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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처음 산을 찾기 시작하면서 환상적인 알프스의 만년설에 덮인 몽블랑 연봉들의 초등정에 관한 서적을 읽고 난 이후 나는 무한한 감동과 흥분에 쌓여 차차 마음속으로부터 알프스에 대한 동경심의 꿈을 키워오기 시작했다. 그후 수많은 날들을 갈등과 번뇌 속에서 산을 찾으면서 알프스로 향한 꿈은 날로 부풀어갔고 여러 가지 풀 수 없는 복잡한 방정식의 묘한 수식들은 자꾸 엉켜져 갔다.
7월 24일 (흐림)
그런데 지금 나는 파리행 점보기에 몸을 싣고 마지막 멀어져 가는 동해안의 기다란 해안선을 내려다보며 앞으로 닥쳐올 꿈 같은 알프스에서의 여름 휴가를 실감하기 시작한다. 비행기가 처음 고도를 높여 가면서 갖가지의 야릇한 감정들은 자꾸 흥분되기 시작하고 친절하게 제공되는 짜릿한 진짜 위스키의 향기 속엔 벌써 몽블랑의 만년설이 눈앞에 얼씬거린다.
7월 25일 - 7월 7일 (맑음)
175톤의 육중한 철판 덩어리는 드디어 두 번의 아침과 밤을 바꿔가면서 19시간의 지루한 비행으로 백야의 북극 상공을 가로질러 이곳 프랑스의 북쪽 샤를르 드골 공항에 사뿐히 안착 완료했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친절한 안내 방송이 쉴새없이 쏟아져 들여오는 웅장하고 복잡하면서도 어느 곳과는 편리하게 연결되는 공항을 벗어 나온다. 나는 곧장 시내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탑승했다.
몇칠전 먼저 이곳에 도착하신 남길이 형님한테서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 듣고 젊은 학생들이 즐겨(?)찾는다는 솔본 대학 주변의 싸구려 호텔을 첫날 숙소로 정했다. 불필요한 짐을 호텔에 모두 보관한 후 아직도 이른 아침의 파리거리를 산책한다. 그리고 차츰 거리에 인파들이 붐비기 시작할 때 파리에서 제일 크다는 장비점을 찾아 앞으로 등반에 필요한 일체의 장비를 몽땅 구입했다. 오랜 시간 장비 구입에 소비한 후 다시 복잡하고 알쏭달쏭한 파리의 번화가와 뒷골목을 밤늦게까지 쏘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침실로 오를 때 이 호텔의 관리인이며 시장님이신 주인 영감이 유창한 프랑스말로 몇가지의 시설물 사용법을 자상하게(?)일러 주셨다. 첫날을 이렇게 하나도 알 수 없는 프랑스 말과 무지하게 복잡하게 섞여있는 파리의 도로며 시차로 인한 항상 바보스런 상태의 어벙한 정신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 이후 이틀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모든 젊은이의 동경의 대상인 파리 유행의 도시요. 예술의 도시라고 지구 구석구석까지 소문나 있고 유명한 화가 치고 몽마르뜨의 골목과 거리의 낡은 건물을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가난한 사람과 창녀와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주제로 글을 쓴 거지작가 루이 필립이 거닐던 몽파르나스와 미라보 다리아래 차분히 흐르는 세느강이며 안소니 퀸의 노틀담 곱추를 생각나게 하는 그 은은한 종소리가 들리든 엷게 낀 안개 속의 노틀담 사원이 있는 곳 반 존슨의 품에 안겨 죽어 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내가 본 마지막 파리"에서부터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 등 영화로도 너무나 유명한 곳 쇼팽이 음악을 작곡하고 헤밍웨이가 고독을 달래며 모리스 르를랑의 루팡이라는 괴도가 신출귀몰하게 드나들던 곳... 파리는 역시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였다.
