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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관들은 무 태후와 이루하를 제외하고 모두가 남자였다. 남자들 가운데는 미시아에게 훨씬 높은 점수를 준 이들도 있었으나, 일부는 고조영의 체면을 생각해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혹자는, 미시아가 몰래 조영에게 공깃돌을 튕겨 조영의 검법시연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점수를 깎았다. 아, 하지만, 미시아가 남몰래 공깃돌을 던진 것은, 일개 여인의 범상한, 아니 고도로 계산된 행위였음을 그 누가 알았으랴? 그녀 역시 여자였다. 말하자면 모종의 이유 때문에 조영의 체면을 세워주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그녀가 조영의 물샐틈없는 검망劍網을 시험해 보았는지도 모른다. 만일 조영이 그녀의 암기를 검으로 막아내지 못했다면 조영은 그 강력한 공깃돌에 상당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암기를 튕겨냄으로써 미시아와 군웅 앞에서 그의 체면이 구겨지는 것은 모면할 수 있었다.
여미아가 조영에게 암기를 조심하라고 충고한 것은, 역시 그녀의 탁월한 예감능력 덕택이었을까, 아니면 미시아가 여미아에게 미리 귀띔해서 조영에게 남몰래 알려 달라 했었을까?
두 사람의 점수를 합산해보니, 우연히도 동일한 점수가 나왔다. 무 태후가 종합한 점수를 보고 있다가 빙그레 웃었다.
“흠! 몇몇 젊은이들은 조영공자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나이든 어르신들은 미시아 아가씨에게 높은 점수를 주셨군요.”
무 태후는 웃는 낯으로 장내를 둘러보다가 덧붙였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한 마디만 하고 끝내죠. 미시아 아가씨의 검법은 뭐랄까, 한편으로 겨울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을 쐬는 느낌이었고, 일면으로 따스한 봄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어지러운 감이 있었어요. 반면에 고 장군의 검술은, 비유컨대, 하늘에서 연이 흐느적흐느적 나는 것도 같았고, 나비가 하늘하늘 춤추는 듯한 환상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난 도무지, 검법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평은 군웅들이 듣기에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미시아의 검법은 무섭고 매서운 맛을 담은 한편 사람들을 현혹하게 했으나, 조영의 검술은 따스한 놀이 같았다.
무 태후가 말을 맺었다.
“두 분의 검법이 연합한다면, 서로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부로 미시아를 나의 시위장수로 선발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좋은 조언이라도 주실 분은 없는지요?”
모든 사람이 박수로 화답하고 한마디씩 축하 인사를 던졌다.
“폐하, 경하 드리옵니다.”
“무림의 여류 고수를 얻으신 것은, 폐하의 지극한 홍복이옵니다.”
“황태후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차가운 겨울 대기 속에서도 장내는 일순간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무 태후 일행은 그 날 고가장에서 그동안의 모든 두려움과 피로를 말끔히 풀었다. 고승은 며칠 후 큰 잔치를 열어 무 태후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무 태후의 요청에 따라 영주도독 조문홰와 송막도독 이진영도 자리를 같이했다.
잔치 자리에서 무 태후는 고승과 임가노장주 임장청, 조문홰, 이진영 등에게 동북지방의 화평과 안정을 위해, 그리고 화하민족과 이민족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애써달라고 당부하며 그들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현했다.
잔치가 파하고 임가장원으로 돌아온 노장주 임장청은 그의 손녀 장미여인 미시아를 불러 내밀히 부탁했다.
“시아야! 너의 소임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네, 할아버지.”
“낱낱이 말해보아라.”
“고려의 장수들인 연헌성, 이다조 장군을 포섭해 후고려에 협력하게 하는 한편, 백제의 흑치상지 장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역시 우리나라에 은밀히 협조하게 하는 거예요.”
“그들이 끝내 거절할 경우에는?”
“그들은 나라의 반역자들이니 당연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 태후를 타도하려는 반란세력이 일어날 경우, 무 태후를 적극 도와서 그들을 진압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태자 전하가··· 태평공주하고··· 혼인해서··· 당황실과 조정에 큰 세력을 형성하도록··· 음으로 양으로 돕는 것입니다.”
웬일인지 이번의 대답에서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말이 띄엄띄엄 이어졌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고 있었다.
임가노장주 임장청이 긴 탄식 끝에 말했다.
“시아야! 울지 말거라. 이 할애비의 가슴도 미어지는 것 같구나.”
그는 측은한 눈길로 미시아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사로운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대사 다음이니라.”
미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훌쩍거렸다. 임장청은 바깥에 눈길을 주며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그의 입이 열린다.
“내가 보니, 그 태평공주라는 여인이 연치는 어리지만 어미를 쏙 빼닮아 대단한 여걸이 될 것 같았다. 내가 구십 평생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은 좀 길렀단다. 어쩌면, 앞으로 늙은 무 태후가 사망한 후에, 그 아이가 당 황실과 조정에서 어미 무 태후에 버금갈 만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임장청은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가 천천히 덧붙였다.
