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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문학기행을 마치고
김영애
우리 회의 연간 계획에 문학기행을 삽입하긴 했지만 실행에는 반신반의 했다. 회원들의 거주지가 전국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회의 끝에 서울과 가까운 파주 일원을 탐방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쉽게 성사를 보게 되었다. 마침, 파주 일원에 산재해 있는 유적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 효봉 박사님께서 안내를 자청해 주셨다. 덕분에 무료 가이드님을 동반하게 되는 호사로운 문학기행이 예견되었다.
5월 19일 출발 일에는 우리 회원 외에 문복선 시조문우회 회장님, 김순희 시인, 김광식 시인. 오인성 시인. 김장수 시인께서 함께 출발했다. 같은 분야에 같은 관심을 가진 분들과 새로 사귀는 건 여행의 보너스 일 것이다.
임진강을 낀 파주는 예부터 하천과 강이 많아 물류이동이 많았고 따라서 임진강변은 늘 흥겨운 노래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강 건너에 북한을 마주하여 지리적으로 군사의 요충지였고 군사도시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 이면에 파주는 세조의 처가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며 황희 정승, 율곡 이이선생의 유적이 많은 곳이기도 하고 천혜의 경관이 많기로도 유명하다는 기초지식만 가지고 승합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 효봉 박사님께서는 준비하신 파주탐방 계획서를 일행에게 배부해 주시고 일정을 소개하시면서 곧 닿게 될 순차적 목적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먼저 황희정승 유적지에서 차를 내렸다. 황희정승의 기념관을 거쳐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반구정(伴鷗亭)에 도착했다. 기암절벽 위에서 푸른 솔숲을 거느리며 임진강 푸른 물이 허리를 길게 늘여 흐르는 모습을 굽어보며 서 있는 반구정의 자태는 작지만 고고했다. 몇 점 편액들이 세월을 담은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황희 정승께서 87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으며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한다. 맑은 날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니 반구정에 앉아 송악산을 건너다보시며 정승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고려의 패망과 조선의 개국을 몸소 겪고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다 파주와 남원으로 유배된 파란만장의 인생 역정과 조선조 네 분 왕을 모신 영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나날을 보내셨을 테지.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와 영정을 모신 영당지를 참배했다. 신생국 조선을 안정시키고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평생의 노고와 관료들의 표상, 청백리로 남아주신 족적에 깊이 감사드렸다.
화석정을 찾았다. 황희정승께서 말년을 반구정에서 보내셨다면 율곡 이이 선생께서는 화석정에서 말년을 보내셨다. 원래 화석정은 고려 말의 유학자 길재가 조선이 개국하자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으나 폐허가 되었고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이 정자를 세우고 증조부가 중수함을 거쳐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고 이이선생께서 중수하셨다고 한다.
화석정은 다 아는바와 같이 이이 선생께서 선조 때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건물에 기름을 발라 두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갈 때 기름배인 정자를 태워 바닷길을 밝혔다는 아픈 과거가 있는 정자이기도 하고 율곡 선생의 혜안을 증명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전소(全燒)된 후 80여 년간 폐허로 있다가 율곡의 증손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1966년 파주시 유림들이 복원하고 1973년도에 율곡선생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침과 내란이 끊어지지 않는 이 땅에서 유서 깊은 정자 하나가 몸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느꼈다. 정자의 내부에는 율곡선생께서 8세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世賦詩)"가 있다.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숲 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끝이 없어라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 리 바람을 머금는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변방의 기러기는 누구를 뜻할까. 이러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는 것일 테다. 8세 어린이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천재성이 보이는 작품이라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구절구절 놀랍지 않은 구절이 없지만 ‘산이 외로운 달을 토해낸다’는 기막힌 시상이 어떻게 8세 아이에게서 떠오를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시 한 수 빚기 위해 아무리 연마한들 범인(凡人)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아 내 솜씨가 은근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순간이었다. 화석정에서 임진강의 물결을 보며 이 시를 음미하는 이 순간만 갖더라도 오늘 여행의 목적은 다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주 화석정(花石亭)
설봉 한휘준
여덟 살 이율곡이 지은 시(詩) 남아 있네
임진란 예견하여 십만 양병 선견 주장
전설 속 나도 밤나무 경이롭던 발자취
황톳물 구비치는 임진강 나루터에
갈매기도 통곡하던 빗속의 몽진 길을
어둠 속 온몸을 태워 불을 밝힌 화석정
여울 물 한탄(恨灘)소리 임진강 다다르면
메기도 기러기도 평화롭게 오가는데
역사는 반복이 되어 허리 잘린 아픔뿐 .
