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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건너뛰었던 왕가 미이라 특별 전시실을 돌아보았다..
우리에게 소설로도 알려진 람세스 2세등 무덤에서 발굴된 보전이 양호한 왕가의 미이라를 항온항습장치를 이용하여 20 여구 보존한 장소이다..
이집트 왕조의 가장 강력한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이라도 친견이 가능한 장소..
왕은 자신의 미이라가 이렇게 대중에게 공개될지 꿈에라도 생각하였을까!
입장료는 박물관 입장료 75파운드보다 비싼 100파운드(한화 15,000 원)이지만 층분한 투자가치가 있다..
4~5천년 전의 사람을 생생하게 접하는 놀라운 경험이 가능한 장소!
파라오의 조상과 미이라관련 장묘 유물이 가장 많은 편..
이집트의 유물들은 서유럽의 박물관에도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대영 박물관은 거의
이집트 박물관에 버금가는 수준의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6000년경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의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문헌에 등장합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하이집트는 번영을 누렸으나, 상이집트는 지속적인 사막화로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
기원전 3000년경 메네스 파라오에 의하여 멤피스를 수도로 하는 첫 통일 왕국이 수립..
메네스의 통일로 이집트는 지중해를 호령하는 왕조로 성장하였으며 법제, 통치이념등이 정립..
문자 체계도 확고하게 정리되고, 365로 된 태양력법도 만들어집니다..
이집트 역사의 1, 2왕조 시절이며 기원전 2,800년 제 3왕조 2대왕 조세르는 최초로 장묘로서의 피라미드를 건립..
앞서 언급하였듯이 기자의 거대 피라미드가 건조된 것은 제4왕조 시절..
파라오는 인간에서 신으로 추앙을 받으며 절대왕권을 누립니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은 우세르카프는 제 5왕조를 수립하였으며 자신의 정통성 수립을 위하여
지금까지 숭배하던 오시리스를 제치고 태양신의 최고신 자리를 확고히 하였으며
파라오는 태앙신의 아들을 자처하며, 이집트 각지에 태양신의 신전을 건립합니다..
번성을 누리던 이집트의 왕조는 오랫동안 계속된 파라오의 통치로 약화되기 시작하여
17, 18왕조 시절 아시아계의 이민족이 잠시 파라오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조로 칭하여지는 19대 왕조에서 다시 절대 권력이 수립된다..
19대 왕조의 3대왕인 람세스 2세는 66년동안 통치를 하며 혼인정책과 평화조약의 수립으로 거대한 이집트 제국을 수립..
모세와 동시대를 산 왕으로 기록되기도 하나 연대를 보면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로 치부되기도..
세력이 강화되고, 또 약화되며 지속되던 이집트의 파라오 왕조는 30대 왕조에서 페르시아에 패하고
페르시아계가 지배하는 31대 왕조가 만들어진다!!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 대제가 이집트를 침공하자 페르시아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집트인들은 정복자로 환영..
그때 만들어진 도시가 알렉산드의 도시라는 불리우는 알렉산드리아!!
이집트의 통치를 당시 지도자에게 위탁하고 이집트를 떠난 알렉산더대제는 323년 정복전쟁중 바빌론에서 사망!!
이집트는 잠시 혼란에 빠진 틈에 바빌로니아의 귀족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장악합니다..
이민족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점점 쇠약하여지면서 기원전 100년 권력을 로마에 의존하기 시작..
시저가 클레오파트라와 유명한 연애 사건을 일으킨후 부르투스에 의하여 사망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이 악티움에서 패전 300년의 통치를 마감합니다!!
어떻게 단편적으로 알던 역사가 조금 정리가 되시나요??
로마의 통치로 들어간 이집트는 오랜 역사와 문화의 힘으로 로마에 오히려 이집트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
로마의 다신교와 이집트의 신들은 절묘한 동거를 시작하나
로마가 통치수단으로 기독교를 채택하고 이집트도 로마와 같이 기독교의 문화권에 흡수됩니다!!
급기야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많은 유물들이 사라지기도..ㅠㅠ
대부분의 유적들이 파괴되었으나, 오랜 역사동안 이집트의 많은 지역이 나일강의 범람으로 모래속에 묻혀지내게 됨으로
지금도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로마의 영향으로 세계 최초의 수도원이 이집트에 생기기도 하면서 콥트문학이라는 이집트 기독교의 문학이 생기기도 하였으나
7세기 이후 강성해진 오스만투르크의 영향에 들어가면서 이집트는 현재까지도 이슬람 문화권에 남아 있습니다..
