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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명 |
간행시기 |
권수 |
비고 | |
목
판
본 |
蜀版(北宋官版, 開寶勅版) |
북송(971~983) |
5,048 |
勅版 |
高麗初雕版 |
고려(1011~1029) |
5,048 |
勅版, | |
契丹版 |
거란(1031~1068) |
579 函 |
勅版 | |
崇寧版(福州東禪等覺院版) |
북송(1075~1103) |
5,700 |
私版 | |
毘盧版(福州開元禪寺版) |
남송(1112~1151) |
6,117 |
私版 | |
思溪版(圓覺寺版) 金版(趙城藏) |
남송(1126~1132) 금(1149~1173) |
5,480 5,048 |
私版 北宋官版 | |
고려대장경版(再雕대장경) |
고려(1233~1248) |
6,568 |
勅版 | |
弘法寺版(金藏) |
남송(1149~1294) |
私版 | ||
思溪版(資福寺版) |
원(1239~?) |
5,740 |
私版,圓覺寺版의 補刻 | |
杭州版(普寧寺版) |
원(1277~1290) |
6004 |
思溪版의 重刻 | |
礦砂版(延聖寺版) |
원(1231~1305) |
6,362 |
私版, 1287년 追刻 | |
明版南藏(報恩寺版) |
명(1373~1403) |
6,331 |
金陵(南京) 開版 | |
明版北藏(北京版) |
명(1419~1440) |
6,361 |
北京서 開版 | |
萬曆版(嘉興楞嚴寺版) |
명(1589~1676) |
7,334 |
方冊本·北藏 增補 | |
宗存版 |
일본(1614~1624) |
284 |
고려대장경版 복각 | |
天海版(寬永寺版) |
일본(1637~1648) |
6,323 |
木活字 | |
黃檗版(鐵眼版) |
일본(1669~1681) |
6,958 |
方冊本·萬曆版 底本 | |
龍藏(淸版) |
청(1735~1738) |
7,838 |
明北藏版 底本 | |
신 활 자 본 |
大日本校訂대장경(縮藏) |
일본(1880~1885) |
8,534 |
고려대장경版 底本 |
日本校訂대장경(卍正藏) |
일본(1902~1912) |
7,148 |
麗明對校錄 底本 | |
上海頻伽精舍版 |
청(1891) |
8,534 |
縮刷藏 底本 | |
大正新修대장경 |
일본(1922~1934) |
9,041 |
고려대장경版 底本 | |
佛敎대장경 |
중국(1979) |
上海頻伽精舍版 底本 | ||
佛光대장경 |
중국(1983~진행) |
고려대장경版 底本 |
*이외에 중국에서는 적사판대장경(磧砂版大藏経)과 송장유진(宋藏遺珍), 수정 중화대장경(修訂中華大藏経), 중화대장경(中華大藏経) 등이 영인(影印)되었으며, 한국에서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経)이 영인되었다.
2. 初雕대장경
1) 雕造에 대한 문제
初雕대장경은 고려 현종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다. 이 初雕대장경은 중국 북송의 開寶板 대장경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간행한 漢譯대장경이다. 開宝板은 宋太祖의 칙명에 의해 成都에서 판각되어 예전부터 蜀版, 勅版으로 부르다가 현재 중국에서는 開寶藏으로 부르고 있다.
송나라 태조에 의해서 간행한 대장경이 991년 고려에 전래되자, 고려는 커다란 자극을 받고 대장경 간행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고려 성종 12년(993)부터 契丹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현종2년(1011)에는 극에 달했다. 초조대장경 판각의 동기는 李奎報가 쓴 「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있는 “顯宗 2年(1011)에 契丹이 侵入하여 顯宗이 難을 피해 南쪽으로 避難하였으나 물러가지 아니하여 君臣이 無上의 大願을 發하여 대장경板本을 새기기를 誓願한 후에 비로소 契丹兵이 물러갔나이다....” 라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初雕대장경板은 1232년 蒙古軍의 侵入으로 불타 버렸고, 1970年代 초에는 日本 京都의 南禪寺외에 한국 내에는 전래된 것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왔다. 최근에 와서야 일본 南禪寺와 대마역사박물관, 국내의 성암고서박물관, 호림박물관, 호암미술관 및 個人 등이 26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필자는 南禪寺 소장 初雕대장경에 관심을 갖고 1990년도부터 관심을 갖고 거의 매년 2~3일 또는 4~5일씩 남선사를 방문 조사하다가 1996년도에는 한 달 동안 집중조사를 할 수 있어서 실태조사를 완료하고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복제를 했다. 이후 대마도 역사자료관에 있는 대반야경도 조사하고 역시 마이크로필름으로 모두 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덮어놓았다가 최근에 와서야 마이크로필름 복사본을 정리하고 있다.
그동안 초조대장경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의 부족과 연구 할 판본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초조대장경의 연구는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인 판각시기에 대해서는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1011년에 시작하여 1087년까지 77년 동안 새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이는 역사 기록에 대한 해석을 잘못함으로써 생긴 혼란으로 보인다.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해인사 대장경판 문제도 바로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板刻性格과 時期
그동안 판각시기에 대해서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나오는 현종2년(1011)에 시작한 것은 확실한데, 선종 4년(1087)에 등장하는 개국사,흥왕사,귀법사에 대한 기록을 잘못 이해하여 1087년까지 77년이 걸려 새겼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국가였다.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새기자 고려에서도 문화적인 자긍심으로 대장경판 판각을 준비하였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거란이 침입하자 이를 계기로 대장경을 판각하였던 것이다. 대장경판각은 불교신앙심으로 국민들의 힘을 결집하고, 거란에 없는 대장경 판각을 통해서 문화적인 우월감을 과시하고, 고도의 전략전술 차원에서 거란이 불교국가인 점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북송에서 대장경이 처음으로 수입된 것은 고려사와 송사(宋史) 및 문헌비고에 의하면, 성종 8년(989)에 승 여가(如可)가 와서 대장경을 청하므로 이를 사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성종 10년(991)에 한언공(韓彦恭)이 송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청하여 가져온 기록도 있다. 이때 481함 범 이천오백권의 대장경 외에 당시 송태종이 지은 『어제비장전』,『어제소요영』,『어제연화심윤』”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989년의 기록은 간행본인지 필사본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고, 991년에 한언공이 가져온 대장경은 ‘사백팔십일함 범이천오백권’이라는 숫자 때문에 함수는 맞는데 권수가 5천 여 권의 반밖에 안된다고 전체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종 10년(1019)에 최원신(崔元信)이 불경 일장(一藏)을 요청하여 받아 온 것이나 현종13년(1022)에 한조(韓祚)가 송으로부터 들어올 때 송 임금이 대장경[釋典一藏]을 주어 받아 온 기록까지도 초조대장경 판각을 위해서 대장경을 수입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려사를 읽어보면, 고려시대 임금들의 불교신앙이 대단하였음을 자주 보게 된다. 각 왕들은 사찰출입이 빈번하였을 뿐만 아니고 마치 경쟁하듯이 불사를 많이 하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간행한 대장경뿐만 아니라 개별 불교경전 간행이나 금은자 대장경 사경이 고려 말까지 빈번하게 이루어졌음을 자주 보게 된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대장경이나 경전관련 기사를 보면, 반드시 국가적인 행사라기보다 임금이나 귀족들의 불교 신앙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도 많은 것이다.
