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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본관은 <조선씨족 통보>에 623본으로 나타나 있다.
1930년 국세 조사에 따르면 김씨의 호구수는 74만 9190세대로서 제2위의 이씨보다 22만 2716세대나 많다. 제3위는 박씨로서 26만 1357세대 제4위가 최씨로 17만 1262세대 제5위는 정씨로 10만 6082세대였다.
흔히 명문을 말할 때, 연안이씨 광산김씨 대구서씨순으로 손고 있는데 이는 그 많은 김씨 가운데서 광산김씨가 으뜸가는 명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밖에도 김관자가 서 말이라는 안동김씨(세칭 장김)를 비롯하여 청풍김씨 연안김씨 경주김씨 들도 지난 날 쟁쟁한 명문 벌족이었다.
□ 김해김씨의 세 파
김해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계와 신라 왕실의 박, 석, 김 3성 중의 하나인 김알지계로 볼 수 있다. 김알지계의 김씨는 달리 '신라김씨'라고도 하며, '김해김씨 법흥파'라고도 한다.
그리고 근원이 다른 김해김씨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의 좌선봉으로 왜병 삼천 명을 이끌고 왔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본 성명은 사야가)를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우록김씨)이다. 김충선은 귀화한 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권율 장군의 진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은 것이다.
수로왕계의 김해김씨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분적된 사례는 없으나 분파된 수는 155파에 이른다.
알지계는 경주김씨를 주종으로 하고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600여 본관으로 분적되었다.
□ 김해김씨의 시조
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199))이다.
가락국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다.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 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수로는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은 김으로 여섯사람 가운데 제일 먼저 나왔다 하여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 그는 뒤에 하유타국(인도의 일국)의 공주인 허황옥(성은 허 이름은 황옥)을 비로 맞아 10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인 거등은 수로왕의 후사로 삼았고 허씨부인(수로왕비)의 부탁으로 허씨 성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거등의 아우인 두 아들에게는 모후의 성인 허성을 주었다. 이 때부터 허씨성이 세상에 전해짐으로써 오늘날 허씨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 계파
후손들이 번창함에 따라 금령군파를 비롯하여 142개(일부 기록은 148개파)로 분파하여 그 계대를 계승하고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 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 데 경파(京派)라고 하는 목경계의 경4파 (영견, 영서, 영정, 영순)가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으며, 목경의 아우 되는 김익경(金益卿)계의 4군파(四君派)(극조, 완, 여수,세기)와 김관(金管)계의 3현파(三賢派);(극일, 일손, 대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파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고, 사군파(四君派)는 중시조로 하고, 삼현파는 김관을 중시조로 한다.
□ 김해김씨의 인물들
◈ 중시조 김유신
김해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사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으로 심신을 수련했다. 629년 중대의 대주로서 낭비성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644년(선덕여왕 13) 소반이 되어 상장군에 오르고, 백제군과 수차 싸워 이겼으며, 647년(진덕여왕 1)반역을 꾀한 차담.겸종의 반군을 토벌한 후 무산성. 감물성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 백제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 윤랑이 되어 상주행군대총관에 올랐다. 다음 해 침입한 백제군을 도륭성에 격파했고, 654년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어천과 상의,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이 도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 사차성을 함락,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663년(문무왕 3) 백제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665년 당나라의 태상정랑평양군개국공에 봉해졌다. 667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 다음해 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정하지 못했다. 고구려 정벌 후 태대각우 에 승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여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했다. 흥무대?에 귀전, 경주의 서악당원, 군위의 제동서원, 진천의 고양사, 강릉의 부풍사, 광주의 장열사, 전주의 원산사에 제향. 김흠순(신라 일명: 흥춘 관직: 대당총관) 진평왕 때 화랑이 되고, 660년(무열왕 7) 유신과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와 호응하여 백제를 정벌, 662년(문무왕2) 내사지성에서 백제 유민들의 반란을 토벌했다. 다음해 천존과 함께 벡제의 거열성을 공략하여 7백여 명을 참살, 거물성, 소평성,덕안성을 함락시키고, 1천 7십을 참살했다. 68년 대당총관으로 김인문과 함께 사죄사로 당나라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했다.
김유신의 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위 사진)
◈ 김대건 (조선 신부)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에게 령세를 받고 예비 신학생에 선발되어 상경, 역관 유진질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갖고 12월 동학 최방지거. 최도마와 중국에 갔다.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신학문과 프랑 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수학, 1836년 .1839년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자 두 번이나 마닐라에 피난한 후 매스트르 신부의 문하에서 신학.신철학을 연구했다. 1845년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에 잠입하는데 성공, 앞서 1839년 을사조약 이래 위축된 교구 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 한때 병을 얻어 눕기도 했으나 다시 프랑스 외방 전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에 갔다.
