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전쟁사]
“왜가 신묘년 이래로 건너오자 격파”
고구려는 신라를 군사적으로 도왔다? (하)
7세기 고구려 멸망으로 단절 역사 증명 ‘광개토대왕비’
장수왕 3년 대왕릉과 함께 건립 日 1882년 발견 …탁본 떠 해석
광개토대왕릉비. 국방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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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2 재위)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해 다스린 고구려의 제19대 군주였다. 대왕은 대국을 건설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중국의 것이 아닌 독자적인 연호, 영락(永)을 제정해 사용하게 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배와 간섭을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왕의 정복 활동은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 능비의 비문에 기록돼 있는데, 연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391년(왜를 격파함) ②392년(백제의 석현성·관미성 등 10여 개 성을 획득하고, 거란을 정벌함) ③393년(수곡성에서 백제와 교전해 승리함) ④394년(패수에서 백제와 교전해 승리함) ⑤395년(시라무렌강 유역의 패려를 토벌함) ⑥396년(백제 수도 한성 등 58개 성 점령, 항복 받음) ⑦398년(백신토곡을 복속함) ⑧399~405년(후연과 신성, 남소성, 숙군성, 요동성, 목저성 등에서 각축전을 벌임) ⑨400년(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해 신라를 구원함) ⑩404년(황해 연안의 대방계에 침입한 백제·왜를 격파함) ⑪407년(백제를 공략함) ⑫410년(동부여를 정벌함). 이 중 ⑨에서 고구려는 위기에 처한 신라의 요청으로 군사적 지원을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능비의 비문에 의하면, 399년에 신라에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왜인들이 우리 국경에 가득 차 있어서, 성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인 우리는 신민(臣民)이 되어 고구려에 의탁하여 대왕의 명령을 기다립니다”라 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신라인의 충성심을 칭찬하면서 비밀스러운 계획을 신라 사신에게 알려 주고 보냈다”고 한다.
한편 3년 전인 396년 전쟁(⑥)에서 수도 한성을 정복당한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영위노객(永爲奴客·영원히 노객과 같은 신하가 되겠다)’의 맹세를 했는데, 399년에 이르러 백제가 왜와 연결하려 한다는 정보가 고구려에 입수됐다. 이 같은 백제의 움직임에 대해 광개토대왕은 평양으로 순행을 실시해 고구려 군사력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사신이 도착해 고구려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아래의 내용이 능비에 기록된 400년의 고구려 군대의 활동(⑨)이다. “400년에 대왕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만 명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가 가득했는데, 고구려 군대가 그곳으로 접근하자 왜적이 물러갔다. 고구려 군대가 왜적의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도착하자, 그 성은 곧 항복했다. 이에 고구려 군대는 수비병을 그곳에 배치했다. 신라성과 염성을 함락해 왜구를 크게 궤멸시키니, 성 안에 있던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곳에도 수비병을 두었다…남은 왜가 궤멸돼 달아났다. 성을 함락시키고 수비병을 두었다. 지난날에는 신라 매금(寐錦·왕을 의미)이 스스로 와서 고구려의 명령을 청하거나 조공을 논의하지 않았는데,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와서 신라 매금이 가복(家僕·집안의 하인)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 3년(414)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됐으나, 7세기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와 기억에서 사라져 우리 조상들은 이 능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군 정보 요원으로 만주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사카와 가게노부(酒?景信) 중위가 1882년 이 능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본국으로 보냈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역사가들을 동원해 6년에 걸쳐 비문과 관련된 여러 작업을 진행한 후, 1889년에 비문의 해석문을 공표했다. 일본은 ①의 391년 신묘년 비문 내용을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
능비의 신묘년 비문은 고구려가 ⑥전쟁을 하게 되는 이유를 서술하는 내용으로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라이위신민(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이다. 이 신묘년 기사는 1889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을 포함한 한·중·일 역사학자들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논쟁이 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이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다. 북한과 우리나라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수왕이 능비를 건립했다는 기본 입장을 취해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이때까지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건너오자, 고구려가 격파하였다. 백제와 임나 및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해 ‘파(破)’의 주체를 광개토대왕 능비의 성격에 따라 고구려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이때까지 조공하였다. 왜가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와 백제·가라·신라를 정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 ‘파’의 주체를 왜로 이해하고 있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허중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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