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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牧使尹公 墓碣
外生 領議政 金壽興 撰
기억해보니 내가 나이 약관 때에 남원윤씨 문중으로 장가를 들었을 때 공을 처음 보니 얼굴이 깨끗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영특하고 화려하기가 곁에 있는 사람도 빛이 날 정도였다. 말하는 것이 굳세고 호탕해서 늘 옛날사람이 공명을 이룩하고 큰 사업을 한 것과 같이 기약해서 당시 실정에 통달했고 문법을 밝게 배워 재주와 기량이 우뚝해서 절대적으로 자질구레한 선비의 태도가 없고 문장이 화려해서 글을 지으면 불가함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녹녹하게 세상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해서 벼슬한지 수 십 년 동안 막힘이 많고 통함이 적어서 벼슬길이 마침내 대성하지 못하고 만년에 벼슬이 겨우 자사에 그쳤으니 높고 우뚝한 기질이 억울하게 현달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리오.
공이 죽은 十八年 후에 여러 아들들이 공의 벼슬과 행검을 기록해 가지고 나에게 묘표를 지어달라고 하는지라. 아! 정명도께서 팽시랑에 행장을 짓는데 공의 도덕은 내가 친히 배워서 알고 있으므로 짓는다고 했으니 나도 또한 이 일에 이러한 형편이므로 드디어 사양하지 아니하고 하노라.
공의 휘는 형각이고 자는 경선인데 남원윤씨는 고려 안렴사 위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대로 벼슬을 해서 훌륭한 가문이라. 조선조에 들어와서 관찰사 세림이란 분이 있었으니 이분의 공의 칠대조이다. 관찰공으로 부터 전해서 사간원 사간 시영과 내자시 판관 청과 사옹원 참봉 증의 조 참판 민신에 이른 것이라. 참판공이 오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문과에 합격했으므로 장고에 기록을 했다.
공의 아버지는 길이니 정시에 장원을 해서 대성을 거쳐 승지에 스쳤으나 공의 공로로 인해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완산 이씨니 계통이 선원이었으니 양념대군 후손인 증참판 세양의 여라. 만력 신축(서기1701년, 선조삼십오년)에 공을 낳았으니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고 빼어났으며 늠름하기가 특수하니 참판공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더라. 열 살에 처음 글을 배웠는데 겨우 몇 달 안 되어 능히 해독하는 지라. 이로부터 학업이 날마다 진취 되었다.갑인년 공이 십사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서 슬퍼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그 다음 해부터 자주 거창한 일을 당했으나 자신이 담당한 일 이상을 몸소 처리하지 않음이 없고 슬픔과 예절을 잘 갖추었으며 상중에 예절을 익힌 여가에 문예(문장과 서예)에 힘을 썼으므로 상을 마친 후에 화려한 소문이 날로 퍼져 전파되었으며 장자(훌륭한 사람)의 가문에 많이 교유해서 견문을 많이 넓혔으니 교유한 친구는 다 당시에 유명한 선비들이었다. 광해군이 정치를 어지럽혀서 삼강오륜이 다 끊어지게 되니 공이 비록 그때 연소하였으나 항상 울분에 쌓여서 비밀리에 바루고 건져나갈 뜻을 가지고서 중흥(재건)할 제장(힘센 장사)글과 교유하면서 모의(전략)를 도왔으므로 계해년에 반정(혁명 인조대왕등극)하니 공은 그 공로를 사양했으나 조정에서는 당시에 동맹자와 다 같이 대접을 해서 격식을 뛰어넘어서 육품직에 제수해서 사헌부 감찰에 배(제수와 같음)되었다가 인제현감을 나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다스림이 나타났고 임금의 뜻에 의하여 상소문을 올렸는데 당시에 적절한 다섯 가지를 말하니 인조대왕이 표창하는 비답이 있었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니 대가(임금이 타는 수레)가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됨에 공이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행재소(임금이 피난 가 있는 곳)에 달려가서 울면서 따라가기를 원했는데 임금이 위로하면서 달래니 할 수 없이 돌아와서 고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때 반역자 이괄의 장인 이방좌가 그 일가들과 더불어 여러 고을을 점령하니 조정에서 명령을 해서 홍천감옥에 가두었는데 방좌가 밤을 틈타 옥문을 부수고 나와서 고을 수령들을 몰아내고 흉당들이 선동하니 유언비어가 난무함으로 사람들이 놀라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지라. 공이 고을 원들 중에서 좌상임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를 잡아들여 그 죄를 문책하고 무기를 가지고 임하면서 성색을 가다듬고 있으니 중승(벼슬이름)인 송상인이 곁에서 보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더라. 공이 이에 드디어 사민(백성)을 불러 모아놓고 대의로 설들을 시키고 격서(격문)를 썼는데 글 내용이 한자도 고칠데가 없고 글 뜻이 엄격하니 보는 자들이 숙연해져서 본색을 잃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글을 외워서 전하더라.