선종 4년(1087)에 등장하는 개국사,흥왕사,귀법사에 대한 기록도 잘못 이해하여 마치 1087년에 대장경 판각을 완료한 년도로 생각했다.
○2월 甲午(11일) 幸開國寺 慶成대장경.
○3월 己未( 7일) 王如興王寺 慶成大藏殿
○4월 庚子(19일) 幸歸法寺 慶成대장경 이란 기록은 선종의 시주로 2월과 4월에 개국사와 귀법사에서 각 각 대장경을 한부씩 봉안하는 의식에 참석한 것이고, 3월에는 흥왕사에 대장경 판본 봉안을 위한 대장전을 지어 그 낙성식에 참여한 것이다. 특히 흥왕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주지를 맡으면서 1091년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교장을 간행했던 사찰이다. 흥왕사의 대장전 건립은 아마도 임금이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 간행을 위해 대장경 판본과 그동안 수집한 교장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을 건립했을 것이다. 현종(1010~1031) 때 판각한 대장경판을 이때에 와서 완성하고 대장경 판전을 건립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렇게 기록에 나타난 대장경에 관한 내용 모두를 초조대장경 간행과 결부시켜 잘못 이해하여 1087년까지 77년 동안 판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경도대학교 명예교수인 찌쿠사 교수에 의하면, 북송의 개보판 대장경은 판각은 971년에서 977년까지 7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려는 중국 못지않은 인쇄문화대국이었고, 송판대장경 간행소식을 듣고 진작부터 대장경 판각을 준비했을 것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은 갑자기 불타버려 미리 준비할 겨를도 없었고, 게다가 내용을 일일이 대교하면서 판각했는데도 준비 기간까지 합쳐서 16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초조대장경 판각에 77년이 걸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초조대장경은 송 개보판 대장경을 저본으로 새겼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현존 개보판 대장경과 비교해 보면 초조대장경이 판수제(板首題)나 판미제(板尾題) 부분의 함차(函次) 표기 등 독자적인 모습도 지니고 있고, 일부분은 판하본을 다시 작성하여 새긴 판본도 있겠지만, 대부분 개보판의 번각(飜刻)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초조대장경의 판각시기와 판각 권수에 대해서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1055-1101)의 저술인 『대각국사문집』에 있는 두 편의 글이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일본의 여러 법사에게 교장을 보내줄 것을 청하는 소」에, "개원석교록은 지승이 찬한 것이고 정원속개원석교록은 원조가 찬한 것인데, 양 본에 수록된 경.율.논 등과 송나라에서 새로 번역한 경론 등 6천여 권은 이미 간행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고,
「선종을 대신하여 제종교장의 조인을 발원하는 소」에서는 "현종께서 5천 권의 비장을 새기셨고 문종께서는 10만송의 계경(契經)을 새기셨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두 글은 대각국사가 수집한 장소(章疏)의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할 때인 1090년 전후에 쓴 글인데, 이때 이미 현종(재위;1009~ 1031)과 문종(재위;1047~1082)때 『개원석교록』과 『정원속개원석교록』에 수록된 대장경과 송나라에서 새로 번역한 6천여 권의 경론에 대한 판각을 모두 마쳤음을 증언하고 있다. 의천 대각국사도 선종 때까지 판각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현종때는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5000여권의 경전을 새기고, 문종때는 『정원속개원석교록』에 수록된 1000여권의 경전을 새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종때는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개보판 대장경 판각사업을 완료한 것이었다.
문종때는 현종때의 미완성 사업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현종때 이후에 새롭게 들어온 밀교대장경 등 송 태종의 칙명으로 새로 번역한 경전을 판각했다. 송 신역 경전은 거의 대부분 송 태종의 서문이 붙어있다. 그리고 당시 간행된 거란 대장경도 수입하여 현종때 대장경에 없는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속장경(續藏經)사업을 새롭게 시작하여 마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종(1010~1031)때의 초조대장경 판각이 문종 때(1047~1082)까지 계속 이어진 동일한 사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에서도 "현종 때의 대장경판본이 임진년(1232) 몽고병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왕과 군신이 다시 서원하고 도감을 세워서 16년이 걸려 완성하였다." 는 기록이나 대각국사 문집에서도 현종 때 판이라고 분명히 했으므로 초조대장경판각은 현종 때 완성한 것이다.
국가에서 대장경을 판각하면서 저본을 구하지 못해서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 개보판 대장경이 977년에 간행되자마자 바로 대장경 판각 준비를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거란이 침입하자 그를 계기로 판각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에 실린 『근본설일체비나야파승사』를 보면, 국전본(國前本)과 국후본(國後本)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 국전본과 송본 그리고 국후본과 거란본을 비교한 것을 보면 문종때 새긴 경전은 거란본을 상당수 수용했고 현종때 새긴 것과 중복되는 경전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국전본은 송 개보장을 저본으로 하여 현종 때 판각을 완료했고, 국후본은 밀교경전 등 송 신역(新譯)경전과 거란대장경의 일부 경전을 수용하여 문종 때 판각한 것이다. 여기서 문종때의 국후본이 국전본과 중복되는 경전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현종때의 대장경 가운데 잘못된 내용이 알려진 경전은 거란대장경에 의해서 중복하여 다시 판각 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종때의 국후본은 아마도 거란대장경이 수입된 문종 17년(1063)에 이후가 될 것인데, 판각은 4-5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종 때 추가로 판각한 경전은 물론 국전본과 중복 간행한 경전도 있었겠지만, 현종 때 판각한 초조대장경의 5분의 1 밖에 되지 않은 1000여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문종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의 출가(1065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문종 때는 초조대장경 판각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초조대장경에 대한 보완적인 차원에서 속편(속장경)으로 판각한 것이다. 판각기간은 고려시대의 뛰어난 인쇄 기술로 봐서 현종때의 초조대장경 판각은 1011년부터 10년, 문종때의 속장경은 1065년부터 5년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3) 南禪寺의 初雕대장경
일본에는 경도 남선사와 대마역사자료관에 고려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경도소재 남선사(南禪寺)는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일체경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일체경은 대장경 연구의 보고(寶庫)로 송판대장경과 원판대장경,고려판대장경,일본판대장경,사경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혼합 대장경이다.