3일을 파리에서 보낸 후 7월 27일 밤 11시 40분 드디어 샤모니로 가기 위해 무지하게 빨리 달린다는 프랑스의 예쁘고 날렵하게 생긴 기차에 올라탔다. 이 기차는 밤 11시 40분 파리를 출발해서 다음날 9시쯤 되야 샤모니로 들어가는 조그만 도시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7월 28일(무지하게 맑음)
밤새 프랑스를 가로질러 800km를 달려온 열차는 샤모니로 통하는 조그만 도시 셍젤베에 도착하여 가쁜 숨을 몰아쉰 후 다시 새벽 안개 속으로 급히 사라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샤모니로 가기 위해 다시 등산열차로 바꿔 타야한다. 이내 출발하는 이 조그만 전동차는 예쁘고 연약해 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가파르고 험준한 산비탈을 신기하게 잘도 기어올라간다. 아스라한 낭떠러지의 계곡 위와 깎아지른 절벽의 모서리를 몇 번이고 삐각이며 꺾어 들더니만 마침내 장엄한 만년설의 몽블랑이 차창으로 가득 찬다. 손을 뻗으면 만년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엄청난 보송 빙하와 함께 차창 안으로 무너져 오는 듯하다.
이른 아침 샤모니에 도착한 예쁘고 조그만 전동차는 다시 삐각이며 침엽의 숲 속으로 꽁무니를 감춰 버리고 텅빈 아침의 대합실을 빠져 나온 우리는 곧장 E. N. S. A. (ECOLE NATIONALE DE SKI ET D'ALPINISM E)를 찾아갔다. 하얀 지붕이 둥글게 생기고 그 끝이 땅과 닿아있는 학교 건물에는 파란 눈의 예쁜 아가씨와 할머니가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짧은 불어와 손짓 발짓을 더한 국제어로 아가씨와 형님이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번인가 나를 쳐다보더니 그 아가씨는 외국인의 등록은 받지 않는다는 표현을 한다. 이유인 즉은 학교의 규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몇 년전까지 외국인 교육을 하였지만 외국인한테서는 아무런 교육효과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폐쇄시켰다는 설명이었다. 대신 외국인을 교육시키는 다른곳을 안내시켜 주겠다며 가이드 조합의 1주일 과정 교육코스를 알러 주었다.
이곳도 ENAS 부설이며 교육내용도 같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괴상하게 생긴 ENSA 건물을 빠져 나온 우리는 가이드 조합으로 가지 않고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티티(본명 트레샤메니)아저씨 집으로 갔다. 그곳은 샤모니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진 곳으로 조용하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며 담장은 없고 주변엔 잘 다듬어진 잔디가 있는 나무로 지은 낡은 2층집으로 테라스에 꽃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전형적인 알프스 지방의 가옥이었다. 그리고 지붕아래 벽에 걸린 통나무의 커다란 간판에는 르 샤모니아드(샤모니의 사람들)라는 희색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1층 홀안에는 그 동안 많은 우리나라 산악회가 다녀간 흔적의 페넌트가 걸려있고 우리가 찾아갔을 때 티티 아저씨는 외출하시고 집에 계시지 않았다. 잠시후 고물 왜곤 한 대가 빵빵거리면서 집 앞으로 다가서자 무식하게 큰 덩치의 독일산 순종 세퍼트 개자식이 나를 뛰어넘어 킹킹거리면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알 수 없는 친근감이 있는 티티 아저씨와 아줌마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우리의 얘기를 들은 아줌마는 손수 티티 아저씨의 자동차로 가이드 조합까지 우리를 태워 주셨다.
