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오악 중의 하나, 경주 토함산. 그 토함산 기슭에 한적하게 자리잡고 있는 불국사. 이 곳에는 1200여년 전 신라인의 숨결이 남아있다. 불국사, 왜 신라인들은 이 절의 이름을 불국이라고 했을까?
불국사는 우리 모두에게 친근한 절이다. 한때는 신혼부부들이 꼬박 꼬박 찾았고 지금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우리 문화재를 자랑할 때도 첫 손에 꼽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동안 너무 친근해서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불국사의 또다른 면모를 보려고 한다.
먼저 이름에 주목해보자. 불국(佛國), 부처의 나라다. 왜 이런 이름을 붙이고 된걸까? 첫번째 단서가 불국사 앞마당에 있다. 석가탑 그리고 다보탑을 자세히 보면 그 모양이 너무나도 다르다. 왜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모양의 두 석탑이 유독 불국사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불국사
불국사가 세워진 것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이다. 그후 몇차례의 재난을 당할 때마다 중건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국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다보탑과 석가탑. 대웅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 왜 다보탑과 석가탑은 절마당 중심에 서있는 것일까?
성타스님 ㅣ 불국사 주지: 원래 탑은 신앙의 대성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 화장을 하고 거기서 나온 유해가 사리입니다. 육체는 없어졌지만 육신의 사리는 바로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을 숭배했던 인도인들은 탑에 사리를 모시기를 원했고 부처님이 계신 곳이 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국사가 세워진 것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이다. 그후 몇차례의 재난을 당할 때마다 중건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국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다보탑과 석가탑. 대웅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 왜 다보탑과 석가탑은 절마당 중심에 서있는 것일까?
성타스님 ㅣ 불국사 주지: 원래 탑은 신앙의 대성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 화장을 하고 거기서 나온 유해가 사리입니다. 육체는 없어졌지만 육신의 사리는 바로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을 숭배했던 인도인들은 탑에 사리를 모시기를 원했고 부처님이 계신 곳이 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은 하늘의 별처럼 자리잡았고 탑들은 기러기 날으는 양 높이 솟았다<삼국사기>삼국시대부터 신라 경주에는 절과 탑이 많았다. 삼국사기는 당시 모습을 8자로 축약해 기록하고 있다. 신라왕경도에서도 곳곳에 흩어져있는 사찰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분황사, 황룡사, 미탄사, 황복사, 중생사, 어디에나 절 하나가 들어서면 동시에 탑이 들어섰다. 처음에 한 개의 탑이 생겼다가 통일 이후에는 쌍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감은사지 3층 석탑
최초로 쌍탑이 세워진 곳이 바로 감은사.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쌍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탁월한 균형미로 이후 3층 석탑의 원형이 된 탑이다. 그 모양과 크기, 조각 수법까지 똑같은 쌍둥이 탑이다.
최초로 쌍탑이 세워진 곳이 바로 감은사.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쌍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탁월한 균형미로 이후 3층 석탑의 원형이 된 탑이다. 그 모양과 크기, 조각 수법까지 똑같은 쌍둥이 탑이다.
그런데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동서로 서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그 모양이 너무나 판이하다. 석가탑은 간결하면서도 육중한 힘이 느껴지는 기단부와 경쾌한 비례로 쌓아올려진 탑신부로 인해 단순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이에 비해 다보탑은 석재를 목재처럼 자유롭게 사용하여 각 층마다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으로 탑을 만든 것일까? 해답은 경전 속에 있다.
이에 비해 다보탑은 석재를 목재처럼 자유롭게 사용하여 각 층마다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으로 탑을 만든 것일까? 해답은 경전 속에 있다.
박경식 교수 ㅣ 단국대학교 사학과: 법화경의 내용대로 석가여래가 설법을 할 때 다보여래가 상주중명을 한다는 내용이 탑으로 구현된겁니다. 석가탑은 석가의 탑이고 다보탑은 다보여래가 저 안에 계시다는 개념입니다.
견보탑품
석가여래상주설법탑 석가탑
다보여래상주중명탑 다보탑
견보탑품
석가여래상주설법탑 석가탑
다보여래상주중명탑 다보탑
법화경에 내용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가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자 다보 부처가 그 말이 진리임을 증명했다고 한다. 다보탑과 석가탑의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법화경의 내용을 고스란히 표현해서 세운 것이 다보탑과 석가탑인 것이다. 그래서 두 탑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얼마나 법화경을 충실히 옮겨놨는지는 우선 다보탑의 모습에서 더욱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
박경식 교수 ㅣ 단국대학교 사학과: 높이는 3만리, 기단의 너비는 1만 5천리라고 되어 있는데 굉장히 크고 넓다는 것이죠. 그와 더불어서 난간과 감실이 수천개씩 조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법화경을 충실히 옮겨놨는지는 우선 다보탑의 모습에서 더욱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
박경식 교수 ㅣ 단국대학교 사학과: 높이는 3만리, 기단의 너비는 1만 5천리라고 되어 있는데 굉장히 크고 넓다는 것이죠. 그와 더불어서 난간과 감실이 수천개씩 조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간이 오천개
문 없는 작은방이 천만개
깃발이 수없이 많고
보배로운 방울이 억만개
법화경에 따르면 다보 부처의 화신인 다보탑은 난간이 5천개, 문없는 작은 방이 1천만개, 무수한 깃발이 휘날리며 억만개의 화려한 방울이 달려있다. 그 뿐 아니라 사면에선 아름다운 향이 뿜어나오고 하늘에서 둥근 꽃이 비오듯 뿌려졌다고 한다. 지극히 화려한 모습이었음이 명확하다.
