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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3세 지음 / 박양운 옮김 / 갑진문화사
1. 작가소개
- 지은이 : 교황 요한 23세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알프산 자락의 베르가모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이며 13형제 중 네번째로 출생했다. 1904년 사제로 서품되어 주교 비서 겸 신학교 교수로 일했다. 1925년 주교가 되었으며 불가리아에서 10년간 머물렀다. 1935년 터키를 거쳐 1944년 프랑스 교황대사로 임명되었다. 1953년에는 추기경, 베네치아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1958년 교황 비오 12세에 이어 261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이때부터 교황 요한 23세로 불렸다. 6년간의 재임기간이었으나, 가톨릭의 교회 쇄신과 현대에의 과감한 적응을 지향한 표방하였다. 1959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고, 1963년 4월 11일 회칙(回勅) ‘지상의 평화’를 발표, 세계평화 ·남북문제 ·노동문제 등 현대 인류사회의 여러 가지 현안 해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63년 6월 3일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2000년 9월 1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가 동시에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성인으로 선포된다.
- 옮긴이 : 박양운
1924년 강원도 문막 태생으로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 신학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가톨릭대학 신학부 기초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종교학과에서도 교수를 역임하였다. 미국 포담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도미하였다. 주요 저서로 『가톨릭 신학 개설』『가톨릭 신학의 어제와 오늘』『그리스도교와 힌두교·불교』『바티칸 공의회 신학 개설』『학생 교리』『토마스 복음서와 법화경의 비교 분석』등이 있다.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신학교의 초년생활(1895~1900년)
1895년 어려서부터 실천한 생활규범
심령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장 훌륭하고 지혜롭고 박식한 사람 중에서, 한 분을 영적 지도자로 모시고 모든 점에 있어 그를 신뢰하고 지도를 받는 것이다.(p69)
☞ 영적 지도자의 중요성.
하루의 규범
1. 아침에 일어나서 적어도 15분간 묵상기도를 바친다.
2. 미사에 참례하거나 혹은 미사 때 복사(服事)한다.
3. 15분간 성서를 읽는다.
4. 자기 전에 양심을 살피고, 잘못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을 발(發)하고 다음 날의 묵상재료를 생각해 둔다.
5. 점심 전 혹은 저녁 전, 그리고 저녁 일반양심성찰 전에 특별양심성찰을 하여, 악습과 결점을 바로 잡고 덕행수업에 대한 방법을 강구한다.
6. 축일에 대한 의무와 학교, 회합 그리고 복습의 의무를 성실히 새운다.
7. 성체조배, 성당과 성모경당의 순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8. 오후 6시부터 9시 사이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손과 발의 네 상처와 심장의 상처)를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 및 성모송을 다섯 번 외운다. 그리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뜻으로 적어도 세 가지 극기행위를 한다.
9. 그 외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주보성인들께 드리는 기도와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를 잊지 않는다.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해서는 영적 지도신부와 의논한다. 그리고 묵상책과 성서의 선택에 대해서는 지도자의 의견을 구한다.
10. 토마스 아 켐피스가 지은 존주성범(尊主聖範)의 한 부분을 정신차려 읽는다.
11. 지도자와 의논해서 위의 모든 것을 잘 지키기위해 알맞은 시간표를 마련한다.
12. 하느님과의 친교를 두텁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신을 자주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 화살기도(짤막한 기도)를 바치는 습성을 가진다. (p69-70)
주례규범
1. 고해성사를 받고 성체를 영한다.
2. 매금 토요일에는 대제大齋(음식의 양을 줄여 먹는것)를 지킨다.
3. 매금 토요일에 지도자의 의견에 따라 자기를 누르는 극기와 희생을 한다.
4. 위의 양일에는 보통 날보다 많은 기도와 영적 독서를 하든지, 아니면 영적 강화 혹은 그 외 신심행사에 참석한다.
5. 한 두 사람의 친구와 산책을 하거나 혹은 교실에서 심령문제에 대해서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좋다.
6. 매 토요일에는 성모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의 모범을 따르기로 결심하며 성모님께 특별한 존경을 표시한다.
7. 위의 주례규범에 대해서 모자라는 점이 있을 적에는 지도자에게 솔직히 말씀드리고 잘못에 대해서는 속죄를 한다.
월례규범
1. 한달 중 하루를 택하여 묵상일로 정하고, 악습의 시정, 덕행수업에 대한 좋은 결심과 반성을 한다.
2. 가장 열심하고 모범이 되는 친구 하나를 택하여 결점을 시정하기 위해 서로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기탄없는 의견교환으로 자기의 모자라고 잘못된 점을 찾아내기로 노력한다.
3.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지도신부에게 가서 모든 점을 이야기하고, 그 지시와 의견을 참작해서 실천한다.
4. 지도자에게 자기의 잘못과 모자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5. 매월 특별한 신심으로 공경하는 주보성인을 갖는다.(p70)
연례규범
1. 신학교에서 하는 연례 피정및 사순절과 서품식 전에 하는 피정에 열심히 참례하고, 어떤 특별한 사정으로 참례하지 못할 적에는 지도자에게 알린다.
2. 위의 피정과 그 외 적당한 시기에 총고해를 한다.
3. 방학하기 전 지도자에게 가서 방학 사이에 지킬 규범에 대해서 상의한다.
4. 방학 전에 방학을 주님 안에 잘 지키기 위한 지혜를 비는 기도를 서로 해주기로 친구들과 약속한다. (p71)
일상생활에 대한 규범
1. 윤리생활에 있어서 가장 주의할 점은 나쁜 친구나 혹은 좋지 못한 친구를 피하는 것이다. 좋지 못한 친구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음담패설과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즐겨하는 자.
② 여자를 따라 다니며 연애에 열중하는 자.
③ 술을 마시기 위하여 요정출입을 심하게 하는 자.
④ 복수심이 강하여 흉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나쁜 짓을 하는 자.
⑤ 일하기 싫어하며 거리를 방황하는 자.
⑥ 공부하기 싫어서 트럼프나 그 외 노름 따위로 소일하는 자.
2. 이성과 교제에 있어서는 친척이나 그 외 어떠한 구실을 막론하고 너무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지나친 잡담이나 희롱은 금물이다.
3. 점잖지 못한 노름은 물론이지만, 점잖은 장난이라도(트럼프, 자치기)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삼가야 한다.
4. 자기의 말과 몸가짐에 있어 남에게 교만하게 보이는 태도는 삼가야 한다. 누구에게나 경어를 써야하며, 뒷짐을 지거나 뒤로 걸어가거나 장난을 하더라도 남에게 손을 대어 때려서는 안 된다.
5. 순결을 보존하기 위한 특별한 경계를 게을리 말 것이다. 눈을 조심하여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거나 음란한 그림이나 영화를 보지 말 것이다. 그리고 도를 지나친 음식, 술을 삼가며, 너무 한가함을 피할 것이다.
6. 겸손의 덕을 익히기 위하여 자주 자신의 지위를 생각해 보라. 육체는 썩을 대상물이요, 영혼은 무지와 죄가 나오는 곳 밖에 아무 곳도 아님을 …… .
7. 순결과 겸손 뒤에는 모든 덕행의 여왕인 우애가 따라야 한다. 우애의 실천을 위하여 모욕을 참아 받으며 또한 남을 후하게 용서해 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물욕을 억제하여야 한다.
8.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적에는 지도신부에게 생활규범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p71-72)
젊은 성직자들을 위한 특별 규범
1. 성직자는 자기의 이익보다 항상 남의 이익과 구원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2. 가까운 거리에 외출을 할 때는 항상 성직자의 긴 옷(수단)을 입고, 먼 거리를 여행할 때는 짧은 옷을 단정하게 입는다. 집에서는 성직자에게 알맞은 복장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
3. 몸과 옷을 항상 깨끗하게 한다. 성당과 제의방, 그리고 예절에 참가할 때에는 단정하고 정중하게 처신한다. 미리 예절 연습을 잘해둔다. 성직자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규범을 잘 지키고, 자기 주교께 특별한 복종의 정신을 갖는다.
4. 학업에 정진한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는 학교를 떠나지 않는다. 하느님께 봉사하고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훌륭한 일꾼이 되기 위하여 힘껏 공부한다. 그리하여 좋은 설교가, 좋은 고해신부가 되어야 하겠다.
5. 절대로 명예가 생기고 돈 많이 생기는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하느님의 의향을 따르고 웃 어른과 지도신부의 의견을 따라 살기로 한다. 아니면 모든 이해(利害)를 초월한 하느님의 평화(필리 4,7)인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갈라 6,16)
성직자에게 권하는 말
성직자 특히 차부제품(次副祭品)을 받은 사람들은 다 허리의 띠(성직자의 표식)를 매고 그가 상징하는 좋은 모범과 백절불굴의 항구심을 터득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성직자의 제복을 단정하게 입음으로 과거 성직계를 빛낸 모범이 된 분들의 후배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규칙을 어길 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니라”(Tertullianus,De Praes adv. Haer. Cap.14)
덧붙이는 말
1. 친지중 어느 누가 곤경에 빠져 있을 적에는 모든 이가 그를 위하여 기도를 바치며 성체를 영한다.
2. 성모님의 성상 앞을 지날 적에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지들을 위하여 성모송 세 번을 외우고 그 끝에는 항상 순결과 정덕에 대한 특별은혜를 전구한다.
3. 성직자가 아닌 사람도 매달 한 번씩 친지를 위하여 성체를 영하고 자기성화를 위하여 규범을 지키기로 하고 남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할 것을 결심하여야 한다. 신부는 매년 한 번씩 자기 죄와 남의 죄에 대한 속죄의 미사성제를 봉헌하도록 한다.
4. 친척이나 아는 이의 기일을 당하면 망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대제를 지키고, 성체를 영하고, 대사(大赦)를 얻는 등, 여러 가지 정성을 다 기울인다 .(p72-73)
11월30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축일에 행한 3일간의 피정
1. 성 프란치스코의 깊은 겸손을 본받아 나의 영육의 비천함을 알기로 한다. 공부와 선행을 하는 데 있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과 그의 영광을 위하고 내 영혼의 이익만을 위하여 행동한다.
2. 그의 희생심을 본받아 내 마음을 누르고 육체를 채찍질하여, 안일을 버리고 원욕(願慾)을 억눌러 바르게 길들인다.
3. 하느님의 영광과 형제의 구원에 대한 성 프란치스코의 열성을 본받아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미사에 참례한다. 또한 교황성하의 건강과 교회의 번영과 비신자들의 회개와 열성, 신앙심, 겸손, 희생심등을 높이기 위하여, 그리고 성자들이 보여준 속세의 허영을 멀리하기 위하여 미사 때 기도한다. (p73)
성 프란치스코 살레지오를 위한 4일간 피정
1. 성인의 온순, 희락, 단정, 정중 등의 여러 가지 덕행을 본받기로 한다. 특히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고생하는 이에게 성인의 기쁨을 전해 주도록 노력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느님의 품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 .
2. 성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엄하게 다스린 그 규범을 따라 자신을 더욱 억누르기로 한다.
3. 하느님께 대한 성인의 사랑을 본받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이 묵상 중에 하느님이 명하시는 모든 일을 충실하게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4. 성인의 우애를 본받아 죄인의 회개, 전교의 확장, 교회의 번영을 위하여 기도드리기로 한다. (p73)
1896년 피정에서 한 결심사항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1. 각 성사를 받는데 있어 아무 열심 없이 습관적으로 받지 않기로 결심하고 약속한다. 그리하여 항상 15분간의 준비를 먼저 하기로 한다.
2. 매일 특히 방학동안, 다음의 신심행사를 잊지 않고 하기로 결심한다. 묵상기도, 특별 및 일반 양심성찰, 묵주기도, 영적 독서, 성체조배, 그 외 평상기도…… 등.
3. 시간이 있으면 마리아께 드리는 소일과와 시편 5장과 그리고 순결을 비는 뜻으로 성모송 세 번을 외우기로 한다.
4. 기도중 잡념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묵상기도와 중식후 외우는 다섯 번의 주님의 기도와 저녁 만과와 그리고 묵주기도 등을 바칠 적에 주의한다. 기도할 적에는 언제나 내가 예수님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예루살렘 공청(公廳)과 갈바리아 산 위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한다.
5. 내게서 오만의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하여 내 자신을 언제나 감시하고 경계한다. 나는 신심과 학업에 있어 모든 사람에게서 뒤 떨어져 있음을 명심한다.
6. 학업에 있어서 나는 내 힘을 다하여 모든 과업을 전부 열심히 다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문제될 수는 없다. 학문에 대한 나의 목적은 오로지 하느님과 교회의 영광과 그리고 구령하는데 국한하고 내 개인의 명예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하면 주님이 나에게 주신 능력인데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을까?
7. 나는 내 자신을 누르는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자애심을 조장시키는 모든 기회를 피한다. 남과 대화할 적에 유식한 체 하지 않고, 나의 행동에 대한 변명은 일체 아니 한다. 자찬의 냄새를 피우는 말이나 행동은 일체 아니 한다.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찬사도 좋아 하지 않기로 하며 또한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광고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
8. 성체에 대한 열렬한 신심을 갖기로 하고 그를 갖기까지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다. 성체성사는 나의 감정, 생각에 있어 그리고 나의 전 성직생활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9. 성모 마리아를 내 가장 사랑하는 어머님으로 모시기로 약속하고 맹서한다. 천사적 순결의 덕행을 조금이라도 생각이나 행동의 위험을 느낄 적에 동정자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기도드려 악의 유혹을 물리친다.
10. 성체성사와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에 있어 내 자신이 무엇보다 먼저 모범이 되고 난 다음 타인에게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그 신심을 장려한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에 있어도 그렇게 한다.
11. 성 요셉을 잊지 않고 매일 기도드리겠다. 내 자신은 물론 죽음에 처하여 있는 병자들과 교회를 위하여 성 요셉에게 전구를 빌겠다.