성당과 나란히 있는 낡은 석조 건물의 가이드조합 내부에는 온통 이곳 샤모니 지방의 침봉을 오르는 클라이머들의 멋진 사진들과 황혼에 붉게 물든 몽블랑 연봉들의 기가 막힌 사진들로 꽉 차있었다. 그리고 티티 아줌마의 안내로 교장과 몇 선생의 소개를 받은 후 교무실에서 간단한 면접과 서류 작성으로 입학 절차를 마쳤다. 다시 가이드 건물을 나온 우리는 샤모니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설악동과 같은 이 조그만 산골동네는 마침 몽블랑 등정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축제로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과 기념물로 홍수를 이뤘고 길가의 건물들과 높게 솟아있는 만년설의 침봉들은 한 장의 그림 엽서와 같이 아름다웠다.
오후에는 간단한 장비를 챙겨서 이곳보다 2800미터 더 높은 에귀디 미디를 올랐다.(3842) 이 에귀디 미디는 이곳에서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떠들기 좋아하는 노랑머리 독일 놈과 신경질을 잘 부리는 이태리, 자식 곁눈질 잘하는 일본 놈, 띨띨한 엽전하나 이렇게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와 늙은이와 애 그리고 주인 잘 만나 호강하는 개까지 범벅이 되어 탑승한 케이블카는 윙윙거리면서 역사를 빠져나가 점점 위로 위로 떠올랐다. 이윽고 케이블카는 단숨에 2800미터를 올라 에귀디 미디의 정상 위에 다 닿았다. 꽝하면서 케이블카의 문이 열어지고 차가운 만년설의 싸늘한 눈보라가 뺨을 때린다. 발아래로 끝없이 펼쳐지는 넓고 넓은 설원 뒤로 무지하게 높고 범죽한 암탑들이 무수히 늘려있고 하늘과 맞닿은 듯 구름을 뚫고 솟아있는 유럽의 지붕 몽블랑이 바로 눈앞에 닿아 있으며 토해내듯 쏟아져 내리다 멈춰 버린 듯한 빙탑과 크래바스의 집합체 보승 빙하가 바로 옆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오후를 에귀디 미디 주변에서 늦게까지 머무르다 심한 두통을 느껴 7시쯤 하산한 후 숙소로 돌아와 바로 취침한다. 아마 이것이 고소증세인가 보다.
7월 29일 (맑음)
학교 교육이 8월 4일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전에 마터호른과 아이거를 다녀오기로 했다. 불필요한 짐을 이곳에 모두 두고 아침 일찍 스위스로 가는 등산열차를 탔다. 국경이라고는 우리나라 도경계선보다도 간단한 곳을 지나 고속열차와 등산 열차를 4번 갈아탄 후 젤마트라는 마터호른이 있는 산골 마을로 향했다. 젤마트로 들어가는 깊은 협곡과 높은 봉우리는 아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골짜기일 것이다. 오후 3시쯤 젤마트에 도착하여 남길 형님이 알려준 호텔을 찾았으나 그 호텔은 이미 모든 방이 예약된 상태였다. 프론트 아가씨에게 갖가지 흉내로 빈방이 있을 다른 싼 호텔이 없냐고 물었더니 몇 군데 전화를 건 후 손끝으로 길 건너 언덕 위의 하얀 3층집을 가르치곤 그곳을 가보라고 하였다. 성당과 묘지를 지나 햇살이 반쯤 비켜 비치고 돌이 바닥에 잘 깔려진 골목길의 끝에 있는 이 호텔은 아침을 제공하는 제법 고급의 호텔이었다. 그런데 젤마트에서는 현재 유일하게 빈방이 있으며 싸다고 하는 곳이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침실로 올라와 보니 외부에서 보던 겉모양과는 달리 훨씬 고급의 시설을 갖춘 무궁화 3개쯤 되는 호텔이었다,
이곳 젤마트는 샤모니와 달리 골목이 좁고 언덕이 많으며 매연을 뿜는 자동차라고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무공해의 조용한 그런 동네였다.