남선사는 국내에는 희귀한 고려시대 초조대장경을 다량 소장하고 있어 유명하다. 국내에 전래되는 초조본이 없다고 이야기될 때 김두종 박사가 남선사의 초조대장경 3종을 발표한 것이 처음으로 초조대장경에 대한 소개였다. 그러나 그동안 남선사의 초조대장경에 대해서도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아직까지 그 특징과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몇 단계 연구 과정을 거쳐야 밝혀 질 것이다.
남선사는 1264년에 구산천황(龜山天皇)의 이궁으로 지었던 곳으로 양위후 사찰을 삼아 1308년에서 1310년 사이에 가람의 규모를 모두 갖추면서 경도의 5본산 가운데 수사찰(首寺刹)로 행세했던 곳이다. 이 남선사는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등장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세종30년(1448) 4월에 일본국 정사(正使 文溪正祐)가 와서 태평흥국남선사는 일본제일의 선찰(禪刹)이어서 왕과 신하가 공경하는데 지난번 화재로 법보가 재가 되었으니 위와 아래가 의지할 곳을 잃었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대장경 7천여 권을 얻어 돌아가는 배에 부쳤으면 합니다고 하니 8월에 정우 등이 돌아감에 대장경 전질함(全秩函)을 보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선사는 1393년과 1447년의 대화재에 이어 응인(応仁)의 난(1467-1468)에 의한 3번째의 화재는 매우 큰 피해를 입어 100여 년 동안은 부흥하지 못하고 계속 쇠퇴하다가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의 세력에 힘입어 부흥했던 사찰이다. 이 대장경도 응인(応仁)의 난 또는 그 이후에 없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일체경도 원래 고베의 선창사(禪昌寺)에 있던 것으로 1614년에 덕천가강의 명에 의해 남선사로 이관된 것이다. 대부분의 판본에 선창사라는 소장인이 찍혀 있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선창사의 일체경은 선창사가 창건된 1394년경부터 1435년 사이에 경안(慶安) 등이 구주에서 수집한 것이라 하므로, 여기에 포함된 고려대장경은 이 당시 이미 산질이므로 고려말 경에 건너간 대장경으로 보인다.
이 남선사의 일체경은 송판 370, 원판 2305, 고려판 1748, 일본판 310, 사본 1089첩으로 구성되어 한 질을 이루고 있는 혼합장경인데 모두 5822첩이다. 송판에는 촉판, 동선원판, 개원사판, 사계판 등을 포함하고 있고, 원판은 보령사판이다. 이 원판대장경 가운데는 고려 충선왕이 충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출한 사실을 밝혀주는 충선왕 4년(1312)의 인출기록이 붙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원판대장경도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원판대장경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남선사 소장의 개보칙판인『불본행집경』 권제19를 살펴보면 물론 동일한 판본이 없어 권제 53과 비교해 보니 자체가 조금 다르고 판식에 있어 판수제(板首題)가 개보판은 “『佛本行集經』 卷第十九 第二張 令字号”라고 되어 있는데 반해 초조본은 “『佛本行集經』 卷第五十三 第十八丈 基”라고 되어 있는 등 판식으로 봐서 그대로 번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동안 개보판과 초조대장경 가운데 현존하는 대반야경 권제 206과 권제 581를 비교해 보니 이 두 권은 자체(字體)가 같아 복각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앞으로 송판과 초조대장경 그리고 해인사 대장경 판본과 비교 검토로 초조대장경의 면모가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초조본은 해인사 대장경판본과 비교해 보면, 형태에 있어서는 『대반야파라밀다경』은 두 번째 장부터는 25항 14자 본인데 해인사본은 23항 14자본이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은 23행 14자인데 해인사 대장경판은 23항 17자본이다. 이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비슷하다.
초조본과 재조본의 각 판의 머리에 나오는 판수제와 또는 판미제와 그 아래에 병기되는 권차 ,장차, 함차의 표시가 다르다. 특히 판수제나 판미제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이 많고, 장차(張次) 표시에서 초조본은 ‘張’보다는 주로 ‘丈’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고 가끔 ‘幅’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해인사대장경은 권미제(卷尾題) 다음에 「丁酉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같은 간기가 있으나, 초조대장경은 간기가 없다.
초조본은 이체자(異體字)와 피휘결획(避諱缺劃)이 나타나고 있다. 피휘결획은 송 태조의 '匡胤'(兼避字; 恇 洭 眶 劻 筐), 송 태조의 아버지의 휘(諱)인 '弘殷'(兼避字 : 泓, 溵 ), 조부의 휘인 '敬' (兼避字 : 儆 警 驚 擎 竟 境 鏡 竸) 등이다. 그 가운데서도 조부의 휘인 '敬'자와 겸피자(兼避字)인 '竟'에 결획 되어있는 것이 비교적 많이 눈에 뛴다.
그리고 초조본은 권말에 역출기(譯出記)가 표시된 것이 많다. 해인사대장경에는 그것이 생략되고 있다.
3.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1) 고려대장경판과 관련기록
고려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4천 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八萬대장경板)’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 때 새긴 판을 ‘초조대장경판’이라 하는데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버려 다시 새겼기 때문에 ‘재조대장경판(再雕대장경板)’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판이라 하여 고려대장경판이라 하고, 해인사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해인사고려대장경판(海印寺고려대장경板)’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기 때문에 ‘고려 대장도감판(高麗大藏都監板)’이라고도 한다. 이때 최우가 주도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내용교정을 맡아 북송 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나라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를 바로 잡아 판각하였기 때문에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교정 작업에 대해서는 각 경권의 말에 붙은 교감기나 고려국신조교정별록30권(영인본 제 38책)에 상세히 적혀 있다.
고려 대장경은 전체 1,496종 6,568권의 경전이 천자문의 순서로 천(天)함(제1함)에서 동(洞)함(제639함)까지 수록되어 있다. 그 수록 내용은 고려 대장경 편성 목록인 대장목록에 실려 있는데, 대․ 소승의 경․ 율․ 논 삼장과 성현 전기류 등의 역사서와 역대 대장경 목록, 음의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대장경은 서기 67년경에 가섭마등이 축법란과 함께 최초로 한역한 42장경」 등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 외에도 서기 1054~1064년 사이에 일칭이 한역한 부자합집경」과 1090년경에 희린이 편찬한 속일절경음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대장경은 각 권의 끝부분에 “○○세 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라는 간기가 보이는데 이는 대장경 편찬과 간행이 국왕의 명을 받아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려 대장경의 조성 동기는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잘 나타나 있듯이 현종때의 조성동기와 같다. 몽고병에 의해 고종 19년(1232) 에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불력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시 새긴 것이다. 대장경 조조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에 의해서 전쟁의 와중에서 국론 분열을 타개하는 국가적 사업으로 주도하여 이룩되었다. 즉 최우가 최씨 정권에 저항하였던 화엄종을 비롯한 교종 세력 무마와 몽고군에게 방치된 백성들의 불만을 호국이라는 종교적 신앙심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로 설명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대장경 조성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불교 신앙심 고취와 문화민족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하여 대몽항쟁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대장경에 관계되는 기록은 동국이상국집,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에 보이는 아래의 자료가 있다.
