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馬島(대마도) : 대마도
섬넓이는 695㎢ 규모의 울릉도 10배 . 제주도의 5/2 정도 되는 열도.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부산에서 49.5km에 있어 사실 한국과 더 가깝다. 일본 규슈(九州) 본토와는 132km 떨어져 있다. 일본에서는 쓰시마섬이라고 한다.
상도(上島), 하도(下島)의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 크기는 남북 82km, 동서18km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를 볼 때 두 마리의 말이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지명이 대마(對馬)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마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朝貢)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후 이곳을 근거지로 왜구가 자주 출몰하자 조선 세종 때 이종무가 원정(遠征)을 하기도 했다.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이 열도는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였다. 1274, 1281년에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주민들이 대량학살당했다. 러시아는 1861년에 이 지역의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동월(董越)이 영종의 명을 받아 조선 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 ‘조선부(朝鮮賦)’에 나와 있는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
이즈하라항 국제여객터미널
부산에서 바다의 제트기인 코비호를 타고 부산→이즈하라 까지 약 1시간 45분정도 소요됩니다
부산→히타카쓰는 1시간 10분 정도 밖에 안걸려요
나머지는 우측은 섬을끼고 35분을 계속 달리니 얼마나 큰지 감이 오시죠
이즈하라항의 주유소가 시발점입니다
도착하여 점심, 신사, 쇼핑, 면세점 이 골목만 왕복 4번한 기억밖에 없어요
대마도는 중간중간 신사가 너무 많아요
하치만구 신사 (팔번궁신사)
대마도의 중심 이즈하라에 위치한 하치만구 신사.
도리이라고하는 문을 양쪽을 지키는 수문장이 "고마 이누"라고 하네요
풀이하면 고려 개를 신사에 둔것이 참 이상합니다
천신(쳔진) 신사
각신사마다 모시는것이 모두 다른데 하치만구 신사는
어부와 병사 각 신사마다 모시는 들을 모시는 신사입니다
앞은 천신 신사, 저쪽은 대마도 도주 아내인 마리아의 신사
수령이 상당히 오래된 삼나무
우리나라 마한, 백제인들이 많이 들어가 살던곳이라 전하네요
오늘의 가이드인 백 상이 열심히 설명하네요
대마도 영주가 타던 마신이라고......
동전 투입하면 종이돈이 나온단다
길은 부적으로 몸에 지니고 흉한것은 나무에 매달고 두번 손뼉치고 염원을 빌면 된단다
하치만구 신사
고마 이누 상
대마도의 시내는 모두 600CC이하 경차의 천국이다
대마도 천연기념물
일본 본토에는 없고 대마도에만 서식하는 멸종위기의 동물
우리나라 살쾡이종류 " 야마네코"
하천정비는 너무 잘되어 있었다
점심 밥상(밥, 된장국외 4찬)
물이 오염되지 않아 바다고기가 올라와 노닌다
역사민속 자료관
고려문
14~15세기 왜구의 시대를 거쳐 소오(宗)씨가 조선 무역의 실권을 독점해 갔던 무로마치시대(1338~1578)에 일본과 조선은 대체로 평화로운 외교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때의 대마도주는 소오 사다모리로서 거처를 사가에 두고 조선과 활발히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평화로운 양국관계에 있어 조선국왕은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씨를 일본국왕으로
인정하고 1428년 이래 수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정식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통신사의 시초)
그러나 이러한 우호는 1590년 이후 일본국내외의 사정에 의해 중단되어버립니다
조선통신사 기념비
조선통신사는 조선정부의 최고 관료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화려한 악대, 소동, 무인, 통역관 등 300명~500명에 달하는 대사절단이었습니다. 에도로 향하는 일행의 접대역을 하명받은 각 지는 물론,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행렬의 현란함에 감탄하였습니다
성신지교린 비( 아메노모리 호슈 인물 )
엄격한 쇄국정치하에서 에도(도쿄)에 들어올수 있었던 유일한 외교사절 그것이 조선통신사였습니다 이러한 사절을 맞이하는 일본측의 대마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였습니다
1719년 제9차 통신사의 제술관인 신유한과 아메노모리호슈와의 교류는 특히 유명하다고함
<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진실을 가지고 교류하는것>이
<성신(成信)의 교류>임을 강조한 호슈의 외교철학은 현대에 와서 빛을 발한다고 함.
조선국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우호적정책을 이어받은 에도 막부에 대해
1811년까지 약 200년동안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보내 왔습니다
여행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외교부에서 요즈음 시세로 환산한 조선통신사 비용은 28억정도랍니다
가네이시 성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일본의 한민족 말살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왕녀인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대마번주의 아들 소 타케유키가와 정략결혼을 하여 비운의 삶을 살았다
(2012년 9월 7일 대마도 땅찾기 기념)
여행소감 : 1. 대마도가 울릉도의 10배로 너무나 컸다
2.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우리 영토이었다
3. 이승만 대통령께서 1948년 1월 신년사때부터 끓임없이 영토반환을 요구했어야 했다
4. 김대중정권 이전의 한일 어업협정에 의한 한일 배타적어업수역/독도와
광할한 대화퇴어장, 그리고 제주도 남쪽의 어장이 한국것이었다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으면서 일본이 독도에 대해 우길수있는 빌미제공)
5. 한 나라의 국권은 부국강병만이 주권과 관용이 있을뿐이다.
역사적 고증 :
그리고 먼 삼국 시대 때,신라의 지증왕이 우산국(독도,울릉도)을 정벌하고..
프랑스 학자가 만든 지도에도 독도를 한국영토를 표시하고..
17세기 말 일본 정부는 독도를 우리땅이라고 인정했고..
19세기 말 대한제국 정부는 독도는 대한의 땅이라고 결정.
(증거는 아닌)1905년 독도를 일본이 강제 편입 시도.
1946년 초 연!합!국!이 독도를 한국 영토라 인정.
대마도는 부산에서 49.5km로 일본에 후쿠오카보다 더 가깝다.
(후쿠오카와 대마도의 거리:132km)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고 표시
조선 전도 중 가장 오랜된 전도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를 조선땅이라고 표시했고
대마도는 삼국 시대, 후삼국 시대, 조선 세종때 이종무가 원정까지가 우리 땅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에는 대마도를 일본에 땅이라고 표시. 일본의 메이지 유신후.강제로 대마도를 훔쳐 편입해갔다.
첫댓글 잘보네요 저도 능력되면 가보고 십지만 .....잘 보앗습니다
독도도 아직 못 가보았네요
먼저 우리나라땅 보고선 대마도 접수하러 가야겠지요
대마도도 우리땅
전문 프로 여행가의 수준이 느껴집니다. 잘보고 잘느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