12. 3월, 5월, 10월에 시행되는 9일기도 중에 특별한 희생으로 나의 욕망을 누르는 약속을 하겠다. 그리고 방학중에 여러 사람 앞에서 예모(禮貌)를 잘 지키고 위험한 기회를 삼가 피하기로 한다.
13. 성체성사, 성모님 그리고 성인들에게 동방정교회와 그의 갈라져 나간 형제들을 위하여 열렬한 기도를 바치겠다. 교황을 위하여, 교회의 번영을 위하여 내 존경하는 주교님과 친척 및 은인들을 위하여 기도 들릴 것을 잊지 않겠다.
14. 나의 모든 행동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거듭 사용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항상 바치겠다. (p73-74)
1897년 거룩한 순결에 대해서
하느님의 은혜와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순결이 얼마나 필요하고 훌륭한 덕행인지 알게 되었다. 앞으로 하느님의 대리자 사제가 되려는 나는, 지도신부님의 동의를 얻어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기기로 한다. 순결의 모후이신 성모님과 순결의 큰 모범을 보여준 성 루도비코,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성 요한 베르크만, 세 분을 특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결심한 것을 잘 실천하는데 필요한 은혜를 빈다.
1. 순결한 거룩한 덕행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나는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하느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순결은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며, 자신을 너무 믿고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순결은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절실히 알아들었다. 나는 하느님과 성모님께 온전히 신뢰하고 “순결의 은혜를 주소서”하고 기도하겠다. 특히 성체배령시 위의 은혜를 간구하겠다. 성체는 “간선자들의 곡식이요, 동정자들을 건장케하는 포도주”(즈카 9,17)가 되기 때문이다. 동정자들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순결의 덕행습득을 위하여 특별한 기도를 바치기로 한다. 성모 소일과, 삼종기도, 묵주기도 첫 번 부분을 위의 지향을 가지고 항상 바치기로 한다. 마리아의 정배이신 성 요셉께도 특별 신심을 갖고 매일 두 번씩 요셉송을 외우고, 성 루도비코외 2인의 순결의 모범 성인을 본받아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깨끗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2. 순결한 필요한 극기행위를 즐겨하겠다. 특별히 눈을 조심하고 경계하겠다. 성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눈이 교활한 올빼미”가 되며, 성 안토니오에 의하면 “눈이 영혼의 도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나, 할수 없이 가게 되면 순결에 해를 받지 않도록 밑을 보고 걷기로 한다.
3. 거리나 시장을 지나 갈 적에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것은 일체 쳐다보지 않는다. “읍내 거리에서 두리번거리지 말고 그곳의 으슥한 데서 서성거리지 마라”(집회 9,7) 회화, 조각 그것이 비록 성당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삼가 조심하여 감상하기로 한다.
4. 여자에 대해서는 그가 친척이든지 수도자이든지 그 외 무슨 이유를 막론하고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 특히 젊은 여자일 경우에는 더욱 주의를 요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여자의 얼굴 위에 눈동자를 돌려서는 안 된다. “계집을 유심히 바라보지 마라. 그와 함께 벌을 받을까 두렵다”(집회 9,5) 혹시 여자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적에는 엄하게 간단하게 삼가서 마쳐야 한다.
5. 순결을 좀먹는 소설책이나 그림은 일체 손에 갖지 않고 눈으로 읽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런 책과 그림은 불살라 태워버려야 한다.
6. 집에서 모든 가족에게 순결의 모범을 보여주는 한편 혹시 내가 있는데서 누가 점잖지 않는 이야기와 노래 따위를 하면 불쾌감을 드러내고 그를 시정하도록 하겠다. 신학교에서는 더욱 엄격한 순결의 생활을 하겠다. 일반 신자들에게 가(可)한 것이 성직자들에게는 불가한 것이 되는 때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7. 식탁에서 절제하며 항상 작은 극기를 하도록 결심한다. 특히 술을 마시는 데 있어 각별히 조심하겠다. 술은 여자에 못지않게 순결을 해치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여자에게 넘겨주어 그가 네 능력 위에 올라서지 못하게 하여라.”(집회 9,2)
8. 내 육체에 관해서 가령 눈, 손 그 외 지체를 항상 깨끗하게 예모있게 움직이겠다. 침대에 들어가서 묵주를 목에 걸고 손은 가슴 위에 십자형으로 합장하고 잠든다.
9. 나는 어디서나 천사와 같이 깨끗해야 된다는 의무감을 느끼며 살아가겠다. 내 눈, 내 말, 내 행동이 깨끗한 성인(성 루도비코,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성 요한 베르크만)들의 그것과 같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도록 노력하겠다.
10. 나는 혼자 있지 않고, 나를 보고 계시는 하느님, 마리아, 수호천사 옆에 있음을 상기하겠다. 순결을 거스리는 유혹을 느낄 적에는 하느님, 수호천사, 성모님께 더욱 부르짖으며 다음과 같이 화살기도를 드리겠다. “원죄없으신 마리아여, 우리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수난시 매 맞으시는 장면을 묵상하거나 혹 인생의 네 가지 종말(죽음, 심판, 천국, 지옥)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물리치겠다. “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집회 7,36) (p75-76)
1898년 2월 27일
분심잡념에 드는 것을 너무 근심하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 결여된 징조이기 때문에 더욱 경계를 해야 한다. 기도중 혹시 잡념에 흐르더라도 인자하신 하느님은 용서해 주실 것을 굳게 믿고 태연하여야 한다. 내가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나를 시험하시고, 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를 스스로 알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될지어다!
저는 앞으로 더욱 정신 차려 하느님의 뜻대로 열심하게 살겠아오니 성모님과 수호천사 그리고 성 요한 베르크만은 저를 도와주소서. 하느님은 내가 비록 수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내가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만은 잘 아신다. 하느님! 이 죄인을 버리지 마시고 축복하여 주소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P77)
3월 6일 주일
요 며칠 동안은 화살기도도 별로 못하였다. 이것은 내가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지 않은 증거이다. 앞으로 전진하려고 하지만 항상 뒤떨어져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앞으로는 아침 저녁으로 감실에서 더욱 조용하게 하느님 생각만을 하겠다. 하루를 지내는 데 있어 보다 많은 화살기도를 바치기로 하고 특히 쉬는 시간과 공부시간에 그렇게 하겠다. 쉬는 시간에 너무 떠들지 않기로 하고 지나친 농담은 피하겠다. 마치 소화 데레사 성녀가 “내 이름을 데레사의 예수님”이라고 한 것과 같이 나도 내 생활을 거룩하게 하므로 그런 영광을 누리겠다. 그보다 앞서 나는 “예수님의 천사”가 먼저 되어야 할 것이다. 성 요셉은 저를 도와주시고 당신의 내적 생활을 저에게 물려주소서! 예수님은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P77)
3월 13일 주일
지난 주간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공부시간에 불필요한 이야기와 농담을 거리낌 없이 마구하였다. 양심성찰은 너무 빨리 하였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묵상의 제목을 생각지 않고 분심잡념에 들기도 하였다. 결심한대로 화살기도도 많이 드리지 못하였다. 이번 주간에는 위의 세 가지 점에 특히 유의해서 열심히 살겠다. 나의 집안에 대한 걱정은 모두 착하신 예수님께 맡겨드리고 걱정하지 않겠다. 가족들을 위하여 성모님과 성 요셉의 전달을 빌겠다. 가족들이 다만 바르게 그리고 죄없이 살기만 바랄 뿐이다. 가정에 대한 걱정, 이것은 나에게 일대 시련인줄 안다.(P78)
3월20일 주일 피정에서
나는 덕행에 얼마나 진보하였는가? 최근 내 모든 행동에 대해서 반성해 보고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모든 내 행동에는 항상 어딘가 결점이 있었다. 아침의 묵상, 미사참례 …… 등 잡념에 쌓이지 않는 날이 없다. 성체조배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양심성찰과 저녁신공도 별로 잘하지 못하였다. 나는 아직도 수덕생활에 있어 초보자임을 깊이 깨달았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지금쯤은 성인(聖人)이 되어 있어야 할 내가 아직도 초보자라니 한심한 노릇이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깊이 깨달았다. 겸손하고 또 겸손하라! (P78)
1899년 1월 15일 월례 피정
나를 친절하게 지도해 주시던 이사키 신부님이 돌아가신 다음 새로 퀴리노 스빰빠띠 신부님을 영적 지도자로 모셨다. ‘영혼의 일기’를 쓰는 문제에 대해서 새 지도신부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각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특징이 있는 법이다. 얼마동안 일기를 중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말은 막간의 이야기고 이제 영혼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한다. (p78)
4월 16일
작년부터 쓰기로 한 ‘영혼의 일기’를 요즘 3개월간 너무나 등한히 하였다. 조금 쓰는 시늉을 하다가 그만 두고 말았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 봄 방학도 지났으니 앞으로는 모든 것을 잘 해 보겠다. (p79)
5월 7일 주일
5월은 ‘성모의 성월’이다. 나는 묵상과 묵주기도에 더욱 열심하기로 분발해야 되겠다. 신심행사에 있어 나는 실천자가 아니라 감상자가 아닌가 싶다. 작년 5월에 성모님께 두 가지 청한 기억이 난다. 즉, ‘겸손’과 ‘사랑’이었다. 성모님을 나의 소망을 들어주사 두 가지 덕행을 실천할 기회를 많이 주셨다. 금년에도 같은 은혜를 내려 주사 더욱 겸손하고 사랑의 실천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겸손의 실천은 솔직히 말해서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괴로움이 변하여 즐거움이 될 것을 믿고 내 자신을 독려하겠다. (p79)
5월 22일 성령강림후 월요일
혹시 누가 나를 멸시할 때에 “나는 속으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하는 생각으로 피나는 희생과 극기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는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타인에게 알리게 되므로 다행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행과 불행 희비쌍곡의 인생연극이다.(p80)
1900년 성년(聖年)에 가졌던 좋은 감정과 결심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명, 지능, 의지, 기억 따위는 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모두 그의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20년 남짓한 것에 한한다. 내가 기억하고 생각하기 전에 해, 달, 별, 산, 바다, 평야, 동물, 식물, 사람들은 … 이미 존재하였다. 모두 하느님의 섭리의 눈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그 때 나는 아직 없었다. 내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를 꿈에도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p80)
하느님! 당신은 비롯음에서 계시고 모든 세기(世紀)에 앞서 계시나이다.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 저를 허무에서 존재케 하여 주시고 생명, 영혼 그리고 모든 영육의 능력을 부여하여 주사, 제 눈으로 하여금 당신이 저를 창조하여 주신 것을 깨닫게 하셨나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제 주님이시며, 저는 당신의 피조물이로소이다. 당신 없이는 저는 아무 것도 아니며, 제 존재는 모두 당신을 위하여 있나이다. 당신 없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더욱 당신이 잠시라도 제게서 손을 떼시면 저는 허무로 즉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 존재의 이유입니다. 하느님이 준 그 모든 것을 마치 제 것과 같이 하느님 눈앞에서 자랑하고 뽐낸다면, 저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p80)
하느님이 내가 필요해서 나를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우주의 모든 질서도 나 없이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는가? 왜 나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처럼 망상하는가? 나는 한낱 버러지요 먼지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왜 나를 과대평가하는가? 오만과 자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세상에 무엇하러 왔는가? 하느님께 봉사하려고 오지 않았는가? 하느님은 나를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절대적 주인이시고 나는 그분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생명은 온전히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데 바쳐져야 마땅하다. 내가 내 편리와 자만심과 찬사를 위하여 행동할 적에 나는 어떻게 되겠는가? 불충한 종이다. 하느님은 이 종을 어떻게 벌하시겠는가? 주여! 저로 하여금 당신의 의노(義怒)를 받지 않고 계속 당신께 봉사하는 종이 되게 하여주소서! (p80-81)
하느님의 종! 이 지위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당신의 멍에는 즐겁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고 가르쳐 주시지 아니 하셨습니까? 성경에는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은 군림하는 것이라”고 씌어져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당신의 이 지상대리자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하느님! 당신께 봉사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한편 당신께 봉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p81)
내게는 귀한 영혼이 있다. 나는 돌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요, 동물도 아니요, 오직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영혼은 나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하였다. 내 기억력은 성부의 모습을 닮고, 내 지능은 성자를 그리고 내 의지는 성령을 닮았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아드님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속량할 만큼 무한한 가치를 갖는 법이다. 그래서 보통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의 영혼도 온 세상의 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이 즐기시는 그러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이렇게 귀한 영혼을 어떻게 나는 죄를 지어 그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p81)
세상에 사는 모든 이가 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 그런데 많은 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에게 봉사하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그를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에 영혼을 구해주고자 하는 구령열(救靈熱)로 불탄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고귀한 피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는 열심히 기도한다. (p81)
☞ 하느님을 모르는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에게는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게 되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하면서도 바리새이와 같이 나를 자랑하고 있으니 한심스럽다. 나는 죄인이다! 마음과 정신을 낮추어 스스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하느님 앞에 자캐오와 같이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하고 가슴을 칠 뿐이다. (p81)
혹시 내 마음에 자만심이 싹틀 적에 죽음을 명상하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영원한 세계에 가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p81)
☞ 나를 돌아보는데 있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지옥에서는 귀를 찢는 듯 한 비명에 얼얼해 지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아직 시끄러운 소리를 못 참겠다. 지옥에서 우리는 아귀처럼 굶주릴 테지만 그래도 나는 한 조각의 맛있는 고기를 지금은 내버려두지 않는다. 저주받은 자와 악마가 나와 함께 지옥에서 있겠지만 이곳에서 나는 내가 싫어하는 어떤 인간이 옆에 있는 것을 인내로서 이겨내지 못한다. 정말 나는 수천 번 지옥에 가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느님! 저는 진심으로 말하나이다. “이 곳에서는 제가 불에 타고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두소서. 그러나 영원 속에서는 저를 구제하여 주소서.”
