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19일 금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병이 들어 죽게 된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셨다며 주님의 표징을 보여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8,1-6.21-22.7-8
1 그 무렵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2 그러자 히즈키야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3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4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렸다.
5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6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21 이사야가 “무화과 과자를 가져다가 종기 위에 발라 드리면,
임금님께서 나으실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22 히즈키야가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7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8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그러자 아하즈의 해시계 위에 드리워졌던 해가 열 칸 뒤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두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어디에도,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비난의 근거로 삼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한 규정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또는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분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주님’이요,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 마음을 잊어버리게 될 때,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장 작은 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섬기기 위한 봉사가 이웃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도구로 쓰입니다. 하느님과 더욱더 일치하고자 하는 그분의 특별한 부르심이 하나의 권력이 되어 함께 봉사하는 이들의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지위와 직분을 어느 순간부터 강조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입에서 나가는 말로 자꾸만 상처와 갈등이 생긴다면, 성체 앞에 앉아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봉사하고 있는 그 일의 주인도,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주신 분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모든 일과 규정, 계명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만나는 데 우리가 봉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본인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이 평가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것을 넘어 학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틈만 나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자책하고 업신여깁니다. 이는 겸손의 덕도 아니고 심각한 병리 증세입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만 자화자찬입니다. 틈만 나면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으니 주변 사람들이 정말이지 피곤합니다. 더 심각한 증세가 있으니 과대망상 증세입니다. 존재 자체로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사이비 교주들,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체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 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들로부터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 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 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심금(心琴)’을 울리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그 소리가 크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장엄하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 산보 중에 목회자의 자기 고백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목은 ‘성도의 수준이 목회자의 수준을 정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감독이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도 관객이 외면하면 감독은 그런 작품 대신에 관객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최고경영자와 같은 목회자를 초대하는 대신에 말씀의 선포자를 초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최고경영자는 성공신학과 긍정의 신학으로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굳어있는 양심을 깨우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공동체가, 목회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계급주의가 드러나는 교계제도를 반대하며 개혁교회를 세웠지만 교회가 직분과 직책으로 계급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자기성찰과 같은 말씀이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판소리를 배우는 수련생이 폭포수 아래에서 연습하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득음의 경지에 오르면 폭포 소리를 뚫고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명창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폭포 소리의 파장과 명창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성악 경연대회는 예선을 치를 때는 피아노 반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예선을 마치고 본선에 오르면 이제 70명이 넘은 악단의 연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본선에 오른 경연자 중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뚫고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연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영예의 대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00년을 이어오는 사찰의 예불 소리를 녹음하고, 수천 명이 참석한 예배의 소리를 녹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스님의 예불 소리가 수천 명의 예배 소리를 압도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으면, 교회가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세상이 내는 파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룩함을 상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내는 파장에 교회의 소리가 묻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중에 심금을 울리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언변이 화려하지 않아도, 크게 내세울 능력이 보이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신부님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넘치지만 섬기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던 그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렸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분은 늘 그러하시니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
그 사이에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은 제쳐놓고
애꿎게 그분을 다그쳤지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과 바리사이들
그 사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부끄러운 낯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지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우리에게는 눈길조차 안 주고
선생님께 이 난리를 치는 거지?’
당신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
그 사이에
그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빌미 삼아
당신을 옥죄려는
바리사이들의 속셈을 아시고
괜찮다는 듯이
제자들에게 웃음 지으시고 나서
바리사이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분도 사람인지라
멀게 느껴지는 바리사이들보다
가까이 있는 제자들을 두둔하셨을까
그게 아니야
제자들은 배고프고
바리사이들은 배불렀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야
제자들은 보잘것없고
바리사이들은 잘났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야
제자들은 그렇게 늘 당해왔고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늘 누려왔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말이지
어설프게 당신의 힘에 기대어
당신의 제자들이
바리사이들이 하듯이
작은이들에게 거들먹거린다면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이 아니라
작은이들의 편에 서실 거야
그분은 늘 그러하시니까
오늘의 성인
성 아르세니오(Arsenius)
신분 : 부제, 은수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354-450년
같은이름 : 아르세니우스, 아르쎄니오, 아르쎄니우스
성 다마수스(Damasus) 교황의 추천에 따라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자기 자녀들의 선생으로 로마(Roma)의 부제인 성 아르세니우스(또는 아르세니오)를 임명하였다. 그는 10여 년 동안을 궁중에서봉사한 후 395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수도자와 함께 살았다.
테오도시우스의 서거 때 그는 스케트의 황야로 숨어들었으며, 드와프의 성 요한이 만든 은둔소 관습을 익혔다.
그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보다 고독하고 쓸쓸한 은둔소 생활을더욱 좋아 하였다.
434년에는 스케트를 떠나야 했는데, 그 이유는 야만인들의 침공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멤피스의 트로에(Troe) 바위 위에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트로에로 돌아가 운명하였다.
(注:Arsenio '아르세니오'는 그리스에서, 남성적인, 강함의 뜻)
성 다마소 교황의 추천으로 테오도시오 대제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임명된 성인은10여년 동안을 궁중에서 봉사한 후, 395년에 콘스탄티노블을 떠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수도자들과 함께 살았다.
테오도시오가 죽은 다음 그는 스케트(쉐떼)의 광야로 숨어 들었으며, 드와프의 성 요한이 만든 은둔소 관습을 익혔다.
그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보다 고독하고 쓸쓸한 은둔소 생활을 더욱 좋아 하였다 .434년에는 스케트를 떠나야 했는데, 그 이유는 야만인들의 침공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멤피스의 트로에 바위 위에서 10년동안 고행하면서 살다가, 다시 트로에로 돌아가 운명하였다.
성녀 루피나 (Rufina)
활동년도 : +287년경?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루비나
에스파냐의 세비야(Sevilla)에서 순교한 성녀 유스타(Justa)와 루피나는 이교의 우상숭배를 거절함으로써 지방 관리에게 끌려갔다. 그들이 용감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니, 관리는 고문대 위에 두 성녀를 놓고 양쪽에서 갈고리로 고문하다가 끝내는 화형에 처하였다고 한다.
성녀 마크리나 (Macrina)
활동년도 : 330-379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같은 이름 : 마끄리나, 마크리나
성녀 마크리나는 같은 이름의 성녀 마크리나(1월 14일)의 손녀딸이자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 그리고 세바스테(Sebaste)의 성 베드로(Petrus, 1월 9일) 형제의 큰 누이였다. 그녀는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12세 때에 약혼을 했으나 약혼자가 죽음으로써 그녀는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하였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녀와 모친은 폰투스(Pontus)의 가족 영지로 가서 공동체를 이루고 기도와 관상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이 공동체의 우두머리였다.
복녀 스틸라 (Stilla)
활동년도 : +1140년경
신분 : 동정녀
지역 : 아벤베르그(Abenberg)
같은 이름 : 스띨라, 쓰띨라, 쓰틸라
스틸라는 독일 뉘른베르크(Nuremberg) 교외 아벤베르그 태생으로 그 지방의 백작 딸이었다. 그녀는 자비로 집 가까운 언덕에 성당을 세우고 사도 성 베드로(Petrus)에게 봉헌하였다. 그녀는 매일같이 그 성당에서 기도하고 묵상했으며, 밤베르크(Bamberg)의 주교인 성 오토(Otto, 7월 2일) 앞에서 동정서원을 발하였다. 그녀는 부친의 집에서 수녀생활을 시작했고, 곧 수녀원을 세우려고 동분서주 하던 차에 운명하고 말았다. 후에 그녀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927년에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