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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봉에서 쌍계사로.....
산행일시: 2023년11월13일
누구와: 좋은사람들 산악회원들과 함께
산행거리: 약12.88km
산행시간: 약6시간(11:18~17:15)
산행코스:청학동국공탐방안내소(11:18)-갓걸이재(12:04)-삼신봉(12:18~28)-내삼신봉(12:56~13:02)-송정굴(13:13~15)-쇠통바위(13:39~49)-1274봉(14:02~13)-1299봉(14:19)-상불재(14:40)-목교(15:09)-불일폭포3거리(15:44)-불일폭포(15:52 ~57) -불일암(16:03)-불일폭포3거리(16:09)-불일평전(16:12)-환학대(16:30)-쌍계사(16:54~17:02)-주차장날머리(17:15)
주요지점 통과 및 이동거리
11:15 청학동 국공탐방안내소 도착
11:18 청학동 국공탐방안내소에서 산행 시작, 해발785m
11:40 지리이정목 14-02
11:52 지리이정목 14-03
11:55 샘터, 산행거리1.73km 산행소요시간38분, 해발1092m
12:04 갓걸이재, 산행거리2.01km, 산행소요시간46분, 해발1190m
12:18~28 삼신봉, 산행거리2.42km, 산행소요시간1시간00분, 해발1288.7m(1290m)
12:40 1320봉, 산행거리2.95km, 산행소요시간1시간22분, 해발1320m
12:43 1315봉, 산행거리3.11km, 산행소요시간1시간26분, 해발1315m
12:53 지리이정목 15-16
12:56~13:02 내삼신봉, 산행거리3.43km, 산행소요시간1시간38분, 해발1355.1m(1350m)
13:10 지리이정목 15-15
13:12, 1333봉, 산행거리3.94km, 산행소요시간1시간54분, 해발1333m
13:13~15 송정굴, 산행거리3.99km, 산행소요시간1시간55분, 해발1329m
13:25 지리이정목 15-14
13:35 1266봉 간이전망대, 산행거리4.72km, 산행소요시간2시간17분, 해발1266m
13:39~49 쇠통바위, 산행거리4.86km, 산행소요시간2시간21분, 해발1271.2m(1269m)
13:50 지리이정목 15-13
1402 1274봉, 산행거리5.38km, 산행소요시간2시간44분, 해발1274m
14:02~13 지리이정목 15-12(간식 및 휴식)
14:19 1299봉(하동독바위갈림봉), 산행거리5.62km 산행소요시간3시간01분, 해발1303m
14:29 지리이정목 15-11
14:40 상불재, 산행거리6.58km, 산행소요시간3시간23분, 해발1111m
14:52 지리이정목 15-09
15:00 이정표(삼신봉4.8km↔쌍계사4.1km), 산행거리7.21km, 소요시간3시간42분, 해발889m
15:07 무명폭포
15:09 지리이정목 15-08, 산행거리7.51km, 산행소요시간3시간51분, 해발816m
15:13 잣나무 숲
15:25 다리, 산행거리8.30km, 산행소요시간4시간07분, 해발682m
15:34 대나무 숲
15:35 지리이정목 15-05
15:44 불일폭포갈림길3거리, 산행거리9.16km, 산행소요시간4시간26분, 해발549m
15:52~57 불일폭포, 산행거리9.40km, 산행소요시간4시간34분, 해발519m
16:03 불일암
16:09 불일폭포갈림길3거리
16:12 불일평전, 산행거리9.86km, 산행소요시간4시간54분, 해발501m
16:20 마족대
16:25 원숭이바위
16:30 환학대, 산행거리10.58km, 산행소요시간5시간12분, 해발368m
16:44 지리이정목 15-01
16:54~17:02 쌍계사, 산행거리11.73km, 산행소요시간5시간36분, 해발172m
17:15 쌍계사입구 정류장 옆, 주차장날머리, 산행거리12.88km, 산행소요시간5시간57분, 해발86m
◎산행 전 이야기
오늘 산행은 지리산 남부능선입니다.
지리산 남부능선은 지난 2022년12월에 1차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산방기간을 생각하지 않고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으로 들어서서 날이 샐 즈음 세석에 도착한 후, 영신봉을 접수하고 난 후 옛 선인들이 찾았던 좌고대와 영신사터 그리고 창불대를 돌아보느라 약1시간 반 이상을 지체한 결과 삼신봉에 14시가 다 되어 도착하였습니다.
삼신봉에서 쌍계사로 계속 산행을 이어가야할지 아니면 삼신봉에서 청학동으로 하산한 후 다음기회에 능선을 이어갈까? 갈등을 하다가 화재장터 터미널에 예약한 버스시간을 맞추기 위해 쌍계사를 포기하고 청학동으로 하산했었습니다.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 2023년도 다 지나갈 것 같았습니다.
혼자서 남부능선 2구간을 산행하기위해서는 08시40분에 하동터미널에서 출발하는 3번 버스를 타야하는데 그러면 하동에서 1박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올해가 가지전 남부능선 2구간을 답사하려고 하동 24시 사우나, 찜질방을 알아보며 기회를 보던 중 좋은사람들에서 삼신봉~쌍계사 구간이 떴는데 직장시간 때문에 갈 수가 없습니다.
11월15일이면 삼신봉~쌍계사 구간은 산방기간에 묶여 가기가 어려지니 고민은 깊어지고 갈등(葛藤)만.... 그러다가 직장에 2일 연가를 신청하는 무리수를 두며 지리산 남부능선 2구간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06시40분 사당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전 내내 달려 청학동 종점에 11시15분이 되어서야 도착합니다.
산행대장님이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15시30분까지 산행을 마쳐 서울로 출발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한다는 안내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각각 산행 준비를 하고.....
지리산국립공원 청학동 탐방안내소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청학동 국공탐방안내소에서 삼신봉 구간
청학동 국립공원탐방안내소에서 100여m 정도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우측으로 삼신봉으로 가는 들머리인데 입구에는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고 큼지막한 입석에는 삼신산 청학동이라고 음각했다.
내일이 지나면 이곳을 통해 삼신봉으로 가는 길은 산방기간으로 통제된다.
차단기를 지나면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길을 치고 올라야 하는데 등로 주변의 풍경은 겨울 일색으로 늦은 단풍이라도 있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낙엽송 잎까지 단풍은 이미 지고 없다.