(p82)
1901년 4월 28일 로마에서 피정을 갖다
내게 언제나 자만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뛰어난 지식을 담은 작품을 공부하고, 많이 배우려는, 지나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께 인간을 구해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내게는 아직도 많은 점이 모자란다. 무엇보다 합당하게 묵상기도와 묵주기도를 드리고, 일반 및 특별한 양심성찰에서 성과를 얻어야 한다.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과 일치하고 진정한 덕행의 실천에 날마다 진보해야 한다. 하지만 그 진보를 위하여 필요한 노력이 모자라는 것이다. (p85)
1902년 12월 10일 ~ 12일 군복무를 끝마친 후의 피정
나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무엇인가? 내 족보는 어떠한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한낱 종일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내 것은 없다. 내 생명과 죽음의 유일하신 주님이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부모와 친척과 스승들을 가지고 있으나, 나의 유일하고 진정한 주님은 하느님이시다.(p86)
나는 한낱 하느님의 종이다. 나는 언제나 종임을 자임하고 내 자신, 한시라도 쾌락이나 허영심을 위해서 나를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도적이다. 내 것이 아닌 시간을 훔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충실치 못한 종, 보상받을 가치가 없는 “나쁜 종”(마태 18,32)이다.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을 하였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이 무슨 치욕인가? 얼마나 큰 거만이며 오만인가? 그런데도 나는 종으로서의 행실을 모르고 있지 않는가! (p87)
주님이신 하느님은 제게 당신 명령을 알게 하셨다. 내 모든 생애를 통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 얼마나 행복된 복종이며, 영광이며, 영예인가! 나는 임금님의 종이니, 언제나 그분을 따르리라. (p87)
내게 주님의 현의(玄義)를 알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께 드리는 나흘 동안의 피정이 끝난 오늘,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 곧 이 세상 모든 창조물과 자연의 모든 선물을 마음대로 사용토록 해주셨다. 그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성화되고, 또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도록 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만물의 존재이유이다. 만일 그 창조물을 쾌락을 위하여 사용함으로 주님의 섭리의 질서를 교란시키거나, 우주의 아름다운 조화를 깨뜨리거나 한다면, 나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몹쓸 종인가! (p87)
만물은 하느님께로 나를 데려가는 데만 사용해야 마땅하다. 만일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다면 나는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바로 여기에 모든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될 황금 같은 법칙과 기본적인 가치판단이 있는 것이다. 그 만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하느님의 의향이 나타난다. (p87)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명예롭거나, 멸시를 받거나, 시골의 가난한 본당 신부나, 커다란 교구의 주교나 모두가 내게는 다 똑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로 내 주님의 뜻을 행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충실한 종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 게다가 만일 선택을 한다면, 부유보다 빈곤을 먼저 택해야 한다. (p87-88)
나는 특별한 공부를 더하고 싶었으나 웃어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더 원하지 않고 순명할 따름이다. 나는 부활절의 차부제(次副祭)로 임명되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의 웃어른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더 기다리고 순종하자. 나는 조용하게 지내기를 바랐으나 웃어른들은 굴욕적이고 또 내 자만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 직책, 병자간호직을 주시려고 하신다. 복종은 커다란 희생을 강요한다. 그래도 좋다. 복종할 뿐이다. 주님 안에 씩씩하고 유쾌하게 살자. 바로 여기에 삶의 고뇌 가운데서도 모든 초조감을 가라 앉히고 불만을 부드럽게 하고 우리를 즐거움으로 이끄는 양약이 있는 것이다. (p88)
반역한 천사들에게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은혜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 범한 마음의 죄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주 죄를 범하는 내게는 주님이 수난의 모든 은혜를 한번 뿐 아니라, 수없이 내려 주신다. 그리고 아직도 하느님은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자비이신가? 또 내게는 이 무슨 창피함인가? 주님,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나이다. 이제부터 주님의 도움으로 언제나 당신을 찾고자 힘 쓰겠사오며 또 타락한 천사 대신에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고 축복하겠나이다. (p88)
불복종, 오만한 행동, 의무에 대한 등한, 한없는 방심과 감정에 대한 불충분한 주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자만함, 죄악, 이러한 것들이 진실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며 내 칭호이다. (p88)
만일 하느님의 자비보다 먼저 정의의 심판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오! 주님, 어떤 시련이라도 좋습니다만, 지옥만은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당신의 성스러운 사랑의 불길로 저를 불태워 주소서. (p89)
이 사람 저 사람 모든 이가 죽는데, 나는 죽지 않을 것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걷는 한 발자국, 흘러가는 찰라마다 나는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 (p89)
오! 주님, 저를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하소서! 그것이 주님의 의향이시라면 죽음이라도 만족하고 기쁨으로 받겠나이다. 주님은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의 중심이며, 종합이며, 최후의 목적이나이다. 하오나 최소한 당신의 성스러운 사랑 안에서 죽게 하여 주소서. (p89)
내게 죽음이 가까이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고 있다면 마음이 완고함을 가리켜 주는 것이다. 자만심이며, 보잘것없는 야망이며 허영심을 버리라. 누구나 죽고 누구든지 죽는다. 나도 이러한 비참한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p89)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히브 9,27) 내가 교황이 되고, 내 이름을 모든 사람이 부르고, 공경하고 대리석 묘비에 새겨진다 할지라도 심판하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날,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것도 아니리라. 오늘 그처럼 많은 신뢰와 자애로 나를 대해주시는 예수님께서, 어느 날엔가 하느님께서 분노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 심판하신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나는 믿는다. (p90)
하느님! 제 영혼의 부끄러움은 어떠한 것입니까? 학자, 열심자 또 성자 따위의 명성들이 그 순간에 가서 무슨 가치를 가질 것인가? 오! 하느님, 내 일 가운데서 가치 없는 것을 가려내고, 또 그것을 성화할 수 있도록, 오늘 제게 당신의 성스러운 빛을 주소서. “심판날에 당신 앞에서 감출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금 제 눈으로 보게하여 주소서. 주 내 하느님, 굽어보시와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행여 죽음의 잠을 잘세라 이 눈을 밝혀 주소서”(시편 13,4) (p90)
내 영혼은 천사, 성모 마리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쳐주는 거을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만약에 그 거울이 조금이라도 더럽혀진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서 쓰레기와 함께 버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 거울인가? 오! 세상은 얼마나 악하며, 얼마나 많은 추악(醜惡)가 악취로 차 있는가?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그 누가 이 범람하는 죄악에서 몸을 빼올수 있겠는가? (P90)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하고 의심이 된다. 그러나 그건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날, 내게 제한된 경험에 비추어 모든 인간의 반 이상이, 그들 삶의 어떤 기간에는 흉측한 짐승처럼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사제들은 어떤가? 하느님, 그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성스러운 품성을 더럽힌 사람이 드물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나이다. (P90)
예수님, 저 자신에 대하여서도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는 데”(묵시 6,13참조) 먼지에 불과한 나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지금부터 나는 세상 사람들의 모든 경멸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 점에 대하여 더욱 세심히 조심하려고 한다. 불결한 생각을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순결에 대해서까지도 생각을 적게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 그리고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살이 놋쇠란 말인가?“(욥 6,12) 이 점에 관하여 전에 묵상 동안에 얻은 결심을 새로이 하고 지극히 깨끗하신 성모님께 호소하여,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 결심들을 지키겠다는 내 뜻을 여기에 기록한다. (P91)
오! 예수님! 이 원수들은 수가 많고 힘이 세나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별한 적이 있어 모든 구실을 다하고 있나이다. 그것은 오만하고 꾀 많고, 항상 저를 놀리며 저와 계약을 맺고자 유혹하며 제 선한 행동 안에서도 저에게 귀찮게 굴고 있나이다.
주 예수님,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나이다. 그것은 제 자만심이며, 오만과 과신과 허영의 정신이나이다. 이것을 영원히 제게서 없애버리려 하나이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면, 적어도 그것을 억제함으로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바라나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좀 더 행동에 자유를 얻고 무너진 곳에서 주님의 거룩하신 의향이 주님과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되기를 바라나이다.(p92)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이것은 요셉의 일터에서 젊은 예수님이 행하신 사실이다. 나는 이 성경을 묵상하는 가운데에 눈물이 나와 어린이와 같이 마구 울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의 빛나는 모범! 비단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써 제가 닮을 수 있음을 당신께 보이는 일은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p92)
그의 나라를 넓히고, 또 사도들의 사명에 참가시키려고 예수님께서는 후세에 나를 즐겨 불러 주셨다. 주님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시골로부터 끌어내시어,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빵을 주셨고, 입을 것이 없을 때 옷을 주셨다. 공부할 책이 없을 때 책을 주선해 주셨다. 몇 번이나 나는 주님을 잊었으나 주님은 부드럽게 나를 일깨워주셨다. 주님에 대한 내 사랑이 식었을 때 주님은 영원히 불타는 성심(聖心)의 사랑의 불길로 나를 태워 주셨다.(p93)
"나의 아들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참조)고 물으신다. 주님, 주님 당신께 무엇을 대답할 수 있사오리까? 저의 눈물을 보시고, 제 가슴이 뛰는 것을 들으시고 떨고있는 제 입술과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저의 펜을 보소서 …… 제가 무엇을 말할 수 있사오리까?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 (p93)
베드로의 사랑과 바오로와 치명자들의 열정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애덕에다 겸손과, 저 자신에 대한 불신과 이 세상의 일에 대한 멸시를 덧붙여 주었으면 사도를 만드시든지, 치명자를 만드시든지, 주님, 저를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하소서.(p93)
그 동안, 내 가난에 대하여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는 이 세상의 고위고관들이 그들의 저명한 이름과 작위와 그들의 하인들로서 즐거움을 얻듯, 나는 가난에서 나의 즐거움을 발견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같은 가정의 출신이니,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주님의 섭리가 오늘까지 항상 내게 해 주셨던 같이 부족한 것을 풍부하게 마련하여 주시리라. (p94)
내 자만심이 자랑하는 어떤 작은 공적이라도 전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걸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내게 보여주신 그 각별한 사랑이 없다면, 오늘 나는 한갓 초라한 농부 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농부들 중에서도 가장 시골뜨기, 가장 무식하고, 아마 가장 심술궂은 사람이 되었으리라. 나는 내가 생각하고, 내 자만심이 꿈꾸는 그런 인물이 결코 아니다. 내 부친은 하루 종일 삽질, 곡괭이질 등 잡일에 몰두하는 농부이다. 나는 아버지가 가진 것보다 아무 것도 더 가진 것이 없다. 차라리 나는 그분보다 더 낫지 못하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는 최소한 단순하고 선량하지만 반면에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나쁜 마음씨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p94)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 내 임무다. 진실로 이 봉헌을 행위로 증명하는 것이 내 임무다. 또 내가 성인이 되기를 바랄 때면, 내 자신이 당황하게 된다. 용기가 모자란다는 것을 느낀다. 나를 위해 큰일을 하신 예수님께서 합당한 어떤 목적 때문에 그 일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 내 자신의 힘을 얻는다. (p94)
나는 예수님의 처음 열두 제자 가운데는 유다도 있었다는 걸 결코 잊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역자가 되었고, 무서운 치욕의 괴물이 된 것이다. 사랑에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어야만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있다.(p94)
겸손하고 박해받은 양처럼, 버림과 배반과 죽음에 굴복하시는 가장 양순하신 예수님을 대하면, 정신은 헛갈리고, 당황하게 되고, 기진맥진하여지고, 자만도 자기주장도 포기하게 된다. “오! 예수님, 영원한 영광의 빛, 방랑하는 영혼들의 위로여, 저는 당신 대전에 침묵으로 당신께 말씀드립니다.”(준주성범 3편21장4절) (p94)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38)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뼈아픈 슬픔을 경험하셨으니, 예수님께서도 연약한 인간의 감정을 맛보셨던 것이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용기를 잃기 쉬운 우리들에게 위안이 된다. 그리고 본받아야할 하느님의 거룩한 모범이다. 슬픔이 영혼을 휩쓸고, 마음이 피 흘릴 때면, 예수님께로, 그의 제단으로 가서, 예수님께 우리의 고뇌를 맡기자.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힘과 평화를 얻을 것이다. (p95)
“시몬아, 자고 있느냐?”(마르 14,37) 예수님의 이 말 속에는 얼마나 큰 슬픔과 탄식이 들어있는가? 피곤으로 압도되고, 일하거나 기도드릴 마음이 없을 때면, 예수님은 위의 말씀을 내게 하신 것처럼 생각하겠다.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거나 일하시거나 눈물을 흘리시는데 나는 잘 마음이 있겠는가? (p95)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마르 14,45) 예수님 이마에 그 입맞춤, 그것은 얼마나 흉측한 것인가! 그러나 많은 사제들이 날마다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머리를 쥐어 뜯어야할 일이다. 오!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제는 결코 당신을 모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이 아들의 사랑스러운 입맞춤을 당신의 가슴에 받으소서. (p95)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마태 26,63) 나를 비난하고 험구하는 것인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나를 꾸짖는 것인가? 나를 비방하는 것인가? 자만심이 지식과 덕행의 자랑을 하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이 말씀을 우리 머릿속에 담아 두자. 침묵은 금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였다“(마태 26,67)
가이파의 집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밤을 지내셨던가? 한편 그의 제자들은 비겁하게도 그를 버렸거나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가! 바로 거기에 이 세상에 있어서 하느님의 진정한 사제들에 대한 보상이 있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사도 5,41) 주님, 당신의 사랑을 위해 저도 또한 그러한 영광에 참여토록 하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당신을 위해 멸시받고 싶은 욕망을 따르도록 하여 주소서.(p95)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마리아와 요한과 또 다른 성녀들이 가졌던 감정을 가지지 못했다면 최소한 갈바리아 산상으로부터 가슴을 치며 내려오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던 백부장의 감동이라도 함께 갖게 하소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 통회하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지만, 나는 당신의 성혈 속에서 정화될 모든 권리는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혈은 모두 내 죄악을 위해 흘리셨기 때문이다.(p95-96)
1902년 12월 16일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시는 예수 성심이여!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불태워 주소서 …… .
