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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는 절로 깁기 장인이 된다
어느새 먼동이 텄다.
유난히 빨리 간 밤인 듯이.
그 조화의 뒷배는 상호처럼 후한(厚/bonito) 마음씨인 바르 보니뚜(Bar O Bonito)의 주인일 것이다.
단잠에 취하게 한 생리적 만복과 정신적 포만감이 그에게서 나왔으니까.
대범한 매직 쇼 담당자도 한몫 했으리라.
나는 침대보다 맨땅을 선호한다.
그래서 1인용 텐트를 애용하기는 해도 이 텐트에는 1m 미만의 폭과 낮은 예각 천장이라는 애로가 있는데
이 애로를 완전히 제거해 준 것이 너른 쇼 무대였으니까.
.무대에서 내려와 하바살의 상쾌한 공기를 맘껏 호흡한 새벽.
온 하늘을 찬란히 수놓던 별들의 유희는 사라졌지만 자국들이 남아있는 듯 아른대는 눈을 깜빡여 보다가
황급히 무대로 올라갔다.
차일피일 미루어 온 백팩(backpack)의 헤진 곳들을 깁는데 이 무대가 절호의 장소니까.
나그네의 너절한 세간살이를 아무렇게나 펼쳐 놓고 그 작업하기가 여기 보다 편한 곳이 없을 것이며, 호미
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2008년 8월에 누구로부터 받은 오스프리(Osprey 65L) 백팩이다.
4번의 백두대간과 9정맥을 비롯해 온 산을 누벼온 무명의 배낭(70L)이 퇴역할 수 밖에 없게 된데다 3번째
엄습해 온 악병(앉은뱅이)과의 사활을 건 결투에서 재기, 길을 떠나려 하기 때문에 필요했던 것.
고산준령을 대신해 옛길(이조시대의 十大路)에 들어서려 할 때 내 바람(국산brand)과 다르지만 선물이라
고마운 마음으로 수용한 것인데 벌써 자주 손을 봐야 할 정도가 되었다.
하긴, 전국에 뻗어 있는 10개의 옛길 중 남반도 구간을 모두 함께 걸었다.
한반도의 서쪽 최북단 해안에서 남쪽 해안을 거쳐 동쪽 최북단 해안(남반도 해안)까지,
휴전선 서단에서 동단까지와 긴 강안들(江岸)을 비롯해 걸을 수 있는 국내의 모든 길도 동행했다.
유럽,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의 까미노(Camino)와 일본의 시코쿠 헨로(四國遍路) 등에서도
만난고초를 더불어 겪었는데 탈이 없을 리 있는가.
7년 동안 지구의 3분의 2바퀴가 넘는 길을 나와 함께 하며 나를 지키느라 만신창이가 된 나의 수호신인데.
유럽의 뻬레그리노스로부터 "평생의 소원이 까미노 메인 루트(7개)의 완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인근국이며 연령의 여유가 있으므로 가능하겠지만 모든 조건이 절박한 최극동의 늙은이에게는 단기간에
이뤄야 하는 일인데, 내게는 아직도 3개의 루트가 남아있다.(그 때 기준)
10월이 가기 전(귀국 비행기 탑승일이 2015년10월26일이니까)에 완주하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그 때까지
만이라도 나를 지켜주기 바라면서 정성껏 기웠다.
나그네 생활이 길어지면 익숙해지는 것 중 하나가 뭘 깁는 솜씨다.
전번의 까미노에서도 숄더백(shoulder bag)을 깁고 있는 내게 다가온 가나다 여인들이 신기한 듯 바라다
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 정도로 숙련공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나그네는 절로 깁기 장인이 될 수 밖에.
변질을 거듭해온 까미노에 집착하는 의미는?
2015년 6월 26일(금), 이른 아침의 6시 30분 경(summer time이 없는 뽀르뚜갈 시간은 5시 반)
공 들인 깁기를 마친 후 즉시 길을 나섰다.