다보탑을 보면 제일 밑에 네모난 기단이 세워져있고 네 면에는 각 10개의 계단이 자리잡고 있다. 그 위에 기와집 같은 충혈을 얹고 사각의 난간을 둘렀다. 또 팔각정을 세우고 대나무 기둥을 박은 다음 연꽃 소반을 얹었다. 그 위에 팔각판을 얹고 상륜부를 만들었다. 그 어느 탑보다 복잡한 구조지만 담겨있는 사상은 아주 단순하다. 아집과 그 어느탑보다 복잡한 구조이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사상은 단순하다.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네모난 중생이 정신을 함으로써 모서리가 떨어져나가고 팔각으로 다시 원형으로… 원만한 깨달음의 과정을 탑으로 표현하고 있다.
문 없는 작은방이 천만개
깃발이 수없이 많고
보배로운 방울이 억만개
법화경에 따르면 다보 부처의 화신인 다보탑은 난간이 5천개, 문없는 작은 방이 1천만개, 무수한 깃발이 휘날리며 억만개의 화려한 방울이 달려있다. 그 뿐 아니라 사면에선 아름다운 향이 뿜어나오고 하늘에서 둥근 꽃이 비오듯 뿌려졌다고 한다. 지극히 화려한 모습이었음이 명확하다.
다보탑을 보면 제일 밑에 네모난 기단이 세워져있고 네 면에는 각 10개의 계단이 자리잡고 있다. 그 위에 기와집 같은 충혈을 얹고 사각의 난간을 둘렀다. 또 팔각정을 세우고 대나무 기둥을 박은 다음 연꽃 소반을 얹었다. 그 위에 팔각판을 얹고 상륜부를 만들었다. 그 어느 탑보다 복잡한 구조지만 담겨있는 사상은 아주 단순하다. 아집과 그 어느탑보다 복잡한 구조이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사상은 단순하다.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네모난 중생이 정신을 함으로써 모서리가 떨어져나가고 팔각으로 다시 원형으로… 원만한 깨달음의 과정을 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불교의 최고 경지를 상징하는 연화세계를 만날 수 있다. 난간에 숨겨진 대나무 기둥은 연화세계에 이르기 위한 꺽이지 않는 힘의 상징이다. 다보탑에는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돌사자. 돌사자는 이런 부처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필요한 조형물이다.
도업 스님 ㅣ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사자는 동물의 왕이에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왕 중의 왕이고 진리 중의 진리이다. 부처님의 진리, 지혜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해서 나타낸 것이 사자이죠. 그래서 탑을 만들때 화엄사 3층 사자상 석탑의 경우도 4마리의 사자가 부처님을 받치고 있습니다. 불국사 다보탑에도 사자가 있는 건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적으로 형상화시키기 위해 나타낸거죠.
경전의 충실했던 것은 석가탑도 마찬가지였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바위를 깔고 앉아 깨달음을 얻었다는 경전의 내용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석가탑은 신라 시대 다른 탑과 유사하지만 석가탑에만 있는 것이 팔방금강좌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금강좌라는 것은 부처님이 앉아계시는 곳이니까 팔방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계시는 이 자리를 중심으로 사바세계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부처님께서 다 앉으시도록 했다는걸 상징합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나란히 서있는 이유는 경전의 내용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바람 때문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금강좌라는 것은 부처님이 앉아계시는 곳이니까 팔방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계시는 이 자리를 중심으로 사바세계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부처님께서 다 앉으시도록 했다는걸 상징합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나란히 서있는 이유는 경전의 내용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바람 때문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다보 부처, 석가 부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경전의 내용을 조형물로 완성시킨 것이다. 이 두 탑이 경전의 내용을 형성화했다는 증거가 석가탑에서도 나왔다. 1966년 석가탑은 천년동안 숨겨온 자신의 속 모습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한다. 문화재관리소에서 훼손과 도굴을 막기 위해 석가탑의 해체복원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2층 탑신부에서 가로 세로 41cm 깊이 10cm의 네모난 구멍이 발견되고 거기에서 석가탑 속에 함께 봉안된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국보급 반열에 들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었다. 석가탑의 몸체 부분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묵서지편의 증언, 석가탑이 무너진 까닭은 http://blog.cyworld.com/eunayoon/3972147)
(묵서지편의 증언, 석가탑이 무너진 까닭은 http://blog.cyworld.com/eunayoon/3972147)
석가탑 2층 탑신에서 맨 처음 나온 것은 사각형 금동사리함이었다. 뒤이어 뒤이어 청동으로 만든 비천상, 나무로 깍은 작은 탑, 관옥, 수정, 구리 비녀, 향을 싼 봉지도 나왔다.