교통수단이라는 바테리로 움직이는 장난감 같은 자동차와 조랑말이 끄는 꽃마차가 골목골목을 딸랑거리며 누비고 다니고 가옥들은 모두다 달력 속에서 보아오던 그런 그림같이 아름다운 형태의 것들이었으며 창문이나 테라스에는 예쁜 꽃들이 잘 놓여져 있고 사람들이 모이는 성당 앞이나 조금이라도 넓은 광장에는 어김없이 꼬마의 그 끝에서 뿜어 나오거나 예쁜 아가씨의 혀끝에서 뿜어 나오는 알프스의 맑고 시원한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집들의 창문들은 마터호른을 향해 열리도록 되어 있고 석양에 붉게 달아오르는 마터호른의 그 웅장함은 언제나 젤마트를 내려보고 있었다. 젤마트를 뒤로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기 꺼려하는 저 마터호른의 알 수 없는 매력은 언제나 젊은 클라이머들의 마음을 끝없이 유혹하기에 너무나 적당하다. 붉게 물든 만년설을 뒤로 태양이 사라지고 창가에 하나둘 불빛이 밝혀질 때 호텔로 돌아왔다.
7월 30일(맑음)
슈발체라는 이정표의 지시대로 그림 같은 논가의 울타리를 지나 울창한 침엽수로 빽빽한 비탈길을 가슴이 터지도록 올라서니 푸른 잔디의 언덕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곳의 잔디는 우리가 생각하는 솜처럼 부드러운 그런 것이 아니라 밤송이 같이 삐죽한 거칠기 이를 대 없는 고약한 그런 것들이다.
굵은 땀방울이 송충이처럼 등줄기를 기어다닐 때 빨간 스위스 국기가 팔랑이는 슈발체의 하얀 호텔이 눈앞에 나타난다. 호텔의 테라스에는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관광객으로 들끊고 슈발체의 길 건너편엔 알프스의 제2고봉 몬테로자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머리위로는 우뚝 솟은 마터호른 삿갓의 버섯구름을 덮어 쓴 채 좀처럼 정상의 모습을 나타내질 않는다.
허기진 배를 카페에서 케이크 한 조각으로 때우고 다시 훼론니 산장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만년설이 녹아 이뤄진 커다란 호수들이 여기저기서 파란 하늘과 희끗희끗한 마터호른을 거울처럼 비치우고 간간이 불어오는 빙하의 싸늘한 바람은 금방 몸을 움츠리게 한다. 마터호른의 훼론니 능선이 등줄기처럼 길게 뻗어져 내린 마지막 능선부터 가파른 돌무더기의 등산로는 시작되고 손에 잡힐 듯한 빨간 지붕의 훼론니 산장은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는다.
다리에 힘이 점점 풀려지고 호흡이 자꾸 가빠질 때 산장은 바로 머리 위에 올려 있었다. 산장 안에는 타오르는 벽난로의 주변에 금방 정상에서 내려온 듯한 몇몇 클라이머들이 등반의 진지함을 이야기하고 단체로 온 듯한 일본이 관광객이 시끌시끌 떠들고 있었다. 아무런 장비도 침실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이곳 산장의 규율로 스웨터와 빵조각을 들고 침상에 올라온 나는 창밖으로 물들어 가는 몬테로자의 황혼을 바라보며 초라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들오들 떨면서 잠을 청했다. 이곳 산장은 젤마트(1620)와는 1700의 고도차로 주변의 빙하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밤에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졌다.