보름전 가을비가 내려서인지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게 들리며, 기온은 조금 낮아 서늘하기는 하지만 계속 걸으니 추위는 생각보다 적은데 내심 지리산이라는 특수로 무척 추울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들머리에서 산행채비를 하는 사이 다른 사람들보다 산행을 일찍 시작했는데 앞서 4명이 있었는데 오르다 보니 선두가 되었고 30분 정도 올라 이정표(청학동1.7km↔삼신봉0.7km)가 나오고, 이정표 옆에는 돌탑을 쌓은 샘터가 있는데 샘터는 샘물은 흐르고 있지만 청소상태가 엉망이라 음용은 불가하다.
샘터에서 낙남정맥이 지나는 갓걸이재까지는 0.3km로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갓걸이재 오름길에 뒤따라 대원 한 사람이 올라왔고 이 사람과 함께 갓걸이재로 오른다.
갓걸이재
고개 이름이 아주 재미있다.
갓걸이재는 최치원선생이 청학동을 넘나들 때 이 고개에 올라 갓을 벗어 나무에 걸고 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전해진다.
갓걸이재는 1대간 9정맥 중, 지리산 영신봉에서 분기한 능선이 삼신봉을 거친 다음 이곳 갓걸이재에서 고도를 낮추었다가 외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오늘 산행구간에서는 이곳 갓걸이재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약400m가 낙남정맥에 해당된다.
원래 우리 선조들은 대간과 정맥으로 구분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대간이나 정맥을 사용하지 않고 산맥이 등장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어린 시절 광주산맥, 차령산맥, 태백산맥이라는 산맥개념으로 배웠는데 이제는 정맥으로 바뀌었는데도 지자체 홍보 또는 안내 게시판에 산맥으로 표기하는 예가 있는데 이제는 고쳐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갓걸이재에서 좌측은 삼신봉이고 우측은 외삼신봉으로 가는 길인데 이곳에서 낙남정맥길인 외삼신봉으로 가는 능선은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는데 왜 비탐방구역으로 묶었는지 알 수가 없다.
갓걸이재에서 좌측으로 들어서서 삼신봉으로 향한다.
삼신봉까지는 0.4km로 처음에는 등로가 가팔게 이어지는데 조금 지나면 거의 평지 수준으로 밋밋하게 이어지며 우측으로 웅석봉과 천왕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 삼신봉아래 3거리에 도착했는데 갓걸이재를 떠나 약10분이 걸렸다.
3거리에는 이정표(쌍계사9km↔청학동2.4km,↑세석7.6km)가 있고 지난해 12월에는 없던 지킴이 초소가 있는데 국공은 없다.
3거리에서 삼신봉 정상까지는 암릉길로 약100m정도 거리에 있으며 1곳이 난해하기는 하지만 조심해서 오르면 된다.
삼신봉으로 올라서며 맨 먼저 지난해까지 무사했던 천왕봉은 그 사이 누가 가져갔는지? 긴 지리산 능선은 누가 훔쳐갔는지?, 천왕봉에서 촛대봉, 영신봉, 삼각고지 형제봉, 삼도봉, 반야봉, 노고단까지 위치를 확인하니 아무 탈 없이 모두 그 자리에 있다.
▷청학동국공탐방안내소에서 삼신봉까지 산행거리2.42km, 산행시간1시간, 해발1290m(원래 높이1288.7m), 현재시간 12시18분이다.
◎삼신봉에서 내삼신봉 구간
삼신봉!
삼신봉은 지리적으로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봉우리로 청암면과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삼신봉을 가운데 두고 양팔을 벌린 듯하게 외삼신봉과 내삼신봉을 두고 있으며 와삼신봉, 삼신봉, 내삼신봉이 감싸고 있는 묵계리는 청학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신봉의 남쪽 사면 골짜기에는 삼신동(三神洞)이 있는데 「진양지」의 기록을 보면 「삼신동은 천왕봉의 남쪽에 있는데 신흥사, ·의신사, 영신사 세 절로 들어가는 길이 모두 이 골을 거치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요, 수각(水閣) 가에 삼신동이라는 세 글자의 석각이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시대 하동의 관찬지리지나 군현지도에는 삼신봉에 대한 표기가 없다.(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지식백과에 의하면 삼신봉이라는 지명은 신흥사, 영신사, 의신사 3절로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고 삼신동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삼신동 위에 있는 봉우리이므로 삼신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3개의 봉우리에서 삼신봉이 유래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삼신봉은 한문으로 三神峰으로 쓰이고 쌍계사 현판에도 三神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식백과에서는 신흥사, 의신사, 영신사를 운운했는데 신흥사의 신은 새 신(新)이고, 의신사나 영신사의 신은 믿을 신(信)을 쓰니 이 또한 믿거나 말거나가 된다.
쌍계사 현판에 삼신산으로 표기를 한 삼신산과 우리가 부르는 삼신봉, 외삼신봉, 내삼신봉은 언제부터 불려졌을까?
최근에 쓰고 있는 카카오지도나 네이버지도를 보면 삼신산의 표기는 없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위치에 삼신봉, 외삼신봉, 내삼신봉이 표기되어 있지만 2013년에 국가정보지리원에서 만든 온맵에는 삼신봉의 고도만 나왔을 뿐 봉우리의 이름은 없다.
그러면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만든 조선지지자료 지도에는 어떨까?
조선지지자료에는 청헉동 인근과 쌍계사 인근 마을 이름은 나오지만 삼신봉이나 삼신산은 나오지 않으며, 더 오래전 지도인 조선 중기~말기에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 삼신산이나 삼신봉은 없다.
결론을 내리자면 삼신산이나 삼신봉은 없는 산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쌍계사 일주문 현판에 삼신산이 표기된 데에서 삼신산이나 삼신봉이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산은 역시 겨울산이 최고다.
작년에도 12월에 이곳을 왔었으니 그때도 시계가 좋아 멀리까지 볼 수 있었는데 오늘도 날씨가 쌀쌀해 박무가 거의 없어 시계가 좋으며 하늘에는 구름 한점없이 푸르고 푸르다.
아무도 없는 삼신봉에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갓걸이재를 함께 올랐던 사람이 이어서 올랐고 서로 품앗이로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사방을 조방하면 도심에서 답답했던 마음이 한방에 날린다.