① 대장경刻板君臣祈告文. 정유년(1237)에 행함.
"국왕 모는 태자, 공, 수, 백, 재추, 문무백관 등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끝없는 虛空界 시방의 한량없는 諸佛菩薩과 천제석을 수반으로 하는 三十三天의 일체 護法영관에게 祈告 합니다...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본도 또한 남김 없이 태워 버렸습니다... 여러 해를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버렸으니, 나라의 보배가 喪失되었습니다. 이제 재집과 문무백관 등과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이미 담당 관사를 두어 그 일을 경영하게 하였고... 맨 처음 창건한 동기를 고찰하였더니 옛적 현종 2년에 契丹의 임금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글안 군사는 오히려 송악성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글안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대장경도 한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글안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 제불성현 삼십삼천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양찰하셔서 신통한 힘을 주어 간악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東國李相國集 제25권)
② 손자 익배가 ... 분사대장도감이 대장경판각을 다 마치고 난 뒤, 칙명을 받아 이 문집을 판각하게 되었다. 마침 내가 다행히 분사도감의 이웃 고을의 수령을 하고 있어 家藏本 한질로 잘못된 곳을 바로잡고 유통케 한다.
(東國 李相國集 跋尾)
... 今者分司都監 雕海藏告畢之暇 奉勅鏤板
予幸守比郡 以家藏一本 讐校流通耳
辛亥歲(1251)高麗國分司大藏都監 奉勅雕造
校勘 河東郡監務 管句學事 將仕郞 良令 李益培
錄事 將仕郞 軍器注簿 同正 張世候
錄事 將仕郞 軍器注簿 同正 片洪湜
副使 晋州牧副使兵馬 轄試 尙書工部侍郞 全光宰
③ 왕이 城 西門 밖에 있는 大藏 板堂에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향을 올렸다. 현종 때의 대장경판본이 임진년(1232) 蒙古兵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왕과 군신이 다시 서원하고 도감을 세워서 16년이 걸려 완성하였다.
(高麗史 卷24 高宗 38年(1251) 9月 壬午(25日)條.)
④ 1317년(충숙왕4년)에 龍岩寺에 있는 대장경의 빠진 函,卷, 張의 보충을 위해 江華 板堂에 가서 印出해왔다.
(東文選 卷68. 靈鳳山龍岩寺 重創記)
⑤ 충혜왕 복위 원년(1340)에 백미 삼백석을 大藏都監과 禪源寺에 나누어 주라. (高麗史 권78,志 권제 32 食貨1. 後元年 三月 傳旨曰..以米三百石分賜大藏都監 禪源社.)
⑥ 晋陽公崔怡는 역대로 전한 鎭兵대장경板이 모두 狄兵의 불사른 바 되었으나 국가에 변고가 많아 다시 새로 만들 여가가 없었는데, 都監을 따로 세워 私財로 새긴 板이 거의 半이나 되어 邦家를 福利케 하였으니 그 功業을 잊기 어렵도 다. 嗣子인 侍中 沆은 家業을 계승하여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난을 제압하였고 대장경板에 재물을 施主하여 工役을 독려하여 告成의 慶讚을 갖게 되니, 中外가 福을 받게 되었고....(高麗史 卷129, 列傳 卷第42, 叛逆3, 崔怡)
⑦ 을사년(1245)에 진양공이 禪源寺를 새로 짓고 크게 낙성회를 벌리는데 대사를 청하여 법석을 지도하게 하였다.
이듬해 병오년(1246)에 대사가 정통한 중 2백을 거느리고 서울에 가 선원사에 머물렀다.
(東文選 제117권 臥龍山 慈雲寺 王師 贈諡眞明國師碑銘)
⑧ 최우의 서자 萬宗과 萬全이 무뢰배를 모아 문도를 삼아돈 모으기를 업으로 삼아 금. 은. 곡식. 비단이 거만으로 계산할 정도이며 ... 경상도에서 그들이 저축한 쌀 50여 만석을 백성에게 꾸어주고 이식을 거두어 들여....
(高麗史節要 제16권 庚子 27년(1240))
⑨ 지금 만종, 만전의 무리가 백성의 재산을 긁어 원망이 실로 대단하여 남방이 소요하니, 만약 적의 군사가 이르면 모두 반역하여 적에게 투항할 염려가 있습니다 .... 만전에게 귀속하여 이름을 항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高麗史節要 제16권 丁未 34年(1247) 夏 6月)
⑩ 崔禑가 사망하니 내외 都房이 모두 항의 집에 돌아가 옹위하였다. 최항은 복상한지 2일 만에 벗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항이 문을 닫고 들어앉아 그 아버지의 여러 첩들을 간통하였다.
(高麗史節要 제16권 己酉 36年(1249) 冬 11月)
⑪ 晏의 初名은 奮이니 ... 怡가 그 재능을 사랑하여 奏하여 國子祭酒를 除授하니 晏이 怡가 專權하여 남을 시기하고 해치는 것을 보고 그 해를 멀리하고자 南海에 퇴거하여 佛을 좋아하며 名山 勝刹을 遍歷하고 私財를 희사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半정도를 간행했다 ... 崔沆이 정권을 잡으매 불러 知文下省을 삼고 參知政事에 올렸다...
(高麗史 卷 100, 列傳 卷第13 鄭晏)
⑫ 정안을 지문하성사로 삼고..