그런데 가장 발굴팀의 관심을 끈 것은 비단 보자기였다. 그 속에는 폭 6.7cm, 길이 6.2m의 두루마리 경전이 있었다.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그렇다면 다라니경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가장 발굴팀의 관심을 끈 것은 비단 보자기였다. 그 속에는 폭 6.7cm, 길이 6.2m의 두루마리 경전이 있었다.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그렇다면 다라니경은 과연 무엇일까?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다라니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다라는 뜻인데요. 다라니라는 말은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경이라고 하고 그 중에 요점을 다 농축시켜서 뽑아놓은 것을 다라니라고 합니다. 다라니는 글로써는 자그맣지만 그것이 팔만대장경을 다 포함하고 있단 뜻입니다.
그런데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이 관심을 집중시킨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8세기 초까지 사용된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때의 글씨가 발견된 것이다. 이것에 따르면 이 다라니경은 적어도 751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황복사 사리함 뚜껑에 새겨진 글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글씨와 황복사 사리함의 글씨체가 똑같다. 이것은 바로 이 다라니경이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박방룡 학예연구관 ㅣ 국립경주박물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에는 일본 나라시의 있는 법륭사 즉, 호류지의 5층 목탑이 있는데 그 안에서 백만탑다라니경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다라니경은 770년정도에 만들어진 것이기때문에 우리나라의 것보다 20년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에 일본의 것이 먼저 발견되어서 최초의 목판인쇄물로 평가받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됨으로써 우리나라가 목판인쇄물의 원조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다라니경은 발견 당시 워낙 부식이 심해 33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현재는 과학적인 복원과정을 거쳐 전체가 원상회복됐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이 다라니를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던 것일까?
봉은사
첫 작업은 경전을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정결한 몸으로 신비로운 경전을 한 자 한 자 베껴쓰는 세경작업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지극정성이 담겨야 한다. 글자 하나를 쓸 때마다 매번 절을 할 정도로 매번 마음을 쏟았다. 이렇게 석가탑 다라니경 글자 하나 하나는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라 쓰는 이의 혼이 담긴 결과물인 것이다.
첫 작업은 경전을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정결한 몸으로 신비로운 경전을 한 자 한 자 베껴쓰는 세경작업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지극정성이 담겨야 한다. 글자 하나를 쓸 때마다 매번 절을 할 정도로 매번 마음을 쏟았다. 이렇게 석가탑 다라니경 글자 하나 하나는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라 쓰는 이의 혼이 담긴 결과물인 것이다.
고인쇄 문화 전수관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한자 한자 베껴쓴 후에는 판각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엔 신라 최고의 목판기술이 접목된다. 옛날 그대로 판각하고 있는 고인쇄 전수관을 찾았다. 이곳에선 지난 1991년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을 그대로 복원해냈다. 5336자를 목판으로 복원하는데 13개월 이상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한자 한자 베껴쓴 후에는 판각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엔 신라 최고의 목판기술이 접목된다. 옛날 그대로 판각하고 있는 고인쇄 전수관을 찾았다. 이곳에선 지난 1991년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을 그대로 복원해냈다. 5336자를 목판으로 복원하는데 13개월 이상 걸렸다고 한다.
취재팀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실제 크기대로 판각해줄 것을 부탁했다. 폭 6.7cm에 글자를 새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도의 긴장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몇 mm의 오차, 손의 힘 조절 하나로 목판 자체를 망칠 수 있어 최고의 장인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임인호 ㅣ 판각전수자: 한 자만 파더라도 칼이 수십번이 가요. 수십번 정도도 아니고 다듬질, 바닥처리를 하다보면 상당히 까다로운데… 저희같은 경우는 작업이 끝나면 눈도 아프지, 팔도 아프지, 온 몸 안아픈데가 없죠. 큰 글자 같으면 파기 편한데 작은 글자니까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요.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글자를 돋보기로 확인해가며 판독해 하루에 팔 수 있는 글자가 16자 정도이다. 목판의 앞 뒷면에 240자를 새기는데 보름이 족히 걸린다고 한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글자를 돋보기로 확인해가며 판독해 하루에 팔 수 있는 글자가 16자 정도이다. 목판의 앞 뒷면에 240자를 새기는데 보름이 족히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다라니경을 세경하고 판독해서 탑 안에 봉했던 신라인들의 기술은 최첨단의 기술이었다. 탑 안에 부처님 몸안에 농축된 사리도 모시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다라니도 탑 속에 모셨다. 이 것을 모시고 탑 앞에서 기도하면 모든 재난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오국진 금속활자장 ㅣ 고인쇄문화전수관: 신라인들의 모든 종이 기술, 먹 개발, 판각 기술까지도 집약되었습니다. 과학기술 총 집약체로 봐야죠.