640년 이슬람 세력이 유입되어 오스만투르크가 물러난 1805년까지 이슬람이 득세..
제국주의 세력이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집트는 프랑스의 지배, 유럽 대륙의 허수아비 세력이 근세왕조가 잠깐 지속되고
1882년부터 1936년까지 영국이 지배 이차대전 기간 독일이 야욕을 보이자 영국은 이집트를 독립시키며
독일의 저항 세력으로 인정하기 시작..
1942년 "알 알라마인"전투에서 독일을 물리치는 성과를 만들어내며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세력을 약화시킵니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착각한 이집트는 아랍세력의 맹주로 1948년 1차중동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서구세력의
이스라엘 지원으로 처참한 패전을 경험합니다..
패전에 대한 불만을 품은 나세르가 주도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전복..
1952년 이집트아랍공화국을 수립..
23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이민족의 지배고리를 끊어버립니다..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
서구세력에 의하여 처참한 패배로 끝난 중동 전쟁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번 이스라엘과 한판..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기억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막강한 이집트 아랍 연합에 의하여 수세에 몰렸으며
서구세계의 중재로 겨우 위기를 벗어납니다..
소련과 유엔의 중재로 이스라엘의 축출에서 실패하였으나 실추되었던 아랍의 자존심은 회복되었으며,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절대적인 민족주의 영웅으로 급부상합니다..
아랍으로 대표되는 제3세계의 맹주가 된 이집트..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이 발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서방세력들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원으로 초기 유리한 전세를 유지하던
이집트 아랍 연합군은 시나이와 요르단 일부 골란고원을 점령당하고 또 유엔과 서방의 중재로 휴전..
심각한 상처를 입은 나세르는 명예회복을 도모하다 병사..
1970년 사다트가 권좌에 오르는데 서방의 지원을 위하여 친서방 온건 정책을 펼칩니다..
사다트는 내부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1973년 10월 10월전쟁으로 불리우는 4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과 격돌..
여전히 서방세계는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지원..
일진일퇴의 공방끝에 아랍은 승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유엔의 개입으로 휴전..
이 전쟁이후 평화협상이 전개되기 시작..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서구 세력에 의하여 악의 축으로 묘사된 아랍세계..
어떻게 아직도 그런 사관을 가진 분들이 많죠..ㅠㅠ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캠프데이비스 협정이 체결되고, 1979년 평화협정이 체결..
이 협정에 불만을 가진 젊은 세력에 의하여 사다트는 군사퍼레이드 행사장에서 쳥년장교들에게
500발의 기관단총 피격을 받고 시체도 수습되지 못하는 지역이 되어 피살됩니다..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실은 투탕카멘 마스크 전시실..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라 외부에서 한장만!!
투탕카멘.. 저주라는 호사가들의 이야기로 유명하죠..
네이버 자료를 한번 옮겨봅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은 왕들의 계곡에서 발굴된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무덤!!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이 무덤에는 일상용품과 장신구 등 무수한 보물과 함께 황금관 속에 황금 마스크를 쓴 왕의 미라가 들어 있었다.
최초 발견 당시 사람들은 무덤에서 쏟아져나온 수많은 황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화제의 대상은 곧바로 다른 데로 옮겨갔다.
바로 '저주'였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굴했던 관계자들이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먼저 발굴의 후원자였던 카나번 경(卿)이 1923년 4월 5일,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원인은 모기에 물려서 생긴 패혈증이었다.
그 반년 후 카나번 경의 처남인 허버트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리고 1924년 2월에는 카나번 경의 숙모인 엘리자베스 카나번이 벌레에 물려 목숨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돌봤던 간호사도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교수들도 차례로 쓰러졌다.
1929년 11월, 하워드 카터의 조수였던 리처드 베셋이 원인 불명으로 죽었다.
아서 메이스 교수는 관이 들어 있던 현실(玄室)과 벽 사이의 수직갱을 여는 순간 갑자기 쓰러져 죽고 말았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X선으로 검사한 아티볼트 더글러스 리드 교수, 파라오의 관을 촬영했던 카메라맨 프랭크 로리도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고고학자 화이트는 "파라오의 저주로 죽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기도 했다.