5백여 년 후에 현장을 찾은 한 후학, 설봉 한휘준 시인이 선생을 기리며 지은 시조이다.
천재적 소질을 가진 선생의 "팔세부시(八世賦詩)" 에 비할까만 즉석에서 이렇게 짓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옛 시인이나 현 시인이나 불우한 조국에 대한 걱정은 다 같다는 생각이다.
자운서원을 찾았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후에 김장생 과 박세채 선생을 추가로 모시기도 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라는 효봉 박사님의 설명을 들었다.
율곡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율곡모자분의 동상을 만났다. 모자분의 동상이 건립된 예는 이 곳 뿐일 것이다. 70년에는 사직공원에 모셔져 있던 것을 파주 이이 유적지로 이전 복원하여 2015년 10월에 제막식을 했다는 안내자의 설명이 있었다. 입구 가까운 곳에 이이선생의 일대기를 적은 신도비를 비롯하여 자운서원, 가족묘역과 기념관을 포함하고 있는 경내는 눈이 모자라게 넓고 깨끗했다. 오월 하순치고는 좀 따가운 더위이지만 가을이면 단풍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고 봄이면 벚꽃으로 화려할 것 같은 경내 분위기다.
율곡선생께서는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으나 6세 때 아버지가 계시는 파주 밤나무골, 율곡리로 와서 성장하여서 호도 율곡이라 했으니 선생께서는 파주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분이라 생각된다. 서원 서편에 있는 가족묘역에는 통상의 예를 깨고 신사임당의 묘소가 아래에, 이이선생의 묘소가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례를 벗어난 이를 두고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다는 안내자의 설명이 있었다. 확인되는 자료 없이 추정되는 몇 가지 설(說) 가운데 아들이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월등히 훌륭할 때는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쓸 수 있다는 설(說)에 한 표를 둔다.
이름도 정겨운 임진강 나루터에 도착했다. 말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만 할 뿐 민족의 가슴에 늘 애잔한 그늘로 남는 임진강! 분단이후 50여 년 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있던 곳인데 최근에 유람이 허용되었다니 감사하게도 임진강의 숨겨졌던 비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황포돛배가 우리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를 외양상 그대로 복원했다는데 다른 점은 바람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동력선이라는 것이다. 노란 돛을 걸고 바람에 몸을 맡겨 유유히 임진강을 오르내리며 부(富)를 강 유역에다 나르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동하는 차에서는 효봉 박사님의 사전설명을 듣느라고, 현장에 내리면 설명과 견주어 견학하느라고 담소도 제대로 못 나누었는데 선착장에서 승선 시간을 기다리면서 모처럼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난 시인들도 금방 친교가 되는 건 우리들 사이에 시조라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매표직원이 문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 효봉 박사님께서 저서를 한 권 증정했다. 너무 감사해 하는 그녀가 인상적이었다. 책을 가치 있게 알아주는 눈을 가진 이는 이미 선비이다.
