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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우 (金仁祐) |
고려때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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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 (金 鉉) |
고려때 감문위(監門衛)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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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충 (金 忡) |
고려 때 도총제(都摠制)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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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조 (金昌祚) |
고려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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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방 (金仲房) |
고려 때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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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원 (金仲源) |
고려 때 청로 상장군(淸虜上將軍)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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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간 (金 ) |
1646 (인조 24) ~ 1732 (영조 8) 자는 직경(直卿), 호는 후재(厚齋), 시호는 문경(文敬), 도(濤)의 아들, 수(洙)에게 입양. 각 문집에 흩어져 있는 선인(先人)들의 예설(禮說)만을 뽑아「동유예설(東儒禮說)」을 편찬, 간행했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자의(諮議)에 이어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지내고, 예산현감(禮山縣監)으로 나아가 관속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덕과 위민의 칭송을 받았다. 연산현감(連山縣監) 1713년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장령(掌令) 1718년(숙종 44) 집의(執義)에 임명되고, 1719년 기로사(耆老社) 등록을 계기로 공조 참의(工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1724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찬선(贊善)오르고 이어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731년 86세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견해가 정밀하고 깊었고 지조를 지키는 일이 돈독하였다 1732년에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문헌: 후재집(厚齋集)동유예설(東儒禮說) 태극도설차기(太極圖說箚記)동몽학규(童蒙學規)거향계사(居鄕戒辭)사재록(思齋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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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 (金繼) |
1528 (중종23) ~1565 (명종20) 자는 성부이고 조선의학자,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한 여광(汝光)의.아들이다.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행의(行誼)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전하며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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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원 (金繼源) |
1720 ~ 1771 자는 仲述(중술) 호는 素居(소거) 훌륭한 학문과 품행이 아름답다고 세상에서 일컬어 왔으며 원주 判官(판관)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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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金敬文) |
진의교위(進義校尉)를 지냈으나 단종(端宗)이 손위(遜 位)되므로 벼슬에 진취할 뜻을 버리고 해주(海州)에 은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해주 미록촌(彌鹿村)에 이거(移居)하게 되었다. 공을 모신 세덕사(世德祠) 상량문(上樑文)은 해백(海伯公 : 申錫禧)공이 지은 글에「사륙신(死六臣)과 더불어 같은 마음이다. 다만 자취가 다를 뿐이라 했고, 또「그 학문의 깊이는 성인의 가르침의 근본을 더욱 순하 게 한 것이었다.」하였으니 공의 모습을 어지간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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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金景善) |
1788 (정조 12) ~ 1853 (철종4) 자는 여행(汝行), 시호는 정문(貞文), 기풍(基豐)의 아들. 1830년(순조 3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문학으로 옮기고 삼사와 춘방을 거쳐 1834년에 의주부윤으로 1839년(헌종 5) 이조참의(吏曹參議), 1843년 파주목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1851년(철종 2) 우참찬(右參贊)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문헌 : 연원직지(燕轅直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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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연 (金敬淵) |
1778 (정조2) ~ 1820 (순조20) 자는 시현(時顯) 1813년에 진사(進士) 1814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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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金 ) |
1670 (현종11) ~ 1727(영조3) 자는 봉년(逢年) 171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으로 승진되고 예조(禮曹)와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등 삼사(三司)를 역임하고 1725년 에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刑曹)·공조(工曹)·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거쳐 좌우승지(左右承旨)에 올랐다. 이조참판에 추증(追贈)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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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관 (金 灌) |
조선조에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으며 1417년에 돌아가시니 왕자 경령군(敬寧君)부인.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의 아버지를 예우하 는 규례에 따라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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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국 (金光國) |
1666년(현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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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묵 (金光黙) |
1767년(영조 4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경상도 관찰사·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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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굉 (金 宏) |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군수(郡守)를 지냈다.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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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구 (金 構) |
1649 (인조 27) ~ 1704 (숙종 30)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 시호는 충헌(忠憲), 징(澄)의 아들. 1682년(숙종 8)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 재직하면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기에 힘썼다. 평안도 등지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의 위(位)를 추복(追復)케 했다. 아울러 중종(中宗)비 신씨(愼氏)를 복위(復位)케하고 묘를 능(陵)으로 추봉(追封)하고 능역을 감독하여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문원(承文院) 제조(提調)를 겸하고 그후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지의금부사 (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이어서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1703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문헌 : 관복재집(觀復齋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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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한 (金龜翰) |
1492(성종23)~1553(명종8) 위솔(衛率)세걸(世傑)의 아들사마(司馬)에 합격하고 벼슬은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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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권 (金 權) |
1549 (명종 4) ~ 1622 (광해군 14) 자는 이중(而中)호는 졸탄(拙灘)시호는 충간(忠簡)덕무(德懋)의 아들 성혼(成渾)에게 학문을 배우고, 1580년(선조13)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92년 임진왜란때 문학으로 삼았다가 이조좌랑의 벼슬을 겸하게 되었다. 1593(선조26)년 홍문관 교리, 지평, 사간등을 지내고 난이끝난후 사인, 수찬이된지 8개월만인 1595(선조28)년 9월에 삼척부사(三陟府使)로나갔다. 1600(선조33)년 직강, 연안부사,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등을거쳐 사복시정, 상의원정, 통례원좌통례, 1609년사도시정 봉상시정, 여주목사(驪州牧使)등을 지내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진하였다. 1612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으며, 호종신료(扈從臣僚)로공신(功臣)2등으로 청풍군(淸風君)에봉(封)해지고 자헌대부(資憲大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으로 승진되었다. 인조때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무안의 송림서원과 청풍의 봉강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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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손 (金貴遜) |
1576 ~ 1651 13세손으로 貴弼(귀필)의 아우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雲峰(운봉) 縣監(현감)에 나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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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규 (金 圭)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윤조(胤祚)의 아들무과(武科)에등과하고 벼슬이판윤(判尹)에 이르렀으나 어떤일로인하여 전라도 임파에 유배되었고 적소에서 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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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상 (金奎相) |
1774~ 1833 자는 致文(치문) 호는 毅庵(의암)학행으로 천거되어 1793년 지평(持平)으로 특별 제수되고 병조참지에 이르렀다. 유고가 있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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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金奎軾) |
1838 (헌종 4) ~ 1895 (고종 32) 자는 우약(雨若), 세호(世鎬)의 아들. 1870년(고종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으며 1889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광양(光陽)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가 되었으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병조참판(兵漕參判)이 되었다. 1895년 충주부관찰사(忠州府觀察使)로 단발령을 철저히 시행하다가 유인석(柳隣錫) 휘하의 의병(義兵)에게 시해되었다. 나라에서는 크게 애석해하고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에 증직(贈職)을 내리고 시호(諡號)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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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金奎植) |
1881 (고종 18) ~ 1950 항일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더우드 집에서 서양식 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1905년 귀국하여 경성청년회 총무·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19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파리 평화회의(平和會義)에 전권대사(全權大使)로 참석하였으며, 1923년 로오노오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4년 임시정부 부수석을 지내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48년 유엔에 의한 남한(南韓)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여 김구(金 九) 등과 함께 북한에 가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정치활동에서 은퇴하였다가 6.25 사변 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헌 : 양자유경(楊子幽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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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열 (金奎悅) |
1887 (고종24) ~ 1958) 항일독립운동가 자는 원습(元習) 3·1 독립운동당시 동지 500여명을 규합하여 봉화(烽火)를 올리고 만세를 수창 하다가 적에게 잡혀 숨이 끊어질 지경까지 구타당한 후 농토를 매각하여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하여 주고 끝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 군내(郡內) 유림에서 자금을 각출하여 의열비(義烈碑)를 세워 영원히 길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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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영 (金奎濚) |
1834 (순조34) ~ 1886 (건양) 자는 성우(聖禹) 188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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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철 (金奎喆) |
한말의병대장 1907년(융희 1) 단양(丹陽)·제천(堤川) ·영주(榮州)·예천(醴泉)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군을 수차례 격파하였으며, 뒤에 패전하여 단양에서 잡혀 호송 중 탈출했다. 1908년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하는 고종(高宗)의 친서가 발각되어 수감되었고, 1922년 군자금 모집사건(軍資金募集事件)으로 다시 체포되어 5년간 복역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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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행 (金奎行) |
1852 (철종3) ~ 1895 (고종32) 자는 인숙(仁叔) 옥구현감(沃溝縣監) 김봉호(金鳳鎬)의 아들 1892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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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형 (金奎馨) |
1857 (철종8) ~ 1919 자는 재숙(在叔) 188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하고 교리(校理) 비서승(秘書丞)을 거쳐 숙천군수(肅川郡守)를 역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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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홍 (金奎弘) |
1845(헌종11) ~ 1905(광무9) 자는 화일(華一) 학성(學性)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修撰)에 오르고 이어 교리(校理)를 거쳐 전한(典翰)을 지냈으며 다시 승진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제수 받고 이어서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1889년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 觀察使)·1893년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이듬해에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한 후에 장례원경(掌隷院卿), 의정부참 정(議政府參政:1896년에 개편된 관제)을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역임하고1898년에는 로서아(露西亞)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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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 (金奎興) |
1872 (고종9) ~ 1936 항일독립운동가 호는 범제(凡齊) 고종의 밀사로 중국에 가려다 사전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08년 중국으로 망명 은행을 설립하여 독립군자금모금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으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갈 때에는 동참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한바있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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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형 (金克亨) |
1605 (선조38)~ 1663 (현종 4)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운촌(雲村), 인백(仁伯)의 아들이다. 20세에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 되었고,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창릉 참봉(昌陵參奉)·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화순현감(和順縣監) 등을 역임했다. 문헌 : 사천집(沙川集), 청풍세고(淸風世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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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 (金 耆) |