하느님은 모든 것이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의 사업의 승리를 위하여 내 생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데 효과적이고 안전한 방법은 겸손이다. 나머지는 다 이 겸손에서 나올 것이다. 겸손은 바탕이 되어 보장할 것이다. 이것은 내 영적 지도자가 준 권고이며, 성령이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다.(p96)
12월 19일
주님, 이 세상에서 제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옵나이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주소서. 그러면 저는 큰 부자가 될 것이오니,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나이다.” (p96)
12월 20일
최근에 신품을 받은 내 동료들과 같이, 성무일도와 성모소일과를 드릴 때, 분심잡념에 들은 적이 그 얼마나 많은가! 휴게실 밖에서 주고받은 동료들과의 잡담, 침묵 시간 중에 떠들은 이야기, 쓸데없는 일에 대한 긴 토론 따위, 이것이 덕행의 행위란 말인가!
반은 잠자는 그런 상태에서 기도와 감정을 주님께 바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신앙심의 연마에 있어서 정신의 과단과 전념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관용을 쉽사리 지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기와 함께 겸양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결함에는 특별한 의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주님만이 우리의 결점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p97)
오늘 나는 행동을 잘하지 못하였다. 내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일 나는 더 많은 주의력과 믿음을 기울이겠다. “주님, 당신은 제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시나이다. 저를 도와주소서. 주님은 제 희망이시나이다.” (p97)
12월 22일
주 예수님, 당신 앞에 저 자신은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고 순종하나이다. 제가 얼마나 비천한가를 아시오니,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주님께서 일깨워 주시고 그 점을 생각하게 하소서. 저는 방심과 우유부단과 임무에 대한 태만과 특히 말에 있어서 잘못을 뉘우치나이다. 그러나 제게 모자라는 것은 확고하고 결정적인 의지력은 아니옵나이다. 최초의 피정에서 실제적인 결과를 조금 밖에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황하고 불안하여 지나이다. (p97)
오! 주 예수님, 당신 은총이 헛되게 되지 말게 하소서. 이제 당신 앞에 나설 용기조차 없나이다. 주님의 성탄절은 불과 이틀 밖에 남지 않았으니, 주여 제가 선물을 기대하고 계시나이다. 주님, 당신께 드릴 사랑을 행위로서 잘 증명하려고 굳게 결심하였으나, 제게 남은 것은 통회와 후회 밖에 없나이다. 요즘 이틀 동안 제 과거를 고치고, 제 영혼을 주님이 오시기에 앞서 잘 준비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또 주님이 제 안에서 즐거워하시고, 저를 쓰다듬어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불태워 주심을 느낌으로써 성탄절에 얻는 제 즐거움을 더 크게 하소서. 마리아여, 성 요셉이여, 저를 돌보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예수여, 마리아여, 요셉이시여, 당신들을 위해 살고 고통을 받고 죽겠나이다.” 아! 이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p97-98)
12월 23일
나는 성덕의 비결이 되는 원칙을 주장한다. 즉 모든 일은 어떻게 하든 그것만이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서 실천하도록 명하신 일인 줄 알고 전력을 다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일의 성공이 비록 성화에 관계된다하더라도 실천 전후에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훌륭한 원칙으로서, 정성 있게 적용하면, 그것은 마치 성수를 가지고 마귀를 물리치듯 잡념을 모두 물리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신 집중의 원칙이 되며 “네가 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실행하게 된다. 또 하느님 앞에서 사는 원칙이 된다. 그러나 그 원칙이 효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루의 첫 행동부터 실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p98)
예수님은 가까이 와 계시다. 그는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참이다. 그는 벌써 사랑에 찬 음성을 듣게 하였다. “보라, 내가 도둑처럼 간다”(묵시 16,15). 그리고 나는 오시는 주님께 특별한 주의를 모아 준비하여야 한다. 그 일에서 무한한 이익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께 전해야할 많은 일이 있다. 또한 그 분도 내게 주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커다란 은혜를 가지고 계시다. 내일 내 정신과 마음은 베들레헴의 외양간으로 변모한 성체감실 앞에서, 온 종일 조용히 지내야 한다. “오소서, 자애로우신 예수님! 지체하지 마시고 오소서. 제 영혼은 이제 하느님의 소망 속에서 안식을 얻었나이다.”(p98)
12월 24일
오! 어린 예수여!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당신 이마에 입 맞추고, 한 번 더 영원히 저를 송두리째 드리고 싶나이다. 오소서, 예수님! 더 이상 지체하지 마소서. 제 초대를 받으시고 어서 오소서.(p99)
슬퍼다! 밤은 깊었고, 잠이 나를 재촉한다. 펜이 손에서 떨어진다. 오! 예수님, 당신의 성스러우신 어머니와 성 요셉이 당신의 처소를 준비하는 동안 저도 조금 잘들게 하소서.(p99)
시원한 밤공기 속에서 쉬려고 한다. 당신이 오시면 찬란한 광명이 눈부시게 할 것이다. 천사들은 부드러운 영광과 평화의 노래로 나를 깨울 것이다. 당신을 받아들이려고 즐겁게 뛰어나가, 제 모든 재산이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제 초라한 선물을 드리고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저와 함께 뛰어오는 목동들과 천사들과 함께, 당신 영광의 찬미가를 부르며, 제 사랑을 당신을 보이겠나이다. 오소서!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나이다.(p99)
12월 26일
주님은 오셨고 위로해 주셨다. 오랫동안 그 분과 이야기할 수 있었고 또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을 그 분께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가 하지 않았거나 혹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내 영적 지도신부께서 내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분께 크게 감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p100)
감사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새로운 은총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친 관심으로 오직 나만을 너무 생각하였다. 그것은 세심한 주의가 결여된 것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 드릴 생활을 하고, 성탄절에 웅변적으로 보여준 그 덕성을 본받고 감사를 표시하도록 노력하겠다.(p100)
그러나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만일 내 뜻과 멋대로의 생각으로는 한 성인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한편 내 행동을 생각해 보면, 슬프게도 나는 얼마나 추잡하고 흉한 존재인가! 나는 아직도 하느님과 계속되는 친교를 맺지 못하고, 물이 계속 흐르듯이 끊임없는 관계를 갖지 못했다.(p100)
내 자신을 말할수록 더욱 덕성을 잃게 된다는 것은 진실이다. 비록 가장 순결한 듯이 보이는 말일지라도, 말 속에는 허영이 튀어나오는 수가 있다. 사람들과 동료들과 웃어른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하게 된다면 꼭 필요하고 알맞은 얘기만 해야 한다. 이것을 머릿속에 간직해야 한다.(p100)
12월 29일
겸손의 길과, 하느님과의 일치하는 일과, 내 즐거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즐거움을 탐구하는데 전념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내 진정한 정신적 발전을 위해 전념하도록 영적 지도신부가 충고한 세 가지 요점이다. 이 세 가지를 한 순간도 잊지 말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실제적으로 이것이야말로 내 임무다. 따라서 “그것은 나의 일이요. 나의 노역이로다.”(Virgilino, Aen, Ⅵ,129) (p101)
겸손에 관하여, 가능한 한 나는 일인칭으로 말하기를 피하겠다. 마치 그것이 독사라도 되는 것처럼 대명사 나(I)와 나를(me) 피하겠다. 특히 어떤 상황이나 어떤 문제에 있어서 떠벌리는 것을 자제하겠다.(p101)
웃어른들은 나에게 보조간호인의 직책을 맡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셨다. 이것은 내가 순종하고 우애와 온순함을 실천하며, 작은 희생을 드리는 기회이다. (p101)
오! 주 예수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여, 제 희생이 어느 정도 그 고통을 완화시키고,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저는 무엇이나 할 각오를 하고 있나이다. 당신들이 바라신다면 제가 고통을 받도록 하소서. 당신에게 바치는 제 사랑과 당신을 대표하는 형제들을 위한 제 사랑을 행위로써 보이려 하오며 이는 몹시 즐거운 일이옵니다.(p102)
12월 31일
내가 영원한 내세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년이나 더 살아야 할 것인가? 아마도 몹시 많이,
아마 몇 해 그렇지 않으면 혹시 한 해도 완전히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당신의 햇수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12) 주님께서 저를 부르는 해에는, 주님께서 죽음의 암흑 속으로 저를 던지지 마시고, 제 등잔에 가득 기름을 채울 수 있게 하소서, (p102)
항상 1902년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해는 군대생활과 투쟁의 해였다. 많은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들처럼 내 성소를 잃을 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잃지 않았다. 성스러운 순결을 지켰고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 자신이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나는 흙탕물 속을 지나 왔으나 하느님께서는 더러워지지 않도록 지켜주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전과 같이 전에 보다 더 건강하고 싱싱하게 살아있다. “예수님, 감사하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p102)
1903년 1월 1일
보잘 것 없는 나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불쌍한 죄인이다. 무익하고 불성실한 종이다. 머리끝까지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잡념에 골몰해 있고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p103)
모든 일에 있어서, 특히 말에 있어서 겸손하고 하느님과 일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서 오늘도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리고 항상 모든 것에서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을 구해야 한다. 내 집과 자신과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에 주의를 기울이겠다. 그 외에는 정신을 기울이지 않겠다. 또 진지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하게 공부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겠다. 모든 것에서 언제나, 정신적인 평화와 안정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p103)
“지금 당장, 예수님!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던 오랜 생활에 지쳐 있사오니, 이제 당신께로 돌아와 쉬겠나이다. 제가 걸어야할 바른 길을 되찾겠나이다. 예수님, 다시 돌아온 당신 양을 보시고, 제게 양식을 마련해 주소서. 저는 굶주려 있나이다.”(p103)
1월 4일
내가 몰두하고 있는 공부가, 방심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를 하느님께로 끌어올리고, 영복을 누리는 행복의 서곡을 울리는 기쁨 속에서 주님 안에 나를 세우지 위한 받침이 되어야 한다. 자주 공부에 대한 결심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 나는 지금 내 정신이 아니어서 신앙심은 그 매력을 잃고 있다.(p103)
나는 조심해야 되겠다. 나의 공부는 끊임없는 하나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기도는 끊임없는 하나의 공부가 되어야 한다. (p103)
무엇보다도 학문과 새로운 사실과 새로 나온 책과, 새로운 인물에 대하여, 그 열광이나 경박함이나 덧없는 모든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내 발언에 경계를 게을리 하지말고 조심해야 하겠다. 나는 모든 점에 대하여 가치평가를 잘하고, 또 가톨릭 문화발전 추세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러나 적당한 한도를 항상 유지한다. “무엇이고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Terenzio, AndriaⅠ, Ⅰ 34) 준주성범에 유명한 저자가 주는 몇 가지 충고를 언제나 기억하겠다. (p103-104)
1월 7일
내 생활은 끊임없는 희생이다. 내게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의 위대한 영혼과 자비로운 마음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끊임없는 사랑으로 불탔기 때문에 성 바오로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실천을 못하고 욕망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p104)
1월 8일
어제 해박한 교회사 교수 움벨토 베니니께서 특별히 마음에 드는 훌륭한 충고를 하셨다. 그것은 조금씩만 읽되 잘 읽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서에 관하여 적합한 말을 모든 것에 적용하겠다. “조금만 하되 잘하라” (p104)
학교에서나 방학 때나 군복무중 몇 권의 책도 나는 읽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잡지들, 많은 신문들이 있었던가! 이 모든 것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 것인가? 거의 없다. 얼마나 많은 신심서적, 얼마나 많은 성인전이 있었던가. 여기서 나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거의 없다. 모든 것을 알고 싶고 모든 가치 있는 저자들을 알고 싶다. 그러나 사실 여기 저기서 작품을 읽고 또 열심히 읽지만, 그 모든 것에서 나는 거의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거기서도 역시 침착하게 하여야 하겠다. 조금 하되 잘 하라. “너무 지나치게 알려 하지 마라. 바로 거기서 수많은 분심거리가 생기고 수없이 많이 속게 된다.”(준주성범 1편 2,2) (p104)
1월 11일
지금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고려할 때, 오늘 내 요구에 꼭 들어맞는 한 충고를 ‘준주성범’의 저자가 내게 주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주의하고 기도해야 한다. 말해야 할 적절하고 유익할 때가 오면 이로움을 가져 올 내용을 말하라.”(준주성범 1권10,2). (p105)
그러므로 내가 대단히 주의해야할 것은, 쓸데없이 지껄이는데 일초도 허비하지 말 것,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빈 사이가 없도록 곧 다른 일을 시작할 것. 그리고 내가 말할 수 있을 때는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나 자신에 관해서는 결코 말하지 말 것, 누가 일부러 묻지 않는다면, 자신의 일이나 행동에 대하여, 어떠한 암시도 주지 말 것, 이것을 하나의 법칙으로 삼으려 한다. 그리고 성직자의 정신과 덕성과 깊은 감정으로 할 수 있는 좋은 회화만을 하도록 하겠다. (p105)
1월 13일
우리 주 예수님, 당신의 별은 각지에서 나타났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나이까? 사도들의 음성은 땅 끝에까지 울렸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걸 듣지 못하였거나, 혹은 그 소리를 무시해 버리려고 하였나이까! 옛날 여러 사람들이 당신께 선물을 가져 왔으나, 오늘 세상의 왕들은, 전혀 당신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나이다. 그들은 당신의 권리를 알지도 못하며 당신의 얼굴에 이집트의 왕같이 당신을 쌀쌀하게 거절하였나이다. “나는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탈출 5,2) 얼마나 무서운 일이옵니까! 그러나 당신의 말씀은 다 맞았나이다! 당신이 십자가에 높이 매달림으로써 모두를 당신께 이끄시나이다. 이교의 어두움을 흩어 버리시고, 이단의 거짓 광명을 밝히어 깨끗이 하소서. 모든 백성이 당신을 섬기고 사랑하며 당신을 주님으로 모시게 하소서. “당신의 권능과 당신의 나라는 영원하나이다.” (p105)
1월 16일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심으로, 어떤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성덕을 응용하는데 있어서 내 생각은 비뚤어진 것이 있다. 곧 그것은 모든 행동에 있어서, 조그마한 결함이라도 알아 차렸을 때 화가가 라파엘의 그림을 정밀하게 베껴 그리듯,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모방하고자 마음먹은 한 성인의 본보기를, 그대로 따르려고 하였다. 언제나 나는 이러한 경우 성 루수는 이러하게 행동하였을 것이다, 혹은 그는 이것과 저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였던 일을 결코 실행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걱정하였다. 그 방법은 틀렸다. 성인의 덕행에 있어서 그 본질을 알아 들어야하며 부수적인 것을 취해서는 안 된다. 나는 성 루도비코가 아니며, 따라서 그가 했던 것처럼 꼭 그 방법으로 나를 성화할 필요는 없다. 나와 그와는 지위, 성격, 생활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p106)
비록 완전한 것일지라도, 한 표본의 어색하고 옹졸한 재생품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성인의 모범에 따라, 그들 덕성의 생명의 즙을 흡수하여 우리의 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특별한 자세이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 조건에 맞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성 루도비코가 지금 태어난다면 그는 그가 행하였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성화하였을 것이다.(p106)
1월 22일
내 영혼에 약간 물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내 영혼에 거의 알아챌 수 없으리만치 작으나 나를 배반하여 생긴 조그마한 틈바귀들에 많은 주의들을 해야 한다. 그것은 쓸데없는 한 마디 말이거나 약간의 자만심이거나 혹은 일하기 전후에 조급히 드린 기도일 수도 있다.(p108)
조심해야 한다. 최초의 과실 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과실이 온다. 쓸데없는 한 마디 말과 잡념 속에 드린 기도는 독설이 되고, 묵주기도나 묵상기도 중 방심이 생긴다. 나 자신에 주의하라! 처음부터 멈추라. (Ovide: Remedia amoris, 91)
내게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지기를!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7) (p108)
1월 27일
나는 말할 때 특히 남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신중을 기하기로 특별히 주의하겠다. 우리들의 혀를 많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위험은 커지고 과실은 많아지는 것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항상 세심하게 노력하리라. “주님의 법을 따라가는 사람들 그 생활 깨끗한 이 행복하도다.”(시편 118,1) (p108)
☞ 요한23세는 자주 말에 대한 조심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 말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성인에게는 걸림돌이었던 것 같다.