두지리에서 배가 출발하자 자장리까지 45분간 임진강의 절경이 펼쳐졌다. 선장은 주요명소마다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거북바위, 토끼바위 임진적벽, 원당리 절벽, 쾌암, 호로고루성, 고랑포 여울목을 지나면서 진지하게 때로는 농을 섞어 45분을 잠깐 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자장리 주상절리 앞에서는 세월이 만들어낸 오묘한 문양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는 60만 년 전에 현무암지대에 임진강물이 흘러들어 침식현상에 의해 수직으로 만들어진 절벽이라 한다. 후일 겸재 정선 선생의 임진적벽도의 실제배경이 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역사적 사실 앞에 우리가 서 있었던 셈이다. 멀리 부여에서 새벽길을 마다않고 문학기행에 참여해주신 들샘 선생님께서 절경을 놓치지 않고 한 수 읊으셨다.
임진강 두지나루
들샘 이흥우
황포돛 뱃길 따라
그려낸 수직적벽
고랑포 여울목은
화폭을 걸쳐놓아
임진강
두지나루에
정선 화백 뵈옵네
종장에서 절대적 동감이다. 돛배가 조용해서일까. 지척에 보이는 북한 땅 때문일까. 아니면 방금 북한을 스쳐 흘러 온 강물의 수심(水心)을 읽은 때문일까, 흐르는 돛배에 앉아 푸른 물결을 보며 못하는 술이지만 딱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일행들도 멋에 겨워 소주 한 잔을 찾는다. 승선 할 때 소주는 고사하고 먹을 것이라고는 과자 한 조각도 준비하지 않았다. 하선 하면 그 유명한 임진강 매운탕으로 점심을 할 계획이어서 시장기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만 우리는 반대로 오찬도 명승지 견학 후로 잡았던 것이다.
황포돛배
벽파 김일영
임진강 두지나루 황토물 거슬러서
전설로 가득채운 강변의 역사 유적
수만 년 노을 빛 젖어 적벽으로 서 있네.
사연도 많은 황포돛배로 묵묵히 흐르는 임진강을 유람하고 내린 사무국장 김일영 시인이 즉석으로 읊은 시조이다.
두지리 매운탕 집은 예약이 되어 있었지만 워낙 손님이 많아 잠시 기다려야 했다. 자고로 외지에서 식사를 하려면 붐비는 집을 택하라고 했다. 붐비는 집은 음식의 질과 맛을 검증받은 곳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손님이 밀고 밀리는 상황은 매운탕에 대한 기대감을 더 크게 갖게 했다. 약간의 시장기에 기다렸다가 받은 점심상으로 매운탕 최고의 진수를 맛보았다고 입을 모았다.
식사 후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감악산 출렁다리로 향했다. 효봉 박사님께서 고개가 높지는 않다고 안내하면서 등산을 유도하셨지만 어쩐지 산 이름에서 좀 까다로운 등산길이 예상되었다. 역시 짧지만 힘든 깔딱 고개로 이루어진 길 끝에 건너편 산에 있는 법륭사를 잇는 예쁜 현수교가 산과 산을 소통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12층의 높이로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게 출렁출렁 거려도 900명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다리라니 우리의 기술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막 신록이 짙어지는 산과 가물거리는 강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값을 마음대로 붙이는 빙과 하나를 먹는 맛도 잊지 못할 만큼 달콤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파평 윤 씨 가문과 청송 심 씨 가문의 긴 법정 공방을 효봉 박사님으로부터 자세히 들으면서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고려 중기 문신인 윤관장군의 묘역을 찾았다. 임진왜란 전후 500여 년간 윤관 장군의 묘소가 확인되지 못하다가 영조 40년에야 후손들로부터 현 위치에서 구비파편(舊碑破片)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께서 봉분을 조성하고 제사를 허락함으로 윤관의 묘소로 공인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윤관 장군의 묘역은 고고학적 측면보다 윤관 장군의 용맹과 북방강토수호를 기리는 묘역으로서 사적 323호로 지정 되었다. 특이한 점은 묘역 안에 장군께서 출정하실 때 하사받은 교자를 사후에 부장한 교자총비(橋子塚碑)가 있다는 것이다. 능에 비교될 만큼 화려하다할까, 웅장하다 할까. 나라를 위한 충절이 컸다면 사후 묘역이 아무리 거창한들 무슨 탓이 있으랴. 그저 장군께 감사 할 뿐이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스럽긴 한데 오월 볕이 여름 흉내를 내는지 일정이 마무리 될 즈음 덥기를 더 보탰다. 산을 오르내린 후라 모두들 지쳐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계획된 용미리 용암사의 석불입상을 보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며칠 후면 초파일이라서 스님들의 손길이 분주하고 절 마당에는 고운 등이 하늘을 메웠다. 갓을 쓴 석불은 산중턱에 모셔져 있었다, 이 석불을 보고 경북 안동시 제비원(연미사)에 있는 머리에 갓을 쓴 석불이 생각났다. 