1459년(세조 4)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 쳐 일본사행(日本使行)때 외교 사절로써 임무를 다하고 돌아오던 길 에 풍랑(風浪)을 만나 배와 함께 침몰하여 돌아가시니 비보(悲報)를 들은 세조께서「특별히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케 하고 정 사(正使) 송처검(宋處儉)과 선전관 김기의 두 집안 자손들을 서용(敍 用)토록 명하고 비록 서자라도 노복으로 군적에 예속시키지 말라」 는 임금님의 명령이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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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대 (金基大) |
1738(영조14) ~1777(정조1) 자는 백풍(伯豊)이고 호는 단헌(檀軒)이다. 1754년에 진사(進士)시(試)에 합격하고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이어서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제용감(濟用監)주부(主簿), 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 1767년 (영조 4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정언(正言) 1768년에 이조좌랑 수찬(修撰)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경기(京畿)도사(都事)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시강원(侍講院)필선(弼善) 군자감정(軍資監正), 충청(忠淸)·전라도(全羅道)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아가 악덕 해상수송사업자의 비리를 일소하였다. 시강원 필선 홍문관 응교 공조 참의(工曹參議)등을 지냈다. 문헌 : 단헌문집(檀軒文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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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룡 (金基龍) |
1847 (헌종13) ~ 1910(경술년) 자는 경전(景田) 진사(進士) 김행묵(金行黙)의 아들. 186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등을 역임하고 공조참 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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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상 (金基常) |
1807년(순조 7) 관직(官職)에 올라 계방 좌승지(桂房左承旨) 등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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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서 (金基敍) |
자는 정택(正宅) 180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역임했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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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金基纘) |
1809 (순조 9) 자는 공서(公緖), 호는 석거(石居), 참판 (參判)주묵(周黙)의 아들. 1835년(헌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37년 홍문록(弘文錄)과 도당록(都堂錄)에 그 이름이 오르고 1842년 경상우도(慶尙右道)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다녀와서 하동부사 이남원(李南轅), 금산군수 장희남(張熙南), 남해현령 김증(金增), 상주목사 신재순(申在淳), 전우병사 조원석(趙元錫)등의 죄상을 보고하고 그 처벌을 건의하였다. 그 뒤 집의(執義)를 거쳐 1852년 (철종 3)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이어 1859년에는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어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석거집(石居集)이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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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통 (金吉通) |
1408 (태종 8) ~ 1473 (성종 4) 자는 숙경(叔經), 호는 월천(月川), 시호는 문평(文平), 효례(孝禮) 의 아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황주 목사(黃 州牧使)·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그뒤 호조 판서에 이르러 1471년(성 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월천군(月川君)에 봉해지고 숭정 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 문헌 : 계유실록(癸酉實錄), 월천집(月川集)
[이천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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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풍 (金基豐) |
1754(영조30)~1827(순조27) 자는 대백(大伯)군수(郡守)안묵(安黙)의 아들. 조선후기의 문신. 1783년진사가 된후 1785영능(永陵) 명능(明陵)의 참봉을 거쳐 의금부(義禁府)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형조좌랑(刑曹佐郞)형조 호조 정랑 (刑曹 戶曹 正郞)등을 거쳐 사도시(司導寺)사옹원(司饔院)장악원(掌樂院)의 첨청(僉正)과 돈영부(敦寧府) 판관(判官) 선혜낭청 등을역임했다. 외직(外職)으로 삼등(三登)영유현령(永柔縣令)순안(順安)맹산현감 (孟山縣監)함흥(咸興)광주판관(廣州判官)선산(善山)장성부사 및 임천郡守, 평양서윤(平壤庶尹), 충주목사 (忠州牧使)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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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형 (金基衡) |
(1801-1869 일명 基成(기성)이고 자는 子潤(자윤) 호는 桐江(동강)이다. 善(선)을 즐기고 義(의)를 좋아하였고 富春(부춘)에 숨어 살며 부춘정을 마련하여 경향의 저명한 선비들과 빼어난 산수와 유유히 흐르는 桐江(지금의 탐진강)에서 학문과 시를 탐구하였다. 스스로 동강처사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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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후 (金基厚) |
1747 (영조 23) ~ 1830 (순조 30) 자는 사중(士重), 시호는 효헌(孝憲), 지묵(持黙)의 아들. 이귀상(李龜祥)의 문인. 1774년(영조 5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영릉 참봉(寧陵參奉)이 되고, 1811년 총융사(摠戎使)·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문헌:만기당유고(晩起堂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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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기 (金南器) |
조선 시대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청원군(淸原君)에 봉(封)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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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두 (金南斗) |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역임(歷任)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追贈)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封)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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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 (金唐) |
문평공.길통(吉通)의.손자.순경(順敬)의아들. 大護軍(대호군, 종3품)으로 절충장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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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관 (金大觀) |
생졸 미상 공양공의 증손으로 자는 仲遇(중우)이다. 벼슬은 사의(司議)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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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 (金德秀) |
1500(연산6)~1552(명종7) 자는 경진(景眞) 호는 이진자(頤眞子) 부자(父子)간 학자로 연원(淵 源)을 이루고 윤근수(尹根壽), 이언적(李彦迪), 권율(權慄), 권순(權恂), 원호(元豪)와 같은 제자를 두고 있으며 조선조예학자계보(朝鮮朝禮學者系譜)에 의하면 윤 근수(尹根壽)문하(門下)에는 김상헌(金尙憲), 조익(趙翼), 조형(趙炯), 이정귀(李廷龜) 같은 문하가 있으며 김상헌(金尙憲) 문하(門下)에는 홍명하(洪命夏), 박세채(朴世采)같은 쟁쟁한 계통을 이루고 있다. 효성(孝誠)이 지극하며 형제간 우애(友愛)가 깊고 학문행의(學問行誼) 가 독실하였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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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수 (金道洙) |
1699 (숙종25) ~ 1733(영조9) 호는 춘주(春州). 을사(乙巳:1725)년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급제하고 음보(蔭補)로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통천 군수(通川郡守)에 이르렀으며 문학적인 면에 있어서도 당대의 이미 시문의 능력을 인정받아 문단을 주도했던 문사들과 각별히 지냈다. 저서로 춘주집(春州集)이 전한다. 문헌 : 춘주집(春州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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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건 (金東健) |
1788 (정조 12) ~1848 (헌종14) 자는 자순(子順).군원(君元), 시호는 문간(文簡), 종정(鍾正)의 손자, 명윤(命潤)의 아들. 세연(世淵)에게 입양(入養). 1826년(순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어「삼조보감(三朝寶鑑)」의 편찬에 참여했다. 뒤에 청녕군 (淸寧君)에 습봉(襲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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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金東奎) |
1803 (순조3) ~ 1884 (고종21) 자는 여관(汝寬) 호는 성아헌(醒哦軒)이다.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부호군(副護軍)에 오르고 문사(文詞)가 널리 알려졌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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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선 (金東選) |
1800(정조24)~1874(고종11) 자는 자의(子儀)이고 군수를 지낸 도택(道澤)의 현손인 기협(基協)의 둘째아들인데 후재공(厚齋公諱.榦)의玄孫인 회연(會淵)에 입양 되었다. 1837년에 식년 生員에 합격하고, 1839년에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아가 통훈대부(痛訓大夫)가 되고, 1853년에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청렴 결백한 행정을 배풀어 선정비가 서있다. 호조참판(戶曹參判)가 의대부(嘉義大夫)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 총관(副摠管)을 역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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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金東軾) |
1824 (순조24) ~ 1884 (고종21) 자는 원중(元仲) 1861년 진사(進士), 186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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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金東元) |
1812 (순조12) ~ 1859 (철종10) 자는 선경(善卿)이며 185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하고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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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헌 (金東獻) |
1791 (정조15) ~ 1869(고종6) 자는 경정(敬正) 시호는 효정(孝貞). 조선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 를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숭록대부(崇錄大夫)로 품계(品階)가 올랐으며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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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명 (金斗明) |
1644 (인조 22) ~ 1706 (숙종 32) 자는 자앙(子昻), 호는 만향(晩香), 준(峻)의 아들. 윤증(尹拯)의 문인. 1671년(顯宗 12) 정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681년 충청도 암행어사(忠淸道 暗行御史),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등을 거쳐 상주목사(尙州牧使), 원주목사(原州牧使) 1684년(숙종 10)에 함경도 종성부사 사간원 헌납(獻納), 사간(司諫)을 지냈다. 군자감정(軍資監正), 통정대부에 우승지(右承旨) 남양부사(南陽府使),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승지(承旨)가 되고, 1696년 좌승지(左承旨), 파주목사(坡州牧使) 병조참지(兵曹參知) 이어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으며 1701년에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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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록 (金得錄) |
1612 ~ 1674 자는 在中(재중) 무과에 급제하고 訓練院. 主簿(훈련원.주부:종6품)가 되고 인조 27년(1649)에 本府(본부)에서 엄격히 선발한 八壯士(팔장사)에 뽑혀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그 후로 심양에 從浦(종포) 萬戶(만호:종4품)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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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성 (金得聲) |
1628년(인조 6) 류효립(柳孝立)의 모반을 적발하여 영사공신(寧社功臣)으로 책록(策錄)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청흥군(淸興君)에 봉(封)해지고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에 추증(追贈)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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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락 (金 洛) |
1545 (인종1)~1604(선조37) 자는 중심(仲深)호는 칠봉(七峯)이다. 1567년 진사(進士)에 급제 하고 1580년에 사포시 별제로 배명되고 금부도사(都事)로 옮겼다. 1583년에 상의원, 직장 종부시, 주부(主簿)로 승진되니 거치는곳 마다 능력과 공로가 있었다. 장례원 사평(司評)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산청현감(山淸縣監)으로 재임 하는동안 청렴공명한 목민관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596년에 통정대부로 승진담양부사(潭陽府使)1598년에는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임명되 었으나 병환으로 부임하지,못하고,그후,황해도,연안부사(黃海道延安府使)로,1602년,6월에는,사직 (司直)으로 8월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9월에는 강화 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가 되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으뜸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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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리 (金 理) |
강원감사(江原監司)의지(義之)의 장남. 경기도찰방(京畿道察訪) 시.도내(道內)의 도로교통에 편리를 도모하여 대신(大臣)의 칭송이있었으며 좌익원종공신에녹훈 되고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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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식 (金晩植) |
1834 (순조 34) ~ 1900 (광무 4) 자는 대경(大卿), 초자(初字)는 기경(器卿), 호는 취당(翠堂), 청은 군(淸恩君) 익정(益鼎)의 아들. 1867년(고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신부사(修信副使) 겸 전권부관(全權 副官)으로 일본에 다녀와 여러 조(曹)의 판서를 거쳤으며, 1883년는 박문국을 설치하여 운양공(雲養公)의 협력하에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신문(新聞)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창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1886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을 체결(締結)하기 위하여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임명(任命)되어 프랑스 정부 전권대신(全權大臣)인『코그르당』과 한불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교사업과 교육문화의 신국면을 타개한 것이다. 청일전쟁 후에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민생안정(民生安定)에 힘쓰고 임종시에도 국사를 걱정하며 운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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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손 (金末孫) |
강원감사.의지(義之)의 손자. 효.증.지평(持平)오(珸)의 四男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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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맹훈 (金孟勳) |
군수(郡守) 말손(末孫)의 아들.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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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면 (金 沔) |
문평공의7세손으로 벼슬은 承議郞(승의랑:종6품)을 지냈으며, 묘는 가평 설악 운곡리 안산 艮坐(간좌)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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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연 (金命淵) |
1753영조29 ~ 1830순조30 자는원명(原明) 감사공.치후(監司公.致垕)의손자.종정(鍾正)의아들.1777년.식년.생원시(式年.生員試)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거쳐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했다.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되었으며 유고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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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몽로 (金夢魯) |