1월 29일
나는 오늘을 지극히 사랑하올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함께 지냈다. 인간으로서 사제, 주교로서 얼마나 훌륭한 분인가! 만약 나도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다면, 교황으로 뽑히는 일조차 내게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에 대해서, 그의 덕에 대해서,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본다는 것은 내게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 몇 번이나 나는 그의 전기를 읽었던가! 그가 남긴 말들은 얼마나 큰 감동으로 내 가슴에 와 닿는가! 그의 빛나는 모범을 따라 겸손과 부드러움과 평온함에 살아야 하겠다.(p108-109)
오! 내 지극히 사랑하올 성인이여! 여기 당신 앞에서 이 순간 참으로 많은 것들을 당신께 말할 수 있나이다. 저는 당신을 정답게 사랑하나이다. 저는 항상 당신에 대한 생각을 가질 것이며, 제 눈은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여, 제가 말을 안 할지라도 드리는 것을 굽어 살펴 보소서. 그리고 당신을 닮도록 나머지 일을 하소서. “제가 당신을 닮도록” (요한 23세가 1961년에 덧붙인 것이다.) (p109)
☞ 요한23세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사랑하셨던 것 같다.
1월 31일
낭비한 일부의 시간, 필요 없고 당치않은 한 마디 말만으로 내 심장을 스물네 시간 고동치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내 오만심을 없애도록 가르쳐야 한다. (p109)
자애로우신 성인께서는 내가 언제나 완덕을 향해가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신다. 완전함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만이 저를 당신에게 들어 올릴 수 있나이다. 죽은 자같이 당신의 두 손에 제 몸을 맡기나이다. 내게 생명을 주소서” (p109)
2월 1일
미소는 내가 화내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성실에 가까워진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웃음은 더욱 즐거워지리라. 결국 내 인내심은 즐겁고 미소 짓는 인내심이어야 한다. 너무 엄숙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 모든 가치를 손상하게 할 것이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내 마음을 당신 마음에 닮게 하소서.”(p109)
2월 2일
나는 어떤 고난을 받더라도 성인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하고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의무는 조용하고 평온한 성질의 것이요, 억압적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새벽에 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어 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계속 그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p110)
이전에 일하던 방법과 습관을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평온과 평화를, 그리고 끈기와 굳셈을 가져야 한다. 자신을 믿지 말고, 소중히 여기지 말 것이며, 하느님과 끝없는 사랑을 교환할 것이다. “그것이 제 일이요, 그것이 제 노역이나이다. 오! 자애로우신 예수님, 저를 도우소서! 마리아님, 마리아님, 당신은 제 어머님이오니 도와주소서." (p110)
2월 6일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반드시 일류 학자가 되어야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는 사람들이 세속의 기준에 따라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판단하는데 우리 자신들을 익숙하게 하여야 한다.(p110)
진정한 위대성은 온전히 오로지 하느님 뜻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께서, 나에게 책들을 태워버리고 환속하여 이름도 없고 경멸당하는 어느 수도원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내 마음은 피를 흘릴 테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진실로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도록 하자. “무엇이든 너무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p110)
2월 15일
잘한 일이 없을 때는 너무 많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를 너무 괴롭힌다면 그것은 변형된 또 하나의 집착의 표시가 될 뿐이다. 완덕이란 그런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완덕이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또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경멸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p110)
☞ 경멸이란 말은 어쩐지 귀에 거슬린다. “자신을 낮추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정말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 오직 하나의 해결책이란 다음과 같다. 내가 언제나 더욱 겸손해지고 또 내 비참을 봄으로써 나의 참 생명이신 사랑은 예수 성심 곁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주님께서는 나의 과오 위에 나를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자비로우신 예수님, 당신께 제 방심과 교만한 행동과 죄과와 더불어 저 자신을 당신께 맡기나이다.(P111)
2월 18일
사람은 결코 무릎을 꿇었을 때보다 더 위대해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박사 루수 뵈이요트가 남긴 아름다운 말이다. 이 말을 항상 기억하자. 진정한 위대성과 지극한 영광은 학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과 하느님 앞에서 우리들의 무능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을 바라는 마음이다. 설사 이 마음이 없이는 우리들이 거인만큼 커진다 해도 존재는 더욱 작아지는 것이다. “오! 마리아님! 마리아님!” (P111)
2월 24일
주님께서는 요 며칠 동안을 오락과 유희로 지낼 수 있게 하여 주시었다. 그러나 내 영혼은 그 때문에 어떤 실제적인 방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노는 것이 몹시 어리석은 짓이라는 듯이 내게 권태를 느끼게 하여주셨다.(p113)
이 밤에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광란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다. 극장에서, 가면 무도회에서, 죄악의 집에서, 공원에서, 심지어 거리와 광장에서까지도 기 막히는 뻔뻔스러움이여! 슬프다. 이 시간에도 내 예수의 사랑하올 성심은 얼마나 모욕을 당하고 있는가! 오! 예수님, 저는 당신의 고통을 받고 당신의 괴로운 수난을 생각하며 잠드나이다. 당신을 사랑하려는 제 강열한 욕망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 많은 제 불행한 형제들의 지독한 잘못을 잊게 하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내일 모든 사람들 머리 위로 풍요하고도 장렬한 좋은 결심의 말이 흘러내려 오도록 하소서. 우리들이 당신 앞에서 어떠한 것들이며 또 우리 생애의 가장 위대한 날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성교회에게 우리들에게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소서.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3월 7일
나는 은혜입고 마음씨 착한 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이 날을 끝마칠 수 없다. 그 가난한 수도자에게는 얼마나 큰 위대함과 예지와 성성(聖性)이 있었던가! 그는 모든 학생에게 특히 나에게 큰 교훈을 준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 그 몇 번이나 학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신심은 뒤로 물러가 버렸던가! 마치 신앙의 실천에 바쳐진 시간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데도 토마스 성인은 그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기 전에 먼저 성인이었고 그가 그렇듯 높은 예지에 도달한 것은 바로 그가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성인이여, 저는 당신의 고귀한 책들을 배울 때도 이 진리를 잘 이해하게 해주소서. (p114)
내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내 이상을 완전히 달성하고 또 그리스도와 성교회의 대의(大義)에 유익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자신을 성화시켜야 한다.(p114)
3월 18일
요 며칠 동안 나는, 편안치 못하고 무기력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거의 이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치통의 발작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3월 19일
요셉 성인을 생각함은 얼마나 따사롭고 위안되는 일이며 달콤하고 안온한 것인가! 내 계속되는 무기력에 대해 나는 그에게 한 가지 만을 구했다. 내면생활의 성실함, 특히 묵상과 영성체를 잘하게 할 성총을 구한 것이다. 이것이 내 피정의 실질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 지금의 내 정신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일인 것이다. “영광인 요셉 성인이여, 저를 위해 빌으소서!” (p115)
3월 22일
잡념과 이완심(弛緩心)을 피하도록 하자. 그것들은 잘 의식할 수 없으나 위험한 것이고, 특히 처음에는 바오로 성인이 주신 충고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성경 봉독과 권고와 가르침에 열중하십시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1디모 4,13-16). 내 정신생활에는 결코 휴가가 없어야 한다. 큰 피정이 다시 한 번 다가온다. 성총을 더 잘 받도록 예비하자. 신품성사가 멀지 않았다. “주님! 주님! 저는 당신 것이옵니까? 주님! 저는 그럴 자격이 없나이다” (p115)
3월 25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그 말씀보다 더 장엄한 말은 없다. 말씀이 탄생하셨도다. 이 얼마나 낮추심이며 사랑이랴! 그는 마리아의 품안을 통해 강생하셨던 것이다. 동정녀의 영광과 위대하심이여! 그러나 어느 날인가에는 그와 비슷한 일이 나를 통해 되풀이될 것이다. 강생하신 말씀을 내 두 손 안으로 들어 올릴 것이다. 그는 면주형상(麵酒形像)으로 내 가슴 속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분은 내 구령(救靈)과 전 인류의 구령을 위해서 봉헌되셨다. (p115)
그 순간이 다가왔다. 내 어찌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있으랴! 어찌 내 영혼으로 하여금, 이 순간이라도 이 생각에서 빠져나가도록 할 수 있겠는가? “오! 예수님, 오! 마리아님, 내 영혼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시고 감동케 하소서.”(p115-116)
4월 1일
오늘 저녁 다시 한 번 차부제품을 예비하기 위한 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피정의 나날을 고통 받으시는 성심께 바친다. 오소서, 성령이여, 지복한 빛이여, 내 영혼을 밝음으로 채워주시고, 내 마음 속에서 거룩한 덕에 대한 원욕(願慾)을 불붙여 주소서. 내 두려움을 씻어주시고, 내 거칠음을 부드럽게 해주시고, 내 상처를 치료하소서. (p116)
마리아여, 고통의 동정녀여, 십자가의 수난 중에 있는 당신의 어린 아기처럼 나를 세상에 내 놓으신 분이여, 제 어머니임을 보이소서. “성모여, 죄악의 질곡 끊으사, 불쌍한 소경들 눈뜨게 하고, 나약한 우리가 악을 물리쳐 선한 일 행하게 빌어 주소서. 우리가 지은 죄 용서받고서 어질고 깨끗함 입게 하소서.”(찬가 Ave Maris Stella) 요셉성인이여, 제 내면생활의 주인이 되어 주실 분은 바로 당신이나이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그렇듯 또렷한 모범을 제게 보여 주셨나이다. (p116)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여! 제게 당신들의 신덕과 당신들의 애덕을 얻어 주소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여! 성 비리버 네리여! 성 이냐시오 로욜라여, 성 루도비코여,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와 성 요한 베르크만이여! 성 알렉산드리아 치명자여, 성 가를로 보로메오여, 저를 위해 빌어주소서. 그리고 내 수호천사여, 당신께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의 묵상을 맡기나이다. 나로부터 해방감을 주시고, 내 무기력 속에서 나를 굳세게 하시고, 모든 일에 있어서 평정과 고요와 규율을 지키게 하여 주소서. “계시해 주시고 지켜주시고 지도해주시고 다스려 주소서” 아멘.
4월 14일
만약 내가 피정동안 특히 서품된 날에 느낀 것같이, 예수님을 항상 가깝게 느낄 수 없다고 해서 놀라거나, 불평해서는 안 된다. 물질적인 내 일과, 예를 들면 학과공부나 유희도 간접적으로 나와 내 영혼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느님께서 그러기를 원하시니 나는 그것으로 자신을 위로하자. 이런 일과 때문에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의무이다. 예수님의 순수한 기쁨과 사랑에 대한 생각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유익한 욕조 속에 잠기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자주 힘을 빌려야 하고, 모든 행동은 내 내심생활에 의해 생기를 얻어야 한다. 성 요셉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셨지만 그의 영혼과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 안에 있었다. “오! 경애하올 성 요셉이여, 저를 도와 당신을 본받게 하소서” (p117)
4월 16일
내 이웃과의 관계는, 내 말이 완전할 때, 정녕 성스럽게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나는 특별한 주의를 하겠다. 어떤 구실로라도 친구와 이웃에 대해서 말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 수련을 위한 기회는 하루 동안에도 수없이 많다. 내 영혼을 하느님께로 들어올리기 위하여, 그리고 겸손의 행동을 이루기 위하여 그 기회들을 이용하리라. 결국 나는, 이웃이 언제나 나보다 훌륭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주여, 이 내 입에다가 파수병을 두시옵고 내 입술 문에다가 순라군을 두옵소서”(시편 140,3)
4월 19일
하루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서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일에 전념하겠다. 언제나 무슨 일에서든 겸손할 것이며, 하느님 앞에 또 친구들 앞에서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겸손의 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 필요성을 어느 순간이나 내 손가락으로 느끼는 것 같다. 두 번째로 겸손함으로써 성찬의 제병형상으로 나타나시는 성체의 광채 속에서 빛나고 계신 예수님의 실존 가운데 내가 항상 머물도록 힘쓰리라! “오! 자애로우신 어머니, 겸손의 주인이여, 저로 하여금 당신을 닮게 하소서.”
