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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山淸) - 산의 그늘로 가득한 땅
산이 많아 뫼산(山)에 그늘 음(陰) 산음이라 불렸던, 산의 그늘로 가득한 땅. 산청군은 경상남도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부는 합천군 의령군에, 서부는 함양군과 하동군에, 남부는 진주시에, 북부는 거창군에 각각 인접하였다
산청 문화관광 http://tour.sancheong.ne.kr/
영상포엠 한국 100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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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1)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363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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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
산청한방약초축제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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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한방 세계화 선두주자로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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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9경
제 1경 지리산 천왕봉. 제2경 대원사계곡. 제3경 황매산철쭉. 제4경 구형왕릉. 제 5경 경호강 비경. 제6경 남사예담촌. 제7경 남명조식유적지. 제8경 정취암조망. 제9경 동의보감촌
남명 조식유적지(사적 제305호. 제7경)
남명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남명기념관,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남명기념관 시천면 사리 468
'산천재(山天齋)'라는 이름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대축괘(大畜卦)에서 가져온 것이랍니다.
이 괘는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 군자가 그 형상을 본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하여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산천재에서 남명이 학생들을 가르친 교육철학의 요체(要諦)는 경(敬)과 의(義)다. 이는 조선유학교육 중에서 좀 빈약했던 행동을 중시한 것으로 산천재(山天齋)는 바로 행동철학의 발상지라고도 볼 수 있다. 산천(山天)이란 주역에 나오는 말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국왕에게 세 차례 글을 올려,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건의하였다. 우리 정신사의 큰 봉우리인 선생이 학문과 인격을 완숙한 경지로 끌어올린 이곳 산천재. 우리는 이곳에서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던 노학자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하겠다.
남명매(南冥梅) 산천재를 세우면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남명매> 한 그루를 직접 뜰에 심고 벗을 삼았다. 우리나라는 매화 10선을 선정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3그루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삼매(三梅)가 있다고 한다. 이 삼매는 모두 경남 산청에 있다.
남사예담촌 원정매(元正梅), 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남명 조식 상소문(단성소(丹城疎, 을미사직소(乙未辭職疏) 단성현감으로 발령을 받자(1555년), 다음과 같이 사직 상소를 올리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자전(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명종)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명종은 매우 불쾌해 했지만 차마 처벌하지 못했다. 당시 권신들로 인해 언로가 막히고 어지러운 정치상황으로 인해 숨은 인재들이 관직에 나오려 하지 않는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한 조식의 글을 성균관 유생 500여명을 비롯한 많은 대신과 사관들이 옹호했기 때문이다.
단성소(丹城疎)가 바로 이 합천 뇌룡정(雷龍亭) 에서 이루어졌다
조식묘소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손수 자리 잡은 곳이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는데 남명기념관 경내에 있다.
[남명 조식(曺植) 묘] 일설에 의하면 남명보다 1년 일찍 세상을 떠난 퇴계가 "내 명정과 비석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쓰라"고 유언을 남기자, 이 소리를 들은 남명이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는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라 했다고 한다.
유언은 이렇다. “나 가걸랑 묘비에 처사라고 써라. 만약 이를 버리고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처사處士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조식은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德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세심정(洗心亭)은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는데, 학문하는 여가에 휴식하는 곳이다. 서원 앞 강가에 있는 정자로 남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조식(曺植)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다. 칼끝은 항상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해 가장 엄격했던 것이다. 또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늘 자기를 깨우치고 칼을 머리맡에 두고 의리의 결단을 생각했다는 남명. 한번 결심을 하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리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자신에게도 용서 없이 질책했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남명(南溟) : 남쪽에 있다고 하는 큰 바다. 冥[ 어두울 명, 바다 명]
그의 학문을 경의학(敬義學)이라고 한다. 경이란 안에서 바른 마음을 갖는 것이요 의란 밖으로 사물을 올바르게 처리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알고서 올바르게 실행해야 된다는 점이 중시되었다.
남명 <장자> '소요유' 편에 북쪽바다를 북명(北冥)이라 했다. 그 바다에 '곤(鯤)'이란 물고기가 사는데 그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곤이 변해서 새, 붕(鵬)이 되는데 그 크기도 몇 천리인지 모른다. 성내어 날면 날개가 하늘에 구름이 드리운 것 같다. 그 붕이 바다가 출렁이고 큰 바람이 일면 남쪽바다 남명(南冥)으로 날아간다. 남명이란 남쪽의 큰 바다.