1694(숙종20) ~1738(영조14) 자는 성희(聖希)요 호는 귀농당(歸農堂)이다. 1716년에 무과(武科) 급제한 후 내외요직을 역임하여 청렴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1726년에 충청수사(忠淸水使)직에 있다가 퇴관(退官)하여 고향에서 정성을 다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하시더니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청주성의 함락 소식을 듣고 전 주서(主書) 유인협. 김광로와 의용군 수백명을 얻어 이를 편성 칼과 활이나 창으로 무장하여 적장 김수 석(金守錫), 노태진(盧泰鎭)을 잡아 목 베이고 적의 괴수의 하나인 신천영이 상당성을 점거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대열을 정돈하고 알아본즉 창의사 박민웅이 그날아침에 성을 무찔러 신천영(申天永) 등의 목을 베고 하성하는 것이었다. 양군은 한곳으로 모여 치하하고 청주성으로 돌아와 잔적(殘賊)을 소탕하고 소모사 유승은 장 계(狀啓)를 올려 보고하고 공에게는 황간현감(黃澗縣監)을 박민웅에게는 상주영장(尙州營將)을 명하였으며 이로써 공은 경상우도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겸 순무사(巡撫使)가 되고 영흥대호군부사(永興大護軍府使), 대호군도총사(大護軍都摠使)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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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무 (金 楙) |
1655(효종6)~1720(숙종46) 관찰사 증 영의정 징(澄)의 아들. 자(字)는 덕보(德甫)1699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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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표 (金文豹) |
1576년(선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군수(郡)守)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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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하 (金文夏) |
1652 (효종3) ~1698 (숙종24) 자는 성기(聖起)이고 사마공(司馬公: 壽蕃)의 아들이다. 1683년(숙종 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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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성 (金彌性) |
생존연대 미상 恭襄公:諱 順命(공양공 : 휘 순명)의 둘째 손자. 자는 養中(양중)이고 벼슬은 僉正(첨정)을 지내고 뒤에 牧使(목사)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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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변신 (金變信) |
1494~1557 자는 東隱(동은)이며 벼슬은 五衛(오위)에 副司正(부사정:종7품)을 거쳐 영암군수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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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지 (金保之) |
호조참의 관(灌)의 아들 평안도찰방(平安道察訪), 길주 판관(吉州 判官),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역임하고 좌익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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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천 (金保天) |
생졸미상 벼슬은 義禁府(의금부) 都事(도사:종5품)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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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성 (金復性) |
1842 (헌종8) ~ 1901 (광무5) 18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교리(校理) 응교(應敎)등을 역임하고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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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휴 (金復休) |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칭한 말)의 벼슬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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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일 (金事一) |
1559 (명종14) ~1652(효종3) 자는 맹성(孟誠) 1581년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여 제용감(濟用監)의 직장(直長)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상주(尙州)의 함창(咸昌)에 내려와 당쟁(黨爭)의 화(禍)를 개탄하고 불취(不就) 시서(詩書)를 벗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가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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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 (金 相) |
1658효종9 ~ 1698영조24 증좌승지(左承旨) 호(浩)의 아들. 자(字)는 군필(君弼) 숙종 甲子에 武科에 등과하여 보성군수(寶城郡守) 와영장(營將)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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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로 (金尙魯) |
1702 (숙종 28) ~ 1766 (영조42) 자는 경일(景一), 호는 하계(霞溪).만하(晩霞), 시호는 익헌(翼獻), 대제학(大提學)유(木柔)의 아들이고 약로(若魯)의 아우이다. 1721년 (경 종1)진사(進士), 1734년(영조1)춘당대(春塘臺)문과(文科)에 병과(丙科) 로 급제 삼사(三司)를 거쳐 1748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된 뒤 이조(吏曹)·호조(戶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1752년 우의정(右議政) 1754년에 좌의정(左議政), 1759년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처벌때 세자의 선생이며 元老大臣으로 처벌을 막지 않았다 하여 사청주(淸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죽은 후 정조가 즉위하여 관작(官爵)이 추탈(追奪)되었으나 고종(高宗)때 신원(伸寃)되었다. 문헌:하계집(霞溪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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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묵 (金尙 ) |
1726 (영조 2) ~ 1779 (정조3) 자는 백우(伯愚), 성채(聖采)의 아들.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71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서 기민(飢民)을 구제한 공으로 포상되었으며, 1774년(영조 50)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재임할 때 사무를 공정히 처리하여 명성을 얻었고 뒤에 대사간을 지내고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행적이 목민심서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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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기 (金碩器) |
1664~ ? 16세손으로 자는 國甫(국보)요 벼슬은 부호군(龍驤衛副護軍:종4품)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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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문 (金錫文) |
1658 (효종9) ~ 1735 (영조11)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군수(郡守) 경(坰)의 손자이다.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역학도해(易學圖解)」를 저술했고, 여러 관직을 거쳐 1726년(영조 2) 통천 군수를 역임했다.`그는 『역학이십 사도해(易學二十四圖解)에 당시에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독자적인 지구 자전설(地球自轉說)을 최초(最初)로 주장하였다. 그 당시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유입된 공식적인 서양 우주설은 『지구는 우주의 정 중앙에 고정되어있으며 그 어떤 운동도 하지 않는다』고 보는 “티코 브라혜”의 우주설을 비판하고 「태양의 둘레를 선회하는 별들이 모두 제각기 궤도에 따라 달이 1년에 12번 선회하며 지구도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제자리에서 1년에 366회 회전한다고 함으로써 즉 1일에 1전한다는 자전설을 주장하였다」이는 홍대용(1731~1783)의 『의산문답』보다 최소한 한 세기(世紀) 정도 앞서는 것으로 아마도 우리나라최초의 체계적인 지구 자전설(自傳說)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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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연 (金錫衍) |
1648 (인조 26) ~ 1723 (경종 3) 자는 여백(汝伯), 시호는 정희(貞僖),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동생, 우명(佑明)의 아들. 음보(蔭補)로 1680년(숙종 6)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내고, 지방관으로 정선군수·가평군수·성천부사를 지내고 1683년 호조참의 공조참의를 거쳐 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부평부사 1686년에 충청병사와 수원부사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추방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기용되어 1697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호조(戶曹)· 형조(刑曹)·공조 참판 한성부좌우윤(漢城府左右尹), 1699년에 영월 장릉 개수공사를 마치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1700년에는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기용되어 1702년 5월까지 근무하였다가 전보되어 1704년에 어영대장(御營大將) 1708년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자헌대부에 승품(陞品), 한성판윤(漢城判尹), 1709년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공조판서(工曹判書)·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도총관(都摠管)등을 역임하고 내섬시(內贍寺) 사도시(司導寺)의 제조(提調)를 지내고 1719년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품되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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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익 (金錫翼) |
1645 (인조23) ~ 1686 (숙종12) 자는 여량(汝兩)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김우명(金佑明)의 아들이다. 23세때 빙고별감(氷庫別監)에 임명되었으며 1657년에는 김포현감(金浦縣監)으로 이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벼슬에 오르고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1684년에는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으며 이어서 총융사(總戎使)가 되었다. 1686년에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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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일 (金錫一) |
1694(숙종 20)~1742(영조 18) 자는 수언(壽彦), 호는 허주와(虛舟窩), 두명(斗明)의 아들. 1731년(영조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을 역임한 후 1741년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통정대부에 올랐다. 문장이능하고 경사에 밝았다. 허주와유고가 전한다. 문헌 : 허주와유고(虛舟窩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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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金錫 ) |
1634 (인조 12) ~ 1684 (숙종 10)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 영의정 육(堉)의 손자, 좌명(佐明)의 아들. 1657년(효종8) 진사(進士)가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전적(典籍)·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냈다. 1674년(현종 15)에 겸 보덕에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수어사(守禦使)·도승지(都承旨)등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고 또 양관(兩館 : 홍문관, 예문관)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상감은 공에게 체부(體府)의 부체사직을 명하였다. 공은 국가의 보장지지(保障之地)인 강화(江華)를 둘러보고 군비를 더욱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 강화연안(江華沿岸) 요소 요소에 돈대(墩臺)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49개 처의 돈대 를 구축할 것을 의정부에 품의 하였다. 결과 53개 처의 돈대를 구축하였다. 훈련대장(訓練大將)과 판의금을 겸하고 이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하였다. 1680년 허견(許 堅)의 모역(謀逆)사건을 사전에 발각 고변(告變)케 하여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封)하여졌다.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공신호(功臣號)를 박탈당하였다가 후에 복관(復官)되고 숙종묘정(肅宗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문헌 : 식암집(息庵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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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겸 (金聖謙) |
1790 (정조14) ~ 1865 (고종2) 자는 사목(士牧) 호는 지족당(知足堂) 181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조좌랑(吏曹佐郞),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로 옮기고 다시 호조참의(戶曹參議)로 나아갔다가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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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선 (金性善) |
1829 (순조29) ~ 1901 (광무5) 자는 성여(盛汝) 통정대부(通政大夫)행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했으며 특히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고 성품이 간결하여 선비들과 벗들이 추앙하였으며 학문행의(學問行誼)가 독실하고 문사가 널리 알려졌다. 유고집(遺稿集)이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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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연 (金盛淵) |
1784 (정조8) ~ 1834 (순조34) 자는 현가(顯可) 1813년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도사(都事)로 재직(在職)시인 182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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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응 (金聖應) |
1699 (숙종 25) ~ 1764 (영조 40) 자는 군서(君瑞), 시호는 효정(孝靖), 석연(錫衍)의 손자, 도영(道泳)의 아들. 초시(初試)를 통과했으며,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후 무신(武臣) 장붕익(張鵬翼)의 추천으로 사복시 내승(司僕寺 內乘)으로 기용, 선전관등을 거쳐 고부 군수(古阜郡守)가 되었다. 1733년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서 별군직(別軍職)으로 전임, 내시사(內試射)에 합격(合格), 훈련원 정(訓練院正), 전주영장(全州營將),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거쳐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전임되었다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황해도(黃海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어 군정을 일신했다.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훈련대장(訓鍊大將)등 훈국(訓局)으로 오래 전력하였으며 주사(籌司:비변사) 당상직을 항상 겸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등을 지내고 1750년(영조 26)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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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자 (金聖梓) |
자는 문보(文甫)이고 한성판관(漢城判官)석달(錫達)의 손이며 상주목사(尙州牧使)도협(道浹)의 아들이다. 22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34세에 능참봉(陵參奉)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내직(內職)으로는 제용감.상서원.사도시.공조.호조.장악원.사옹원.선혜청.한성부.선공감 을지내고 외직으로 진천현감(鎭川縣監), 강서현령(江西縣令), 옥천군수(沃川郡守), 청풍부사(淸風府使) 파주목사(坡州牧使)와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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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金聖準) |
1735 (영조11) ~ 1801 (순조1) 자는 해여(海如) 177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돈영부(敦寧府)도정(都正)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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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金聲振) |
1589 ~ ? 자는 汝聖(여성) 若天(약천)의 아들. 벼슬을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나 병자난 때 선군께서 화를 입은 이후로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세상사를 간섭않았고 이것을 자손들에게 유훈하였고 科場(과장)이나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고 尊周錄(존주록)에 올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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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필 (金成畢) |
처사(處士)수영(壽永)의 아들. 정랑(正郞)을 역임하였고, 아드님 직장공(諱.事一)이 임진난때 함창에 낙남하여 복거(卜居)한후 400여년 자손이 살아오고 있으니 충청도사공파의 세거지(世居地)가 된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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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화 (金聖和) |
1737 (영조13) ~ 1825 (순조25) 자는 혜보(惠甫)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거창부사(居昌府使),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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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후 (金聖 ) |
1683 (숙종9) ~ 1755(영조31) 자는 영서(永瑞) 수암(遂菴)권상하(權尙夏)의 문인. 172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 전랑(銓郞) 수찬(修撰) 응교(應敎)등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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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걸 (金世傑) |