4월 22일
나는 언제나, 덕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겠다. 무엇보다도 과오가 많은 자신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큰 희생을 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겠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한다. 언제나 한결같고 복된 성격에 합치되는 겸손이어야 한다. “오! 예수님 나를 겸손케 하소서” (p118)
4월 26일
치명자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은 지상에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인들의 피가 붉게 물들어 있는, 이 복지 로마에서는 유통되는 화폐이다. 그러나 이들 치명 복자들과 우리들을 연결하는 사슬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에 대한 기억도 더욱 더 따사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순결한 세 송이 백합꽃과도 같이 아름답고 가련한 세 소년이다. 박해자의 칼날은 이른 인생의 봄철을 꺾어 버렸다. 허지만 그들은 얼마나 좋은 기회를 타고 났던가!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2-3) (p118)
그들에 관해서 아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다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알고 계신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덕은 천국의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이마에는 영광의 화관이 씌워져 있고, 그들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그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오! 지극히 사랑하올 성 플로랜틴, 소시우스, 빅토린이여, 저도 암흑과 멸시 속에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 주소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 제 피를 흘릴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날 저는 영광의 옷을 입고 당신들의 기쁨에 참여하고, 당신들과 함께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묵시 14,4) 예수님을 모실 수 있게 하소서. (p119)
4월 28일
아!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피를 흘렸던가! 또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한 많은 영혼들은 그들의 일생을,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한 희생으로 바칠 방법을 찾았을까? 그런데 나는 내 영혼의 이익과 다른 영혼들을 구하고, 내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가장 적은 고행도 감당할 수 없단 말인가?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통을 받으며 사랑으로 빛나는 모범 신앙자들 앞에서 죄인인 나로서는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박해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기쁘게 감수하는데 익숙하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성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p119)
오! 내 주님, 당신의 간절한 모방자의 기도를 받으시고, 환난을 기꺼이 받도록 힘을 주시고 당신 사랑을 위해 당신과 함께 어떤 고통이라도 참아 나가겠다는 타오르는 목마름을 허락해 주소서.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4월29일
이 세상의 잡다한 소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는 높은 곳, 몬떼 마리오보다 더 높고, 지상의 모든 산보다 더 높은 그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별로 생각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서는 지금 살아있는 지상 존재 중에 한낱 티끌인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 분은 어느 날엔가 그들을 심판하실 하느님이시고, 그들은 그분 앞에서 부끄러워 망연해지고 부서져 버릴 것이다. 아! 세상 사람들은 그분의 판단으로는 얼마나 어리석으며 그리고 그의 심판에 대해 얼마나 눈먼 사람들인가! (p120)
4월 30일
지상의 낡은 사물로부터 천상의 위대함에로, 세속적인 사치의 헛된 번쩍임으로부터 성덕의 고요한 빛남에로, 내 생각은 재빨리 옮아간다. 오늘의 성녀를 생각해 봄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인가! 그녀는 버림받고 경멸을 받으면서도 성교회의 이익을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힘찬 방법으로 행동하여 스스로를 수련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이 경멸하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힘이라고 하신다”라는 말은 위대한 동정녀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에게서 경탄할 만치 잘 증명된다. 겸손하며 자신을 감추고, 그리고 천상의 하느님만을 사랑하려하였던 그녀는 교황을 로마로 소환시킴으로써 성교회에 평화를 돌려주도록 선택되었다.(p121)
그녀와 비교하면 그녀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세속의 현자와 정복자들 또 위인들이란 도대체 뭣이란 말인가? 내 자만심을 없애는데 얼마나 숭고한 교훈인가?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얼마나 한 믿음의 동기가 되는 것인가! (p121)
5월 4일
나는 특히 내심생활의 추구와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일에 끌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보트를 흘려보내는 물이 보이지 않는 틈새를 통하여 조금씩 스며들어 왔다. 방심할 때마다 내 영혼 안에서 흘러가 버리는 것은 한 조각의 내적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특히 조그만 일들에 눈을 떼지 말 것이다. “오! 마리아님, 지극히 경건한 동정녀여, 제 영혼을 모아 주소서” (p122)
5월 18일
이렇듯 아름다운 성모성월에 내 일들은 잘 되어나가고 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생각이 때때로 나를 온유하게 해준다. 그리고 나는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그것을 즐긴다.(p123)
젊음으로 원기 왕성한 가톨릭의 전사들이 이태리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노동자의 위대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노동헌장(Rerum Novarum)을 기념하고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기쁨으로 축하한다. 그때마다 아직 사제직에 오를 준비도 안 된 나로서는 그 때의 그 큰 사건을 상상하고 교황의 그 위대한 생각에 열띤 감격과 예찬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과 기도로 예수님 곁으로 한층 몸을 붙이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p123)
☞ 강신모 신부님도 평화방송의 ‘성경강독’ 시간에 레오 13세 교황님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생소하지만 훌륭한 교황이셨던 것 같다.
사회적인 문제는 물질적 삶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에 관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지성인들의 동요와 가난한 사람들의 불평, 그리고 사제직에 있는 영혼들의 열성 있는 활동, 그들의 실망과 그들의 승리 등을 생각할 때면, 그 문제는 내 주의와 흥미, 내 열렬한 서원과 일 등에 맞갖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p124)
특히 그 커다란 그림의 배경에서 넓은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봄의 태양과도 같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러한 것이다. 그는 평온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두 팔은 벌린 채 있는데, 성심은 모든 것을 덮어씌우고 스며드는 빛으로 빛나고 있다. 오! 성심이여, 당신은 진정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시나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어려움의 해결이시나이다.“ 당신 안에 우리들의 희망이 있고, 당신이 구해줄 것을 기다리나이다.
오! 예수님, 사회와 가정과 지성들 안에 당신의 자리를 다시 찾으소서. 그리하여 평화로운 주권자로서 다스려 주소서.(p124)
5월 26일
요 며칠 동안 부속병원에서의 임무와 학과 공부는 자유 시간을 전부 빼앗는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제나 더욱 더 많이 알아야”하지만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하는 것이다.(로마 12,3) 그리고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p124)
7월 20일
어제 저녁의 내 조그만 기록은 중대한 결함이 있다. 부속병원에서의 변함없는 임무와 임박한 시험은, 마구 휘갈긴 이 몇 줄에 대해서 신경을 쓸, 모든 가능성과 여가를 빼앗아 가버렸다. 장중한 축전들, 축복의 기회들, 예수성심성월 축일, 이 모두가 내게 하나의 암시도 주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조금만 기록들을 지나치게 아끼고 싶은 의도는 없다. 이 기록들이 내게 자만심의 한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때에는 불에 던져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p125)
☞ 그랬더라면 우리는 이 소중한 기록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1903년 4월 1일 차부제품(次副祭品)을 예비하는 부활절의 피정
예수님, 당신의 숭고한 교훈을 듣기위해 금년 들어 또 다시 당신 앞에 왔나이다. 제 마음은 이번에야 말로 당신께 엄숙하게 바쳐지기를 간구하나이다. 성교회는 저를 불렀으며, 당신은 저를 초대하였나이다. 그래서 “보소서,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 저는 어떠한 계획도 전혀 세우지 않았나이다. 그저 제 존재의 껍질을 벗으려고 노력하오며 이미 제 것이 아니나이다. 제 영혼은 당신 앞에서 백지가 되었나이다. 주님, 그 백지 위에 당신 마음에 드는 한 마디 말 ― 저는 당신께 속한 것이라고 쓰소서.(p125-126)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리고 일생 동안 섬기며 또 죽은 후 영원히 궁전에서 하느님을 즐기기 위하여 왔나이다. 과학의 모든 대답도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문답의 몇 마디만 하지 못하다.(p126)
내 평생 의무는 세 마디로 요약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섬길 것,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이외의 아무 다른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 하느님의 뜻은 바로 내 뜻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 하나만이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가장 작은 사물에 있어서도 그래야 한다. 바로 이것이 처음이 되고 기본이 되는 원리이다.(p126)
특히 내 친애하는 성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무관심은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적인 냉담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름다운 즐거움이나 뜻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될 때는 어떤 것에 대해서나 초연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덕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평정, 하나의 고요, 고상한 정신, 깊은 철학이다. 우리들은 그것으로 해서 높은 이상을 목적으로 삼게 되고, 또 중요하지 않으며 저속한 사물들 때문에 마음을 흔들이지 않게 한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방법이 어떠하든, 우리들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 아주 힘있는 지렛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렛대는 우리들이 덕을 닦아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 몇몇의 실천사항을 모아 보았다. 그것들은 내게 흥미 있고 기억해 두어야 할 것들 이다.(p126)
행운의 재산, 부, 이런 것들은 주님께서 내게 주실 수도 있었을 테고 안 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내게 그런 것들을 갖추어주지 않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렇다고 내가 주님께 불평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내게는 성화의 한 방법이다. 따라서 주님께 감사할 일이다. 때로 심한 어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얼마의 빚을 지기도 한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우울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허락하신 이는 하느님이시며 이 사실만으로 족하다.(p126)
재능과 기억력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은 재능을 받았다고 해서 슬퍼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보다도 더 적게 주신다면 내가 안 받을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든 않든 시험에 통과하며 좋은 성적을 딴다는 것은 마음이 끌리는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신 것을 모두 했을 때에는 내 공부의 좋고 나쁜 결과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p127)
때로 내 신앙을 실천함에 있어서, 내 모든 힘을 기울여 마음을 가다듬고 노력하고 또 하느님 말씀의 부드러움을 느끼려 노력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다. 나는 마음이 돌로 만들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방심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감추고 계신 것 같다. 슬픔과 불만이 나를 엄습해 오고 나를 흔들어댄다. 아니다. 이 모든 약함을 거부하자. 이런 경우에도 즐거움과 평정을 유지하자. 그리고 나 자신을 위로하자.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실 것이다.(p127)
여러 사람들 가운데 서거나 혼자 서거나 불평이나 비판은 결코 한 마디도 말아야 한다. 행복 되고 다정한 자발적인 미소가 언제나 내 입술 위에서 꽃을 피워야 한다. 성공의 기쁨으로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생존의 슬픔으로 내 마음이 좌절되지 말아야 한다. (p127)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과 기쁨을 위해 행하는 부드럽고도 온전한 봉헌이 그 나머지 모든 것을 흡수해 버려야 하고 나 자신의 저속한 움직임을 변형시키거나 승화시켜야 하는 것이다.(p127)
오! 부드럽고 겸손하신 예수님, 내가 이 진리를 이해하도록 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것을 생활에 적용토록 하소서. “내 잠자코 입을 아니 여오니 당신이 하신 까닭이오이다”(시편 38,10). “오! 동정녀 마리아여, 지극히 부드러우신 어머니시여, 저를 도와 주소서” (p127)
사소한 덕행일지라도 그것이 성총의 더함을 불러온다는 사실이 참이라면, 이와 반대로 그것이 아무리 작은 행위일지라도 주님께서 내게 행하도록 요구하신 덕행을 소홀히 함은 나로하여금 많은 성총을 잃게한다는 사실도 참이어야 한다. (p128)
이것이야말로 내가 어째서 영적 생활에서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나아가게 되는 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관용과 친절이 많다든가 적다든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성총에 보답하는가 하는 문제다. 성총은 언제나 마련돼 있으나 우리들의 결함이 그것을 얻기를 방해하는 것이다.(p128)
성인들의 성성(聖性)은 요란한 대사(大事)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소하게 보이는, 대단찮은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중 최초의 삼십 년간은 나에게 빛나는 모범들로 가득 찬 교훈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p128)
방심, 자만, 공부의 소홀함, 시간의 낭비,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의 애덕을 거스른 잘못, 조그만 허영, 오! 하느님, 얼마나 큰 잘못이옵니까! 나를 눌러 부스러뜨리기에 족하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이다. 큰 죄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보고 느끼며 또 이 사실을 확신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느님, 당신께 애원하는 저를 용서해 주소서” (p128)
이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좀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죄에 대한 보속을 나는 하였던가? 아니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한 조각까지 그 모든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내가 하느님께 채무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내 가장 미소한 의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세심하게 완수하는 것이, 올바른 보속인 것이다. 그것은 관대한 것도 아니고 심한 것도 아닌 가차 없는 심판이다. 내가 내 빚을 갚지 못하는 한 하느님께서, 내게 내리신 환난과 영혼의 메마름과 다른 비슷한 고난에 대해 나는 불평할 권리가 없다. 나 자신이 버림받고 외롭고 박대 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다소곳이 이마를 조아려야할 것이다.(p128-129)
