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상용(二目上容)의 경전
오종락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의 이목구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날마다 마주하는 평범한 얼굴이건만, 선인들의 옛 글귀를 빌려 그 구조를 틔워보니 새삼 깊은 우주적 질서가 느껴진다. 이른바 ‘이목상용(二目上容)’이다. 두 눈이 얼굴의 가장 높은 곳에 놓인 까닭은 당장 눈앞의 이익과 편협한 근시안적 소견에 갇히지 말고 세상을 멀리, 그리고 깊게 내다보라는 뜻이라 했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함의요, 그 귀가 입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것은 내 얄팍한 주장보다 타인의 음성을 더 존중하라는 하늘의 준엄한 설계도다. 게다가 눈과 입은 내 의지로 닫을 수 있으되, 귀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으니, 이는 세상의 지혜와 타인의 아픔을 마음대로 차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몸의 구조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도덕경이자 인생의 지침서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아는 것이 힘이고, 많이 보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 살고 있다. 더 많은 정보를 쥐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입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역설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옛이야기 속 한 마님의 일화는 내 오만한 지적 탐닉에 강한 경종을 울린다. 생란을 밥에 비벼 먹기를 즐기던 마님이 문틈으로 몸종의 실수를 목격했다. 마루에 떨어져 깨진 달걀을 슬그머니 접시에 담아 상을 내오는 몸종의 모습을 보며 마님은 괘씸죄를 물으려 했다.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날카로운 질문에 몸종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안 보이면 깨끗한 것입니다.” 이 소박하고도 깊은 한마디에 마님은 무릎을 탁 치며 노여움을 거두고 용서했다. 안 보이면 깨끗한 것, 모르면 차라리 약이 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은폐나 무지가 아니라, 때로는 삶의 허물을 덮어주고 넘어갈 줄 아는 관용이자 지혜의 영역이다.
장자는 일찍이 지혜가 도리어 인간을 해친다는 것을 깊이 간파한 성자였다. 그는 《장자》 내편에서 ‘응제왕’의 우화를 통해 ‘혼돈’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남해의 임금 숙과 북해의 임금 홀이 중앙의 임금 혼돈의 대접에 보답하고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일곱 구멍(눈, 코, 귀, 입)을 혼돈에게 하루에 하나씩 뚫어주었다. 그러나 이레째 되던 날, 온전한 이목구비를 갖추게 된 혼돈은 도리어 죽고 말았다. 분별하지 않고 온전하게 비어 있던 자연의 상태에 억지로 인위적인 앎과 감각의 구멍을 내자, 본연의 생명력이 소멸해 버린 것이다.
서양의 역사에서도 이와 닮은 서글픈 지혜의 한계가 존재한다.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는 아폴론 신에게 미래를 보는 예언의 능력을 선물 받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저주를 동시에 받았다. 조국의 멸망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매 순간 선명하게 보면서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던 그녀에게, ‘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영혼을 갈기갈기 찢는 잔혹한 형벌이자 재앙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었을 비극적 앎의 무게다.
한편, 삼국지 속 조조의 그늘 아래서 천재적 지략을 과시했던 양수 역시, ‘계륵(鷄肋)’이라는 단어 속에 담긴 조조의 속내를 어설프게 먼저 알아맞혔다가 목숨을 잃었고, 후대의 역사는 이를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기록했다. 소동파 역시 그의 시 ‘인생식자우환시(人生識字憂患始)’에서 “인생은 글자를 알 때부터 우환이 시작된다”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예리하게 분별하기에 우리는 쓸데없는 근심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다. 성철스님께서 수행자들을 향해 “책을 읽지 말라”고 사자후를 토하셨던 이유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리라. 책 속에 담긴 타인의 생각과 어설픈 지식 조각들을 제 비장인 양 착각하여 아집만 키우는 독서라면, 차라리 마음을 하얗게 비워두는 면벽(面壁)의 침묵보다 못하다는 경고였으리라.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숱한 후회와 상처들도 대부분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고,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어설프게 알아채며, 닫아야 할 입을 성급하게 열었던’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 타인의 허물을 굳이 들추어내어 확인하려 들고, 내가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 상대를 재단하려 했을 때, 내 마음의 평화는 깨어지고 관계는 금이 갔다. 상대방이 들어서 결코 이롭지 않을 이야기라면, 설령 그것이 진실의 조각일지라도 내 가슴속 깊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것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예의요 진리임을 나이가 들수록 뼈저리게 깨닫는다.
눈은 감을 수 있고 입을 닫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적 침묵의 자유가 있음을 뜻한다. 비록 귀는 열려 있어 세상의 온갖 소음과 허물을 다 받아들일지라도, 내 마음의 여과기를 거쳐 보이지 않는 듯 덮어주고, 모르는 듯 품어주는 넉넉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낀다. 앎의 화려함보다 비움의 깨끗함이 더 고귀하다는 몸종의 대답을 마음에 깊이 품는다. 이목상용의 가르침대로, 시선은 멀리 두어 사소한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되, 내면은 맑게 비워 삶의 우환을 스스로 지워 가리라.
오늘 밤, 거울 너머 나를 바라보는 두 귀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세상의 허물은 조용히 품어 안고 섣부른 앎의 소란은 고요히 비워내며, 몸이 일러준 우주적 침묵의 길로 비로소 한 걸음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