동으로 웅석봉을 시작으로 천왕봉, 촛대봉 그리고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 세석산장이 희미하게 관측되고, 영신봉에서 분기한 능선이 남쪽으로 남하하며 이곳까지 이어지니 낙남정맥으로 이곳에서 외삼신봉을 지나 계속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런가하면 지리산 남부능선은 이곳에서 낙남정맥과 헤어져 내삼신봉을 지나 상불재까지 이어다가 상불재에서 성제봉을 지나 악양면 외둔에서 맥을 다하게 되는데 대부분 상불재에서 쌍계사로 내려서서 남부능선을 갈음하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 혼자서 산행을 한다면 정상적인 남부능선을 답사해야하나 오늘은 산악회 팀과 함께 산행하므로 쌍계사로 갈음하기로 했다.
영신봉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조금 내려서면 좌고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보이지가 않는데. 이어지는 능선은 칠선봉을 지나 벽소령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고,이어서 형제봉이 있는 삼각고지를 넘어 연하천에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명선봉을 넘어 삼도봉으로 내려앉는다.
잠시 쉬어가는 삼도봉에서 지리 제2봉인 반야봉을 세우고, 다시 내려선 능선은 임걸령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가 피아골3거리를 지나 다시 힘을 내어 올라 노고단으로 올라선다.
이제 지리산도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능선은 모두 마음속에 담았으니 어디가 어디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올해가 시작되면서 지리산 4대능선은 답사를 마친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 동부능선을 남기고 있는데 긴 동부능선을 웅석봉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내봉이 있는 와불산까지는 답사를 해야하는데 ......
삼신봉에서 조망을 하는 사이 연이어 대원들이 속속 올라선다.
방 뺄 시간이 되어서 삼신봉에서 세석방향으로 내려서서 삼신봉을 에돌며 3거리를 지나 혼자서 내삼신봉으로 향한다.
지리산은 대부분 육산으로 등로가 이어지는데 삼신봉에서 내삼신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암릉길이 대부분이며 지리산은 이미 겨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있고 그래도 가끔씩 푸른 산죽이 분포하고 있다.
내삼신봉으로 가며 뒤돌아 삼신봉을 보니 삼신봉에는 뒤따라 올라선 대원들의 모습이 보이고 산죽이 분포되어 있는 능선 등로는 능선을 넘어서 능선 좌측으로 이어진다.
15분 정도 걸었나? 내려섰던 등로가 고도를 높이며 무명봉에 올라서니 이 봉우리가 1320봉이며 1320봉에서 3~4분 지나 다시 무명봉에 도착하니 이곳은 1315봉이다.
이어서 능선을 좌우로 넘나들며 지나면 지리이정목15-16이 나오며 이어서 큰 암봉이 앞을 막고 있으니 좁은 석문을 기어올라 능선으로 올라서면 내삼신봉으로 내삼신봉에는 삼신산정이라는 정상표지석이 있다.
정상표지석 옆에는 오래전 삼각점과 새로 설치한 삼각점 2개가 있는데 오래전 삼각점은 돌틈에 끼워있어 움직이는데 움직이는 건 삼각점뿐이 아니고 내삼신봉 정상표지석도 돌위에 얹어 놓은 것으로 무척 불완전하다.
내삼신봉을 지척에두고 뒤에 따라 붙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삼신봉을 오를 때 뒤따라 왔던 사람으로 이곳 내삼신봉에서도 품앗이로 사진을 찍어준다.
▷청학동국공탐방안내소에서 내삼신봉까지 산행거리3.43km, 산행시간1시간38분, 해발1350m(원래 높이1355.1m), 현재시간 12시56분이다.
◎내삼신봉에서 상불재 구간
내삼신봉!
내삼신봉의 유래도 삼신봉과 같으며 삼신(三神)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신(神)이 들어가는 3절에서 비롯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내삼신봉에서도 사방 조망은 좋은 편이다.
지리산 주능선은 삼신봉에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이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에서는 불무장등능선과 왕시루능선이 확실하게 구분되는데 불무장등에서 푹 꺼져 내려섰다가 황장산으로 오르는 V곡이 대단하게 보인다.
가야할 방향으로는 서쪽으로 이어가던 능선이 검게보이는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계속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검게보이는 무명봉이 송정굴이 있는 곳 무명봉이다.
그리고 송정굴 무명봉 좌측으로 1306.2봉 뒤편으로는 광양의 백운산과 억불봉이 보이고 산행종점이 되는 쌍계사 인근은 관측이 되지 않는다.
지나온 삼신봉을 보면 멀게 느껴지고 외삼신봉과 삼신봉을 견주어보면 삼신봉이 더 높은데 이곳에서는 외삼신봉이 아주 많이 높아 보이는 착시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조망을 하는 사이 이어서 대원들이 하나 둘 올라오고..... 함께 올라왔던 사람은 혼자서 저만치 내려서고 있다.
서둘러 내삼신봉을 내려서서 능선을 이어간다.
능선길은 좋다.
때로는 산죽 잎새에 햇빛이 반사되기도 하고 반사가 없는 곳에서는 싱싱한 산죽 푸른 잎새가 계절을 착각하게 만들고, 암튼 좋다.
가는 방향 능선으로 앞에 2개의 무명봉이 눈에 들어오고, 지리이정목 15-15를 지나면 밋밋한 무명봉 정상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1333m봉이며 1333m봉에서 내리막으로 1분 정도 내려서면 앞에 큰 무명암봉이 버티고 있으므로 등로는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우측으로 소로 길이 있어 내려가 보았는데 이곳이 송정굴이었다.
하마터면 송정굴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내삼신봉에서 볼 때 가야할 방향으로 우뚝 솟은 무명봉이 송정굴이 있는 무명암봉이다.
송정굴
송정굴은 조선시대 송정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난을 피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임진왜란을 겪던 시대에 송정이라는 인물이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사실여부를 떠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월간 산」지난8월호에는 청학동~삼신봉~내삼신봉~청학동의 원점회귀산행이야기가 실렸는데 산행기에는 송정굴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주에서 이곳 산행에 나선 이모씨가 비를 피하기 위해 송정굴에 머물렀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더라는 것이다. 분명 혼자였는데 누가 있는지 다시 확인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모씨는 송정굴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는 내용인데 필자도 오늘 혼자서 송정굴에 약5분을 머물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이야기라는 것이 바늘이 몸둥이 된다고, 카더라 하는 이야기가 몇 다리 거치면 바늘이 몸둥이로 바뀌는 것이니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서야 이런 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설악산 비탐구간만 4년동안 혼자서 다녀봤고, 때로는 혼자서 밤중에 지리산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귀신은 만나지 못했으니까........