오! 조그만 잘못들! 모든 것은 내 영적 생활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성총이 나를 부르고 차츰차츰 증가해 나가듯 이와 마찬가지로 과실들도 서로서로 꼬리를 물면서 일어나 성총의 효과를 없이하고 무한히 증가되면서 나를 벼랑 가장자리로 밀어가는 것이다.(p129)
나는 언제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내게 깨우쳐준 말을 기억하리라. “그대에게 수천의 방해로운 사념과 관경을 보여주는 악마(즉 다른 나의 이성)로 하여금 그대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도록 가만히 버려두라. 악마는 그대의 승낙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밖에 없으므로 그 문을 굳게 닫아두도록 하여 평화 속에 있어라. 환영들이 그대 뱃전에서 우왕좌왕하더라도 그것으로 불안해하지 말 것이다. 하느님께서 거기 계시는 한 두려워 말라.”(p130)
주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것은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과 아무 관계없이 경멸당하는 것까지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않으리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2,19) 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겸손에 이르러야 한다. 예수님, 저에게 적어도 그것에 대한 진정한 욕망만이라도 허락해 주소서.(p131)
이 감정은 언제나, 어디서나 강의시간이나 공부할 때나 대화할 때나 나를 따라 다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을 자랑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 여기에서도 역시 무시됨을 사랑하는 것이 내 좌우명이리라. 다른 사람들, 친구이든 웃어른이든 그들에 대한 내 태도는 그 숭고한 어린 예수의 그것이어야 한다.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루카 2,46) (p132)
예수님께서 내게 가까이 하시는 것을 느낀다. 그는 요 며칠간 내가 바다에 떨어짐으로써 얼마나 내게 필요한 지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내 비참과 내 교만을 숙고하면서 바닷물에 얼마간 잠겨있도록 버려두셨다. 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위험에 처한 순간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하시기 위해 나를 맞으시려 걸어오시며 미소 지으신다. 나는 베드로와 같이 그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p132)
당신 없이는 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사오나 당신은 제가 의지하는 기둥이나이다. 저는 결코 저의 비참을 잊지 않겠사오나 그것은 끊임없이 두려움으로 떨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보잘 것 없음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큰 믿음으로 당신 성심께로 가까이 다가감을 위함이나이다. 왜냐하면 제 비참은 당신 자비와 사랑의 옥좌이기 때문이나이다. “자애로우신 예수님, 저 당신과 함께 있사오니 저에게서 떠나지 마소서” (p132)
오늘은 성 목요일, 위대한 예수 성심의 날, 그 혼례의 날이요 동시에 그 사랑을 서약하는 날이다. 내 자애로우신 주님 역시 내게는 일년중 가장 장중한 오늘! 나를 올려 주시고 비춰주셨다. 그를 받으러 다가갔을 때 나는 무한한 평화로 흘러넘치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그분 현존의 희열을 느꼈다. 나는 격정으로 그분의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고별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면서 내 두 눈을 가리는 끝없는 애정으로 내 전신은 부드럽게 떨리며, 나는 그를 그의 감옥으로 따랐다. (p132)
오! 그는 언제나 내가 그의 욕망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끊임없이 성체에 대한 신심 안에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내 몸을 불태운다. 그리고 나는 성체 옆에서 예수님을 위해서만 생활하고 싶다는 욕망 ― 즉 내가 느끼며 또 나를 자극하는 이 욕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또 그의 도움 없이는 틀림없이 저질고야 말았을 수많은 죄과에서 구함을 받는 성총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이 초대에 무관심할 수가 있겠는가? (p133)
오! 예수님,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전부터 기다렸고 갈망했는지 모르겠나이다. 보소서. 예수님, 저는 조국과 부모와 저의 보잘것없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 가나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마태오와 그리고 다른 사도들을 맞아 들였듯이 저를 받아 주소서. 만약, 제가 당신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면 적어도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빵 조각이라도 줍기 위하여 당신 발밑에 앉겠나이다.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 83,11) (p133)
오직 하나밖에 원하지 않나이다. 언제나 당신의 성스러운 사랑 안에 거(居)하여 당신이 당신의 성부와 하나이듯 나 또한 당신과 하나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 당신 앞에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서움에 떨며 간절히 원하오니, 만일 제 허원(許願)을 언젠가 어기리라고 당신이 알고 계시다면, 지금 당장, 당신께 충성을 맹세하기 전에, 죽게하소서. (p133)
요 며칠간 주님께서 당신 수난을 묵상하고 느끼고 간직하게 하고 싶어 하신 모든 좋은 생각과 감정을 상기해야 한다면 한 주일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 자만심이 내 부주의의 한 순간을 이용하여 공중누각의 성벽을 구축하며 나를 내치려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수난지에 대해 생각할 것을 규칙으로 삼겠다. 그것은 겟세마니, 카야파의 집, 그리고 골고타 산상의 세 곳이다.(p133)
십자가는 언제나 나에게 커다란 도움을 제공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죄인을 가슴에 안기 위해 팔을 벌리고 계신다. 내가 잘못을 범할 때마다, 그리하여 평정을 잃어버릴 때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십자가상의 예수님 발밑에 무릎 꿇고 있는 나 자신을, 구세주의 상처 입은 늑방에서 비처럼 흘러내리는 피와 땀을 머리 위에 받는 나를 상상하겠다.(p133-134)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결론짓기를, 골고타 산은 ‘사랑하는 이들의 산’이며 ‘사랑의 동산(신애론)’이라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골고타 산을 나 자신에게 더욱 친근하게 해야 한다. 또한 예수성심이 최초로 그리고 가장 엄숙하게 나타난 곳이 거기 골고타 산상이기 때문이다.(p134)
마리아여, 마리아여, 지극히 사랑하올 어머니 마리아여, 당신의 눈물을 거두어 주소서. 당신의 아들은 이제 부활하려 하나이다. “하늘의 여왕이시여, 기뻐하소서” 저는 당신 품으로 가오니 저를 당신 아들에게 보여주소서. 마리아의 정배(淨配)이신 성 요셉이여, 사도요 완성인이여, 예수 성심의 두근거림을 들으신 당신들은 이제 당신들의 성교회에 서품되려는 저에게 당신의 사랑의 영광을 주소서. (p134)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여, 그리고 로마와 전 세계의 치명자 복자들이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여, 지극히 사랑하올 제 주보성인이여, 저를 위해 기도하여 주소서. 죄인인 저, 하늘 궁전 앞에 엎드리오며 천상낙원의 모든 복자들의 기구에 저를 의탁하나이다.(p134)
교황 대리 추기경께서는 교황 성하와 교회의 이름으로 내 성사를 맡으시고 축복하시고 이루어주셨다, 나는 이 세상 것을 버렸고 내 신품성사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적이어서 물러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내가 엄숙하게 엎드렸다가 일어나 제대로 다가갔을 때, 그리고 추기경께서 내 허원을 들으신 후에 새로운 영광의 제복(祭服)을 내게 입혀주셨을 때, 그 큰 성당의 고요한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교황들, 신앙고백자들, 그리고 치명자들 역시 몸을 일으켜 내 기쁨을 함께 하며 형제의 우의로써 나를 껴안아주고, 부활의 천사 합창단에 모여, 이처럼 비참한 존재를 높이사 지극한 성무를 맡겨하신 영광된 예수께 하례하여 주는 것 같았다.(p135)
오! 내 혀는 이 순간의 모든 사랑의 상념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순간의 추억은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 나는 하느님과의 사랑과 그의 위대함과 영광을 끊임없이 예찬하겠다.(p135)
더듬거리면서라도 입 밖에 낸 말은 오직 다음의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렇다. 나는 이미 내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 속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여러 번 말한바 있으나, 오늘은 한층 더한 열정으로 되풀이 한다. 나는 예수님께 속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 내 모든 자유를 받아들이소서!(p135)
1903년 8월 29일 휴가 중의 피정
모든 내 참상보다도 내 심약과 부실 등 모든 것이 최초의 내 열성을 상당히 식혀 버렸다. 그 명백한 증거로 특별한 성찰을 거의 포기해버린 사실과 묵상때 방심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더 잦아지는 사실 등이다. 묵상에서 거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성무일도를 염할 때 별다른 느낌이 없다는 사실도 그 증거의 하나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독선으로까지 나아간 건방증과 거리낌 없는 태도도 그러하다.(p136)
낙담하지 말고 보다 많은 쾌할과 용기를 갖도록. 죽음이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런데 등불이 비어있다면? “오! 찬미하올 예수님, 제 영혼을 동정하소서”(p136)
구체적으로 써 보자면 나는 다음의 세 가지 일에 특별한 주의를 기우리려고 결심한다. 특별 성찰 ― 이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생활과 신심의 실천에 있어서의 내 품행을 채점하는 것이다. 존경심과 주의력을 가지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성무일도를 염할 것. 하루 동안에 그에 대한 많은 사랑의 행동과 많은 화살기도(짧고 열성있는 기도)로써 성체를 영할 것. (p136)
1903년 11월 1일 ~ 3일 학년 초의 피정
휴가 중의 피정때 내가 약속한 규약은 내 게으름 때문에 조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 나는 자애로우신 주님께서 내려주신 ― 특히나 지난 해 ― 수없는 성총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덕행과 내면적 발전의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직도 한 가련한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p137)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른 것을 후회하는 어린애로서 나는 다시 한 번 그러나 이번에는 보다 성실하게 내 결심을 다짐한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의 마음에서 이젠 성총의 도움으로 이 결심을 굳게 지켜나갈 자신이 솟아남을 느꼈다.(p137)
기구할 때와 신심행사 때의 내 품행뿐만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말씨도 나날의 시험의 대상으로 취하려 한다. 왜냐하면 말씨가 흩어지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내 성격과 내 새롭고 미묘한 상태를 가장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p137)
1903년 12월 9일 ~ 18일 부제서품을 위한 피정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시기 당신의 뜻 따르라 내게 가르치소서.”(시편 142,10) 다시 한 번 더 ― 1년이라는 짧은 기간, 세 번째로 ― 주님께서는 이 성스러운 피정 기간에 나를 그에게로 부르셨다.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요한 11,28) 이 피정들은 덕의 길에 있는 세 개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어야 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성과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아직 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 나는 굴욕을 느꼈고 내 비참에 대해 수치를 느낀다. 그러나 낙담하지는 않는다. 마치 여름의 심한 더위에 냇가에 이른 수영객처럼 나는 다시 한 번 더 성총의 유익한 바다에 내 몸을 잠근다. 그리하여 나를 깨끗하게 하고, 존경하올 아르스 본당 신부가 말한바와 같이 따사로운 사랑의 목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쪽 강변에서 미소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자애로우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 내 하느님이시여, 당신이 스스로 움직이소서. (p138)
☞ 아르스의 요한 비안네 신부이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나는 언제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태도는 또한 명백히 하느님께서 때로 교부들과 그 선지자들 앞에 나타나시어 저들을 존경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언제나 내 앞에 있으신 것처럼 공경의 예를 나타내야 한다.(p138)
정신은 정신대로 또 이 생각에 젖어있어야 한다. 나를 내려다보시며 그의 빛으로 나를 비추시는 하느님께서는 내 모든 행동, 심지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내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그리고 이 내 비참,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그는 내가 범한 잘못과 내게 주신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성총을 기억하고 계시다. 이 모든 사실은 나를 너무나 잘, 그리고 미묘한 의식으로 하느님께 결합하게 하므로 나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이유들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p139)
이 첫날의 모든 묵상의 빛나고 숭고한 결론은 무관심이라는 위대한 원리이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할 것, 가장 곤란한 일이라도 ― 설사 내 감정과 내 자존심을 대단히 상케하는 것일지라도 ― 언제나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를 갖춰놓을 것이다.(p139)
☞ 무관심은 하느님의 섭리에 내 맡기는 것이다. 많은 성인들이 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내 웃어른들과 지도신부께서 결정하신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기에 힘든 순명이 아니라, 내 판단과 뜻을 웃어른들의 의견과 명령에 맞추어야 한다는 일이다. 겉보기에는 내 견해가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거룩할지라도 그것들을 발로 짓밟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상상력과 또한 내가 즐겨 쫓는 것도 없애야 한다.(p139)
그러므로 편견과 사상누각은 쌓지 말 것, 많은 생각을 갖지 말 것, 정당하고 성실한 생각만 가질 것, 욕망은 더구나 작게 가질 것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나는 이런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p139)
주님께서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 하느님 한 분께만 알려지고 아마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경멸되고 무시당하여 알려지지도 않은 일생을 생각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자만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사랑을 받을 만한 일생을 주시거나 무관심한 일생을 주시거나 아무렇게 되더라도 내 자신을 충분히 통제하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p140)
내가 모든 천사의 학문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 머릿속에 악인들처럼 교만한 생각이 들어있다면 나는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악마이리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p140)
이 세상에서의 보속은 훌륭한 생활을 위해서는 본질적 요소이며 사후의 완전한 진복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너무 즐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때에 따라 특히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이 몇 해 동안 고난을 사랑하여 고통 받기에 습관을 들여야 한다.(p140)
☞ 나도 이 세상에서의 어려움, 고통을 하느님 나라를 위한 보속으로 생각하고 즐거이 받으리라.