(高麗史節要 제17권 辛亥 38年(1251) 春 正月)
⑬ 참지정사 鄭晏이 門生인 郎將 林, 내시 李德英, 威州副使 石演芬 등과 시국 일을 의논하면서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중한 것인데 崔令公(崔沆)이 어째서 사람 죽임을 이와같이 하는가."... 정공이 딴마음이 있어 나의 일을 비방하는 것이니. 장차 난을 꾸밀 것이라 하고 드디어 그 집을 적몰하고 백령도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사람을 보내어 물에 빠쳐 죽이었다.(高麗史節要 제17권 辛亥 38年(1251) 夏 5月)
⑭ 공민왕 9년(1360) 윤 5월에 “왜가 강화를 노략질하면서 禪源寺와 龍藏寺로 침입하여 300여명을 살육하고 쌀 40,000여석을 약탈하였다.(고려사절요 권 27, 공민왕 9년(1360) 윤5월)
⑮ 江華禪源社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龍山江에 행차 했다. (朝鮮王朝實錄. 太祖 7年(1398) 5月 丙辰(10일)條)
2) 판각 시기
고려대장경판에는 각 경전의 권말(卷末)마다,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판각한 연도가 새겨져 있다. 필자는 대장경 권말에 새겨져 있는 간행 기록을 모두 조사하여 년도 별로 분류해 본 결과 대장경판 판각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고려 대장경의 판각 시기에 관하여 살필 수 있는 자료로는 고려사」를 들 수 있다. 내용은 고종 38년(1251) 9월 임오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서문(城西門)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대장경板堂)으로 가서 현종 때의 판본이 임진년(1232) 몽고 침입 때 불타 버려 군신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우고 16년이 걸려 마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중심으로 그동안 대장경 판각을 고종 38년을 기점으로 16년 전인 고종 23년(1236)에 판각을 시작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 고려사」 기록은 대장경의 판각을 모두 마친데 대한 경축 의식을 행한 내용이므로 판각 기간 산출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려사』와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초조대장경이 몽고병에 의해 고종 19년(1232)에 불에 타서 없어졌고 정부는 서울을 강화로 옮겨 장기간 대몽항전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대장경은 고려 시대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므로 바로 대장경 조성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불교 신앙에 의한 일체감을 조성하고 몽고침입으로 불타버렸기 때문에 판각사업을 통해 대몽항쟁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황을 봐서도 바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장경을 판각 연도별로 분류하여 보면, 연도별 판각 양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해마다 일정량의 판각계획에 의하여 판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장경판각의 순서에 있어서도 뒤로 오면서 상당수 경전의 순서가 바뀌어 판각되었다. 또 같은 경에 있어서도 권차(卷次)의 순서로 판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도 판하본(板下本) 검토와 교정 그리고 필사한 후 다시 검토하고 각수에게 넘겨 초벌새김, 재벌새김, 마무리새김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마지막으로 인출하여 제대로 새겼는지 다시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 마구리를 부착하고 보관하는 곳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이러한 원문교정에서부터 각 단계별 작업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권별로 진행했을 것인데 각 과정 종사자의 능력이 동일하지 않았을 것이며 특히 잘못 새긴 것은 다시 새겨야 하는 등 각수(刻手)의 능력 및 판각작업의 진행속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권 이상으로 구성된 경에 있어서 경별(經別)로 같은 연도에 판각된 것만 아니라, 권별 순서가 바뀌어 판각된 것이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판각연도인 간기가 모두 권별(卷別) 간기(刊記)이기 때문에 간기는 곧 판각 완료를 나타낸 것이었다.
[표3] 간기를 통해 본 대장경판 판각 연도별 분류표
板刻 年度 |
板刻種 · 卷數 |
板刻 年度 |
板刻種 · 卷數 |
丁酉年(1237) 戊戌年(1238) 己亥年(1239) 更子年(1240) 辛丑年(1241) 壬寅年(1242) |
2種 115卷 42種 509卷 103種 304卷 74種 292卷 107種 296卷 176種 382卷 |
癸卯年(1243) 甲辰年(1244) 乙巳年(1245) 丙午年(1246) 丁未年(1247) 戊申年(1248) |
466種 1,317卷 286種 1736卷 280種 765卷 169種 453卷 32種 96卷 1種 1卷 |
刊記 無 |
78種 303卷 |
計 : 1,738種 6,568卷 | |
實際로 構成된 대장경 總計 : 1,496種 6,568卷 |
도표에 나타나 있듯이 판각한 것은 1237년에 2종 115권을 판각한 것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목록」 판각을 마지막으로 12년이 걸려 1,496종 6,568권을 완료하였다. 실제로 대장경판 판각은 1247년까지 마치고 1248년에는 대장목록을 마지막으로 판각은 1248년에 모두 마친 것이다. 고종 19년(1232)에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되었고, 더구나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곧바로 대장경판의 조성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사」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판각했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1233년부터 대장경 조성 사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경축 의식이 늦어졌던 것이었다. 아마도 경축 의식이 늦어진 이유는 당시 대장경 판각을 모두 마치고 난 뒤 대장경 판각을 담당했던 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을 강화도의 대장경판당으로 운반해야 했고, 또한 무엇보다 대장경 판각을 지원했던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고종 36年(1249)에 죽게 되고 그의 아들 최항이 집권하는 정치적인 과도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판각 기간의 잘못된 추정은 전래된 역사 자료의 결핍 탓도 있지만, 선학들의 선입견 때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장경 판각은 우선 대장경판을 새길 목재를 구하여 운반하고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충분히 건조시켜 판각용으로 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전국에서 경판 판각에 경험이 있는 각수(刻手)와 판하본(板下本)을 쓸 필사자(筆寫者)를 모집하여 일정한 체제로 통일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또한 수기(守其) 등이 중심이 되어 초조본· 송본․ 거란본․ 국내 전래본과 내용 대교 등의 작업은 1-2년의 준비 기간으로는 어림없는 거국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결국 1233-1236년의 판각을 위한 사전 준비 기간을 거쳐, 1237-1248년까지 12년 동안 판각을 모두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249년에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그뒤를 잇는 집권 과도기를 거쳐 1251년(고종 38)에 와서야 경축 의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3) 板刻 場所
고려대장경판각은 어디에서 했을까? 그동안 고려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 대장도감이 설치되어 선원사에서 판각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대장경판의 간기를 조사해 본 결과 1243년부터 대장경 판각이 본격적으로 왕성하게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대장경판은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만이 아니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분사대장도감판의 연도별 분류>
계묘년(고종30;1243) |
235(1), 237(1), 239(1), 240(1), 241(1), 242(1) 243(1), 245(1), 246(1), 248(1), 249(1), 250(1) 251(1), 252(1), 253(1), 254(1), 255(1), 256(1) 257(1), 584(10), 587(3), 588(1), 589(2), 648(19),799(2) 800(1), 801(27), 803(7), 804(2), 805(1), 1047(5),1048(1) 1050(31), 1052(16), 1,053(10), 1075(27), 1081(28) 38종 213권 |
갑진년(고종31;1244) |
801(1), 889(7), 941(9), 951(52), 960(9), 961(2), 962(1), 963(7), 968(10), 1053(5), 1054(6), 1055(10), 1056(5) 1065(11), 1066(4), 1067(1), 1081(1), 1258(8), 1259(4) 1404(86), 1421(1), 1426(3), 1427(2), 1428(2), 1431(1) 1435(3), 1436(1), 1437(1), 1438(1), 1439(1), 1440(1), 1450(1), 1463(1) 33종 258권 |
을사년(고종32;1245) |
79(1), 1049(1), 1055(1), 1261(1) 4종 4권 |
병오년(고종33;1246) |
79(1), 1050(1), 1261(20) 3종 22권 |
정미년(고종34;1247) |
1447(4) 1종 4권 |
계 |
72종 501권 |
*숫자는 경순서(經順)번호, ( )안은 권수 표시
이 72종 경전 가운데 전체가 분사판인 것은 51종이고 나머지 21종은 분사판과 대장도감판이 섞여 있다. 위와 같이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경은 모두 72종 501권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판각기간은 계묘년(1243)에서 정미년(1247)까지 5년간이었다. 이 가운데 경순 1404번 『법원주림』은 100권 가운데 12권이 대장도감판이고, 2권은 간기가 없고, 나머지 86권이 분사대장도감판으로 모두 갑진년(1244)에 판각된 것이다. 그리고 경순 799번 『생경』은 5권으로 구성된 경전인데 권 2와 3은 분사대장도감이고 권 1과 4는 대장도감판이며 권5는 간기가 없다. 경순 800번 『불설의족경』은 2권짜리 경전인데 卷1은 분사판이고 권2는 대장도감판으로 되어 있다.<사진 8 참조> 이러한 것은 판각장소가 동일한 곳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진8> 불설의족경- 권말 간기
분사대장도감 간기 표시-대장도감판을 오려내고 상감수법으로 분사를 끼워 넣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했을까?