미라를 직접 만지면서 조사를 벌였던 더글러스 테리 교수도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
투탕카멘의 저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22명의 관계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저주'에 대해 고대 바이러스설, 미발견 질병설, 미지의 독극물설 등이 제기되었지만 지금까지 결론은 나지 않은 상태다.
불가사의한 것은 발굴에 참여했던 현지 인부들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최고 책임자였던 하워드 카터도 66세까지 살다가 죽었다.
투탕카멘의 마스크를 비롯한 3,500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된 이후 더 이상 '저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왕의 미라는 지금 박물관 유리관 안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라는 현실을 도외시한 호사가들의 이야기라고 보아야 하겠죠!!
사실 밥먹다가 죽은 사람, 잠자다가 죽은 사람이 투탄카멘은 저주로 죽은 사람보다는 더 많지 않나요??ㅎㅎ
미이라를 만들면서 장기는 따로 항아리에 향료와 소금으로 방부처리하여 보관합니다..
장기 보관하는 항아리들..
뭐하는 짓들이었는지..ㅠㅠ
이집트 근세 이야기 마무리 합니다..
사다트가 1881년 피살되고 무바라크 대통령이 취임..
네이버 발췌 대체..
1981년 10월 사다트 대통령이 피살됨에 따라 무함마드 호스니 무바라크(Muhammad Hosni Mubarak)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와 사다트의 친서구주의의 장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중도주의를 지향하였다.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에 대항하여 이집트는 걸프전쟁에 참전하였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이래 이집트는 아랍권으로부터 소외 당했으나, 걸프전 참전을 계기로 아랍의 중심으로 재부상하였다. 1979년 평화협정 체결 당시 아랍연맹 본부를 이집트에서 튀니지로 옮겼으나, 걸프전 직후 아랍연맹 본부를 카이로로 다시 옮겼다.
1997년 룩소르(Luxor)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하여 외국인 58명이 희생되었다. 1999년에는 이집트 최대 이슬람 과격 단체인 감마 이슬라미야(Gamma Islamiya)가 대정부 투쟁 종식을 선언하였다.
1999년 10월 무바라크 대통령이 6년 임기의 4선에 당선되었으며 2005년 9월에는 대통령 5선에 당선되었다.
2011년 1월 25일 장기 집권 대통령인 무함마드 호스니 무바라크(Muhammad Hosni Mubarak)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과도 정국이 이어져 무함마드 후세인 탄타위(Muhammad Hussein Tantawi)군 최고위원회 위원장이 과도정부 국가원수를 맡았다.
2012년 6월 이집트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결선투표에서 이슬람계인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s)의 자유정의당(FJP, Freedom and Justice Party) 소속 무함마드 무르시(Muhammad Morsy) 후보와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정권에서 마지막 총리를 지낸 아메드 샤피크(Ahmed Shafik) 후보가 격돌하였다. 6월 24일 이집트 선거관리위원회는 무르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발표하였으며, 같은 달 30일 무르시 후보가 이집트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독재를 경험한 백성들은 독재에 익숙하여 지고 강력한 정부에 대한 동경이 있는지
2012년 취임한 무르시는 다시 발발한 시민 항쟁에 의하여 실각하고, 무바라크 시절 시민에 대한 발포를 거부한
엘시시가 취임.. 다시 무라바크와 비슷한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불만 무마를 위하여 전시행정에 가까운 제2수에즈 운하개통 등의 보여주는 행정을 펼치면서..ㅎㅎ
1981년 사타트를 시해하였던 청년 장교들은 모두 무죄로 방면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곳이 이집트..
장기 보관 항아리들..
동물들의 미이라..
왕가의 미이라 전시실..
유료 공간이며 엄격하게 사진 촬영이 금지된 장소입니다!!
왕가의 미이라 전시실 가는 길..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20여기의 미이라가 항온항습장치에 보관 전시되고 있습니다!!
왕가의 미이라 외곽에 있는 미이라..
람세스 2세등 정말 귀한 미이라들이 왕가의 미이라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데 촬영금지..
수쳔년이 지난 시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도록 머리카락 손톱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시신에 대한 존엄성이 없는 것 같아 조금 안스럽기도 하고..
어린아이 미이라..
이집트 박물관 구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