1474 (성종5) ~ 1543 (중종37) 자는 군보(君甫), 호는 수암(修菴), 일찍이 정암 조광조(趙光祖) 선 생에게 학문을 익히고 박세희(朴世熹), 이약수(李若水)등과 교유(交 遊)할 때 민본사상에 입각한 도덕과 인간의 사회적 도리를 다 함으 로써 그 덕망을 존경받아 군자감정(軍資監正)의 지위까지 올랐다. 정 암과 동천선생의 사후에는 벼슬과 정치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전념 하다 신사무옥(辛巳誣獄)때 간신들의 모함으로 고매한 혁신파 선비 들은 모두 화(禍)를 당하고 뜻을 펼 수 없는 것을 보자 장흥에 있는 수인산(修仁山) 아래에 종적을 감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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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량 (金世良) |
생졸미상 벼슬은 儀賓府(의빈부) 經歷(경력:종4품)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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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 (金世淵) |
1745(영조21)~1768(영조44) 자는 상연(尙淵)이고 감사공(監司公) 치후(致垕)의 아들이다. 1768년 식년진사시(式年進士試)에 급제하고 문화현령(文化縣令)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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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金世英) |
예조참판(禮曹參判) 공양공(恭襄公 : 順命)의 아들 이다. 판관(判官)의 현직에서 1495년(연산군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가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에 전 직되고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으로 갔다가 예빈시정(禮賓寺 正)· 홍문관의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한 뒤에 황해도관찰사(黃海 道觀察使)등을 역임하고 청풍군(淸風君)에 봉군(封君)됨으로 삼대봉군(三代封君)의 명문가의 집안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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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준 (金世俊) |
1471-1532 자는 君弼(군필) 순생(順生)의 아들. 중종 2년(150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壯元(장원)을 하고 홍문관(弘文館)에 전한(典翰:종3품)을 거쳐 응교(應敎)를 지냈고 安州牧使(안주목사)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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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형 (金世衡) |
1686년(숙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현감(縣監)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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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호 (金世鎬) |
1806 (순조 6) ~ 1884 (고종 21) 자는 치현(稚賢), 호는 수재(修齋), 진교(晋敎)의 아들. 1843년(헌종 9) 식년전시(式年殿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1846년(헌종 1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고 삼사(三司)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고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성균관대 사성(成均館大司成)에 승차하였다. 1850년에는 민란(民亂)이 빈번하여 경상좌도의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숙청하였다. 그 뒤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쳐 이조참의와 이조참판(吏曺參判)을 지내고 1869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문헌:논어석의(論語釋疑)강화설재편(講話說諸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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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 (金 琇) |
강원감사 의지(義之)의 五男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높고 선정을 펴서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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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관 (金遂琯) |
1623 ~ 1697 자는 國寶(국보)요 벼슬은 果毅校尉(과의교위)를 지내고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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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성 (金遂性) |
자는 유초(有初), 세영(世英)의 아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의 석방을 탄원하다 유배(流 配)되었고 후에 풀려 나와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 과(丙科)로 급제, 1539년 대사성(大司成)에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 察使)로 나갔다. 1541년(중종 36)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고, 예 조참의가 되었으며 1546년(명종 1)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고 이어 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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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경 (金順敬) |
1425-1476 文平公(문평공) 길통(吉通)의 큰아드님으로 戊辰(무진) 1448년에 벼슬길에 나아가 사복시 판사를 지냈으며 癸酉(계유:1453)년 癸酉靖難(계유정난)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아버님이 계신 수광리로 내려와서 몸을 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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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리 (金順理) |
戊申1428-1489 文平公(문평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삼수군수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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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명 (金順命) |
1435 (세종 17) ~ 1487 (성종 18) 자는 거이(居易), 시호는 공양(恭襄), 길통(吉通)의 넷째 아들. 1456년(세 조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 功臣) 2등에 책훈(策勳)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으며, 이 듬해 명나라 사신의 청으로 자계(資階)가 올라 당상관(堂上官)이 되 었다. 1469(예종1)년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우부승지 로 전임되었다가 1471년 성종옹립(成宗擁立)의 공으로 순성좌리공신 (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훈(策勳)되고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이 듬해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1475년(성종4) 전라도관찰사(全羅 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477년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 호조, 병조, 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고 1479년에 청릉군(淸陵君)에 봉(封)해졌으며, 1484년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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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상 (金順常) |
문평공의 일곱째 아들로 벼슬은 軍器寺(군기시)에 별좌를 지냈다. 묘는 失傳(실전)해서 設壇奉享(설단봉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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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생 (金順生) |
1431-1491 문평공의 셋째 아드님으로 호는 麗澤劑(여택제) 成宗(성종) 원년(1470)에 통례원(通禮院) 相禮(상례:종3품)를 지냈으며, 뒤에 大邱府使(대구부사)를 지냈다. 장흥 수암공 종중에서 1998년부터 設壇奉享(설단봉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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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성 (金順誠) |
1440 (세종2) ~ 1506 (중종1) 문평공 길통의 여섯째 아들. 자는 경보(敬甫)이고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전 랑(吏曹銓郞) 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에 임명되었으며 이조참의(吏曹參 議)를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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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승 (金順承) |
1446~1505 문평공, 길통의 8째 아들. 벼슬은 縣監(현감:종6품)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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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애 (金淳愛) |
1889 (고종26) ~1976 여성독립운동가 김규식박사의 부인,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신한 청년단 이사로 활동, 국내로 파견되어 백신영. 김마리아. 함태영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고,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인동포들을 규합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 추진하다가 일경에 발각 체포되어 강 금 당하였다가 상해로 탈출, 상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참여를 독려,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을 돌봐주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후원에 진력, 해외각지에 한국지도와 태극기 등을 만들어 보급,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달하는데 힘썼다. 상해의 대한적십자회 이사로 활동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함으로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기여,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 한인교포의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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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중 (金順中) |
1437-1494 文平公(문평공)의 5번째 아들. 字(자)는 동일(東一) 의빈부 도사(종5품)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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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숭한 (金崇漢) |
한성윤(漢城尹) 흔지(俒之)의이남(二男)무과에 등과하고 외직으로 성종11(1480)삼척부사에 부임하여 성남(城南)에군영(軍營)을 설치하였고 성종14(1483)년 오위(五衛)의대호군(大護軍)으로 전직되고 순흥부사(順興府使)로 나아갔으며 위계(位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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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숭해 (金崇海) |
한성윤(漢城尹) 흔지(俒之)의 장남 무과에 등과하고, 세조(世祖)13년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출정(出征)하여 선봉장이 되어 공을세웠고 김해부사(金海府使)에이르렀고 위계가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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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국 (金蓍國) |
1577 (선조 10) ~ 1655 (효종 6) 자는 경징(景徵), 호는 동촌(東村).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5년에 주서(注書), 1618년 병조 좌랑(兵曹佐郞), 1620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직강(直講)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전라도선유어사(全羅道宣諭御史)가 되었다. 1625년 우부승지 (右副承旨), 이듬해 우승지(右承旨) 1630년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했으며, 1632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4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문헌 : 동촌유고집(東村遺稿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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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묵 (金時 ) |
1722 (경종 2) ~ 1772 (영조 48) 자는 이신(爾愼), 시호는 정익(靖翼),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아버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우명(佑明)의 후손, 성응(聖應)의 아들. 1750 년(영조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 교리(校理)등을 거쳐 1759년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형조참의를 거쳐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나아갔다가 1761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 차하여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1762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있을 때 딸이 세손빈(世孫嬪)이 되자 총융사(摠戎使)로 발탁, 이조와 호조(戶曹)의 참판(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등을 지내고 1769년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어영대장(御營大將),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그후 공조(工曹)와 호조(戶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 府事)·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좌참찬(左參贊)을 역임했다. 죽은 뒤 정조(正祖)가 즉위(卽位)하고 딸이 왕비로 진봉(進封)되면서 영의정(領議政)·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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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번 (金始蕃) |
1610 (광해2) ~1652(효종3) 자는 중거(仲擧) 호는 면호(眠湖)이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신국(藎國)의 아들이다. 1632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1638년에 홍문록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지평(持平)에 임명된 뒤 부수찬·수찬(修撰)·부교리·교리(校理)·정언(正言)등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42년 지제교로 선발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다음해에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1644년에는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거쳐 1646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이 때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가 인조(仁祖)를 시해하려 하였다 는 혐의를 받고 사사되었는데 세자빈을 구제하려다가 인조의 노여움 을 사 파직 당하였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한 공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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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식 (金 湜) |
1482 (성종 13) ~ 1520 (중종 15)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 시 호는 문의(文毅), 숙필(叔弼)의 아들. 1501년(연산군7)에 진사(進士)가 되고 천거로 광흥창(廣興倉) 주부(主簿)·이조좌랑(吏曹佐郞)·사포시(司圃寺)사포(司圃)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1519년(중종 14) 현량과 (賢良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 홍문관 직제학 부제학(副提學) 대사 성(大司成)이 되었다. 조광조, 김안국, 기준 등과 도학소장파 (道學少 壯派)를 이루어 제도개혁과 민중 교화에 힘쓰다가 이해 훈구파 남곤, 심정등이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선산(善山)에 유배되고 그후 다시 절도(絶島)로 이배(移配)된다는 말을 듣고 거창에서「군신천세의(君臣千歲 義)」라는 시를 짓고 자결했다. 1568년(선조) 작위가 복관(復官)되어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 되었다. 그후 1746년(영조23)에 가자(加資)되어 의정부 좌찬성 (左贊成)이 되었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양근의 미원서원, 청풍에 봉강서원, 거창의 완계서원등에 제향 되고 있다. 배(配)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인 영신군(永新君 怡)의 따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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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국 (金藎國) |
1572 (선조 5) ~ 1657 (효종 8) 자는 경진(景進), 호는 후추(後瘳), 급(汲)의 아들. 1591(선조24)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 때 영남에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집,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참봉(參奉)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 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했으며, 정언을 거쳐 1599년 사복시정이 되어 어사로서 관서지방을 순시, 북인이 대소로 갈라지자 소북(小北)의 영수로 대북(大北)을 공격하다가 그들에 의해 관작(官爵)이 삭탈(削奪)되고 충주에 은거「경현록(景賢錄)」을 편찬했다. 1608년 보덕으로 기용되고 광해군 때 사간(司諫)을 거쳐 1612년 익사공신(翼社功臣)이 되어 청릉군(淸陵君)에 훈봉되고 곧 대사성에 있다가 오래지 않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 우참찬(右參贊)·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光海君)때의 훈작을 삭탈 당했으나 곧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당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평양성(平壤城)의 수축과 군량(軍糧)의 비축(備蓄)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難) 때 국문(鞠問)당했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1627년 정묘호란때 호조판서로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금나라 사신과 화약(和約)을 논정(論定)했고. 공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끝까지 항전(抗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이사(貳師)가 되어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陪從)하여 심양에 갔다가 1638년 강화유수(江華留守)에 발탁되어 전후 민심안정에 치중하였고, 1646년(인조 24) 영중추부사(領中樞院府事)가 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특선되었다. 문헌 : 후추집(後 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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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로 (金若魯) |