송정굴은 굴이라기보다 거대한 바위가 거대한 바위틈새에 끼어 넓은 통로를 만든 터널형인데 터널형 통로는 무척 넓어 서서 지날 수 있는데, 높이 약1.5~2.5m, 좌우4~7m, 길이 약10m정도로 무척 큰데 선답자들이 올린 사진을 볼 때 개구멍같은 굴로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선답자의 글을 보면 뒤편으로 조금 오르면 기도터가 있다고 하는데 곳곳에 얼음이 얼어 위험하기 때문에 더 이상 오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송정굴 천장에도 고드름이 아주 여러 개가 굵게 달려있었는데 올해 들어 처음 보는 고드름이었는데 무척 큰 고드름을 보니 올겨울에는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송정굴을 보고 등로로 질러서 내려가는 길이 없으므로 50m 정도 되돌아가 3거리에서 상불재 방향으로 이어가야 한다.
3거리에서 1333봉과 송정굴이 있는 무명암봉 중간으로 내려가는 길은 아늑하고 따뜻했는데 뒤따라오던 대원이 이곳에서 쉬면서 간식을 먹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송정굴을 보지 못하고 그냥 내려선 사람이어서 송정굴 위치를 말해주었는데 송정굴을 갔다가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오늘 산행에서 주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곳은 삼신봉, 내삼신봉, 송정굴, 쇠통방위, 하동독바위, 불일폭포, 쌍계사인데 꼭 보고 가야할 명소를 보지 못한다면 힘들게 산행하며 허무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333봉과 송정굴이 있는 무명암봉 협곡을 내려서면 또다시 송정굴이 있는 무명암봉과 좌측으로 1306.2봉 협곡을 다시 내려서야 하는데 길이 무척 험해 눈이 온 후라면 조심해서 내려서야할 곳이다.
협곡을 내려서면 1306.2봉 밑둥을 따라 1306.2봉을 에돌아 능선을 이어간다.
지리이정목15-14를 지나며 다시 산죽이 이어지는 능선을 지나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청학동과 왕시루봉 능선방향을 보며 10분 정도 이동하면 능선 우측으로 참 잘 생기고 멋있는 전망바위가 나오는데 마치 영신봉 아래 창불대와 마주보고 있는 자살바위 복사판 같은 곳이다.
그런데 경관이 좋은 전망바위는 잡목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 같은데 잡목을 제거하면 이곳을 지나는 산객들이 쉽게 올라가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삼신봉과 내삼신봉에서 사방 조망을 했으므로 이곳은 그냥 지난다.
자살바위 복사판 바위가 있는 곳에서 1분을 지나면 밋밋한 1266봉 정상부인데 이곳 서쪽으로 간이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제한적으로 조망이 가능한 곳으로 왕시루봉과 황장산, 지리주능선은 노고단에서 토끼봉까지가 조망이 되며 능선 아래 범왕과 신흥일대가 조망권 안에 있다.
잠시 조망을 마치고 1266봉에서 내려서는데 여자들의 환호성이 계속 들린다.
무슨 일인가? 생각하며 3~4분 내려선 곳이 쇠통바위였는데 쇠통바위에 오른 여자들이 주변 조망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삼신봉~내삼신봉 산행은 우리가 처음으로 오른 것이 아니고 이 여자분들이 먼저 올랐고 우리 대원들이 뒤를 이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선답자들이 올린 사진으로 보던 쇠통바위는 작은 굴이 있는 조그만 바위로 생각했는데 쇠통바위는 어마어마한 암봉인데 암봉을 오르는 곳은 가운데 하늘을 향해 큰 구멍이 뚫린 바위로 눈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을 때는 아래서 위로 치켜 올려 찍으므로 사실감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사진으로만 보고, 또 지나치며 오르지 않고 쇠통바위를 운운하는 장님이 코끼리 발등을 만져보고 코끼리가 어떠하더라 이야기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쇠통바위에 오르면 사방이 통달한 조망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을 오른 여자들 7명이 환호에 환호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필자도 배낭을 내려놓고 쇠통바위를 올랐다.
2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쇠통바위 암봉은 북측에 있는 암봉이 더 높으며 안전하기는 남측에 있는 암봉이 더 안전하다.
북측 암봉위로 오르면 기분상 오늘 조망 중 최상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특히 산행을 시작한 청학동 일대를 환하게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신선봉이나 내삼신봉에서 조망하던 것과 거의 같으니 남으로 하동 금오산과 남해가 있고 상불재 뒤로 광양 백운산과 도솔봉이, 서쪽으로는 왕시루봉과 왕시루본 능선이, 그 앞쪽으로는 불무장등능선과 황장선이, 지리 주능선은 노고단, 반야봉, 토끼봉, 명선봉, 삼각고지, 형제봉, 가물거리게 벽소령대피소까지,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세석, 촛대봉,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전구간이 조망된다.
여자들의 환호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쇠통바위를 내려서서 등로로 접어들면 지리이정목 15-13이 있다.
산행을 마치고 며칠이 지나 쇠통바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여자분들의 산행기를 접할 수 있었다.
전국단위 여성 산악회로 민0여성산악회라고 했는데 서울과 지방 등 곳곳에서 출정한 이 사람들의 산행기를 보고 놀랍기도 했는데 송정바위 무명봉 위로 올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음 이곳 쇠통바위에서도 한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1299봉에서 등로를 벗어나 하동 독바위에서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젊음이 좋기는 좋은 것 같다.
산행팀들을 보면 남자들은 대부분 50대가 되어야 산행을 하는데 여성들은 30대 산꾼들도 많은 편이다.
지리이정목15-13을 지나면 길은 편하게 이어진다.
잠시 후 서서히 오름이 시작되며 좌우로는 앙상한 나뭇가지 뒤로 노고단 방향과 외삼신봉 방향으로 능선을 감상할 수 있다.
오늘은 날씨가 쌀쌀한 편으로 송정굴에 큰 고드름이 달려있는 것을 보았지만 육산 등로를 걸을 때면 서릿발이 서있어 밟으면 서릿발의 비명이 귓전에 들리고는 했다.