7월 31일 (흐림)
이른 새벽 어둠 속에 해드 랜턴이 깜박이기 시작하고 부지런한 클라이머들은 벌써부터 출발을 시작했다. 기술적인 특별한 어려움 없이 선인을 올랐던 사람이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이 코스는 마터호른을 오르는 가장 쉬운 길이었다. 400미터쯤 올랐을 때 여명의 아침은 밝아오기 시작했고 나를 다시 한번 실망시키는 고소증의 괴로운 두통이 무거운 배낭에 한발씩 옮기는 걸음마다 욱신거리는 두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깨끗한 판정패의 마터호른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뒤로 돌아 곧장 슈발체까지 하산했다. 하산도중 신기하게 두통은 사라졌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여권을 산장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700미터 고도차의 슈발체와 훼론니 산장을 왕복한 나는 허기와 탈진으로 젤마트에 내려와서는 완전히 K. O되어 버렸다. 길가의 벤치에 걸터앉아 잔뜩 부풀은 발바닥의 물집을 터트리는 거지같은 내 모습이 무척 안돼 보였는지 지나가던 마음좋은 스위스 아줌마가 빵과 물을 주면서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아줌마는 핸드백에서 소독약을 꺼내 발라주고 처음 보는 나에게 알 수 없는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그 고마움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배가 부르자 밀려오는 졸음에 깜빡 눈을 붙인 것이 무려 2시간을 잠들어 버렸다. 잠을 깼을 때는 벤치 밑에 편안히 배낭을 배고 누워 있었고 주위에는 많은 관광객이 오가고 있었다.
비브람의 인나 부츠만 챙겨 신은 채 샤모니로 다시 가기 위해 절뚝거리면서 역으로 갔다. 원래 계획은 그랜델발트로 갈 계획이었으나 처음 신는 플라스틱 비브람의 덕택으로 엉망이 된 발로는 더 이상 등반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 스위스는 물가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었다. 샤모니의 숙소로 돌아오니 한국에서 온 일반 트레킹 관광객들이 20명씩이나 와 있었다. 오인환 형님의 안내로 유럽을 일주하는 그 분들은 내일 젤마트로 간다한다. 그분들이 준비한 저녁으로 오랜만에 고추장과 김치로 밥을 배불리 먹었다.
8월 1일 (맑음)
아침 일찍 젤마트로 가는 오인환 형님과 일행들을 역까지 배웅하고 하루종일 발을 치료하기 위해 호텔과 시내에서 쉬었다. 저녁에는 티티 아저씨가 선물로 주신 특수 포도주로 저녁을 하고 취해서 잠들었다.
8월 2일 (맑음)
새벽 일찍 스타킹을 2켈레 신고 트레이닝을 하기 위해 다시 에귀디 미디를 혼자 올랐다. 이제 두통은 없었다. 좋은 컨디션으로 영국에서 혼자 온 나 같은 놈과 함께 몽블랑 두타컬(4248)을 오른 후 하루를 그 주변에서 머물렀다가 밤늦게 하산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8월 3일 (맑음)
오늘 역시 교육에 대한 트레이닝으로 FLEGERE 산군 주변을 걸어 올랐다. 그리고 5시에 하산하여 내일부터 교육에 대비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교육 전에 이렇게 트레이닝을 한 이유는
첫째 잘 맞지 않는 이곳 기후와 음식 그리고 3000미터 이상의 높이에 정상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체력의 준비와
둘째 내가 등록한 교육과정이 높은 그레이드의 동반들로 구성되어 있는 크라스였고
셋째 남길 형님이 처음 이곳에서 교육받을 때 무지하게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충고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름 시즌에만 운영하는 이 학교는 3등급의 구분으로 학생들을 교육시킨다.
처음 등산을 시작하는 A급의 초급 크라스(여기에는 다시 +, -로 구분됨) 그리고 고급등반을 추구하는 B급 크라스 마지막 C급 크라스는 전문 클라이밍의 훈련된 학생을 교육시키는 전문 코스로 구분된다. 내가 등록한 크라스는 B+급(그레이드 4급-5급)으로 학생수는 총 16명이었다. 1주일 교육중 16명은 다시 강사 1명과 4명의 학생으로 구분되어 각각 교육받으며 교육 중에는 이렇게 1개조씩 모든 교장을 돌아다니며 행동한다.
