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때문에 바닷가가 많이 생각나는 요즈음입니다
침대맡 창문을 열어도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아요.
어제 밤에도 애어컨을 켯다 껏다
하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렇땐 바닷가에 앉아서 밤이 새도록 파도랑 있고 싶네요~
다행히 이번주 번개산행때는 장봉도 해안둘레길을 트레킹한다고 하네요
시원한 바다내음과 풍경을 보면서 바다에 들어갈수 있다고 하니
일정을 조절해서 기꺼히 참가하겠다고 했었는데..
그만큼 가슴이 벅차고 기대가 되는 산행이 되겠네요..
짜증스러운 무더위입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 유념하시고 건강한 여름 되시기를 바랍니다.
8월의 노래로 지금 노래교실에서 뜨고 있는
송대관의 신곡 '딱좋아'라는 노래를 보냅니다.~~
사랑도 해봤다 이별도 해봤다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
눈물도 흘렸다
원망도 해봤다
삶에 지쳐 쓰러져도 봤다
이 나이에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지금이 딱 좋아
지난 일은 생각 말자
후회를 말자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지금이 딱 좋아
한 때는 겁 없이
잘나가도 봤다
무서울 게 없던 나었다
실패를 해보고
욕심도 버렸다
이제 마음도 다 비워버렸다
이 나이에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지금이 딱 좋아
지난 일은 생각 말자
후회를 말자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지금이 딱 좋아
이 나이에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지금이 딱 좋아
지난 일은 생각 말자
후회를 말자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지금이 딱 좋아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지금이 딱 좋아
송대관
송대관은 1946년 6월2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 송대관의 조부는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도와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
로 갖은 고초를 겪은 송영근이며 1942년에 타계하였다.
그리고 부친은 한국전쟁때 실종이 되어 어린시절 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현재 실종된 부친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있다.
정읍과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던 송대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서울로 상경하여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을 만나 일을 도와주면서 트레이닝을 받았다.
1967년에 트로트〈인정많은 아저씨〉로 처음 가요계에 발을 내딛었다.
당시 송대관이 데뷔하던 대한민국 가요계에는 동료 가수 남진, 나훈아가 주목을 받던 판국이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만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74년에 신인 작곡가 신대성이 멜로디를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세월이 약이겠지요〉가 처음 히트하면서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에 송대관이 직접 작사하고 신대성이 작곡한《해뜰날》이 크게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송대관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남진, 나훈아,최헌,하춘화 등 당대 대형 가수를 재치고 그 해에 방송국 가요대상 3개를 수상하고
동시에 가수왕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해뜰날〉의 대히트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송대관은
이 때부터 꾸준히 음반을 발매하며 가수 활동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송대관은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했다.
약 7년 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그 쯤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송대관은
〈혼자랍니다〉로 가수로 복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였고 1989년에 발표한 곡
〈정 때문에〉가 20만장의 레코드판매량을 기록하고 라디오 차트 분야에서
3개월간 1위를 하며 다시금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1992년에는〈차표 한장〉이라는 곡의 가사처럼 차표 한 장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또한 1998년에 발표한〈네 박자〉는 여러 세대층을 포섭하며 남녀노소 누구나 부르는 국민애창곡으로 뽑혔다.
송대관은 1980년 대 말부터 트로트 음악을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역할의 중심이 되었던
가수 현철, 태진아,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인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 중에 어려운 미국 생활 시절, 동고동락했던 태진아와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사이로 지내며
그와 함께 명콤비로 불리며 현재까지 매년마다 《송대관 & 태진아 라이벌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2003년에는 아내 이정심이 작사한〈유행가〉는 2000년대에 가장 크게 히트한
송대관의 노래로 젊은 층이 즐겨부르는 곡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후사랑해서 미안해〉,〈내 여자〉,〈오래오래〉를 부르며 활동해왔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태진아와 함께《명인제약 이가탄》의 전속모델로 활약하였다.
2008년에는 신인가수 김양을 스카우트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하여 후배양성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해에는 남진의 뒤를 이어 제 2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2009년, KBS 드라마《공주가 돌어왔다》, 2011년 SBS 드라마《신기생년》이라는
두 편의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실력을 뽐냈다.
또한 2009년 10월 31일에는 정읍출신의 국민가수이자 정읍시 홍보대사이기도 한
송대관의 명성을 통해 정읍시와 내장산을 전국에 알리고
가요제의 명품화를 통해 정읍시의 이미지 향상을 꾀한다는 취지로
마련된《정읍 송대관 가요제》가 처음 개최되어 차세대 트로트 유망주의 등용문이 되기도 하였다.
2011년에 송대관의 부인이 원정도박 혐의로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건과
지난 2013년 4월, 캐나다 교포 부부로부터 토지 분양대금 사기 혐의로 피소되었고 기기소 의견으로
6월, 송대관 부부는 사기혐의로 경찰에 송치되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18일 부동산 사기 혐의로 피소된 가수 송대관과 부인 이모씨를 기소의견으로
서울서부지검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송대관 부부는
캐나다 교포인 A씨 부부로부터 토지 분양대금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를 받았다.
A씨 측은 경찰조사에서 송씨 부부가 충남 토지개발 분양사업에 투자를 권유, 3억7000만원을 투자했지만
개발사업 인허가가 이뤄지지않고 소유권 이전이 불가능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재판부는 이날 송대관과 아내 이씨에 대한 항소심 심리를 종결하고
오는 8월 13일 선고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송대관 부부는 지난 2009년 원고 양 모씨 부부에게 충남 보령 토지개발 분양사업 투자를 권유,
약 4억 원을 받았으나 개발하지 않고 투자금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송대관의 경우 지인으로부터 1억 원을 빌린 뒤 갚지 않은 혐의도 받았다.
송대관은 1심에서 징역 1년2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으며,
아내 이 씨는 징역 2년을 받고 법정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송대관 부부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첫댓글 송대관의 인생사를 노래를 표현한 흔적이 엿보이네요..
한때는 잘나가던 가수였지만 지금은 송사에 휘말리는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암튼..세상사 후회없는 인생살이로 엮어갔으면..노래는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