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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도 꿈을 꾸자
요엘 2:28-32 2010.05.23.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28절)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성도님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오나 저는 늙었어도 꿈을 자주 꿉니다. 제 꿈 이야기를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어도, 꿈을 꾸고 황당할 때도 있고 마음이 마냥 즐겁고 유쾌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늙었어도 철없이 자주 꿈을 꾸고 싶습니다. 목회자들은 종종 교인들의 꿈 이야기를 듣게 되고 꿈의 해석을 요구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꿈 해석을 거의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거의가 다 개꿈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꿈을 꿉니다. 잠재의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었던 일련의 생각이나 감정이 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잠자는 우리는 꿈을 꿉니다. 대부분 우리는
자는 동안에 꾸는 꿈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 합니다. 생생하게 기억되는 꿈은 극소수입니다.
그렇다면 꿈은 무익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의 꿈이 다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아주 의미심장했던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합니다. 꿈은 우리의 수면 시간에 하나님이 주는 특별한 선물일 수 있습니다. 이 무의식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깨어 있을 때에 필요한 그 무엇을 깨닫게 하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성령님에 의한 특별한 꿈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꿈은 하나님의 중대한 의사전달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꿈으로 하나님의 현현이나 계시를 나타내시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꿈에 대한 대표적 이야기는 창세기 41장의 바로의 꿈과 다니엘 2장의 느부갓네살의 꿈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수많은 이야기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 요셉, 솔로몬, 다니엘, 마리아와 요셉, 바울과 베드로, 사도 요한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쓴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때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지나가는 절기를 지키는데 머무를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성령을 층만하게 받아 꿈을 꾸고 이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꿈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통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면 지금도 우리의 꿈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리로이 하우라는 사람이 쓴 책 “영적 친구로서의 꿈”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영적 친구인 꿈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말씀-때로는 확신의 말, 때로는 경고의 말, 때로는 명령의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격려해 주고 있다. 꿈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꿈은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제시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친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허망한 꿈에 근거해서 모든 중대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꿈을 통해서도 은혜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상황에 대한 통찰이나 경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는 노령화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노인이 넘칩니다. 우리 교회에도 노인들이 많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으며 저는 많이 고민했습니다. 늙은이에게도 성령님이 필요한가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습니다. 바로 오늘 분문으로 요엘 선지가가 전한 말씀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1-2) 그래서 저는 용기를 얻고 오늘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성도님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비록 나이가 많아 힘들고 어려워도 이 말씀 안에서 하늘의 위로와 평강을 누리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누가 등을 떠밀거나 무엇을 내놓으라고 닦달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곤하고 삶에 지친 노인들이라도 주 안에 있은즉 조금 졸다가 자더라도 신령한 꿈꾸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늙은이라도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20년 동안 거의 거울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늙고 추하게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싱그럽고 해맑은 피부에 어느덧 좀이 슬고 색깔이 바랜 우중충한 천처럼 살빛이 누렇게 삭아갈 때, 탐스런 뺨과 풍만한 가슴은 축 쳐지고 빛바랜 살결에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새겨질 때 여성들은 끔찍한 가위눌림을 당할 것입니다.
모파상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라는 소설에서 육체의 쇠락을 확인한 어느 중년 여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 에니는 늘어나는 주름살을 확인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거울을 산산조각 내고 맙니다. 그러고도 변심한 애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보석을 세공하듯이 공들여 화장을 해봅니다. 한때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여자가 쭈그렁밤송이처럼 할머니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큼 잔인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성들만 늙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도 여자들만큼 육체적 쇠락을 겁냅니다.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에게 영혼과 젊음을 맞바꾸자고 제안하여 거래를 한 것도 늙음을 두려워하는 남성들의 속내를 환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입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은 늙음을 두려워합니다.
