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2012(제11집) 연간지 [광주전남시조문학]이
2012년 12월, 도서출판한림에서 나왔다.
다음은 조연탁 회장의 '발간사' 일부이다.
"... 한마디 고언하고 싶은 것은 이런 저런 이유로 시조의 틀을 깨뜨리려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런 발상을 하는 이는 시를 쓰는 게 어떨까 우리만의 고유의 전통이요 가락인 시조의 틀에
왈가왈부하는 일은 어떠한 이유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이다.
3장6구와 종장의 자수율 삼오사삼은 한국의 시 '시조'의 특유의 멋과 가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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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족(遠足) / 김종
먼길 굽은 어깨가 현관 열고 들어온 집
마중 나온 주인처럼 눈길 자주 보냈더니
한 그루 청죽이 자라 미륵처럼 앉았다
안마당과 바깥 마당 두 개의 징검돌은
한달음에 건너 뛰면 금세 지날 지척인데
태양도 발이 짧은 척 하루걸이 원족이야
사람 천년 세월 천년 건너는 두 마당 사이
이 나라의 오천 년이 마디발로 기어갔어
바람도 마당귀 돌아 원족 가는 강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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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짜 꽹과리 / 김옥중
날마다 빈둥빈둥 밥만 먹고 녹만 스니
그 죄가 하늘이라 곤장 만 장 맞고서야
소리도
미끄러질 듯이
저리 환히 반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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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의 말 / 문주환
초록진 내 여름을 그녀에게 다 내주고
하늘만 쳐다보다 허방다리 짚는다
한쪽 발 들어다 놓은 옆방이 더 후끈한지.
더듬어온 긴 날이 간극으로 맞닿아
푹신한 살거죽을 은근 슬쩍 잡아트네
비집고 넘어선 경계 틈새 더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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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방 / 유헌
계수나무 달방에서 손님을 받습니다
초사흘 깊은 밤엔 내줄 방이 더 없고요
찼다가 기울어지는 달빛 안고 잠든 방
얼마나 더 올라야 달방에 이를까요
흩어진 은행잎들 시린 가슴 덮습니다
이중섭 은지화(銀紙畵)처럼
등 기대고 사는 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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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얼흥얼 물드는 노래 / 박정호
할머니는 앞마당에
고추를 말리시고
시어머닌 하우스에
모종을 옮겨 심고
새댁은 아이를 낳아
몸조리하며 누워 있고.
먹감나무 잎사귀
빛깔 드는 사정이야
서 마지기 배추밭에
서리 내린 사정이라 해도
김가네 오달진 풍경
말난 김에 소문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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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화 - 막사발 / 송선영
더운 김 오롯이 품어 뉘 수척한 생 적셨네
한 평생 둥근 품 열어 백의종군 하염없더니
세상 짐, 길섶에 부려놓고
산화하는
저, 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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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 이보영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연꽃 한 송이
얼마나 그리우면 하루에도 몇 번씩
속마음 열었다 닫았다 달을 향해 기울다가.
갯내음 심고 달려오는 천수만 파도소리
섬 아닌 섬을 향해 저물도록 부서지다
지는 해 노을 빛 타고 날아가는 철새 몇 마리.
* 간월암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송만공 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간척사업으로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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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 이성관
없는 게 죄일까만 머리 숙여 삽니다
타고난 뚝심으로 해종일 들일 밭일
주인님 눈짓만 해도 신앙처럼 따르며
새벽처럼 일어나 꼴 베고 논밭 갈며
아린 허리 고개 들면 흰구름이 도옹동
논두렁 쌈지담배에 무지갯빛 아롱져도
손가락 마디마디 가슴에도 못이 박혀
아린 삶 되올리면 노을처럼 흐르는 강
언제나 나래를 펴고 하늘 훨훨 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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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다 / 최지형
오늘밤 찬 바람이 모여
음모를 시작했다
나무는 사색이 되고
잎들은 기댈 곳이 없다
이런 날
올 줄 알았겠지만
이별이라니 슬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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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피와 탱자 / 노창수
사랑하는 기미 잡티
미백에 울고 채이고
귀엽던 복점 주근깨
밉다 미워 깎아라
레이저,
고, 고민해도
깨끗해진다는 유토피아
피부톤에 맞춤 시술
캘러스에 추출물로
죽이다 살린 유전자 처방
네 고민 풀어준단다
살아날,
탄탄한 탄피
탱탱한 탱자,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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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蛇足)의 변천사 / 서연정
그릴에서 가든으로 레스토랑에서 카페로
웰빙에서 힐링으로 혀를 빙빙 돌릴 때
그 빛깔, 삶의 포장지
현란한 사족이다
길거리의 간판이 이름을 바꾸는 사이
열다섯 소녀에서 쉰네 살 여인으로
아직도 멀고 먼 찰나,
그 거리,
사족이다
* grill, garden, restaurant, cafe 등은 음식점 간판에 쓰였거나 쓰이는 이름이고,
한때 너나없이 삶의 본질이 wellbeing에 있다고 떠들어대더니
지금은 healing을 쓰는 게 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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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적막한 / 정혜숙
달의 운필이 동쪽에서 시작될 때
새순처럼 돋아나는 미간이 밝은 별들
어둠의 솔기 안쪽으로
꽃의 일가는 흩어졌다
고단한 생의 좌표일 수도 있겠다
별들이 빚어놓은 간결한 문장들
내 눈이 붉어지면서
문장을 따라간다
팔걸이의자에 앉아 입술을 축이며
소인 없는 편지를 가만히 음독한다
달빛은 흰 독말풀 근처를
배회하며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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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에게, 오탈자 수정을 부탁하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 수 있다.
'힐링'을 '휠링'으로 보내고, 수정을 부탁하였지만,
책자에는 '휠링'으로 나오고 말았으니........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하는, 글자들과의 숨바꼭질,
편집자의 그 고생을 알고도 남기에,
답답한 심정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