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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1986년 동계 캉첸준가 원정에서 있었던 안드르제이 초크의 조난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된 글라이비츠 산악연맹위원회 보고서에서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1월 21일 안드르제이는 유레크 쿠쿠츠카와 함께 다울라기리에 등정했다.
그는 7,500미터 고소에서 비박을 했을 때 심한 동상을 입고, 그뒤 다리의 발가락을 두 개씩 잘랐다.
수술하기 전이나 수술 후나 회복될 가망은 없었다.
얼마 뒤 그는 새로운 원정대를 준비했는데, 이 훈련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생활까지도 지장을 받았다.
그리하여 안드르제이는 체중이 늘어나고 산에서 자연히 컨디션이 정상이하로까지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 정신면에서는 건재했다.
그는 캠프를 세우는 일에 언제나 참여했다.
1월 7일 정상에 오르려고 자일파티가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초크와 피아섹키 그리고 쿠쿠츠카와 비엘리키 두 조였다.
그날, 그들은 제1 캠프에 도달하고 이튿날 제2 캠프에, 9일 제3 캠프 그리고 10일 제4 캠프에 전진했다.
그날 다른 5명의 대원이 2차 공격조로 제3 캠프에 진입했다.
안드르제이는 제3 캠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 9일 밤에 심한 해수발작을 일으켰다.
의사가 무전으로 그에게 아스피린과 막라비트와 비타민 C를 먹고 티로스피랄을 마시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물을 끓여서 김을 쏘이고 다음날 내려오라고 말했다.
약을 먹고나니 기침은 멎었다.
당신은 여러날 전부터 안드르제이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없었는가?
우리가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전에 몹시 바빴다.
제1 캠프 앞의 땅이 갑자기 무너졌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캠프 80미터 전방에서 빙하가 가라 앉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1 캠프로 가는 새로운 길을 뚫고, 거기에 고정자일을 깔게 됐다.
그런데 제2 캠프에서 안드르제이가 고질적인 기침으로 이미 고생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침은 겨울에 특히 악성 유행병이었는데, 안드르제이의 기침은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제1과 제2 그리고 제3 캠프에 도착하자 다시 기침을 시작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초크는 제3 캠프에서 이미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캉첸준가의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변한 진전사항을 듣고나서야
안드르제이가 악화일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3 캠프가 눈에 덮여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텐트를 파내야 했다.
그런데 다음 캠프지에는 텐트가 하나밖에 없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텐트를 하나 더 가지고 모두 함께 자거나, 아니면 두 사람씩 오르고 일부는 제3 캠프에서 기다리자고 했다.
결국 우리는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400미터를 올라간 지점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 파티와 프르제메크 안드르제이의 파티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결국 그들은 함께 도착하지 못했다.
초크가 멀리 처지고 말았다.
"그의 템포는 눈에 띄게 느렸다.
그는 피아섹키보다 한 시간 늦게 제4 캠프에 도착했다.
밤이 되어 텐트에서 그는 더 심하게 기침을 했다.
의사가 무전으로 당장 내려오라고 하면서 일러준 약에 푸로세미드 두 알을 같이 먹으라고 했다."
이날 밤 안드르제이의 기침은 더 이상 누그러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그는 혼자 내려가겠다고 하자 프르제메크가 같이 내려가겠다고 나섰다.
크르지츠토프와 나는 컨디션이 좋아서 그 사이에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피치를 개척하기로 했다.
5시 40분경 출발했는데 이때 나는 안드르제이와 마지막 대화를 했다.
"1월 11일, 쿠쿠츠카와 비엘리키는 동틀 무렵 이웃 텐트에 있는
안드르제이의 상태를 살펴보지 않고 정상으로 떠났다.
그밖에도 조사에 따르면 피아섹키도 안드르제이의 병세를 잘 모르고 있었다.
안드르제이는 아이젠을 착용할 힘도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제3 캠프로 내려갔다.
도중에 2차 공격조와 만나게 되어 함께 18시경에 제3 캠프에 도착했다.
안드르제이의 몸을 침낭으로 조심스레 감싼 다음 자일로 묶어서 아래로 내려보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비스듬히 뉘였다.
그는 몹시 지쳐서 거의 말을 못했으며 계속 기침을 했다.
21시경 안드르제이의 상태는 다소 좋아진 것 같았다."
제4 캠프에서 정상까지는 아직도 800미터 남아있었다.
해돋이 전에는 혹한의 세계였다.
9시경에야 첫 햇살이 우리를 다소 따뜻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두 서너 가닥 낡은 고정자일을 보았는데,
이것으로 적어도 루트를 빗나가지 않게 됐다.
만일 이 고정자일을 보지 못했다면 정상 아래 지형이 제멋대로여서
길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을 것이다.