오국진 금속활자장 ㅣ 고인쇄문화전수관: 신라인들의 모든 종이 기술, 먹 개발, 판각 기술까지도 집약되었습니다. 과학기술 총 집약체로 봐야죠.
통일신라 당시 최첨단의 목판인쇄기술과 당대 사람들의 뜨거운 열망이 한데 농축되어 있는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왜 신라인들은 다른 곳에선 발견되지 않는 다라니경을 불국사 석가탑 속에 모셔두어야만 했을까?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이 탑에다가 부처님 몸에 농축된 요지인 사리도 모시지만 가르침의 요지인 법사리에 해당되는 다라니도 그 속에 모셨죠. 이런걸 왜 탑에 모셨냐면 이런 것들을 모시고 지극하게 기도하게 되면 모든 재난이 사라진다…
재난이 없는 세상을 갈구했던 신라인들은 석가탑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안도 경전의 세계로 만들려고 했다. 신라인들의 이런 마음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까지 만들어냈던 것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이 탑에다가 부처님 몸에 농축된 요지인 사리도 모시지만 가르침의 요지인 법사리에 해당되는 다라니도 그 속에 모셨죠. 이런걸 왜 탑에 모셨냐면 이런 것들을 모시고 지극하게 기도하게 되면 모든 재난이 사라진다…
재난이 없는 세상을 갈구했던 신라인들은 석가탑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안도 경전의 세계로 만들려고 했다. 신라인들의 이런 마음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까지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신라인들은 경전을 형상화해서 탑을 만들고 온갖 정성을 다한 다라니경까지 넣어서 조형물에 혼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런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석가탑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무영탑이다.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 둘은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백제 석공 아사달은 석가탑을 만들기 위해 신라땅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게 되자 아사녀는 남편을 찾아 서라벌로 오게 되는데 탑이 완공이 되고 탑의 모습이 연못에 비춰지게 되면 그 때서야 남편이 돌아온다고 했는데 탑 그림자가 비춰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고 기다림에 지쳐 메말라가던 아사녀는 그 연못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만다.
탑 그림자가 비춰지지 않아 석가탑이 무영탑, 그림자없는 탑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렇다면 불국사 안에 석가탑이 비춰질만한 연지가 있었다는 것일까? 조선시대 성인이라 불리우는 초의 선사의 시를 살펴보자.
昇天橋外九蓮池 승천교외구연지
七寶樓台水底移 칠보누대수저이
無影塔看還有影 무영탑간환유영
阿斯來鑑到今疑 아사래감도금의
승천교가 구연지에 칠보누에 아롱지고
무영탑 그림자를 보노라니 아사녀과 와서 보는 듯 하구나
그 곳에는 분명 연지가 있었고 분명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쳤었다는 이야기이다. 탑의 그림자가 비칠만한 연지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탑 그림자가 비춰지지 않아 석가탑이 무영탑, 그림자없는 탑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렇다면 불국사 안에 석가탑이 비춰질만한 연지가 있었다는 것일까? 조선시대 성인이라 불리우는 초의 선사의 시를 살펴보자.
昇天橋外九蓮池 승천교외구연지
七寶樓台水底移 칠보누대수저이
無影塔看還有影 무영탑간환유영
阿斯來鑑到今疑 아사래감도금의
승천교가 구연지에 칠보누에 아롱지고
무영탑 그림자를 보노라니 아사녀과 와서 보는 듯 하구나
그 곳에는 분명 연지가 있었고 분명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쳤었다는 이야기이다. 탑의 그림자가 비칠만한 연지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처음 세울 당시에는 2,000여간의 웅장한 전각으로 이루어졌던 불국사. 비를 맞지 않고도 절을 다닐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몇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수난을 당하고 만다.
불국사 복원의 노력은 계속 이어져왔다. 그러나 불국사가 그나마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은 1970년 대대적인 발굴, 복원공사로 의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불국사 발굴복원공사 보고서에는 흥미로운 흥미로운 사진이 실렸다. 발굴 조사 중 내린 비로 웅덩이에 물이 고이자 말로만 전해지던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쳤던 것이다. 그 곳은 바로 연지의 자리로 추정된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 복원공사에서 연지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국사가 통일신라 건축물? 박정희 정권 ‘상상력의 산물’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567537.html)
(불국사가 통일신라 건축물? 박정희 정권 ‘상상력의 산물’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567537.html)
동국대 사찰조경 연구소
불국사 연지의 실체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동국대 사찰조경 연구소를 찾았다. 홍광표 교수는 복원되지 않은 연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준비 작업 중이다. 우선 불국사 발굴 복원 보고서에 밝힌 연지의 위치와 크기가 타당한지 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불국사 연지의 실체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동국대 사찰조경 연구소를 찾았다. 홍광표 교수는 복원되지 않은 연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준비 작업 중이다. 우선 불국사 발굴 복원 보고서에 밝힌 연지의 위치와 크기가 타당한지 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홍광표 교수팀과 함께 불국사 현장 실측 조사에 나섰다. 이곳에 과연 얼마만한 규모와 어떤 모양의 인공 연못이 가능할지 직접 현장에서 가늠해보기 위해서였다.