전국 사찰에 석불은 많아도 이와 같이 갓을 쓴 석불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안내 하신듯하다. 두 곳의 석불이 천연바위를 몸체로 하고 머리를 따로 올린 것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으나 안동 연미사는 부처 한 분을 모셨고 용암사는 남녀 두 분을 모셨다는 차이가 있다. 이 곳 지역민들은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이고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믿으며 왕자가 없는 고려 선종이 왕자 한산후를 얻게 된 전설이 있어 아들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계획된 곳을 한 곳도 빠짐없이 견학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했다. 개인적으로 파주는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방문의 기회가 없었다. 단편적으로 경치 좋은 유적지이며 군사도시 정도로 알았던 곳을 충절의 고장이며 문향이고 예향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감동이 두 배가 되었다. 시간상 못 가 본 그 외의 지역, 현대를 선도하는 파주의 모습을 내년 문학기행으로 기약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문화재 콘사이스‘라는 별명을 얻으시며 조금이라도 더 세세히 설명해 주시려고 애쓰신 효봉 박사님께 감사드리며, 부여에서 보령에서 영주에서 충주에서 장거리를 마다 않고 참여해주신 회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서투른 진행과 불편한 좌석에서도 불평 없이 협조해 주신 오늘 처음 만난 네 분 시인님들께도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시조활동을 통해 또 만났으면 한다.
파주 문학기행을 마치고
김영애
우리 회의 연간 계획에 문학기행을 삽입하긴 했지만 실행에는 반신반의 했다. 회원들의 거주지가 전국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회의 끝에 서울과 가까운 파주 일원을 탐방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쉽게 성사를 보게 되었다. 마침, 파주 일원에 산재해 있는 유적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 효봉 박사님께서 안내를 자청해 주셨다. 덕분에 무료 가이드님을 동반하게 되는 호사로운 문학기행이 예견되었다.
5월 19일 출발 일에는 우리 회원 외에 문복선 시조문우회 회장님, 김순희 시인, 김광식 시인. 오인성 시인. 김장수 시인께서 함께 출발했다. 같은 분야에 같은 관심을 가진 분들과 새로 사귀는 건 여행의 보너스 일 것이다.
임진강을 낀 파주는 예부터 하천과 강이 많아 물류이동이 많았고 따라서 임진강변은 늘 흥겨운 노래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강 건너에 북한을 마주하여 지리적으로 군사의 요충지였고 군사도시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 이면에 파주는 세조의 처가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며 황희 정승, 율곡 이이선생의 유적이 많은 곳이기도 하고 천혜의 경관이 많기로도 유명하다는 기초지식만 가지고 승합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 효봉 박사님께서는 준비하신 파주탐방 계획서를 일행에게 배부해 주시고 일정을 소개하시면서 곧 닿게 될 순차적 목적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먼저 황희정승 유적지에서 차를 내렸다. 황희정승의 기념관을 거쳐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반구정(伴鷗亭)에 도착했다. 기암절벽 위에서 푸른 솔숲을 거느리며 임진강 푸른 물이 허리를 길게 늘여 흐르는 모습을 굽어보며 서 있는 반구정의 자태는 작지만 고고했다. 몇 점 편액들이 세월을 담은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황희 정승께서 87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으며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한다. 맑은 날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니 반구정에 앉아 송악산을 건너다보시며 정승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고려의 패망과 조선의 개국을 몸소 겪고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다 파주와 남원으로 유배된 파란만장의 인생 역정과 조선조 네 분 왕을 모신 영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나날을 보내셨을 테지.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와 영정을 모신 영당지를 참배했다. 신생국 조선을 안정시키고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평생의 노고와 관료들의 표상, 청백리로 남아주신 족적에 깊이 감사드렸다.