엄격한 의미로 성인들을 모방함은 내게 불가능한 것같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나 그리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물에 있어서도, 특히 식생활에 있어서 고행에 친숙해야 한다. 나는 쓴 맛이 조금도 없는 단 것은 아무것도 내 입으로 가져가지 않으리라. 또한 그것이야말로 하느님 섭리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고통을 주신다. 그러나 위안이 따르지 않는 고통은 결코 주시지 않으신다.(p140)
나는 특히 시각적 금욕을 하리라. 나는 아무 것도 자신할 수는 없다. ‘눈으로 하는 간음’도 나를 비참한 결과로 이끌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술에는 언제나 물을 많이 탈 것이다. 그것은 보다 위생적이기도 하고 내 머리를 식혀줄 것이다.(p140)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또 있다. 그것은 내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가능성이다. 지옥에는 나를 위한 자리도 있을 수 있다. 나를 지옥의 심연 가장자리로 끌어다 놓기 위해서는 내가 냉담한 정신상태에 버려두는 것으로 족하다. 그렇게 되면 단 하나의 죄일지라도 어느 불행한 죄인에게 그러하듯 내게도 지옥에 떨어지게 할 마지막 계기가 될 수 있다. 오! 나는 얼마나 약한가? 이 하나의 생각만으로도 나를 겸손하게 한다. 나 역시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주님! 저는 당신께 다시 한 번 되풀이 하오니, 당신께서 그 곳에서 저를 구해 주신다면 저는 무엇이라도 길 위의 먼지처럼 뭇 발에 밟힐지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세상에서는 당신 사랑의 불꽃으로 저를 태워 주소서.(p140)
나는 내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하느님께서 순간마다 원하시는 바를 해야 한다. 미래의 걱정은 그에게 맡기고 나는 삶의 안주인인 죽음에 관한 생각에 친숙해 지기를 배워야 한다. 나는 특히 어떤 한 사물에 집착하지 않도록 노력하리라. 별로 중요성이 없는 사물일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의복, 그림책, 서류, 공경의 대상까지도, 내가 언젠가는 그것을 버려야 하고 나 자신도 모든 사람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을 받게될 것을 예견해야 하기 때문이다.(p141)
시험에 대한 염려가 평온을 해친다. 나는 시험을 받기위해 한 자리에 모인 교수단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할 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엄하신 하늘의 심판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하늘나라 궁전 앞으로 죄악 투성이인 내 영혼을 가지고 홀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성인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던 것이다. (p141)
"주님은 의인들과 함께 계시옵기 그들은 겁에 질러 소스라치리라."(시편 13,5) 그런데 나는 당연히 두려워할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간, 보다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곧 이 세상 시험에 대해서는 겁을 좀 덜 내야하고, 성공을 이루어 공로를 얻기에 한층 더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의 심판이 내게 덜 무서워질 것이다.(p141)
나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고 조금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성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떤 좋은 일을 하려할 때 가끔 다른 사람들의 뜻을 거슬러야 하고 무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갈라 1,10)
오! 다정하신 예수님, 제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당신께서 실현시켜 주시리라 확신하고 당신 발밑에 몸을 던지나이다. 저는 당신이 원하시면 어디에서 어떤 대가를 치를 지라도 또 내 희생이 어떤 것이 되든지 당신을 섬기기 원하나이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나이다. 겸손할 줄도 모르고 오직 한 가지만을 말할 수 있나이다. 인제 그것을 제 온 마음으로 당신께 말하오니 겸손하고 싶나이다. 겸손을 사랑하고 싶나이다. 내 인물에 대한 이웃들의 무관심을 사랑하고 싶나이다. (p142)
눈 감은 채 기쁨을 가지고 이 경멸과 고통과 천대의 분류(奔流)속에 제 몸을 던지나이다. 당신은 저로 하여금 그 분류 속에 있게 함을 즐겨하시나이다. 당신께 이 말씀을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우나 당신께 약속하나이다. 저는 당신을 위하여 경멸받고 고통받기를 원하나이다. 저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옵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없사오나 제 영혼의 모든 힘으로써 이렇게 원하나이다. “당신을 위해 경멸받고 고통받고 고통 받겠나이다” (p142-143)
기쁨은 영적 생활의 중요한 요소이며, 덕행의 의상이다. 그것은 정신이며, 본능이며, 재능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총이다. 기쁨은 특별히 정신적 자유의 원동력으로 생각된다. 정신의 기쁨은 사랑을 넓히고 희생하게 하고 겉보기에 조화될 수 없는 것같은 영적 생활의 모든 요소들을 결합할 능력이 있다. (p143)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고 변함없이 기쁨에 차있도록 해야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한 순간도 나에게 부과되는 고행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신의 개화를 마비시키고 우리들에게 슬픔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자만심이다. 고행은 생명과 고요와 평화를 부르는 것이다.(p143)
성인들은 아주 쾌활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수사들과 수녀들은 즐거운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오로 성인처럼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키는”(1코린 9,27)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행하는 사람은 천상에 기원을 둔 순수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p143)
신심은 너무나 일반적인 덕이어서 그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 특히 성직자들은 별로 문제삼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적 생명이 호흡하는 공기이다. 누가 자기가 호흡하는 공기를 보았으며 거기에 주의를 기울였던가? 무엇보다도 나는 이 신덕을 매일 매일 실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p143)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긴 생명을 주시고 또 성교회 안의 어떤 것을 섬기는 성직자가 될 방법을 마련해 주신다면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이렇게 말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 신부는 열렬하고 단순한 신덕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리고 보고 느끼는 미묘한 여러 방법에 있어서도 교황을 위해 교황과 함께 있었다.”고. 나는 벨가모의 훌륭한 노인신부들처럼 되고 싶다. 그들은 교황, 주교를 성교회의 교리와 정신 외에는 보지 않았으며 또 보기를 원하지도 않았다.(p143)
의심되는 점은 쓸데없이 입을 열기보다는 모르는 사람처럼 침묵하기를 택하리라. 그런 부질없는 말들은 성교회의 올바른 진실로부터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결론들이 전통적인 신앙의 내용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약간 당돌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결코 놀라지 않으리라. 흔히 경이는 무지의 아들인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께서 그의 계시의 불변 진리를 보석보다 투명하고 순수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사실을 운용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것이다.(p144)
☞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의 정신은 여기서 싹튼 것이 아닐까?
전반적으로 내가 지킬 규칙은 모든 것을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말을 듣는 일이며, 반성하고 많이 공부하는 것이다. 또 판단에 조급하지 않는 것이며, 지껄이지 않는 것이다. 소란 떨지 않는 것이며 언제나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교회의 정신으로부터 엄지손가락 하나만치도 나를 멀리하지 않는 일이다. 어느 현인이 말한 것처럼 “이렇듯 시간은 모든 학설을 파괴해버리나 진리는 남아 있으며 항상 더 강해지며 생활하며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다.”(p144)
내가 너무 많은 짐을 지지 않고 복잡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을 하나만 가지기로 한다. 나는 영적지도의 직책을 잊지 않겠다.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처럼 하루하루 생활할 것이 아니라, 요한 베르크만 성인처럼 시간 시간으로 생활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야할 행동이요,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p145)
모든 일의 귀결점으로서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미묘한 감각,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완전한 망각―내 행동이 어떤 것이든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p145)
☞ 나를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든 평정함과 성실함과 완전한 단순성을 가지고 종사하리라. 마치 내가 그 하나하나의 행동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자신의 입으로 그 일들을 명하셨으며 내가 일하는 동안 내 앞에 있으시며 나를 바라보시고 계시는 것처럼, 그리고 또 다른 일이 생긴다면 조금도 서두르거나 불안해하거나 다 하지 못한 채 버려두지 않고 다시 수정할 필요가 없도록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일하리라.(P145)
"모든 어려움의 해결책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시다.“ 꼴롱비에르의 존경하올 끌로오드 신부는 예수님께서 태연히 치욕의 시간을 기다리신 대담성과 용기 그리고 그 치욕에 숭고한 열정을 가지고 몸을 내맡기신 태도 등을 묵상하고 경탄한 바 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리하여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때, 나는 역시 많은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나 자신에게 시련을 주기를 원하거나, 굴욕의 바다에 빠지기를 원하거나 참으로써 말할 수 없는 힘의 더움을 느낀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성총을 가지고 확실히 나 자신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수난의 장면들은 모든 희생을 내게 친근하게 해 줄 것이다.(P145-146)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다. 그러나 우정 어린 말과 용서하시는 눈으로만 대답하신다. 나도 내가 이롭게 해준 사람들로부터 은혜갚음과 존경을 받지 못했다고, 또 그들의 무관심에 화를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P146)
나도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게 지꺼리게 내버려 두겠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맨 뒷줄에 앉으라 하여도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 말과 행동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을 변명도 비난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 또 내 웃어른들의 꾸중도 아무 말 없이 즐겁게 받아들이겠다.(P146)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고통과 치욕의 바다 가운데에서 난파당하시고도 한 마디의 불평도 않으셨고 오히려 그의 적들에 대한 동정과 용서의 감정만을 가지셨다. 나도 역시 주님께서 내게 원하신 시련들 가운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 친구들과 심정을 터놓고 이야기할 때라도 ― 노력하겠다. 특히 공부에 있어서 성적이 좋지 못하여 마음이 괴로울 때 아무의 동정도 구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리라. 그리고 평화롭게 기쁨을 가지고 불안해하지 않고 내 부끄러움을 받으리라. 마치 그것이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인 것처럼, 부드러운 말 한 마디인 것처럼, 또 애무인 것처럼,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예수 성심과 성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아름다운 회상들과 따사로운 애정과 즐거운 희망의 물결이 내 가련한 몸둥이 위에 흩어 퍼지며 나를 떨게 하여 내 영혼을 달콤한 애정으로 가득 채워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모든 선의 샘으로부터 성찬의 베일 밑에서 신비롭게 고동치는 예수 성심으로 내 전 몸둥이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찬 부름이다.(P147)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내 전 생애를 통하여 나를 따라 다녔다. 그 늙으신 사베리오 할아버지는 세상에 태어난 갓난애인 나를 영세시키시어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 마을의 조그만 성당 안의 예수 성심께 바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예수 성심의 보호하에 훌륭한 그리스도교도로서 자라게 하셨던 것이다. 나는 내가 그 충직한 노인의 무릎 위에서 배운 최초의 기도를 오늘날 이렇게 외어본다. 너무나 값진 그 아름다운 짧은 기도를 기억한다. “예수의 성심이여! 저로 하여금 당신을 항시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P147)
☞ 예수성심께 바치졌던 요한 23세였구나!
나는 이 조그만 일들이 아무리 중요치 않더라도 즐거운 기쁨을 가지고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게 예수 성심이 나로 하여금 큰 비참을 지나서 로마에서의 보다 많은 성총에 참여하도록 인도해 온 여정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총의 샘은 여전히 메마르지 않는 것 같다.(P148)
예수 성심 안에서 내 모든 난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나는 예수 성심의 승리를 위해 내 피를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내 가장 열렬한 욕망은 내 사랑의 이 고귀한 대상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때로 내 교만한 자만심에 대한 생각이 그리고 내 비참에 대한 생각이 나를 무섭게 하고 당혹케 하여 용기를 잃게 한다. 그러나 나는 곧 예수님께서 진복자 마리아 말가리타에게 하신 이 말씀 속에서 힘의 원천을 발견한다. “나는 너를 부당하고 무식한 그대로 선택하여 나의 계획을 완수하려 한다” (P148)
아! 나는 예수 성심을 섬기기를 원한다. 오늘날 영원무궁한 사랑의 성체에 숨겨져 있는 예수 성심에 대한 내 신심이 모든 영적 발전의 척도가 되기를 원한다. 이 피정동안의 내 결심의 본질적인 것은 내가 지금까지 성체 안의 예수 성심과 은밀히 결합한 가운데에서 깨달은 바를 하려하는 데에 있다.(p148)
인간들에 의해 그렇듯 굴욕을 당하신 예수 성심과 하나가 됨으로써 나를 낮추고 나를 황송케함은 내게 아늑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내게 대해 무관심과 경멸만을 가지게 될 때, 내 가장 큰 기쁨은 오직 모든 위안의 원천인 예수 성심 안에서만 힘을 찾아 얻으리라. (p149)
나는 내 정신과 의지로 하여금 특히 일상생활의 두 가지 실천사항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영성체와 저녁의 성체조배, 그러나 나는 루도비코 성인이 한 바와 같이 예수 성심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에게도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끊임없는 열망을 입 밖에 내지는 않으리라. 나는 내가 예수 성심 안에서 진정으로 겸손해진 나 자신을 말할 수 없는 한, 간단없이 노력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겠다.(p149)
오! 성심이여, 오늘 당신께 느낀 사랑을 약속하고 증명하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르겠나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제 결심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커다란 불안을 느끼나이다. 아!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여기서 제 죄의 선고를 발견하지 않도록 하소서.(p149)
내가 만일 보다 세분된 다른 결실들을 글로 이 이상 더 쓴다면 거의 어떤 이익됨도 없이 되풀이만 하는 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 겸손,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 이것으로 전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p149)
첫댓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존재, 겸손,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 이것으로 전부다"...아멘.
이 책은 50년전인 1965년에 나온 책입니다. 이제는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는 없습니다.인터텟 헌책방에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50년 세월의 흔적으로 누렇게 바라고 곰팽이 냄새가 나는 책이었답니다. 다시는 이 책을 읽지는 못하겠기에 필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정리했습니다.
성경구절도 현재의 성경으로 바꾸고, 맞춤법도 조금 수정하고 했습니다. 너무 길어 몇 번에 걸쳐 올려 드리겠습니다.
4월27일 시성되시는 요한23세 교황님의 이 책이 다시 발간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어려움의 해결책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너를 부당하고 무식한 그대로 선택하여 나의 계획을 완수하려 한다."
귀절 귀절이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어렵게 구하신 책 소개,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정말 좋은 귀절이 많은 책입니다..^^*
마음지기님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매일 자기 자신을 성찰의 중요성과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묵상하고 갑니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얼마나 소박합니까?
아고..너무 길어서 읽는건 담에 해야겠습니다.
하여튼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_^
천천히 읽어셔도 됩니다...^^*
당신 없이는 저는 아무 것도 아니며, 제 존재는 모두 당신을 위하여 있나이다. 당신 없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더욱 당신이 잠시라도 제게서 손을 떼시면 저는 허무로 즉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슬픔이 영혼을 휩쓸고, 마음이 피 흘릴 때면, 예수님께로, 그의 제단으로 가서, 예수님께 우리의 고뇌를 맡기자.?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힘과 평화를 얻을 것이다.
주님의 성혈은 모두 내 죄악을 위해 흘리셨기 때문이다
일에 있어서,특히 말에 있어서 겸손하고 하느님과 일치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열심인 선미님, 좋은 묵상 감사합니다..^^*
@마음지기 늘~~귀하고 좋은 책
간추려 올려 주시고
추천해 주심 감사드립니다.
영육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