불국사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연지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실측결과 청운교 남쪽에서 발굴된 연지의 규모는 대략 동서 39.5m, 남북으로 25.5m에 이르는 타원형이고 깊이는 2~3m 정도로 돌로 쌓은 인공적 연못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현재 청운교 앞의 공터와 정원수 공간이 모두 연지터로 포함되는 자리였다.
불국사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연지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실측결과 청운교 남쪽에서 발굴된 연지의 규모는 대략 동서 39.5m, 남북으로 25.5m에 이르는 타원형이고 깊이는 2~3m 정도로 돌로 쌓은 인공적 연못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현재 청운교 앞의 공터와 정원수 공간이 모두 연지터로 포함되는 자리였다.
1,200년 전 당시 신라인들은 청운교 백운교 앞에서 규모가 큰 연못을 만났을 것이다. 그럼 연지까지 물은 어디서 어떻게 끌어왔을까?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토함산 정상에서 흐르는 계곡을 볼 수 있습니다.
토함산 정상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불국사가 나온다. 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온 물이 불국사 연지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계곡물을 어떻게 연지로 끌어들였을까?
조선 선조때 간재 이덕홍의 기행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덕홍이 경주를 구경하고 쓴 동경유록에는 불국사의 구석구석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 돌다리를 건너니 큰 바위 위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 홈통을 통해 날으는 샘처럼 물이 횡으로 멀리 흐른다. 물이 떨어지는 아래에는 석조가 있고 날으는 샘 위쪽에는 구름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는 돌을 깍아만든 무지개와 같았다.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토함산 정상에서 흐르는 계곡을 볼 수 있습니다.
토함산 정상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불국사가 나온다. 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온 물이 불국사 연지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계곡물을 어떻게 연지로 끌어들였을까?
조선 선조때 간재 이덕홍의 기행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덕홍이 경주를 구경하고 쓴 동경유록에는 불국사의 구석구석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 돌다리를 건너니 큰 바위 위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 홈통을 통해 날으는 샘처럼 물이 횡으로 멀리 흐른다. 물이 떨어지는 아래에는 석조가 있고 날으는 샘 위쪽에는 구름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는 돌을 깍아만든 무지개와 같았다.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나무통에 물을 담아서 구품연지 쪽으로 물을 인수한 거죠. 간재 선생이 본 것처럼 나무가 떠서 흘렀을 거라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토함산 정상부터 시작된 계곡물이 일정높이로 설치되어 있는 나무 홈통을 통해 이동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나무 홈통의 높이는 높았을 겁니다. 허공을 가로질러서 오다가 어느 장소인지 모르지만 폭포로 떨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토함산 정상부터 시작된 계곡물이 일정높이로 설치되어 있는 나무 홈통을 통해 이동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나무 홈통의 높이는 높았을 겁니다. 허공을 가로질러서 오다가 어느 장소인지 모르지만 폭포로 떨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물이 흘러들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범용루 아래쪽에 있는 물받이와 배수구다. 이 배수구를 통해 나오는 물은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아니었다. 불국사 경내에 물이 흘러나왔던 곳이 있었다.
대웅전 뒤편에 위치한 무설전 근처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무설전 강당 동편쪽에 샘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물이 있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무설전 강당 동편쪽에 샘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물이 있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 샘의 물은 무설전을 거쳐 대웅전 서편으로 흘러 범영루에 난 수로를 통과하게 된다. 이렇게 계곡물과 샘물이 서로 만나 연지는 늘 깨끗한 물로 가득 채워졌던 것이다.
현장확인을 통해 조사된 내용을 종합해서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래픽으로 불국사 연지를 복원해봤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못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물을 폭포처럼 떨어뜨려서 물보라를 일으킨다든가 구품연지로 인해 생성되는 안개효과를 통해 석단 위에 있는 성스러운 공간을 환상적으로 연출하려고 하는 의도도 숨어있지 않았나…
현장확인을 통해 조사된 내용을 종합해서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래픽으로 불국사 연지를 복원해봤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못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홍광표 교수 ㅣ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물을 폭포처럼 떨어뜨려서 물보라를 일으킨다든가 구품연지로 인해 생성되는 안개효과를 통해 석단 위에 있는 성스러운 공간을 환상적으로 연출하려고 하는 의도도 숨어있지 않았나…
불국사를 세웠을 당시 신라인들에게 이 연지는 왜 필요했을까?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학교 사학과: 현실세계로부터 이상세계를 향해 가려고 하는데 여러 종교들이 차안으로 피안으로 하는 상징을 가지고 있죠. 연못은 사바세계 현실세상과 피안의 불국세상을 구별해줬죠. 우리는 저 아름다운 극락세계로 가려고 할때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다리를 건너서 가기도 하고 수레를 타고 가야겠죠.
불국사 연지. 그것은 지금은 잃어버린 신라인들의 또다른 불국세계였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학교 사학과: 현실세계로부터 이상세계를 향해 가려고 하는데 여러 종교들이 차안으로 피안으로 하는 상징을 가지고 있죠. 연못은 사바세계 현실세상과 피안의 불국세상을 구별해줬죠. 우리는 저 아름다운 극락세계로 가려고 할때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다리를 건너서 가기도 하고 수레를 타고 가야겠죠.