지나온 등로에 있던 서릿발은 모습을 땅속에 감추고 있었는데 이곳 오름길 등로 옆에는 긴 서릿발이 마치 악마의 이빨처럼 허옇게 드러내며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섰음을 알린다.
서릿발이 있는 등로를 지나면 우측으로 제법 괜찮은 암봉을 지나 밋밋한 1274무명봉에 올라 여장을 풀고 간식타임을 갖는다.
간식타임을 갖는 사이 산죽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분이 혼자 지나쳤는데 우리 대원인지, 아니면 쇠통바위에 올랐던 다른 팀인지 알 수가 없었고 뒤를 이어 쇠통바위에 올랐던 민0여성산악회원들이 줄지어 지나고, 우리팀 5명이 2차례에 지나므로 오래 지체할 수 없어 배낭을 챙기고 앞서간 팀의 뒤를 따른다.
1274무명봉에서 5분여를 오르자 이정표(삼신봉3.2km↔쌍계사5.8km)가 있는 1299봉 정상에 도착했는데 삼성궁 방향으로 금줄이 쳐있는 것을 보고 이정표 뒤로 정상적인 남부능선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지도를 확인하면 1299봉에서 쌍계사 방향으로 내려서다가 능선이 분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299봉 정상에서 삼성궁 방향으로 금줄이 있고 금줄 뒤로 길이 보였는데 이곳으로 5분 정도 내려서면 하동독바위가 있는데 당시에는 이를 알지 못했으므로 하동독바위를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데 민0여선산악회 여자분들은 이곳에서 금줄을 넘어 하동독바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1299봉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내려서기를 10분, 지리이정목15-11이 있는 능선에서 우리팀들이 잠시 쉬고 있어 합류 했고 5~6명이 팀을 이루어 신죽과 노각나무 고목이 있는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자 이정표(삼신봉4.1km↔쌍계사4.9km,↓삼성궁2.3km)가 나오니 이곳이 남부능선, 삼성궁과 쌍계사 방향으로 갈라지는 상불재3거리다.
▷청학동국공탐방안내소에서 상불재까지 산행거리6.58km, 산행소요시간3시간23분, 해발1111m, 현재시간 14시40분이다.
◎상불재에서 불일폭포 경유, 쌍계사 구간
상불재
상불재3거리는 중요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차량을 가지고 청학동으로 오는데 이럴 경우 원전회귀산행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산행코스를 삼신봉~내삼신봉을 지나 이곳에서 삼성궁으로 하산하는 곳이며, 쌍계사까지 산행계획을 세웠다가 체력에 문제가 있을 때 가까운 청학동으로 내려서기도 한다.
상불재에서 시작되는 하산 등로는 가파르게 내려서게 되는데 한동안 돌계단을 조성했으므로 안전하기는 하지만 무릎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계단 폭이나 높이가 높아 내려서며 충격을 많이 받게 되므로 아주 힘든 구간이다.
처음에는 우리팀들과 같은 속도로 내려섰는데 점점 무릎에 무리가 간다는 것을 느끼고 혼자서 천천히 내려섰으며 어느 정도 내려서자 너무 힘들어 지리이정목15-07에서 스틱을 꺼내 들었다.
한동안을 내려서자 돌계단이 끝나는데 이곳부터는 낙엽속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돌이 밟히며 무릎과 발목에 많은 부담을 준다.
다른 대원들을 모두 보내고 천천히 25분을 힘들게 내려서자 지리이정목15-08이 있는 목교를 지난다.
실제로 이곳부터는 길이 상당히 양호하므로 무릎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마라톤식으로 뛰어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인데 얼마나 무릎에 충격을 주었는지 빨리 갈 수가 없다.
어차피 산행대장이 제시한 시간 안에는 하산할 수 있으므로 천천히 걷기로 한다.
첫 번째 목교를 건너고, 바로 2번째 목교가 나오고 이어서 잣나무 수림이 나오더니 3번째 목교가 나오고 이어서 대나무 숲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느끼는 건 계곡을 따라 내려서던 등로는 잣나무 수림을 지나며 계곡과 점점 멀어지며 등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생각에 능선을 하나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하고 등로를 이어가자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는 곳에 지리이정목15-05가 있고 마치 동네 야산을 지나는 기분이다.
순탄한 길만 남았는 줄 알았는데 등로는 무명계곡을 가파르게 오르고 내려서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가파른 사면으로 내려섰고, 계곡을 아주 아래 깊은 곳에 있으므로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때로는 힘들게 내려서며 등로를 따르다 보니 국립공원 지리산 각 구간별로 입산통제를 알리는 입간판이 나오는데 산방기간에는 이곳까지만 산행이 허용되며 이제까지 내려선 구간은 통제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입간판 옆에 이정표(삼신봉6.9km↔쌍계사2.1km, 불일폭포0.3km) 가 있으니 이곳 3거리가 불일폭포 갈림길이다.
그 유명한 불일폭포를 이곳까지 와서 보지 않을 수도 없으니 가기는 해야 하는데 무릎상태가 너무나 안 좋은데 그래도 가야했다.
3거리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사면 아래로는 계곡이 아주 깊게 있는데 지그재그로 내려가나 생각했는데 미미한 능선을 넘고 넘으며 지나온 방향으로 역행한다.
불일폭포로 내려가는 곳에 불일암이 있다.
불일암 앞에서 앞서간 일행6명을 만났는데 반갑기도 했지만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 계곡길을 물으니 계곡길을 없고 다시 되돌아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불일암을 지나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는데 멀리서부터 폭포 물소리가 들리고 나뭇가지 너머로 보이는 폭포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계단을 내려서서 폭포 전망데크로 내려선다.
장관이다.
불일폭포는 예전부터 사진으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웅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늦가을 또는 초겨울이라 물이 많지는 않지만 이정도 물로도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멋있는데 여름철 장마철에 이곳을 찾는다면 불일폭포의 장엄함에 숨이 멎을 것만 같을 것이다.
1558년 지리산을 찾았던 남명 조식선생은 유두류록에 불일폭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서 불일암에 도착했다.
이곳이 곧 청학동이다.
이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 한 바위위에 있어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없었다.
동쪽에 높게 가파르게 솟은 곳은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 벼랑을 깎아 내어 만길 낭떠러지기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2~3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아래는 학연이 있는데 까마득하여 보이질 않는다.