1694 (숙종 20) ~ 1753 (영조 29) 자는 이민(而民) 호는 만휴당(晩休堂), 시호는 충정(忠正), 유(楺)의 아들. 1726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1727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729년에 설서(說書) 1731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승진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으로 옮기고 1733년 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고 헌납(獻納)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전직되어 1735년에 응교(應敎)·군자감정·호조(戶曹) 예조(禮曹)의 참의(參議)와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비변사 부제조를 역임하고 1740년에는 병조참지(兵曹參知) 송도유수(松都留守)에 발탁되어 공조 예조의 참판(參判)과 동지경연 동지의금 동지중추를 역임하고 1942년에 판윤(判尹)에 제수되어 관찰사(觀察使)로 나아갔다. 1744년에 대사헌(大司憲) 호조판서(戶曹判書)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병조판서(兵曹判書) 1745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좌참찬(左參贊) 공조·형조 예조판서등을 역임하고 1747년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의로써 굳이 사양하므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다시 공조·호조의 판서가 되고 1749년 경기감사(京畿監司)로 나아갔다가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세자부(世子傅)와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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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천 (金若天) |
1570 ~ ? 자는 景欽(경흠) 副提學(부제학) 遂性(수성)의 손자. 음직으로 世子翊衛司(세자익위사)에 洗馬(세마:정9품)의 벼슬길에 나아갔고 병자호란 때 용맹스럽게 싸우다 殉節(순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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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지 (金億之) |
좌찬성 관(灌)의 아들. 흥덕현감(興德縣監)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역임하고 첨지중추원 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좌익원종공신에 책훈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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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엄 (金 淹) |
1560 (명종15) ~ 1630 (인조8) 호는 금정(錦亭). 기묘(己卯:1579)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만력 경신(庚申:1620)년 에 절충장군(折衝將軍)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천계.신유(辛酉:1621)년에 종성진.병마,첨,절제사 겸(種城鎭.兵馬僉節制使兼)도호부사(都護府使)천계.임술(壬戌1622)년에 소강진.수군.첨제사(所江鎭水軍僉制使)천계.계해(癸亥1623)년에 황연도.수.륙군.방어사(黃延道水陸軍防御使)로 특별히 제수되었다. 더욱이 선고인 첨지중추부사,원복(僉知中樞府事:元復)공을 비롯 해서 원복공 의 둘째아드님 담은, 봉사(湛,奉事) 셋째 아드님 진은, 태안군수(津,泰安郡守)로, 품계는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네째 종성부사 엄(鍾城府使: 淹) 엄공의 아들인 훈련원주부, 중현(訓練院主簿:重玹)주부공의 아들 훈련원판관, 익화(訓練院判官:益華)부사, 엄공의 둘째 아들인 봉교선교랑, 상현(奉敎宣敎郞:相玹)상현의 아들인 군수, 필화(郡守:必華)등 사세(四世)에 걸쳐 여덟분이 등과(登科)하여 덕망높은 가문으로 추앙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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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여 (金 礪) |
1459년(세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한림 (翰林)에 이르렀다. 1459년(天順己卯)에 형제 세분이 문무과(文武科) 에 합격하여 기이한 일로 가문을 빛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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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여 (金 膂) |
1555(명종10) 상의원 정 孟勳의아들 자(字)는 중강(仲强) 식년문과(式년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봉상시 주부를 거쳐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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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金汝珠) |
1570 ~ ? 16세손으로 자는 君玉(군옥)이다. 선조 때 禮賓寺(예빈사) 主簿(주부:종6품)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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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흥 (金麗興) |
1689 ~ ? 자는 浩卿(호경)이고 軍資監.正(군자감.정)에서 품계가 通政(통정)에 이르렀다. 보기드문 효자로 부모를 잘 봉양하여 1738에 어버이를 위하여 얼음을 깨서 고기를 잡다 죽었다. 李吉谷(이길곡) 선생이 이 사실을 듣고 사림들에 부고를 전했는데 듣는 이로 하여금 그 행위에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고 朴廷夏(박정하)등 수백인이 관영으로 이 사실을 장게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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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철 (金鍊鐵) |
1567 ~ 1648 청풍김씨 12세손으로 明宗(명종)때 사람이다. 벼슬은 活人署(활인서) 別提(별제:종6품)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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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오 (金 珸) |
강원감사(江原監司) 의지(義之)의 사남(四男). 자(字)는 윤수(允叟) 사옹원별좌(司饔院別坐)를 역임 하였고, 좌익원종신(佐翼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는데, 생전의 효행(孝行)이 나라에 알려져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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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金完植) |
1831 (순조31) ~ 1863 (철종14) 자는 폭경(輻卿)이며 청은군(淸恩君: 益鼎)의 아들이다. 1847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三司)를 거쳐 1858년 12월에 순천도호부사(順川都護府使) 1860년 9월에 내직(內職)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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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용 (金 鎔) |
1529 (인종1) ~ 1602(선조37) 1546년(명종 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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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묵 (金用 ) |
1773 (영조49) ~1819 (순조19) 자는 현로(玄老) 호는 성은(城隱) 1795년에 진사(進士) 1802년 정시문과(庭試文科) 을과(乙科)로 급제 집의(執義)에 이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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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복 (金龍福) |
생졸미상 자는 永膺(영응). 15세손으로 선조 때 임진외난에 공훈을 세워 호성3등훈을 특별히 제수 받았고 겸하고 司僕寺正(사복시정)이르고 향사를 받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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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맹 (金友孟) |
1469예종1 ~ 1512중종8 군수극함(克諴)의 三男. 1489년 30세에 武科에 등과하여 관직이 희천(熙川)군수에 이르고 선정을 펴시어 송덕비가 전하며 제임중 임지에서. 돌아가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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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명 (金佑明) |
1619 (광해군 11) ~ 1675 (숙종 1) 자는 이정(以定), 시호는 충익(忠翼), 영의정 육(堉)의 아들. 현종의 장인. 1642년(인조 20) 진사 (進士)가 되고, 강릉참봉·세자익위사(世 子翊衛司)세마(洗馬)·부솔(副率)을 역임하고 1653년에 평시서령(平 市署令)·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1654년에는 장락원(掌樂院)첨 정(僉正)으로 제수 되었다가 부평부사(富平府使)로 1657년에는 사재 감(司宰監)첨정(僉正)·군기시 부정(軍器寺 副正)을 역임하고 예빈시 정(禮賓寺 正) 1658년에는 제용감 정(濟用監 正)을 그해 가을 문정공 (文貞公)의 상(喪)을 당했으며 따님을 세자빈(世子嬪)으로 맞아들인 현종이 1659년에 즉위(卽位)하자 공의 따님은 왕후(王后)에 오르고 공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의 직위를 제수받고 겸하여 사옹원(司饔院)의 제거(提擧) 그리고 상방 (尙方)·사도(司導)·장락(掌樂)·빙고(氷庫)등을 관장하였다. 다음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에 호위대장(扈衛大將)까지 되 어 누차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문헌 : 충익공유고(忠翼公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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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성 (金祐性) |
1857 (철종8) ~ 1880 (고종17) 자는 경평(景平) 187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8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주서(注書)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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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연 (金友淵) |
1797 (정조21) ~ 1871 (고종8) 자는 희안(希顔) 호는 연가제(然可齊) 1852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북청부사(北靑府使)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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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증 (金友曾) |
자는 희흥(希興)이고,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을 지 내신 극함(克諴)의 아들이다.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 관(宣傳官)이 되었는데 연산군이 궁안에서 말을 달리고자 하는 지 라 공이 말굴레를 잡고 못하는 것이라고 간(諫)하였다. 명천현감(明 川縣監), 동래현령(東萊縣令)에 이어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거쳐 첨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는데 1742년에 공이 세운 공훈 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청평군(淸平 君)의 봉군(封君)이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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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성 (金元性) |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형·예·이조 참판(刑·禮·吏曹 參判)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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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식 (金元植) |
1823 (순조 23) ~ 1881 (고종 18)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학해(學海), 시호는 효헌(孝憲), 익정(益鼎)의 아들, 군수(郡守) 익철(益哲)에게 입양(入養). 1840년(헌종6) 음보로 명릉참봉(明陵參奉)이 된 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내외직을 역임하고 공조(工曹)·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경연(經筵)·의금부(義禁府)·중추부(中樞府)·춘추관(春秋館)·돈령부(敦寧府) 등의 지사(知事)를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시문(詩文)과 가승(家乘) 25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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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양 (金園瀁) |
1640(인조18)~1704(숙종30) 익조(翊朝)의 아들. 자(字)는.추수( 氵隹叟) 무과(武科)에 등과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으며, 셋째 형님이신 원방(園放)도 무과(武科)에 등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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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호 (金園皓) |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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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유 (金 ) |
1653년 (숙종 9) ~ 1719 (숙종 45) 자는 사직(司直), 호는 검재(儉齋), 시호는 문경(文敬), 징(澄)의 아들. 박세채(朴世采)·송시열(宋時 烈)의 문인. 정랑(正郞)으로 1699년(숙종 2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찬수낭관(纂修郎官)으로「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증보(增補)했으며, 1701년에 고양군수, 사도시 첨정(司導寺 僉正) 장례원 사평(掌隷院 司評),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부평현감(富平縣監), 1707년 황해도(黃海道) 연안현감(延安縣監)시에 선정(善政)을 베푼 공으로 명주옷감 안팎의 하사(下賜)를 받고 1708년에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 1712년에는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 1713년에는 봉조하(奉朝賀)직 을 띠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사간원(司諫院)에 사간(司諫), 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고 1714년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 수원부사(水原府使)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수명하고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평안도에서 돌아와 홍문관부제학,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에서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이르렀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전생서(典牲暑)제조(提調)등을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문헌 : 검재유고(儉齋遺稿) 소학집주(小學集註)증보주자외기(增補朱子外記) 존주록(尊周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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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성 (金裕成) |
1849 (헌종15) ~ 1914 자는 경소(景韶)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원식(金元植)의 아들로 김관식(金寬植)에 입후(入后) 187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77년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1879년에는 홍문관의 부교리 (副校理)가 되었다 1889년에 북청부사(北靑府使)로 가서 위유사(慰諭使)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2년에는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1894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가 곧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 개편된 지방관제에 따라 함흥부관찰사(咸興府 觀察使)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중추원1등의 관리관(管理官)이 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올랐다. 1899년에는 종2품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 3등에 올랐으며 1910년 8월에는 규장각 전제관(奎章閣 典製官)에 있으면서 훈(勳)3등을 받기도 하였다. 문헌 : 시문집(詩文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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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金裕貞) |
1908 (융희1) ~ 1937 소설가 1931년 이무영, 이 상, 정지용등과 경향파 문학을 배격하는 순수문예운동인 구인회를 조직했고, 당대의 농촌현실을 계몽적 이상주의나 감상적인 현실중시의 농민문학이 아닌 당시의 농촌과 서민생활에 깊숙히 파고들어 그 생활 감정과 생활습속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소설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1935년 조선 일보에 <노다지>등 소설이 당선되어 혜성처럼 등단한 그는 29세의 짧은 인생을 마치기까지 불과 2년 남짓한 기간에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문헌 : 유정집(유정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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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택 (金裕澤) |
1911 ~ 1975 1949년 재무부이재국장, 재무부차관등을 역임하고 한국은행 총재시 전시 경제체제를 확립, 부산 피난시 통화개혁을 주도하였으며, 환도 후에는 전재복구의 당면과제와 현대적 금융 통화 질서의 기초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재정의 독립성을 주창하고 국제기구가입을 실현하는 한편 한국은행 해외지점을 개설하였으며 또한 국제부흥개발은행 이사겸 국제통화기금이사, 일본, 영국, 덴마아크, 노르웨이, 주재 특명전권대사, 재무부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6·7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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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행 (金裕行) |