불국사 연지. 그것은 지금은 잃어버린 신라인들의 또다른 불국세계였다.
이렇게 연지를 복원해놓고 보니 연지를 경계로 세속과 불국세계가 확연히 구분이 되고 안개가 구름처럼 신비롭게 불국사를 감쌌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랏빛 노을이라는 뜻의 자하문도 그저 문학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보이는 현상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불국토로 건너다 주는 계단은 아래쪽 청운교와 백운교를 합해 모두 33개, 이 33은 깨달음의 과정을 나타내주는 숫자다.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겪는 중생들이 한 발 한 발 노력해서 부처의 세계로 닿기 위해 밟아 올라가는 희망의 다리이다.
마음의 공덕을 쌓으며 이 무지개 다리를 다 올라서면 자하문이 있다. 자색 안개 혹은 자주빛 안개 자욱한 문이라는 자하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불국세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 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무엇 하나 그저 지어진 것이 없다. 조형물 하나 건축물 하나까지도 깊은 뜻이 숨어있다. 그런데 불국사는 하나 하나의 조형물에만 깊은 의미가 숨어있는게 아니다.
불국토로 건너다 주는 계단은 아래쪽 청운교와 백운교를 합해 모두 33개, 이 33은 깨달음의 과정을 나타내주는 숫자다.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겪는 중생들이 한 발 한 발 노력해서 부처의 세계로 닿기 위해 밟아 올라가는 희망의 다리이다.
마음의 공덕을 쌓으며 이 무지개 다리를 다 올라서면 자하문이 있다. 자색 안개 혹은 자주빛 안개 자욱한 문이라는 자하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불국세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 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무엇 하나 그저 지어진 것이 없다. 조형물 하나 건축물 하나까지도 깊은 뜻이 숨어있다. 그런데 불국사는 하나 하나의 조형물에만 깊은 의미가 숨어있는게 아니다.
불국사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공간이 확연이 구분되어 있는데다 각 공간의 크기도 서로 다르다. 왜 그럴까?
불국사가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점은 가람의 배치가 독특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이 배열되어 있는데 불국사는 회랑을 쳐서 각각의 건물을 독립시켜놓았다.
불국사가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점은 가람의 배치가 독특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이 배열되어 있는데 불국사는 회랑을 쳐서 각각의 건물을 독립시켜놓았다.
불국사의 주요 건물로는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자하문, 좌경루가 있고 뒤쪽으로는 대웅전이 자리잡고 잇으며 회랑이 빙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대웅전 뒤편으로는 관음전, 비로전이 있다. 대웅전 옆에 있는 극락전은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불국사의 전각들은 서로 다른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불국사의 중심인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가 머물고 있고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곳이다. 법화경을 바탕으로 지어진 세계이다.
극락전은 아미타부처가 머물며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곳이다. 아미타경에 근거해서 세워졌다.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비로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상징하고 있다. 화엄경이 바탕을 이룬다.
가장 낮은 백성, 가장 고통받는 자를 손수 돌보는 관세음보살은 바로 관음전에 머물고 있다. 불국사는 이처럼 다양한 부처들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한데 어우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국사는 이렇게 다양한 부처들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각각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가 되도록 만들었단 말이에요. 획일적인 하나도 아니고 떨어진 별개도 아니고 각각 존재하면서도 하나로 존재하는 이것을 화엄의 세계라고 합니다. 화단의 꽃이 종류가 서로 다르고 크기다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같이 피어서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잖아요.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각각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가 되도록 만들었단 말이에요. 획일적인 하나도 아니고 떨어진 별개도 아니고 각각 존재하면서도 하나로 존재하는 이것을 화엄의 세계라고 합니다. 화단의 꽃이 종류가 서로 다르고 크기다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같이 피어서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잖아요.
그렇지만 각 영역들은 규모에서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다. 대웅전의 영역은 좌우 폭 51m, 전후 폭은 71m 인데 극락전 영역은 좌우 폭이 38m, 전후 폭이 42m다. 이를 평수로 계산해보면 대웅전은 1072평, 극락전은 473평이다. 대웅전의 넓이가 2배가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각의 넓이만 봐도 대웅전이 훨씬 크다.