N347-1 도로를 떠나 알베르게(10€를 초과하기 때문에 포기한 Albergue O Bonito) 옆으로 잠시 동진한
후 그 거리만큼 동남향 농로를 따르는 까미노.
이후, 동동남행하는 500m 쯤의 농로가 되어 남북으로 곧게 뻗은 메인 농로에 합류한다.(T자로)
(잠부잘 이후의 까미노는 Rabaçal에 진입하기 위해 EM563도로를 따르지만 하바살을 포기하고 Fartosa
로 직행한다면 도로를 건너 남으로 직진함으로서 1.5km쯤의 단축 효과를 내는 농로다)
좌측 길(Fartosa길)을 버리고 루인(ruins)에 버금가는 킨따 다스 샤바스까스(Quinta das Chavascas)를
지나는 비포장 직선로를 1km쯤 남하하는 까미노.
우회전하여 700m쯤을 남서진하고 남하한 후 300m 미만의 서진을 한다.
우측 구릉지에 자리한 풍차 아래를 지나는 길이며 좌회전하여 현계(縣界/Coimbra와 Leiria)를 건넌다.
행정구역이 지자체 뻬넬라(Penela/Coimbra縣)의 하바살(São Miguel,Santa Eufémia e Rabaçal)에서
지자체 안시앙(Ansião/Leiria縣)의 알보르지(Alvorge)로 바뀌는 경계다.
현계를 중심으로 두 지자체(Penela와Ansião) 지역은 본래 광대한 관목 구릉지대였으리라.
오르내림(高低)은 완만하다 해도 험하고 불편한 산길이 대부분이었을 것임을 의미한다.
2.000년 전에 사도 야고보가 이 지역의 선교 여정을 가졌다 해도 그 길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획정할 때도 이 길 외에는 대안이 없었으며 부분적인 개간 개발로
편한 농로와 도로가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험하고 불편한 암반과 자갈로 된 길이 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의 현 까미노 중에서 오리지널(original)은 험한 암반길 뿐이며, 일체의 길이 개간 개발
에 따라 무시로 바뀌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겠다.
특히 양쪽 프레게지아(Rabaçal과Alvorge) 구간 까미노의 숙명이다.
까미노는 남하와 남서진(500m미만)으로 N347-1도로에 진입한다.
하바살을 관통하며, 아침에 헤어졌던 길로 프레게지아 알보르지(지자체Ansião)의 루가르인 히베이라 지
알깔라모케(Ribeira de Alcalamouque)를 지난다.
우측 도로변의 슈라인(shrine/2002년에 설치?)을 지나 500m쯤 남하한 후 마을을 떠나는 까미노.
좌측의 농로에 이어지는 관목숲 길을 따른다.
자갈길 암반길 등 험한 길임을 의미하는데 외로이 서있는 아줄레주(azulejo/陶瓦/광택나고매끄러운벽돌)
타일로 된 십자고상(十字苦像)의 슈라인(Shrine).
험하고 외로운 길과 매치(match)되는가.
까미노는 1km 이상의 동남진과 1km쯤을 남하하여 까미뇨 지 뽀르뗄라 아 까자스 노바스(Caminho de
Portela a Casas Novas) 길에 합류한다.
연달은 이름 없는 길(unnamed road)이 이름을 갖기는 잠시였을 뿐이고 다시 무명의 길로 든다.
대부분이 관목지대라 황량하고 험했던 옛길을 가늠해 보게 하는 길이다.
300여m의 남동진에 이어 1.5km 정도의 남서진으로 N347-1도로에 다시 진입하기 까지.
현계를 지난 후에도 합류했다가 이탈하는 도로다.
이 지역은 지형에 따른 악천후로 사방이 꽉 막히면 까미노를 찾아가기 난감한 때가 종종 있단다.
더구나 잘못 들면 낮고 완만하기는 하나 산 하나를 헤매야 하기 때문에 아슬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지역.
