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자애의 거인 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님의 생애와 정신에 관해
박희택 원장의 또 한 차례의 방송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광본(廣本)에 해당하는 인터뷰 1(22.8.4)의 약본(略本)이 되겠습니다만,
광본에는 없는 정보도 다소 들어 있습니다. ((열행))
▶ 2022년 9월 8일 08:36-08:44(8분간)
▶ 포항KBS <활기찬 아침, 포항입니다>
▶ 9월 12일 방송되는 <위인전>의 예비 인터뷰 성격
○ 프로그램명 : 포항KBS 라디오, ‘활기찬 아침 포항입니다.’ (95.9 MHz) ○ 인터뷰 시간 : 2022년 9월 8일(목) 오전 8시 36분–44분 ○ 인터뷰 연결 : 열린행복아카데미 박희택 원장 (010-3267-0999) ○ 담당 : 이지연 작가 (☎ 010-8581-4758) |
-> 지금 시각 00 시 00 분 지나고 있습니다.
ann 1> 활기찬 아침이 준비한 추석 특집 방송
<우리 마을 위인전>의 두 번째 주인공은
파란 눈의 선교사 루이 델랑드,
남대영 신부인데요.
오늘 <파워 인터뷰>에서는
오랜 시간 남대영 신부를 연구해 온
열린행복아카데미 박희택 원장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ann 2> 먼저 이번에 우리가 조명해 볼 루이 델랑드, 남대영 신부에 대해 소개를 해 주실까요.
박희택> 포항을 모원(母院)으로 하는 세계적인 수도회인 ‘예수성심시녀회’와 한국 사회복지의 효시인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의 설립자이십니다. 1895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972년 한국 포항에서 78세로 서거하셨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포항에 영면하고 계십니다. 1922년 28세에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되었고, 29세가 되던 1923년 6월에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 선교사의 소명을 띠고 도착하였습니다.
ann 3> 원래 프랑스 이름은 루이 델랑드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남대영 신부로 잘 알려져 있어요.
남대영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다면요?
박희택> ‘남대영(南大榮)’은 ‘남쪽의 큰 영광’이란 의미인데, 조선의 남쪽에서 소명을 잘 수행하라는 의미에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신부님에게 부여한 현지이름입니다. 선교사들은 현지문화에 부합하기 위하여 전교회로부터 현지이름을 받곤 하였습니다. 사제로서의 세례명은 ‘루도비꼬’인데, 이것도 한국에서는 ‘누수’라고 음역하였고 대잠동 모원 윗편의 묘비에는 ‘남누수’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세간명은 ‘루이델랑드’인데요, 이름이 ‘루이’이고 성이 ‘델랑드’입니다.
ann 4> 원장님이 남대영 신부의 발자취를 쫓게 된 이유는 뭘까요?
박희택> 크게는 눈에 보이지 않게 과거세로부터 성숙되어온 필연의 ‘인연’이라고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학자로서는 한국 사회복지발달사의 맨 첫자리이신 ‘남대영복지’를 연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불교종단 진각종이 종립으로 설립한 종합대학 위덕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대학 사회복지학부에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님 두 분이 편입해 왔고, 포항에 살면서 장엄한 공동체로 제게 다가온 신부님의 수도회와 사회복지법인에 대해 연구할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평소 대업을 성취한 대인에 대한 관심이 많은 제게 진리의 세계에서 종교를 넘어서 인연을 맺어 주신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ann 5> 한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외국인 신부 중에서 특히 남대영 신부에게 주목하신 이유는요?
박희택> 적지 않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사목을 하였습니다만, 남대영 신부님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십니다. 첫째는 시스템을 확립한 분이십니다. 고전에서는 ‘작자지위성(作者之謂聖, 예기 악기13)’이라고 하여 시스템을 확립한 분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신부님은 영성과 자애의 시스템인 예수성심시녀회와 성모자애원을 확립하여 당신 아니 계신 후에도 이어가게 했습니다. 둘째, 풍부한 사상과 거대한 실천을 한 분이십니다. 신부님의 <희망과 용기, 섭리와 낙관, 신뢰와 의탁, 사랑과 행복>에 관한 영성의 사상은 풍부합니다. 한국 사회복지 발달사와 함께한 이 땅 복지 역사의 첫 자리로서 사회복지 전 영역을 생전에 실천한 종합복지의 원형이십니다. 셋째는 진실함의 당체(當體)이십니다. 고전은 “진실함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중용20)”고 하였습니다만, 신부님은 설립자의 권위로 살지 않았습니다. 외출도 잘 않으시고 아이들의 식단을 챙기고 우는 아이를 달래고 후원해준 세계 곳곳의 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ann 6> 남대영 신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항에 머물길 원하셨는데요.
남대영 신부와 포항의 인연도 살펴볼까요.
박희택> 남대영 신부님은 칠곡-부산-대구-영천 등지의 사목을 거쳐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포항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늘이 이 분을 형산강전투(1950년 9월)의 현장에 먼저 보내신 것으로 섭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신부님의 공동체는 지금의 포스코 자리인 송정리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1950년 8월 11일 포항을 점령하였고, 9월 5일 한국군이 반격하는 과정에서 포탄이 12개 가량 떨어졌습니다만, 기도 속에서 사상자 없이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런데 1968년 12월 이 송정리를 포스코에 내어주고 대잠동으로 기꺼이 옮긴 역사도 유명합니다. 당시 한국 최대의 복지공동체에 800여 가족, 35채 이상의 건물이 있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 제철소가 꼭 필요함을 아신 신부님의 공동체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이전을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반세기에 걸친 한국에서의 삶의 반(약 23년)을 포항에서 실천하며 사셨고, 서거하여서도 포항땅에 묻혀 계신 포항의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이십니다.
ann 7> 남대영 신부는 포항을 대표하는 위인으로도 선정이 됐고요,
또 한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서 모두 훈장을 수여 받았는데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박희택> 2013년에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셨습니다. 신부님 생전에 그 공적이 널리 알려져 장면 총리(1960년 10월 9일)와 육영수 여사(1965년 6월 16일)의 방문을 받았으며, 1962년 우리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훈하였고, 1969년 고국 프랑스정부로부터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장을 수훈하였습니다. 사제로서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가장 약자인 자들을 한결같이 돌본 진실한 실천의 삶이 양국 정부로부터 인정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ann 8> 그렇다면 우리는 남대영 신부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박희택> 남대영 신부님은 일제 강점기의 상처 많은 조선과 조선인들과 함께하고,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 그리고 근대화 초기의 한국의 역동성과 함께한 가장 진실한 이름 가운데 한 분이라 하겠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78년 간의 삶의 대부분을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일관되게 사셨습니다. 이분은 단지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지 직접 체현해 보이신 것입니다. 대중들을 깨어나게 하는 영성 지도자로서도 풍부한 내용을 보이셨고, 사회사업가로서도 누구에 견줄 수 없는 자애의 화신(化身, 성육신)이었습니다. 본당(성당) 사목에 머물 수 없는 거대한 카리스마로 ‘영성과 자애의 거인’이 되신 것입니다.
ann 9> 네, 그럼 원장님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듣고 오늘 인터뷰 마무리 하겠습니다.
박희택> 우리 한국인들이, 특히 포항인들이 신부님의 은덕을 잊지 않고 기려야 하겠습니다.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포항을 주된 인연처로 하여 우리 근현대사에 깊은 자취를 남긴 남대영 신부님을 사랑하고, 그의 자취를 순례하는 보은의 시간과 행렬이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ann 10>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열린 행복 아카데미 박희택 원장이었습니다.
▶ 녹음은 ann 2~4가 누락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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