범영루를 중심으로 전각의 넓이가 이렇게 확연히 구분된다. 넓이 뿐만 아니라 높이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대웅전 영역이 극락전 영역보다 석축 한 단만큼 더 높다. 높이의 차이는 불국사 정면도로 보면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또한 극락전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건물 한 채 높이로 대웅전이 높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대웅전과 극락전은 높이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미타 부처의 극락전보다 석가모니의 세계인 대웅전이 더 크고 높게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석가모니 부처의 세계를 더 크고 높게 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니까 우선 시각적으로 가까이 있으면 크게 보이는 그런 측면도 있고 현실세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세계도 필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좀 더 중요시하고 강조한 측면에서 높게 건설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불국사를 지었던 신라인들에겐 살아있는 현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부분이 강조됐다고 해서 다른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신라인들에겐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이런 신라인들의 생각을 불국사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학교 사학과: 신라인들은 자기들의 이상세계를 불교가 말하고 있는 불국세계를 통해서 조형화시켜보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상세계를 단순히 하나로 획일화시켜서 말하지 않습니다. 아미타경, 법화경,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국세계를 하나의 불국세계로 담아보이려 했던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상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죠.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석가모니 부처의 세계를 더 크고 높게 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니까 우선 시각적으로 가까이 있으면 크게 보이는 그런 측면도 있고 현실세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세계도 필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좀 더 중요시하고 강조한 측면에서 높게 건설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불국사를 지었던 신라인들에겐 살아있는 현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부분이 강조됐다고 해서 다른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신라인들에겐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이런 신라인들의 생각을 불국사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현 교수 ㅣ 동국대학교 사학과: 신라인들은 자기들의 이상세계를 불교가 말하고 있는 불국세계를 통해서 조형화시켜보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상세계를 단순히 하나로 획일화시켜서 말하지 않습니다. 아미타경, 법화경,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국세계를 하나의 불국세계로 담아보이려 했던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상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죠.
오묘한 조화의 세계를 이룬 불국사. 일주문을 지나면 사찰의 수문장 사천왕을 만난다.
세속과 불국세계의 경계인 연지를 지나면 볼 수 있는 것이 청운교, 백운교이다. 신라인들은 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야 한다. 한 단 한 단 욕심을 버리고 정상에 올라서면 거기서부턴 본격적인 부처의 나라다.
석가모니불의 성전 대웅전 마당을 장식하는 석등과 탑. 마음의 불을 밝히듯 스스로 지혜의 등을 켜고 정진하면 깨달음에 닿고 이승도 꽃밭이 될 수 있다.
불국사 가람은 구석구석까지 예사롭게 지어진 것이 하나 없다. 하나 하나의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듯 하면서도 보다 큰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파와 서로 다른 경전의 가르침이 조화를 이룬 셈이다. 대웅전으로 가보자.
특히 크고 웅장한 대웅전에선 죽어서 가는 내세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훨씬 더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세계를 부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아무리 하찮은 건축에도 온갖 정성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그만큼 필요하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불국사를 만드는 일이 왜 그토록 절실했던 것일까?
불국사의 가장 특징적인 것중 하나가 석축. 칼로 베어낸듯한 인공석에서 마구 가져다 심은 듯한 돌들까지 수많은 돌들이 불국사를 이루고 있다. 이 거대한 돌들은 불국사가 얼마나 세우기 어려운 절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가 20여년이 넘어서도 완공되지 못했던 이유도 이런 돌의 운반과 가공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양의 돌을 어디서 구했을까?
불국사의 가장 특징적인 것중 하나가 석축. 칼로 베어낸듯한 인공석에서 마구 가져다 심은 듯한 돌들까지 수많은 돌들이 불국사를 이루고 있다. 이 거대한 돌들은 불국사가 얼마나 세우기 어려운 절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가 20여년이 넘어서도 완공되지 못했던 이유도 이런 돌의 운반과 가공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양의 돌을 어디서 구했을까?
불국사가 자리잡은 토함산, 석재전문가와 그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토함산에 대부분의 돌이 화강암이고 불국사에 사용된 돌이 화강암인 것을 볼때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돌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다뤄진 것일까? 삼국시대 방법 그대로 성을 쌓고 있는 이천의 설봉산성. 이 곳에서 불국사의 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아직도 토함산 여기저기에는 떼어낸 돌의 흔적이 보인다.
큰 돌을 잘라서 쓰려고 쐐기를 넣었네요.
토함산에 있는 대부분의 돌이 화강암이고 불국사에 쓰인 돌이 화강암인 것을 볼때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토함산의 돌들은 불국사를 만드는데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돌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다뤄진 것일까?
큰 돌을 잘라서 쓰려고 쐐기를 넣었네요.
토함산에 있는 대부분의 돌이 화강암이고 불국사에 쓰인 돌이 화강암인 것을 볼때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토함산의 돌들은 불국사를 만드는데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돌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다뤄진 것일까?
경기도 이천 설봉산성
삼국시대 방법 그대로 산성을 쌓고 있는 이천의 설봉산성. 이곳에서 불국사의 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방법 그대로 산성을 쌓고 있는 이천의 설봉산성. 이곳에서 불국사의 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볼 수 있다.
우선 쐐기를 박아 돌을 잘라난다.