---중략---
바람과 우뢰 같은 폭포소리가 뒤 얽혀 서로 싸우니 마치 천지가 개벽하려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아서 겨우 그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를 걷어내고 벽면을 살펴보니 삼선동(三仙洞)이라는 세글자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 문 밖 소나무 밑에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껏 술을 마셨다.
아울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메아리쳤다.
동쪽에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길 낭떠러지기로 쏟아내려 학담을 이루고 있었다.」
조식선생의 글에서보면 폭포 좌측 봉우리는 향로봉이고 우측 봉우리는 비로봉이라고 적었는데 최근에는 청학봉 백학봉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무슨 이유로 언제 왜 봉우리의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향로봉과 비로봉이 청학봉과 백학봉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남원부사로 있던 어우당 유몽인선생은 1611년 지리산을 두루 돌며 마지막으로 이곳 불일암과 불일폭포를 보고 유두류산록에 이렇게 적었다.
「드디어 불일암(佛日菴)에 도착하였다. 암자 앞에 평평한 대가 있고, 벼랑에 완폭대(玩瀑臺)라고 새겨져 있었다. 폭포수가 검푸른 봉우리 푸른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는 되어 보였다. 여산의 폭포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의 박연폭포(朴淵瀑布)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길이나 더 긴 듯하고, 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더 긴 듯했다. 다만 걸림이 없이 곧장 떨어지는 것은 이 폭포가 박연폭포만 못한 것 같았다. 」
유몽인 선생은 불일폭포와 박연폭포를 비교하며 길이는 불일폭포가 길지만 불일폭포는 경사가 완만한 폭포인반면 박연폭포는 직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1618년 지리산을 찾은 현곡 조위한선생은 불일암과 불일폭포를 보고 유두류산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절 앞에 십여 명 정도 앉을 만한 누대가 있는데 바위에 ‘완폭대(翫瀑臺)’ 세 글자를 새겨놓았으니 역시 고운이 직접 쓴 것이었다. 다섯 사람이 누대 위에 둘러 앉아 잔을 씻어 술을 따르고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악공에게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소리가 구름을 뚫고 나가 골짜기에서 메아리로 화답하였다.」
조식, 조위한, 유몽인 3사람의 글을 비교해보면 폭포가 웅장하다는 것은 동일하다.
조식선생이 불일암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며 피리를 불었다고 기록했으며 조위한 선생은 악공에게 피리를 불게하고 기생이 노래했다고 기록했는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산에서 악공이 피리를 불고 기생을 동반해 춤과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지체가 높은 사대부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혼자서 이리저리 각도를 재며 보고, 사진을 찍어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위에서 우리 일행 한분이 내려온다.
불일폭포를 배경으로 품앗이 사진을 찍는데 거리는 가깝고 폭포는 커서 카메라에 폭포를 담는게 쉽지만은 않다.
불일포포 한켠에는 불일폭포를 그린 2점의 그림이 있다.
한점은 겸재 정선의 「하동 불일암폭포」이고 또 다른 한점은 최근인 2018년에 그린 현석 이호신의 「불일암과 불일폭포」 인데 겸재의 그림은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그림이라고 하며 주석에는 겸재가 불일암과 불일폭포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겸재의 그림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고 적었는데 겸재의 「하동 불일암폭포」그림에는 겸재 낙관은 물론이고 작가가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낙관이 없다.
각자에 대한 이야기다.
조식선생은 폭포 어디엔가 이끼를 걷어내자 三仙洞(삼선동)이라는 글씨가 있다고 기록했고, 유몽인선생과 조위한선생은 1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에 고운 최치원선생이 새긴 玩瀑臺(완폭대)라는 글자가 있다고 기록했다.
현오 권태화님의 「현오와 걷는 지리산」299페이지 글을 옮기면 이렇다.
「2018년3월25일 지리산꾼 도솔산인 이영규는 이 선인들의 유람기에 나온 내용을 보고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玩瀑臺(완폭대)라는 각자바위를 ‘지리산역사문화지원단’의 일원으로 찾아 나선다.
집요한 탐사 끝에 위 바위를 발견하였고 이는 공단 직원 조봉근에 의해 공단은 물론 하동군에 보고되었고 2018년5월.10일. KBS9 뉴스에도 보도되었다.」(불일암과 불일폭포와 관련한 선인들의 유람기는 「현오와 함께하는 지리산」 297쪽에서 301쪽의 내용을 인용하여 편집했습니다.)
이영규님에게 박수를 보내며 응원한다.
그런데 조식선생이 이끼를 걷어내자 나타났다는 三仙洞(삼선동)이라는 각자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던 것 같은데 三仙洞(삼선동)이라는 각자는 아직 세상에 나타날 시기가 되지 않은 것인가? 三仙洞(삼선동)이라는 각자도 하루 속히 세상 빛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런가 하면 다름 한켠에는 작은 안내판에는 불일폭포는 고려시대에 지눌이 폭포 옆 암자에서 수도했다고 하는데 당시 왕은 지눌에게 불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로 암자는 불일암이라 했고, 폭포는 불일폭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불일폭포는 하동10경에 해당하는데 폭포좌측은 청학봉, 폭포우측은 백학봉으로 높이가 60m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불일폭포를 구경하고 일행 한사람을 남기고 먼저 올라선다.
조금 전 먼저 간 일행을 만났던 곳 옆이 불일암이라고 했으니 지눌이 수도를 했다는 불일암을 보고 갈 요량이었다.
불일폭포에서 불일암으로 되돌아 나오는 계단은 아주 힘들게 느껴졌고..... 힘들게 올라서 등로와 붙어있는 불일암으로 올라선다.
이번 산행을 하고 난 후 현오 권태화님이 쓴 산행기를 접할 수 있었는데 현오님은 이곳 불일암에서 폭포 상부 계곡을 지나 폭포 우측 청학봉까지 답사를 하였다고 했는데 폭포 위쪽으로 가는 길은 불일암 대웅전 뒤편으로 있는 것 같았다.
불일암을 둘러보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선인들이 불일암에서 보았던 비로봉(백학봉)과 향로봉(청학봉)의 풍경을 음미해보지 못하고 내려섰다는 것인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향로봉이나 비로봉도 가보아야 할 것 같다.