을축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정묘년에 감찰로서 어가(임금의 행차)를 강화도까지 호위해 갔으므로 양천현령에 제수되었으며 신미년에 전중(내직)에 있다가 홍산현감으로 나갔다. 현감으로 있는 오년동안에 다스림이 가장 훌륭했으므로 누차에 걸처 표창을 받았다. 을해년에 어사가 어떤 사람에 사주를 받아서 세세한 일을 캐어 내어서 법을 어겨가며 임금에게 상계를 했으나 상감이 불문에 부치었다.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서 선정을 기록했다.
병자년에 산관(무관)으로서 남한산성(임금이 피난가서 계셨음)에 들어가서 임금을 호위함으로 장예원 사평에 배명되었다가 사이가 되었는데 어영대장 원평원공이 불러서 종사관을 삼으니 밤낮으로 성을 지키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했다. 정축년에 사복시관에 옮기었다가 다시 김제군수로 나갔는데 전번에 하던 군수가 관가 재정을 축내었는데 공이 여기에 연좌되어 그릇 책망을 당해서 영암으로 귀양을 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무죄가 밝혀졌다. 그때가 난리가 끝난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공이 그 지방(영암)에 토속(농지나 산세나 지방풍속)을 즐거해서 이에 머물러 살았다. 날마다 고을 부로들과 더불어 모아놓고 술과 시로서 기쁘게 지내니 고을에 자제들이 공에게 수업한자가 또한 많으니 상례에 대해서 잘 가르치니 모두들 믿고 복종해서 준행하는 자가 많았다.
을유년에 북쪽으로 올라가서 석성(부여군 석성면)에 우거해 살았다. 병술년 봄에 유책등이 여러 고을에 흉도들과 체결해서 비밀리에 불궤(역모)를 도모해서 장차 일을 시작하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데 윤참판 문거가 갑자기 그 말을 듣고 공에게 달려가서 고하되 기의(적당한 시기에 토벌)를 논하니 공이 곧 이산(지금의 논산군 노성)으로 달려가서 현감 유동수와 석성현감 민진발 등을 지휘해서 군사를 일으켜 체포를 하고 한편으로는 훈구대신들에게 글을 보내고 감사 임당과 더불어 계략을 강구해서 잔당을 잡아서 법대로 처벌을 하도록 하니 다 공의 힘이더라.
이해 여름에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조정에서 역모들을 토벌한 공으로 통정에 승진시켜 파주목사를 제수했는데 폐하가 선온주를 하사하였는데 사양하였다. 공이 이산에 있을 적에 공장을 올린 내용이 변란이 일어날 당시 급보에 적힌 내용과 서로 다르다고 대간(사헌부)이 체포를 해서 공과 유동수를 대질 심문하니 상감이 동수가 정직하지 못함을 알고 공은 석방 하고 동수를 죄주고 공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되 공신에게 하사하는 예와 동일하게 하였다.
파주목사로 이년을 있었는데 미미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기축년에 남원부사로 갔었다가 마침 공이 원래부터 어사를 즐겨하지 아니했다가 모함을 당해서 강진으로 귀양 갔다가 신묘년에 방면되어 돌아와서 첨지중추부사와 오위장을 지냈다.
을미년에 양양부사를 지냈고 기해년에 태안군수를 지냈고 신축년에 성주목사를 지냈다. 전후로 고을을 다스릴 때에 다 조목과 법에 맞도록 했다. 계묘년 가을에 안신(안찰사)에게 헐뜯음을 당해서 금천으로 귀양을 갔다가 갑진년에 병이 발생해서 돌아가셨다.
정승 장태화와 홍정승 명하가 경연석에서 말해서 특별히 직첩을 돌려주었다.
공은 태어난 자질이 명랑하고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기상과 사령(음성)이 높고 우렁차며 사람을 대해서는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미더우며 절대적으로 불평함이 없고 대과(허물)를 미워하고 사람에 불선함을 보면 곧 바로 물리쳐서 얼굴을 붉힌 다음 그만두며 비록 아무리 친한 자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다 공경하되 꺼리며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효우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으며 제사지내는 예절은 능히 그 정성을 다하고 백씨를 섬기되 인정과 사랑이 심히 독실하되 날마다 서로 대하는데 즐겁고 기쁘고 농담도 하면서 일찍이 잠시도 떨어지지 아니했고 공의 동생 박사공이 일찍 죽으매 어린 조카들을 어루만져 길러서 잘 가르쳐 성취(결혼)을 시켰으니 자기 소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친척을 두루 도와주되 친한 이나 성근 사람이나 차이가 없으며 이웃에 혼사나 상사에 급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공을 믿고 있더라. 평생에 가정 사업에 힘쓰지 아니하니 거처하는 집이 옹색하고 좁으며 풍우도 가리우지 못했으며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옴에 가정 형편이 군색하되 안연히 처해 있으며 평상시에 손에는 책을 놓지 아니하고 자질(아들과 조카)들과 사사로이 문자를 논한 이외에 말은 하지 아니하더라.