그리고 경순 801은 70권으로 구성된 『정법염처경』인데 28卷이 분사대장도에서 새겼고 나머지는 모두 대장도감에서 새겼다. 왜 이랬을까 ? 이때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대장도감은 강화도에서 분사대장도감은 남해 등 지방에서 새겼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다. 또한 『불본행집경』은 60권으로 구성된 경전인데 전부 계묘년(1243)에 대장도감에서 판각되었다. 그런데 각 경판에는 대장경판을 판각한 각수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 『불본행집경』을 새긴 각수 ‘加大, 光呂’ 등 69인이 갑진년(1244)에 87권이 분사대장도감판인 『법원주림』 100권의 판각에도 함께 參與하였음을 보게 된다.
이 외에도 대장도감 간기의 경판을 상감수법으로 파내고 ‘분사’를 집어넣은 판이 상당수에 이러고 있다. 이러한 것도 동일한 장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진 9 참조>
<사진 9> 甲辰歲 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에서 ‘高麗國大藏都監奉’을 파내고
더 나아가 계묘년(1243)에 분사대장도감에서 『십주비파사론』 권6, 『생경』 권2, 『정법염처경』 권27을 새긴 克夫는 같은 해에 대장도감에서 『불본행집경』 권59, 『경율이상』 권 권36과 『정법염처경』 권55를 새겼다. 이러한 결과는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동일한 각수가 같은 장소에서 대장도감판과 분사판을 함께 새겼던 것이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그동안 대장경 판각장소가 선원사라고 잘못 알려져 오면서 많은 오류를 범했다.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願刹)이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에 임금이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 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기록으로 인하여 고려대장경은 선원사에서 판각을 했고, 이곳에서 보관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선원사는 고종 32년(1245)에 창건되어 그 다음해인 고종 33年(1246)에 진명국사(眞明國師)가 주지로 부임했던 사찰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대장경 판각이 90% 이상 완료된 때이었으므로 대장경 판각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다. 고려사에도 성의 서문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으로 가서 행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대장경을 봉안한 곳이 성 서문밖에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317년(충숙왕4)에 용암사에 있는 대장경의 빠진 함,권,장의 보충을 위해 강화 판당에 가서 인출한 사실<사진 10 참조>이나, 충혜왕 복위 원년(1340)에 백미 삼백석을 대장도감과 선원사에 나누어 주라고 한 기록 등에서도 대장경판은 선원사와는 관계가 없었고 별도로 판당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리고 공민왕 9년(1360) 윤 5월에 “왜가 강화를 노략질하면서 선원사와 용장사로 침입하여 300여명을 살육하고 쌀 40,000여석을 약탈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만일 대장경판이 선원사에 있었다면 무사할 수 있었을까.
<사진 10> 초조본 금광명최승왕경 권1 <1317年(忠肅王4年)에 龍岩寺에 있는 大藏經의 빠진 函,卷, 張의 補充을 위해 江華 板堂에 가서 印出한 것이 전래된 것이다.>
이 경전은 앞의 서문부분(어제 대당중흥삼장성교서)이 훼손으로 탈락되어 강화판당에 가서 1317년에 재조대장경판으로 새로 찍어 보완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기사는 선원사가 항구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용산강으로 실어 나가기 위해 옮겨 놓았던 곳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이었기에 교통의 요지인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에 위치했던 것이다. 지금 선원사는 일제 때 땅을 메운 곳이라 한다. 그리고 강화도는 당시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피난 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판각사업을 벌릴 형편도 아니었다.
기록 ⑥의 고려사 열전 최이 조를 보면, 강화정부는 대장경판을 판각할 여력이 없었고, 최이가 대장경 판각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최이는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였고, 진주 지방 일원은 그의 아버지 최충헌 때부터 식읍지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만종과 만전이 각각 단속사와 쌍봉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경상도에서 비축한 쌀 50만석을 대여하여 이식을 취하고 있었다.
기록 ⑪ 의 정안 조에서 정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고 하였다. 정안은 국자제주를 그만둔 고종 28년(1241)이후에 남해로 내려가 대장경 판각의 운영 경비를 부담하였던 것이다. 정안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동지역의 호족출신이었고 또한 최이의 처남이었다. 그리고 대장경판각이 끝나고 난 뒤 1249년에는 남해의 자기 집을 사찰로 꾸미고 일연선사를 맞아들였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렇게 남해는 대장경판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위의 <간기를 통해 본 대장경판 판각 연도별 분류표>에서 보듯이, 실제로 정안이 남해로 내려가서 대장경 판각에 참여한 1242년부터 5년 동안 전체 대장경 판각의 3분의 2 이상 판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대장경의 절반 정도를 간행했다는 내용은 정안이 당시 최우와 약속하고 이 사업을 주관했고 대장경 판각사업이 남해에서 행해졌음을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해인사 대장경판전에 100권으로 구성된 『종경록』이 보유판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데, 『종경록』은 1246년에서 1248년에 추가로 판각된 모두가 분사대장도감판이다. 이 『종경록』 권27에 “丁未歲(1247)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이란 刊記가 새겨져 있어 그동안 추정해 왔던 대장경판 판각 장소가 남해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사진11 참조> 더구나 이 『종경록』을 판각한 각수가 '崔同'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사진11> 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
이 '최동'은 갑진년(1244)부터 대장경판각에 참여하고 있음이 보이고 있는데, 『마하승지율』, 『십송율』, 『사분율』, 『선견율비파사서품』 등 갑진년에 10여개 이상의 대장도감판 경전을 판각하였고 같은 해에 분사대장도감판으로 『살파다비니비파사』 권2, 『아비담비파사론』 권23, 49, 『법원주림』 권10,29,49,72,95의 판각에도 참여하였던 각수였다.<사진12 참조> 다시 말하면 최동은 동일한 장소에서 대장도감판이나 분사대장도감판을 새긴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南海”였던 것이다.
