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오적’이나 ‘비어’나 다 사회현실에 대한 풍자시로서 걸작이다. 나는 ‘비어’가 작품성으로서는 ‘오적’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출판사로 출근을 하니까 난리가 나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서점에 깔린 잡지들을 전부 압수해버렸다는 것이다. (중략) 20여 일 동안 시달리면서 나는 내 담당 수사관의 간청에 오히려 연민을 느껴 그들의 요구대로 가톨릭출판사 주간직을 사퇴하겠다고 응락했다. 그리고 남산을 내려와서 사표를 써 회사에 제출하고, 책상서랍을 정리한 후 집으로 갔다. 이 사건으로 김지하 시인 자신도 남산에 불려 가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내가 「창조」에 출근을 하지 않고 일주일쯤 되었는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전임 유봉준 사장 신부는 사퇴를 하고, 신임 김병도 사장 신부가 발행인 김수환 추기경의 방침을 전달했다. 「창조」의 발행인은 나인데 왜 주간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가, 몸이 피곤할 터이니 3개월간 집에서 쉬고 다시 출근해서 가톨릭출판사 단행본 간행까지 총괄하는 편집주간직을 계속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3개월을 쉬는 동안 월급은 매월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그 때엔 은행의 온라인 제도도 없었으므로 백승철 편집장이 월급봉투를 내게 전달했다. 내가 제출한 사표를 김 추기경이 늦게 알게 되었고, “교회가 사람을 키워야 하는데, 들어와 있는 사람도 내보내면 안 된다”라고 했다는 김 추기경의 언급을 김병도 사장 신부는 고지식하게 전달했다. 같은 무렵 동아일보사에서도 필화사건이 일어나 천관우 주필이 퇴사를 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회사가 천 주필에게 마무리 대우를 잘 하지 못 했다고 한다. 사학자이며 언론인인 천 주필은 당대의 지사로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어 문단의 젊은 친구들이 정초에 세배를 하러 가곤 했다. 그만한 이가 시대를 잘못 만나 사회적으로 섭섭한 은퇴를 하는데, 아직 40대의 젊은이인 나에게 김수환 추기경이 베푸는 배려와 의리는 보기 드문 사례였다. 그리하여 3개월을 집에서 쉰 뒤에 나는 다시 가톨릭출판사에 나가 10년의 세월을 더 김수환 발행인 밑에서 지내게 된다.
- 구중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책 만드는 집, 2009), 100-102쪽.
1972년 봄, 나는 가톨릭종합지 ‘창조’지의 비어(蜚語) 필화사건으로 마산 가포결핵요양원에 연금돼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 때다. 그 때 그 곳에서 환자들을 위한 김민기/양희은 두 사람의 음악회가 있었다. 나는 그 음악회장 뒤편에 서서 두 사람의 듀엣을 듣고 있었다. 그 때 내 등 뒤에 누군가의 묵직한 걸음이 멈추서는 것을 느끼고 뒤돌아보니 거기 신문사진에서 뵌 적이 있는 추기경님이 계셨다. “김 시인이죠?” “네” 바로 그 때다. 추기경님이 당신 목에 감고 계셨던 흰 로만칼라를 손으로 확 잡아 떼셨다. 깜짝 놀랐다. 가톨릭의 엄연한 귄위의 상징인 로만칼라가 아닌가. 왜? 그 날 밤 마산교구청장 주교님 방에서 둘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 「조선일보」(200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