그렇게 잘라낸 돌 하나 하나도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날라야 한다. 이렇게 폭 68m, 높이 5m에 이르는 설봉산성을 쌓는데 10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총 인원은 14명이 투입되었는데요. 석공이 6명, 목도가 4명, 짐 지는 사람들이 있고…
14명의 전문가가 잠시도 방심하지 못하고 정진하는 모습에서 불국사를 세우던 신라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불국사의 석축은 길이도 설봉산성보다 긴 90m인데다가 인공석과 자연석을 섞어 쌓는 작업이라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14명의 전문가가 잠시도 방심하지 못하고 정진하는 모습에서 불국사를 세우던 신라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불국사의 석축은 길이도 설봉산성보다 긴 90m인데다가 인공석과 자연석을 섞어 쌓는 작업이라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기술을 가진 신라의 돌 전문가들이 판석 하나를 가다듬고 제자리에 끼우는데 엄청난 공력이 들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권오달 ㅣ 석공예 명장: 30cm 이 한면을 한 재라고 합니다. 정을 만들고 망치를 자기 손으로 다 만들어서 하루에 만드는게 30cm를 만드는 겁니다. 홈을 파고 다듬는게 시간이 또 걸리니까 이 한 재만 15일이 걸린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불국사의 공사가 얼마나 대규모 공사였는지는 70년대 초 불국사 복원공사 보고서만 봐도 알 수 있다. 현대 기술로도 5년동안 86,000여명, 석공만 33,900명이 투입된 엄청난 공사였던 것이다.
김대성이 751년 불국사 건설 시작,
774년에 완성을 못하고 죽자, 국가에서 완성
삼국유사에도 불국사 공사에 신라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당시 신라는 어떤 시대길래 이런 대규모 공사를 시작한 것일까?
당시 불국사의 공사가 얼마나 대규모 공사였는지는 70년대 초 불국사 복원공사 보고서만 봐도 알 수 있다. 현대 기술로도 5년동안 86,000여명, 석공만 33,900명이 투입된 엄청난 공사였던 것이다.
김대성이 751년 불국사 건설 시작,
774년에 완성을 못하고 죽자, 국가에서 완성
삼국유사에도 불국사 공사에 신라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당시 신라는 어떤 시대길래 이런 대규모 공사를 시작한 것일까?
불국사가 세워졌을 무렵은 신라 문화의 전성기였다. 수많은 걸작들이 이때 만들어지고 세워졌다. 독특한 석탑양식과 탁월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유려한 석재가공기술과 함께 온화한 분위기가 살아나는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자연과 인공이 이루어낸 조경예술의 극치 안압지. 모두 세계적인 유산이다. 그런 문화적 토대와 자신감 위에 불국사는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안압지는 신라의 생활사박물관이었다 http://blog.cyworld.com/eunayoon/3132043)
(안압지는 신라의 생활사박물관이었다 http://blog.cyworld.com/eunayoon/3132043)
김상영 교수 ㅣ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이 시기에 조성된 문화유산들이 상당수 있습니다만 당나라 대종에게 선물로 보내진 만불상같은 조각품은 당나라 대종이 보고 하늘에서 만든 작품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신라 불교 예술 수준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가 8세기 초중반입니다. 지금은 확인할 수 없지만 황룡사 대종도 기록만 보더라도 상당한 대작으로 생각됩니다. 8세기 초중반 신라는 사상적, 교학적, 불교문화예술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고 있던 시기고 불국사 창건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배경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라인의 마음이었다.
이러한 모든 배경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라인의 마음이었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건물을 지을때 노동자들이 모두 염불을 하고 지었다고 해요.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나무를 깍는 사람도 나무 아미타불, 돌 두드리는 사람도 나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단순히 강제 동원된 노동력으로 민중의 고혈을 빨아서 지었다거나, 만리장성이나 궁궐짓는것 처럼…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심으로 지었다…
계층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순수한 마음을 하나로 힘을 모은 사람들. 불국사는 당대 신라인의 열망이 결집하여 만든 산물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저 서방정토만 극락세계가 아니고 저 인도만 부처님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라도 부처님의 나라라는 거에요.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타방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가 부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죽어서 좋은데 간다던지 좋은 나라로 이민가겠다던지 그런 식의 생각을 갖지 말고 내가 사는 이 신라를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고 부처님의 나라이도록 해서 행복을 누리고 살자는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국사는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절로 남아있는 것이다.
계층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순수한 마음을 하나로 힘을 모은 사람들. 불국사는 당대 신라인의 열망이 결집하여 만든 산물이다.
법륜 스님 ㅣ 정토회 지도법사: 저 서방정토만 극락세계가 아니고 저 인도만 부처님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라도 부처님의 나라라는 거에요.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타방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가 부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죽어서 좋은데 간다던지 좋은 나라로 이민가겠다던지 그런 식의 생각을 갖지 말고 내가 사는 이 신라를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고 부처님의 나라이도록 해서 행복을 누리고 살자는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국사는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절로 남아있는 것이다.
통일을 이뤄낸지 100년이 지난 후, 신라는 정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고 문화 또한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신라는 소중히 얻은 이 안정과 평화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꿈꿨을 것이다. 대립과 갈등,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땅, 이상세계를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신라 땅 경주에 부처의 나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국사다. 최고의 기술력, 문화적 자신감, 신라인들의 간곡한 염원이 하나 되어 만들어낸 이상세계, 불국사. 그래서 신라인들은 이 절에 감히 불국이란 이름을 당당히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