김가포신학교에서 택덕으로 승품, 한국인 최초의 신부에 임명되어 만당성당에서 처음으로 미 사를 집례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해를 떠나 충남 강원에 잠입, 서울로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 전도에 힘썼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년락을 위한 비밀 항로 개척을 위해 등산 지방을 답사하다가 피체, 서울로 압송되었다. 6회에 걸쳐 혹독한 문초를 받고 선교사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후 25세로 순교, 미산리에 안장되었다. 1857년(철종 8)교황청에서 가교자로 선포, 1925년 교황청에서 다시 감복식이 거행되고, 한국 전 성직단 대주보로 정해졌다.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다.
□ 가문의 번영
◈ 경파
^ 김목경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은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목경의 후손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김보의 6세손 김영견(金永堅 : 동지중추부사), 김영서(金永瑞 : 현감), 김영정(金永貞 : 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金永純 : 한성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때 명신 김우항(金宇杭)은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 사군파
^ 김진문
사군파에서는 파조인 김익경(金益卿)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李穡), 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께 은둔 생활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추(金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김석(金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 김진문 후소
한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 김극희(金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김완(金完): 학천군 김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 김여준
김우(金宇)의 아들 김여준(金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내어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 김동광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 일어나 성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의 정문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삼현파
^ 김관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세조인 김관(金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김극일과 그 아들
김관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 김일손
김일손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 김대유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김언유과 그 아들
김일손의 증손 김언유(金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김언유의 아들 김현성(金玄成)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 그 밖의 인물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덕승(金德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김예직(金禮直),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김진희(金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 김해 지방의 옛날
김해 지방은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가락국을 금관국으로 또는 금관군 금관속경 힘해현 김주 김녕부 김주목 등으로 여러 차례 고쳐 불려오다가 고려 충선왕 때에 이르러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가락왕(수로)의 후손들은 본관을 김해로 하게 된다.
□ 인구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남한에 총 1,295,080가구, 4,124,9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767,061명이었다.
<집성촌>
경남 창원시 일원
경북 김천시 일원
경북 포항시(전 영일군) 일원
광주시 광산구 일원
전남 신안군 일원
전남 영광군 일원
전남 진도군 일원,
전남 해남군 일원
함남 북청군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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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는 크게 가야 수로계 김해 김씨, 신라 알지계 김해 김씨, 일본계 김해 김씨로 나눈다. 일본계 김씨는 임진왜란때 귀화한 일본인 장수 김충선(사야가)을 시조로하는 사성 김해 김씨가 있는데 김해 김씨 사성파 또는 우록 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충선과 함께 귀화한 김성인(사여모)도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가 최근에 함박 김씨로 본관 이름을 바뀌었다.
김해 김씨는 가야 수로계을 선김(先金), 신라 알지계을 후김(後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후김의 시조는 경순왕 3남 김렴, 중시조는 그의 후손 김시흥으로 최초 본관은 김녕이었는데 고려말 지역통합으로 본관이 김해로 바뀌었다가 조선말 왕명으로 본관을 김녕으로 복원하였지만 여전히 (후) 김해김씨 익화파(益和派), 종남파(從南派), 법흥파(法興派), 종민파(宗敏派)등은 본관을 김해로 하고 있다. (후) 김해김씨 법흥파는 기존 후김, 김녕 김씨와도 구별된다. 법흥파 1세조 김춘(金春)은 김시흥의 8대손으로 그의 8촌 김문기가 사육신과 관련하여 화을 당하자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했다가 1471년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후손들이 그를 김춘을 1세조로 하고 김해 김씨 법흥파 또는 법흥 김씨라고 하였다.
김해라는 지명은 통일 신라 말기(756년)에 생겨난 지명으로, 처음 김해을 본관으로 하였던 성본은 고려 말기 지역 통합으로 김녕 김씨에서 김해 김씨로 개칭한 신라계 김해 김씨(후김, 後金)이다. 가야계 김해 김씨(선김, 先金)의 원래 본관 이름은 가락 김씨였는데, 가락은 특정 지역명이 아니므로 조선 시대에 본관 이름을 가락 김씨의 발원지인 김해로 개칭하였다. 이후 신라계 김해 김씨(후김, 後金)와 혼선이 빚어져 후김(後金)의 본관을 김녕으로 복원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김해라는 본관을 먼저 사용한것은 후김(後金)이었기 때문에, 후김(後金)의 일부는 본관을 김해로 하고 있다.
김해 김씨는 가야 설화에 등장하는 수로왕에 연원을 두고 김유신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김해 김씨는 인구가 많은 성씨로 2000년 조사에 따르면 400만명이 보고 되었다고 한다. 주요 인물로는 김유신, 김홍도, 김기창, 김활란 정치인 김종필, 국회의원 김형오, 김종률, 김무성, 김부겸, 배우 김유미, 김명민, 김수미, 가수 김태우, 개그맨 김숙, 김현철 김신영, 아나운서 김성주등이 있다.