1845 (헌종11) ~ 1897 (광무1) 자는 경건(景健)이고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원식(金元植)의 아들 18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문신(文臣)겸 선전관(宣傳官)으로 나아가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 부사직(龍驤衛 副司直) 통훈대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지제교겸 경연검 토관· 춘추관 기사관 사간원헌납 병조정랑 사헌부집의 사복시정 홍문관부응교 ·지제교겸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그해 8월에는 수찬(修撰)이 되고 홍문관에 다시 복직되어 삼사(三司)와 삼전(三銓)을 역임한 후에 좌우승지(左右承旨), 그 뒤에 여러 번의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1887년에 대사성(大司成)에, 그 이듬해에는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888년에는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잠시 있다가 대사간에 복직되어 같은 해 12월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육조(六曹)의 참의(參議)를 두루 거쳤고 문장가(文章家)로서 지제교(知製敎), 춘추관(春秋館) 수찬(修撰),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등을 두루 역임하였다.문헌 : 시문집(詩文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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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홍 (金裕弘) |
1868 (고종5) ~ 1920 자는 의일(毅一) 18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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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육 (金 堉) |
1580 (선조 13) ~ 1658 (효종 9)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 흥우(興宇)의 아들. 1624년(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643년(인조 21)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 가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 귀국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 다. 1649년(인조 27)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이어 사은 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영중추원부사(領中樞院府事) 로 전직되어 진향사(進香使)로 또 청나라에 다녀왔다. 실록청 총재관 (實錄廳摠裁官)이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을 맡아보았고, 1654년(효종 5)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경 제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어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서양의 새로운 역법(曆法)「신력효식(新曆曉式)」을 보고 1653년부터 시헌력(時憲曆)이라는 새역법을 시행케 하였으며, 수레를 제작하고, 관개(灌漑)에 수차(水車)의 사용을 주청하였다. 한편 1651년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를 건의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 많은 서적을 간행하게 했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實學)의 원조(元祖)인 류형원(柳馨遠)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문헌 : 잠곡유고(潛谷遺稿)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 유원총보(類苑叢寶)잠곡필담(潛谷筆談). 종덕신편(種德新編),청풍세고(淸風世槁),옥하보(玉河譜),황명기략(皇明紀略),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송도지(松都誌)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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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金允植) |
1835 (헌종 1) ~ 1922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익태(益泰)의 아들. 유신환(兪莘 煥)의 문인.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81년 영선사(領選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근세 최초의 유학생을 인솔하여 병기 제조기술을 습득케 하는 등, 이듬해 귀국하여 신식 군대 800여 명을 양성했다. 이 사행으로 인하여 온건개혁파의 실천각료로 성장하고 한말정국에 있어서 중요인물로 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원세개(袁世凱)의 원군으로 김옥균(金玉均) 일파를 제거, 병조 판서가 되었다. 고종21년에는 통상교섭사무아문협판(通商交涉事務衙門協辦), 그 후 면천으로 정배 되기까지 2년 6개월간 대외관계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5년 6개월의 유형후 고종31년 6월에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재 등용하고 그해 7월에 재차 외무대신(外務大臣)에 임명되었으며 건양 원년2월 아관파천(俄館播遷)후 면직(免職). 그후 을미사변에 연루된 혐의로 광무2년 1월에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된 다음 지도(智島)로 이배되고 귀양이 풀어진 것은 10년이 지난 광무11년 6월이었다. 귀경(歸京)후 황실제도국 총재, 규장각학사.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등 명예직에 임명되었다. 한편 강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기호학회회장, 흥사단장, 교육구락부 부장, 대동교 총회 총장등에 취임하여 초기민족지 도자(初期民族指導者)가 되었다. 이 시기에 공은 두문불출이었으나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자 이용직(李容稙)과 더불어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제출하여 저들은 보안법(保安法) 위반 명목(違反 名目)으로 징역(懲役)2년 집행유예(執行猶豫)3년형(刑)으로, 대제학(大提學)의 직이 면직되고 자작(子爵)의 작위(爵位)도 박탈(剝奪)해가니 공의 일본(日本)에 대한 최후의 저항(抵抗)이었다. 비로서 공은 만년의 누명을 벗을 수 있어 기뻐하였으며 대종교청년회장으로 추대되고 이듬해 1월21 일 88세로 장서(長逝)하니 공의일생은 한말 격동기를 대변하는 듯 파란만장의 영욕의 역사였다. 공은 구한말의 이름높은 석학(碩學)이자 문장가로, 저서로는「운양집(雲養集)」「천진담초(天津談草)」음청사(陰晴史)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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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복 (金應復) |
별제(別提) 옥경(沃卿)의 아들. 자(字)는 형중(亨仲)의 흥현감(義興縣監)을 역임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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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청 (金應淸) |
공의 관직은 현감이요. 기묘사화로 인하여 從叔 判事公 世傑(종숙 판사공 세걸)과 從叔(종숙) 진사공 世寶(세보)는 함경도 영흥에 귀양 가고 從弟(종제) 부제학공 수성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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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회 (金應晦) |
1556명종丙寅 ~1633인조癸酉 참봉(參奉) 희경(僖卿)의 아들. 자(字)는 명언(明彦)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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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지 (金義之) |
호조참의(戶曹參議) 관(灌)의 아들 사복시주부(司僕寺 主簿),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 使)가되고 호조참의(戶曹參議) 경상도절제사,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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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한 (金以漢) |
1522 ~1602 자는 仲信(중신)이며 수암공(휘, 세걸)의 손자이다. 壽(수)를 81를 하셨고 벼슬은 五衛(오위)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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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견 (金益堅) |
1599선조32~1668현종9 자(字)는 이후(而厚)1624년 이괄의난에 임금을 호종하고 무과에 급제한후 1636년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 에서 여러번 나가 싸우다가 10 여곳의 상처를 입었는데, 인조가 충성을 가상히여겨 선전관에 제수하였고, 후에 제주, 언양, 거창,三邑의. 현감을 역임하고, 청백자수(淸白自守)하였다고 전하며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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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겸 (金益謙) |
1579선조12 ~1616광해8 집의 효백(孝伯)의 아들. 자(字)는 사수(士受)1603년 별시(別試)무과에 등과하여 선전관을 역임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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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문 (金益文) |
1806(순조6) ~1886(고종23) 자는 공회(公晦)이고 시호는 문정(文靖). 1838년(헌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뒤, 1840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선발되므로 서 출사하였다. 1842년 평안도(平安道)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숙천(肅川), 삼화(三和), 개천(价川), 순천(順川), 맹산(孟 山)등지의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을 숙청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뒤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大司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 하고 고종(高宗)조에 들어와서 형조·예조·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정계(政界)의 중요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1869년 동지겸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광주부유수(廣州府 留守)·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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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선 (金益銑) |
1589 ~1658 자는 自澤(자택)이요, 號(호)는 鳳谷(봉곡)이다. 벼슬은 오위에 司果(사과:정6품)을 지냈고 병자(1636)년 이후로는 科場(과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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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성 (金益成) |
1820 (순조20) ~ 1888 (철종25) 자는 순구(舜九) 호는 수옹(守翁)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의 문인 1855년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차출되어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으로 승차, 1869년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를 임명받고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숭릉령(崇陵令)이 되고 1873년에 김화현감(金化縣監), 1876년에 한산군수(韓山郡守), 1878년에는 김해부사(金海府使) 1881년에 서천군수로 전직되어 외직(外職)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한결같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서천군청(舒川郡廳) 앞에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서 있으며 1884년에는 능주목사(陵州牧使)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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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철 (金益哲) |
1804 (순조4) ~ 1829 (순조29) 자는 명여(明汝)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 진위현령(振威縣令), 문화(文化), 서산(瑞山), 배천군수(白川郡守)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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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휴 (金翊休) |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뒤에 대사간(大司諫)·순흥 부사(順興府使)·형, 공조판서(刑, 工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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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인 (金 寅) |
1586 (선조19) ~ 1654(효종5) 자는 여진(汝震) 1635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하고 교수(敎授) 찰방(察訪) 현감(縣監)등을 역임했고 판결사(判決事) 에 추증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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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백 (金仁伯) |
1561 (명종16) ~ 1617(광해9) 자는 군수(君壽) 학문행의(學問行誼)가 독실하였고 이조판서(吏曹 判書)에 추증되었다. 증손 대에서 부터 사대육상(四大六相)이 배출되 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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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金寅植) |
1856(철종7)~1880(고종17) 자는 경춘(景春)이고 1874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응교(應敎) 공조참의(工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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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잠 (金 土岑) |
1641 (인조19) ~ 1732 (영조8) 자는 이준(而俊) 호는 수와(睡窩)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흥지(興址)의 아들이다. 1681년 정릉참봉(貞陵參奉)에 임명된 후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 내섬시 주부(內贍寺 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적성현감(積城縣監)이 되었다가 사도시 주부(司導寺 主簿) 사직서 령(社稷署令)을 거쳐 연천현감(漣川縣監) 함경도(咸鏡道) 문천목사(文川牧使)를 역임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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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재 (金 栽) |
조선 1695년(숙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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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간 (金在簡) |
1817 ~ 1893 자는 致貞(치정) 20세손으로 벼슬은 돈령부(敦寧府) 도사(都事)를 거쳐 동돈령(同敦寧)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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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로 (金在魯) |
1682 (숙종 8) ~ 1759 (영조 35)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허주자(虛舟子), 시호는 충정(忠 靖), 우의정 구(構)의 아들. 1710년(숙종 3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수찬(修撰) 등을 역임했다. 1718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대사간·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호서 안무사(安撫使)를 겸하여 난을 토평 하는데 공을 세웠고, 내직으로 돌아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다. 1729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보임(補任) 되고, 이어서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 ·지춘추 관사(知春秋館事)로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하여「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733년 양역구관당상 (良役勾管堂上)으로서 양역(良役)을 재조정(再調整)하였으며 이듬해 세자의 책례도감 제조(冊禮都監提調)를 지낸 뒤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신간된 《명사(明史)》를 얻어왔 고 1740년(영조 6)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1746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의 복관을 건의하여 신원(伸寃)케 했다. 영조 묘정(英祖 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문헌:청사유집(淸沙遺集)본말록(本末錄)청사일기(淸沙日記),예기보주(禮記補註) 경오보(庚午譜)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좌씨집선속(左氏輯選續)금석록(金石錄)난여(爛餘)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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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金 鼎) |
1505 연산11) ~ 1568 (선조1) 자는 응지(凝之) 1522년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1524년 별시문과 (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곡산부사(谷山府使), 전라도사(全 羅都事),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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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金 瀞) |
조선조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배(配)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익제(益齊) 문충(文忠公 : 慶州 李齊賢) 공의 외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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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립 (金廷立) |
1585년(선조 18) 진사(進士)가 되고,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가 되었다. 판서(判書)로 추증(追贈)되고 청풍군(淸風君)에 봉 (封)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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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 (金鼎華) |
1599 (선조32) ~1654 (효종5) 자는 국경(國卿) 호는 감호(甘湖) 1636년에 진사(進士)가되고 여러 관직(官職)이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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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만 (金鍾萬) |