잠시후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강사를 소개받은 후 1주간 교육의 교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불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유창하게 지껄이는 이 친구의 말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간간이 아는 단어가 튀어나오면 암호 해독가처럼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이야기의 줄거리는 끝나버렸고 그중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내일 아침 이곳에서 다시 보자는 이야기뿐이었다.
8월 4일(맑다가 뇌우를 동반한 소나기)
아침 일찍 장비를 몽땅 챙겨 가지고 약속장소로 나간다. 오전 교장은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LECOL DES MONTETS라는 곳으로 강사들이 준비한 그들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교장으로 갔다. 이곳은 산책코스의 평지로 크고 작은 갖가지의 볼더링 바위가 즐비한 곳으로 학생들의 암벽테크닉 테스트가 첫날 첫 시간 교육인 것이었다.
처음 그들이 시범으로 보여준 바위는 90도를 넘는 오버행의 멍키행을 민첩한 발과 손놀림으로 무용을 하듯 그곳을 넘어섰다. 암벽화도 아닌 그들의 운동화는 엄지발가락 코끝이 구멍이 나있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다시 90도의 미세한 크랙의 레이백 또는 턱걸이를 이용한 오버형태의 바위를 귀신같이 오르는 것 등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어려운 곳을 택해 학생에게 시키는 이유는 비슷한 실력들로 구성된 조편성의 테스트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등산열차가 지나가는 철교 위에서의 추락 훈련이었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높이가 25미터쯤 되는 교각 위에서의 추락으로 고도감에대한 공포심을 없애주는 것과 담력 및 확보법을 동시에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번씩 2가지의 추락형태(수직 추락과 원추운동을 하는 수평 추락)를 모두 실시하였다. 그들의 교육법은 특별한 이론 교육이 없이 그때그때의 질문과 시범 그리고 자세한 설명으로 진행되었다. 첫날은 이렇게 큰 등반이 없이 간단한 테스트로 끝마쳤고 내일부터는 실제의 등반으로 교육이 시작된다.
8월 5일 (오전 비)
오늘부터 우리 조는 프랑소와라는 학생 그리고 스테판, 여학생 안느 나해서 4명이 한 조로 구성되었고 강사로는 쟝이라는 전문 프로가이드였다. 안느라는 이 여학생은 보기와는 달리 5급의 바위를 배낭을 매고 선등하는 우먼파워로 우리나라의 실력 있는 산쟁이들을 빰칠 정도다.
아침 일찍 성당 앞에 모여 어제와는 반대편인 샤모니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정도 벗어난 LE FAYET라는 암벽교장으로 갔다. 이 암장은 무수히 풍부한 홀드와 많은 스텐스의 면을 가지고 있는데 평균 각도가 100도는 될 것이다. 처음 등반은 쟝이 선등으로 이중 자일로 확보하여 등반하였고 후등으로 동시에 안니와 프앙소와를 등반시켰다. 다음은 스테판이 다시 다른 자일로 선등하고 나는 스테판과 한파티로 후등으로 올랐다. 이 방식은 알프스 등반의 키 포인트인 속전속결의 등반 방식으로 나중에는 선등과 후등을 교차로 하는 격시등반의 형태이다.
선등 다음인 후등은 약 80미터의 등반을 한번에 해치우므로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는 팔의 힘을 모조리 빼앗아 가는 어려운 체력 등반의 연속으로 4급+의 80미터 정도였다.
오후에는 교장을 옮겨 보송 빙하로 갔다. 이곳에서는 픽켈로 오르는 고전 등반법의 모든 것과 크레바스 추락자의 구조 그리고 설벽에서의 확보법을 강의하였다. 2중 확보를 강조하며 많은 기구를 사용하여 추락자를 구조하여 추락자를 끌어올리는 독특한 구조법은 숙달되니 않은 사람에게는 다소 위험할 뿐 아니라 매우 복잡하였다. 하지만 한가지는 꼭 익혀 두어야 할 필수적인 것이었다.