“그녀가 고조영을 몹시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니 네가 중간에서 방해하는 대신 오히려 고조영을 설득해 그가 태평공주와 혼인하게 하는 날에는, 너의 대임이 거의 완수되는 셈이다.”
임가노옹은 가슴이 무척 저린 듯,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미시아를 가까이로 불러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태자전하께서 등극하시는 날도 올 것이다. 그 때는 너에게도 혹시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른다.”
미시아가 어느 샌가 훌쩍거림을 멈추고 조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낯에는 엄숙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이 할아비가 너에게 준 대임을, 너는 십이분 완수할 수 있겠느냐?”
임장청이 조용한 목소리로 미시아에게 물었다.
미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임장청의 얼굴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장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안다. 네 마음을···. 하지만 어쩌겠느냐? 그것도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지.”
할아버지가 말한, 하늘의 뜻일 수도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총명한 미시아로서도 쉽게 판별하기 어려웠다.
‘고조영과 태평공주 이영월이 혼인하는 것을 이름인가? 아니면 혹시 할아버지께서 내 속마음을 간파하고 계신 게 아닐까?’
하지만 미시아는 두렵고 또 일면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이튿날 무 태후는 태평공주, 회의와 이해고, 사비우, 조영과 극시아, 이루하와 여미아 등을 데리고 고승과 임장청의 배웅을 받으며 어디론가 바람처럼 떠나갔다.
고조영이 다시 돌아왔으므로 그의 아우 야발은 고가장에 남았다. 이 인물이 훗날 외국 각지를 돌며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단기고사檀奇古史>라는 중대한 사서를 저술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그의 후손 가운데서도 대진발해국 왕이 배출된다.
미시아는 약속대로 신변을 정리한 후 한 달 지나 낙양궁에 홀로 찾아가기로 했다.
얼마 후 무태후의 일행이 나타난 곳은 뜻밖에도 영주도독부 관아였다. 영주도독 조문홰에게 정사에 관한 보고를 받은 후, 도독부 관아의 영빈관에서 묵은 무 태후는 그 밤에 회의대사와 조문홰를 숙소로 조용히 불렀다.
조문홰가 들어가니 무 태후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곁에는 회의대사가 동석 중이었다.
“이 밤에, 대인을 이곳으로 오게 해서 대단히 미안하오.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무 태후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폐하의 명이라면 수화사지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조문홰가 엎드려 절하며 아뢰었다.
“내가 은밀히 강호를 돌아다니는 이유는, 대인도 알다시피, 백성의 안위를 살피는데 있소.”
그녀는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나라를 어지럽히며 백성을 못살게 굴고 역모를 꾀하는 무리들이 있으니 이 나라가 어찌 될지 모르겠소.”
“네? 그런 무리들이 또 있었습니까? 몇 년 전에 두 도적 서경업 서경유 형제가 소란을 피우다가 천벌을 받아 황천으로 간 것을 보고서도 그런 역적들이 있다니, 그들의 간덩이가 보통 부은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조문홰가 놀라는 표정으로 장황하게 말했다.
무 태후는 조문홰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용히 물었다.
“대인에게 한 가지 묻겠소. 고승과 임장청은 고려와 말갈의 정신적 지주들인데, 만에 하나 은밀히 군사들을 모아 반역이라도 일으킨다면, 대인의 지위는 어떻게 되겠소?”
조문홰는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일이라면 결단코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고려인들과 말갈인들, 그리고 송막도독 이진영의 휘하에 있는 거란인들은 대인의 말을 잘 듣고 있소?”
“그렇다마다입니까? 폐하의 위엄이 변방 끝까지 미친 오늘날, 대당에 복종하지 않는 오랑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무 태후가 은근히 미소를 짓고 곁의 회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분 대사께서는 대단한 신통력을 가지고 계신지라, 고승과 임장청, 그리고 이진영에게서 이미 역모의 기운을 읽었다오.”
“네, 그게 사실입니까?”
조문홰가 언성을 높였다.
“쉿! 대인, 입 조심을 하시오. 나도 그런 기운을 느낄 수 있소.”
그 무렵 무 태후는 공포정치를 펴는 가운데, 역모사건의 발생 우려에 대해 특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태후가 조정의 전권을 휘두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당시의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늘의 순리와 이씨 황실의 생리를 크게 거스르는 일이었으니, 무 태후가 자신의 내밀한 반대세력에 대해 그토록 칼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조문홰는 더 이상 입을 열수 없었다. 그가 물끄러미 무 태후를 쳐다보았다.
“어떻소? 조대인이 반역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는 게.”
조문홰는 속이 떨려왔다.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조대인의 앞날은 보장된 거나 다름없소.”
무 태후가 눈동자를 빛내며 덧붙였다.
