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교배구는 대신의 독무대였다. 1960년대 중반 배구부를 창단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내어 우승을 휩쓸기 시작했고, 60년대 후반에는 무려 140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연승기록을 이어가기도 했다. 당시 ‘조재학’이라는 180센티도 채 안되는 불세출의 강스파이커가 있었는데, 일본 고등학교팀과의 게임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당장 그의 팬이 되었다.
70년대 초반 전호관씨(여자배구대표팀이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딸 때 코치)가 코치이던 시절, 인창이 한해 정도 반짝했으나, 잠시뿐 곧 다시 대신의 전성시대로 이어졌다.
70년대 초반 (72년-74년) 무적 대신에는 세계적인 세터 김호철이 있었다.
나는 이러한, 계속되는 대신 전성기의 와중에 인창에 입학했다.
조재학으로 인해 대신의 팬이었던 내가 라이벌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운명의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건 무엇이건 이후 나는 조재학을 배신하여 우리 모교, 인창고 배구부를 영원히, 무지무지하게,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서대문 금화산 언덕위에 세워진 녹지 하나 없이 삭막한 학교..., 건물이래야 본관 건물 하나와 체육관 건물 하나가 전부인 학교...게다가 그 좁은 부지를 인창중,고등학교 뿐 아니라 같은 재단인 경기국민학교도 함께 쓰고 있어 더욱 불편했다.
점심시간 같은 때는, 도시락을 후따닥 까먹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그래도 좀 놀아보겠다고 전부들 모여들어, 그 좁은 마당은 와글와글 도떼기시장과 다름 없었다.
학교에 그래도 자랑할만한 시설이 하나 있었으니, 체육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다목적실이었다. 조회나 학교 행사가 있으면 강당으로 쓰기도 하였으니까...
그 체육관에서 배구부와 농구부가 같이 연습을 하였다. 박 한, 차성환, 최인선, 박수교 같은 걸출한 선배들을 배출한 농구부는 성적을 못내서 찬밥을 먹다가, 내가 2학년때 해체되고 만다. 이후 학교는 배구부에 올인하게 된다.
배구부는 경기대 근처 숙소에서 합숙을 하였는데, 재단이 넉넉하지 않았음인가, 우리는 한달에 한번씩 성미(쌀)를 강제로 걷어서 배구선수들 일용할 양식으로 제공해야만 하였다.
인창은 1950년대에 배구부가 생겼다. 창단 이후 주로 9인제에서, 항상 강호의 면모를 과시하면서 숱하게 우승도 차지하고 기라성같은 배구계 인사들을 배출한 전통의 명문이었다!
하지만 대신고에 배구부가 생긴 이후에는 준우승 전문으로 전락해 있었다. 하기사, 명문이란 꼭 우승횟수로만 따질 것은 아니지만,
1학년 때, 4고교배구정기전을 위시한 5,6개의 전국대회에서 대신고에 전패하였다. 거의 결승에서, 거의 풀세트접전에서...고지가 바로 저긴데, 한끗 차이로 오르지 못했다..
대신의 땅꼬마 (죄송합니다, 김감독님!) 김호철의 손끝에서 마술과도 같은 현란한 show가 매일 펼쳐졌다. 김호철의 토스는 가히 예술이었다. 김호철 한 선수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분루를 삼켰다.
따라서, 김호철은 우리들의 ‘공공의적’이었다. 김호철 재학 중에는 대신을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으니 우리의 적개심은 당연했다.
어렸을 때부터 장충체육관을 제집 같이 드나들어서 온갖 종류의 경기와 응원을 다 봐왔던 나는, 그리고 당시 사춘기라 청개구리처럼 말 안들었던 나는, 배구 응원을 가서도, 나홀로 응원석에서 빠져 나와 일반 관람석에서 보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가, 나같은 인간들 잡으러 다니는 훈육선배에게 된통 걸려서 구타를 당한 적도 있다. 응원 안하고 놀러 왔냐고...
나는 학교에서 배구부 연습하는 것을 매일 보았다. 어디서 보았느냐 하면, 화장실에서 보았다. 본관과 체육관 건물은 이웃해서 있었는데 본관 2층 화장실 창문으로 체육관 내부가 아주 잘 보였다.
매일 기도하였다. “타도 대신! ”을, 꿈까지 꾼 적이 있다. 대신을 꺾고 우승하는 꿈 ...
드디어, 소원성취하는 날이 왔다.
다음 해 내가 2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김호철이 졸업한 대신은 약체가 되어 있었다.
첫대회인 4고교정기전에서 3 : 0 으로 대신을 박살내던 날, 아 그날...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쳤다.
우리는 거침없이 TBC배, 대통령배, 종별선수권, 전국체전까지 모든 대회를 퍼팩트하게 전승으로 우승하였다.
그 전년도 주전멤버에서 최삼환, 김종범, 황병식, 김길남이 졸업하였으나 박관덕, 김정원이 건재하였고 정태선, 강영일이 성장하였으며, 무엇보다 해체된 강경상고에서 조택현, 변보현이라는 무시무시한 레프트 공격수를 데리고 왔으니 멤버 구성으로 보아 당연한 결과였다.