임진왜란때 남명조식선생님에 제자들이 의병장이 가장 많았습니다. 곽재우는 조식에 외손녀사위이고 제자이며 정인홍, 김천일 등등 모두 조식에 제자입니다. 곽재우에게는 직접 병법을 가르쳤다.
유두류록[遊頭流錄] 조식(曺植)의 두류산(지리산) 견문록
남명이 기행문에서 두류산을 다섯 방향으로 모두 12번(58세)이나 갔었다고 자술했듯이 주위의 지명, 지리, 산천에 대해 익히 알고 기술하여 단순한 여정의 나열이 아니라 입체적이며 역동적으로 서경(敍景)과 서정(抒情)을 조화, 함축시켰기에 기행문학으로서 가치가 높다.
남명선비문화축제 문화체육관광부선정 지역민속축제로서 실천유학의 대가인 남명조식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열리며, 선비문화체험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남사예담촌(제6경)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81-1 남사마을
남사예담촌 남사리 이씨고가
남사예담촌은 옛 선비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전통한옥마을이다. 남부지방에서 사대부가 살았던 전통적인 한옥으로 이곳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이씨 고가쪽으로 걸어갔다.
이씨 고가에 이르는 돌담길에는 일명 선비나무(부부나무)로 알려진 회화나무 두 그루가 X 자 형태로 서 있다. 남사예담촌을 상징하는 수령 300년 된 나무들로 마을 지형으로 인한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심었다 한다. 잎이 무성한 계절이면 더욱 예쁠 것 같은 이 부부나무 아래를 통과하여 돌담 끝에 있는 대문을 열자 1700년대 건축인 이씨 고가의 사랑채가 나왔다.
<사진 : 이씨 고가에 이르는 돌담길에는 일명 선비나무로 알려진 회화나무(과거급제, 벼슬길에 나가면 심었다) 두 그루가 X 자 형태로 서 있다. 남사예담촌의 상징적 나무들로 수령이 300년이다>
남사예담촌 남사리 최씨고가
사랑채 좌우 두 곳에는 안마당으로 연결되는 중문을 설치했는데, 동쪽의 중문으로 들어가면 안채가 한눈에 들어오게 한 개방적인 구조이다. 이에 반해 서쪽 중문으로 들어갔을 때 익랑채와 안채가 바로 눈에 띄지 않도록 ‘ㄱ’자 모양의 담을 둘러 쌓았다. 이것은 유교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사대부 주택의 유형으로 남녀의 공간을 나누고 여성 공간에 대해 독립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한 방법이다. 여느 뒷간과 달리 계단을 올라가 2층에서 일을 보게끔 만들었는데, 사람의 똥이 가장 좋은 비료였던 옛날에 효과적인 인분 활용을 위한 것으로 옛사람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사진 : 남사예담촌의 최씨 고가에 이르는 돌담 길 풍경은 참으로 운치 있고 정겹다>
남사예담촌 원정매(元正梅)
이 고택 뒤뜰에는 하즙의 손자로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하연(1376~1453)이 7세 때 심었다는 감나무는 630여 년의 세월 속에 아직도 꽃과 열매를 피우고 있어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곧게 뻗어 오르다가 공중에서 휘감아 돌며 뻗어 오른 나뭇가지의 기상이 일품이라며 극찬 받던 원정매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는 없어서인지 그 어느 해 봄부터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한다. 600여 년의 아름다운 자태를 뒤로 한 채 2006년 고사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본목(本木)이 동사하기 몇 해 전 밑둥치에서 나온 가지가 살아남아 탐스러운 홍매화를 피우고 있고 원정매 바로 옆에는 씨앗이 떨어져 뿌리 내린 또 다른 홍매가 자라고 있어 끈질긴 자연의 섭리를 다시한번 확인했다.
내원사[內院寺] 삼장면 대포리
단속사지 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 (보물 제72호)
단속사지(斷俗寺址)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1963년 보물 제7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3m이다. 남쪽을 향한 절터에 동서로 있는 2기의 탑 중 동쪽 탑으로 두 탑의 규모와 수법이 비슷하여 같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상하의 비례가 정연하고 탑신부의 체감률도 알맞아 단아하고 우아하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조화롭게 이루어졌으며,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알맞게 구성되어 있다. 각부의 조각수법과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신라 하대 것으로 추정된다.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斷俗寺址 西 三層石塔) 보물 제73호
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이 매화나무는 고려말, 통정 강회백(1357∼1402)이 어릴 때 이 절에서 공부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훗날 강회백이 종2품 벼슬인 '정당문학'에 오르면서 이 매화나무를 '정당매'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령이 630여 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본래 나무는 고사하고 현재 이 나무는 100년 뒤에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산청 삼매 중 유일하게 경남도 보호수로 지정됐다.