이런 경우에 까미노에 대한 애착을 접고 N347-1도로를 따르는 뻬레그리노스(순방향/Lisboa→Santiago)
가 더러 있으며, 안전하거니와 반복하는 이탈과 합류가 없으므로 3km 이상의 단축 효과도 있단다.
이미 변질을 거듭해온 현재의 까미노(농로)에 위험을 무릅쓴 집착이 무슨 의미있겠는가.
현명한 선택이라고 권하거나 순례가 목숨을 걸고 허는 고난과 고행이라는 이유로 비판할 수도 없겠다.
합류한 도로의 전방, 코앞에 우회전해서 올라가라고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
파띠마 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다.
600여m의 관목지대를 남~ 서~남으로 이어가는 동안에 줄곧 유혹한 것은 해발 300m 미만인데도 꽤 높아
보이는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교회다.
지호지간인 알보르지의 교구교회(Igreja Paroquial de Alvorge)
알보르지의 순례자 숙소(Albergue peregrino)에 가려면 다비드 미겔 나모라 길(Rua David Miguel Na
mora)을 따라야 하나 이 때는 숙박소와 무관한 오전이다.
알베르게는 생략해도(passby) 되지만 그 서북쪽의 교회가 이끌어가는 인력(引力)이 대단했다.
평일(金)이며 어떤 애로나 특별한 희망사항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웬지 들르고 싶도록.
이같은 경우가 이따금 있으며,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만으로도 심란한 마음이 진정되었으니까.
알베르게를 경유하지 않고 직행할 수 있는 길인 듯한 숲속 오솔길이 보였다.
어렵잖게 올라갔다.
그러나 '뚜두 헤빠루'(Tudo reparo).
내외부 전체를 수리중이라는 안내문이다.
교회 안에 들어갈 생각을 접으라는 명령에 다름아니다.
교회의 문을 열 수는 없으나 탁 트인 사방을 보는 것 만으로도 한(regret)은 면했다 싶으며, 마음의 안정도
찾은 듯 하였으므로 미니 슈퍼(Mini Mercado)의 콜라 1캔으로 프레게지아 알보르지를 마쳤다.
남하하는 다비드 미겔 나모라 길을 따라 알보르지를 관통해 N348 도로를 건넌 후 돌포장 광장(Largo do
Cruzeiro/Junta de Freguesia de Alvorge)에서.
뽀르뚜갈, 세계 최초의 식민제국, 세계 최후의 식민제국은 허명인가
보이사스 길(Rua das Boiças)로 바뀌어 남서진하는 까미노.
잠시의 농로에 이어 무명 비포장 도로로 1km미만을 남서진한 후 좌회전, 동남과 남행을 거듭하기 1km쯤.
N348 도로에서 분기한 도로에 T자로 진입, 남서진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프레게지아 알보르지(지자체Ansião)의 남단 루가르인 준케이라(Junqueira) 마을을 지나는 까미노다.
500m 정도의 지점에서 좌회전하여 실개천 농로를 따라서 N348 도로 코앞까지 남동진한 후 우회전, 잠시
도로(N348)와 나란히 남서진하다가 그 도로에 합류한다.
500m미만이며 프레게지아 산띠아구 다 구아르다(Santiago da Guarda)의 농로다.
소교구(Freguesia)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데 까미노(Camino de Santiago)에 대한 자부심과 성 야고보
(Santiago)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이 대단함을 느끼게 하는 프레게지아의 이름이다.
수호신 산띠아고(Santiago da Guarda)라는 이름.
곧, 우측 도로변의 파띠마(Fatima) 안내 표지기둥 앞에서 도로를 떠나는 까미노.
다시 1km 남짓을 변화가 심한 숲속 길로 남하하여 까사이스 다 그란자(Casais da Granja)를 지난다.
인구 8명(남3여5)의 미니 마을인데도 마을길이 돌을 깊게 심는 돌 포장로인 것으로 미루어 개발할 때 많은
돌 때문에 고역이 많았겠는데 왜 폐가와 공가가 많게 되었으며 폐촌이 점쳐지는 마을이 되었을까.