“고려인들과 말갈인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조문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폐하, 죄송하오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어서 말씀하시오.”
“두 사람은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이라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사실이오. 하지만 늙을수록 교활하기가 이를 데 없다오. 만일 대인이라면, 어찌 반역의 기운을 보고 하루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소?”
“폐하, 송구하옵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대당의 안정을 위해, 그리고 이곳 동북지방의 평화를 위해 용단을 내려주시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조문홰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나는 조대인의 지혜와 모략을 믿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이 비록 우준하지만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사옵니다.”
“송막도독 이진영은 아직 충성심이 변치 않고 있으나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니, 좀 더 두고 잘 관찰하시오.”
이진영은 아직 쉰이 되지 않은 비교적 젊은 사람인데다 재중 거란인들의 실질적 통수자로서 얼마든지 무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므로, 무태후도 그를 건드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고승과 임장청도 쉽게 제거할 수 있는 만만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만 에 하나 무 태후가 정권 차원에서 그들을 반역자로 다루게 된다면, 고려인과 말갈인들에게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환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북방 이족들의 불안정한 분위기가 잔뜩 부풀어 오른 마당에 자칫 불씨라도 잘못 던지는 날에는, 분노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
무 태후는 쩔쩔매고 있는 조문홰에게 마지막으로 명했다.
“지금 즉시 성문을 열어주시오.”
“네?”
조문홰가 무슨 뜻인지 몰라 반문하자 무 태후가 다시 조용하게 말했다.
“이 시각에 바로 성문을 열어 우리가 나가게 해 주시오. 그리고 우리 일행을 깨워서 모두 떠날 차비를 하게 해 주시오.”
그 날 밤 무 태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야음을 이용해 낙양성을 목표로 삼아 길을 재촉했다.
곁의 회의가 물었다.
“폐하, 갑자기 무슨 일로 이렇게 밤길을 재촉하십니까?”
“궁을 비워둔 지 너무 오래되었네. 예감이 불길해. 윤閏 정월이 되기 전 궁에 들어가야 하네.”
궁에 돌아온 즉시, 무 태후는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자신의 손자들, 즉 당금황제 예종 이단의 아들들을 왕으로 임명한다.
무 태후 일행이 떠나간 다음 날, 조문홰는 심복부하인 서연을 은밀하게 불렀다.
“폐하가 나를 신임해 내게 밀명을 주고 떠나가셨네.”
“···?”
조문홰는 무 태후의 부탁을 잠깐 설명한 후 말했다.
“이 일은 자네가 맡아주게. 물론 거란인들을 시켜 성사해야 하네. 거란인 흑도 가운데, 이름난 살수煞手(살인청부업자)들을 섭외해보게.”
“믿을 만한 이들 가운데는, 그래도 대도大盜 귀수신투鬼手神偸가 으뜸입니다.”
“그 자들이 훔치는 데는 능하고 그들 덕분에 우리가 지난 번 후고려왕 고중상의 밀서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들이 살수殺手에도 능한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적절한 자를 고용할 수도 있습니다.”
조문홰가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들의 무공武功이 몹시 뛰어난 듯하고, 그들 주위에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데, 어떻게 그들을 쉽사리 제거할 수 있을까?”
“이 일은, 무예만으로는 성사하기 어렵습니다. 알맞은 기책과 적절한 기회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주방 사람들을 포섭해 음식에 독극물을 탄다든가···.”
조문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만 믿겠네.”
한편, 무 태후 일행을 보낸 고승과 임장청도 그 시각 역시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숙의하고 있었다.
“노황 기하, 이번에 무 태후가 우리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나, 자신이 실질적으로는 감금당해 있었으니, 차후에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설사 우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우린 이미 살대로 산 사람들인데, 목숨이 뭐가 아깝겠습니까?”
“그야 그렇습지요.”
임장청은 천정을 쳐다보다가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으로 우리 삼한의 후예들(고려인들과 말갈인들)이 봉기라도 일으킨다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채 준비도 완수되기 전에 미숙하게 사건을 일으킨다면, 우리의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 있겠소.”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살수煞手를 고용해 은밀히 접근할 것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이라 했으니 늙은 목숨 구차하게 연명해 뭘 하겠습니까? 우리의 계획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본국인 후고려가 있으니, 그들에게 고토수복을 맡기면 될 것입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신다면, 내 자손들이 이 땅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시면 아무래도 위험할 테니, 방비가 든든한 우리 임가장으로 와서 묵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말씀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을 지키다가 의롭게 죽을 작정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제 손주 녀석을 잘 건사해주십시오. 저는 임대인만 믿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 소립니다. 정 그러시다면, 더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아무쪼록 몸조심하십시오.”
그 날 밤 고승은 유서를 작성해 장롱 속에 넣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계성 북문 밖의 고가장과 계성 서쪽의 임가장은, 숱한 비밀을 안고 어둠 속에 함께 잠들었다.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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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7. 20. 장마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