대원사[大源寺] 삼장면 유평리
건물로는 대웅전·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봉익루 등이 있고, 절 뒤쪽의 사리전(舍利殿)에는 비구니들이 기거한다. 절 입구에 부도와 방광비(放光碑)가 있고, 선비들의 수학처인 거연정(居然亭) 등이 있다.
대원사 계곡(제2경)
대원사신중도(大源寺神衆圖) 대원사에 있는 신중탱화로서, 인도의 재래적인 토속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불교 그림이다. 신중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불법 수호의 선신(善神)들로, 이처럼 별도로 그림을 그려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신중탱화는 주로 전각의 주불을 모신 불단의 왼쪽(向右)에 걸어 놓는다.
동의보감촌(제9경)
한방테마공원으로 발길을 돌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곰과 호랑이 상징 조형물과 샘골이다.
전통 한방 휴양관광지에는 전국 최초의 한의학 전문박물관인 산청한의학 박물관과 불로문 등 공공시설과 한방의료 시설인 본디올 탕제원과 한의원, 약초와 버섯 골 전통식당 등 민간시설, 마무리 단계에 있는 한방테마공원, 약초판매장 등 한방휴양관광의 메카로 손색없는 시설을 갖춘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촌에서는 <2013 산청 세계 전통의약 엑스포>가 열릴 예정이다. <산청한방약초축제>
동의보감촌 한의학박물관 금서면 특리
한의학의 세계화를 지향하며 산청군에서 건립하였고, 관학협력을 맺은 부산대학교 한의학 전문대학원이 위탁 운영한다. 지상 1층은 전통의학실, 2층은 약초전시실로 꾸며몄으며, 주제별로 모두 7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졌다. <산청한방약초연구소>
동의보감촌 류의태 약수터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법계사(法界寺)
그러나 6·25 때 불탄 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법당이 준공되어 절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당 왼쪽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 있으며, 절 뒤에는 암봉(巖峰)과 문창대(文昌臺)가 있다
법계사 적멸보궁 불상을 모시지 않는 적멸보궁 불전을 본당으로 하여 사리탑에 기도 예배토록하고 있다.
법계사 극락전 불교도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법계사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에는 지리산 여산신(女山神) 마고선인(麻姑仙人)을 모시고 있다. 지리산에는 노고단(老姑壇)이 있는데 신라의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면서 탑(塔)과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신명과 노고(老姑)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했다는데 그 노고(老姑)할머니가 여기 모신 산신이다. 노고는 바로 마고(麻姑) 선인(仙人)을 가리키므로 지리산 산신은 여자산신이다는 것이다.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473호)과 적멸보궁 앞쪽에 있는 문창대의 기암은 일본의 후지산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고 한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법계사가 망하면 일본이 흥한다는 속설로 법계사 주변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의 정기를 흐리게 했다. 일본이 법계사의 혈맥을 짓누르려고 쇠말뚝을 박았던 걸 2055년 음력 5월1일과 2006년 10월 3일 제거하고 뽑은 쇠말뚝을 전시하고 있다
박문수의 어머니가 법계사에서 주목껍질을 벗겨 즙을 짜서 밥을 지어 먹고 즙으로 목욕을 하면서 천일기도를 올렸는데 지극정성에 감동한 부처의 어머니인 문수보살이 아들을 하나 주겠다 해 자식을 얻어 키운 아들이 바로 박문수라고 한다. 문수란 이름도 문수보살을 의미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산청 이사재[尼泗齋]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박탈당한 뒤 백의종군시 하룻밤을 묵어 갔다는 곳이다
생초국제조각공원 생초면 어서리 93-15
산청 박물관 산청군은 지난 2005년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전시 등을 위해 생초국제조각공원 내에 산청 박물관을 지난 2008년 7월에 완공했다.