크르지츠토프는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나보다 거의 반 시간 전에 정상에 도달했다.
그러나 얼음처럼 찬 강풍 속에서 그는 정상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상 5미터 아래에서 그를 따라잡아 함께 제4 캠프에 도착했다.
오후 4시였다.
우리는 따끈한 차를 마시고 베이스캠프와 연락했다.
정상에서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것은 복잡한 배낭 속에서 도저히 전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무전을 통해 안드르제이가 몹시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내려가 서둘러 그를 도와주려고 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제3 캠프로 내려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텐트에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날에야 안드르제이의 운반을 도우려 하산하게 됐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베이스캠프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의사와 원정대장이 산소를 가지고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다.
그들은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올라올 생각이었다.
아침에 우리는 다시 베이스캠프와 연락을 했다.
무전기에서 쉰 목소리가 절박한 상황을 알려왔다.
"아무것도 묻지말라.
난 자네들에게 안드르제이 초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할 뿐이다.
그가 죽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의 병세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에게 그런 불행이 일어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베스트 멤버였던 그가, 영원히 죽을 것 같지 않던 그가 죽었다니!
우리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를 살리지 못했으니까.
온갖 노력을 다했고, 갖은 간호로 돌보고, 대원 모두가 있는 힘을 다했는데...
그런데 산소는? 그들이 산소를 가져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되돌아 갔다.
포기했던 것이다.
제1 캠프에도 올라오지 못했고 그 사이에 안드르제이는 죽었다.
22시였다.
프르제메크가 차를 가져가려는데 갑자기...
산소를 가져오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알 리가 없었다.
안드르제이는
ㅡ신체적 컨디션을 제외하고는 ㅡ
산에서 여러 차례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어째서 갑자기 그렇게 되었는가?
바로 고산병이 그를 기습한 것이다.
고산병은 가장 우수한 등산가라도 내던지는데, 안드르제이는 결국 폐수종으로 죽었다.
고소에서 호흡하기가 어렵고 땀을 지나치게 흘리면 무기물의 소모가 심해진다.
이렇게 되면 사람 몸에서 전기분해의 균형이 크게 지장을 받는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보통 신장을 거쳐 분비되는 나트륨이 쌓이며 이것이 세포와 세포 사이에 물을 고이게 한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병이 수종이며 몸이 붓는다.
수종 현상이 다리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뇌수종이나 폐수종의 경우는 치명적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누구보다도 빨리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고,
산소공급을 거의 받지 않는상태에서 재빨리 오를 수 있는 제일 잘 훈련된 등산가들이
폐수종의 위험에 가장 빨리 노출된다.
이 병은 높이 4,000미터에서 이미 그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피로와 호흡곤란과 관계가 있다.
대개의 경우 호흡이 곤란한 사람은 입에 거품을 문 것이 멀리서도 보인다.
병자는 대부분 산소 결핍으로 피가 검푸르게 되는 치아노오제 현상을 일으킨다.
전형적인 증세는 빨라지는 맥박과 기침이다.
기침은 처음에 심하게 일어나지만,
침이 마르며 나중에는 피가 섞인 점액을 토하고 결국 각혈을 하게 된다.
의학적으로는 죽음과 다를 바 없으며 결국 질식해서 죽게 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치료법으로서 이뇨제를 사용한다.
안드르제이의 죽음은 당신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들은 당신이 동료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를
귀국후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질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당신들이 고소순응이 잘 되어 유리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당신과 크르지츠토프 비엘리키에게 책임이 있다고 압력을 가하다시피 했다.
무슨 말이냐하면 안드르제이가 충분한 고소순응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신들을 따라가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당신들이 너무 의식적으로 캉첸준가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한다...
이런 질문을 나도 혼자 하곤 한다.
나는 안드르제이를 살리려고 정말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는가.
말하자면 그의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을 다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일을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그의 병이 초기 단계를 지켜볼 만큼 머리가 잘 돌아야 했다.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지금도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되살리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만 해! 안드르제이, 자네는 돌아가야 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어느 원정대에서나 일어나는데,
말하자면 일이 잘 안되면 누구나 마음이 약해진다.
그런데 안드르제이가 스스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비로소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실은 그에게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안드르제이는 내려가면 다시 좋아지리라ㅡ모든 것이 잘 되겠지. 그러나 혼자선 내려가지 못한다..."
이렇게 나는 생각했다.
안드르제이가 나라고 해도 그랬으리라고 본다.
위원회 보고서에서 :
쿠쿠츠카와 비엘리키가 한 조로 뛰면서 일어난 경쟁 분위기는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정상적인 스포츠 분위기가 언제나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경쟁하는 의도가 나타났다.