화석정을 찾았다. 황희정승께서 말년을 반구정에서 보내셨다면 율곡 이이 선생께서는 화석정에서 말년을 보내셨다. 원래 화석정은 고려 말의 유학자 길재가 조선이 개국하자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으나 폐허가 되었고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이 정자를 세우고 증조부가 중수함을 거쳐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고 이이선생께서 중수하셨다고 한다.
화석정은 다 아는바와 같이 이이 선생께서 선조 때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건물에 기름을 발라 두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갈 때 기름배인 정자를 태워 바닷길을 밝혔다는 아픈 과거가 있는 정자이기도 하고 율곡 선생의 혜안을 증명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전소(全燒)된 후 80여 년간 폐허로 있다가 율곡의 증손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1966년 파주시 유림들이 복원하고 1973년도에 율곡선생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침과 내란이 끊어지지 않는 이 땅에서 유서 깊은 정자 하나가 몸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느꼈다. 정자의 내부에는 율곡선생께서 8세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世賦詩)"가 있다.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숲 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끝이 없어라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 리 바람을 머금는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변방의 기러기는 누구를 뜻할까. 이러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는 것일 테다. 8세 어린이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천재성이 보이는 작품이라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구절구절 놀랍지 않은 구절이 없지만 ‘산이 외로운 달을 토해낸다’는 기막힌 시상이 어떻게 8세 아이에게서 떠오를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시 한 수 빚기 위해 아무리 연마한들 범인(凡人)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아 내 솜씨가 은근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순간이었다. 화석정에서 임진강의 물결을 보며 이 시를 음미하는 이 순간만 갖더라도 오늘 여행의 목적은 다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주 화석정(花石亭)
설봉 한휘준
여덟 살 이율곡이 지은 시(詩) 남아 있네
임진란 예견하여 십만 양병 선견 주장
전설 속 나도 밤나무 경이롭던 발자취
황톳물 구비치는 임진강 나루터에
갈매기도 통곡하던 빗속의 몽진 길을
어둠 속 온몸을 태워 불을 밝힌 화석정
여울 물 한탄(恨灘)소리 임진강 다다르면
메기도 기러기도 평화롭게 오가는데
역사는 반복이 되어 허리 잘린 아픔뿐 .
5백여 년 후에 현장을 찾은 한 후학, 설봉 한휘준 시인이 선생을 기리며 지은 시조이다.
천재적 소질을 가진 선생의 "팔세부시(八世賦詩)" 에 비할까만 즉석에서 이렇게 짓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옛 시인이나 현 시인이나 불우한 조국에 대한 걱정은 다 같다는 생각이다.
자운서원을 찾았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후에 김장생 과 박세채 선생을 추가로 모시기도 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라는 효봉 박사님의 설명을 들었다.
율곡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율곡모자분의 동상을 만났다. 모자분의 동상이 건립된 예는 이 곳 뿐일 것이다. 70년에는 사직공원에 모셔져 있던 것을 파주 이이 유적지로 이전 복원하여 2015년 10월에 제막식을 했다는 안내자의 설명이 있었다. 입구 가까운 곳에 이이선생의 일대기를 적은 신도비를 비롯하여 자운서원, 가족묘역과 기념관을 포함하고 있는 경내는 눈이 모자라게 넓고 깨끗했다. 오월 하순치고는 좀 따가운 더위이지만 가을이면 단풍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고 봄이면 벚꽃으로 화려할 것 같은 경내 분위기다.
