는 상태, 정신적으로 동화된 규범화된 상태’이다. 대중문화인 영화에서 ‘institution’라는 어려운 사회과학 용어를 불쑥 들이대니 너무 생뚱맞다. ‘institutionalized'를 일상적 말로 번역한다면 ‘길들여진, 몸에 배인, 익숙해진, 체질이 되어버린, 없이는 못사는’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하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영어단어 ‘institution’은 이해하기 힘든 단어이다. 이질적인 두 개념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개념은 18세기 중반 산업혁명 당시 일부 자본가들이 설립한 고아원·양로원·교육기관들을 통칭하는 ‘조직’을 의미한다. 정부가 하지 않는 공익서비스를 ‘내부(in)에서 세웠다(설립하다: 라틴어 statuere, 영어 set-up)’ 는 의미로 사적 공익조직을 in·stitute로 부르게 된다.
두 번째 개념은 ‘관습’을 의미한다. 이 역시 외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in)에서 규율이 형성되었다(영어 set-up)’ 는 의미로 ‘in·stitute’을 쓰게 되었다. ‘쇼생크탈출’에서는 관습·규율·제도·규칙의 두 번째 뜻으로 사용되었고, ‘institutionalized’는 습성이 몸에 배인 ‘길들여진다’로 번역되었다.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라 역설했다. 그에게 철학이란 내재화되어 길들여진 상태를 탈출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철학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하는 것이 담론이다. 스티브 잡스가 맥킨토시 광고를 대중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1983년 10월 영업사원 컨퍼런스였다. 유튜브의 기록을 보면 광고를 본 영업사원들의 환성이 들린다. 드디어 기존 체제를 깨려는 ‘담론’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애플은 퍼스널 컴퓨터는 물론 휴대폰 모바일 시장을 석권 하면서 IBM보다 더 큰 시장가치를 가진 업체가 되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는 ‘브룩스’가 드러낸 ‘길들여짐’의 문제를 꿰뚫어 보았지만, 주인공 ‘앤디’는 ‘브룩스’처럼 길들여지지 않고 ‘쇼생크’를 탈출한다. 기존의 체제가 옳거나 그르다는 선과 악의 이슈에 주목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재화된 세상은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영혼은 견디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은 내재화된 세계를 끊임없이 깨부수어 버리며 성장해 나간다. 담론은 고착을 부수는 혁신의 출발점이다. 담론의 결과가 항상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함께 하면 공감이 전파되어 세상이 변화한다. 그러한 혁신은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시작된다. 중심부는 내재화의 총화를 상징한다. 변방은 혼돈의 상징이고 담론의 시작점이다.
작금의 IT업계에서 소비자를 길들인 기술은 무엇일까? 그것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독점된 SNS 앱과 스마트폰 없이는 못살겠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을 것 같다. 거대 IT권력은 사용자의 관습 속에 자신의 기술을 깊숙이 침투시키고 , 우리들을 모니터링하며 사고를 지배하려 한다. IT권력이 지배하는 모바일 활용문화를 깨부수는 혁신 담론이 다시 시작될 시점이다.
지금도 변방의 누군가는 권력화되는 내재화를 떨치고 나가려는 담론을 꿈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들여져서 변화는 싫다고, 문을 활짝 열어 두어도 ‘브룩스’처럼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들여다 보며 ‘변화와 대안은 나쁜 것’이라는 최면을 거는 IT 빅 브라더의 스크린을 향해 강철 헤머를 멋지게 던지는 또 다른 리틀 브라더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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