1715숙종41 ~1768영조44 증 이조참판 치중(致重)의 아들. 자(字)는 수이(受而)1740년 武科에 급제하고, 1746년 武科重試에 합격한 후 여러관직을 거쳐 경상도병사(慶尙道兵使)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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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문 (金鍾文) |
1750 (영조26) ~ 1825 (순조25) 자는 유인(猶人) 18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등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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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金鍾秀) |
1728 (영조 4) ~ 1799 (정조 23) 자는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梧)·진솔(眞率), 시호는 문충(文忠), 희로(希魯)의 손자, 치만(致萬)의 아들. 1768년(영조 44) 군수(郡守)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이조 판서에 등용되었고, 1785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어 대제학(大提學), 1789년 우의정(右議政), 1793년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 때「경연고사(經筵故事)」「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를 지어 바쳤다. 종묘(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문헌 : 몽오집(夢梧集)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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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순 (金鍾純) |
1750 (영조26) ~ 1802(순조2) 자는 원강(元剛) 177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하고 부정자(副正字)를 역임했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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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선 (金宗善) |
1766 (영조 42) ~ 1810 (순조 10) 자는 성보(城甫), 호는 송재(松齋),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시묵(時黙)의 손자, 기대(基大)의 아들. 어려서 이술원(李述源)에게서 학문을 닦고, 후에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의 문인이 되었다. 정조 때 척신(戚臣)으로 기용되어 의령현감(宜寧縣監)에 오른 다음 우승지 (右承旨)를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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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金鍾英) |
1725영조1~1818순조18 병사종만의 아우. 자(字)는 언화(彦華)1750년 武科에 등과하고 덕원부사(德源府使)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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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정 (金鍾正) |
1722(경종2) ~ 1787(정조11) 자는 백강(伯剛)이고 호는 운계(雲溪)이며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174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교리(校理) 강원도사(江\原都事)를 거쳐 영남어사(嶺南御史) 강원도감운어사(江原道監運御史)\가되어 세금감면(稅金減免)등 양곡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다.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고, 또 병조(兵曹)·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고 1768년에는 이조참판·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1773년에는 대사성(大司成) 11월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 1776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정조(正祖)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시정대책(施政對策) 7조(條)를 올리고 1779년에 물러났다. 1785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다음해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의금부사(義禁府事)를 겸하고 1787년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다. 청천군(淸川君)에 봉하여졌다. 문헌 : 운계만고(雲溪漫稿) 사례집요(四禮輯要)문헌집략(文獻輯略)시차(時箚)서차(書箚)예차(禮箚)중용기의(中庸記疑)중용집설(中庸輯說)가범(家範)낙민장보(洛?壯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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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후 (金鍾厚) |
1721 (경종1) ~ 1780 (정조 4) 자는 백고(伯高), 호는 본암(本庵). 진재(眞齋), 시직(侍直)치만(致萬)의 아들. 민우수(閔遇洙)의 문인. 진사 (進士)가 된뒤 성리학자로 이름났으며,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1778년(정조 2) 장령(掌令) 이 되고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문헌:본암집(本庵集)가례집고(家禮集考)성심록(醒心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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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후 (金從厚) |
1724 (경종 4) ~ 1784( 정조 8) 초명은 치묵(致黙), 초자(初字)는 인지(因之). 자는 자용(子容), 호는 동병(東屛), 중로(重魯)의 아들. 1765년(영조 41)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학문을 닦았다. 영남(嶺南)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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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명 (金佐明) |
1616 (광해군 8) ~ 1671(현종 12)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귀천(歸川), 시호는 충숙(忠肅), 영의정 육(堉)의 아들. 1633년(인조11)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644년 (인조 22) 문과별시(文科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시강원의 설서 홍문관의 옥당을 거친다음 병조좌랑·1646년(인조24)에 문과중시병과에 합격하니 홍문관 부수찬·수찬·교리에서 이조좌랑·과 정랑 응교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하면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직을 겸하고 사헌부 집의(執義) 1652(효종3) 승정원 부승지(副承旨)·예(禮) 병(兵) 형(刑) 공조참의(工曹參議)와 장예원 판결사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보직을 바꿔가며 역임하였으며 승정원에 있을 때 문장의 내용이 간결하고 흐름이 막힘이 없었으며 글 솜씨에 크게 탄복하였다. 1656년(효종7)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참판(工曹參判)·도승지(都承旨)·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참판·부제학(副提學) 1657년 동지경연사·병조참판(兵曹參判)· 대사헌(大司憲)·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예조참판(禮曹參判)· 도승지(都承旨)·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 문정공(文貞公)이 만든 대동법(大同法)을 전 호남(湖南) 호서(湖西)지방에 시행토록 강력 추진하였다. 또 상평법(常平法)을 시행하였다. 1662년(현종3) 공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수어사(守禦使)가 되었다. 치적(治積)의 특징(特 徵)은 군율이 엄정하였으며, 국가 자원을 축내지 않았다. 1663년 호서지방의 수군(水軍)병졸(兵卒)의 폐습(弊習)을 개혁(改革) 부역대신 돈으로 바치는 금액을 반으로 줄였다. 1665년 북경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가을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다시 돌아와 1667년 영령전(永寧殿)을 재건축하고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며 1668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호조판서(戶曹判書)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669년에 예조(禮曹)·호조판서(戶曹判書) 1670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숭록대부(崇祿大夫)· 가을에 위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영의정.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현종묘정(顯宗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문헌 : 귀계집(歸溪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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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교 (金周敎) |
1802 (순조2) ~ 1860 (철종11) 자는 범수(凡秀) 호는 고산(古山) 참판(參判) 희조(熙朝)의 아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 시문에 능하였으므로 1850년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임하여 남다른 선정을 베풀었으며 1856년에 부사과(副司果)로 고을을 떠나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공은 평소에 어 머님에게 항상 즐거움을 병세가 위중하면 잠시도 떠나지 않고 변소 길에는 공이 부축하며 비복들에게 맡기는 일이 없었다. 공이 돌아가 신 2년후 학문과 덕행이 세상에 알려진후 사헌부장령으로 증직되고 효자(孝子)로 정려(旌閭)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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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묵 (金周黙) |
1777 (정조1) ~ 1847 (헌종13) 자는 몽유(夢臾) 호는 재재실(哉哉室) 1809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삼사(三司)와 사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역임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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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金俊) |
생졸미상 벼슬이 五衛(오위)에 부호군(副護軍:종4품)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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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명 (金重明) |
1614 (광해군 6) ~ 1685 (숙종 1) 자는 이회(而晦), 빙고별검(氷庫別檢) 전(典)의 아들. 1645년(인조 23) 무과(武科)에 급제, 효종이 북벌계획(北伐計劃)으로 인재를 구할 때 송시열의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이되고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 내금위장(內禁衛將)·죽산(竹山)· 갑산부사(甲山府使)· 익산군수(益山郡守)· 영흥중군(永興中軍)· 해미(海美)· 청주영장(淸州營將)을 거쳐 1671년(顯宗 12)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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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식 (金中植) |
1842 (헌종8) ~1898 (광무2) 자는 치화(致和) 능주목사(陵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의 아들 188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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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묵 (金持黙) |
1724 (경종 4) ~ 1799 (정조 23) 자는 유칙(維則), 시호는 익헌(翼憲), 성응(聖應)의 아들, 부원군(府院君) 시묵(時黙)의 아우. 1750년(영조 26) 생원시(生員試)에 급제, 참봉(參奉)을 거쳐 1771년(영조 4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올랐고 이어서 총융사(摠戎使)가 되고, 장용사(壯勇士) 어영대장 금위대장(禁衛大將)을 역임하고 1793년 (정조17)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어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다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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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연 (金直淵) |
1811 (순조11) ~ 1884 (고종21) 자는 경우(景愚)이고 호는 품산(品山) 1846년 정시문과(庭試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사(三司)를 거쳐 승지(承旨) 병조참의(兵曹參 議)등을 지내고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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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달 (金鎭達) |
1870 (고종7) ~ 1906 (광무10) 자는 윤문(倫聞) 충주관찰사(忠州觀察使) 규식(奎軾)의 아들, 1892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비서승(秘書丞)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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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 (金振聲) |
1602 (선조35) ~ 1656 (효종7) 자는 만리(萬里) 호는 국헌(菊軒) 청풍군(淸風君) 정립(廷立)의 아들이다. 조선 선조때에 삭주부사(朔州府使)를 역임하였고 1628년에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을 적발하여 갈충효성병기익명(竭忠孝誠炳幾翊命) 영사공신(寧社功臣)으로 책록되어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오르고 청릉군(淸綾君)으로 봉(封)해졌으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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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질 (金 )> |
1433(세종15) ~ 1493(성종24) 자는 수옹(壽翁) 1459년 진사(進士)에 이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아가 청렴과 공평한 행정으로 포상을 받았으므로 공황(龔黃)과 견줄만하였고, 집의(執義) 를 거쳐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르렀으며 안동부사(安東府使)시에 선정(善政)을 높이 평가하고있다. 배(配)는 양령대군(讓寧大君 : 剛靖 公) 의 손녀, 순성군 희안공(順城君 禧安公)의 따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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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징 (金 澄) |
1623 (인조 1) ~ 1676 (숙종 2) 자는 원회(元會), 호는 감지당(坎止堂), 극형(克亨)의 아들. 이 식(李 植)·송준길(宋浚吉)의 문인. 1652년(효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53(효종4)년에 천거되어 승정원(承政院) 주서(主書)겸 기사관(記事官)에 제수되고 1655(효종6)년에 전적(典籍)· 예조(禮曹)와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이어서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 등을 역임하고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가 되었다. 1666년(현종7)병조좌랑(兵曹佐郞) 1668년에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670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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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협 (金鎭協) |
1863 (철종14)~ 1906 (광무10) 자는 범오(範五) 정주목사(定州牧使) 김규승(金奎升)의 아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9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규장각(奎章閣)의 시교(侍敎)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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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추 (金 樞) |
1649인조 ~ 1721경종 자(字)는 기중(機中)1676년 무과에 등과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는데 위계는 통정(通政)에 오르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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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망 (金忠望) |
증 지평(贈持平) 오(珸)의 후손(後孫). 덕명(德明)의 아들. (公)의 오형제(忠望 忠相 忠成 忠伯 忠錫)가 武科에 등과하니 나라에서 아버님(諱.德明)을 치제(致祭)하게 하고 세상의 부러움을 삿으며 보사원종 공신(保社原從功臣)에 책훈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하였고, 아드님 유벽(有璧)과 유황 (有璜)도 무과에 등과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 계제(季弟)충석(忠錫)도 주부(主簿)에 이르렀 으나 불행이도 아우님 사형제(四兄弟)는 무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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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백 (金忠伯) |
1554 (명종9) ~1613 (광해5) 자는 군서(君恕) 집의(執義) 계(繼)의 아들 학문이 독실하였고 효행(孝行)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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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삼 (金春三) |
1876 (고종13) ~ 1944) 항일독립운동가 일명 김익수(金益洙) 1907년 조영구 의병진에 참여 의병(義兵)을 규합 제천, 원주, 청풍 등지에서 일군(日軍)을 격파 1908년 충주성(忠州城)을 공략 하다가 체포되어 10여년 옥고(獄苦)를 치르고 후유증으 로 별세하였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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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구 (金致九) |
1766년(영조 4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양사(兩司)의 벼슬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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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공 (金致恭) |
1767년(영조 43) 정시(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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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만 (金致萬) |
1697 (숙종 23) ~ 1753 (영조29) 자는 회일(會一), 호는 고은당(高隱堂), 희로(希魯)의 아들. 1721년(경종 1)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1723년(경종 3)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거쳐 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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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묵 (金峙 ) |