어느 분의 수필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나도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일흔 살을 바라보는 늙은이가 된 것이다. 일흔 살은 세상을 잃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죽음의 자리에 다 이르렀다는 뜻인가? 어찌 되었든 늙은이가 되었다. 그러나 늙은이가 ‘늘 그이’라는 뜻이라면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늙은이 -늘 그이- 나이가 들어 쭈그렁이가 되어도 늘 그 품성에 그 인격이라면 늙은이는 아무리 들어도 기분 나쁜 말이 아니다.”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라는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이라는 ‘종말의 날’입니다. 아울러 여호와의 날은 구원을 위한 ‘결단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요엘은 이스라엘 땅에 계속되는 가뭄과 극심한 메뚜기 재앙을 바라보면서 이를 하나님이 온 누리를 심판하실 조짐으로 보았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페르시아의 침략이 파국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요엘이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엘은 세상을 황폐화시키는 메뚜기 떼의 재앙과 대흉년의 가뭄을 예언해야만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메뚜기 떼의 흉악성과 공격은 지금 핵을 가지고 있는 북한과 그들의 무지비한 공격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무참하게 천안함을 침몰시켜 생떼 같은 우리의 젊은이 46명을 죽인 것 같은 속수무책의 피해로 우리의 가슴이 떨리게 하고 있습니다.
요엘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바로 ‘여호와의 날’을 보았던 것입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에서 심판과 구원이라는 양면적인 주제를 전개합니다. 피와 불과 연기와 같은 전쟁이나 해가 어두워집니다.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자연현상은 모두가 심판의 조짐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엘이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좋은 약속입니다. 요엘은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영을, 거룩한 영, 성열을 부어 주신다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은 부름 받은 예언자에게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게 내려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민족의 어른인 늙은이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남종과 여종까지도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신다고 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마다 앞으로 닥칠 일이 무엇이며 어디서 살길을 찾을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요엘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그 때에 모든 육체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그렇다면 요엘이 고대 예루살렘에서 제기한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가 오늘 우리와는 어떤 관계에 있겠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늙은이들이 꿈을 꾸는 것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일입니까? 이 말씀은 오늘 여기라고 하는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영을 받은 늙은이들이 과연 꿈을 꾸고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김광규 시인은 ‘간단한 부탁’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그대는 이미 늙었다./ 나이를 먹었으면/ 늙은이여/ 제발 젊은 척하지 마라” 기가 막히는 시어입니다. 이 시는 나이 먹었으면서도 젊은 척 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늙은이가 젊은 척 한다고 해서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늙은이는 이제는 내려놓을 줄고 알고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뺄셈을 공부해 보셨습니까? 뺄셈은 어린이가 아닌 노인들이 공부해야 할 필수과목입니다. 어느 시인은 늙은이에게 뺄셈을 공부하라고 권합니다. “덧셈은 끝났다./ 밥과 잠을 줄이고/ 뺄셈을 시작해야 한다./남은 것이라곤/ 때 묻은 문패와 헤어진 옷가지/ 이것이 나의 모든 재산일까/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치고/ 낡은 사전을 들추어보는 것은/ 품위 없는 짓/ 찾았다가 잃어버리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 이제는 정물처럼 창가에 앉아/ 창밖의 저녁을 바라보면서/ 뺄셈을 해야 한다.” 늙어서 혼자 있을 때 창밖의 저녁을 바라보면서 뺄셈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제 다 늙었는데 아직도 욕심스럽게 더 채우려고 덧셈만 일삼지 말고 이제는 뺄셈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을 부음 받아 자신의 영혼 속에 ‘영생’이라는 보물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라면 그들은 늙어 가는 것이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을 얻는 것임을 알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을 소유하고 거기에 갈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 속에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시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시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요엘이 보았던 ‘여호와의 날’ 재앙과 심판의 날을 보고 요엘이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 영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추억만이 아니라 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이라는 보물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꿈꾸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고 말씀합니다. 우리 비록 늙었으나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꿈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된 삶을 책망하시고 회초리를 드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전에 환난과 역경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계속해서 고통 가운데 내모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을 주시어 우리를 힘든 가운데 놓이게 하셨으나 더욱 강인한 자로 크게 하기 위한 훈련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고 즐거움이 넘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으로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의 장벽을 깨트려 과거의 나쁜 잔재들을 지워버리고, 오히려 과거와 현재의 경험으로 더 축복된 미래를 설계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낡은 생각을 바꾸십시오. 새로운 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과 성도 여러분을 위한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욜 2:23)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밭에 끊임없이 창조적인 씨앗을 뿌리시며 꿈꾸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의 창고는 축복의 보화로 가득하고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며 꿈꾸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28절 말씀을 다 같이 읽읍시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아멘. 몸은 늙었으나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꿈꾸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송달웅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