8월 6일 (맑음)
오늘은 새벽 일찍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케이블카로 INDEX(2595)를 올라 다시 설원을 거슬러 오른 후 바위와 눈과 얼음이 섞인 LA FACETTE DES CROCHUES라는 곳으로 높이는 약 2900정도이고 간혹 낙석이 있으며 동계장비를 갖추고 등반해야 하는 이곳은 전형적인 알프스의 벽 등반이었다.
출발지점은 설원이어서 크게 어렵지 않지만 오르면서 점점 좁아지는 침니와 눈 쌓인 좁은 스텐스는 투박한 비브람과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오르기는 무척 어려웠다. 등반시간은 약 5시간이 소요되었고 하산은 릿지로 이어지는 몇 개의 봉우리를 돌아 약 400미터의 가파른 설사면으로 그리세딩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하산 도중에 설사면에서 활락 정지와 확보법 및 스키 기본자세를 익혔다. 교육이 끝난 후 매일 가이드 조합에서 그날에 대한 등반평가와 다음날 등반에 대한 교장 브리핑이 있었다.
8월 7일(맑음 : 지독하게)
오늘 교장 역시 샤모니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1500미터 정도의 험준한 비탈을 걸어 오른 후 400미터 정도의 암벽을 등반하는 L'AIGUILLE DE PRAG TORRENT는 빈번한 자연 낙석과 거친 푸석 바위로 좁은 크랙과 80도 정도의 슬랩이 간간이 이어지는 쉽지 않은 4급+의 바위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등반시간은 6시간이 소요되며 정상은 몇 개의 봉우리가 릿지로 이어진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다른 여러 팀이 군데군데 등반을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출발을 선등한 나는 홀수 핏치를 계속 선등했다.
첫 핏치는 선인 B 침니보다 좁은 침니로 시작되며 2핏치는 슬랩 등반이었다. 내가 후등으로 오르는 4번째 핏치에서는 벽을 우측으로 6미터 정도 트래바스한 후 머리 위로 이어지는 좁은 리스를 레이백으로 오르는 곳이었는데 앞팀의 후등자가 프랜드 회수의 실수로 바위를 굴렸다. 이때 낙석이라는 고함을 출발하라는 신호로 잘못 알아들은 나는 하마터면 구르는 바위와 함께 3핏치 테라스 아래로 곤두박질 칠 뻔한 아찔한 순간을 넘겼다. 오른쪽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떨어진 바위는 2핏치의 테라스에서 "퍽"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면서 추락의 끝을 마쳤다.
8월 8일 (눈)
6시 30분 에귀디미디를 오르는 케이블카 역에서 모였다. 오늘 등반을 하는 이곳은 에귀디 미디를 케이블카로 오른 후 VALLEE BALANCHE의 무지하게 넓은 설원을 건너 몽블랑 두타킬 동벽의 무수한 침봉과 눈과 바위가 늘려있는 POINTE LACHENAL이라는 곳의 벽 등반이다.
몇 개의 크래바스를 건너 뛰어 설원을 건넌 후 도착한 포인트 나서날은 반지르한 화강암으로 손가락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좁은 크랙으로 출발된다. 역시 격시 등반으로 2파티가 오르며 오늘 나와 한 줄을 묶은 파트너는 안느였다. 그녀는 설원을 안자일렌으로 건너오면서 줄곧 뭐라고 일러주었지만 무슨 뜻인지 아직 하나도 모르겠다.