율곡선생께서는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으나 6세 때 아버지가 계시는 파주 밤나무골, 율곡리로 와서 성장하여서 호도 율곡이라 했으니 선생께서는 파주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분이라 생각된다. 서원 서편에 있는 가족묘역에는 통상의 예를 깨고 신사임당의 묘소가 아래에, 이이선생의 묘소가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례를 벗어난 이를 두고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다는 안내자의 설명이 있었다. 확인되는 자료 없이 추정되는 몇 가지 설(說) 가운데 아들이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월등히 훌륭할 때는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쓸 수 있다는 설(說)에 한 표를 둔다.
이름도 정겨운 임진강 나루터에 도착했다. 말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만 할 뿐 민족의 가슴에 늘 애잔한 그늘로 남는 임진강! 분단이후 50여 년 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있던 곳인데 최근에 유람이 허용되었다니 감사하게도 임진강의 숨겨졌던 비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황포돛배가 우리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를 외양상 그대로 복원했다는데 다른 점은 바람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동력선이라는 것이다. 노란 돛을 걸고 바람에 몸을 맡겨 유유히 임진강을 오르내리며 부(富)를 강 유역에다 나르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동하는 차에서는 효봉 박사님의 사전설명을 듣느라고, 현장에 내리면 설명과 견주어 견학하느라고 담소도 제대로 못 나누었는데 선착장에서 승선 시간을 기다리면서 모처럼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난 시인들도 금방 친교가 되는 건 우리들 사이에 시조라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매표직원이 문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 효봉 박사님께서 저서를 한 권 증정했다. 너무 감사해 하는 그녀가 인상적이었다. 책을 가치 있게 알아주는 눈을 가진 이는 이미 선비이다.
두지리에서 배가 출발하자 자장리까지 45분간 임진강의 절경이 펼쳐졌다. 선장은 주요명소마다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거북바위, 토끼바위 임진적벽, 원당리 절벽, 쾌암, 호로고루성, 고랑포 여울목을 지나면서 진지하게 때로는 농을 섞어 45분을 잠깐 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자장리 주상절리 앞에서는 세월이 만들어낸 오묘한 문양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는 60만 년 전에 현무암지대에 임진강물이 흘러들어 침식현상에 의해 수직으로 만들어진 절벽이라 한다. 후일 겸재 정선 선생의 임진적벽도의 실제배경이 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역사적 사실 앞에 우리가 서 있었던 셈이다. 멀리 부여에서 새벽길을 마다않고 문학기행에 참여해주신 들샘 선생님께서 절경을 놓치지 않고 한 수 읊으셨다.
임진강 두지나루
들샘 이흥우
황포돛 뱃길 따라
그려낸 수직적벽
고랑포 여울목은
화폭을 걸쳐놓아
임진강
두지나루에
정선 화백 뵈옵네
종장에서 절대적 동감이다. 돛배가 조용해서일까. 지척에 보이는 북한 땅 때문일까. 아니면 방금 북한을 스쳐 흘러 온 강물의 수심(水心)을 읽은 때문일까, 흐르는 돛배에 앉아 푸른 물결을 보며 못하는 술이지만 딱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일행들도 멋에 겨워 소주 한 잔을 찾는다. 승선 할 때 소주는 고사하고 먹을 것이라고는 과자 한 조각도 준비하지 않았다. 하선 하면 그 유명한 임진강 매운탕으로 점심을 할 계획이어서 시장기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만 우리는 반대로 오찬도 명승지 견학 후로 잡았던 것이다.
황포돛배
벽파 김일영
임진강 두지나루 황토물 거슬러서
전설로 가득채운 강변의 역사 유적
수만 년 노을 빛 젖어 적벽으로 서 있네.
사연도 많은 황포돛배로 묵묵히 흐르는 임진강을 유람하고 내린 사무국장 김일영 시인이 즉석으로 읊은 시조이다.