김정원과 강영일의 중앙속공, 조택현.변보현의 오픈 공격, 정태선의 시간차와 더불어 탄탄한 수비가 어우러진 우리는 난공불락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몇번을 간단히 우승하여 우승의 감격도 시들해져 가고 있을 때, 원체 실력차이가 많이 나니 응원갈 필요도 없다는 학교 방침에 맞서 2학년 반장들은 그래도 결승전은 가야 한다고 우기며 교장실에서 농성을 하였다. 응원가게 해달라고...
그래도 불허하는 학교에 맞서 나는 조퇴를 하였다....
3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을 앞두고, 항상 내다보는 화장실 유리 창문을 통해 나는 노루같이 길쭉하게 생기고, 순박한 인상에 키만 뻘쭘하게 큰 빡빡머리 중딩을 처음 보았다. 그가 바로 불세출의 스타 장윤창이다.
경기도 송산중에서 스카웃해 온 장윤창은 벌써 떡잎부터 틀렸다. 190센티가 넘는 장신에 유연한 몸, 높이뛰기 선수 출신이라는 루머가 돌았을 정도의 점프력(사실은 배구 이전에 핸드볼선수이었다)....그는 우리 인창의 미래였다.
3학년이 되었다. 주전 대부분이 졸업한 우리팀은 전년도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 내 친구 강영일을 비롯한 신용희, 최원탁의 3학년 트리오 외에 신입생인 장윤창, 남태성, 김인옥이 주전으로 이원재, 차영수가 백업으로 있는 단촐한 멤버였다.
한편 대신도 문용관, 유중탁, 엄종석, 김성범 같은 충암중 출신의 1년생들이 주전을 이룰 정도로, 전력이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해 4고교정기전은 아깝게 졌으며, 그후 대회는 일진일퇴하였다.
‘76년도의 최강자는 강두태, 황인철의 부산 성지공고였다.
인창의 패인은 뻔했다. 장윤창에의 의존도가 너무 컸다. 라이트 주공으로, 센터블로커로, 북치고 장구치는 장윤창은 체력이 약했다. 이를 뒷받침할 보조공격수가 부족했다.
이 해에 양교에 입학한 장윤창, 김인옥, 이원재, 문용관, 유중탁 등은 향후 우리 배구를 대표하는 스타가 된다.
이들은 ‘79학번으로 장윤창은 경기대로, 김인옥.이원재.남태성은 서울대로, 대신고 선수들은 전원 인하대로 입학하여 대학배구 르네상스시대를 열었고, 또 이들 학번이 대학을 졸업할 때인 ’83년도에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써비스라는 두 개의 실업팀이 창단되고, 배구 중흥의 도화선이 될 대통령배배구대회가 개최되게 된다.
특히 장윤창과 문용관, 유중탁은 국가대표로도 오래 활약을 하였는데, 현재에도 장윤창은 경기대교수로, 문용관은 대한항공 감독으로, 유중탁은 남자대표팀 감독으로 우리 배구계에 공헌하고 있다.
돌고래 장윤창은 우리배구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거의 최초로 백어택과 스카이서브를 실전에 사용하였으며, 고교 2학년때 대표팀 라이트주전을 차지할 정도로 군계일학이었다.
이들이 3학년이었던 '78년도까지 인창, 대신 접전의 시대는 계속되었지만 그들이 졸업한 후 전통의 두 명문교가 같이 우승권에서 다투는 일은 없어진다.
이후 대신은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겪다가 ‘90년대에 아쉽게도 팀이 해체된다.
우리 인창은 다행히 동계인 인창중학교에 배구부가 있어 계속 전통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간간이 최강으로 군림하던 때도 있었다.
가령 이상렬, 이영국, 김은석, 지창영, 김재범, 최영준이 뛰던 해는, ‘75년처럼 전관왕을 이루었고 이동훈, 이병희. 신경수가 활약하던 때도 최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인정, 신정섭, 구준회 시절에 성적은 나지 않았으나 선수들의 장래성은 어느 해보다 뛰어났었고, 가까이는 임시형, 유광우, 강영준이 뛰던 ‘03년도에 우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삼손 이상렬은 역대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선수였으나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선수생활을 너무 일찍 그만둔, 비운의 선수이다. 라이트 백어택에서 후려치는 스파이크는 문자 그대로 언터쳐블이었다. 그런 이상렬이 LIG 코치로 코트에 복귀한다하니 무척 반갑다.
김은석은 작은 키에도 엄청난 점프력과 탄력을 가진 레프트 공격수였는데 요절하여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애증은 백지 한장 차이라 했던가, 대신고에 꼭 배구팀이 재창단 되었으면 좋겠다. 두학교의 정기전도 부활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옛날의 추억들 되살리며 이제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은 채, 까마득한 후배들의 경기를 다시 보고 싶다.
근 50년 이상 배구 명문교의 위상을 계속 유지해온 모교 배구부가 자랑스럽다.
학교를 상징하는 꿀벌처럼, 성실하고 끈기있게 변함없이 이어져온 그 전통...
그립다, 그 옛날 배구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놓고 일희일비하던 젊은 날의 내 열정이, 내 젊은 날의 초상이....
첫댓글 제고등학교 1년후배가 올린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