우리나라 남반부와 비슷한 땅덩이지만(인구는 서울특별시와대동) 세계 최초의 식민제국(1415년)이었으며
세계 최후의 식민제국(1999년)이기도 한 나라의 산간벅촌 사정이 이럴 줄이야.
까미노는 EM526도로에 진입, 동진하는 5거리(Torre de Vale de Todos)에서 N348도로를 건너 십자고
상(Crucero) 좌측길(R. do Cruchel)을 따라 리베르다지 길(R. da Liberdade)까지 2km쯤 남동진한다.
이미 프레게지아 안시앙 지역이며 네뚜스 마을(Netos/lugar)이다.
이후 500m 이내의 예배당(Capela de S. Jose) 앞에서 좌회전(동진)한 후 1km쯤의 상 조세 길(R. de São
José)로 동진, 동남하한다.
우측 길을 따라 남서진과 남둉진을 하고 다시 우측의 남서진 숲길로 들어가는 까미노.
잠시의 이름 없는 숲길이 끝나고 다시 우회전하는 까미노는 안시앙의 루가르인 아레오사(Areosa)와 바떼
아구아(Bate Agua)의 포장도로와 올리브 숲(?)을 따라 서진과 남동진을 한다.
까미노가 획정된 당초 부터 무수한, 이름 없는 길들을 우왕좌왕하며 갈피 잡기 어려운 길이었을 리 없다.
왜냐하면 내가 누누이 강조해 오는 대로 길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므로 개간, 개발이 전혀 이뤄
지지 않은 곳들에 길이 들어설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이즘에는 길의 개념이 사람의 발이 아니고 교통승용
구 위주로 정의되고 있지만)
이후에도 괄목할만한 개간과 개발이 보이지 않는데도 이름도 얻지 못하는 길들이 혼란스럽게 만들어진 것
이야 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오리지널 루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날(2015년 6월
26일)의 내 숙소가 될만한 곳 중 하나(Volunteer firefighters Ansião)는 이 지점에서 2.3km 전방이란다.
뻬레그리노스를 위한 볼런띠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안시앙의 자원 소방서다.
아마도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을 식사?
숲에서 나와 포장도로의 우측 폰치 산따 길(R. do Fonte Santa)을 따라 CM1090도로를 건넌 후 롬바르두
길(R. do Lombardo)과 교차할 때까지 농원길(Travessa da Fonte Santa)을 따라 650m쯤 남서진했다.
에스따지우 길(R. do Estádio)이 바통 터치함으로서 숙박 예상지인 안시앙의 자원소방서(Volunteer fire
fighters Ansião)가 1.65km 남았을 뿐인데 와락 시장기가 왔다.
아침 먹기를 거르는 것은 오래 된 습관이다.
아직껏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간밤에 워낙 포식하였기 때문인데 시장기라니?
알보르지 다운타운의 미니 슈퍼에서 콜라 1캔을 마셨고 EM526 5거리 주유소((Torre de Vale de Todos)
의 스낵 바르에서 콜라에 빵 1개를 먹었을 뿐이기 때문에 그럴만도 한가.
지도가 확인해 준 음식점은 600m에 불과하다는데도 굉장히 멀게 느껴졌을 정도의 공복감이었다.
에스따지우 길을 따라서 대형 경기장(Estádio Municial de Ansião)을 지나 진입한 N348도로의 좌측 길
(R. dos Pinheirais)로 잠간 동진하다가 남하하는 노변(좌측).
2성급 호텔(Residencial Solar Da Rainha - Fernando Freire Castela, Lda.)의 식당이다.
왕래 여인(旅人)과 일반 외부인에게도 개방되고 있다는 식당.
많지 않은 투숙객만으로는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불가피한 경영 전략인가.
서양의 대중식당을 드나들 때마다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메뉴다.
고백하건대 나는 다양한 서양 음식에 무지하기 때문인데 이 식당에 들어설 때도 그랬다.
상상보다 널따랗기 때문이었을까.