첫핏치를 선등한 나는 무거운 배낭과 불편한 비브람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안느가 2핏치를 마무리했을 때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가득 찼고 먼저 오른 쟝과 프랑소와는 가스 속에 사라져 버렸다. 이내 눈밭이 휘날리기 시작하면서 기온은 바로 영하로 떨어져 버렸다. 단단한 화강암의 홀드 끝에는 눈이 쌓이기 시작하고 5핏치를 끝냈을 때는 손이 시러워 도저히 등반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6핏치, 7핏치는 5급의 미세한 크랙의 레이백 등반이었고 그리고도 앞으로 6핏치쯤은 남아 있었다. 이런 날씨로는 아무래도 힘든 등반이 될 것 같다. 암벽이 끝나면 그 위에 60도의 설벽이 300미터 가량 이어지는 빙벽 등반으로 몽블랑 두타길의 정상으로 이어진다.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안느와 불어를 하나도 모르는 나하고 한파티로 등반하는 시간은 당연히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잠시후 먼저 오른 쟝이 하강을 하면서 돌아내려 가자고 한다.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에 이곳 기후를 잘 아는 그는 등반을 포기했다. 80미터의 하강 줄을 3번 설치하여 출발지점으로 내려왔다. 우리가 되돌아 내려온 5피치는 아직도 남은 등반길이에는 4분의 1에 불과했다.
호텔에 돌아오니 파리에서 남길 형님과 나와 등산학교 동기인 파리에 유학 온 이해우라는 아가씨가 저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오늘은 몽블랑 등정 200주년 날이어서 동네에서 불꽃놀이의 불바다로 밤늦게까지 난리였다.
8월 9일 (맑음)
오늘 등반은 아주 간단한 암벽의 4코스를 등반하는 것을 끝으로 1주일간의 교육을 마무리 지었다. 오후 2시쯤 등반을 끝내고 학교에 모인 학생들에게 1주일간 교육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겪은 이곳 샤모니의 등반에서 다같이 알아야할 점등을 들려주고는 모든 것을 마쳤다. 학교를 나와 우리 조 4명은 다시 카페에 둘려 앉아 교육동안의 서로의 의견과 느낀 점을 의논하고 주소를 나누어 가졌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로부터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8월 10일 (뇌우 소나기)
오늘은 원래 몽블랑을 혼자 오를 계획이었으나 좋지 않은 날씨로 등반을 포기하고 기이양 암장에서 그 동안 숙소에서 사귀어온 친구들과 볼더링을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3편의 산악영화를 감상한 후 밤늦게까지 카페에 모여 앉아 잡다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8월 11일 (눈발소나기)
아침 남길 형님과 유재원 형님 묘지로 참배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몬테베에 올라가 시간을 보낸 후 숙소로 돌아와 아쉬운 작별의 샤모니를 떠나기 위해 짐을 챙겼다. 생벨배로 가는 등산열차에 올랐을 때 이별의 슬픔으로 하늘에서는 작별의 눈물인 듯 거센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8월 12일(맑음)
파리에 도착하여 역앞에 있는 싸구려 숙소를 정한 후 장비점을 찾아 면세로 인한 잔여금을 환불받고 몽파르나스의 어느 카페에서 마지막 밤을 파리 야경을 내려보며 그 동안의 휴가를 정리하였다.
8월 13일 (구름 위)
10시 40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갔다. 그 동안 모든 면으로 도와주신 남길 형님에게 무엇보다도 감사드리며 형님과 악수를 나누고 이곳에 무한한 미련을 남겨둔 채 게이트를 빠져 나와 좌석번호를 찾아 창가에 앉았다. 돌아오는 기내에서 그 동안 20일간의 날들을 수첩에 정리하면서 모든 것을 그저 어떤 휴가의 추억으로만 접어두기로 한 채 마냥 공짜 술만 시켜 들이 마셨다. 김포에 도착해서 면세구역에 들어서니 문밖으로 기활 형님의 얼굴이 얼씬거린다. 아직도 덜 깬 술에 정신은 어벙쩡하고 푹푹 삶는 날씨에 스웨터와 비브람을 신고 픽켈을 꼽은 내 꼬락서니가 이상한 듯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안내양이 말을 건넨다. "아저씨 덥지도 않으세요?"
첫댓글 체르마트 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