아! 공의 포부와 뜻이 과연 능히 세상에 쓰여졌은 즉 공명사업이 어찌 고인만 못하리오. 한때에 친구들이 권세 있고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한사람도 밀어주거나 끌어당기는 자가 없었으며 단 재주와 지혜에 미친바로 겨우 고을 말직에 그쳤고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마침내 한번 펼치지 못했으니 가히 애석하지 않은가?
공은 문장이 일찍 성취 되었고, 더욱이 병려체에 능숙하며 한나라 때 글과 당나라 글을 전공해 말달리듯 진취되어 시률이 강경하고 굳세어, 비록당시에 노숙한 문장이라도 미치지 못하더라. 효빈유고 삼권이 가정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부인은 파평 윤씨니 친정아버지는 흡인 데 한성서윤이다. 부인이 법도 있는 집안에서 성장해서원래 익히고 배운 것이 있었는데 공에게 시집와서 부도를 갖추었고 단정하고 화순해서 밤낮으로 어김이 없었다. 맏동서 섬기기를 구고(시부모)와 같이 했고 다른 동서들한테도 잘하니 사람들의 이간질함이 없었고 자녀를 가르치는 데는 사랑하되 엄하게 하고 가중(노비)들을 부리는 데는 자애롭고 은혜롭게 했으므로 일평생 행동이 옛날 여사와 같음이 있었다. 공이 늘 공경하면서 말하기를 부인은 진실로 여중군자라 했다.
만력 임인(서기一六0二年)에 출생해서 기해(서기一六五九年)년에 돌아가셔서 처음 금천검지산 선영국내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돌아가심에 사좌 해향(亥向/북향) 언덕에 합폄하였다.
三男三女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빈(彬)이니 군수며 감사인 파평 윤득열의 女에게 장가들어 二男二女를 낳았으니 아들은 천준(天駿), 성준(星駿)이고 여는 조의봉이 딸 한명은 아직 시집보내지 아니했다.
다음 반(攀)은 문과에 합격해서 사간인데 대사헌 이정기의 女에게 장가들어 二男六女를 낳았으니 아들 덕준은 문과에 합격해서 지평이고 女는 박필하, 박필양, 조성하이고 一男 三女는 아직 어리다.
다음 무(楙)는 일찍이 죽었으나 현감 황중구의 여에게 장가들어 二男을 낳았으니 의준, 인준이고 공의 장녀는 현감 김수민에게 시집가서 三男三女를 낳았으니 아들 성달은 현감이고 성적은 진사고 그 다음 성도이고 여는 장시현, 여필관은 진사고 이조원도 진사이다.
둘째 사위는 응교 이유상인데 四男二女를 낳았으니 아들은 태조, 관조, 사조, 진조이고 여는 조명우, 조태구이고 셋째사위는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이니 一男五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창열이고 여는 별검 홍택보, 생원 송광속, 참봉 이희조, 이만성, 이성좌이다.
손자인 천준(天駿)이 二女를 두었고 사위 조의봉은 一女를 두었고 박필하는 二男一女를 두었고 박필양은 一男을 두었고 김성달은 四男三女를 두었고 성적은 三女를 두었고 장시현은 二男을 두었고 여필관은 一女를 두었고 이조원은 一男一女를 두었고 이태조는 二男을 두었고 관조는 一男一女를 두었고 사조는 一男을 두었고 홍택보는 一男三女를 두었고 송광속은 三女를 두었고 이희조는 一女를 두었고 이만성은 一女를 두었고 이성좌는 一女를 두었고 측실에 아들은 권(權)이요 女는 안순유고 一女는 양시웅이고 다음은 류영일이고 女는 구명석이고 다음은 이석우이다.
내외증손 현손이 五十여人이다. 공의 가문의 여경(餘慶)이 넘쳐나도다.
외생 원임 의정부 영의정 김 수 흥 撰
보국숭록대부판의금부사 이 정 영 書
통훈대부 행 경기도사 박 태 유 小字 書
첫댓글 많은 자료들을 발굴하여 올려주셔서 선조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