성철(性澈)대종사 생가
생가와 관련 건물이 먼저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된 뒤, 마무리 작업이 끝난 2000년 10월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으며, 2001년 3월 30일 '성철스님생가 복원식 및 겁외사 창건 회향 법회'를 가졌다. 면적 165㎡의 생가는 한옥으로, 안채· 사랑채·유품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철의 영정을 모신 안채는 일반인들이 참배하는 공간이며, 사랑채는 외부인이 머물 수 있는 숙소로 지어졌다.
성철(性澈)대종사 생가 겁외사[劫外寺 ] 성철(性徹 1912~1993. 11. 4)스님의 생가터에 있는 사찰로, 2001년 3월 30일 창건 회향법회를 열었다. 전국에 있는 15곳의 성철스님 문도사찰(門徒寺刹) 중 한 곳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이자 20여 년간 성철스님을 시봉했던 원택스님이 창건하였으며, 2008년 현재 주지를 맡고 있다. 겁외사(劫外寺)는 시간 밖의 절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은 성철스님에 의해 지어졌다.
율곡사[栗谷寺]
절의 배치는 산 속 절의 전형적인 사동중정형식(四棟中庭形式)을 지형에 맞게 변형한 특이한 형식을 취했다. 대웅전, 관심당(觀心堂), 칠성각, 요사채로 이루어진 아담한 절이다.
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지은 건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7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집계 불전이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뒷벽 중앙에 불단을 만들었는데, 살미첨차 끝에 쇠서가 없는 공포에, 전면 문살은 빗살·띠살 무늬로 장식하고 궁판과 불발기로 복잡하게 구성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불단 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걸려 있다. 대웅전 기단 앞에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석조팔각불대좌(石造八角佛臺座)가 남아 있다.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 제4경)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가락국의 제10대 왕(재위 521∼532).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겸지왕(鉗知王)의 아들이자, 각간(角干) 김무력(金武力)의 아버지이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曾祖父)이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항복하여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가야국의 끝왕 구형왕 (구해왕, 양왕)의 능인데 왕이 신라에 합병된 뒤 망한 나라의 왕으로서 죄책감에 돌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능이 돌로 쌓아 이루어진 석릉인데 따라온 군사들이 돌 하나씩 놓았다는 것이다.
왕릉 주위가 숲이지만 왕릉에는 낙엽이 없고, 새가 많아도 새똥이 없고, 돌이 많지만 뱀이 없다고 해요.... 그리고 구형왕이 유언하길 나라를 빼앗긴 죄인이니 흙속에 묻힐 수 없다 하여 시신 위에 바로 돌을 쌓으라고 했다. 왕의 유언대로 신하들이 돌로 무덤을 쌓고 그 내력을 종이에 적어 왕산사 서까래에 숨겨두었는데 숨긴 곳이 은밀하여 오랜 세월동안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종이가 담긴 상자가 발견되어 꺼내려고 하나 손을 대는 사람마다 죽게 되니 그 누구도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민경원이란 사람이 종이를 꺼내어 비로소 이 무덤이 가야의 마지막 왕의 왕릉이라고 밝혀진것이다.
정취암(淨趣庵 제8경)
기암절벽에 매달린 정취암은 옛 단성현(丹城縣) 북방40리에 위치한 대성산(大聖山)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절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 하여 예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 6년에 동해에서 아미타불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비추니 한 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 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대사께서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圓通庵)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淨趣寺)를 창건하였다. <거북바위>
1833년[순조33]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기 150cm 크기의 불화이다. 일반 탱화에서는 산신이 호랑이 옆에 앉아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행차하는 것을 협시동자가 받들고 있는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의 주제는 불교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토속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의 혼합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시천면 중산리의 중산관광단지 내
2층 생활실과 산청과 지리산실에서는 지리산에서의 빨치산과 토벌부대 생활상과 지리산이 간직한 역사·자연경관 및 산청의 문화관광자원에 대한 전시를 하며, 영상실에서는 빨치산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상영한다.