작은 마당에는 평상을 만들어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었고 앞 건물에는 佛日庵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대웅전은 뒤편에 있으며 좌측 옆으로 작은 요사채가 있는 작은 암자다.
그런데 불임암 편액이 있는 정면의 풍경을 담지 못했는데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는데 지나고 나면 그런 게 후회스럽다.
불일암 계단을 내려서려는데 폭포에 남겨둔 일행이 들어섰고, 들어서고 나가기를 하며 불일암을 나와 불일폭포3거리로 되돌아오니 일행들은 이미 가고 없고, 시간은 25분이 지나서다.
불일폭포3거리에서 등로는 지능선을 넘어선다.
그런데 깊은 산중은 틀림없는데 분위기는 야산같았고 주변에는 채소밭도 있고 건물도 몇 동이 있고 곳곳에 입간판이 있는데 확인하니 이곳이 불일평전이라고 하는데 건물 옆 산사면에는 돌로 작은 탑을 쌓았는데 소망탑이란다.
지리산국립공원에서 세운 입간판에 청학동 옛지도와 청학동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는데 나는 이때까지 우리가 처음 산행을 시작한 곳이 청학동으로만 알았는데 이곳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 안내판의 설명이 맞는다면 청학이 살던 원조청학동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1489년 지리산을 유람한 김일손은 속유두류록에서 「쌍계의 동쪽을 타서 지팡이를 짚고,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태로운 잔도를 기어오르기도 하여 두어 마장을 가니,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 나왔다. 세상이 여기를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라고 기록했으며 1618년에 지리산을 돌아본 조위한은 유두류산록에서 청학동으로 오르는 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가마를 타고 법당 뒤쪽을 따라 올라가니 정상이 너무 험해 부여잡고 오를 수가 없었다. 가마 메는 승려들은 풀무질하는 소리를 내면서 헐떡이고 소금기가 등에 배었다. 대여섯 걸음 가는 사이에 어깨를 바꾸고 다리를 바꾸며,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미는 통에 왼쪽으로 거꾸러지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니 가마 타는 고통이 가마 메는 것보다 뒤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지금은 아주 잘 나있는 등산로이지만 조선 중기 때만해도 화개에서 쌍계사 오르는 것만도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쌍계사에서 이곳 불일평전을 오르는 길이 무척 험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위한님 글에서는 가마를 타고 올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가마꾼이 승려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권세가 있는 사대부들은 사찰의 승려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의 많은 사찰 중 설악산 일대에 있는 사찰들의 경우 다른 문제도 있겠지만 권세 있는 사대부들 때문에 폐사한 곳도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으니 전국 명산명찰은 권세 있는 사대부나 벼슬아치들의 간섭으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불일평전의 대문 역할을 하는 곳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이 불일평전을 지켜주고 있다.
불일평전에서 잘 정리된 등로를 따라 5분 정도 내려서면 국립공원에서 세운 입간판이 붙들어 세우는데 입간판은 마족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위에 말 발자국이 음각되어 있다는 것인데 안내판에 의하면 고운 최치원이 말을 타고 가다가 남긴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탔던 말이 자국을 남겼다고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말발자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족대 옆이 설치한 벤치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라는 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마족대에서 바위에 새겨진 말발굽을 확인하는데 불일암에서 헤어진 일행이 내려왔고, “우리팀 중 마지막이냐?“고 물으니 우리 일행3명이 불일폭포를 보러 갔다며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3명은 뒤에 있다고 한다.
마족대에서 일행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3분을 내려서면 안내판이 또 잡아 세우는데 이번에는 원숭이바위란다.
별관심이 없이 사진 한 장을 찍고 안내판을 읽어 보니 남명 조식선생의 그 유명한 말씀이 이곳에 있는 이언경과 이홍연의 마애명을 보고 두루유록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나는 설악산을 오래 다니며 마애명이나 마애각을 무척 많이 보고 관심도 많이 가졌는데 마애명과 마애각을 새기는 선비나 관료들에게 일침하는 글을 남긴 분이 남명조식선생과 연암 박지원선생, 그리고 근세에 들어 노산 이은상선생 3분을 기억하고 있다.
남명 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 기록한 유명한 지침서가 이곳 원숭이 각자바위를 보고 남긴 것이라니 달리 보인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그 새가 과연 무슨 새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쉽게 이야기하면 옛날 조선시대에 대신들이 조회를 하거나 왕에게 진언을 하면 사관은 진언하는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사내라면 왕에게 백성을 위해 바른 말을 하는 것이 기록되어야지 아무도 없는 숲속바위에 이름을 새긴다면 후세사람들이 누구인지 어찌 알겠느냐?”라는 질책이다.
남명 조식선생은 지리산 이곳에서 이언경과 이홍연의 마애명을 보고 이렇글을 남겼다면 연암 박지원 선생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김홍연이라는 사람의 마애명을 보고 「연암집」에 이렇게 기록했다.
「풍악산을 유람할 때--(일부생략)--깎아지른 천길이나 높이 서있어 그 위에 나는 새 그림자 조차도 끊겼는데 김홍연이란 이름 세글자가 있었다.--(일부생략)--봉래 양사언도 이곳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거늘 저 이름을 써 놓은 자가 누구이기에 석공을 시켜 다람쥐와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했단 말인가?」라고 기록하며 혹독하게 꾸짖었다.
그런가 하면 노산 이은상 선생은 「설악행각」에서 비선대의 각자를 보고 이렇게 적었다.
「반석 위에는 어느 때 어떤 사람들인지 빈틈없이 이름을 새겼는데, 얼른 보니, 제각기 제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니라, 누가 이름 마차를 끌고 가다가 쏟아놓은 것 같이 보입니다. 비록 개똥이라도 그것은 주워가면 비료로 쓰려니와, 여기 흘려놓은 이 똥같은 이름은 주워가 쓸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왠지 모를 불쾌감을 주는 죄는 천추만대에 이 이름들이 지고 갈 것입니다.」
원숭이 바위를 보고 아무 생각없이 3분 정도 내려서니 입간판이 보이는데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분명 환학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
예상대로 환학대인데 안내판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 바위에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라고 한다.