<사진12> 각수 최동(崔同)
대장경판의 간기는 일정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라고 칙명을 받아 새긴다는 뜻이므로 ‘칙조조’를 줄을 바꿔서 배열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국 대장도감에서 분사를 집어넣어 판각하는 것도 글씨를 다시 써서 판각해야 하므로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대장도감이나 분사대장도감은 칙명을 받들어 판각하는 “봉칙조조”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함부로 판각장소를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판각 완료를 앞두고 엄격한 제약을 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고, 그것도 대장목록에 들어가지 않은 추가로 새긴 판이기 때문에 남해를 집어넣어 판각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宗鏡錄』을 새긴 '崔同'은 갑진년(1244)에 분사에서 판각한 『법원주림』 권49와 권95 그리고 『살파다비니비파사』 권2를 새겼고, 대장도감판인 『법원주림』 권72와 『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 권5, 『아비달마집이문족론』 권10의 판각에도 참여한 각수임이 확인되었다. 이 '崔同'이란 각수 덕분에 판각에서도 대장경판이 대장도감이나 분사대장도감 할 것 없이 모두가 남해에서 새겨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해인사 대장경판 목질을 조사한 학자가 대장경판 목재 가운데도 남해 근처에서 채취한 목재가 섞여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남해는 목재조달이나 경비조달 등이 용이한 곳이었고 대장경판은 남해에서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몽고의 침입으로 정부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전국토가 안심할 수 없었는데 남해는 섬이기 때문에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던 곳이고 무엇보다 최우와 정안에 의해 대장경 판각 경비를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아마도 대장경판을 새기는데 필요한 자금은 전반기에는 최우가 전담했을 것이고 후반기에는 정안이 판각을 책임졌을 것이다. 최우의 처남이었던 정안은 1241年 이후 남해에 내려가서 본격적으로 이 사업을 주관하여 판각을 완료한 것이다. 이외에도「집고금불도론형』권제4는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것인데 권말에 중교서(重校序)에 수기(守其)의 서문이 붙어있다.<사진13 참조> 이 교정기록을 보더라도 수기대사가 강화도 대장도감에서 대장경 교감 작업을 한 것이라는 것과 상치된다. 당시 전란중에 그것도 대장경판 판각을 교감하는 장소가 따로 있고 판각하는 장소가 여러 곳일 수가 없는 것이다. 수기대사는 남해 분사대장도감에서 진두지휘를 하며 대장경 내용을 교감하고 판각사업을 주관하여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사진13> 권말에 붙은 守其 序와 갑진세(1244)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
3) 流通
고려대장경은 고려후반기에 금은자 대장경을 조성할 때 저본으로 활용되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조선왕조의 배불정책과 일본과의 선린외교의 희생물로 활용되어 모두 일본으로 보내고 중종 때는 국내에 한 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으나 조선조 후반기 형편으로는 印出할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그 후 1865년, 1899년, 1915년, 1937년에 인출한 것이 각각 한 부씩 국내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19세기까지 대장경에 대한 연구기반이 형성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건너간 고려 대장경은 일본이 불교문화 국가로 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되었고, 일본이 세계 불교문화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1613년에 대장목록 3권을 시작으로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경도 北野経王堂에서 대장경 간행에 착수하였다. 이 대장경은 천태종의 종존(宗存)이 건인사의 고려대장경에 의해서 1614년부터 시작하여 1624년까지 刊行하였다. 현재 134부 1126첩이 현존하고 있다. 간기도 “甲寅歲大日本國大藏都監奉勅雕造”라고 고려대장경 간기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판식도 고려대장경의 형식을 그대로 하여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그 후 일본에서는 1669-1681년에 황벽판(黃蘗板) 대장경이 목판으로 처음 새겼다. 이 대장경은 중국 황벽 희운(希運)의 종풍을 계승한 만복사(萬福寺)의 개산조 은원(隱元)의 제자 철안(鐵眼)이 주관하여 명의 만력판을 번각한 것이다. 이 대장경은 영리목적으로 만들어진 사판(私版)이었기 때문에 매매가 쉽게 이루어져 일본 국내에 400질이나 보급되었다. 그런데 忍澂(1645-1711)이 황벽판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大乘本生心地觀經」을 읽다가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원인이 황벽판 대장경 자체에 잘못된 곳이 많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계기로 인징은 황벽판 대장경을 건인사 소장의 고려대장경과 대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건인사 고려대장경과 황벽판 대장경을 1706년부터 1710년까지 대교하여 『려장대교록 100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고려대장경에만 있는 64부 502권의 궐본보궐부(闕本補闕部)를 간행하고자 하였고, 그 가운데 25부 281권을 간행하였다. 이렇게 인징은 황벽판 대장경과 대교를 통하여 고려대장경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인징은 고려대장경 가운데서도 일체경음의」의 존재에 주목하였다. 그의 제자인 가연(珂然)이 적은 사곡백련사인징화상행업기」에 의하면,
당나라 장安 서명사의 혜림이 지은 일체경음의」100권은 명의 남장이나 북장도 수록되지 않아 건인사의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고 있었다. 인징은 이 일체경음의」를 읽어봤을 때 발이 부자유스러운 사람이 걸 수 있게 되고 장님은 볼 수 있게 되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아픈 사람은 명의를 만나고 굶주리는 사람이 먹을 것을 얻고 목이 마르는 사람은 물을 얻는 것처럼 너무 기뻐하였다. 그래서 곧 제자에게 일체경음의를 베끼게 하고 출판하고자 교열하였다.
이렇게 인징의 『려장대교록』이 19-20세기에 일본대장경 간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러나 인징의 대교사업에 의해 비로소 고려대장경이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고 황벽판대장경이 출판되기 이전부터 이미 고려대장경은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고려대장경 사경이 임제종 묘심사와 정토종 법연사· 증상사를 중심으로 종단차원의 대규모사업으로 行해지기도 하였다.