1741 (영조17) ~ 1788 (정조12) 자는 정부(靜夫) 1768년에 사서(司書), 177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고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 보덕(輔德)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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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신 (金致信) |
1771년(영조 4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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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양 (金致讓) |
1725 (영조1) ~1793(정조17) 자는 여득(汝得)이고 호는 미로헌(未老軒)이다. 영의정(領議政) 김상로(金尙魯)의 아들이다. 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 정언(正言)등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1766년에 좌승지로 1769년에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선정을 펴고 같은해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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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인 (金致仁) |
1716 (숙종 42) ~ 1790 (정조 14)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시호는 헌숙(憲肅), 재로(在魯)의 아들. 1748년(영조 2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여 1765년 우의정(右議政),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고, 1766년부터 수차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고부 겸 청승습주청사(告訃兼請承襲奏請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85년「대전통편(大典通編)」편찬을 총재했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기용되어 정조의 명으로 당쟁(黨爭)의 조정에 힘썼다. 문헌:고정일기(古亭日記) 명의록(名義錄)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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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일 (金致一) |
1700 ~ 1759 영의정 재로의 장남. 1721 증과 진사에 합격하고 경릉 참봉 봉사 직장등을 역임한후 전생서 주부 호조 공조 좌랑 선공감 부정등 내직을 역임후, 충주목사를 역임하고 장약원정 제조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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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현 (金致顯) |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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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후 (金致垕) |
1691 (숙종 17) ~ 1742 (영조 18) 자는 사중(士重), 호는 사촌(沙村), 태로(泰魯)의 아들. 1726년(영조2)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있을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1738년 대사간이 되어 탕평책(蕩平策)의 폐단을 상소하다가 위도(蝟 島)로 유배, 2년 후 풀려 나와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고, 뒤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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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로 (金取魯) |
1682 (숙종 8) ~ 1740 (영조 16) 자는 취사(取斯), 시호는 충헌(忠獻), 유(木柔)의 아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1713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고 경종 초에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다가,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1731년(영조 7)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공조(工曹)·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고 1735년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737년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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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탁 (金 鐸) |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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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화 (金泰華) |
생졸미상 13세손으로 甘湖公(감호공) 鼎華(정화)의 동생이다. 자는 熙卿(희경)이요 벼슬은 尙衣院(상의원)에 別坐(별좌:정5품)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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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묵 (金平 ) |
1819 (순조 19) ~ 1888 (고종 25)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庵), 시호는 문의(文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881년 이만손(李晩孫)을 비롯한 만여명의 영남유생들의 척사위정(斥邪衛正)운동을 후원했으며 그 해 7월에 다시 초안해 올린 척양척왜(斥洋斥倭) 소를 올렸다가 섬에 유배(流配)됨.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 나왔다. 스승인 이항로(李恒老)선생의 학문을 계승(繼承)했으며 1881년 (고종 11) 스승의 화서아언(華西雅言)을 편집 간행했다. 제학(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문하에 성재 유중교, 항와 유중악, 의암 유인석등 명성 높은 유학자와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문헌 : 중암집(重菴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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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金鶴善) |
1841 (헌종7) ~ 1890 (고종27) 자는 여고(汝臯) 1858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878년 별시문 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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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金學性) |
1807 (순조 7) ~ 1875 (고종12) 자는 경도(景道), 호는 송석(松石), 시호는 효문(孝文), 종정(鍾正) 의 증손, 동헌(東獻)의 아들. 1828년(순조28)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33년 시교(侍敎), 1841년 한성부좌우윤(漢城府左右尹), 1844년 이조 참판(吏曹參判), 1848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규장각(奎章閣)제학(提學) 이어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1854년(철종5)형조판서(刑曹判書) 1857년 형조· 공조의 판서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 1863년(철종 14) 이조 판서·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역임하고, 1872년 평안도 관찰사 (平安道 觀察使)가 되었다. 문헌 : 송석유고(松石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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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조 (金翰朝) |
1600 (선조33) ~ 1680 (숙종6) 자는 헌국(憲國)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4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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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 (金 晛) |
예빈시주부(禮賓侍主簿) 진충(進忠)의 아들. 자(字)는 욱지(旭之) 벼슬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金晛)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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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손 (金賢孫) |
지평(持平)오(珸)의 장남. 자(字)는 광숙(光叔빙고별좌(氷庫.別坐)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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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로 (金亨魯) |
1694 (숙종20) ~ 1757(영조33) 자는 성회(聖會)요 1725년에 무과에 합격하고 선전관이 되었다. 1730년 무과현량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에 발탁되었다. 1734년 훈련원사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부정(副正)으로 옮기고 무과(武科)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의금부(義禁府)와 경연(經筵)에 나아갔다가 함흥판관(咸興判官) 함흥진(咸興陣)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직하였다. 1745년에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내고 해미영장(海美營將), 방어사(防禦使)를 거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오르고 총융사(摠戎使)로 나갔으며 1755년에는 어영청에 중군관성장(中軍管城將)으로 올라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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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선 (金亨善) |
1862 (철종13) ~ 1907(순종1) 자는 태경(泰卿) 188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의 시독관(侍讀官)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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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호 (金 湖) |
1429(세종11~1505(연산11) 자(字)는 경봉(景奉) 길주목사(吉州牧使) 억지(億之)의 아들. 문과(文科) 급제 후 二邑止 수령을 거친 후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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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金弘祺) |
1823 (순조23) ~ 1919 자는 조경(祚卿) 184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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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례 (金孝禮) |
문평공 길통(吉通)의 아버님. 朝鮮初(조선초)에 陽城(양성, 지금의 양평) 縣監(현감)을 지냈으며 純忠補祚功臣(순충보조공신)으로 左贊成(좌찬성)으로 증직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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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백 (金孝伯) |
1557 (명종12) ~ 1619 (광해11) 자는 행원(行源) 집의(執義) 계(繼)의 아들 염계(炎刂溪)선생의 문인, 평생 소학(小學)을 근본(根本)으로 삼았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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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흔손 (金欣孫) |
1461(세조 辛巳)~1515(중종 乙亥) 지평(持平) 오(珸)의 차남. 자(字)는 경보(慶甫)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하고 품계는 통정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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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흔지 (金 之) |
호조참의(戶曹參議)관(灌)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감 역(監役),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조, 병조, 형조참의(刑曹參 議)를 역임하고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겸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역임한 후 한성윤(漢城尹)을 지내고 정란좌익원종공신(靖亂佐翼原從功臣)에 책 훈(策勳)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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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우 (金興宇) |
1564 (명종19) ~ 1594 (선조27) 자는 선경(善慶)이고 증 좌찬성(贈左贊成) 비(棐)의 아들이고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덕수(德秀)의 손자이자 대사성(大司成) 증 좌찬성(贈左贊成:湜)공의 증손자이다. 가문 대대로 유학을 전수 받은 데다가 일찍부터 율곡(栗谷:李珥), 우계(牛溪:成渾)두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우뚝 수립하여 약관에 재주와 학업이 대단하였으므로 문장이나 서예에 능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공은 문충공(文忠公:金尙容), 문민공(文敏公:黃愼), 문숙공(文肅公:李春英), 문정공(文正公:金尙憲),등과 서로 함께 학문을 공부하였는데 공이 그사이에 노닐면서 문충공을 형으로 김상헌을 아우로 대우하였다. 1585(乙酉)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자 선비들이 사모하며 칭찬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강릉참봉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병환으로 일찍 타계하셨다. 배위는 정암 조광조(趙光祖)선생의 종손녀(趙希孟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에 증직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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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록 (金興錄) |
1566 (명종21) ~ 1591 (선조24) 자는 선응(善應)이고 증 좌찬성 비(棐)의 아들이다. 성품이 맑고 깨끗하고 온화하며 청아하였다.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諱 李恒福)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학문행위가 독실하였으며 준재였으나 몸이 쇠약하여 일직 사망하였다.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 되었으며 배위(配位)는 증(贈)정경부인(貞敬夫人) 수원백씨(水原白氏)로 승지(承旨)유함(維咸)의 따님이고 참찬(參贊) 휴암(休庵:仁傑)공의 손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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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지 (金興址) |
1600 (선조33) ~ 1679 (숙종5) 1635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1644년에 지례현감(知禮縣監)을 거쳐 문경, 양구, 문의등 삼읍(三邑)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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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신 (金熙臣) |
자(字)는 경여(敬如). 호는 홍주(洪州). 택휴(宅休)의 아들. 생부(生父)는 판서 익휴(翊休) 1798(정조22)년 式年 司馬試에 급제하고 1799년 처음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함창縣監.간성郡守 등 여러 고을 수령을 역임하고, 洪州牧使에 이르고 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가는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頌德碑를 세웠는데 함창과 홍주에는 지금까지 善政碑가 세워져 있고 공의 아드님 진교(晋敎)공도 사마시에 급제하고 일곱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황주목사(黃州牧使)에 이르고 吏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황주와 강경, 서울의 양천長城에는 興學碑와 淸白善政碑가 세워져 있고,또 손자 世鎬공까지 三世에 거쳐 善政碑가 무려 10여기가 넘으니 목민관 으로서 선정을 펴심을 가히 알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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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채 (金熙采) |
1744 (영조 20) ~1802 (순조2) 자는 혜중(惠仲), 택휴(宅休)의 아들. 승휴(承休)에게 입양(入養). 1780년(정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88년(정조 12) 수찬(修撰)을 거쳐 평택 안핵어사(按覈御史)가 되었으며,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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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조 (金熙朝) |
1783년(정조 7) 증광전시(增廣殿試)에 갑과(甲科)로 급 제, 여러 벼슬을 거쳐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쳐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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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화 (金熙華) |
1765 (영조 41) ~ 1849 (헌종15) 자는 관여(觀汝), 익휴(翊休)의 아들.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式 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825년(순조 25) 예방 승지(禮房承旨) 를 거쳐 1843년(헌종 9) 공조 판서에 승진, 1849년 숭록대 부(崇祿大夫)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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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연 (金會淵) |
1750 (영조 26) ~ 1817 (순조 17) 자는 문통(文通), 호는 효운루(曉雲樓), 종정(鍾正)의 아들. 1800년(정조 24)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 1801년(순조 1) 홍문관 교리 (弘文館校理)·종부시 부정(宗簿寺副正) 등을 거쳐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1808년(순조 8) 예조 참의(禮曹 參議)·대사간을 지냈다. 그후 1810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통신사 (通信使)가 일본에 갈 때의 경비로 도(道)에 신수곡(信需穀)을 비치하고 백성에 대한 잡부금을 엄금하는 등으로 신망을 얻었다. 이조 참의를 거쳐 1815년 예조 참판(禮曹參判)·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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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로 (金希魯) |
1673 (현종 14) ~ 1753 (영조 29) 자는 성득(聖得), 우의정 구(構)의 아들. 1702년(숙종 2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704년 빙고 별검(氷庫別儉) 등을 지내고, 공조(工曹). 호조(戶曹)의 참판(參判)을 두루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