점심 때를 넘겼기 때문인지 썰렁하다고 느껴질 만큼 한산한 식당.
뻬레그리노스가 주 고객인 까미노 주변의 음식점 대부분은 '뻬레그리노스메뉴'라는 이름의 푸짐한 식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식당에서는 기대 난망일 것 같은 느낌이 앞섰다.
메뉴 자체가 없기 때문이었는데, 제공하는 음식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단일 메뉴라는 서빙남(男).
그의 설명은 내 첫 느낌과 정 반대로 내 기분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단일 메뉴가 이즈음에 내가 부쩍 먹고 싶어진 비프스테이크(bife)라니 이보다 더한 다행이 있겠는가.
또한 빵과 쇠고기, 야채샐러드와 비뇨(wine) 등으로 약간 엉성하기는 해도 공복감이 극으로 치솟고 있는
나에게는 당연히 꿀맛 음식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무공해 초원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자란 소의 씹을수록 맛이 더하는 육질.
뻬레그리노스에게는 의식적으로 음식의 양(量)을 후하게 제공하는 것이 이베리아 반도 음식점들의 관행이
라고는 하지만 두려울 정도로 많은 양이 담긴 고기 접시가 나왔다.
비뇨 또한 뻬레그리노스에게는 1잔(반병)의 무상 제공이 관행이라는데도 내게는 1병을 병째로 가져왔다.
음식점에서 제공하는(service) 비뇨는 질이 낮다는 평이지만 내게 온 것은 수일 전에 지나온 바이하다 산
(Bairrada産)으로 뽀르뚜갈을 대표하는 비뇨 중 하나란다.
친구인 로저(Vila Nova de Gaia의)는 자기 고향(북부)의 비뇨 도루( Douro)를 꼽지만 이 지역은 중부다.
얼마나 맛있게 먹고 마셨기에 삽시간에 빈 접시, 빈 병이 되었을까.
점내를 살피던 중년남(주인?)이 밝게 웃으며 새로 한상을 차려오듯 리필(refill)을 했다.
더는 먹고 마실 수 없게 되었을 때 안면에서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그 중년남이 다시 내게 왔다.
비로소 내 나이와 국적, 이베리아 반도에서 하려는 남은 계획 등에 관심을 보여왔다.
"Are all Coreans over 80 as healthy as senior?"(80세 이상의 한국인이 모두 어르신처럼 건강합니까)
영어를 하는데 물음은 메모지에 적어서 내게 보여주었다.
자기 몸이 부실한 편(weak)이기 때문인지 강건한 시니어가 가장 부럽다는 그.
포장하겠다며(take away) 주방으로 간 남은 음식이 비프도 비뇨도 다 풀(full)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para o jantar"(for dinner/저녁식사용)이라는 메모지와 함께.
10€ 음식으로 이보다 더 후한(질과 양+정) 경험은 내 일생에서 아직 유일하다.
아마도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을 식사?
나의 이베리아 반도 여정은 2개월이 되어가므로 아직 3분의 1도 소화하지 못한 상태다.
그는 4개월이나 남은 내 장도를 축원하며 1km쯤 전방이라는 안시앙 다운타운 길을 안내했다.
숙소도 소개하려던 그는 "안시앙 자원소방서(Bombeiros Voluntários de Ansião)를 이미 점찍었다" 며
뻬레그리노임을 강조하는 내게 경악하며 탄식조(歎息調)의 푸념을 했다.
옛 뻬레그리노스는 형극의 길을 걷고 풍찬노숙이 다반사였지만 이 시대에는 2성급 호텔에도 불평불만인데
최저 알베르게만도 못한 최하급 숙소를 스스로 찾아가는 80대 시니어에 경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
봄베이루스(소방서)가 제공하는 숙소는 2층 벙크(bunk)가 최상이며 야전용 간이침대 또는 맨바닥에 간이
매트리스가 전부인 간이 숙소다.
하지만 뻬레그리노스가 기껍게 취해야 하는 노숙에 비하면 더할 수 없는 고급 숙소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