고려대장경은 19세기말부터 일본에서 신활자로 간행하게 된다. 그 첫 번째가 1880年-1885年에 축쇄판으로 간행된 대일본교정축각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고려대장경과 대교한 『려장대교록』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고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신연활자 5호로 간행한 것이다. 이 대장경의 범례에서 "이 대장경은 고려장을 저본으로 하여 송․ 원․ 명 3본으로 대교하였다. ... 고려본이 타본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에서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되어 1905년에 출판된 만자장경도 인징의『려장대교록』을 정본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의 범문학교실 高楠順次郞 등이 中心이 되어 동경 증상사(增上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1922年-1934年까지 13年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이다. 당시 유통되고 있던 축쇄판(縮刷版)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또한 일본 국내에 있는 필사본 대장경을 이본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이 대장경은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여 현재 세계 각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써 활용되고 있다. 이렇듯 고려대장경은 일본에서 간행한 대장경에 저본으로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일본에서의 고려대장경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02년 조선 유적을 조사하고 있었던 關野貞에 의해 해인사에 고려대장경판이 있다는 것을 보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일본에서는 중종이후에 고려대장경 판본이 없어 더 이상 보내 줄 수 없다고 했던 것이 고려대장경板도 없다고 알려졌던 모양이다. 緣山三大藏経目錄」이나 大日本校訂縮刻대장경緣起」에도 고려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關野禎의 고려대장경판이 있다는 보고는 당시 일본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켜 이후 고려대장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竺沙雅章, 落合俊典, 松永知海 교수 등이 관심을 갖고, 과거의 연구 성과를 다시 점검하면서 보다 심층적인 연구로 전환하고 있는 추세이다.
4. 마무리
초조대장경 판각사업은 현종 때에 판각 완료한 것이다. 의천이 지은 「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를 보면 수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현종연간에 5천축의 비장을 새겼다는 기록과 문고께서는 10만 게송의 경전을 새기셨습니다.”라는 기록으로 봐서 더욱 그러하다. 대각국사 의천도 현종때 대장경 판각과 문종때 판각한 경전을 분명히 달리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사』 기록에서도 현종 때 판각했음이 입증된다. 송나라에서 수입한 개보칙판은 현종 때 모두 판각 완료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문종때 거란대장경 수입후에 북송 개보칙판에 없는 것이라든가, 송 신역 경전과 본문에 탈루와 착사가 심한 것만을 가려 다시 새겨서 보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과는 그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대장경 판본 가운데 오래된 판본은 모두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여러 차례 간행을 하였지만, 국내에는 한 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지니고 있던 송판이나 원판대장경 까지도 15세기에 선린외교의 산물로 모두 일본에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일본에 가서 한역대장경 가운데 가장 뛰어난 대장경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명성을 지니게 된 것은 일본의 인징(忍澂;1645-1711)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전인 1613년에 목록을 간행하였고, 종존(宗存)이란 승려가 려장을 저본으로 경도에서 목활자로 찍었다. 이와 같이 인징 이전에도 고려대장경은 이미 소문이 나 있었고, 종존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대장경을 출판한 일이 있을 정도로 이미 17세기 초에 일본은 그 우수성을 알고 활용하였다
고려대장경을 연구를 위해서는 한역대장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다른 대장경과 비교연구가 필수이지만 비교할 만한 중요한 대장경은 일본이 소장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에서 최근에 영인본이 간행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어 비교 연구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고려대장경의 영인본이 발간된 이후 손쉽게 접근이 가능하게 되면서 학계에서 다양한 각도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 필자는 오따니대학 소장 고려대장경을 조사하였다. 이 대장경은 1381년에 염흥방(廉興邦)과 이색(李穡)의 발원으로 찍어 내어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다가 태종 14년(1414)에 일본국왕에게 보냈던 그 대장경이었다. 이 대장경은 오래 동안 일본의 지방신사에 있었기 때문에 동경 증상사(增上寺)나 경도 건인사(建仁寺)의 고려대장경에 비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지만, 현존 고려대장경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판본이었다. 이 대곡대학 소장 고려대장경은 한역 대장경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 版本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국내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장경 판각 때의 공방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였다. 각수들의 소속 조직과 작업장소로 보이는 공방이 음각되어 있었다. 아육왕경』 권1과 권6말에 ‘中房 英立'과 '東房 守聰' 등이 그것이다.<사진 14 참조>
<사진14> 아육왕 권1의 판각장소- 中房과 東房
이를 미루어 대장경 판각 작업은 최소한 동·서·중방 등 3방(房)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추가로 남·북방도 설치되어 판각용품 조달이나 교정 작업실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그리고 또 주목할 것 가운데 하나는 국내에 있는 고려대장경판본이나 영인본에 없는 內典隨函音疏」가 권481과 권490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내전수함음소」는 대장경의 계보와 음의(音義)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지만 국내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자료이다. 최근에 490이 새겨진 경판이 발견되어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고려대장경의 고판본에 대한 실태조사는 대장경이 지닌 정보 특히 그동안 몰랐던 여러 가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각 시대에 제작된 대장경은 그 시대의 모든 정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각도로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동안 고려대장경에 대한 일본학자들의 연구업적은 고려대장경이 가장 정확한 대장경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려대장경은 대일본교정대장경(卍藏經), 대정신수대장경, 縮刷藏 등 일본에서 출판된 대장경 거의 대부분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았고, 일본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타 대장경이 지니지 못한 대장경의 교정록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불법 수호를 위해 잘못된 것은 싣지 않는 전통은 진작부터 있었을 것이다. 현종때 초조대장경 조성이나 문종의 속장경 판각 때 터득한 지혜가 대각국사 의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고, 수기대사가 이어 받아 고려대장경판을 판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완전무결한 불전 결집을 위한 자세는 수기대사가 이어받아 오늘날 민족문화의 정수인 해인사의 대장경판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장경 천년 기념이라고 하면서도 고려대장경판에 담긴 정신이 무엇인지는 관심도 없고 왜곡되고 퇴색된 과거의 유물로만 치부되어 고려대장경판의 영광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명성에 머물지 말고 학자들이 손쉽게 활용 가능한 대장경으로 만들고, 고려대장경판이 역사적으로 책임져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기타 참고>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수기대사가 각 대장경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교정한 내용을 수록한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의 첫째 경전인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제1권 첫째 장과
마지막 『일체경음의』 제 100권 마지막 장.
간기 표시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가차없이
수정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간행한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의 간기(1237년)와
제일 늦게 간행한 대장경목록 권하의 간기(1248년)
송판대장경은 고려초조대장경을 탄생시키고, 초조대장경은 고려재조대장경을
만들고 그 역할을 다하였다. 고려대장경은 결국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을 탄생
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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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자료도 안 뜨는 군요. 파일을 첨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