실제로 환학대의 내용을 접하고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환학대는 경치가 뛰어난 곳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매우 컸는데 아무리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넓은 지리산에는 멋있는 경치에 멋있는 바위도 많은데 보잘 것 없는 이 바위에서 학을 불러 놀았다는 게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말기인 1902년 지리산을 유람한 송병순은 유방장록에서 「국사암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몇 리쯤 올라가자 하나의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면에 喚鶴臺(환학대라고 새겨져 있었다. 잠시 바위에 기대 머물렀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바위 앞면에 喚鶴臺리고 새겨져 있는데 올라설 때는 쉽게 볼 수 있지만 내려오면서는 세밀하게 살펴야 볼 수 있는데 뒤편에서 비석을 읽고 시간을 보내다 그냥 내려서느라 喚鶴臺라고 새긴 글씨를 보지 못하고 내려섰다.
그런데 사진으로 확인한 喚鶴臺는 다른 곳 마애각이 명필로 새긴 것에 비하면 이곳 약간 조잡하게 새겨져 있다.
환학대를 지나면 남은 건 쌍계사밖에 없다.
환학대에서 10분 정도 내려서면 지리이정목15-01이 나오고, 이정목을 지나면 좌측 잡목뒤로 쌍계사의 건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며 잠시 후 국사암갈린길3거리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쌍계사까지는 300m로 내려서는 길은 좋다.
이어서 금당 앞에 도착하며 쌍계사로 들어선다.
쌍계사는 와본 적이 없고 이번이 처음인데 사찰에는 관심이 없는데 사찰을 가면 꼭 보는 곳이 범종각인데 범종각도 일반적인 범종각이 아니고 불전사물을 갖춘 범종각으로 불전사물은 운판, 법고, 목어, 범종을 말함인데 불전사물에 대해 알아본다.
범종루는 불전사물을 보관하는 곳으로 불전사물(佛前四物)이란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범종(梵鐘)으로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의식용 법구로서, 이 네 개의 법구 모두가 절의 불전(佛殿) 앞에 놓여지는 까닭에 이를 불전사물이라 하는데 불전사물 중 운판은 天을, 법고는 地를, 목어는 水를, 범종은 萬物을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운판(雲板)
하늘의 소리로 날개를 펴다.
운판이란 원래 부엌에 매달아 대중들에게 공양시간을 알리기 위한 기구로 사용 되었는데 운판(雲板)의 외형은 대개 뭉게구름 모양으로 한 면에는 용의 형상과 범자를 새기며 다른 한 면에는 사찰의 이름을 새긴다.
운판이 구름 모양으로 조형된 까닭을 화재예방의 염원적 상징조형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구름은 곧 물이 되기 때문에 불을 다루는 부엌에서 화재예방의 염원으로 운판의 형상을 조형하였다는 이야기다.
또한 운판은 예불 때 운판의 울림 소리를 통해 허공을 헤매는 영혼을 천도하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조류계의 모든 생물들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고(法鼓)
땅의 모든 생물을 제도하다.
법고란 절에서 쓰는 불교의식용 북으로 이는 불법의 진리 싣고 울려 퍼지는 북을 말함이다.
법고를 칠 때는 마음 심(心)자를 그리면서 2개의 북채로 두드리는데, 여명의 고요 속에 흩어지는 장엄한 북소리를 듣고 땅위에 모든 생물이 안정을 찾는다.
목어(木魚)
잠들지 않는 수행의 길로 인도하다.
나무로 물고기의 형상을 만들어 그 배 부분을 파내고 그 사이를 막대기로 두드리면 몸통 사이에서 생겨나는 공명의 울림이 주변에 퍼지면 그 소리 듣고 살고 있는 수중 생물들은 한없는 해탈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는 밤낮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졸지 말고 늘 깨어서 꾸준히 수도에 정진하라는 뜻에서 그 형상으로 목어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범종(梵鐘)
만물을 깨워 세상을 밝히다.
범(梵)이란 우주만물이며 진리란 뜻으로 바로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이 범종이다.
따라서 범종은 그것의 장엄하고 청명한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며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고 참회한다는 신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쌍계사 범종각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들어갈 수가 없고 주변에서 방향을 바꾸며 보고 사진으로 담는다.
범종각에서 불전사물을 보고 대웅전 앞으로 갔는데 대웅전 앞에는 무슨 공사를 하는제 가설물이 있어 대웅전을 제대로 찍지 못하고 내려선다.
이어서 팔영루를 내려선다.
우리나라 사찰을 가면 건축물이 뛰어남을 새삼 느낄 수 있는데 팔영루 역시 요즘으로 치면 필로티 건물로 2층이지만 1층은 통풍을 위한 공간으로 건물이 오래 지나도 튼튼하게 유지되는데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통풍구조인 건축양식을 복사해서 필로티 건축양식으로 발전시켰나보다.
팔영루 계단을 내려서면 쌍계사9층석탑이 하늘 높게 솟아 있는데 이 탑은 1990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문화재는 아니고 일반 석탑일 뿐이다.
9층석탑을 내려서면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 일주문에 닿게 되는데 일주문 현판은 「三神山 雙磎寺」로 달려 있고 일주문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일주문(一柱)이란 기둥이 하나라는 것인데 쌍계사 일주문은 기둥이 2개였는데 그렇다고 2주문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나........
쌍계사 일주문의 이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라고 하는데 쌍계사 일주문 현판 원본은 성보불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쌍계사와 환학대, 불일평전에 나오는 선인들의 유람기는 「현오와 함께하는 지리산」 297쪽에서 301쪽의 내용을 인용하여 편집했습니다.)
김규진은 영친왕의 서예 스승이기도 하며 창덕궁에 희정당 안에 있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 그림을 그리려고 금강산을 2번 갔다고 한다.
또한 김규진은 순천송광사, 공주마곡사, 고성 건봉사, 부여고란사, 장성백양사 등의 편액도 썼으며 그밖에 많은 사찰의 편액을 쓸 정도로 서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김규진은 우리나라 사진작가1호라고도 하는데, 모두 다 좋은데 일제강점기 때 조금 잘 나가던 사람은 대부분 친일파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일주문을 벗어나 큰 길을 따라 내려서면 화개천에 놓인 쌍계2교를 건너 우측으로 넓은 주차장이 보이는데 이 주차장은 쌍계사입구 버스정류장과 붙어 있다.
아~~~오늘은 힘든 산행을 했다.
▷청학동국공탐방안내소에서 쌍계사입구 버스정류장 옆, 주차장까지 산행거리12.88km, 산행소요시간5시간57분, 해발86m, 현재시간 17시15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