두지리 매운탕 집은 예약이 되어 있었지만 워낙 손님이 많아 잠시 기다려야 했다. 자고로 외지에서 식사를 하려면 붐비는 집을 택하라고 했다. 붐비는 집은 음식의 질과 맛을 검증받은 곳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손님이 밀고 밀리는 상황은 매운탕에 대한 기대감을 더 크게 갖게 했다. 약간의 시장기에 기다렸다가 받은 점심상으로 매운탕 최고의 진수를 맛보았다고 입을 모았다.
식사 후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감악산 출렁다리로 향했다. 효봉 박사님께서 고개가 높지는 않다고 안내하면서 등산을 유도하셨지만 어쩐지 산 이름에서 좀 까다로운 등산길이 예상되었다. 역시 짧지만 힘든 깔딱 고개로 이루어진 길 끝에 건너편 산에 있는 법륭사를 잇는 예쁜 현수교가 산과 산을 소통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12층의 높이로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게 출렁출렁 거려도 900명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다리라니 우리의 기술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막 신록이 짙어지는 산과 가물거리는 강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값을 마음대로 붙이는 빙과 하나를 먹는 맛도 잊지 못할 만큼 달콤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파평 윤 씨 가문과 청송 심 씨 가문의 긴 법정 공방을 효봉 박사님으로부터 자세히 들으면서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고려 중기 문신인 윤관장군의 묘역을 찾았다. 임진왜란 전후 500여 년간 윤관 장군의 묘소가 확인되지 못하다가 영조 40년에야 후손들로부터 현 위치에서 구비파편(舊碑破片)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께서 봉분을 조성하고 제사를 허락함으로 윤관의 묘소로 공인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윤관 장군의 묘역은 고고학적 측면보다 윤관 장군의 용맹과 북방강토수호를 기리는 묘역으로서 사적 323호로 지정 되었다. 특이한 점은 묘역 안에 장군께서 출정하실 때 하사받은 교자를 사후에 부장한 교자총비(橋子塚碑)가 있다는 것이다. 능에 비교될 만큼 화려하다할까, 웅장하다 할까. 나라를 위한 충절이 컸다면 사후 묘역이 아무리 거창한들 무슨 탓이 있으랴. 그저 장군께 감사 할 뿐이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스럽긴 한데 오월 볕이 여름 흉내를 내는지 일정이 마무리 될 즈음 덥기를 더 보탰다. 산을 오르내린 후라 모두들 지쳐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계획된 용미리 용암사의 석불입상을 보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며칠 후면 초파일이라서 스님들의 손길이 분주하고 절 마당에는 고운 등이 하늘을 메웠다. 갓을 쓴 석불은 산중턱에 모셔져 있었다, 이 석불을 보고 경북 안동시 제비원(연미사)에 있는 머리에 갓을 쓴 석불이 생각났다. 전국 사찰에 석불은 많아도 이와 같이 갓을 쓴 석불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안내 하신듯하다. 두 곳의 석불이 천연바위를 몸체로 하고 머리를 따로 올린 것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으나 안동 연미사는 부처 한 분을 모셨고 용암사는 남녀 두 분을 모셨다는 차이가 있다. 이 곳 지역민들은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이고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믿으며 왕자가 없는 고려 선종이 왕자 한산후를 얻게 된 전설이 있어 아들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계획된 곳을 한 곳도 빠짐없이 견학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했다. 개인적으로 파주는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방문의 기회가 없었다. 단편적으로 경치 좋은 유적지이며 군사도시 정도로 알았던 곳을 충절의 고장이며 문향이고 예향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감동이 두 배가 되었다. 시간상 못 가 본 그 외의 지역, 현대를 선도하는 파주의 모습을 내년 문학기행으로 기약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문화재 콘사이스‘라는 별명을 얻으시며 조금이라도 더 세세히 설명해 주시려고 애쓰신 효봉 박사님께 감사드리며, 부여에서 보령에서 영주에서 충주에서 장거리를 마다 않고 참여해주신 회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서투른 진행과 불편한 좌석에서도 불평 없이 협조해 주신 오늘 처음 만난 네 분 시인님들께도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시조활동을 통해 또 만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