당시 빨치산과 군경토벌대가 사용한 총기류와 의복·공민증·화폐·나침의 등의 압수품, 토벌작전 모형, 다양한 사진자료와 설명자료를 갖추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天王峰 제1경)
정상에 오르려면 동쪽으로 개천문(개선문), 남서쪽으로 통천문을 거쳐야 하며, 이 외에 칠선계곡을 지나는 날카로운 비탈길과 대원사에서 중봉을 거쳐 오르는 험난한 길 등이 있다. 법계사를 지난 뒤에 나오는 개천문은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개선문으로 알려져 있다. 통천문은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뜻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통천문은 천연 암굴로 사다리를 타야 지날 수 있는데,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할 수 없고 선인(신선)들도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 경계에 솟은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지배적. 사찰에 들어설 때 반드시 사천왕문을 통과한다. 즉, 천왕봉은 사천왕문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 사천왕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앙하였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 지점의 동서남북에서 그들의 무리와 함께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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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강(鏡湖江 제5경) 거울처럼 맑은 강이란 뜻이다. 지금의 경호강은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 진주의 진양호까지 80여 리(약 32km)의 물길을 이르는 말이다. 한강 이남의 유일한 래프팅 장소로 알려져 있다. 경호강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뱃놀이를 즐기던 어느 수령이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다 관인 (官印)을 강에 빠뜨려 파직(罷職) 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월 동강`인제 내린천과 더불어 3대 래프팅 명소로 꼽히는 경호강
사양정사(하씨고가)
사양정사는 한말의 유학자 계제 정재용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종화가 남사로 이전한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1920년대에 지은 재실이다.
사양정사는 '사수泗水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사수'는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에 있는 강 이름이다. 공자를 흠모한다는 뜻으로 마을을 휘감아 도는 개천을 사수라 부른다.
하씨고가 감나무 사양정사 앞에는 세종 때 황희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지낸 원정공 하집(즙)의 증손자 문효공 하연이 일곱 살 때 심었다는 600년 된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산청곶감 특히 지리산 산청 덕산곶감은 조선시대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최근에는 청와대 선물용으로도 선정되기도 하였다. 지리산 두메산골 덕산농원에서는 최고의 품질 및 맛으로 소비자 분들이 만족을 하고 있다..
'제3회 지리산 산청곶감축제'가 2010.1. 9일 시천면 천평리 곶감경매장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
이곳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묘역으로 6·25 전란 중이던 1951년 2월 7일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이 전개되면서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 주민에게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705명)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 중 양민을 통비 분자로 간주집단학살한 사건 (제 4대국회 제 35회 임시회 - 산청ㆍ함양ㆍ거창사건 진상보고서, 박상길 외 2인 : 1,818명 인명 피해)
산청군목조각장전수관 산청출신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의 보유기술 등을 전수함으로써 전통 목조각을 배우는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작품과 도서를 전시하여 탐방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함
양수발전소전력홍보관 양수발전은 주간과 야간의 전략사용의 차이를 이용하여 수력으로 발전하는 시스템이다. 양수발전은 수력발전소와 달리 물을 저장하는 상부댐과 하부댐의 2개의 댐을 운용한다. 산청 양수발전소의 시설용량은 700MW이며 35만kW 발전기 2기가 운용된다.
이동서당[尼東書堂 ]
일제강점기 때 을사늑약 체결한 자를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던 명우 곽종석의 학식과 우국충절의 인품을 기리기 위해 1920년에 건립되었다. 곽종석은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전념하다가 기미년에 전국유림대표 137명을 대표하여 파리만국박람회 때 조선이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장서를 송치한 일로 옥살이를 하였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리산뱀사골 고로쇠약수제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성도성모의 단을 쌓고 하늘과 산에 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에 고로쇠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올렸으며, 신라의 화랑들은 신비의 영약으로 즐겨 마셨다고 한다.
지리산 온천은 수백 년 전부터 만인의 병을 낫게한다는 방장산하제중약천으로 유명한 서쪽의 산수유마을 약수터 자리에 위치. 만인의 병을 낫게하는 게르마늄오천수와 광천수를 이용한 지리산온천랜드 탄생하였다.
단성I.C → 목면시배유지 → 성철대종사생가 → 남사예담촌 → 남명조식유적지 →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 대원사→ 밤머리재 → 구형왕릉 → 동의보감촌(한의학박물관, 한방테마공원, 기체험 등) → 황매산영화주제공원 → 정취암
생초I.C → 구형왕릉 → 동의보감촌(한의학박물관, 한방테마공원, 기체험 등) → 밤머리재 → 대원사→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 남명조식유적지 → 남사예담촌 → 성철대종사생가 → 목면시배유지 → 단성I.C
산청I.C → 동의보감촌(한의학박물관, 한방테마공원, 기체험 등) → 구형왕릉→목면시배유지 → 성철대종사생가 →대원사 → 내원사 →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 남명조식유적지 → 남사예담촌 → 단성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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