표고 8,000미터급 고봉을 원정하는 동안 특히 동계에는 누구나 고산병에 걸리기 쉽고
처음에 아주 작은 징후로 나타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고산병은 고산의 원정을 거뜬히 해낸 아주 강인한 체질도
고소순응의 기간과 관계없이 걸린다는 것을 경험이 말해준다."
산소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 하고 싶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앞서 밝힌 바 있는데,
이번 일로 보면 산소는 결코 인공적 보조수단이 아니고 생명을 구하기 위한 치료약이었다.
당신들이 캉첸준가의 정상에 산소를 휴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결심의 문제다.
우리는 있을 수 있는 상황을 모두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말하면 '깊이 숙고해야' 했다.
산소통이란 당연히 베이스캠프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있으므로 크게 마음을 놓게 된다.
그 산소통은 등반할 때 엄청난 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결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이러한 선택이 어떤 경우에도 옳았다고 믿는다.
위원회 보고서에서 :
"많은 인원이 8,000미터 고봉에 도전할 경우
산소통을 될수록 높은 곳에 두어야 하며 특히 겨울에 그렇다.
산소는 고산병 치료뿐만 아니라 동상 등 외상의 경우와
그밖에 모든 위험한 상황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치료제다.
산소를 베이스캠프에 놔두기로 한 캉첸준가 원정대의 결정은 잘못된 처사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위원회의 보고는 고산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유행성 감기에 걸린 환자에게 의사가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당신 병을 소홀히 생각하지 말아요.
혹시 약국에 이 약이 없을지 모르지만 처방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5일 동안은 자리에 누워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환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처방을 가지고 가서 자기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했을 것이다.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은 환자가 자기의 처방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양심적인 의사의 요망사항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산소를 텐트에 두고 혈액순환과 수면과 정신적 상태를 양호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려면
반드시 산소를 가지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산소를 가지고 정상에 오를 것인가,
산소없이 오를 것인가 선택의 문제에 부딪친다.
당신의 원정대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므로 산소를 캠프에 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등반 중에 산소를 사용했다고 해도 항의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UIAA가 알파인 스타일의 정의를 내리며
특히 산소를 사용하는 일과 베이스캠프에 산소를 비치하는 그 자체를
'금지'하며 의료목적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 이 문제점은 바뀌었다.
지금 이러한 스타일의 순수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없으며
이 불합리한 규칙을 지킬 필요도 없게 됐다.
이제 이러한 인식이 점점 굳어가고 있다.
당신은 여기에 동의하는가?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산소 사용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그래도 좋다.
하지만 등반하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다.
캉첸준가 비극은 다른 윤리적 문제도 일으켰다.
안드르제이가 7,400미터 고소 제3 캠프에서 죽었는데 그를 어디에 묻어야 했는가...
나는 처음부터 안드르제이를 베이스캠프로 내려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안드르제이의 의사도 그러했으리라고 보기 때문에 그러기를 바랬다.
그가 1982년 마칼루 원정 때 얼마나 모범적으로 행동했는가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때 타데크 출크가 사고를 당했는데 아담 빌체브스키 대장이
안드르제이를 암벽 위쪽 루트 개척에 가장 중요한 대원으로 생각하고 타데크의 시체를 수용하는 일에 그를 배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드르제이는 스스로 결심하고
아무도 아래로 내려보내지 못하고 있는 시체를 같이 싸매고 하루 쉰 다음 등반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5일 뒤 마칼루 정상을 밟았다.
그러나 나는 입장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았다.
베이스캠프에는 유능한 구조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안드르제이의 시신을 땅에 묻으려면 눈이 없는 데까지 가야하는데
과연 거기까지 시신을 운반할 수 있을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다.
대다수의 의견은 안드르제이를 우리 힘으로 나르기는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제3 캠프 텐트에서 멀지않은 빙하의 틈에 묻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산에서나 지상에서나 우정을 맺어온 많지 않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즐거웠던 행사나 감명 깊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산에 가는 사람은 슬픈 일도 각오해야 한다.
즉 시체를 묻는 일이 그것이다.
우리는 시체를 매장하는 장례식을 제대로 치루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침낭 속에 안드르제이를 넣고 단열매트로 싼 다음 빙하의 깊은 바닥으로 내리기에 앞서
함께 주기도문을 읽고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를 했다.
이윽고 우리는 각자 묵묵히 그와 마지막 고별을 했다.
이것이 우리가 그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베이스캠프 가까이 묻히는 사람은 보통 돌무덤에 안장한다.
그리고 흔히 그 자리에다 기념비를 세운다.
안드르제이의 무덤이 된 빙하의 균열은
우리의 기도와 대나무 십자가 그리고 사진 두 장으로 장식됐다.
그리고 멀리 아래쪽 베이스캠프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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