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을 시험하는 소설
-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눈먼 자들의 도시』 , 해냄출판사, 2015.
류인혜
이 소설은 무겁다. 무거움으로 한 번에 들어올리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읽어가면서 점점 눌려오는 무게감에 정신이 복잡해진다. 들고 있을 수도, 내던져버릴 수도 없는 난감함에 잡혀서 글의 제목을 ‘인내심을 시험하는 소설’이라고 붙였다. 다행히 나는 눈을 뜨고 있기에 “눈이 보이면 보라 볼 수 있으면 관찰하라”는 작가의 훈계에 응답할 수 있다. 읽어가면서 마음이 복잡해 질 때마다 그 격려에 힘입어 차분히 대응한 것이다.
또 이 소설책에는 차례가 없다. 주인공의 이름도 없다. 인물들이 더 복잡하게 등장하기 전에 가볍고 평범한 기호를 붙였다.
A는 가장 먼저 눈이 멀게 된 38살의 남자다. 건널목 중간 차선 선두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눈앞이 하얗게 되어 보이지 않게 된다. 이 하얗게 되는 상태는 눈이 멀게 되는 모든 사람들의 증상이다. B는 친절하게 눈이 먼 남자 A를 그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차를 훔쳐서 달아나다가 자신도 눈이 멀게 된다. C는 안과의사다. 안과에 온 A의 눈이 멀게 된 원인을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서 안과학 책들의 색인을 확인했다. 보던 책을 모아서 책꽂이로 갔을 때 자신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A가 아내와 같이 안과에 갔을 때, 그곳에는 세 사람의 환자가 있었다. 결막염에 걸린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D는 처방전으로 약을 구입한 후 호텔로 들어가서 사랑의 의식을 하던 중에 눈이 멀었다. 개산성외사시(사팔뜨기) 소년E과 검은 안대 노인F도 점차로 눈이 멀게 되었다.
B와 D는 경찰관이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경찰에 접수 된 두 건의 실명 사건이다.
안과의사 C는 잠을 자고 일어나서 보건부에 전화를 걸었다. 의사의 전화를 받은 하급공무원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다. 안과의사는 병원 원장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드디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장관은 눈먼 자들을 ‘백색의 악’으로 결정하여 정신병원에 격리하라 지시하고 군인들에게 감시하도록 했다.
의사의 아내G는 소지품을 들고 자기도 눈이 멀었다며 격리되는 남편을 따라 구급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눈이 멀지 않았다. 그래서 무겁고 답답하게 짝이 없는 독자의 눈이 되어 이 소설을 이끌어 가며 ‘다행이다, 눈뜬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기에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의사의 아내는 그곳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그런 행동이 경멸스럽고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볼 권리가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96쪽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눈먼 인간들을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무엇들과 결사적으로 싸움을 한다. 침대, 쇠막대, 검은 안대 노인의 라디오, 시계, 길고 끝이 뾰쪽한 가위, 점자 타자기, 라이터, 그리고 달빛, 램프, 탐조등, 눈물을 핥아주는 개도 등장인물과 독자의 감정 선을 이끌어 간다.
도시에서는 점점 눈이 멀게 된 사람들이 많아져 정신병원은 최악의 수용소가 되었다. 힘센 자들이 뭉쳐 다른 눈먼 자들의 식량을 약탈하고 돈이 되는 물건을 빼앗고 강간이 일어난다. 의사의 아내가 자신을 강간한 깡패두목을 죽일 때, 두목에게 당하고 있었던 다른 여자는 소지품 속에서 라이터를 찾아낸다. 그녀는 깡패들이 문을 막아놓은 침대에 불을 붙인다. 화재가 발생하자 눈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주인공들과 함께 추악한 냄새가 나는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인간본성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 그들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먹을 것을 찾으며 다시 살아갈 길을 모색한다.
의사C와 그 아내G, 맨 먼저 실명한 남자A와 그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D, 사팔뜨기 소년E, 검은 안대 노인F 등 일곱 사람은 눈뜬 여자에게 또 서로에게 기대었다. 그들은 소설 속에 차례로 등장하여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었다.
모두 함께 있어요. 솔방울처럼 꼭 붙어 있어요. 이 열기 속에서도 솔방울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 301쪽
그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다. 세 여자와 소년이 가운데 앉고, 세 남자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거기서 그들을 본 사람이라면, 그들이 그런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들은 하나의 몸, 하나의 숨결, 하나의 굶주림이라는 인상을 준다. - 308쪽
이 소설은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더라도 살아낼 방법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이기적인 태도 혹은 두려움으로 관계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외면한다. 모른척했던 부조리에 맞서서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된다. 그 사태를 주시하며 관찰해야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정의로움이 숨어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서로 손을 잡으면 극한의 어려움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용기인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들이 눈뜨는 장면을 마지막 한꺼번에 몰았다.
드디어 첫 번째 눈이 멀었던 남자가 눈을 뜨고, 두 번째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가 눈을 뜬다. 그리고 안과의사가 세 번째로 눈을 뜨게 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로 만들어 졌다. 읽는 것보다 눈뜨는 화면을 보았다면 손이 덜덜 떨리며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눈물은 저절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눈물을 핥아 주는 개는 소설의 마지막쯤에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을 쓴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는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22년 포르투갈 중부 지역의 한 가정에서 태어나 3세 때 수도 리스본으로 이주했다. 1947년에 소설 『죄악의 땅』으로 데뷔했고, 1979년 희곡 『밤』으로 포르투갈 비평가협회가 뽑은 올해의 희곡상을 받았다. 1982년 환상적인 역사소설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를 발표해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에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포르투갈 펜클럽상과 리스본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포르투갈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3년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의 란사로테 섬으로 이주했다. 2010년 6월 18일, 자택에서 지병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주제 사라마구는 환상적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사실주의와 정치적 회의주의를 실험적 문장과 느낌 있는 등장인물을 이용해 독창적으로 드러낸다. 개인과 역사 현실과 허구를 바탕으로 우화적 비유와 신랄한 풍자를 발휘하며 넘치는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2018년 서로다독독서포럼 사화집
류인혜(柳仁惠)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수필집: 《순환》 외 2권. 수필선집: 《마당을 기억하며》. 인문서: 《아름다운 책–류인혜의 책읽기》.
나무수필집: 《나무이야기》, 《나무에게 묻는 말》. 시집: 《은총》.
수상: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