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꽃무릇), 상림공원에는 6만 여평의 숲내에 석산(꽃무릇) 30만구를 심어 군락지로 조성해 놓았다.
꽃무릇(석산화)은 9월-10월에 붉게 피어나는 수선화과 식물로 꽃이 떨어진 다음 잎이 나오는데, 이 잎은
다음해 봄에 시든다. 꽃이 시든 후에 잎이 나고 잎이 시든 후에 꽃이 피기 때문에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여, 사찰에 불공을 드리려 온 속세 여인이 수도에 정진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 스님에 대한 사모의 정만 키우다 꽃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랑나무 : 연리목(連理木),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목이라 하고 가지가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지라 한다. 연리목과 연리지는 부부간의 금슬이나 남녀간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는데, 특히 이 연리목은 수종이 서로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의 몸통 전체가 결합되어 있어
더욱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함화루(咸化樓), 원래는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망악루(望嶽樓)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명칭은
남문에서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이름하였다고 한다. 1932년 고적보존회의 대표였던
송계 노덕영이 사재를 들여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여 함화루(咸化樓)라고 개칭 하였다.
화수정. 파평 윤씨 종중(宗中)에서 집안끼리 모여서 우의와 정담을 나누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으며, 상림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입구 잔디광장 쪽의 연리목 과 다른 곳의 두 번째 사랑나무 연리목
함양읍 만세 기념비(1985.12 건립), 1919.3.28 함양읍 장터에서 외친 대한독립 만세의 대열에 뛰어 들었던
민중이 천명을 넘어섰던 그 날 만세운동에 앞장 섰던 선인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기념비
약수터
문창후최선생신도비, 신라 진성여왕(887-897)때 문창후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로 부임하여 읍민을 다스릴 때 읍성을 지나 흐르던 뇌계(위천수)가 홍수로 인한 농토와 가옥이 유실되고
군민의 생활이 궁핍함을 살펴보고 치수를 위하여 상림에서 하림까지 둑을 쌓고 물을 돌려 조림을 함으로써
민심을 바르게 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23년에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비다.
사운정(思雲亭), 1906년 (高宗 46)에 경상도 유림과 정삼품 박정규, 김득창이 문창후 고운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여 모현정이라 불렀으나 고운 선생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이라
고쳐 불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금호미다리, 고운 최선생은 상림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어디엔가 나뭇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 두었다는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40여회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천령문화제 행사에는 필히 금호미 찾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상림숲 중앙을 흐르는 정비가 잘 되어있는 소하천
물레방아, 상림숲의 정비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상가가 있었으나 상림숲 정비사업으로
상가는 철거되고, 1998년도 함양을 상징하는 물레방앗간을 건립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상림 연밭, 면적 약 2만평(백련, 홍련, 황련, 분홍련, 수생식물), 연꽃 탐방로 340m
1. 장소 : 뱀사골신선길(남원시 산내면), 함양 상림공원(함양군 함양읍)
2. 일자 : 2023. 9. 20, 대구향토시민대학원 산수원산악회
3. 산행길(어르신 걸음) : 왕복 2.6km, 약 2시간 소요
반선교(12:27) → 신선길 입구(12:33) → 무장애 길 종점(12:49) → 오룡대, 화개재갈림길 쉼터(13:02~13:08) →
와운마을 입구, 통나무산장(13:23) → 지리산 천년송(13:35~13:40) → 화개재갈림길 쉼터(14:01) → 반선교 탐방
안내센터(14:31)
4. 개요
○ 상림숲(천연기념물 제154호, 면적21ha, 연장1.6km,폭80~200m )은 신라 진성여왕때 최치원이 이곳 천령군의
태수로 계시면서 조성 했다는 역사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이다.
○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잡은 호안림이며 신라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
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이라고 전한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하
였다고 한다. 최치원선생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강변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
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 당시에는 이숲을 대관림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후 중간부
분이 파괴되어 지금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있고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상림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